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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가슴 웹진가슴/해외음악 연대기 9 POSTS


  1. 1. 60년대
    8회) 필청음반

    - '필청음반'이라는 명분 하에 선정된,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 반영된 음반 컬렉션

    박준흠 | 가슴

    {{{ 용례 보기 }}}
    ★★★ : 초강추 (오잇!) ★★ : 강추 (으흑!) : 추천 (아하!)
    ★★★ Big Brother & The Holding Company
    [Cheap Thrills](68)
    ★★★ Blind Faith
    [Blind Faith](69)
    ★★★ Cream
    [Wheels Of Fire](68)
    ★★★ The Doors
    [The Doors](67)
    ★★★ Jeff Beck
    [Truth](68)
    ★★★ Jimi Hendrix Experience
    [Electric Ladyland](68)
    ★★★ King Crimson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69)
    ★★★ Mike Bloomfield, Al Kooper, Steve Stills
    [Super Session](68)
    ★★★ Neil Young & Crazy Horse
    [Everybody Knows This Is Nowhere](69)
    ★★★ The Rolling Stones
    [Let It Bleed](69)
    ★★★ The Velvet Underground & Nico
    [The Velvet Underground & Nico](67)
    ★★ The Beatles
    [Abbey Road](69)
    ★★ The Bee Gees
    [Best Of Bee Gees](69)
    ★★ Bob Dylan
    [Highway 61 Revisited](65)
    ★★ Bob Dylan
    [John Wesley Harding](68)
    ★★ The Doors
    [Waiting For The Sun](68)
    ★★ Jimi Hendrix Experience
    [Axis : Bold As Love](67)
    ★★ John Mayall With Eric Clapton
    [Blues Breakers](66)
    ★★ Joni Mitchell
    [Clouds](69)
    ★★ Led Zeppelin
    [Led Zeppelin](69)
    ★★ Led Zeppelin
    [Led Zeppelin 2](69)
    ★★ Moody Blues
    [Days Of Future Passed](68)
    ★★ Simon & Garfunkel
    [Sound Of Silence](66)
    ★★ The Velvet Underground
    [The Velvet Underground](69)
    The Beatles
    [A Hard Day's Night](64)
    The Beatles
    [Sergeant Pepper's Lonely Heart Club Band](67)
    The Band
    [The Band](69)
    Blood, Sweat & Tears
    [Child Is Father To The Man](68)
    Bob Dylan
    [The Freewheel' Bob Dylan](63)
    Bob Dylan
    [Bringing It All Back Home](65)
    Buffalo Springfield
    [Buffalo Springfield Again](68)
    Crosby, Stills & Nash
    [Crosby, Stills & Nash](69)
    Donovan
    [Greatest Hits](69)
    Fairport Convention
    [Unhalfbricking](69)
    Ike & Tina Turner
    [River Deep Mountain High](66)
    Jefferson Airplane
    [Surrealistic Pillow](67)
    Joe Cocker
    [With A Little Help From My Friends](69)
    Leonard Cohen
    [The Songs Of Leonard Cohen](68)
    The Mamas & The Papas
    [If You Can Believe Your Eyes & Ears](66)
    Otis Redding
    [Otis Blue](65)
    Peter Green's Fleetwood Mac
    [Fleetwood Mac](68)
    The Paul Butterfield Blues Band
    [The Paul Butterfield Blues Band](65)
    ? The Rolling Stones
    [Aftermath](66)
    ? The Rolling Stones
    [Beggars Banquet](68)
    ? Simon & Garfunkel
    [Bookends](68)
    ? Sly & The Family Stone
    [Stand!](69)
    Them
    [Them](65)
    ? Van Morrison
    [Astral Weeks](68)
    ? Ost
    [Easy Rider](69)
    ? Ost
    [Woodstock](69)
    ? The Who
    [My Generation](65)

    [시대별 추천음반 가이드] [해외 음악 연대기]

    1. 60년대8회) 필청음반 - '필청음반'이라는 명분 하에 선정된,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 반영된 음반 컬렉션 박준흠 | 가슴 {{{ 용례 보기 }}} ★★★ : 초강추 (오잇!) ★★ : 강추 (으흑!) ★ : 추천 (아...
    ☆☆☆☆☆ | 해외음악 연대기
  2. 7회 : 기타 (60년대)

    - 편집인 | 1999/09/17 14:21

    7회 : 기타 (60년대)

    - 편집인 | 1999/09/17 14:21

    1. 60년대
    7회) 기타


    60년대 영미 대중음악의 큰 줄기는 밥 딜런으로 대표되는 반전 포크의 확대, 비틀즈로부터 촉발된 브리티쉬 인베이전 그리고 우드스탁으로 종결되는 플라워 파워와 사이키델릭 사운드였다. 그러나 당시 시선의 바깥에서는 전술한 사건들 못지 않은 평가를 후대에 얻게되는 움직임들이 있었다. 60년대를 마감하는 이번 회는 지엽적인 사건이지만 중요한 그리고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되었던 흐름들을 살펴본다.

    황정 | 가슴

    브리티쉬 하드 록의 탄생

    브리티쉬 인베이젼을 야기시킨 비틀즈와 롤링 스톤스의 뿌리는 리버풀의 항구를 통해 수입된 미국 남부 블루스였다. 지극히 흑인적인 회한을 담아낸 블루스는 60년대를 통틀어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70년대를 주도하게 되는 블루스 록을 낳았다. 60년대 중반 미국에서 시작된 블루스 리바이벌은 일렉기타가 밴드 전면에 부상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고 전형적인 4∼5인조 록밴드 구성을 완성시켰다. 이 무렵 등장한 지미 헨드릭스는 블루스를 기반으로 한 파격적인 기타 테크닉을 선보여 일렉기타의 가능성을 한층 넓혔다. 강한 피드백과 하울링까지도 표현의 수단으로 사용한 그는 바다 건너 영국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혁신적인 연주 기법들은 '세계 3대 기타리스트'로까지 불리며 하드 록 기타의 시초가 된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제프 벡(Jeff Beck), 지미 페이지(Jimmy Page)에 의해 완성되었다.

    70년대 딥 퍼플, 레드 제플린, 블랙 사바스, 씬 리지 등으로 대표되는 브리티쉬 하드록의 전통을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 3인의 기타리스트는 경쟁과 보완을 거듭하며 록 기타를 한 단계 진보시켰다. 63년 야드버즈(Yardbirds)에 가입, 열 아홉 살의 백인소년이 하는 연주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능숙한 블루스를 선보인 에릭 클랩튼은 '블루스 록'의 전형을 확립시킨 연주자로 평가된다. 기본적인 펜타토닉 스케일에 깊은 비브라토와 속주를 가미한 그의 연주는 [Wheels of Fire](크림), [Blind Faith](블라인드 페이스) 등 블루스 록의 명반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에릭 클랩튼이 떠난 야드버즈의 새 기타리스트 제프 벡은 테크닉과 연주형식에 있어 누구보다도 실험적이었다. 왜곡된 디스토션 음은 물론 뉴에이지 풍의 딜레이 기타 톤까지 다양한 사운드는 물론 아밍(Arming)을 이용한 혁신적인 연주기법들을 개발하기도 하였다. 그는 야드버즈 이후 밴드의 멤버로 머물지 않고 솔로의 길을 걸었지만 그의 연주 스타일은 후대 밴드들에게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클랩튼, 벡에 못지 않은 카리스마와 실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솔로의 길보다는 밴드활동에 치중하였던 지미 페이지는 야드 버즈 가입이전에 세션으로 명성을 날렸다. 안정된 리듬 기타와 불꽃같은 솔로연주를 동시에 보유하고 있었다. 로버트 플랜트 등과 결성한 레드 제플린에서 그는 'Whole Lotta Love', 'Rock & Roll'과 같은 하드록 역사에 길이 남을 리프가 담긴 곡들을 선보였다.

    이 3인의 기타리스트는 블루스 리바이벌로부터 출발하여 브리티쉬 하드 록의 기초를 만들었다. 기존의 블루스를 뛰어 넘는 파격적인 기교와 이펙터를 선보였던 이들로 인해 록기타는 디스토션과 속주의 세계로 접어든다. 딥 퍼플을 비롯한 70년대 수퍼그룹들은 물론 80년대 헤비 메틀 사운드에까지 이들의 영향은 지속되었다. 80년대 '서커스'라고까지 불릴만큼 기타가 형식과 테크닉에 관해 극단까지 추구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뉴욕 펑크의 개화

    플라워 무브먼트, 브리티쉬 인베이전 등의 시대 60년대에 상대적으로 저평가 되었던, 그러나 대중음악과 후대에 끼친 영향에서 결코 그 무게가 가볍지 않았던 사건은 벨벳 언더그라운드(Velvet Underground)의 등장이었다. '머리에 꽃을 달고' 서부로 향하던 당시의 물결과는 대조적인 흐름은 창조적인 예술가들의 도시 뉴욕의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시작되었다.

    50년대 비트닉 운동에 매료되었고 뉴욕의 자유로운 '예술가 혼'과 로큰롤을 동경했던 루 리드는 멀티 인스트루멘틀리스트 존 케일을 만나 희망을 현실로 옮길 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결성한다. 이들의 역사적인 데뷔는 클럽 맥스 캔자스 시티(Max Kansas City)에서 이루어진다(맥스 캔자스 시티는 CBGB와 함께 뉴욕 아방가르드 씬을 대표하던 클럽이다. 알렌 긴스버그 등 비트닉의 상징들과 앤디 워홀을 비롯한 팝아트의 선구자들 그리고 영화배우들까지 당시 창조적인 예술가들의 집합처였던 이곳은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비롯 뉴욕 달스, 블론디 등 70년대 상징적인 밴드들을 배출하였다).

    이 곳에서 앤디 워홀과의 역사적인 만남이 이뤄진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아방가르드 씬의 풍부한 실험정신과 자신들의 창조력을 바탕으로 파격적인 음악을 선보였다. 워홀이 자켓 디자인과 프로듀서를, 금발의 모델 니코가 보컬을 맡은 이들의 데뷔 앨범은 미니멀리즘에 입각한 연주와 갖가지 소음들의 사용, 거침없이 사회의 병리를 해부한 가사들로 반발과 숭배를 동시에 얻었다. 이들이 기존문화에 대한 반발의 의미로 '펑크(Punk)'라는 타이틀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들이 시도한 반항과 혁신의 실험들은 70년대 접어들며 본격적으로 일기 시작한 뉴욕 펑크의 출발점이 된 것은 물론 비슷한 시기에 데뷔해 70년대 글램록의 출발을 알린 데이빗 보위, 펑크 이상주의자 이기 팝 등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변방의 선지자들
    어느 시대도 마찬가지지만 60년대도 어떤 카테고리로도 묶기 힘든 다양한 흐름들이 존재했다. 아방가르드 록에서부터 신랄하고 기지 넘치는 가사로 '코미디 록(Comedy Rock)'이라는 장르까지 다양한 실험을 거듭한 프랭크 자파(Frank Zappa)는 어떤 장르로도 묶을 수 없는 음악을 시도했다. 스트라빈스키, 스톡하우젠 등의 현대 음악, 두왑, R&B, 블루스, 재즈 그리고 구체음악(40년대 말 프랑스에서 시작되었으며 악기의 음색을 무시한 채 생활속의 소음 등을 전자적인 조작을 통하여 구체화시킨 현대음악의 조류로 구상음악으로 불리기도 한다) 등을 록과 접목한 그의 스타일은 변방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주류에 수많은 자양분을 제공하였다(66년 발표된 데뷔 앨범 [Freak Out!]은 컨셉트 형식을 선보였는데 비틀즈는 이에 영감을 받아 [Sgt. Peppers...]앨범을 기획하였다고 한다).

    68년 독일에서 결성된 캔(Can)은 이듬해 데뷔앨범 [Monster Movie]를 발표하며 독일 크라우트 록(Kraut Rock)의 탄생을 알렸다. 핑크 플로이드, 킹 크림슨, 무디 블루스 등의 영국 진보 록그룹들이 록에 클래식의 형식을 도입하려는 시도에 몰두하였던 것과는 달리 캔은 신서사이저를 이용한 전자음의 조작, 컷 앤 페이스트(Cut & Paste)기법을 이용한 음원들의 꼴라쥬로 새로운 실험을 하였다. 70년대 들어 파우스트(Faust), 크라프트베르크(Kraftwerk) 등 독일 전자사운드의 효시가 된 캔은 카뱌레 볼테르(Cabaret Voltaire)를 비롯한 인더스트리얼의 태동에, 그리고 최근 가장 진보적인 음악장르로 평가받는 포스트 록(Post Rock : 토터즈, 스테레오 랩 등)진영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비틀즈의 진출로 브리티쉬 인베이전이 가시화되기 시작한 60년대 중반 미국 중부에서는 그에 자극을 받아 철저한 아마추어리즘을 표방하는 밴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바리언(Barbarians), 시드(Seeds), 헤드 헌터스(Head Hunters)등으로 대표되는 거라지(Garage) 밴드들은 이기 팝, 벨벳 언더그라운드 등 프로토 펑크의 '3-Chord'를 수용하며 직선적인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66년 데뷔 앨범을 발표한 바바리언 등 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밴드들이 단명한 거라지 록은 비록 국지적인 현상에 그치고 말았지만 그들이 주창한 DIY정신은 80년대 LA와 뉴욕을 중심으로 한 아메리칸 펑크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편 중세적인 풍모를 간직한 영국의 켄터베리에서도 주류에서 벗어난 실험이 있었다. 당시 켄터베리의 클럽밴드들은 재즈와 포크 그리고 실내악을 혼합한 형태의 음악을 선보였다. 이들 중 대표적인 그룹인 와일드 플라워(Wild Flower)는 63년 결성하여 6여년에 걸친 활동기간동안 비록 단 한 장의 앨범도 발표하지 않았지만 그 멤버들이 소프트 머쉰(Soft Machine)과 캐러번(Caravan)을 결성하면서 캔터베리를 대표하는 밴드로 기억된다. 이들은 70년대 진보 록 그룹들과 재즈 록 그룹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외에도 버트 바카락과 일명 '브릴 빌딩(뉴욕에 위치한 뮤직 비즈니스 센터로 닐 세다카, 상그리라스 등 팝, 록과 R&B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스타를 배출했다) 사운드'로 불리는 트래디셔널 팝의 융성, 밴 모리슨을 필두로 한 '미국포크에 대한 영국의 화답' 등 60년대는 곧 이어질 70년대의 풍성함을 예고하는 움직임들이 만개한 시대였다.

    60년대를 닫으며
    새 시대에 대한 희망으로 시작된 60년대는 청년문화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해였다. 케네디의 암살로 인한 개혁의 좌절, 보수세력의 득세, 베트남전 등 혼란의 사회상은 청년들에게 새로운 탈출구를 생각게 하였고 음악에 있어 그 변화는 무엇보다도 직접적으로 나타났다. 현실로의 도피 사이키델릭, 영국 노동계급 청년의 울분 모드 등 60년대를 주도한 대중음악 스타일은 파급력이나 후대에 미친 영향에서 이전과는 달랐다. 고출력 앰프를 이용한 록 페스티벌은 10만이 넘는 청중을 한 자리에 모을 수 있었고 이들의 모임은 그 몇십배에 달하는 청년들에게 어필하였다. 이를 통해 록은 청년들에게 취미가 아닌 이데올로기로까지 자리잡았다. 60년대는 록의 정치학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60년대 록의 정치성이 음악으로서의 퇴보를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60년대는 어떤 시기보다 활발하게 록의 진보를 위한 움직임이 있었다. 비틀즈, 밥 딜런, 지미 헨드릭스 등을 비롯한 수퍼스타들은 물론 지역의 밴드들까지 항상 창조적인 시도를 그치지 않았고, 그 시도들은 '록음악은 천박한 것'이라는 보수주의자들의 편견을 넘는 발전을 가져왔다. 70년대 초부터 시작된 '록의 르네상스'는 이러한 60년대의 시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60년대를 통해 록은 음악으로서의 진보와 사회에 대한 영향력의 확대라는 두 가지 명제를 모두 성취한 것이다. 화려했던 우드스탁의 3일간을 끝으로 희망의 시대는 끝났지만 그 성취는 70년대를 넘어 오늘날까지 곳곳에서 흔적으로 남아있다.

    1. 60년대7회) 기타 60년대 영미 대중음악의 큰 줄기는 밥 딜런으로 대표되는 반전 포크의 확대, 비틀즈로부터 촉발된 브리티쉬 인베이전 그리고 우드스탁으로 종결되는 플라워 파워와 사이키델릭 사운드였다. 그...
    ☆☆☆☆☆ | 해외음악 연대기
  3. 6회 : Woodstock Nation

    - 편집인 | 1999/09/17 14:16

    6회 : Woodstock Nation

    - 편집인 | 1999/09/17 14:16

    1. 60년대
    6회) Woodstock Nation


    애초에, '지상에서 가장 완벽했던 낙원' 우드스탁은 '이상(理想)'이었다. 히피와 사이키델리아가 자신들이 벌여놓은 거대한 일들이 단지 '자위행위'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을 때, 그들의 위세에 눌려있던 기성세대의 반격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을 때, 무엇보다도 이를 이용한 페스티벌이 굉장한 돈벌이가 된다는 것이 증명됐을 때 그 좌절은 예고되었다. 이 사흘간의 '사랑과 평화'의 축제는 탄생부터 그 쇠락을 짐작하고 있었고 뒤따라올 보수의 반동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곧 꺼질 불꽃처럼 너무나 강렬했다.

    황정 | 가슴

    낙원으로 향한 첫걸음
    플라워 무브먼트(Flower Movement)가 절정에 달하던 67년 여름 히피들의 메카 샌프란시스코는 각지에서 몰려드는 히피들의 발걸음으로 분주했다. 인근 몬트레이 페어그라운드(Monterey Fareground)에서 열릴 몬트레이 인터내셔널 팝 페스티벌(Monterey International Pop Festival)에 참가하기 위한 행렬이었다. 순수한 비영리적인 목적으로 기획된 이 행사에는 뮤지션 뿐만 아니라 데니스 호퍼, 앤디 워홀 등 당시 영화, 미술 등 각계에서 청년문화를 선도하던 이들의 지지를 얻었다. 6월 15일부터 사흘간 열린 페스티벌에는 당초 예상보다 3배가 넘는 5만의 인파들이 몰려들었고 에릭 버든, 사이먼 앤 가펑클, 캔드 히트,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 일렉트릭 플랙, 제니스 조플린, 컨트리 조 앤 더 피쉬, 제퍼슨 에어플레인, 버즈, 그레이트 풀 데드, 후 그리고 지미 헨드릭스 등 사이키델릭 사운드의 핵심들이 총출연했으며 당시로는 엄청난 액수인 45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물질보다는 정신'을 중요시하는 히피들을 이용한 사업이 막대한 '물질적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음을 여실히 증명한 것이다.

    몬트레이 이후 미 서부의 여름은 페스티벌의 연속이었다. 68년 지미 헨드릭스가 참가한 워번 페스티벌(Woburn Music Festival)과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밀워키 페스티벌(Milwaukee lakefront music festival) 등 크고 작은 페스티벌이 각지에서 젊은이들을 불러모았다. 모든 것이 다 이익을 낸 것은 아니었지만 수만명의 젊은이들을 한데 모을 수 있는 페스티벌은 투자가와 공연 기획자들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25세의 젊은 나이로 캐피탈 레코드의 중역까지 지낸 이력을 가진 아티 콘필드(Artie Confield)와 4만을 불러모은 마이애미 팝 페스티벌을 성공적으로 치룬 23세의 마이클 랭(Michael Lang)은 이점에 주목하여 사상최대의 축제를 구상하게 된다. 이후 69년 2월 재정적인 후원자 존 로버츠(John Roberts)와 조엘 로슨먼(Joel Rosenman)과 만나 이들은 우드스탁 벤처 주식회사(Woodstock Ventures Inc.)를 설립하여 행사명을 'Woodstock Music & Art Fair'로 정하고 이를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들은 자선에 초기 목적을 둔 몬트레이와는 달리 철저히 상업적인 행사로 우드스탁을 기획하였다. Village Voice, Rolling Stones 등의 전문지는 물론 New York Times에도 적극적인 홍보를 하였고 지역 라디오 방송에는 쉴새없이 페스티벌 안내가 나왔다. 제퍼슨 에어플레인, CCR, 후 등 뮤지션들에게는 평소의 2배에 달하는 개런티(평소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공연 1회당 출연료는 6,000달러 정도였으나 이들은 우드스탁과 12,000달러에 계약했다)를 지불했고 5만 이상을 위한 사운드 시스템이 전무했던 당시에 10만이 들을 수 있는 출력을 내기 위해 장비에도 막대한 돈을 투자했다. 그 결과 같은 해 7월이 되자 뉴욕 근교의 화이트 레이크에 휘치한 맥스 야스거 농장에는 사상 최대 규모의 무대와 공연설비, 화장실과 세면장, 매점 등의 부대시설이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한편 출연진에는 그레이트풀 데드를 비롯한 당대 샌프란시스코 사운드의 수퍼스타들이 포진했으며 조운 바에즈, 제니스 조플린 그리고 후 등이 속속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몬트레이에서 최고의 주목을 받았던 지미 헨드릭스가 계약을 함으로서 포크, 록, 블루스 등의 장르와 영국, 미국의 지역을 총망라한 수퍼스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바야흐로 전 미국은 다가올 '나흘간의 낙원'에 모든 시각이 쏠려있었다. 젊은이들 사이에 페스티벌에 대한 관심은 7월 20일 달에 첫발을 디딘 닐 암스트롱에 대한 것보다 높을 정도였다.

    '꽃의 낙원'의 시작
    8월 15일 캠핑장으로 향하는 버스 행렬은 공연이 오후 4시로 계획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침부터 길게 늘어섰다. 행사장으로 향하는 길은 거대한 주차장으로 변했고 형형색색의 싸이키델릭 페인팅으로 장식한 버스의 지붕에는 풍선과 꽃을 든 히피들이 자리하여 도로는 거대한 꽃밭으로 변해있었다. 이들이 입장을 시작했을 때 이미 통제는 불가능했다. 더구나 기부금을 노린 국제청년당(International Youth Party)의 이피(Yippie) 들이 뿌린 삐라는 '입장료를 내지 말자'라는 문구로 입장권을 구하지 못한 이들을 선동했고 야영장으로 진입을 시도한 무리들에 의해 크고 작은 소요가 일어나고 있었다.

    오후 4시로 예정된 공연의 시작은 한시간이 넘어서야 시작됐다. 막히는 교통으로 출연진들이 미처 무대로 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리 도착했던 리치 헤븐스는 시작을 알리는 영예를 누렸다. 다음 순서가 도착하길 기다리며 세시간 넘게 계속된 이들의 공연에 관중들은 서서히 달아올랐다. 이윽고 헬기를 타고 온 첫 날의 출연진들은 당시 신예로 주목받던 멜라니 사프카를 비롯 존 B 세바스찬, 인크레더블 스트링 밴드, 알로 거스리 그리고 포크의 여왕 조운 바에즈까지 당대 최고의 포크 스타들이었다. 당연하게도 이날은 반전과 정부에 대한 비판이 신랄했다. 당시 보스톤의 인구와 맞먹는 숫자의 관객들은 조운 바에즈의 'We Will Overcome'을 함께 합창했고 공연 중반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악천후 속에서도 불을 밝히며 반전을 소리높였다.

    둘째날은 록의 밤이었다. 주최측은 가장 에너지가 넘칠 이날 혹시 벌어질지도 모르는 소요를 위해 무대와 관중의 사이를 띄어놓는 등 철저히 준비를 했다. 산타나, 캔드 히트 등에 이어 무대에 오른 제니스 조플린은 격렬하게 '사랑'을 토해냈고 관중들은 5센티미터 깊이의 진흙창 속에서 맘껏 뒹굴며 자유를 즐겼다.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의 무대는 가장 에너지가 넘쳤고 그레이트풀 데드도 사상최대의 관중을 사운드의 환각속으로 몰아넣었다. 신작 [Tommy]를 발표한 후는 장엄한 록 오페라로 관중을 매료시켰다. 그리고 동이 틀무렵 그레이스 슬릭이 "한알의 알약은 너를 크게 만들수도, 작게 만들수도 있지... 'White Rabbit'"라고 읇조리며 등장한 제퍼슨 에어플레인은 관객을 환각이 지배하는 '이상한 나라(Wonder Land)'로 초대했다.

    우드스탁을 통해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신인 조 카커가 문을 연 세째날은 자니 윈터, 텐 이어스 애프터, 밴드, 블러드 스웻 앤 티어스 등 장르를 망라한 무대였다. 그리고 이미 신화로 떠오른 지미 헨드릭스가 헤드라이너를 맡았다. 명성에 있어서는 조금도 뒤지지 않을 밴드들이 팽팽히 겨뤘던 무대였지만 공연의 대미를 장식할 지미 헨드릭스는 일거에 모든 이를 압도했다. 미국 국가를 사이키델릭 블루스로 바꾸어 '위대한 미국'의 치부를 맘껏 조롱했던 지미 헨드릭스의 연주는 '사랑과 평화의 3일 국가'의 대미를 알렸다.

    낙원없는 이상.... 현실로의 복귀
    우드스탁이 남긴 것은 '사랑과 평화의 3일'에 대한 추억만이 아니었다. 숭고한 이상에도 불구하고 갖가지 이기적인 행태들과 폭력 그리고 욕심이 존재하고 있었다. 독점업체 'Foods of Love'에 맡겨진 음식물 배급은 열악했고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군중들은 식료품 트럭과 매점을 습격하였다. 이들앞에서는 조운 바에즈가 노래하는 굳센 의지 'We Will Overcome'도 소용없었다.

    농장 주변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광란의 현장에서 벗어날 수도 없어 집안에서 3일을 불안에 떨어야 했다. 치안 유지를 맡은 일부 호그농장 직원들은 위협과 폭력을 일삼았다. 일부 뮤지션들이 공연료 선불문제로 무대를 거부하였고 무대 시스템은 악천후와 엉성한 대비로 엉망이었다. 약물 남용에 대한 후유증도 심했다. 주 보건담당부서의 보고서에 의하면 797건의 약물 남용 사례와 5,162건의 의료행위가 이뤄졌다. 일대는 수많은 사람이 남긴 오물로 오염되었다. 주최측은 일대를 청소하는 데만 10만달러의 경비를 써야했다.

    상업적으로도 그리 성공하지 못하였다. 우드스탁 벤처 주식회사는 티켓 판매로 1백십만달러를 벌었으나 뮤지션 수송을 위한 군용 헬기 대여 등 초과비용 발생으로 2백만달러에 달하는 진행비를 썼고 결국 1백3십만달러의 채무를 떠 안게 됐다. 영화, TV를 통한 수입을 제외하고도 막대한 빚이 남았다.

    '사랑과 평화'라는 슬로건 아래 50만명에 달하는 젊은이들이 모여 펼친 3일의 천국은 '풍요의 시대'를 거친 히피문화의 산물이었으나 결국 정치적 지향점이 모호한 히피 사상의 한계를 드러냈다. 더 이상 공동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은 히피들은 좌절했다. 플라워 무브먼트는 그 생명력을 점차 잃기 시작했다.

    이상(理想)과 환상(幻想)의 종말
    히피 시대의 종언을 고한 것은 '알타몬트의 비극'이었다. 우드스탁이 끝난지 4개월 뒤 롤링 스톤즈가 무료로 기획한 알타몬트 페스티벌은 폭력과 무계획으로 일관된 우드스탁의 사생아였다. 추위와 오물 그리고 약물로 얼룩진 공연장 곳곳엔 경비를 맡았던 헬스 엔젤스들이 무자비한 곤봉을 휘둘렀고 급기야는 이들의 손에 메레디스 헌터라는 흑인 청년이 살해되었다. 단지 백인 여자친구와 있었다는 이유로 맞아죽은 이 청년의 죽음은 페스티벌에 대한 존폐 자체를 떠나 히피 문화에 대한 사회의 강한 거부를 불러일으켰다. 주정부들은 속속 페스티벌을 금지시켰으며 정부는 LSD에 대한 금지법안과 처벌을 강화했다. 이미 대항할 힘도 명분도 잃은 히피들은 안락한 가정으로 돌아가거나 소수의 공동체로 가라앉았다. 60년대 청년문화의 상징이었던 이들은 자신들이 만든 천국으로 인해 결국 파멸을 맞게 되었다.

    1. 60년대6회) Woodstock Nation 애초에, '지상에서 가장 완벽했던 낙원' 우드스탁은 '이상(理想)'이었다. 히피와 사이키델리아가 자신들이 벌여놓은 거대한 일들이 단지 '자위행위'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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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1. 60년대
    5회) San Francisco Sound / Flower Movement : part 2


    이번 호에서는 50년대의 블랙 마운틴 컬리지에서 파생되어, 60년대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에서 융성했던 비트 문학과 그 시인들, 60년대의 대표적인 밴드들, 90년대에 이어지는 사이키델릭의 요소들을 다루기로 했었다. 그러나 60년대의 시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이번에 누락되었다. 적지 않은 그리고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문학적 분위기를 짧게 다루기에 지면(화면?)의 제약도 제약이지만 무엇보다도 본인의 게으름이 우선된 결과라 아주 짧게! 사과 드린다.

    또한 60년대의 밴드에 대해서도 이번 호에서는 샌란시스코에 기반했던 대표적인 팀만을 소개하기로 한다. 이번에 누락된 부분들은 다음 호와 이어질 60년대의 이야기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대신 90년대로 이어지는 사이키델릭의 요소들과 크고 작은 변화들을 뮤지션들과 음반을 중심으로 짚어보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지난번에 개괄적으로 소개했던 사이키델릭 사운드, 그리고 시대적인 분위기 외에 음악 씬 전반을 아우르고자 했다.


    한수영 | 가슴

    샌프란시스코의 대표적 밴드들


    사실상 샌프란시스코만의 사운드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활발한 모양을 띠고 떠들썩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긴 했지만 미국 전역에서 사이키델릭을 받아들인 밴드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오히려 샌프란시스코를 규정지을 수 있는 것은 이곳을 중심으로 발생하고 형성되었던 반문화의 분위기와 거기서 발생한 음악 산업과 문화적 행위들일 것이다. 그러므로 샌프란시스코 사운드라는 말을 여기서는 지역적인 사운드의 차별이라기보다는 단순한 지역적인 구분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공동체적인 모습이 다분하던 당시의 특성에 따른 지역적인 구분일 수도 있다라는 것이다. 굳이 찾아내자면 소소한 공통점으로 이들을 묶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소심한 작업은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단지 사이키델릭 사운드가 가장 융성했던 지역으로서 샌프란시스코 씬을 대표할 수 있는, 아니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60년대 음악 씬 전체를 대표할 자격을 가지는 아주 유명한 3팀에 대해서 간략하게 얘기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Janis Joplin (Big Brother And The Holding Company)
    1960년대 최초의, 그리고 당대에 가장 특출했던, 격렬하고 억제되지 않았던 스테이지 매너로 관객들을 최면에 걸리게 했던 백인 여성 블루스 보컬리스트로서, 록의 역사에서 재니스 조플린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단지 보컬로서의 그녀의 역량 때문만은 아니다. '걸 싱어'로서 공연 무대의 얼굴 간판 역할이 주를 이루고 있던 당시에, 무대 공연자로서 그녀의 강렬한 연출은 이전에 어느 공연에서도, 누구도 보여주지 못하던 것이었다.

    최면을 거는 듯 관객을 몰아가는 거친 목소리와 감정이 충만한 솔직하고 자제하지 않은 그녀의 무대 연출은 백인 보컬에게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도, 바라지도 못하던 것을 이룬 여성이 바로 재니스 조플린이다. 젊은 나이에 약물과용으로 사망한 그녀의 거칠었던 삶에 대한 얘기는 'The Rose'라는 영화로도 제작되었고, 1995년 그녀는 록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The Jefferson Airplane
    제퍼슨 스타쉽과 스타쉽이라는 이름으로 80년대를 관통하며 90년대에도 활동을 꾸준히 이어왔던 밴드. 그 뿌리가 바로 제퍼슨 에어플레인이다. 제퍼슨 에어플레인은 그들의 날카롭고 신랄한 정치적 가사와 하모니로 대표되는 사이키델릭 록 밴드로 그들의 신랄한 사이키델릭 성향은 [Surrealistic Pillow]라는 앨범의 타이틀과 'White Rabbit'같은 환각적인 영향이 드러난 곡 제목에서부터 나타났다.

    이들은 그들의 정치적인 행동자세로 인해 1960년대 반문화의 중요한 기수 중 하나였다. 그러나 1970년대와 1980년대를 지나면서 계속적인 멤버의 변화와 팀명의 변화와 함께 메인 스트림적인 요소를 받아들이며, 방향을 전환하며 차트에 진입하기도 했다. 처음 1960년대 중반, 포크 뮤지션들로 구성되었던 밴드에 1966년, 날카로운 목소리의 모델이었던 그레이스 슬릭과 무겁고 나직한 리듬을 쏟아내는 베이시스트 잭 캐서디와 드러머 스펜서 드라이덴이 들어오면서 제퍼슨 에어플레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이들은 처음으로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한 샌프란시스코의 밴드가 됐다.

    지금까지 끊이지 않는 활동을 하고는 있지만, 비록 상업적인 성공은 거두었다 하더라도, 결코 그들이 행동방식을 바꾸기 이전에 누리던 명성을 되찾지는 못했다. 1996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

    The Grateful Dead
    1960년 중반 샌프란시스코의 즉흥적인 사이키델릭 록 음악의 화신! 그레이트풀 데드는 실질적인 라디오 히트곡 하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록의 역사에서 가장 성공한 투어 밴드 중의 하나다. 일렉트릭 사운드의 실험과 재즈적인 요소들을 블루그래스와 포크에 융합한 음악으로 그레이트풀 데드는 1967년, 히피 베이비 부머들을 끌어모으던 사랑의 여름 동안에 샌프란시스코의 '자유 방임주의' 적인 라이브를 보여준 가장 특별한 밴드였다.

    앨범을 발표하기 전부터, 이미 다이하드 팬들의 지지로 언더그라운드에서 팬들의 네트워크를 만들어내며 그 안에 확고하게 자리잡았고, 1960년 후반까지 이들의 공연에는 그들을 따라 다니는 대규모의 팬들이 함께 했다. 데드헤즈(The Deadheads)로 불리는 이 무리들은 당시의 반문화를 축약해 놓은 하나의 형태였다. 밴드가 무대에서 몇 시간 동안 끊이지 않는 즉흥 연주를 하는 동안 이들은 수많은 스카프를 감싸고, 히피 풍의 옷을 입고서 누구도 의식하지 않으며 춤을 추어댔다. 단지 공연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그레이트풀 데드와 함께 공연을 다닌다는 것이 더 어울릴 법한, 이러한 데드헤즈들의 성실한 충절은 밴드를 백만장자로 성공하게 만들었고, 1995년 밴드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였던 제리 가르샤의 죽음으로 팀이 해체될 때까지 그레이트풀 데드가 라이브와 음악을 계속 할 수 있도록 만든 힘이었다.

    어떤 장르도, 어떤 밴드도 유동적이면서도 음악에 빠져들어 이루어지는 상호교감, 무아경의 분위기, 본능적인 충동에 대한 자극에 있어서 전성기의 그레이트풀 데드에 견줄 수 없다고 한다. '그레이트풀 데드의 공연과 같은 것은 어느 곳에도 없다'라는 데드헤즈들의 말은 그만큼 사실이다. 그레이트풀 데드는 누가 모방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원조이고 뿌리일 수 있는 미국 음악의 새로운 경지를 만들어냈다. 이들도 1994년 어김없이 로큰롤 명예의 전당의 징집 명령에 성실히 응했다!

    'Psychedelia' Continues...
    1990년대... 테크노와 일렉트릭 사운드 그리고 애시드 록
    1. 60년대5회) San Francisco Sound / Flower Movement : part 2 이번 호에서는 50년대의 블랙 마운틴 컬리지에서 파생되어, 60년대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에서 융성했던 비트 문학과 그 시인들, 60년대의 대표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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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1. 60년대
    4회) San Francisco Sound / Flower Movement : part 1


    60년대 성공적으로 미국 상륙을 기록하며 잇따른 영국 밴드들의 미국 침공을 성공시킨 비틀즈는 이제 아이돌 스타의 자리에서 한걸음 올라서, 아니 자신들의 내면으로 한발짝 들어서며 랄랄라∼ 흥겨운 로큰롤에서 벗어나 진지하고도 몽환적인 사운드를 담은 음반을 작업하게 된다. 비틀즈의 영향으로 일렉트릭 기타를 손에 잡은 밥 딜런은 그의 가사에 이를 도입하며 난해하고 몽상적인 노래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작은 미 서부의 샌프란시스코였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의 시대상이 그대로 투영된 하나의 환각적이고 몽상적인 애시드 문화로 발전한다. LSD라는 약물이 대중에게 알려졌으며, 히피라는 새로운 단어가 나오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들이 창궐했던 이 시기는 정치 사회적으로 심한 격동의 시기였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많은 일들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결코 음악만으로 얘기하기에 너무나 벅찬, 그러나 음악이 그 모든 것을 대변해주는 시기가 60년대 중반, 그리고 후반이었다.

    한수영


    전쟁 이야기가 일상이었던 나날들

    그치지 않고 점차 확대되어가고 있던 베트남에서의 전쟁은 60년대의 많은 사회 저항자들을 만들어낸 발화 요인이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었을 당시, 베트남에는 최소한 만오천 명의 미국 젊은이들이 파병되어 있었다. 린든 존슨 대통령 하에서 그 숫자는 점점 더 불어났고, 1966년까지 무려 50만명의 젊은이들의 베트남 전쟁을 위해 전장에서 살고 있었다. 미디어를 통해 베트남에서 점점 늘어가는 섬뜩한 일들이 미국의 시민들에게 전해지고 있었고, TV는 미국의 잔인하고 냉혹한 폭격 행진으로 인한 죽음과 파괴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매일 밤 뉴스에서는 늘어가는 전사자들의 숫자가 발표됐고, 문학과 정치계의 많은 사람들이 베트남 전쟁을 끌어가고 있는 미국 정부에 대해 반감을 외쳐대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회 상황 속에서 미국은 길어지는 전쟁 속에서 확신했던 결과를 이루지 못했다. 1968년 1월 30일 북쪽의 베트남 군들이 사이공을 침략했고, 새벽에 대담하게 미국 대사관을 기습 공격했다. 1969년 신문들은 미국이 '마이라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600명을 죽인 대량학살에 대한 기사를 실었고, 곳곳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늘어만 갔다. 그제서야 미국 정부는 더 이상의 전쟁이 어렵다는 것을 인정했다.

    나와 너의 평등과 화합을 원하는...

    베트남 전쟁과 더불어 시민의 권리를 찾기 위한 움직임은 60년대 또 하나의 커다란 사회적 저항을 일으킨 촉매였다. 'Civil War' 이후로 미국 내에서는 불평등한 인종 차별을 없애고 소수 민족에게도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많은 단체들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들의 움직임은 아니 인종차별 철폐에 대한 여론의 확산은 너무나 힘들고도 속도감이 붙지 않는 느리고도 고통스러운 행보였다.

    이전 몇백년 간의 노력은 60년대까지도 변화를 위해 필요한 힘을 조금도 얻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60년대가 될 때까지 평화적 노선을 따르던 NAACP, CORE, 마틴 루터 킹 목사의 SCLC와 같은 그룹들은 여론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었으며, 또 다른 그룹들 Black Panthers, the Nation of Islam, Black Nationalist Movement 들은 인종간의 분리를 외치며 보복을 위한 폭력을 주창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수많은 행진, 집회, 파업, 폭동, 경찰과의 폭력적인 대립은 피할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마틴 루터 킹과 말콤 X와 같은 전국적인 파워를 가진 지도자들은 암살되었고, 백인들로만 구성된 배심원단은 아프로 아메리칸들에 대해 저질러지는 백인들의 범죄들을 묵과하며 이들이 주창하는 정의에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60년대 초반동안 레스토랑, 호텔, 나이트클럽, 학교에서조차도 인종차별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소수 민족에 대한 교육과 직업의 기회들은 대다수의 백인들이 누리고 있는 것에서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었다. 소수 민족들로 구성된 아프로 아메리칸 사회는 백인 집단의 한 귀퉁이에 간신히 기대있었고, 모두가 똑같은 인간 평등주의를 이야기하던 히피 무브먼트의 정신 속에서 조금이나마 자신들의 정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불가해한 현상, 히피...
    사랑의 종족, 플라워 피플이라고 불리던 히피. 60년대에 등장한 신 종족.



    도대체 히피는 어떤 사람들이고, 그들이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 모든 것은 매우 빠르게 생겨났고, 갑자기 확산되었다. 젊은 히피 남성들은 긴 머리를 하고, 수염을 길렀다. 젊은 히피 여성들은 사이키델릭한 색깔들로 물들인 촌스러운 스타일의 옷을 입었다. 히피들은 대부분 지저분해 보였고, 이들 속에는 항상 LSD가 있었다. 약물에 취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들은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무례한 태도를 보였고, 기존의 제도권 사회를 경멸했다. 이들은 대학을 그만두고 록 밴드를 시작했고,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며 생활했으며, 이 공동체는 너나할 것 없는 무소유의 개념을 따랐으며, 이것은 남녀간의 사랑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또한 지구상의 갈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떠돌아다니는 방랑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들은 기존의 사회에 있어서 극도로 불안한 존재들이었고, 그만큼 신비하고, 설명할 수 없는 불가해한 무리였다.

    이들에게 사이키델릭 음악은 모든 것이 융합되어 있는 공동체의 장이었다. 사이키델릭 공연장은 이들에게는 회합의 장소였고, 사랑의 장소였고, LSD를 위한 가장 완벽한 환경이기도 했다. 사회는 이들을 불안해했고, 시민들은 히피의 장례식을 치르기도 했다. 언론에서는 이러한 새로운 현상을 히피라고 불렀으며, 출판업계들은 설명할 수 없는 이들을 설명하기 위해 수많은 히피에 대한 책을 출판했다.

    60년대의 록음악
    당시의 록음악은 새롭게 나타난 히피들의 미학에 가장 가깝게 다가가 있고, 그것을 정의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화려하고 소용돌이치는 컬라풀하고 환각적인 그림을 그려주는 몽환적인 음악들은 사이키델릭이라고 이름지어졌다.

    밥 딜런은 사이키델릭의 대열에 편승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음악인 중의 한 명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포크 록에 초현실적인 이미지들을 결합한 의미심장한 가사의 노래들을 만들었는데, 의심할 여지없이 그러한 음악들은 당시의 많은 사이키델릭 밴드들로부터 영감에 기초한다.

    첫번째 사이키델릭 음악을 들려주기 시작한 곳은 가장 미국적인 밴드라고 불리워지는 그레이트풀 데드, 제퍼슨 에어플레인, 제니스 조플린이 함께 했던 빅 브라더 & 홀딩 컴퍼니 등이 활동하던 샌프란시스코였다.

    그러나 사이키델릭 사운드의 미학은 퍼그스 The Fugs와 벨벳 언더그라운드같은 뉴욕의 음악 그룹들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고, 슬라이 & 더 패밀리 스톤, 챔버 브라더스 등의 소울 그룹들도 그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영국의 비틀즈를 비롯 대부분의 팀들도 너나할 것 없이 자신들의 음악에 사이키델릭 사운드를 담았다.




    1960년대 : 사이키델릭 사운드로의 변화


    1967년 비틀즈는 그들의 작업 중 가장 환각제의 영향이 짙다고 평가받는 앨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의 마지막 작업을 하고 있었고, 같은 애비로드 스튜디오의 한켠에서 당시 무명의 신참 밴드였던 핑크 플로이드가 최면성이 다분한 자신들의 데뷔 앨범 [The Piper at the Gates of Dawn]를 작업하고 있었다.

    루이스 캐롤, 블루스, 불협화음을 뒤섞은 실험과 함께, 핑크 플로이드는 영화, 문학, 비주얼 아트의 전면적인 변화 이전에 1960년대의 혁명, 미국과 영국의 록에서 나타난 대중 문화의 변화의 움직임을 예감시킨 열쇠중의 하나였다.

    사이키델릭 음악은 환각상태 혹은 마리화나, LSD와 같은 '의식의 확장'이라 불리던 약물들에 전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사운드적으로는 오버드라이브가 잔뜩 걸린 기타, 앰프를 통해 발생하는 피드백, 동양음악에서 영향받은 나른한 기타의 모티브들의 사용을 통해 환각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전달했다.

    이러한 사이키델릭에 대한 의식이 대중들에게 퍼진 것은 1960년도부터 자아발견을 위한 방법으로 LSD의 연구를 시작한 하버드 대학의 교수 티모시 리리(Timothy Leary) 등의 하위문화 전문가들에 의해서이다.

    60년대는 그 시대를 살았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의 변화였고, 발전과 도약의 의미로서의 돌파구였다. 여기에는 성의 해방과 약물의 연구가 함께 있었다. 60년대의 시대정신은 고루한 사상들의 마지막 붕괴를 의미했고, 그 씨앗들은 페미니즘으로 열매를 맺기도 했다.

    약물과 사이키델릭은 동일시되지 않았다. 약물은 사람을 마취시킬 뿐이지만 사이키델릭은 진실 혹은 실재를 보는 능력을 확장시킨다고 생각되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사이키델릭의 도구인 LSD는 음악과 결합했을 때 일종의 연금술적인 결과물을 생산해냈다. 많은 사이키델릭 밴드들은 자신들의 음악 속에서 일반적인 록의 리듬과 연주에 사이키델릭을 결합하여 새로운 감각을 얻었고 그것을 탐구하는 것이 당시의 사이키델릭 음악이었다.

    사이키델릭의 발화지 San Francisco
    1950년대에 미국 캘리포니아의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헝그리 I(Hungry I) -1958년 킹스턴 트리오(Kingston Trio)가 그들의 베스트 셀링이 된 라이브 앨범을 녹음했던- 같은 수많은 포크 클럽들이 생성되고 자라났다. 그러나 1966년까지 샌프란시스코는 미국 주류 음악 산업의 역류로 취급됐었다. 그러나 1960년 중반 이후 빌 그래험(Bill Graham) 같은 프로모터들이 제퍼슨 에어플레인, 그레이트풀 데드, 빅 브라더 & 홀딩 컴퍼니 등과 같은 이 지역의 필모어 어디토리움과 같은 커다란 '댄스' 공연장에서 공연하던 밴드들과 계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의 음악은 시대를 관통하는 하나의 아이콘이 된다.

    사이키델릭 음악이 음악 씬을 주도하면서 라이브 공연장 모습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기타리스트들은 7분이 넘어가는 화려하고 자기도취적인 솔로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조명이 라이브 쇼의 중요한 시각적 요소가 되었고, 토플리스 차림의 반라의 댄서들은 또 하나의 볼거리를 제공했다. 공연을 보러온 관객들 또한 더 이상 단순히 공연을 보는 차원을 넘어서 공연장의 멤버들과 맞먹는 화려하고 사이키델릭한 의상을 입고 있었으며, 마약은 공연장 어느 곳에나 있었다. 공연장은 밴드의 음악과 히피들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공동체 사회였다.

    이 음악들의 영향은 탐 도나휴(Tom Donahue) -처음으로 라디오에서 사이키델릭, 프로그레시브 음악을 소개- 와 같은 디스크 자키를 등장하게 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음악에 기반을 둔 '롤링스톤'지가 창간되었다.

    필모어 웨스트가 두드러지기 전까지 샌프란시스코는 세계적인 대중 음악의 중심지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새로 나타나는 지역 밴드들 대부분이 거대한 계약금을 받기 위해 대도시의 음반사들과 계약을 하면서, 그 힘과 기동력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 속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음반사는 오클랜드의 환타지(Fantasy) 레코드였다. 환타지 레코드는 마약의 영향권하에 있는 신참 밴드들의 음악이 아닌 재즈 음악을 다루는 레이블이었는데, 막판에는 오히려 더 많은 음반을 팔아치우며 살아남았다.

    다양한 사이키델릭 사운드의 탐구
    샌프란시스코의 그레이트풀 데드는 [The Grateful Dead], [Anthem of the Sun] 같은 앨범에서 컨트리, 록, 블루스, 애시드 R&B의 즉흥적인 믹스를 만들어냈다. 반면에 또 하나의 걸출했던 샌프란시스코의 밴드인, 그레이스 슬릭이 프론트를 장악했던 제퍼슨 에어플레인은 'White Rabbit'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환각적인 즐거움의 애시드 여행을 추구했다.

    LA에서 활동하던 다민족적 밴드 러브(LOVE)는 프론트 맨인 아서 리(Arthur Lee)의 독특한 시각에 영향받은 기묘하고, 자유로운 사운드의 몽환적인 록을 연주하며, 히피들의 너저분한 모습을 풍자하고 빈정대기도 했다. 또 다른 LA의 밴드 버즈는 재빠르게 또 다른 길을 찾아냈다. 이들이 만들어낸 사운드는 쟁그랑대는 사이키델릭 포크 사운드에 풍부한 보컬의 하모니와 오케스트라 사운드가 결합한 좀 더 대중적인 음악이었다. 밥 딜런의 'Mr. Tambourine Man'을 커버하기도 한 이들은 도어스의 무겁고 진지한, 강도 높은 사운드와 함께 가장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둔 밴드 중 하나이다.

    그러는 사이 텍사스, 오스틴의 밴드 13th 플로어 엘리베이터(13th Floor Elevators)는 사이키델릭 록의 어둡고 보다 정신병적인 광포한 사운드의 전형을 만들었는데, 환영을 쫓는 듯한 몽환적인 사운드에 재즈적인 어프로치로 블루스가 믹스된 록이 이들이 만들어낸 사운드이다. 이들은 LSD로 만들어진 신비주의와 초월의 단계를 그들이 만들어낸 음악에서 들려준다.

    웨스트 코스트의 이러한 '플라워 무브먼트' 라고 불리던 약간의 쾌활함이 살아있는 사이키델릭 사운드에 비해 이스트 코스트의 음악들은 보다 침착하고 냉정하며 가라앉아 있다.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주술과도 같은 반복적인 암송을 되뇌이며, 허무주의적인 사운드를 들려준다. 그리고 이들이 이스트 코스트 지역과 달랐던 차이는 이들이 노래한 것이 LSD가 아닌 헤로인(HEROIN)이라는 것에도 있다.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HEROIN'이라는 곡으로 직접적인 약물의 영향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들에 이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록 밴드들이 자신들의 음악속에 사이키델릭적인 요소들을 하나 둘 씩 섞은 음악을 내놓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서도 주문같은 'Tomorrow Never Knows'가 있는 [Revolver], LSD를 암시하는 가사의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가 있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같은 음반을 발표한 비틀즈는 계속해서 [Magical Mystery Tour]의 소용돌이치는 몽환적인 사운드의 'Strawberry Fields Forever', [White Album] 등을 발표하며 실험적인 요소들을 콜라주하듯 사용하며 사이키델릭 사운드를 이어갔다.

    비치 보이스 역시 자성적인 분위기의 사이키델릭적 요소를 받아들였으며, 야드 버즈의 기타리스트 제프 벡은 'Shapes of Things'에서 에코를 잔뜩 건 기타 사운드를 사용했으며, 롤링 스톤스조차도 'Paint It Black'같은 곡에서 사이키델릭의 영향을 드러냈다.

    이미 패션, 공연 포스터 -비주얼적인 사이키델릭의 전형은 당시 밴드들의 공연 포스터에서 가장 확연히 드러난다-, 라이브 공연에 거의 혁명에 가까운 변혁을 일으킨 사이키델릭 록은 60년대 이후에도 헤비 메탈, 프로그레시브/아트 록, 독일의 크라우트 록 등 수많은 장르에 영향을 미쳤다. 뿐만 아니라 사이키델릭 록의 영향은 훨씬 이후인 펑크에서 트립합, 애시드 하우스 뮤직에까지 그 영향을 드러내고 있다. 폴 매카트니가 얘기했듯이 사이키델리아는 '음악적 자유'를 의미한다. 굴곡되어 보이지만 내면에 가장 직설적인 사이키델릭 음악은 개인의 가장 순수한 자유에 기대있는 음악이다.

    정의되지 않는 의미로서의 Psychedelic

    이렇게 많은 밴드들 -특히 동시대의 밴드들의 음악에서는 그 어떤 것이든 사이키델렉의 영향이 드러나고 있다- 의 음악적 차이, 사운드의 차이에서 드러나듯, 로큰롤의 수많은 중에서 사이키델리아라는 것은 한번에 휘어잡기 가장 어려운 것 중의 하나이다. 사이키델릭 록은 어떤 법칙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며 계속 변화하고 새로운 것과 결합하며 장르에서 이제는 요소로 그 영향력을 흩뿌리고 있다. 록음악의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의 향수적인 평가가 적절치 않은 사이키델릭 록은 1967년 사랑의 여름동안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하지도 않았고, 60년대와 함께 끝나지도 않았다!

    # For More About Psychedelic
    사이키델릭이라는 단어는 1950년 초반의 정신활성의 약물을 연구하던 두명의 선구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캐나다의 알콜 중독 방지모임에서 메스칼린이라는 흥분제와 LSD를 연구하던 영국의 정신학자 험프리 오스몬드(Humphry Osmond)와 'Brave New World'(1932)와 'The Doors of Perception'(1954)을 쓴 영국의 작가 헉슬리(Huxley)가 그들이다.

    이 두 사람은 그들 자신이 연구하고, 얘기하고 있는 약물의 효과를 묘사할 단어를 찾아내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다. 그때 오스몬드가 그리스어인 'psyche'(영혼)와 'delein'(확실하게 하다), 'deloun'(드러내다)라는 단어들을 조합하여 'psychedelic'이란 단어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 단어를 다음과 같은 문장 속에서 사용했다. "지옥 혹은 날아오르는 천사와 같은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단지 적은 양의 사이키델릭을 취하라"

    처음에 과학자들은 공감각을 야기하거나, 음악의 소리를 색으로 표현하는, 혹은 색으로 음악을 듣는 경험을 만들어 주는데 탁월한 효과를 보이는 사이키델릭 약물의 효과들을 연구했다. 처음 LSD를 제조해낸 스위스의 화학자 앨버트 호프만은 환각상태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모든 소리는 그 자신이 구성하고 있는 형태와 색깔을 가지고 선명하게 변화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하버드 대학의 교수에서 애시드 전문가로 노선을 바꾼 티모시 리리는 환각 상태에서 이렇게 외쳤다. "모든 것이 음악적 연주로 바뀌고 있다"

    이러한 환각 물질의 사용자들 역시 음악이 약물의 효과를 오래 지속시키고, 그 경험을 극대화시키는 독특한 힘이 있다며 음악과 약물의 관계에 대해 인정했다. 50년대 후반, 6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합법적인 향정신성 약물들은 LA, 뉴욕, 런던의 문학가, 예술가, 정신병의사들 집단 안에서 사용됐고 발견되고 있었다.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이것을 가지고 음악적 실험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서프 밴드 갬블러스(Gamblers)가 가장 처음으로 자신들의 음반에서 LSD를 언급한 록 밴드였다. 그들은 1960년 나온 싱글 [Moon Dawg]의 비사이드 곡인 연주곡의 제목을 'LSD 25'라고 붙이며 처음으로 LSD를 언급한 밴드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웅웅대는 기타사운드와 소란한 재즈적인 피아노연주는 나중의 사이키델릭 록과의 연관성을 보이고 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1963년 뉴욕의 포크 뮤지션 피터 스탬펠(Peter Stampfel)의 곡 'Hesitation Blues'에서는 처음으로 'psychedelic'이 가사에 언급되었다.

    # For More About LSD (Lysergic Acid Diethylamide; "Acid")
    LSD는 일반적으로 화학적 합성에 의해 약품 제조소에서 조제되는 화학 물질로 그 기본적인 화학적 구조는 에르고친(맥각 麥角) 식물염기와 유사하다. LSD는 뇌 조직 속의 혈관 수축물질인 세로토닌의 반응을 방해한다. LSD는 일반적인 행동들로부터 일탈된 탈선 행위들을 유도하기도 하는데, 그 절차는 아직까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십중팔구는 세르토닌의 반응을 억제하는 데서 나오는 결과이다.

    이러한 효과로 LSD는 실재와 거의 비슷한 정신이상 상태를 만들어주는 실험의 도구로 성심리의 치료를 위해 사용되어 왔다. 어떤 근육에서도 쉽게 흡수되며, 심지어 귀의 근육으로도 흡수되는 LSD는 투약 후, 30분에서 60분 내에 작용한다. 그 효과는 대체로 8시간에서 10시간 정도 지속되는데, 경우에 따라 며칠동안 그 효과가 남아있기도 하다.

    두가지의 가장 두드러진 효과는 정신병적 반작용의 일시적인 재현과 지속이다. 치료를 위한 실험적 용도 이외의 LSD사용은 상당히 많은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LSD가 만들어내는 왜곡된 시간과 공간, 환각과 망상, 충동적인 행동은 환각 상태에 빠져있는 개인에게는 위험하고 때대로 사회적인 문제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합법적인 LSD의 사용은 1960년대 중반부터 현저하게 감소되었다. 미국내에서 제조, 소유, 판매, 운반, 사용 등 LSD에 대한 모든 것인 금지되었고, 1966년에는 공인된 제조업체들도 모두 철수했다. LSD를 이용한 연구 프로젝트들은 국가 설립 정신 건강 연구소에서 감독의 엄격한 통제하에 이루어지고 있다.

    암시장에서의 LSD의 거래는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했었지만, 코카인의 인기가 증가하면서, LSD의 사용은 1970년 후반부터 미국내에서는 급격하게 감소했다. 그러나 LSD와 다른 환각물질들에 대한 관심은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다시 일어났는데, 대부분 부유한 백인 젊은이들이 자신들만의 모임 -댄스 클럽, 올나이트로 이루어지는 레이브 파티 등- 에서의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 NEXT TIME :
    60년대의 시인들 & 중요 밴드들, 90년대에 이어진 사이키델릭의 모습들



    1. 60년대 4회) San Francisco Sound / Flower Movement : part 1 60년대 성공적으로 미국 상륙을 기록하며 잇따른 영국 밴드들의 미국 침공을 성공시킨 비틀즈는 이제 아이돌 스타의 자리에서 한걸음 올라서,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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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1. 60년대
    3회) British Invasion : part 2

    황정


    차갑고 냉소적인

    젊은이들의 초상 비틀즈와 롤링스톤스가 브리티쉬 인베이전의 정점을 이루었다면 그와는 다르게 진행된 갈래가 있었다. 사회에 대한 절제된 냉소와 개인적인 탐닉 그리고 실험정신으로 무장한 이른바 '모드 그룹(Mod Group)'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들의 라이브는 그 사운드의 탄탄함 못지 않게 볼거리가 많았다. 바로 패션잡지에서 튀어나온 듯한 의상과 악기파괴 등의 일탈적 행동은 수많은 추종자를 만들었다. 비록 인기는 비틀즈와 롤링스톤스 보다는 적었으나 그들의 행동과 옷차림 하나 하나는 젊은이들에게 교과서와 같은 것이었고 그들의 스타일을 따라하는 것은 젊은이들 사이에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다.

    롤링스톤스의 블루지함과는 다른 모드 그룹들의 음악은 새로운 자극이었다. 그들 중 가장 두각을 나타냈던 그룹은 후(Who)였다. 피터 타운젠트(g), 로저 달트리(v), 키스 문(d), 존 엔트위슬(b)의 4인조 후는 각자의 탄탄한 연주력 못지 않게 스타일에 민감하였다. 이들이 데뷔할 무렵 런던은 이미 비틀즈가 씨를 뿌려놓은 모드의 열풍이 휩쓸고 있었고 이들과 매니저는 그 점을 십분 활용하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음악에 모드의 사상을 집어넣었다. 모드 족들의 감성으로 작사하고 노래하는 이들에게 당시 또래의 유행에 민감하던 젊은이들은 광적으로 빠져들었다. 영국을 제패하고 미국으로 건너간 후는 맹목적으로 런던의 음악과 유행을 따르던 미국의 젊은이들마저 굴복시킨다. 차갑고 냉소적인 사운드는 비틀즈, 롤링스톤스와는 또 다른 감성으로 미국 청년들에게 각인된다.

    그러나 후의 성공이후 브리티쉬 인베이전은 그 위력을 잃고 만다. 불이 붙기 시작한 청년문화가 요구하는 스타일은 나날이 바뀌어갔고 또한 다양해졌다. 비틀즈로부터 촉발된 영국에 대한 동경심은 점점 식어가고 다양한 요구에 발맞추기에 대서양 너머는 너무 멀었다. 미국의 젊은이들은 새로운 것에 눈을 돌렸다. 60년대 말에 떠오르기 시작한 약물문화와 동양적인 것에 대한 호기심은 싸이키델릭이라는 또 하나의 스타일을 창조하게 된다.





    젊은이들을 위한 소비재와 새로운 라이프스타일
    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후 승전국의 이점을 톡톡히 누린 미국의 젊은이들은 '풍요의 시대'의 단 열매를 맘껏 맛보았고 그들의 소비지향적인 생활은 유럽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미 전쟁 중에 소비시장으로서 미국은 규모나 영향력에서 유럽을 압도하고 있었고 종전 후 그 기세는 더욱 거세졌다. 그 시장에서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한 소비계층은 '십대'들이었다. 전체적인 부의 상승과 함께 십대들은 사치품과 유행에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할 여유를 갖게 되었고 그에 따라 그들을 위한 새로운 시장전략과 라이프스타일이 요구되었다. 로큰롤은 이러한 소비시장의 필요에 의해 탄생하게 되었고 그와 관련된 많은 상품들이 고안되었다. 바야흐로 미국의 십대시장은 게걸스런 소비자들과 그의 욕구에 부응할 상품제조능력이 갖춰졌다. 이제는 유행을 선도한 스타일이 생겨 불꽃을 당기는 일만 남았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50년대 후반 이러한 미국의 청년문화는 리버풀 등의 항구를 통해 영국에 속속 수입되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그 첨병은 '로큰롤'이었다. 로큰롤의 전파와 함께 등장한 수퍼스타들은 십대들 사이에 스타일을 제공하였고 이전보다 훨씬 소비능력이 커진 이들은 헤어스타일, 의상, 트랜지스터 라디오, 하이파이 장치들에 막대한 돈을 쏟아 부었다. 십대들이 소비의 중심에 서게되고 그들을 위한 마케팅전략이 필요한 때가 온 것이다.

    막 지나온 전쟁과 앞으로 벌어질 유류 파동의 위험을 안고있던 60년대는 낙관주의와 함께 엄청난 에너지를 담고 있었다. 대중문화의 폭발과 함께 끊임없이 새로운 스타일이 요구되었으며 소비의 증대는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상품을 요구했다. 이런 현상은 십대들에게 더욱 심했다. 미국의 십대들은 항상 새로운 유행을 원했으며 그런 역할을 맡을 '스타'를 갈망했다. 비틀즈의 시기 적절한 미국 상륙은 십대들의 열망에 불을 당겼다. '풍요의 시대' 젊은이들에게 패션은 그들의 부모와는 달리 '유희의 대상'이었고 밝고 철없어 보이는 영국의 네 젊은이들은 이들의 기호에 너무도 적절했다. 그들의 헤어스타일, 옷차림은 그들의 레코드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빨리 또래사이에 번졌고 십대들의 소비욕구는 철저히 시장을 지배했다.

    비틀즈, 롤링스톤스, 후 등 서로 다른 음악 형태로 진행된 브리티쉬 인베이전이 미국에 끼친 영향은 당시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었던 상품들을 보면 더욱 자명해진다. 비틀즈와 후를 추종하던 모드족들에게 인기 있던 스쿠터는 47년 이탈리아의 유선형(Streamline)디자인이 도입된 베스파(Vespa)였다. 첫 등장이후 여러 형태로 개조된 이 스쿠터는 단지 탈 수단이 아닌 모드족에게 있어서는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아이콘이었다.

    또한 후가 입고 나와 일시에 유행으로 된 유니온 잭을 응용한 재킷과 가슴에 커다란 과녁이 새겨진 T-셔츠도 이들에겐 필수품이었다. 이는 영국에서 처음 발아된 팝디자인 운동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소비지향적이고 유희적인 십대들의 취향에 발맞춘 팝디자인 운동은 패션이나 가구 등 생활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우주적인 느낌과 유아적 취향은 의상은 물론 가구, 부엌소품에까지 적용되었다. 프랑스의 앙드레 쿠레쥬가 디자인한 은박 재킷이나 메리 퀀트의 미니 스커트는 그 수용자인 십대들이 전세대와 뚜렷하게 구별되게 하였다. 런던 카나비 스트리트에는 독창적인 디자이너들의 가게가 앞다퉈 문을 열었고 감각적이며 지속력이 약한 유행들을 쏟아내었다. 그중 메리 퀀트의 디자인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미니스커트, 꽃무늬 플란넬 셔츠 등 부모 세대의 옷차림에 대한 반항이 분명한 디자인은 카나비 스트리트를 비롯한 런던을 휩쓸었고 대서양 건너 미국까지 급속도로 전파된다.

    모드의 열풍이 잠잠해지던 60년대 말에는 환각문화와 동양적인 색채를 다룬 디자인으로 옮겨갔고 그 사이에는 비닐을 이용한 우주적인 느낌의 의상도 등장했다. 모드가 잠잠해지고 플라워 무브먼트가 형성될 당시까지도 영국의 디자인들은 상품으로 만들어져 대서양 반대편의 젊은이들에게 팔렸다. 브리티쉬 인베이전은 음악이 그 파생상품들을 생산해 산업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한 것이다.

    1. 60년대 3회) British Invasion : part 2 황정 차갑고 냉소적인 젊은이들의 초상 비틀즈와 롤링스톤스가 브리티쉬 인베이전의 정점을 이루었다면 그와는 다르게 진행된 갈래가 있었다. 사회에 대한 절제된 냉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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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1. 60년대
    2회) British Invasion : part 1

    1964년 1월 13일. 영국 리버풀 출신의 4인조 비틀즈(Beatles)의 'I Want To Hold Your Hand'가 US차트를 점령했을 때도 섣부른 예상은 금물이었다. 즉 네 명의 영국억양의 젊은이들이 불과 두 달도 되기 전 벌어진 케네디의 암살과 함께 꺼져버린 미국 젊은이의 가슴에 새로운 불을 당기리라고는 누구도 단언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뉴욕 케네디 공항에 도착한 2월 7일, 그리고 이틀 뒤에 에드 설리반 쇼에 출연했을 때 TV를 지켜보던 미국 젊은이들은 자신들에게 새로운 구세주가 왔음을 깨달았고, 그 깨달음은 불과 몇 주 사이에 미국 전역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메니저 엡스타인이 포장한 비틀즈라는 상품은 레코드뿐만 아니라 악기, 패션, 인형, 노트, 가구에까지 적용되었고, 그들에게는 엄청난 부를, 젊은이들에게는 하나의 유행을 가져다주었다. 비틀즈라는 아이콘으로 케네디 암살이후 공황상태에 빠진 젊은이들은 하나로 뭉쳤고 기성세대들 또한 크나큰 반발 없이 자녀들의 기호를 수용했다. 전 미국에는 비틀즈를 좋아하는 젊은이들과 그들의 부모만이 남게 되었다. 이는 로큰롤이 거둔 최고의 성취였고 이후 로큰롤의 이름아래 행해지는 수많은 청년문화 담론의 시발점이 되었다. 즉 "우리는 해독제이며 심하게 병든 사회에 처방전을 줄 수 있는 약제사이다"라는 엡스타인의 말대로 비틀즈는 케네디 이후 앓고 있는 미국사회에 엄청난 자극과 활기를 불어넣었다.

    비틀마니아와 동조자들
    비틀즈에 열광하기 시작한 미국젊은이들은 그들과 같은 출신들에 대해 한없이 관대해졌다. 블루스와 로큰롤의 종주국으로서 영국에 대한 우월감이 사그러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더 이상 리버풀의 밴드들은 런던에서의 성공을 꿈꾸지 않았다. 그들에게 런던은 단지 미국으로 가기 위한 발판이었을 뿐이었다.

    사실 리버풀은 비틀즈의 성공이전에 비트 그룹들의 탄생을 위한 요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대서양에 인접한 항구도시로서 뉴욕, 뉴올리언즈 등 미국에서 온 배들의 기착지였던 리버풀은 미군들과 함께 들어온 로큰롤, R&B, 재즈의 레코드가 술집마다 울려퍼졌다. 당연히 클럽에선 취미를 넘어선 직업밴드들이 생겨났다(1961년 당시 리버풀의 밴드는 350개가 넘었다). 이들은 리버풀의 캐번(Cavern)클럽에서 시작해 인근 함부르크의 클럽들(Star, Top Ten 등)에서 연주를 하였고 인기를 얻으면 런던으로 가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는 것이 출세를 위한 '선망의 길'이었다.

    비틀즈는 이 고리를 통해 가장 성공을 거둔 머지비트 그룹이었다. 이 성공을 위한 고리를 움켜쥐기 위해선 뛰어난 매니저와 프로듀서가 필요했다.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비틀즈라는 상품을 훌륭하게 팔았다면 그것을 포장한 이는 클리프 리차드의 프로듀서였던 조지 마틴이었다. 로큰롤의 상업성을 이미 경험했던 그는 멤버 전원이 노래하고 직접 작사, 작곡을 하는 이들에게서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했고 이들을 프로페셔널로 다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상업적인 성공을 검증 받은 이 모델은 이후 머지비트그룹들에게 교과서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후 게리 앤 더 피스메이커(Gerry & The Peacemaker), 서처스(Searchers), 스윙잉 블루진스(Swinging BlueJeans) 등의 리버풀 머지비트그룹들이 비틀즈의 뒤를 잇게 되지만 대부분 반짝 인기를 누리는 원 히트 원더(One Hit Wonders)로 끝나고 만다. '비트의 힘'으로 미국이라는 거대시장을 주물렀던 매니지먼트사들은 대안으로 리버풀 밖으로 눈을 돌린다. 멘체스터의 할리스(Hollies), '토튼햄(Tottenham)사운드'로 불린 데이브 파이브 클락(Dave 5 Clock), 세인트 알번의 좀비스(Zombies) 등이 비틀즈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비틀즈로 열린 미국의 문은 더 많은 것을 원했다. 영국의 밴드들은 변해야 했고 무엇보다도 비틀즈가 먼저 변했다. 「Rubber Soul」로 예술가이길 공언한 비틀즈는 머지비트그룹들과는 다른 거장으로서의 길을 갔고 팬들은 더 이상 달콤한 하모니와 말끔한 매너에 열광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잠시 잊고 있었던 '블루스'의 리바이벌과 보다 거칠어진 로큰롤의 광기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보다 미국적인... 또는 보다 무례한...
    머지비트그룹들의 부각은 비틀즈의 성공 때문이었고 그 생성과 진행 그리고 소멸 또한 급작스런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보여줬던 일률적인 모습이 영국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었다. 영국은 아직 미국에 줄 것이 남아있었다. 머지비트그룹들의 득세 이전부터 런던의 클럽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온 R&B에 대한 탐구는 원산지인 미국에 '브리티쉬 블루스'를 돌려주었다.

    블루스 리메이크 곡 'The House Of Rising Sun'과 'Don't Let Me Be Misunderstood'로 미국침공을 시작한 애니멀스(Animals)는 전면에 '미국의 블루스'를 표방했다. 그러나 에릭 버든이 내지르는 육성과 싸이키델릭한 올갠과 거친 기타 사운드가 가지는 에너지는 엄청났다. 블루스 기타로 따지면 야드 버즈(Yardbirds)는 그 이상이었다. 에릭 클랩튼과 지미 페이지, 제프 백의 걸출한 기타연주에 미국인들은 블루스 필의 절정을 느꼈다. 무디 블루스(Moody Blues)와 맨프레드 맨(Manfred Man)의 멜로디는 또 달랐다. 바야흐로 미국은 다양하게 앞에 놓여진 영국의 음악들을 기호에 따라 고를 수 있었고 또한 그에 중독되었다.

    그중 가장 큰 중독성을 발휘한 것은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였다. 불손한 태도, 거침없이 드러내는 노골적인 성욕, 권위에 대한 도전 등 거침없는 청년의 분노로 일관한 이들은 젊은이들에게 기성세대와의 결별을 선언케 했다. 비틀즈와는 달리 부모들은 롤링 스톤스를 듣는 자녀들에게 더 이상 관대할 수 없었다. 이들의 레코드를 들을려면 어른들과의 한 판 싸움을 피할 수 없었다. 즉 비틀즈와는 다르게 롤링 스톤스는 원초적이고 반항적인 생각을 갖게 하였다. 롤링 스톤스의 반항은 기성세대들에게는 귀엽게 보아넘길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 부모들은 한낮 지나가는 유행이 아닌 자신들의 권위를 위협하는 '록'을 경험하게 되었다.

    롤링 스톤스는 '록 = 반항'이라는 이미지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 최초의 그룹이었다. 그러나 그 반항의 이미지는 한참 후에 등장하게 되는 펑크의 분노와는 다른 것이었다. 런던의 마키(Maquee)클럽에서 브리티쉬 블루스의 대부 알렉시스 코너(Alexis Korner), 잭 브루스(Jack Bruce) 등과 교류하던 믹 재거, 머디 워터스에 경도돼 있던 키스 리처드는 런던 중산층의 아들이었다. 이들이 가진 경제적, 심적 여유는 음악적 완성도에 대한 탐구를 가능케했고 이들의 반항 또한 사회구조에 대한 것이기보다는 부모를 비롯한 전세대에 대한 것이었다. 이들이 말하는 일탈, 마약, 성욕, 여성비하 등은 젊은이들에게 감각적으로 맞는 것이었다. 이는 이후 80년대 메틀그룹들에게서 볼 수 있는 '불손한 섹스어필의 전범'이 되었다.

    이들의 메시지가 다분히 전략적이었던 반면 음악에 대한 태도는 비틀즈의 후기와 비견될만큼 진지하고 실험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흑인의 소리를 백인답게 표현한' 모범사례였다. 머디 워터스의 기타는 키스 리차드의 손에서 비트와 훅이 강해졌고 믹 재거의 목소리는 블루지 하면서도 날이 서 있었다. 즉 블루스는 이들의 손에서 록으로 진화되었고 이들이 정형화한 '록'은 이후 하드 록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리고 미국을 향한 '영국의 침공'은 새로운 사운드의 전기를 맞게 된다.




    |||| 황정 ||||

    ** 3회에서는 후(The Who)를 비롯한 모드(Mod)와 시대상, 패션, 스타일 등을 묶어서 다루려고 합니다. (편집자주)
    1. 60년대 2회) British Invasion : part 1 1964년 1월 13일. 영국 리버풀 출신의 4인조 비틀즈(Beatles)의 'I Want To Hold Your Hand'가 US차트를 점령했을 때도 섣부른 예상은 금물이었다. 즉 네 명의 영국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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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1. 60년대
    1회) 45년 ~ 63년 1월 + Bob Dylan 데뷔, Beatles 데뷔



    <<1950년대>>

    (1) 로큰롤 그 화려한 막을 올리다.

    50년대까지의 십대들은 그들만의 음악이 없이 그들의 부모 세대와 같이 프랭크 시내트라 같은 스탠다드 팝을 듣고 있었다. 대부분 상투적인 노랫말로 포장된 채 전자악기 사용이 배제되어 있었으며, 성, 사회, 종교와 같은 주제는 터부시되고 있었다.

    견디기 힘든 현실로부터 도피하며 저항하는 블루스는 흑인들만의 음악이었고, 서민적이며 우리의 트로트의 가사와 유사한 노랫말을 가지고 일렉 기타, 드럼 등의 악기로 연주되던 컨트리는 그저 촌스런 시골뜨기들의 음악으로 치부되고 있었을 때, 50년대의 록큰롤은 흑인의 블루스, 전쟁 이전의 빅밴드와 재즈, 가스펠, 그리고 백인의 컨트리 등의 다양한 음악 양식들의 혼합체로서 등장하였다. 그 뿌리는 거의 흑인들의 감수성이었지만 그것을 혼합하고 상품화한 사람들은 당연히도 백인들이었다.

    50년대 미국 젊은이들은 전쟁의 고통을 모르고 자란 새로운 세대였다. '베이비 붐세대'로 일컬어지는 이들은 '소비의 세대'이기도 하다. 로큰롤은 바로 그런 그들의 성격에 딱 맞추어 통속적인 음악 언어로 다가갔다. 이들은 부모 세대의 멜로디 위주 스탠더드 팝 대신 강하고 격렬한 비트의 음악에 몰두했으며, 1955년 빌 헤일리가 'Rock around the Clock'을 발표하며 이들은 손뼉을 치며 춤을 추게 만들어주는 이 리듬에 푹 빠져들었다. 이 곡은 영화 'Blackboard Jungle'의 주제가로 사용되며 최고의 히트를 침과 동시에 로큰롤 음악과 십대들의 반항과 비행, 폭력과의 고리를 이어 놓았다.

    그리고 백인들은 역시 영리했다. 백인 젊은이들이 흑인들의 음악 속에 완전히 빠져들기 전, 백인 로큰롤 스타를 만들어낸 것이다. 흑인의 목소리와 감성을 지닌 가난한 남부의 촌뜨기 엘비스 프레슬리는 흑인음악과 백인음악의 초상업적인 결합을 이루며, 육감적인 목소리와 관능적인 허리율동으로 기성세대의 지탄과 젊은이들의 열광을 받았다. 엘비스는 비록 애초부터 상업적으로 만들어진 상품이었지만 전세계적으로 로큰롤을 인식시켰다는 정도의 평가는 해도 좋을 것이다.

    보다 진정한 로큰롤은 진 빈센트, 빈스 테일러, 50년대 중엽의 척 베리, 리틀 리처드 등에게서 찾아지는데, 이러한 음악은 모두 간단한 멜로디에 단순한 코드, 전기 기타의 연주, 격렬한 리듬감, 폭발하는 에너지, 거칠고 격렬한 보컬과 다이내믹한 율동 등을 특징으로 했다. 십대들은 청바지와 가죽재킷을 입고 로큰롤 춤에 빠져들었으며 자유연애가 시작되었으며, 미국 사회를 엄청난 변화와 저항과 자유의 바람으로 휩쓸었다.

    (2) 음악산업 & 매체
    - 1931년 3월 31일, 섹스 피스톨스의 곡으로도 유명한 EMI가 그라모폰과 컬럼비아의 합병으로 설립됐고, 같은 해 11월 12일, 팝과 록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애비로드 스튜디오가 영국에서 문을 염. 비틀즈의 음반을 비롯해 아직까지도 유명 뮤지션들의 음반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곳은 유명한 관광명소이기도 하다.
    - 1936년 1월 4일, 빌보드 팝차트 처음 게시.
    - 1945년 3월 15일, 빌보드는 앨범 차트를 발표하기 시작.
    - 1952년 3월 7일, New Musical Express의 창간호가 발행.
    - 1955년 11월 2일, 빌보드 Hot 100차트 게시 시작. 지금은 200으로 늘어났지만... 그리고 그해 11월 25일 첫 로큰롤 곡이라고 말해지는 빌 헤일리의 'Rock Around The Clock'이 영국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한다.
    - 1956년 8월 24일, 영국의 첫 로큰롤 클럽인 Studio 51이 문을 염.
    - 1957년 1월 16일, 영국 리버풀의 작은 공연장 캐번 클럽이 개장. 비틀즈는 이곳에서 공연한 최초의 로큰롤 밴드였다.
    - 1958년 1월 25일, 엘비스 프레슬리의 'Jailhouse Rock'이 영국 차트의 정상을 차지하는 최초의 미국 곡이 됨.

    <<1960년대>>

    (1) 비틀즈의 미국 상륙

    그러나 엘비스는 60년대 이후 인기와 영합해가며 음악도 부드러운 팝발라드로 바뀌었다. 엘비스 팬들은 그를 쫓아갔지만, 그는 예전과 같은 황제가 아니었고, 갖가지 사고로 로큰롤의 창시자들이 사라지면서 로큰롤은 그 생명력인 생동감을 상실했다.

    그러나 이것은 로큰롤의 침체가 아니라 비틀즈를 위한 혁명전야였다. 비틀즈의 최고의 해는 1964년으로 바로 그들이 미국 케네디 공항에 도착한 해이다. 영국의 딱정벌레들의 미국 침공의 성공은 또 다른 스타가 생겼다는 의미를 넘어서 록음악의 구분을 지어놓는 하나의 거대한 사건이었다. 로큰롤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아직까지도 비틀즈 이전/이후라는 구분은 유효하게 쓰이고 있다. 비틀즈는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64년 4월 4일 그들은 빌보드차트 1-5위를 석권했고, 인기는 전세계로 넓어졌다. 종래의 팝을 다시금 재해석했으며, 새롭게 만들었다. 멤버들 전원이 노래를 만들고, 스스로 노래하고, 연주하는 스타일은 이전에 전혀 없던 신선한 스타일로 젊은이들을 감동시킨 것이다.

    음악산업의 변방이라 할 리버풀과 함부르크의 욕설이 난무하는 뒷골목에서 자신들 음악을 가꿔온 영국 노동자계급 출신의 딱정벌레들은 징징대는 사운드와 질러대는 목소리로 64년 미국공략을 성공적으로 끝냈다. 당시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에 매우 경직되었던 미국의 분위기는 비틀즈의 상륙으로 즐거움과 환호로 가득 찼으며 슬픔은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비틀즈는 또한 새롭게 옷을 입은 로큰롤을 미국에 전파하였으며 64년 비틀즈의 상륙과 맞물려 미국에서는 버클리 대학에서 시작된 성과 정치 등에 관한 터부의 타파를 주장하는 Free Speech Movement를 비롯해, 학원 투쟁과 도시 흑인 폭동, 무장봉기, 베트남 반전운동이 전개되었다.

    60년대에 비틀즈는 음악만이 아니라 패션과 헤어스타일까지도 유행시켰으며 수많은 프로모터들에게는 비틀즈 자체가 굉장한 귀중품이었으며 공연 문화에도 일대 혁명을 일으켰다. 비틀즈는 우리가 지금 뮤직비디오라고 부르는 'pop promo film'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2) 밥딜런, 일렉 기타로 비틀즈에 화답하다

    그리고 1963년 미국에서는 포크 가수 밥 딜런이 [freewheelin' Bob Dylan]을 발표한다. 이후 1965년 통키타를 메고 노래하던 프로테스트 포크 가수였던 그가 일렉트릭기타를 메고 등장함으로써 포크 록이라 불리는 장르가 생겨났고, 이것은 이후의 이글스(Eagles)로 이어져 포크 록의 원류가 된다. 이러한 포크 록은 브리티시 인베이전에 대한 미국의 화답이라고 이야기된다.

    밥딜런의 초기 음악은 통키타 만으로 연주되는 단순한 구조였지만 그것의 파워는 비틀즈가 사정권 안으로 들어올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비틀즈가 베이비 붐 세대를 깨웠다면 밥딜런은 그들의 의식화를 담당했다. 그리고 이후의 음악에 서로 지대한 영향력을 주고받는다.

    많은 평론가들이 비틀즈를 단순한 십대 젊은이들을 위한 광대이며 곧 사라질 것이라고 할 때도 밥 딜런은 그들에게 빠져 있었으며 비틀즈의 사운드와 하모니에서 지속력을 감지했다. 밥 딜런은 그것이 앞으로 음악이 가야할 방향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일렉 기타를 잡았다.

    존 레넌 역시 밥 딜런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비틀즈와 밥딜런, 그들은 록의 역사에서 최정상의 자리를 차지하지만 그 자리에서 밥 딜런의 자리는 보다 특화 되어 있다. 그 가지야 다를지언정 비틀즈는 엘비스 프레슬리가 정체성을 확립한 록의 스타일을 만들었고, 그 예술적 지반을 확대했다. 역시 밥 딜런도 그 과정에 존재하지만 그는 스타일이 아닌 내면으로 존재하고 있다. 밥 딜런은 록의 노랫말이고 메시지였다.

    로큰롤이 폭발하여 확산되던 시점인 50년대의 로큰롤은 메시지가 없었다. 더 나아가 60년대 비틀즈가 미국을 침공해 록의 르네상스를 일구고 있을 때도 비틀즈의 록은 의미 있는 가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의식 있는 계층들이 여전히 록을 경시하고 있을 때 비틀즈는 누구보다도 먼저 밥 딜런의 위력을 절감한 것이다. 그의 포크 사운드와 메시지를 귀담아 듣고 자신들의 음악에 적극 수용한다. 존 레넌이 만들었던 포크 풍의 노래들은 밥 딜런을 빼고는 출처를 확인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이것은 65년 그들의 앨범 [Rubber Soul] 이후 중반기 작업에서의 확인되는 톤다운으로 드러난다.

    이후 비틀즈는 다양한 삶의 모습과 냉철한 사회비판의식을 음악에 담으며 로큰롤을 확장하며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소위 록 르네상스시대의 기폭제가 되어 록음악의 급속한 발전이 이루어지게 했다.

    비틀즈 이후 이들의 뒤를 이어 수십 여 개의 영국 그룹들이 물밀 듯이 미국으로 몰려들었다. 이것이 일명 브리티쉬 인베이전이라고 불리는 영국 밴드들의 미국 침공인데 후(The Who), 롤링 스톤즈, 야드버즈, 크림, 핑크 플로이드 등 비틀즈 이후 록 흐름의 주도권을 최근에 이르기까지 영국이 쥐게 만들어준 사건이기도 하다.


    (3) 모드 맨 (Mod Men)으로서의 비틀즈
    영화 'A Hard Day's Night'에서 한 리포터가 링고 스타에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모즈인가? 록커인가?" 여기에 대한 링고 스타의 대답은 정말 그럴듯하다. "나는 모커이다."

    1963년, 비틀즈의 매니저는 대중적 인기를 끌기 시작할 무렵, 깨끗한 이미지를 보이기 위해 단정해 보이지 않는 가죽 재킷을 벗기고 피에르 가르뎅이 디자인한 칼라 없는 수트를 입혔다. 1964년, 수트에 터틀넥을 받쳐입는 캐주얼한 룩과 함께 비틀즈의 스타일은 남성들의 기본적인 모즈 스타일이 되었고, 낚시모자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대중적인 것이 되었다.

    비틀즈의 영향력은 패션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도 했는데, 일명 비틀즈 록이라고 불리던 모즈 스타일을 만들어낸 것이다. 단정한 헤어스타일과 깔끔한 검정, 네이비 정장에 허리는 꼭 끼고, 어깨는 딱맞고, 바지는 약간 짧은 듯하며 슬림하다.

    그러나, 1965년부터 비틀즈는 개별적인 스타일을 추구해 각각의 스타일을 전체적으로 조화시키는 방향으로 변신했고 1967년까지 모즈의 영향이 남아있는 속에서 등장한 플라워 차일드(Flower Child)의 영향으로 털 달린 베스트, 인디안 풍의 히피 스타일의 옷을 즐겨 입기도 했다. 전체적으로는 사이키델릭한 트랜드가 계속되었지만, 1968년 비틀즈는 새로운 모즈 실루엣으로 변신했다. 이전보다 더욱 부드럽고 로맨틱한 댄디 스타일의 더블 브레스트 재킷에 러플 블라우스로 또 다른 유행을 만들어냈다. 1969년 이후 그들의 룩은 말끔하게 차려 입는 정장 스타일을 버리고, 캐주얼한 모습으로 다시 변했다.

    (4) 모드(MOD)
    60년대 이전의 십대들은 음악에서와 같이 자신들만의 의상에서도 그들만의 스타일이 없이 부모의 옷을 축소한 것 같은 옷을 입었다. 이전에도 테디 보이(Teddy Boys)라 불리는 에디워디안(Ediwardians), 록커(Rockers), 비트(Beatniks)와 같은 하위문화가 젊은이들에게 다소 존재했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반항하는 아이들 또는 또래 집단에서 이탈된 젊은이들의 하위문화로만 존재했었다. 대부분의 10대들은 여전히 부모와 같은 옷을 입었다.

    그러나 1960년대 초반에 혁명은 시작되었다. 새로운 젊은이들의 문화는 영국에서부터 일어났다. 모더니스트의 줄인 말로 알려진 모드 운동은, 주류문화권에서 이탈된 젊은이들이 그 구성원들이었고, 이들의 대부분은 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은 트레이드마크인 파카를 입고 베스파(Vespa) 모터 스쿠터를 타고 다녔다. 여자아이들은 부풀려서 풍성하게 한 헤어스타일, 블랙 가죽 코트, 짧은 스커트, 블랙 부츠를 즐겨 신었다.

    모즈 밴드라고 불리던 후(The Who)의 드러머 키스 문(Keith Moon)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심볼이 들어간 티셔츠를 모즈 패션의 역사로 만들기도 했다.

    1967년 개봉된 영화 'To Sir With Love' 에서, 런던의 한 교사가 학생들에게 "여러분의 옷은 반항의 형식이 아닌가?"라고 묻자, 한 여학생이 "이것은 단지 새로운 패션일 뿐입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이런 옷을 입는 것을 어리석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한다. 이 말은 'Mod'라 불리는 60년대 스타일에 대한 가장 적절한 설명이다. 반항이 아니라 단지 새로운 패션일 뿐이라는 이 대답은 젊은이들의 새로운 스타일 뒤에 숨겨진 잠재된 운동을 부인하고 있지만 이들의 패션이 반항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들 부모들이 입었던 성숙한 스타일의 옷에 비해 간단했다라는 것 자체가 그들의 부모의 권위에 대한 반항이었던 것이다.

    물론 모즈 운동에도 부정적인 측면이 있었다. 마약복용은 많은 모즈들 사이에서 일반화되어 있었고, 이들은 특히 암페타민을 즐겨 사용했다. 서로 적이라고 생각했던 록커들과 맞붙어 일으키던 패싸움 또한 커다란 문제였다. 모즈들이 파카를 입고 스쿠터를 타고 다니는 반면, 록커는 가죽 재킷을 입고 모터사이클을 타고 다녔다. 도심에 록커가 나타날 때마다 두 그룹간에는 피할 수 없는 충돌이 일어났고, 1964년 브링톤(Brington)에서의 충돌이 가장 악명 높았던 사건으로 얘기된다. 이후로 독특한 문화 운동으로서 모즈는 점차 그 범위를 확대시켜 나갔고, 일반화되었다.

    이러한 하위 문화였던 모즈는 오늘날 우리가 젊은이들의 의복과 라이프 스타일로서 알고 있는 모드 운동으로 연결이 된다. 젊은 사람들은 하나의 세력이 되어 점점 변화를 가속화했다. 그 당시 10대였던 베이비 부머들이 대규모 소비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꾸준한 경제성장 은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했고, 젊은이들은 가용할 수입이 많아졌다. 경제적 여유가 생긴 젊은이들은 자신이 일하고 있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비틀즈는 대중 음악을 혁신했고, 앤디 워홀은 예술을 변혁했다.

    이런 매체의 하나로서 패션 또한 변화했고, 이것은 젊은이들의 몫이었다. 60년대 중반에는 젊은 층에서 시작되었던 좀더 심플하고, 좀더 짧고, 좀더 밝아진 스타일의 요소들이 전 연령층과 전 계층의 의복에 퍼졌다. 영국의 젊은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시작한 뉴 스타일은 빠르게 다른 나라로, 특히 프랑스와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런던에서는 'mods', 파리에서는 'yeyes'라고 불려졌다. 'yeyes'란 용어는 비틀즈의 'yeah yeah yeah'의 프랑스식 말이다. 전통적으로 패션의 중심지였던 프랑스조차도 이 용어를 사용하면서, 모드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을 인정했다. 그리고 60년대 중반, 주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모즈 패션에 도전하는 새로운 흐름 뉴 로맨티시즘이 나타났다. 이것은 히피들의 운동과 연관된다.


    (5) 음악산업 & 매체

    1962년 :
    - 7월 12일, 롤링 스톤즈가 영국의 마키 클럽에서 첫 공연.
    - 9월 27일, 밥 딜런이 카네기 홀에서의 공연과 함께 최초로 뉴욕타임스에 소개됨.
    - 10월 5일, 비틀즈의 첫 싱글 'Love Me Do' 발매.

    1963년 :
    - 1월 11일, 미국에서는 록 클럽의 시작이 된 위스키 어 고고(Whisky A Go-Go)가 LA에서 개장됨.
    - 1월 12일, 'Please Please Me'를 발매하여 비틀 매니아를 탄생시킴.
    - 2월 11일, 비틀즈가 EMI 애비로드 스튜디오에서 데뷔 앨범 [Please Please Me]를 녹음. 13시간만에 10곡을 커팅함. [Please Please Me]는 발매 10일이 지난 4월 6일 영국차트 10위로 등장, 5월 4일부터 30주간 1위에 랭크되는 등 64주간 차트 100위권에 머무는 신기록을 세웠고 당시 데뷔 앨범으로는 최다 판매고를 기록하던 앨비스 프레슬리의 [Jailhouse Rock] 판매량을 2만장 초과하는 25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영국을 비롯한 전 유럽지역에 비틀즈 선풍을 몰고 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 5월 27일, 밥 딜런이 두 번째 앨범 [The Free Wheelin' Bob Dylan] 공개.
    - 6월 야드버즈 결성.
    - 6월 7일, 롤링 스톤즈의 첫 싱글 'Come On' 발매.
    * 1963년에 비틀즈매니아라고 불러지는 엄청난 팬들이 생겼고, 더 이상 비틀즈는 콘서트에서만 연주하는 그룹이 아니었다. 시청률이 매우 높은 TV쇼인 'Sunday Night At The London Palladium'과 각종 특별한 쇼에 초대되었다.

    1964년 :
    - 1월 13일, 비틀즈가 'I Want To Hold Your Hand'를 발매 차트 정상을 차지, 비틀즈는 이 곡을 통해 비로소 전세계 젊은이들의 우상이 됨.
    - 2월 7일, 비틀즈가 뉴욕의 케네디 공항에 도착함으로써 역사적인 '브리티쉬 인베이젼'의 시작을 알림.
    - 3월 23일, 존 레넌이 Foyle 문학상을 수상.
    - 4월 26일, 롤링 스톤즈가 데뷔 앨범 발매.
    - 12월 야드버즈의 데뷔 앨범 [Five Live Yard Birds] 발매.

    |||| 한수영 ||||

    1. 60년대 1회) 45년 ~ 63년 1월 + Bob Dylan 데뷔, Beatles 데뷔 &lt;&lt;1950년대&gt;&gt; (1) 로큰롤 그 화려한 막을 올리다. 50년대까지의 십대들은 그들만의 음악이 없이 그들의 부모 세대와 같이 프랭...
    ☆☆☆☆☆ | 해외음악 연대기

  9. 가슴에서는 약 30회에 걸쳐서 64년 2월(비틀즈가 미국 뉴욕의 케네디 공항에 도착한 시기. 보통 이를 '브리티쉬 인베이젼'의 시작으로 얘기하고, 가슴에서는 서구에서 록음악이 발화된 날로 잡았다)부터 현재까지의 서구 대중음악을 '음악사' 중심보다는 '사회/문화사'를 중점을 두어서 다루려고 합니다. "왜 그 사건이 그 시대 상황에서 발생했는가?"에 주안점을 두어서 연재를 진행해 나갈 계획입니다.

    |||| 박준흠, 한수영, 황정 | 가슴 ||||


    == 전체 차례 ==
    1. 60년대 (총 8회)
      1회) 45년 ~ 63년 1월 + Bob Dylan 데뷔, Beatles 데뷔 (한수영)
      2회) British Invasion - part.1 (황정)
      3회) British Invasion - part.2 (황정)
      4회) San Francisco Sound / Flower Movement - part.1 (한수영)
      5회) San Francisco Sound / Flower Movement - part.2 (한수영)
      6회) Woodstock Nation (황정)
      7회) 기타 (황정)
      8회) 필청음반 소개 (박준흠)
    2. 70년대
    3. 80년대
    4. 90년대
    가슴에서는 약 30회에 걸쳐서 64년 2월(비틀즈가 미국 뉴욕의 케네디 공항에 도착한 시기. 보통 이를 '브리티쉬 인베이젼'의 시작으로 얘기하고, 가슴에서는 서구에서 록음악이 발화된 날로 잡았다)부터 현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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