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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가슴 고정필자코너/뉴욕에서 한대수 15 POSTS


  1. 나는 왜 음악을 하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다. 그냥 일상생활에서 어떤 자극이나 영감을 얻으면 나도 모르게 노래가 만들어진다. 수학공식처럼 정해진 형식도 없고 일정한 법칙도 없다. 내가 사는 퀸즈 아파트에서 뉴욕타임즈 일요판(나는 30년 동안 뉴욕 타임즈 일요판을 종교예식처럼 일요일 새벽부터 4시간씩 읽는다. 신문 두께가 7센티미터 정도다.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습관이다. 그 당시 내 첫 번째 마누라는 그렇게 몇 시간이고 꼼짝 않고 뉴욕타임즈를 읽는 나를 보고 치질이 안 걸린 것이 기적이라고 할 정도였다.)을 사러가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늘씬한 금발 미녀를 보고 <White Woman>(기억상실)이란 곡을 썼다. [매스터피스]를 제작하러 잠시 한 달 동안 오피스텔에 머물면서 혼자 잠에서 깨어나 표현할 수 없는 소외와 공포를 느끼기도 했다. 그리하여 8집에 수록된 <Paranoia>(편집증)라는 곡이 탄생했다.

    보통 곡의 주제가 되는 ‘후렴’ 부분이 나의 뇌리를 강타한다. <White woman>의 경우에는 “White woman, can I come home with you?(백인 아가씨, 같이 집에 갈까요?)”라는 후렴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그 당시 즉흥적으로 느낀 성적 갈망이었다. 그리고 <Paranoid>를 작곡할 무렵에는 잠에서 깨어나 느낀 공포로부터 영감이 떠올랐으므로 “난 잠자기가 무서워”로 곡이 시작된다. 일단 주제만 잡히면 나머지 코드와 음의 진행과 가사는 분위기에 맞춰 연결하면 된다. 보통 영감만 얻으면 곡은 3~4시간이면 완성된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물좀 주소>와 <행복의 나라>도 곡을 완성하는 데 두 시간 걸렸다.

    작곡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음이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가사가 훌륭하다고 하지만 사실상 좋은 음이 없으면 아무리 훌륭한 가사도 무의미해진다. 가사 없는 훌륭한 음악들이 많지 않은가? 클래식 심포니 대부분, 그리고 재즈와 뉴에이즈의 음악이 좋은 예다. 음이 인간의 몸매라면 가사는 옷이다. 일단 몸매가 완벽해야 무슨 옷을 입혀도 매력적이다. 그 반대는 있을 수 없다. 밥 딜런이나 레오나드 코헨의 문학적인 가사를 대중들은 중시하는데, 사실상 그들의 곡들이 일단 완벽하다. 딜런의 <Knockin' on heaven's door>나 코헨의 <Suzanne>은 곡 자체가 명곡이다. 말하자면 늘씬한 몸매에 최신 유행 패션의 옷을 입힌 셈이다. 그러니 그들의 곡은 예술이 아닐 수 없다.

    한대수, 이상은 : 2005 광명음악밸리축제 홍보대사


    나는 음대 근처에도 못 가봤다. 배우지도 못한, 즉 엉터리 작곡가다. 왜 내가 음악을 하는지 생각해보면 내가 음악가의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말도 못할 음악광이었고 1940년도에 연희대학의 창설자인 언더우드 박사의 추천으로 프린스턴으로 유학을 가서 신학 박사학위를 딴 사람이다.(이승만 박사도 프린스턴의 선배였다.) 그는 사실상 음악 작곡을 전공하는 것이 꿈이었지만 기독교를 이 땅에 전파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국인 목사 용사가 필요했던 언더우드 박사는 “한군, 음악도 좋지만 신학학위를 따고 음악을 부전공하는 것이 어때”하면서 팔을 비틀었다. 당시 할아버지는 이미 바이올린도 연주하셨고, 또 미국 명사의 추천 없이는 유학갈 돈도, 방법도 없었을 때였다. 짧은 영어에 박사학위 논문 쓰느라 눈코 틀 새 없었고 잠잘 시간도 모자란 한국유학생이 어떻게 부전공을 생각할 여유가 있었겠는가. 그리하여 신학 학위만 취득한 채 귀국하여 연희대학 초대 신학대 학장과 대학원장을 겸임하셨다. 당시 연희대는 미션 스쿨로서 단과대학이 신학대학 하나뿐이었다. 나중에 세브란스와 합쳐서 연세대학이 된 것이다. 아마 할아버지나 언더우드 박사가 살아계셨다면 지금의 거대한 연세대학을 보고 까무라쳤을 것이다.

    그 당시 할아버지는 점심 땐 다른 교수들과 점심식사를 나누지 않고 꼭 사택에 돌아오셔서 자기가 유학갈 때 사온 신 매그노복스 하이파이로 우렁차게 베토벤 심포니, 아니면 바하 무반주 첼로를 한 시간씩 들으시고 다시 출근하셨다. 그것도 동네가 떠나가라는 듯이. 그래서 내가 할아버지 생신 때마다 훌륭한 최신 클래식 음반 하나만 선물하면 언제나 기뻐하셨다. “역시 내 손자가 내 취향을 제일 잘 아는구먼”하시면서. 그리고 또 하나 할아버지의 취미는 카메라였다. 항상 독일제 콘텍스를 보물같이 가지고 다니시면서 슬라이드 필름으로 사진을 찍어 교수가족과 동네 사람들을 초청해 슬라이드 쇼를 하는 것을 큰 낙으로 삼으셨다. 그리고 항상 수천 권의 철학, 음악, 미술책으로 가득 찬 널찍한 서재가 우리집에 있었다. 나에게는 그 서재가 개인 도서관이 되어버렸다. 나는 수많은 나날을 이 나만의 도서관에서 지냈다. 10살 때부터 여자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브리태니커로 여자의 신체 부분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비행기에도 관심이 많아 독일, 일본, 미국 전투 비행기를 일일이 공부하며 어떤 비행기가 공중전에서 승리할 것인가를 내 스스로 연구하고 판단했다. 당시 내가 매료된 비행기는 독일 매서치미트와 일본 제로 그리고 미국 무스탕기였다. 그래서 나 역시 지금까지도 음악, 사진, 책을 가장 좋아하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는 당시 드물게도 피아니스트였다. 할아버지가 목회하시는 교회에서 피아노와 오르간을 쳤으며 그 인연으로 우리 할아버지의 며느리가 된 것이었다. 즉 음악이 우리 가족의 시멘트 역할을 한 것이다. 그 당시 피아노가 국내에 없어 부유한 집안의 장녀였던 우리 어머니의 외할아버지가 나가사키에서 피아노를 구입해 화물선으로 나르셨다고 한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나는 태어났고 음악을 매일같이 우렁차게 들어가며 방바닥을 기어다녔다. 음악은 피할 수 없는 방안의 공기였다.

    그러나 고등학교 땐 기타를 치는 친구의 소개로 기타를 배우게 되면서, 당시 내가 가장 부러워하고 우상으로 삼았던 엘비스 프레슬리를 흉내내기 시작했다. 심지어 헤어스타일도 엘비스와 똑같이 포마드를 바르고 스타일링 했다. 그러다 비틀즈가 나를 보고 “너도 곡을 쓸 수 있어”라고 교훈을 주었고 밥 딜런이 등장해 “가사에도 너의 생각을 담을 수 있어”라고 가르쳐 주었다.

    고민


    내가 내 자신의 거울로 내가 살아온 과정을 돌아보면 참 희한하다. 왜 그렇게 굴곡이 심했고 변화가 많았는지. 그것도 동서양을 교체해가며 말이다. 나는 한 나라에서 입학과 졸업을 마친 적이 없다. 국민학교는 한국에서 입학하고 미국에서 졸업했다. 중학교는 미국에서 입학하고 졸업은 한국에서 했다. 고등학교 입학은 한국, 졸업은 미국이었다. 대학과 전문학교는 미국에서 다녔다. 나도 어지럽다. 그러니 미국에서는 내가 ‘칭총(중국인에 대한 비하가 담긴 말)’으로 불렸고 한국에 오면 ‘양키’라고 놀림 받았다. 그 당시 미국은 백인 우월주의 사회였고 유색인종 인권운동이 활발해지기 이전이었다. 그리고 그 공부는 얼마나 혼돈스러웠는지. 미국에서는 조지 와싱턴 전기를 읽으며 펄시 비쉐 쉘리의 평전을 써야 했으며, 한국에서는 세종대왕을 배우며 한자도 배워야 했다. 나의 해골은 아이러니와 혼돈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돌이켜 보건대, 나의 성장 과정은 소속감이 철저히 배제된 상태의 연속이었다. 어딜 가도 나의 소속은 없었다. 어떤 친구와 우정의 다리를 튼튼히 세우다가도 좀 친해질만하면 그 나라를 떠나야했다. 그리하여 나의 주어는 소외와 고독이었다. 그리고 그 결핍을 메꾸기 위해 음악을 한 것 같다. 작곡으로 나만이 가진 고독과 분노와 갈망을 표현했고, 노래를 부를 땐 해소의 숨소리를 토해냈다. 그로부터 나는 창작이란 변명으로 나의 아이덴티티를 찾으려고 노력했고 아직도 하고 있다.

    청년이 되어 사랑과 절망, 결혼과 이혼을 경험하면서 음악은 나의 또 다른 탈출구가 되었으며 고통의 방패가 되었다. 대부분의 평론가나 팬들이 나의 1집 [멀고 먼 길]을 가장 좋아하고 최근의 앨범들은 그다지 평가를 안 하는 것 같다. 한국일보 기자 한분은 “선생님, 요즘 음악은 너무 어려워요. 한국적인 얼이 모자란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물론 나는 요즘 영어 노래를 많이 작곡하고 35년 동안의 뉴욕생활을 했으니 영어 작곡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요즘 한국에 오래 머물면서 한글 작사가 자연스레 되듯이.

    나는 구태여 한국의 얼, 한국적인 것을 음악에 요구하는 것은 무리인 것 같다. 21세기 인터넷 혁명 이후 모든 세계적인 가치관이 글로벌화되고 있다. 그리고 한국 사람이 창작한 것이면 한국의 얼이 분명히 있다. 윤이상씨가 독일에서 장기 체류하시면서 분명히 한국인으로서의 독특한 분위기를 작곡에 불어넣었고, 백남준씨 역시 뉴욕 소호에서 작품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의 고향을 상기할 것이다. LA 카운티 박물관에서 본 백남준의 작품 중 부처가 자기 자신을 텔레비전으로 보며 명상하는 작품도 분명히 한국인이니까 가능한 상상력이다. 그리고 정경화씨나 정명훈씨, 사라 장 역시 세계적인 서양 클래식의 대가로서 한국인이란 그 자체만으로 충분하다. 참고로 사라 장을 장영주라고 부르는 것은 못마땅하다. 왜 브랜드 네임을 마음대로 고치는가. 사라 장은 세계적인 브랜드 네임이다. 그의 어머니와 내가 뉴저지에서 일본 사시미를 같이 먹었다. 왜 사라 장이 가능했는가를 한순간에 눈치챘다. 그의 어머니는 서울대 작곡과 출신이다. 사라 장 역시 가정에서 나처럼 음악적인 분위기를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훈련된 음악가라기보다는 태생적으로 음악의 환경을 타고난 것이다.

    그리고 내 노래에 등장하는 White Woman이라는 단어 자체도 내가 한국인이니까 성립되는 것이다. 내가 만약 백인 남자였다면 구태여 White라는 호칭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 기자가 내 음악이 ‘어렵다’고 했던 것은 나의 음악의 영어가사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것 또한 우리가 신중히 고민해야할 숙제다. 미안하지만 2차 대전 이후 영어가 국제어가 되었다. 프랑스가 그토록 불어를 세계화시키려고 노력했지만(유엔과 올림픽의 공식 언어가 프랑스어다.) 아직도 국제적인 중요 행사 때는 영어가 먼저 나온다. 그렇지만 현재에 이르러 누가 누구를 속일 수 있는가. 이제는 영어가 국제어가 되었고 인터넷의 공용어가 됨으로써 빼도 박도 못하는 세계어가 되었다. 우리와 미래의 세대가 세계적인 음악가, 특히 팝 록 계의 대가를 배출시키려면 영어 가사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 지금 현재 한국의 댄스 음악에 인용되는 ‘Oh, Baby’, ‘Oh, Sexy’ 정도를 가지고는 택도 없다. 그야말로 시적이고 세련된 영어 가사와 세련된 음악이 있어야 핸섬하고 이쁜 남녀 가수들을 완전무장시켜 세계무대에 내보낼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록 역사 50년 동안 스타들은 주로 영, 미, 아일랜드 계통 아티스트들이다. 모두가 영어 작사다. 그 중 독일계 스콜피언스, 스웨덴계 아바, 아이슬랜드계 비욜크, 스페인의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모두 영어로 노래했기 때문에 세계 정복의 길에 나설 수 있었다. 일본 가수 큐 사카모토의 <수키야키>는 예외적으로 일본어 노래로 미국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다. 아직도 리메티크 될 정도로 인기가 대단하다. 하지만 곡이 너무 감미롭고 훌륭했고 또 60년대말 히피 문화의 전성기에 일본과 동양 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애도의 분위기가 맞물려 있었던 것이다. 최근 논란이 되는 한류 신드롬에 비해 일본의 ‘일류’는 이미 60년대 말부터 미국과 유럽을 강타했다. 곧이어 일본 음식, 즉 사시미, 스시, 그리고 토요타 자동차, 카와사키 오토바이, 소니 텔레비전, 가부키 연극, 영화감독 구로자와 아키라와 나기사 오시마, 패션 디자이너 요지 야마모토, 이시 미야키 등등 일본의 문화는 서양인들을 매료시켰다. 심지어 어느 록 밴드는 <터닝 재패니즈(일본 사람이 되고 싶다)>라는 노래로 빌보드차트 1위를 차지했다. 또 한 영국 아트 록 밴드는 팀 이름이 아예 ‘재팬’이다. 지금 뉴욕은 일본 스시집이 맥도날드만큼 많을 정도다. 농담이 있는데, 회장님이 손님 접대할 때 최고 손님은 일식, 그 다음은 프랑스 요리, 제일 마지막이 양식이라 한다.

    상처


    영어 노래가 세계적인 히트가 되는 이유는 몇 가지 있다. 첫째, 언어는 국력을 의미하는 것이며, 미국이 세계를 제패한 2차 대전 이후 영어를 안 쓰면 비즈니스도, 정치도, 학문도 할 수 없다. 자연스럽게 영어가 보편어가 된 것이다. 둘째, 영어발음이 매우 음계에 부드럽게 그리고 편히 앉는다. ‘Oh,. Baby’하면 편안하지만 ‘내 사랑’하면 좀 불편하다. 즉 가수가 감정을 잡기에는 영어가 훨씬 편안하다. 나는 세계적인 중국 로커 추이 지엥(최건)을 1999년 뉴욕 센트럴 파크 공연 때 만났다. 추이지엥은 최건이란 이름을 싫어하고 한국말도 안한다. 그는 조선족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지만 한국과 관련시키는 것보다는 거대한 중국의 등을 타고 세계적인 로커로 발돋움하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내가 중국에 가서 ‘한대수’가 아닌 ‘한따이슈’로 행세한다면 그것도 무리지 않은가. 추이지엥은 베이징 필하모닉의 트럼펫 연주자였으므로 클래식 음악의 배경을 지닌 사람이다. 그리고 세계 어느 대륙이나 차이나 타운이 없는 곳이 없으므로 그는 매년 월드투어를 한다. 이 점 하나는 몹시 부럽다. 그리하여 뉴욕타임즈는 추이지엥을 ‘only Asian rock star(유일한 아시아의 세계적인 록커)’라고 부른다. 아티스트의 고유 이름은 그 발음 그대로 존중해야 한다. 어떻게 ‘프라다’를 ‘무라딕’이라 부를 수 있으며 ‘삼성’을 ‘신젠꾸’로 부를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아티스트의 이름은 사라 장이든 추이지엥이든 그대로 존중해줘야 한다. 나는 중국에 가도 한따이슈가 아니라 한대수다.

    추이지엥은 바우리 볼룸이라는 유명한 다운타운 클럽에서도 공연을 가졌다. 음악은 강력했다. 힙합 록이었고, 그의 트럼펫 솔로도 관객들의 마음을 적셨다. 약 500명으로 꽉 찬 클럽은 대부분 중국계 미국인이었지만 약 100명은 미국인이었다. “중국 록의 대가로 불리는 친구의 노래를 한 번 들어보자”라는 호기심 때문에 미국인들도 왔지만 다섯 곡의 연주가 끝나고 추이지엥은 계속 중국어로 노래를 하니 미국인들은 짜증을 내며 하나하나씩 떠나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는 언어 때문에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지 않았던 것이다. 2002년 서울에서 그를 다시 만났을 때 “추이지엥, 당신은 계속 월드 투어를 하는데 외국 팬을 위해 영어가사가 필요하지 않나?”라고 물었더니, 그는 “영어보다는 중국어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여”라고 대답했다. 이것 또한 중국인이 가진 중화주의와 맞아떨어지는 셈이다. 물론 중국인이 세계인구 1/5을 차지하고 있고 중국어도 세계화되고 있으니 추이지엥 말이 가까운 미래에는 맞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어권이 세계를 제패하고 록 음악의 기수 역할을 한 것이 50년 이상 된다면, 중국어가 세계화 된다 하더라도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세계의 음악팬들은 50년 동안 영어 노래에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욕망


    왜 내가 음악을 하는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내가 이주일 전에 작곡한 <When I was young(내가 어렸을 때)>(※12집 [욕망]에 <When I was a child>로 실렸다.)은 며칠 전 내 마누라 옥사나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우리 마누라가 만취된 상태에서 자기 부모를 그리워하면서 동시에 원망하는 표정으로 울고 있었다. 옥사나의 부모는 옥사나가 아주 어릴 때 이혼을 했고 어머니는 3년 전에 돌아가셨다. 옥사나의 모습을 통해 나도 부모 없이 자란 내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볼 수 있었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나의 신곡의 후렴부분인 “when I was young, my father left me alone, when I was young, my mother left me alone”이란 가사가 떠올랐다. 나는 [침묵]이라는 책에서도 어린 시절의 상처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당신은 당신의 어린 시절의 제물이다. 당신은 어린 시절의 상처를 절대로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이 극복할 수 없는 상처가 없었다면 좋았겠지만, 또 그 상처가 없었다면 내 음악도 없었을 것이다. 즉 작곡은 내 마음의 상처의 치유다. 그리고 내 음악이 여러분들의 상처의 치유가 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그래서 나는 작곡을 한다. 마지막으로 2001년 봄에 출간한 [한대수 노래 모음]에 실었던 글, 그리고 나의 10집 [상처]에 실린 글을 인용하면서 “나는 왜 음악을 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대신해 본다.

    //

    저의 음악은 제 자신도 모르는 잠재의식 속에서 꿈틀거리는 괴물입니다. 길을 걷다가, 버스 안에서 속삭이는 여자들의 이야기에서, 좁은 골목길을 올라가며 외치는 상인들의 “항아리 사이소”와 같은 소리에서, 그리고 급변하는 우리 사회의 뉴스에서… 이 모든 것이 노래의 주제가 되고 음률의 영감이 되어 나타납니다. 이 책에 실린 20여 곡의 노래는 저의 일기장입니다. 제가 20여 년 동안 그렇게 사랑했던 부인이 떠나간 후 눈물로 만들었던 <나 혼자>, 방송 출연 금지를 당했던 21살 때 오갈 데가 없어 방황하며 저의 텅 빈 마음을 노래한 <하루 아침>. 저의 노래에는 사춘기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저의 굴곡 많았던 인생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길고도 먼 여행길이 힘들고 고통스럽겠지만, 저의 음악이 작게나마 위안이 되었으면 합니다.

    전쟁과 죽음으로 악의 길로 걸어가는 우리 인간들의 모습이 슬픕니다. 이 음악이 여러분들의 위로가 되고 흥겨운 가락이 되길 빕니다. 음악이야말로 우리를 고뇌스런 삶에서 해방시켜 줍니다. 물론 순간적으로. 하지만 모든 순간들이 이어지면 영원으로 갈 수 있습니다. 끝으로 저의 고장난 몸을 고쳐주신 신규호 박사님과 세브란스 섹시 나이팅게일들에게 영원히 감사드립니다. 땅콩베리머치! 여러분 즐기슈! Peace…

    나는 왜 음악을 하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다. 그냥 일상생활에서 어떤 자극이나 영감을 얻으면 나도 모르게 노래가 만들어진다. 수학공식처럼 정해진 형식도 없고 일정한 법칙도 없다. 내가 사는 퀸즈 아파트에...
  2. Bob Dylan [Blonde on Blonde](1966/Columbia)


    2-A. Bob Dylan [Blonde on Blonde](1966/Columbia)

    1 Rainy Day Women #12 & 35 4:36
    2 Pledging My Time 3:50
    3 Visions of Johanna 7:33
    4 One of Us Must Know (Sooner or Later) 4:54
    5 I Want You 3:07
    6 Stuck Inside of Mobile With the Memphis Blues Again 7:05
    7 Leopard-Skin Pill-Box Hat 3:58
    8 Just Like a Woman 4:52
    9 Most Likely You Go Your Way (And I'll Go Mine) 3:30
    10 Temporary Like Achilles 5:02
    11 Absolutely Sweet Marie 4:57
    12 4th Time Around 4:35
    13 Obviously 5 Believers 3:35
    14 Sad Eyed Lady of the Lowlands 11:20


    난생 처음으로 보는 Double Album(2장 앨범)이었다. Dylan(본명 : Robert Zimmerman)은 첫 앨범 [The Freewheelin' Bob Dylan] 때부터 큰 충격을 주었고 좋아했지만, 이 앨범은 진정 걸작이었다.

    곡의 구성, 세션, 곡의 길이(<Sad Eyed Lady of the Lowlands>는 약 12분이다) 그리고 파격적인 디자인. 이 앨범은 록계에 다른 큰 길을 열어주었다. 심지어 60년대 록혁명의 대부 Beatles까지 영향을 받았다.

    David Bowie [Low](1977/Virgin)


    2-B. David Bowie [Low](1977/Virgin)

    1 Speed of Life 2:46
    2 Breaking Glass 1:51
    3 What in the World 2:23
    4 Sound and Vision 3:03
    5 Always Crashing in the Same Car 3:29
    6 Be My Wife 2:55
    7 A New Career in a New Town 2:51
    8 Warszawa 6:20
    9 Art Decade 3:43
    10 Weeping Wall 3:26
    11 Subterraneans 5:39


    Brian Eno가 프로듀싱한 이 앨범은 전자음악과 록의 훌륭한 결합이었다. 드럼에 특수효과를 넣는다든지, 신서사이저와 일본악기 Koto를 융합시킨다든지 - 실험적이며, David Bowie의 작곡도 상당히 자기고백이었다.

    Brian Eno와 David Bowie의 음악적 결혼이 시작되어 3개의 훌륭한 작품이 나왔다. [Low], [Heroes], 그리고 [Lodger]. 이 때쯤 Bowie의 목소리도 제일 매력적이었고, 영화 'The Man Who Fell to Earth'에 주역을 맡을 만큼 전성시대였다.

    미술학교 출신의 Bowie는 음악뿐만 아니라 패션의 리더 역할도 하며 '지적인 록커'라는 평을 받았다. 이 대를 이어가려고 노력하는 아티스트가 곧 Sting이다. 스팅 역시 고등학교 교사 출신이다.

    나는 Bowie 공연을 2번 보았다. 첫 번째 Madison Square Garden(약10,000석) 'Heroes 콘서트'는 잊을 수가 없다. 일본 디자이너 Kansai 옷을 여러 차례 바꾸어가며 관객들을 파도의 율동 같이 흥분시켰다. 마지막은 해군장군 모자와 복장으로 앵콜을 여러 차례 답했다. 이런 광경은 난생 처음 보았다. 인간 바다의 발레였다.

    Beatles [Meet The Beatles!](1964/Capitol)


    1-A. Beatles [Meet The Beatles!](1964/Capitol)

    1 I Want to Hold Your Hand 2:24
    2 I Saw Her Standing There 2:50
    3 This Boy 2:11
    4 It Won't Be Long 2:11
    5 All I've Got to Do 2:05
    6 All My Loving 2:04
    7 Don't Bother Me 2:28
    8 Little Child 1:46
    9 Till There Was You 2:12
    10 Hold Me Tight 2:30
    11 I Wanna Be Your Man 1:59
    12 Not a Second Time 2:03


    비틀즈의 모든 앨범과 곡들은 명곡이다. 하지만 내가 받은 이 첫 앨범의 중요성과 충격 때문에 1위이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달리, 4명의 음대 출신도 아닌, 심지어 악보도 읽을 줄 모르는 어린 청년들이 기타를 메고 이렇게 아름답고 강력한 멜로디로 자기의 청춘세계를 그릴 수 있다는 것은 혁명이었고, 가르침을 주었다.

    "너희들도 할 수 있다!" 그래서 1964년에 나온 이 앨범을 듣고 나 자신도 작곡을 하기 시작했다. 비틀즈는 록계의 원조이며, Bach와 함께 영원할 것이다.

    Jimi Hendrix Experience [Are You Experienced?](1967/MCA)


    1-B. Jimi Hendrix Experience [Are You Experienced?](1967/MCA)

    1. Purple Haze
    2. Manic Depression
    3. Hey Joe
    4. Love Or Confusion
    5. May This Be Love
    6. I Don't Live Today
    7. The Wind Cries Mary
    8. Fire
    9. Third Stone From The Sun
    10. Foxy Lady
    11. Are You Experienced?
    12. Stone Free
    13. 51st Anniversary
    14. Highway Chile
    15. Can You See Me
    16. Remember
    17. Red House


    보스톤 여름방학, 햄버거 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기간, 피곤해서 낮잠을 자다 라디오에서 <Purple Haze>를 들었다. 벌떡 일어났다. 이게 무슨 소리야? 헨드릭스의 강력한 기타 사운드 그리고 처음으로 듣는 Fuzz Tone이었다. 앨범 제목과 같이 나도 '경험'했다. 27세의 어린 나이에 요절했지만, 이전/이후로 이렇게 창작력이 있는 기타리스트는 없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우리 속담처럼 헨드릭스는 수년 동안 그리니치 빌리지 'Cafe Wha'라는 클럽에서 활동했지만 뉴욕의 음반계 중역들은 이 천재를 알아보지 못했다. Animals의 베이스 플레이어인 Chas Chandler가 너무 안타까워 그를 런던으로 데려갔고, 3인조밴드 'Jimi Hendrix Experience'가 탄생되어 전세계를 휩쓸었다.

    모두들 헨드릭스가 영국계 흑인인줄 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시애틀에서 태어난 뉴요커였다.

    Pretenders의 크리시 하인드, 티나 터너와 마찬가지로 지미 헨드릭스도 미국인으로서 자기 나라에선 외면 당했지만, 영국의 힘으로 세계적인 아티스트로 성장할 수 있었다.

    John Lennon [Double Fantasy](1980/Capitol)


    1-C. John Lennon [Double Fantasy](1980/Capitol)

    1 (Just Like) Starting Over 3:56
    2 Kiss, Kiss, Kiss 2:41
    3 Cleanup Time 2:58
    4 Give Me Something 1:35
    5 I'm Losing You 3:57
    6 I'm Moving On 2:20
    7 Beautiful Boy (Darling Boy) 4:04
    8 Watching the Wheels 3:59
    9 Yes, I'm Your Angel 3:09
    10 Woman 3:31
    11 Beautiful Boys 2:55
    12 Dear Yoko 2:34
    13 Every Man Has a Woman Who Loves Him 4:02
    14 Hard Times Are Over 3:22
    15 Help Me to Help Myself 2:37
    16 Walking on Thin Ice 6:00
    17 Central Park Stroll (Dialogue) 0:17


    나는 존 레논을 사랑한다. - 부모의 사랑 없이 자란, 음악이 유일한 고통의 출구였던. 이 앨범은 상당 공백기간 후 나온 솔로 앨범이다. 자기 고백이다. 부인에 대한 사랑, 아들 이야기, 자신의 허탈함에 대한 노래다. 간단한 록밴드 구성과 진실성이 풍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Watching the Wheels>이다. 1980년 어느 미친 청년이 총으로 그를 살해했을 때, 이 음반을 들으며 한없이 울었다.

    나는 존 레논과 오노 요코를 뉴욕에서 두 번 만났다. 한번은 길가에서, 또 한번은 음식점 옆자리에서. 나는 그에게 훌륭한 음악을 선사해 주어서 고맙다고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떡였다.

    Pink Floyd [The Wall](1979/Capitol)


    1-D. Pink Floyd [The Wall](1979/Capitol)

    1 In the Flesh? 3:19
    2 The Thin Ice 2:29
    3 Another Brick in the Wall, Pt. 1 3:09
    4 The Happiest Days of Our Lives 1:51
    5 Another Brick in the Wall, Pt. 2 3:59
    6 Mother 5:36
    7 Goodbye Blue Sky 2:48
    8 Empty Spaces 2:08
    9 Young Lust 3:30
    10 One of My Turns 3:37
    11 Don't Leave Me Now 4:17
    12 Another Brick in the Wall, Pt. 3 1:14
    13 Goodbye Cruel World 1:17
    14 Hey You 4:42
    15 Is There Anybody Out There? 2:40
    16 Nobody Home 3:24
    17 Vera 1:33
    18 Bring the Boys Back Home 1:27
    19 Comfortably Numb 6:24
    20 The Show Must Go On 1:35
    21 In the Flesh 4:17
    22 Run Like Hell 4:24
    23 Waiting for the Worms 3:58
    24 Stop :30
    25 The Trial 5:20
    26 Outside the Wall 1:44


    비틀즈가 바하라면, 핑크 플로이드는 바그너이다. 굉장히 염세주의적이며 Depression한 테마로 웅장한 사운드를 만든 걸작이다.

    Bob Ezrin의 Monumental Producing 그리고 David Gilmour의 죽여주는 기타. <Comfortably Numb>를 들어 보라. 꼭 Sigmund Fraud 박사의 쇼파에 누워 Psychoanalysis(정신분석)를 받는 기분이다. 최고다!


    <에필로그>

    나의 록 명반 선정은 지극히 개인적이며, 아무도 동의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이 앨범들은 나의 음악세계와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준 음악들이다. 내가 뽑은 이 음반들과 아티스트들은 음악이 훌륭할 뿐만 아니라 '음악혁명'을 일으킨 인간의 소리이다.

    Bob Dylan [Blonde on Blonde](1966/Columbia) 2-A. Bob Dylan [Blonde on Blonde](1966/Columbia) 1 Rainy Day Women #12 & 35 4:36 2 Pledging My Time 3:50 3 Visions of Johanna 7:33 4 One of...
  3. Roxy Music [Avalon](1982/Virgin)


    7. Roxy Music [Avalon](1982/Virgin)

    1 More Than This 4:30
    2 The Space Between 4:30
    3 Avalon 4:16
    4 India 1:44
    5 While My Heart Is Still Beating 3:26
    6 The Main Thing 3:54
    7 Take a Chance With Me 4:42
    8 To Turn You On 4:16
    9 True to Life 4:25
    10 Tara 1:43


    이렇게 Smooth한(비단 같은) 앨범은 별로 없다. 곡도 그렇고, 프로듀싱, 연주자, 그리고 리더 Bryan Ferry의 살결 같이 부드러운 목소리. 디지털 녹음이 시작될 무렵, CD플레이어가 처음으로 대중들에게 소개될 무렵 이 앨범을 들었다. 내 온 집안 전체, 내 온 몸 전체가 사운드로 가득 채워졌다. 그렇게 기타소리, 드럼소리, 목소리가 명백할 수 있을까?

    Bryan Ferry는 내 생각엔 록계의 Frank Sinatra라고 부르고 싶다. 너무나도 부드럽고 매력적인 보컬이다. 뿐만 아니라 6척 이상의 큰 키와 늘씬한 몸매, 영화배우를 능가하는 핸섬한 얼굴. 수많은 미국, 유럽, 일본 여성들의 꿈의 동반자가 되었다.

    나는 Radio City에서 Roxy Music 콘서트를 보았다. Tuxedo를 입고 노래부르는 모습이 정말 매력적이었다.(우리 마누라는 '뿅' 갔다.) 하지만 쇼는 약간 지루한 느낌이었고, 너무 변화가 없었다. 이 때 Bryan의 약혼녀가 19세의 텍사스 모델 Jerry Hall이었는데, Mick Jagger한테 빼았겼다. 역시 '화폐 파워'가 무시 못하는 것 같다. 그후, Jerry는 Mrs. Jagger가 되었고, Bryan은 2년 동안 '멍든 마음 손에 들고' 있었다고 한다.

    Michael Jackson [Thriller](1982/Epic)


    6. Michael Jackson [Thriller](1982/Epic)

    1 Wanna Be Startin' Somethin'
    2 Baby Be Mine
    3 The Girl Is Mine
    4 Thriller
    5 Beat It
    6 Billie Jean
    7 Human Nature
    8 P.Y.T. (Pretty Young Thing)
    9 The Lady in My Life


    역시 Quincy Jones의 프로듀싱이 주인이다. 꼭 마치 수학계산을 하듯이 빈틈없는 Pop/Rock 앨범이다. 아무리 누가 비판을 해도 <Billie Jean>은 완벽한 댄스/록이다. 베이스 라인, 드럼, 신서사이저, 코러스 그리고 마이클의 가창력. 이 곡 하나로도 이 앨범은 '끝난 것'이다.

    마이클 잭슨은 현재 '문제 아동'이다. 지나치게 돈이 많고, 지나치게 일찍부터 유명해졌기 때문에 자기 인생을 자연스럽게 살지를 못했다. 7살 때부터 아버지의 권유로 무대에 섰다. 학교도 제대로 못 다녔다. 그래서 사회생활이 무엇인지, 인간관계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Lisa Marie Presley와 희·비극적인 결혼/이혼, 숱한 성형수술, 그리고 아프리카의 온갖 동물들을 구입해 성과 같은 별장에서 혼자 놀고 있는 모습.

    위에 계신 분은 절대 두 손에 떡을 다 주지 않는다. 돈과 유명세는 있지만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감수성과 기능, 그리고 존경을 주지 않았다. 약 8년 전 서울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이클 잭슨 공연을 보았다. 실망이었다. 하지만 우리 마누라 옥사나가 아직도 마이클을 이 세기 최고의 Voice요 Performer라며, 미디어에서 모욕을 할 때마다 가슴 아파한다. 나도 동의한다.

    마이클 잭슨은 록계의 천재적인 Vocalist이자 Entertainer이다.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다.

    King Crimson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1969/EG)


    5. King Crimson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1969/EG)

    1 21st Century Schizoid Man (Including Mirrors)
    2 I Talk to the Wind
    3 Epitaph (Including March for No Reason/Tomorrow and Tomorrow)
    4 Moonchild (Including The Dream/The Illusion)
    5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Including The Return of the Fire Witch)


    내가 이 앨범을 처음 1969년에 들었을 때, 록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느꼈었다. 기타, 드럼 위주의 전래적인 사운드가 아니라 뭔가 우리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또 하나의 소리가 있었다. 이것이 Moog Synthesizer였다. 현재 기교적으로 세련된 키보드의 시발점이었다. 그리고 흐디흐디한(흔하디 흔한) 블루스 바탕의 기타가 아니었고, 귀에 익숙치 않은 Robert Fripp의 기타애드립. 그리고 노래제목도 멋있었다. <21st Century Schizoid Man>(21세기 분열증 환자), <Epitaph>(비명), <I Talk To The Wind>(나는 바람과 이야기한다) 등등.

    상당히 철학이 담긴 전례 없던 주제의 록음악이었다. 또 다시 영국의 전통과 문화가 미국의 'Fast Food' 문화와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킹 크림슨은 그다지 공연 활동을 많이 하지 않아서 드디어 1996년 재결합 당시 뉴욕 Town Hall(약2,000석)에서 보았다. 상당한 기대감과 흥분된 가슴을 안고 입장했다. 실망이었다.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순전히 기교적으로 꼭 "나 악기 잘 다뤄" 하는 자랑으로밖에 안 보였다. 리드기타 로버트 프립은 의자에 학교교사 같이 앉아 별로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옛날 히트곡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프립은 한번 더 본 적이 있다.(역시 콘서트에서 큰 감동은 못 받았다.)

    하지만 이 앨범이야말로 록계의 큰 획을 그은 작품이다. 즉 Sound Texture(소리의 감촉)를 중요시하고, 철학과 연주자들의 기교(Improvision)를 중시하는 Progressive Rock의 출발점이었다. 그후 Moody Blues, Yes, ELP, Roxy Music, David Bowie 등등이 바톤을 받아 진화시켰다.

    Brian Eno [Before And After Science](1977/EG)


    4. Brian Eno [Before And After Science](1977/EG)

    1 No One Receiving 3:52
    2 Backwater 3:43
    3 Kurt's Rejoinder 2:55
    4 Energy Fools the Magician 2:04
    5 King's Lead Hat 3:56
    6 Here He Comes 5:38
    7 Julie With... 6:19
    8 By This River 3:03
    9 Through Hollow Lands 3:56
    10 Spider and I 4:10


    나는 전혀 Eno가 누군지 몰랐다. 1980년 초 징기스칸 그룹으로 한참 뉴욕의 냄새나는 록 클럽들을 누비고 다닐 때, 영국계 베이스 플레이어인 Ian이 소개를 해주었다.

    이 음악은 희한했다. 록도 아닌, 재즈도 아닌, 꼭 무슨 화성에서 오는 소리 같았다. 그리고 감미로웠고, 나의 영혼을 만져주었다. 새로운 음악을 발굴하려면 그 누군가 소개를 해줘야 한다. 덧붙여 새로운 음식과 새로운 방식의 섹스도 마찬가지이다.

    Eno에 대해서 공부를 하려하니 전혀 자료가 없었다. 인터뷰도 별로 없고,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음악가로서 골수팬들만 소수 확보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Roxy Music의 초창기 Keyboardist로서 색깔 있는 인품으로 패션감각과 메이크업이 대단했다. 결국 리더인 Bryan Ferry의 스포트라이트를 빼았는다 해서 '소유와 질투'에 의해 그만두게 되었다.

    약 10년 전 뉴욕 일본음식점에서 혼자 식사하는 모습을 보았다. 40대 초반인데, 벌써 대머리가 되었고, 조용한 위엄성 때문에 접근을 안 했다. 그는 일본 문화와 사시미를 즐긴다고 했다.

    그후 Eno는 오히려 프로듀서로서 명성을 얻는다. David Bowie의 두 걸작, [Heroes]와 [Low], U2의 [Unforgettable Fire], Talking Heads의 [More Songs About Buildings and Food] 등 많은 대작을 작업했다.

    Brian Eno는 신서사이저 사운드의 천재다. Tape Loop, 또 기타를 올갠 앰프를 통해서 소리조작을 한다든지. 최근 강산에 앨범에서도 Tape Loop를 들었다.

    Eno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프로듀서 셋 중 하나이다. 나머지 둘은 Daniel Lanois와 Bob Ezrin이다.

    Cream [Fresh Cream](1966/Polydor)


    3. Cream [Fresh Cream](1966/Polydor)

    1 I Feel Free 2:53
    2 N.S.U. 2:47
    3 Sleepy Time 4:22
    4 Dreaming 2:01
    5 Sweet Wine 3:20
    6 Spoonful 6:33
    7 Cat's Squirrel 3:05
    8 Four Until Late 2:10
    9 Rollin' and Tumblin' 4:43
    10 I'm So Glad 3:59
    11 Toad 5:09

    3인조, Jack Bruce(베이스), Ginger Baker(드럼) 그리고 Eric Clapton(기타) - 그런데 엄청난 사운드. 완벽하게 자기 악기들을 다루는 것이었다. 셋 다 블루스 백그라운드 출신으로 60년대 히피혁명에 휘발유를 뿌렸다. 그리고 곡들도 색달랐다. 그냥 블루스가 아니었고, 또 다른 화음법의 '소리의 창문'을 열었다.

    60년대 중반, 처음 뉴욕에 왔을 때, Cafe Au Go Go(약150석)에서 역사적인 순간을 경험했다. 넘치는 에너지, 연장된 솔로(약 20분, Prolonged Improvision) 그리고 영국 중세기 시대와 흡사한 패션, 꽃무늬, 얼룩덜룩. - 몇 년 뒤엔 10,000석 이상에서만 공연한다.

    크림이야말로 히피 마약문화의 최고 인기 밴드들 중에 하나였다. 연장된 기타솔로, 드럼과 베이스솔로에 미국의 젊은이들이 푹 빠졌다.

    나중에 에릭 클랩튼이 "솔로를 그렇게 오래한 이유는 뭐냐?"라는 질문에 "우리는 그 당시 헤로인을 많이 복용했으므로 그냥 음악에 도취된 상태라, 언제가 시작이고 언제가 끝인지를 구분 못했다"라고 대답했다.

    크림의 역사적인 시간은 짧았지만 음악계에 준 충격은 영원하다.

    Roxy Music [Avalon](1982/Virgin) 7. Roxy Music [Avalon](1982/Virgin) 1 More Than This 4:30 2 The Space Between 4:30 3 Avalon 4:16 4 India 1:44 5...
  4. Quincy Jones - [Back On The Block](1989/Qwest)


    12. Quincy Jones - [Back On The Block](1989/Qwest)

    1 Prologue (20's Rap) (Quincy's Rap)
    2 Back on the Block
    3 I Don't Go for That
    4 I'll Be Good to You
    5 The Verb to Be
    6 We B. Dooinit [Acappella Party]
    7 The Places You Find Love
    8 Jazz Corner of the World [Introduction to Birdland]
    9 Birdland
    10 Setembro (Brazilian Wedding Song)
    11 One Man Woman
    12 Tomorrow (A Better You, Better Me)
    13 Prelude to the Garden
    14 The Secret Garden (Sweet Seduction Suite)


    1991년 [천사들의 담화]를 이우창씨와 녹음할 무렵, 할렘가와 East L.A.에서 흑인들이 비트에 맞춰 주절거리는 'Rap'이란 음악이 유행하기 시작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길가에 Boom Box를 들고 다니는 흑인 아동들의 소리를 들으니, 무척 단조롭고 특별한 음악성은 없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퀸시 존스가 프로듀스한 이 앨범이야말로 "Rap/HipHop Has Arrived"(이것이 Rap 이다)하고 선언했다. Ice-T, Snoop Doggy Dog 등의 신인들이 등장한(나중엔 대가가 된다) 이 앨범은 'Power'였다. 그 이후 이렇게 음악적인 Rap 음악은 못 들었다.

    Sex Pistols - [Never Mind the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1977/Warner Brothers)


    11. Sex Pistols - [Never Mind the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1977/Warner Brothers)

    1 Holidays in the Sun 3:20
    2 Bodies 3:02
    3 No Feelings 2:49
    4 Liar 2:40
    5 Problems 4:10
    6 God Save the Queen 3:18
    7 Seventeen 2:02
    8 Anarchy in the U.K. 3:31
    9 Submission 4:12
    10 Pretty Vacant 3:16
    11 New York 3:05
    12 E.M.I. 3:10


    록계가 지루함의 연속으로 이어갈 70년대 말 무렵, 'Sex Pistols'(성기 권총)가 등장했다. 전혀 능숙치 않게 악기를 다루는 밴드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리드 싱어 Johnny Rotten(썩은 죠니). 하지만 에너지가 넘쳤고, 왕족으로 이루어진 영국 정계를 뒤집겠다고 외쳤다. 즉 Anarchy(무정부)를 외쳤다. 물론 영국의 Local Issue였지만, 이러한 초반항적인 태도가 대서양을 건너와 미국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나는 <God Save The Queen>(신이여 우리 여왕 엘리자베스를 구원하게)을 처음 들었을 때 슬펐다. 마지막 "No Future No Future"(우리에겐 미래가 없다) 하고 반복 코러스를 할 땐 마치 서양사회 자체가 미래가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무렵 런던을 방문했는데, King's Road를 들어서니 너무나도 신기했다. Mohawk(머리 옆 양쪽만 밀고 중간은 남김) 스타일의 헤어스타일에 빨강, 초록, 노랑, 제각각 색깔의 Punk 아동스들이 걸어다닐 땐 꼭 인간새를 연상케 했다. 그리고 그들은 공원에 서서 Dog Food(개가 먹는 깡통음식)를 손가락으로 찍어 먹는 것이었다. 쇼크 받을 줄 모르는 뉴요커였지만, 이때는 쇼크를 크게 받았다. 코와 귀, 때로는 입술에 Safety Pin(옷핀)을 흉칙하게 세로로 찔렀다.

    Punk의 혁명은 약 5년 정도로 짧았지만 큰 영향을 음악계에 미쳤다. 특히 패션 부분은 아직도 Punk Style을 일본 하라쥬쿠나 홍대 앞에서 가끔 본다. Sex Pistols는 그 이후 Clash, Generation-X(Billy Idol), Police(Sting), 미국의 Dead Boys, Ramones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에필로그로, 베이스 플레이어 Sid Vicious(흉칙한 시드)가 걸프렌드 Nancy Spungen과 동거하며 뉴욕의 유명한 Chelsea Hotel에서 헤로인/코케인을 복용하다 Nancy가 죽었다. 살인자로 투옥된 Sid가 몇일 후 감옥에서 자살했다. 이로써 Punk Rock의 결실은 비극적으로 문을 닫았다. 이 스토리가 'Sid & Nancy'라는 극영화에 잘 그려져 있다.

    Jean Michel Jarre [Equinox](1978/Dreyfus)


    10. Jean Michel Jarre [Equinox](1978/Dreyfus)

    1 Equinoxe, Pt. 1
    2 Equinoxe, Pt. 2
    3 Equinoxe, Pt. 3
    4 Equinoxe, Pt. 4
    5 Equinoxe, Pt. 5
    6 Equinoxe, Pt. 6
    7 Equinoxe, Pt. 7
    8 Equinoxe, Pt. 8


    70년대 화제의 영화 'The Night Porter'의 여주인공인 영국배우 Charlott Rampling이 새로운 Sex Symbol로 등장했다. 처음으로 극영화에서 Sado/Masochism이 묘사되어 인간의 숨겨진 Sexuality를 자극했다. 그녀가 인터뷰에서 "우리 남편은 불란서 음악가인데, 아주 모던하고 묘사하기 힘든 음악을 한다"라고 말했다. 이 분이 바로 연하의 남편 Jean Michel Jarre이었다.

    나는 커버가 너무나도 초현실주의라 이 앨범을 샀다. 턴테이블에 놓는 순간 이 우주 같은 신서사이저 사운드에 회오리바람 같이 빨려 들었다. 과거 Terry Riley, Mike Oldfield와는 또 다른 차원의 Synth/Rock이었다. 일본의 Kitaro가 Shubert라면 Jean Michel은 Beethoven이다.

    파리의 도시축제에 Jean Michel은 에펠탑 공연에서 2백만명의 관객을 끌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리고 중국이 처음으로 Non-Classic 서양밴드를 초청했는데, Rolling Stones를 제치고 이 영광을 획득했다. 결과물은 밀리언셀러인 [Live In China]이다.

    Butterfield Blues Band [East-West](1966/Elektra)


    9. Butterfield Blues Band [East-West](1966/Elektra)

    1 Walking Blues 3:15
    2 Get Out of My Life Woman 3:13
    3 I Got a Mind to Give up Living 4:57
    4 All These Blues 2:18
    5 Work Song 7:53
    6 Mary, Mary 2:48
    7 Two Trains Running 3:50
    8 Never Say No 2:57
    9 East-West 13:10


    내가 고등학교 졸업 무렵, 1967년, 한참 비틀즈, 롤링스톤즈에 빠져 있을 때 블루스의 매력을 처음으로 느꼈다. John Mayall을 통해서 즐기기 시작했지만 Paul Butterfield는 나를 보냈다. 폴의 애수 짙은 목소리, 능숙한 임프로비젼(Improvision) 하모니카, 그리고 Mike Bloomfield의 깨끗하고 마음을 찌르는 기타. 이것이 즉 시카고 블루스였다.

    그후 두 번이나 라이브로 보았다. 한번은 그리니치 빌리지 중심에 위치한 약150석의 Cafe Au Go Go, 그리고 약5,000석 규모의 Filmore East. 너무나도 감동적이었고 Cool했다.

    폴은 알콜중독으로 약 15년 전에 죽었고, 마이크는 약 12년 전에 헤로인 과잉으로 죽었다. Mike Bloomfield의 마지막 뉴욕콘서트를 Beacon Theatre에서 봤다. 너무 슬펐다. 손가락도 제대로 안 돌아가고, 몸도 휘청거렸다. 신문이나 매체들은 이들의 별세에 대해 별 보도도 하지 않았다. 나는 슬펐다. 이 위대한 두 음악인의 고통과 고독, 그리고 요절. 나는 울었다.

    [East-West]는 블루스계, 록계의 대작이다. 특히 14분짜리 연주곡은 교향곡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곡은 <I Got A Mind To Give Up Living>이다.

    Iggy Pop [The Idiot](1977/Virgin)


    8. Iggy Pop [The Idiot](1977/Virgin)

    1 Sister Midnight 4:23
    2 Nightclubbing 4:18
    3 Funtime 2:53
    4 Baby 3:20
    5 China Girl 5:12
    6 Dum Dum Boys 7:12
    7 Tiny Girls 3:03
    8 Mass Production 8:28


    Iggy는 록계의 괴짜다. Detroit 자동차산업의 도시 출신으로, 형용사를 쓰자면 '칼날'이다. Stooges라는 하드록밴드 싱어로서 주목을 받다, David Bowie를 만나면서 음악적 세계가 넓어졌다.

    두 번 보았다. 한번은 롱아일랜드의 My Father's Place(약200석)에서, 그리고 캘리포니아 롱비치(약2,000석)에서. 내 입이 벌어졌다. 웃통을 벗은 채 유리병으로 자기 몸에 핏자국을 내지 않나, Peanut Butter를 온몸에 발라 꼭 똥칠을 한 것 같았고, 사타구니 사이에 바이올린 활을 끼워 넣고 노래를 불렀다. 우리 마누라 명신은 기겁을 하여 민망해서 나가버렸다.

    하지만 Iggy Pop 목소리는 죽인다. 강한 바리톤 그리고 록계의 'Rebel King'(반항의 제왕)이다. 70년대 말 내가 <Nightclubbing>을 뉴욕 소호 클럽에서 처음 들었다. 이 때 뉴욕은 클럽문화의 절정이었다. Mudd Club, Studio 54, CBGB's, Max's Kansas City 등이 미국과 유럽 젊은 귀족들의 집합 장소였다. Iggy의 강한 목소리와 느리고 반복되는 비트에 따라 숱한 젊은 미남/미녀들(하이패션 옷을 입은)이 춤을 추는 것을 보니, "야, 여기가 (뉴욕) 세계 중심이구나"하는 느낌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이 앨범의 주인공은 바로 프로듀서인 David Bowie이다. 간단하면서도 강력한, 잔소리가 없는 앨범이다.

    Iggy Pop은 Punk의 대부로 알려진다. Sex Pistols가 등장하기 수 년 전에.

    한가지 덧붙일 것은, 내가 Long Beach 콘서트를 보고 3일 동안 귀가 웅웅거려 고생했다. 너무 볼륨이 컸기 때문에.

    Quincy Jones - [Back On The Block](1989/Qwest) 12. Quincy Jones - [Back On The Block](1989/Qwest) 1 Prologue (20's Rap) (Quincy's Rap) 2 Back on the Block 3 I Don't Go fo...
  5. Tina Turner - [Private Dancer]


    15. Tina Turner - [Private Dancer](1984/Capitol)

    1984년 Radio City Music Hall. 40대 중반의 아줌마 로커를 보게된다. 약 10년 동안의 침묵을 깨고, 남편 Ike와 헤어지고, 티나는 실질적인 첫 솔로 앨범을 낸 것이다. 앨범 프로모션 투어였다.

    이 콘서트는 한마디로 섹시했다. 6인조 tight(완벽한 사운드)한 밴드, 육체미가 늘씬한 금발 코러스 둘, 웃통을 거의 벗은 saxophone/percussion 호남의 율동. 그리고 티나 터너, 초미니 검은 가죽 스커트, spike heel(굽이 매우 높고 칼날 같이 가늠) 그리고 지미 헨드릭스 이상의 tease한 머리. 그녀가 다리를 꼬면서 무대를 춤추며 나올 땐 온 관객이 일어섰다. 마치 'Black Goddess'(흑인 여신)가 백성을 다스리듯이. 그녀의 찌그러진 표정으로 열창을 시작할 땐 정신적 오르가즘이었다. 새로운 음악과 <proud mary>와 같은 과거 히트곡들을 쉬지 않고 한시간 반 동안 열정을 토해냈다. 특히 코러스 두 명과의 자기가 직접 안무한 너무나도 섹시한 춤은 놀라웠다.(아마 마돈나가 여기서 배웠을 것이다.)

    티나는 10년 동안 너무나 고통스러운 생활을 했다. 남편이었던 아이크의 마약중독(freebasing, 코카인과 헤로인 합성) 때문에 음악으로 번 돈은 다 날아갔고, 심지어 구타까지 자주 당하여 얼굴이 멍든 사건도 과거 잡지에서 보았었다.(아이크는 곧이어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싸구려 호텔에서 묵다가 신용카드가 사용정지되어 쫓겨나기도 했다. 이 안타까운 상황을 다들 지켜보는 가운데 한 젊은 영국 매니저가 이 훌륭한 음악인이 타락의 길로 가는 것을 구제한 것이다.

    이 앨범은 최고 영국인 세션, 즉 Mark Knopfler, Jeff Beck 등등이 참여하여 미국 음악계가 외면한 이 천재적인 rock voice를 다시 살려낸 것이다. 훌륭한 pop/rock/soul 앨범이다. 아직도 마누라 옥사나가 최고로 꼽는 록콘서트이다.

    Doors - [Strange Days]


    14. Doors - [Strange Days](1967/Elektra)

    도어스는 Jim Morrison이다. 부유한 미해군 제독의 아들로서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서 영상(film) 공부를 했다. 시인이며 목소리와 외모가 매우 매력 있어 한 때 여자들의 sex symbol이었으며, 남자들한텐 우상이었다. 1967년 내가 뉴욕에서 사진학교 다니면서 저녁엔 음식점에서 요리사 조수로 일하는데, <Light My Fire>가 라디오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렇게 길고 연장된 improvision은 처음 들은 것이었다. 칼질하다 손 자를뻔 했다.

    마약을 너무 많이 하여(특히 LSD) 지나치게 자아에 빠지게 된다. 심지어 자기의 섹스 심볼을 과시하듯이 무대에서 진짜 자기 섹스 심볼을 노출시키다 플로리다 공연에서 경찰에 구속당했다. 짐 모리슨은 무엇보다 그의 빠다 발린 허스키 목소리(buttery husky voice)이다. 그리고 그의 저항적인 자세(revellious attitude). 도어스야말로 영국 중심의 록계를 미국 밴드가 다시 정복하려고 노력한 음악인들이다. 물론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도어스의 곡은 <when the music's over>이다. 그리고 Francis Ford Coppola 감독의 영화 [Apocalypse Now]의 첫 장면, 포탄이 터지면서 나오는 <the end> - "This Is The End..." 이 장면을 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고맙다.

    Rolling Stones - [Let It Bleed]


    13. Rolling Stones - [Let It Bleed](1969/ABKCO)

    롤링 스톤즈가 가장 생명력이 긴 밴드라는 점은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회생과 희생(원조 리더였던 Brian Jones의 요절 등), 두터운 우정(중학교 때 맺은 Mick Jagger와 Keith Richard, 심지어 걸프렌드를 나눌 정도의 사이)의 결과이다.

    수많은 롤링 스톤즈의 앨범들 중에서 [Let It Bleed]는 가장 창작력이 뛰어나며 작곡과 세션이 훌륭하다. 리더 믹은 매우 현명하고 브루조아 의식을 가진 음악가이다. 남들의 예상과 달리 마약도 별로 안 한다. 그리고 그는 London School Of Economics(영국판 하버드 경제학과) 출신이며, 과거의 매니저와 많은 충돌과 사기 행위 때문에 자기가 직접 밴드를 매니지한다.

    스톤즈의 음악적인 색깔은 뚜렷하다. 강한 리듬섹션 그리고 현란하지는 않지만 특유의 굵고 묵직한 키스 리차드의 기타와 흑인 블루스의 목소리를 어릴 때부터 사모하고 모방한 믹 재거의 째어지는 목소리이다. 이 음반의 곡들은 다 주옥이다. 특히 <gimme shelter>와 <you can't always get what you want>는 걸작이다.

    나는 아직도 스톤즈의 라이브를 보지 못했다.(수많은 공연을 뉴욕에서 해왔고, 아직도 하고픈데도.) 영화나 TV에서는 자주 보았다. 너무 지나친 노출 때문일까? 하지만 롤링 스톤즈는 록음악의 대명사인 노래를 불렀다. 즉, <satisfaction>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이 인생에 만족을 얻을 수 없기에...


    Tina Turner - [Private Dancer] 15. Tina Turner - [Private Dancer](1984/Capitol) 1984년 Radio City Music Hall. 40대 중반의 아줌마 로커를 보게된다. 약 10년 동안의 침묵을 깨고, 남편 Ike와 헤어지고,...
  6. Jeff Beck - [You Had It Coming]


    20. Jeff Beck - [You Had It Coming](2001/Epic) 그리고 모든 것

    제프 벡은 음악인들 사이엔 대가다. 특히 록 기타리스트 사이엔 영웅이다. 2000년 가을 뉴욕 Roseland Ballroom(약 2,500명 수용 - 전통 있는 댄스홀이므로 의자가 없음. 서서 감상해야 함)에서 드디어 이 살아있는 신화를 몸소 경험할 수 있었다. 워낙 공연을 별로 하지 않기 때문에 내 마음은 신비스러운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과연 앨범과 같이 기타를 칠 수 있을까?"

    드럼, 베이스, 리듬기타 그리고 리드기타(자기) - 4인조 밴드였다. 그리고 적절한 슬라이드 조명. 마셜 앰프 3층 짜리(3 Deck Marshall)가 무대 뒤로 3개. 첫 곡이 시작하자마자 나의 의문점은 사라지고 그의 기타 묘기에 침투되었다. 제프는 기타를 치는 것이 아니라 기타 온몸이 자기 장난감이었다. 바디(body) 밑을 손으로 때릴 때는 '윙' 하고 소리나고, 윗부분을 각도를 비틀 때는 '앙' 하고 소리나고, 프렛에서 솔로하는 것과 이러한 특수 소리를 배합하여 희한한 기타 사운드로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약 2시간 동안 관객들과 대화도 없이 연주만 했지만, 지루하지 않았고 흥분의 파도는 계속 몰아쳤다. 마지막 3번째 앵콜 때는 "I Love You New York"하고, 비틀즈의 <A Day In The Life>를 정말 멋있게 혼자 solo로 막을 내렸다.

    재미있는 것은, 대부분 관객은 백인 남자였으며, 흑인은 약 100명, 일본인은 약 100명 그리고 한국인은 우리 셋. 밤 11시쯤 브로드웨이 거리를 나서니 시원한 가을 바람이 우리를 안겨주었고, 타임스퀘어 네온사인은 더욱 명백하게 반짝였다. 옥사나와 나는 같이 온 감미옥 최사장 식당에 가서 설렁탕과 깍두기를 먹었다. 나의 모든 인간의 구멍이 만족했다.

    U.K - [U.K.]


    19. U.K - [U.K.](1978/EG)

    드럼 Bill Bruford, 베이스 & 보컬 John Wetton, 신서사이저 & 일렉트릭 바이올린 Eddie Jobson,

    Beacon Theatre, 약 1980년도.
    나는 제일 꼭대기 3층에서 삼인조의 엄청난 사운드에 매료되었다. 특히 Bruford의 베이스 드럼은 내 가슴을 푹푹 때리듯이 음향시스템과 테크닉이 완벽했다. 전 King Crimson의 Wetton과 Bruford, 전 Roxy Music의 Jobson - 이 대가들의 사운드는 프로그레시브 재즈와 프로그레시브 록의 희한한 배합이었다. 전혀 익숙치 않은 사운드이면서도 관객들을 꼭 움켜잡았다. 특히 Jobson의 투명한 일렉트릭 바이올린은 어느 헤비메틀 기타리스트보다 더욱 강렬했고 호소력이 있었다. U.K.의 첫 앨범은 걸작이다.

    Neil Young - [After The Gold Rush]


    18. Neil Young - [After The Gold Rush](1970/Reprise)

    닐 영은 항상 연구하고 실험정신이 강한 아티스트이다. 50이 훨씬 넘은 이 때에도. 원래 보컬에 자신이 없어서 CSN&Y 때에는 노래를 안 불렀다. 자기 솔로 앨범으로 데뷔하면서 매니저의 권유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이상한 목소리 - 알토도 아닌, 꼭 짐승이 상처를 받아 연약하게 고함을 지르는 소리이다. 그리고 그는 탁월한 기타리스트는 아니지만 자기 자신만의 톤을 진하게 가지고 있다. 기타 픽업을 바꾼다든지, 앰프를 색다르게 연결한다든지, 항상 톤을 중요시하는 기타리스트이다. 미국 뮤지션들 사이에서 'One Note Neil' 이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sustain note를 좋아한다. 작곡도 훌륭하고, 가사는 초현실주의적이다. 이 앨범으로 빌보드 차트에 올랐고, 싱어송라이터로서 대가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Lou Reed - [Transformer]


    17. Lou Reed - [Transformer](1972/RCA)

    루 리드는 뉴욕을 상징하는 록커이며, 유태인으로서 자기 아버지 회사의 계리사로 일하다 같은 유태인인 앤디 워홀의 지원 아래 Velvet Underground의 리더로서 명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작곡은 너무 단순하다. 주로 코드 2개 아니면 3개로 노래를 이어간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Rock & Roll>과 <Walk On The Wild Side>가 그렇듯이. 작사 부분은 정말 뉴욕의 언더그라운드의 풋냄새를 풍긴다. 주제는 희망 없는 마약 중독자, 친구의 자살 그리고 호모섹스의 희망과 절망. 목소리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말소리 뒤에 에코를 넣었듯이, 상당히 부드러운 음성이다.

    이 앨범 [Transformer]이야말로 루 리드를 솔로 아티스트로 이륙하게 만든다. 이 음반의 주인공은 자기의 친구였던, 다름 아닌 아트록(Art Rock)의 대부였던 David Bowie이다. 루 리드가 얼굴 화장을 하기 시작한 것도 보위의 영향 때문이었다. 데이빗 보위가 손수 선택한 세션 음악가와 직접 참여한 편곡이 이 앨범을 걸작으로 만든다. 그 이후 보위가 참여하지 않은 리드의 솔로 앨범들은 뭔가 완성도가 높지 않다.

    Human League - [Dare!]


    16. Human League - [Dare!](1981/A&M)

    1985년인가(?) 뉴욕의 Beacon Theatre에서 런던의 그룹의 첫 데뷔 콘서트를 보고 깜짝 놀랐다. 무대를 보니 드럼도 없고, 기타도 없고 - 하얀 화면만 뒤에 보였다. 그리고 신서사이저 키보드 3대, 코러스 여자 둘 그리고 리드 싱어. 이러한 편성 하에 엄청난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즉 'Synthesizer Rock' - 기타, 드럼도 없이 순전히 인공의 사운드로 사람을 사로잡는 것이었다. 이 새로운 사운드로 뉴욕커들을 흥분시켰다. 과장 하나 없이 2층 발코니가 휘어질 정도로 관중들은 춤을 추었다. 정말 무너질까봐 나는 걱정하며, 내 마누라를 무대 앞 쪽으로 밀었다.

    그 후 <Don't You Want Me>가 빅히트하고, 런던에서 계속적인 침범이 시작되었다. 즉 'Blitz Movement'의 창문을 열은 것이다. Steve Strange, Flock Of Seagulls, Depeche Mode, Spandau Ballet 그리고 보이 조지의 Culture Club이 이후 80년대 미국의 음반 시장을 독점했다.

    Jeff Beck - [You Had It Coming] 20. Jeff Beck - [You Had It Coming](2001/Epic) 그리고 모든 것 제프 벡은 음악인들 사이엔 대가다. 특히 록 기타리스트 사이엔 영웅이다. 2000년 가을 뉴욕 Roseland Ballr...
  7. Bob Marley - [Legend]


    25. Bob Marley - [Legend](1994/ Polygram)

    밥 말리는 역사를 이루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자메이카 출신으로 록의 세계적인 대가가 되었다. 전례가 없는 일이다. 정치성을 띤 곡들도 있고, 자기의 종교 'Rastafarianism', 즉 이디오피아의 왕 하일리 쎌리세(Haile Selassie)를 구세주로 인정하고 ganja(대마초)를 뺄 수 없는 종교예식으로 습관적으로 피웠다. 결국 brain tumour(골종기)로 일찍 별세했다. 하지만 그의 아름다운 레게음악은 전세계인의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채워주었다.

    Marianne Faithfull - [Broken English]


    24. Marianne Faithfull - [Broken English](1979/ Island Records)

    나는 여자 아티스트를 싫어한다. 뿐만 아니라 나는 여자 작가도 싫어하고, 여자 스포츠도 안 본다. 이유는 이러한 분야는 여자의 강점을 나타내는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특히 여자 음악은 나에게 아무런 이야기를 해주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male chauvinist는 아니다. 나는 여자 자체를 너무나도 사랑한다. 1979년에 발표된 이 앨범은 충격적이었다. 믹 재거와 결별하고 10년 동안 마약중독과 고독과 싸운 시련의 결과물이다. 워낙 골초(담배)이기 때문에 그녀의 허스키하고 섹시한 목소리는 더욱 청취자의 마음을 우수에 젖게 한다. Steve Winwood, Frankie Collins 등의 훌륭한 세션과 Mark Miller Mundy의 프로듀싱은 훌륭하다.

    Joni Mitchel - [Ladies Of The Canyon]


    23. Joni Mitchel - [Ladies Of The Canyon](1970/ Reprise)

    조니 미첼은 싱어송라이터로서는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대가다. 곡들이 그렇게 섬세할 수 없고, 여성의 감정을 교묘하게 표현하는 아티스트이다. 때로는 기타, 때로는 피아노 - 이 두 악기를 탁월하게 연주하는 작곡가다. 항상 음악이 진취적이고 실험 정신이 강하다. 때로는 재즈 뮤지션과 때로는 혼자서 피아노와 기타 한 대로... 내가 이 앨범을 약 24년 전에 들었을 때의 이른 아침 - 아직도 그 운이 남아 있고 그날 커피 맛은 더욱 좋았다.

    Johnny Winter - [Nothin' But The Blues]


    22. Johnny Winter - [Nothin' But The Blues](1977/ Blue Sky)

    1979년 눈이 퍼붓는 날 - 약 20cm - 첫부인 명신씨와 함께 링컨 컨티넨탈을 타고 뉴저지의 Capital Theatre로 미끌어지면서 달렸다. 쟈니 윈터를 처음으로 보는 것이었다. 이러한 강력한 일렉트릭 블루스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1966년 Paul Butterfield 이후로. 그리고 그의 위스키에 젖은 허스키 보이스. 뿐만 아니라 휘날리는 흰 금발에 묘하게 생긴 얼굴. 그는 Albino(백변종. 털과 피부가 병적으로 흰 유전병)이다. 약 5,000석이 되는 이 공연장은 마리화나 냄새와 앵콜할 때마다 켜지는 라이터 불의 물결이 환호성과 함께 꼭 우주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마지막 4번째 앵콜은 혼자서 의자에 앉아 슬라이드 기타를 약 20분 동안 improvise. 이것이 음악의 파워였다. 자정에 공연이 끝나자 눈은 그쳤다. 전세계가 하얀 담요로 덮혀있었다. 자동차도 분간 할 수 없을 정도로. 윈 쉴드 눈을 간신히 손으로 치우고 있을 때 내 아내 명신씨가 말하기를, "대수씨, 행복해."

    그 이후로 1997년 김도균, 조덕환(들국화) 씨와 뉴욕 Bottom Line(약 450석)에서 노후한 자니를 보았다. 너무 슬펐다. 기타도 없었고, 보이스도 없었고, 힘도 없었다. 그냥 그의 고독한 목소리, "예아, 예야(yeah)" 밖에 안 들렸다.

    Blind Faith - [Blind Faith]


    21. Blind Faith - [Blind Faith](1969/ Polydor)

    에릭 클랩튼, 스티비 윈우드, 진저 베이커, 릭 그렛치 - 로 구성된 이 임시 밴드의 하나 밖에 없는 레코드이다. 우선 작곡이 훌륭하고, 연주가 훌륭하다. 특히 prolonged improvision(연장된 솔로)이 이 앨범에서 각 개인의 음악성을 과시한다. 이러한 록 임프로비젼 앨범은 이전에는 들을 수도 없었고, 이만한 실력을 갖춘 록연주인도 이전에는 없었다. 1년 전 친구 KJK 집에서 매킨토쉬 앰프로 이 레코드를 들었다. <can't find my way home>, <had to cry today>, <do what you like>. 꼭 아름다운 한국 미녀가 나를 안아주는 기분이었다. 죽여줬다!

    Bob Marley - [Legend] 25. Bob Marley - [Legend](1994/ Polygram) 밥 말리는 역사를 이루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자메이카 출신으로 록의 세계적인 대가가 되었다. 전례가 없는 일이다. 정치성을 띤...
  8. [A Hard Day's Night]에 출연한 패티 보이드


    '조용한 비틀즈'라고 불리는 조지 해리슨은 2001년 11월 29일 목과 허파암으로 58세에 별세했다. 그의 유골은 인도 갠지스강에 뿌려졌다. - 그는 힌두교도자였다.

    비틀즈의 능숙한 기타리스트로, 또 걸작의 사랑노래 <Something>과 <Taxman>의 작곡가로서, 그리고 자기의 솔로 대작 [All Things Must Pass] 3 레코드 세트를 남긴 록 역사의 거물이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비틀즈 유명세에 대해 불편해 했으며,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빼앗긴 데 대해 분노까지 느꼈었다.

    1964년 비틀즈가 처음으로 뉴욕 JFK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수천명의 소녀팬들이 웃고, 울부짖으며 발광을 하는 것을 보고 겁이 났다. 즉, 'Beatle Mania'의 시초였고, 그후로부터 비틀즈의 4 멤버는 미디어의 스포트라이트를 피할 수 없는 난처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 때 조지 해리슨이 말하기를, "이거 정말 좆 같이 병신 같아. 그토록 성공하려고 노력했는데, 겨우 이룬 것은 궁뎅이 흔드는 빈대가 되다니?" 그는 그토록 스타덤을 증오했으며, 나중엔 거대한 저택에 숲을 지어 전기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이름표도 없는 옥스퍼샤일 교외에서 정원이나 가꾸고 지냈다.

    젊은 조지, 1963


    조지 해리슨은 음악계의 거물로 부와 명예를 동시에 누린 영광을 차지했지만, 그와 비례한 비극도 작지 않았다. 그 중에 그에게 한평생 가장 아픔을 준 부분이 첫 부인 패티 보이드와의 비극적인 사랑이었다.

    1964년 비틀즈의 첫 영화인 [A Hard Day's Night] 촬영 중 조연으로 출연한 패션모델, 19살의 패티 보이드를 보고 첫 눈에 반했다. 금발의 파란 눈 -꼭 사파이어 같이 빛나는-, 그리고 초미니에 늘씬하고 싱싱한 긴 다리. 그리하여 조지는 끝없이 데이트 신청을 하여, 드디어 패티의 애정을 빼았았다. 1966년 1월에 몰래 조용히 런던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조지는 존 레논과 달리 부모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자랐기에, 상당히 가장으로서 보수적인 면이 있었다. 신혼여행이 끝나자마자 조지는 자기의 젊은 아내가 모델일을 그만두라고 명령을 했고, 가정 주부로써 빈틈없는 역할을 바랬다. 패티는 세계적인 록스타의 아내로, 조지가 녹음을 할 때, 또 공연 투어를 할 때 쓸쓸히 혼자 지내는 고독을 느끼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많은 노력을 했으나 자식을 가지는 하늘의 선물은 오지 않았다. 생각보다 화려한 생활의 꿈은 깨어지기 시작했다. 겨우 21살의 나이에.

    조지와 패티의 신혼 시절


    에릭 클랩튼은 1964년 Yardbirds를 이끌 때 조지와 비틀즈를 자주 접했고, 같은 세기의 명기타리스트로서 우정의 꽃이 피기 시작했다. 특히 조지의 [Wonderwall Music] 앨범에도 에릭이 블루스 기타 세션도 했고, 비틀즈의 <While My Guitar Gently Weeps>의 죽여주는 기타 주인공도 에릭 클랩튼이었다.

    Cream 시절엔 에릭이 조지의 영감을 빌려 작곡도 같이 했다. 에릭 클랩튼이 조지의 부인 패티 보이드를 1969년에 처음 보고 입이 벌어졌다. "나는 처음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만날 때마다 사랑이 더욱 깊어지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다. 내 마음은 텅 빈 항아리와 같았다. 난 언제 저렇게 아름다운 여자를 가질 수 있을까?"

    Delaney And Bonnie 포크록 그룹이 에릭 클랩튼의 리드기타 지휘 아래 영국 투어를 할 때, 조지는 너무나도 흥이나 같은 패거리가 되었다. 에릭은 물론 절친한 친구 조지와 무대 위에서, 무대 뒤에서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었지만, 패티에 대한 사랑은 더욱 깊어져갔다. 에릭이 말하기를, "나의 절친한 친구의 부인이었지만, 나는 사랑에 흠뻑 빠져서 보이는 게 없었다." 에릭은 패티에게 드디어 사랑을 고백하기 시작했다. 전화로, 때로는 편지로, "나는 당신을 너무 사랑해." 즉, 에릭 클랩튼은 세계 최상의 수퍼 그룹 비틀즈의 부인을 훔쳐 가는 작전을 자기도 모르게 하기 시작한 것이다.

    George Harrison [All Things Must Pass]


    1970년에 조지는 자기의 첫 솔로 앨범 [All Things Must Pass] 녹음 작업에 착수했다. 마침 그때 뉴욕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Oh Calcutta' off broadway 뮤지컬이 개봉되어, 조지와 부인에게 두장의 귀중한 초대권이 왔다. 이 뮤지컬의 화제꺼리가 뭔가 하면, 30명되는 남녀 게스트가 전나체(all nude)로 공연을 하고, 나중에 관객들도 전라로 유도시키는 해프닝(happening)이었다. 사상 처음이었다. 조지는 자기 첫 솔로 앨범 녹음에 집중되어있었고, 또 제작기간이 너무 지연되어 이 아까운 초대권을 에릭 클랩튼에게 주면서, "야, 너 좀 내 마루라 데려가 주면 고맙겠다." 에릭은, "그럼, 물론."

    믿어지지 않았다. 드디어 둘만이 있는 기회가 남편으로부터 주어진 것이었다. 섹스의 음탕한 공기로 가득 찬 이 공연을 본 후, 에릭 집에서 두 사람은 처음으로 환상적인 육체적 사랑을 나누었다. 이젠 일이 벌어졌다! 아무리 껴안아도 더욱 껴안고 싶은 육체의 욕망에 불이 붙은 것이었다. 꼬리가 길면 문턱에 걸리듯이, 사랑을 나눈 후 손에 손을 잡고 거리로 다가오는 에릭과 패티의 모습을 목격한 것이었다. 조지가 에릭에게, "너 새끼, 우리 마누라 한번만 더 만나면 죽어!" 그리고 패티를 자기 찬 안에 밀어 넣었다.

    패티 보이드


    하지만 육체적 사랑은 유사와 같다. 두 사람은 차안에서, 에릭 집에서, 영화관 뒷구석에서 계속 관계를 가졌다. 드디어 패티는 죄책감에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심리적 갈등으로 희노애락의 춤이 끊임없었다. 패티가 말하기를, "나는 너무나 지나친 죄책감을 느꼈다. 에릭이 내가 조지를 떠나 자기와 함께 살자고 권유했을 때, 나의 두 발은 얼어버렸다. 혼돈된 나의 마음을 바로잡을 수 없었다." 에릭이 마지막 선전포고를 패티에게 던졌다. "당신이 나에게 안 오면, 나는 죽는다." 하며 헤로인(Heroine) 마약 한 무더기를 보내 주었다. "나는 Overdose(마약과다복용 죽음)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패티는 결국 조지 해리슨 남편에게 돌아갔다. 그후 에릭 클랩튼은 3년 동안 활동을 안 했고, 헤로인 마약 중독자로서 거의 목숨을 끊을 뻔했지만, 음악의 구세주가 다시 살게 한 것이다.

    조지 해리슨은 이 그리스 비극과 같은 시나리오가 펼쳐지는 것을 보면서, 묵묵히 두 눈을 감고 참고만 있었다. 절대 폭력, 모략, 분노도 없이. 이유는 그가 그때 Ravi Shankar 라는 인도의 유명 시타리스트를 만나 인도 음악뿐 아니라, 인도의 평화스러운 힌두교 가르침을 받은 것이었다. "시끄러울 때는 더욱 더 조용히 있어라."

    Derek & the Dominos [Layla & Other Assorted Love Songs]


    조지의 첫 앨범 [All Things Must Pass]는 대히트를 했고, 비틀즈 이후 존 레논 다음으로 최고의 아티스트로 인정받았다.

    에릭 클랩튼은 이후 패티 보이드를 위해 만든 <Layla>와 <Wonderful Tonight>로 대히트를 했다. 하지만 이 삼각관계 이야기는 끝난 것이 아니다. 에릭이 마이아미 플로리다에서 자기 솔로 앨범 [461 Ocean Boulevard]를 녹음할 시기, 패티는 다시 에릭을 찾았다. "난 고독한 여자야. 당신이 필요해. 그리고 우리의 사랑이 진실이라는 걸 이젠 알았어요. 난 조지 해리슨을 떠나겠어요." 드디어 에릭 클랩튼이 자기의 절친한 친구인 조지 해리슨에게 접근해 말을 토했다. "난 당신의 부인을 사랑해!"

    조지는 이 타격으로 LSD 마약과 알콜 중독에 빠졌다. 또 다시 음악이란 구세주가 조지를 살려주었다.

    조지 해리슨


    조지와 패티는 결혼 11년 후 1977년에 정식 이혼했고, 에릭과 패티는 1979년에 결혼식을 올렸다. 조지는 결혼식에 초대장을 받았으나 참석하지는 않았고, 그후 리셉션에 가서 두 사람을 웃음으로 축하해주었다. 이 사건이 조지 해리슨의 여린 마음에 큰 충격과 지속되는 고통을 주었다. 이 복잡하고 애매한 사랑의 삼각관계가 조지 해리슨의 암의 원인 중에 하나로 보고 있다.

    나도 이러한 사랑의 환호와 고통을 안다. 결혼한 여자, 결혼한 남자 그리고 질투에 들끓는 회사 사장. 완전히 사랑의 용암 속에 다 같이 자살하는 행위이다. 오, 아름다운 여자여! 당신의 이름은 '고통'이로다!

    20002년 7월
    한대수

    조지와 패티의 행복했던 시절

    조지와 패티의 행복했던 시절

    조지와 패티의 행복했던 시절

    [A Hard Day's Night]에 출연한 패티 보이드 '조용한 비틀즈'라고 불리는 조지 해리슨은 2001년 11월 29일 목과 허파암으로 58세에 별세했다. 그의 유골은 인도 갠지스강에 뿌려졌다. - 그는 힌두교도자였다....
  9. Chet Baker 1952. Jerry Mulligan(왼쪽)과 함께.


    쳇 베이커 하면 첫 번째로 생각나는 것이 그의 목소리이다. 고요하고 무언가 갈망하는 그의 고독한 영혼의 소리이다. 애절하고 너무나 연약해서 꼭 안아 주고 싶은 그런 그의 목소리이다. 그리고 그의 트럼펫. 지나치게 빠르고 화려하진 않지만 항상 적절하고 전위적인 임프로비젼(improvision)은 귀를 아니 기우릴 수가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하게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그의 '마약중독'이다. 특히 헤로인(heroine) 중독에 빠져 살았고, 헤로인 중독으로 죽었다.

    1929년 12월 23일 Chesney Henry Baker, Jr.로서 오클라호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Chet Sr.는 컨트리뮤직 밴드의 벤조/기타리스트였고, 어머니 Vera는 가정주부였다. 음악가의 집안에서 가난에 벗어나지 못해 결국 아버지는 캘리포니아 로키드 비행기 공장에서 직공으로 일을 하게 된다.

    쳇이 11살 때 아버지가 트럼펫을 어느 전당포에서 싸구려로 구입해서 그에게 선사했다. 그 때부터 그는 트럼펫에 입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연습을 했다. 정식 교육이란 제대로 받지도 못했다. 중학교 음악 학습 빼고는. 악보도 제대로 읽지 못해 나중에 아티스트로 음반 녹음 과정에서도 프로듀서들은 그의 미비한 점을 감안해야 했다. 그러나 그의 귀로 한 번 들었다 하면 천재적으로 따라 연주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 즉, 그는 Natural Musician(태어난 음악인)이었다.

    트럼펫을 6개월 보유했을 때 학교 동료와 싸우다 돌에 이빨이 맞아 앞니 위가 부서졌다. 그리고 40살 되던 해에 동네 깡패들에게 폭행을 당해 앞니가 완전히 부셔져 버렸다. 그 때부터 틀니(denture)를 박을 수밖에 없었다. 즉, 쳇은 트럼펫을 불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 어려운 악기의 대가가 된 것이다.

    1958년 뉴욕에서. 워낙 미남이라서 재즈계의 제임스 딘(James Dean)이라고 불리었다.


    쳇 베이커의 인생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비극'이다. 16살 때 고등학교 졸업도 못한 채 권태에 못 이겨 육군에 자원입대 하여 독일 베를린 군악단에 배치되어 가입한다. 이 때쯤 재즈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고, 이 사운드에 매료된다. 2년 동안 군복무가 끝난 1948년에 그는 캘리포니아로 옮겨 재즈 밴드에서 멤버로 활약하기 시작한다. 여러 아마추어 밴드에서 활약하다 어느 날 찰리 파커(Charlie Parker) 밴드의 오디션을 통과해 이 유명한 흑인 색소폰 밴드의 트럼펫 연주자로 활약하기 시작한다. 파커가 말하기를 "서부에 흰디 트럼펫이 있는데 너희를 잡아먹을 거야!" 그 이후로 쳇의 명성은 더욱 높아지고 재즈계의 대가들, 즉 Jerry Mulligan, Russ Freeman, Stan Getz 등의 거물급 스타와 유럽과 미국을 투어하며 공연 내지 음반 녹음을 하게 된다.

    쳇의 여자 관계도 복잡하다. 20살 때 샬레인(Charlane)이라는 연상의 여인과 처음 결혼을 한다. 쳇이 말하기를 "그녀는 금발의 미녀였고, 나도 섹스를 좋아했고, 그녀도 섹스를 좋아했고, 그래서 결혼했어." 결국 결혼 생활이 1년도 못 넘겼다. 27살 때 할레마(Halema)라는 인도계 여자와 결혼/이혼, 30살 때 캐롤(Carol)과 결혼. 그의 인생의 골목길 사이에 또 다른 숫한 여인들과 동거생활과 이별로 이마의 주름살이 그려진다.

    22세의 야심찬 젊은 음악인의 모습.


    무엇보다 쳇 베이커 인생에서 음악만큼 중대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그의 마약에 대한 사랑이다. 그는 1954년 25살 때부터 마약을 습관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즉 헤로인을 chipping(혈관에 주사하는 것) 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코카인(cocaine)과 합성하여. 그는 이러한 방식의 칵테일 주사법을 제일 즐겼다. "나는 나의 모든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서 벗어나 하늘 위로 뜨는 구름 위에 앉아 웃고 있다."

    그의 중독성은 더욱 심해졌고, 나중에는 음악을 위해 마약을 하는지, 아니면 마약을 위해 음악을 하는지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그는 유럽 공연을 장기적으로 한 이유로 유럽에서는 헤로인을 더욱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파리나 런던, 이태리나 독일, 항상 공연 전후에 그는 유럽 도시의 뒷골목을 헤매며 마약을 구입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특히 그는 암스텔담에 자주 공연을 하며 머문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 곳은 전 서양 세계에서 가장 마약을 쉽게 구할 수 있는 도시이며, 마약법도 관대하다. 뿐만 아니라 재즈의 고향인 미국보다도 유럽인들의 재즈 열기는 더욱 환호적이었다.

    쳇의 수입은 말년에 대단했다. 1983년서부터 공연 수입이 월 4천달라에서 마지막 죽기 2년 동안엔 월 2만 5천달라를 유럽 공연에서 벌었다. 하지만 끝없는 마약의 필요성 때문에 항상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86년 암스텔담. 사고로 별세하기 2년 전. 마약중독이란 무서운 병이 얼굴에 새겨져 있다.


    쳇은 1988년 5월 13일 새벽 3시에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도시 암스텔담에 있는 싸구려 호텔의 3층에서 떨어져 머리 뒤 충격으로(타박상?) 죽었다. 쳇 베이커 인생의 마지막 행위는 스피드 볼(speed ball - 코카인과 헤로인 합성 주사). 호텔 방엔 59.90길더(약 30달러), 싸구려 라이터, 진주 목걸이, 시티즌 시계, Vincent Bach Stradivatius 트럼펫 그리고 그의 마약들. 자기가 가장 아끼는 자동차인 은빛의 알파 로미오(Alfa Romeo)는 호텔 근처에서 조용히 돌아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몸은 로스앤젤레스의 돌아가신 아버지 곁으로 옮겨졌다. 이것도 베이커 가족이 부담할 수 없어서 유명한 패션 사진작가 부루스 웨버(Bruce Weber)가 경비를 대고, 장례식도 치루어 주었다. 장례식은 쓸쓸했다. 2번째 부인 할레마, 세 번째 부인 캐롤과 세 아이들 그리고 소수의 친구 약 7명이 모였다. 팬들도 첫 아들 체스니(Chesney)도 오지 않았다.

    부인 캐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쳇은 음악으로 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의 마약중독 때문에 자기 자신과 주위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파괴했다. 15년 동안 한번도 그는 우리 자식들이나 나에게 경제적, 정신적인 도움을 준 적이 없다. 그의 죽음은 의례 당연하다."


    << 쳇 베이커 중요 사항 >>

    1929년 - 1988년 (향년 58세)

    - 1942년 : 트럼펫 독학.
    - 1952년 : Charlie Parker와 Jerry Mulligan 밴드 가입. 첫 음반 녹음이 대성공하다.
    - 1953년 : Chet Baker Quartet 결성. 재즈 잡지 다운비트에서 최우수 재즈 트럼펫상 수상. 노래 부르기 시작.
    - 1955년 : 유럽 투어 시작. 말년엔 유럽에서만 공연함.
    - 1956년부터 수 차례, 미국, 이태리 등등의 유럽 도시에서 마약 범죄로 형무소 생활을 함. 때로는 6개월, 때로는 1년 반.
    - 디스코그라피는 약 200장의 음반이 있음.


    << 중요 앨범 >>

    1952 : Gerry Mulligan / Paul Desmond
    1953 : Charlie Parker - The Bird You Never Heard
    1956 : The Best Of Chet Baker Sings
    1979 : No Problem
    1980 : Leaving
    1983 : Baker / Catherine / Rassinfosse
    1985 : Chet's Choice
    1987 : Chet Baker in Tokyo (<My Funny Valentine>이 죽여줌!)


    << 기타 >>

    * 가장 존경하는 음악가 : Miles Davis, Dizzy Gillespie
    * 가장 싫어하는 음악가 : Wynton Marsalis ("그는 테크닉만 가지고 장난하는 거지 진지함-영혼-이 없어!")

    * 권장 도서
    (1) Chet Baker - His Life & Music (J. De Valk / 1989)
    (2) Deep In A Dream - The Long Night Of Chet Baker (James Gavin / 2002)

    Chet Baker 1952. Jerry Mulligan(왼쪽)과 함께. 쳇 베이커 하면 첫 번째로 생각나는 것이 그의 목소리이다. 고요하고 무언가 갈망하는 그의 고독한 영혼의 소리이다. 애절하고 너무나 연약해서 꼭 안아 주고 싶...

  10. 뉴욕!
    세계에서 백만장자가 제일 많은 도시, 증권시장(Wall Street)의 세계본부, 부동산이 가장 비싼 지상의 수도(Capital Of The World).

    세계의 수도 뉴욕 - 지구를 들고 있는 아틀라스(Atlas), 록펠러센터.


    뉴욕!
    그리고 또 하나의 수식어가 있다. 뉴욕은 Homeless(거리의 노숙자)가 또한 가장 많은 도시이다. 맨하탄 중심가인 30번가에서 50번가 사이만 해도 약 5,000명, 전 뉴욕시를 따지면 약 3만 5천명이라 하며, 이들은 매일 늘고 있다. - 특히 9.11 사태 이후 많은 산업들이 정리해고 하는 이유도 크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뉴욕시는 20개 이상 되는 Homeless Shelter(노숙자 안식처)를 마련했으나, 대부분 노숙자들은 규율이 엄격하고 위험한 분위기 때문에 그냥 거리 모퉁이에서 혼자서 생존한다.

    "나는 돈이 필요해 - 술, 마약, 창녀를 얻기 위해 - 나는 솔직하니까"


    고개를 푹 숙이고 맨하탄의 화려한 거리 구석에서 낮에는 주로 잠만 자고, 저녁이 되면 쓰레기를 뒤지며 남은 음식, 필요한 물건을 줍는다. - 특히 음식점 앞의 쓰레기는 매우 양호한 (영양) 공급소이다. 먹다 남은 고기, 야채 또는 비교적 싱싱한 빵도 충분히 만족하게 먹을 수 있다. 몸을 씻기 위해선 고속버스 화장실 등에서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자정 때를 이용해 몸을 씻는다.

    비교적 옷차림도 깨끗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눈에선 고독병이 보인다.


    그러나 대부분 혼자서만 생활하기 때문에 고독병에 걸려 정신병자 초기 과정에 들어가 있다. 'Main Chance'(절호의 기회)라는 사회단체에서 관리로 일하는 James Burch에게 홈리스가 되는 가장 큰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Burch는 "첫째로, 이혼이 가장 큰 사유다. 남자일 경우 부당한 이혼법 때문에 대부분의 돈과 재산을 여자에게 빼앗긴다. 결과적으로 마음적 상처가 너무 크고, 살 의욕을 잃어버린다. 둘째로, 학대적인 부부관계, 특히 여자일 경우 남자의 지나친 구타 때문에 집을 나와보니 직장도 기술도 적당한 게 없어서 결국은 심적인 고통으로 인해서 나서게 된다. 셋째로, 마약, 알콜 중독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든 홈리스를 중독자로 취급하지만, 이것은 겨우 세 번째 이유밖에 안 된다."

    Burch는 계속 말한다. "비행기(Stealth 폭격기) 한 대에 수억 달라를 쓰지만, 우리는 연 2백만 달러만 있으면 홈리스가 필요한 저렴한 아파트, 의료 검사, 기술 재교육, 직장 안내 등등 큰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다. 홈리스도 인간이다. 단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운이 나빴다는 이유뿐이다."

    홈리스가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화려한 뉴욕거리 한복판에서...


    나는 뉴스를 통해 종종 듣는다. 시청 요원들이 변명하기를 "홈리스는 해결책이 없다. 자신들이 인간 사회에서 탈퇴하여 낙오자 생활을 선택한 것이니 아무리 돈을 써도 낭비이다. 결국 그들은 쓰레기를 뒤지며 마약과 알콜로 날을 채울 것이고, 구제할 수 없는 인간들이다."

    나는 매일 같이 늘어 나는 이 슬픈 인간들을 보고 더욱 마음이 아파진다. 하나님은 양떼보다 한 마리 길 잃은 양에게 더욱 사랑을 베풀라고 했다. 하지만 이것이 최근 10년간 뉴욕의 모습이고, 사람들은 무관심하게 지나간다.

    1999년 도쿄 신주쿠 지하철역. 일본 홈리스는 아예 상자로 방을 만들었다. 역시 일본인답다.


    3년 전 도쿄에서도 홈리스가 눈에 띄게 보이기 시작했다. 세계에서 가장 부자나라 일본에서 말이다. 깜짝 놀랐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극치로 발달된 사회의 결과물이라면 정말 슬프다. 똑 같은 한 인생, 똑 같은 아름다운 꿈을 가졌을 텐데, 인간이 쓰레기가 되다니?

    2002. 6. 5

    뉴욕! 세계에서 백만장자가 제일 많은 도시, 증권시장(Wall Street)의 세계본부, 부동산이 가장 비싼 지상의 수도(Capital Of The World). 세계의 수도 뉴욕 - 지구를 들고 있는 아틀라스(Atlas), 록펠러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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