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만화 3호


[1]
평론의 필요성이나 전문지의 존재가치에 대한 지지와 회의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담론의 풍성함과 전문지의 수라는 양적인 지표가 해당 분야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인식의 수준을 어느 정도 드러내주는 것만큼은 부정하기 힘든 사실일 것 같다. 가령, 교양이나 예술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연구할 만한 깊이는 있는 것인가. 그런 시덥지 않은 질문들에 대한 대답 말이다. 근 몇 년 동안 단 한 종류의 정기간행물도 없었던 한국의 만화전문지 시장은 그 자체로 이 나라에서의 만화의 위치를 대변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작년 봄, 정부지원 하에 비로소 탄생한 [계간만화]는 그 존재 자체가 소중한 오프라인 만화전문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난 4월, 제3호인 2004년 봄호를 발간한 [계간만화]의 편집부 김영진 기자를 만났다.


-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 김영진이라고 합니다. 2001년에 시공사에 입사, 단행본 팀과 잡지 [비쥬] 팀에서 근무했으며, 2004년 1월부터 [계간만화] 팀에 합류했습니다.

- 그 외 편집부 분들에 대해서도 간략히 소개해주신다면...

= 이재식 사장님은 서울문화사에서 [나인] 편집부의 창간 멤버, [아이큐 점프] 편집부 등에서 일했으며, 이후 [코믹스 투데이]에서 편집장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2001년 씨엔씨 레볼루션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황제성 기자는 [코믹스 투데이]부터 이재식 사장님과 함께 활동을 해 왔습니다.

- 편집부 분들의 사적인 만화 취향은 어떻습니까.

= 너무 다양합니다만,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이재식 사장님과 황제성 기자는 소년 만화 쪽을, 저는 순정만화 쪽을 좋아합니다. 아무래도 전에 순정 작가 담당을 하던 경력이 성향으로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 책의 스태프 명단을 보면, 기획위원, 편집위원, 편집인, 편집부 기자, 온라인 사업부 등 여러 분들이 계신데요. 업무분담은 어떻게 되어 있으며, 실제로 [계간만화] 한 권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각각 맡게 되는 역할을 간략하게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 기획위원과 편집위원은 콘텐츠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의 의견 개진을 통해 편집부가 나아가야 할 방향 등에 대해 도움말을 주고, 발간된 책에 대해 함께 평가를 하는 분들입니다. 하지만, 실무적으로 참여하시는 부분은 없습니다. 그리고, 편집인 이재식 사장님은 편집장이시구요, 편집부 기자는 말 그대로 편집부 기자입니다. 실제적으로 편집인과 편집부 기자는 기획위원과 편집위원들의 다양한 평가와 의견을 반영해서 책의 구체적인 내용들에 대해서 기획하고 기사를 작성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온라인 사업부는 [계간만화]의 홈페이지 www.Qcomic.com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합니다.

- 그럼, 기획위원과 편집위원 분들은 자문 역할을 하시는 것이고, 실제로 책을 만드는 것은 편집부 세 분이 모두 맡아서 하시는 것이었군요. 편집부는 현재 [계간만화]에만 총력을 기울일 수 있는 환경입니까? (회사의 다른 업무에 치이지 않고 말이죠.. 물론 사장님은 그러기 어려우실 것 같지만요.)

= 넵, 말씀하신 것처럼 사장님은 실제적으로 사이트의 운영과 [계간만화] 업무 두 가지에 총력을 기울이느라 많이 힘드신 상황입니다. 그 이외 저를 비롯한 기자들은 오로지 [계간만화]에만 집중하고 있는 상황이구요.

- 계간이고 청탁 원고가 많기는 하지만, 인원이 너무 적어서 힘들진 않으신가요? 아니면, 힘들긴 하지만 효율성 면에서 볼 때 현재 인원이 적정한 선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 안 그래도, 현재 1명을 새롭게 보강했습니다. 현재 여름호 준비를 함께 진행하고 있는 중이구요. ^^;;

- 그렇습니까. 어떤 분이시죠?

= 만화문화연구원 출신의 김성훈 기자입니다. 지난호에 '1968년, 그리고 COMIX' 라는 글의 필자로 활약을 했던 분으로, 이미 만화에 대한 식견과 글에 대한 능력이 검증이 되어 있는 분입니다.

- [계간만화] 이외에 씨앤씨 레볼루션에서 진행중인 프로젝트나 계획중인 사업이 있으신지요.

= [계간만화] 이외의 사업으로는 'comic19'라는 인터넷 만화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스캔만화 서비스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만, 과거에는 오리지널 창작 만화를 연재하고 단행본 발간까지 함께 진행을 했었고, 현재 <커플>이라는 연재작 하나만 남아있는 상황입니다. 일단 현재는 [계간만화]에 집중적으로 힘쓸 계획이며, 이후 상황이 허락하는 한에서 기획 단행본 출간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계간만화 1호


[2]
사실 M씨가 [계간만화] 창간호를 구입한 후, '1년쯤 지나면 인터뷰를 해봐야겠다'고 혼자 신나서(까지는 아니고-_-;) 상상하고 있었던 대상은 현재의 편집부가 아니었다. 작년 봄, '새 만화책'이라는 출판사의 이름을 달고 처음 모습을 드러냈던 [계간만화]는 어찌된 일인지 2호였던 여름호 이후 긴 침묵 속에서 가을과 겨울을 지낸 후, 올 봄, 새로운 출판사 '씨앤씨 레볼루션'을 통해 새로운 모습의 3호로 돌아온 것이다.


- [계간만화]는 작년에 창간되어 2호까지 나오고, 좀 많이 쉬었다가 이번 3호는 출판사가 바뀌어 나오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씨앤씨 레볼루션'에서 [계간만화]의 발행을 맡게 되셨는지 과정이 궁금합니다. (정상적인 프로젝트 기간 종료 후 다시 선정과정을 거친 것인지요.)

= 기존에 출판을 담당했던 새만화책과 애니메이션 센터의 사이에 정확히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새만화책이 정상적인 프로젝트 기간 종료를 거친 것은 아닙니다. 작년 12월에 새로운 출판사 선정에 대한 공고가 붙었으며, 그 과정에 씨엔씨 레볼루션이 기획을 들고 참여하여 선정되었습니다.

- 출판사 공모시 경쟁률은 어느 정도 되었습니까?

= [계간만화]가 새만화책에서 나온 후, 두 번째 사업자를 선정하는 시기는 작년 가을 무렵이었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거기서 다른 사업자가 선정이 되었습니다만, 그 사업자가 애니센터 측과 협의를 하는 단계에서 합의를 하지 못하게 되어 결렬이 되었습니다. 이후 겨울에 다시 세 번째 사업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저희가 선정이 된 것입니다. 제가 입사한 것은 그 이후의 일인지라 자세한 사항은 잘 모르겠구요, 다만 저희를 포함해 두 곳에서 참여를 했으며, 저희가 다른 한 곳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표(?)를 얻었다고 하는 정도만 들었습니다.

- [계간만화]의 제작에 관련된 비용은 전액 정부지원금으로 충당이 되는 것인가요?

= 전액은 아닙니다. 원고료, 인건비, 순수 제작비 등의 세 가지 부문에 대해서 70%를 지원하는 방식입니다. 실제적으로 이 세 가지 이외에 들어가는 부분까지 생각을 한다면 전체 제작비에 대한 지원비의 비율은 더 낮습니다.

- 한 권에 소요되는 비용을 고료, 디자인, 인쇄, 종이, 유통, 홍보, 자문, 취재 등 분야별로 따져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고료가 전체의 50% 정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이외의 것(디자인, 인쇄, 종이, 유통, 취재 등)들은 기본적으로 잡지를 만드는데 필요한 정도로 들어갔구요, 홍보와 자문 등은 거의 소요된 비용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대부분이 인터넷 등을 통해서 일을 진행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 온라인 상에 만화와 글 모집 광고를 많이 하셨었는데요. 성과는 좋았습니까?

=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대략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매체 자체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관심은 있어도 그다지 적극적으로 참여를 하려고는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번 여름호를 기점으로 다시 한번 많은 참여가 있기를 기대하고 있는 중입니다.

- 만드시는 입장에서 이번 호의 판형, 재질, 가격에 대한 입장은 어떻습니까?

= 판형과 재질, 가격에 대해서 대체적으로 만족하는 편입니다. 대부분이 저희가 최초에 잡았던 컨셉에서 큰 변화가 없이 진행이 되었으며, 그 의도를 잘 살렸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재질의 부분은 약간 아쉬움이 남으며, 앞으로 수정 보완할 계획입니다.

- 전 괜찮은 것 같은데.. 어떤 면에서 아쉬움이 남으시는지요. (가격은 더 떨어질 여지가 없나요?^^;;)

= 아무래도 컬러 페이지에서 색이 조금 번지거나 흐리게 나온 부분이죠. 때문에 다음호에서는 그 재질 부분을 보완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가격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딱히 어떻게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오즈


[3]
이 나라의 만화전문지 시장이 처음부터 이 모양이었던 것은 아니다. 90년대 후반만 해도, 창작자적 관점을 견지하는 강좌와 인터뷰 중심의 [코믹테크], 비평적 관점으로 진지한 기사와 비주류 만화 작품들을 아우르던 [오즈] 같은 반짝이는 별들이 - 비록 동시에는 아니었지만 - 존재하고 있었다. (그 밖에 입시서적처럼 느껴졌던 [만화창작]을 비롯, 반짝이지 않는 별들도 어느 정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2000년 초 [오즈]가 웹진으로 전환하고, 다음해 3월 그마저도 문을 닫았을 때, 한국 만화전문지 시장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 [계간만화]를 새로이 발간하시면서 나름대로 설정하신 편집 방향이나 타겟 독자층이 있는지요.

= 기본적으로 1차 타깃은 만화 매니아층입니다. 그리고 만화계와 관련된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나 대학의 만화과 학생 등 실제적으로 만화의 창작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을 2차 타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 아무래도 만드시는 분들 입장이나 보는 독자 입장이나, 지난 두 권의 [계간만화]와의 비교는 피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전의 [계간만화]에 대한 자체적인 평가는 어떻게 내리고 계신지요.

= 1, 2호가 예술 속의 만화라는 관점에서 접근을 한 시도는 무척 고무적으로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다만 현재 우리 만화에 대한 관점이 그다지 많이 드러나 있지 않은 점이 아쉬웠습니다. 때문에 저희 3호는 1, 2호에 비해 좀 더 실제적인 내용을 담을 수 있는 방향으로 전환한 것입니다.

- 유사한 성격의 잡지로 과거 [코믹테크], [오즈], [만화창작] 등이 떠오르는데요. 이들에 대한 벤치마킹도 있으셨는지 궁금합니다.

= 실제적으로 과거에 그런 잡지들을 보고 느낀바가 컸었던 만큼, 어느 정도 그 성격에 있어서 반영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의도적으로 어떤 방향성을 설정한 것은 없습니다.

- 국내 유일의 만화전문지라는 위치를 감안했을 때, 또 계간이라는 잡지의 기간을 고려했을 때, 현재 [계간만화]의 글과 만화 비율이 적당하다고 보시는지요.

= 이번호 발간을 계기로 많은 편집위원, 자문위원과 회의를 가지면서 다양한 의견을 들었습니다. 일단 양적인 면으로 봤을 때 많은 노력이 있었을 것이라는 격려를 많이 받았습니다. (실제로 많은 노력을 하기도 했구요.) 때문에 최소한 양적인 면에서는 그다지 모자라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질적인 면에서는... 역시 더욱 노력을 해야겠죠. ^^;;)

- 새로 나온 만화관련 서적 리뷰는 계간이라는 잡지의 기간에 비해 소개되는 책의 수가 너무 적다는 느낌도 있는데요.

= 그 부분은 자체 품평회 및 편집회의에서 충분히 이야기가 나온 부분입니다. 앞으로 더욱 많은 책의 리뷰를 소개할 수 있도록 노력할 계획입니다.

- 내용적인 측면에서, 신간 소개의 증가 이외에 앞으로 바꿔야 한다거나 좀 더 보강해야 한다고 편집부 자체적으로 판단하고 계시는 부분은 어떤 부분이 있습니까.

= 글 자체의 부분에 있어서 전문적인 글의 수준을 조금 낮추는 부분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글이 전문적으로 만화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분들에게만 적합한 것이 아닌가 싶은 내부 판단도 있었습니다. 때문에 지금과 같이 깊은 수준의 글과 함께 조금 더 만화계 언저리 수준의 사람들이 어느 정도 밑그림을 그려가며 함께 읽을 수 있는 기사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순수한 리뷰 혹은 인터뷰 기사 대신 리뷰와 인터뷰가 섞여 있는 형식의 기사들이 많습니다. 이런 형식의 기사들은 전문성보다는 대중성에 무게를 두는 잡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형식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요. 이런 면에 대한 고민이 있으셨는지요.

= 딱히 그러한 면에 대해서 고민은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일을 진행하는 과정상에 있어서 편집부의 자연스러운 의도가 그렇게 표현이 된 것 같습니다. 현재 만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지나치게 전문적인 면만을 고집하는 것보다는,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만화에 대한 담론을 형성해낼 수 있는 그런 역할을 수행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 광고가 하나도...는 아니고 거의 없는데요.^^

= 인적, 시간적인 제약 때문에 봄호의 경우는 처음부터 신경을 많이 쓰지 못한 결과인 것 같습니다.

계간만화 기사목록


[4]
조금 과장해서 이야기하자면, [계간만화] 2004년 봄호에 대한 M씨의 감상은 '책을 읽기 전부터 반가움'이었다. 또 폐간이냐... 하는 떫떠름한 의구심을 지워준 것부터 시작해서, 그 위용만으로도 부담스러웠던 스케치북으로부터 누워서도 볼 수 있는 보통의 잡지 모양으로 바뀐 판형도 흐뭇하고, 뺀질거리지 않는 표지의 부드럽고 차분한 색감도 마음에 들었다. 재창간에 가까운 새로운 구성과 풍성한 기사, 작가진의 연령대별 고른 분포가 인상적인 만화 작품들 역시 충분히 - 적은 수의 편집인원에 비하면 더욱 - 박수를 받을 만한 대목이다. 2호까지의 [계간만화]도 분명 좋은 책이었지만, 국내 유일이라는 잡지의 위치를 고려했을 때에는 그 스펙트럼이 너무 협소하고, 특유의 아카데믹한 분위기나 '전쟁-일상-이미지'같은 기획(의 방향)은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었다. 좀 더 중앙으로 이동하고 넓은 영역을 커버하는 이번호는 그런 면에 있어서 무척이나 반가운 변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 이번 [계간만화]의 기사들을 보면, 방향성은 좋지만 좀 더 깊이 파고 들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생기기도 합니다. 원론적이고 교양적인 측면에서 충실한 읽을 거리를 제공하는 반면 현장감이나 집요함이 부족한 듯도 하고, 설명과 해설에 비해 주장이나 견해가 약하지 않은가 싶기도 하구요. 예를 들면, 기획기사는 [계간만화]가 가지고 있는 현재 만화계의 창작환경 혹은 창작태도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제안보다는 상황 분석에 치중한 듯 하고, 대여권 관련 기사도 거시적인 히스토리에 비해 - 제 개인적으로는 더 궁금한 - 각계의 대립적인 입장이나 현재의 논의 상황은 작은 박스에 너무 간략하게 나와있는 것 같습니다. 또 대여권에 대한 [계간만화]의 견해도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지 않은 것 같구요. 이런 의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요.

= 먼저 특집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특집기획은 지난 3호로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일단 3호 자체는 연속 특집을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일단 기본적인 상황분석에 치중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앞으로 이어질 특집에서 좀더 심화된 분석 등을 다룰 예정입니다. 그리고 대여권 관련된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현재는 그 동안 끊임없이 토론이 되어 왔던 대여권에 대한 문제가 2003년에 활발하게 거론되었던 것과는 달리 2004년 초의 모습을 봤을 때 거의 정리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딱히 법제화에 대한 내용이 신속하게 반영되지 못한 채 2009년 이후에 다시 대여권 문제가 상정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다시 문제를 크게 키울 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자체 판단 속에서 그 동안의 로드맵을 정리하는 수준으로 기사를 마무리지었던 것입니다.

- "딱히 법제화에 대한 내용이 신속하게 반영되지 못한 채 2009년 이후에 다시 대여권 문제가 상정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다시 문제를 크게 키울 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자체 판단 속에서 그 동안의 로드맵을 정리하는 수준으로 기사를 마무리지었던 것입니다."라는 말씀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 부탁드립니다.

= 저희가 당시 이야기를 들은 바를 따르면 지난해인가 올해인가 완전하게 법제화가 되지 못하면 2009년이 되어야 다시 의제로 상정이 될 수 있을 것이란 얘기를 들은 바가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의 흐름이나 분위기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해서 뚜껑을 열어봤더니, 한 순간에 치료를 하기에는 문제가 꽤 큰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든다면 이런 것이죠. 저작권에 대한 확실한 법률이 마련이 되었을 경우, 그것을 확실히 시행하기 위한 시설적 기반을 마련하는데 엄청난 돈이(죄송합니다, 액수는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든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배보다 배꼽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현실적으로 나라에서 그 돈을 충당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고, 그렇다고 작가와 출판사의 힘만으로 그 시스템을 구축하기에도 무리가 있다는 그런 느낌이 있었다는 거죠. 그런 상황을 알게 된 후 일단 한 차례 소강상태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의미로는 "덮는 분위기"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었던 거죠. 그런 맥락이었기 때문에 다시 문제를 크게 키울 거리가 못 될 거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이후 저희가 기사를 진행하면서 간간이 대여권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이 다시 논의 진행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이 자율적인 시행부터 시작을 해야 한다는 내용들이었구요. 하지만 그 시점에서 나온 내용들은 이미 이전부터 주장이 되어 왔던 것으로서 딱히 별다른 내용은 없었던 것이며, 그 시행에 대한 의지도 신문에 났었던 기사와는 달리 확실하게 정해진 것은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기존에 대여권과 관련해서 편집부가 세웠던 방침 그대로 로드맵을 정리하는 수준에서 기사를 마무리했던 것이구요.

- 만화의 경우 편집부에서 작품을 기획하는 경우가 있으셨는지, 아니면 작가에게 전적으로 맡기시는 쪽이신지요.

= 창간부터 현재까지는 작가에게 전적으로 맡기는 편이었습니다. 작가 자신들의 역량만을 생각해도 충분히 저희가 생각했었던 작품을 보여 줄 수 있는 작가라고 생각이 되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제 잡지가 제 궤도에 들어서게 되면 조금씩 기획이 살아있는 작품을 실을 수 있도록 할 계획입니다.

- 작가 섭외는 어떤 기준으로 이루어졌는지요.

= 그 동안 주류에서 보여 주었던 것과는 차별화된 무엇인가를 보여줄 수 있는 작가를 생각해서 청탁했습니다. 또 작가진의 선정에 있어서 남녀, 연령대의 구분이 없도록 최대한 배려를 하는 방향으로 진행했습니다.

- 작가분들을 무슨 출판사 계열로 구분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서울문화사 쪽에서 활동을 보여주신 분들이 많은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요.^^

= 앗, 그런가요?? @.@;; 딱히 일부러 의도하고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만... ^^;;

- 기자님께서 개인적으로 '정말 실력은 뛰어난데, 이상하게 요즘 활동이 뜸한 것 같다.' 싶은 작가분 한 두 분만 꼽아 주신다면...

= 이강주 선생님(순정) : 그 동안 많은 활동을 보여 주지 않으셨었는데, 현재 다른 곳에서 활동을 다시 재개한다고 하십니다. 때문에 참여가 힘드실 것 같습니다.
문흥미 선생님(순정) :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래도 제가 순정 담당인지라.... ^^;;

계간만화 홈페이지


[5]
당연히 옳은 이야기만 길게 늘어 놓는 것이 아니라 논쟁적인 부분도 피하지 않는 집요함을 갖추었으면 좋겠다. 리뷰와 인터뷰 혼합 형태의 기사보다는 리뷰와 인터뷰 각각의 순도를 높여, 기사의 표현을 다듬는데 시간을 소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제작환경이 윤택한 것도 아니고, 중요한 것은 내용이니까...) 계간이라는 기간을 고려해볼 때 만화는 '보다 과감하고 독특한 작품'들로 강한 인상을 남겨주었으면 한다. 만화계 전체와 개별 작품(혹은 작가), 둘 중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을 유지하고, 작품에 대한 분석은 인문학적인 접근보다는 만화형식적인 접근을 좀 더 보고 싶다. 이런 것들이 앞으로의 [계간만화]에 대한 M씨의 개인적인 바램들이다. (말이니까 쉬운 내용들이긴 하지만, 또 M씨 개인의 바램이 올바른 만화전문지의 방향이라고 볼 수도 없는 것이지만..-_-;; 어쨌든..) 현재 [계간만화]의 컨셉과 방향성은 분명 충분한 기대감을 줄 수 있을만큼 긍정적이라 생각되고, 이 정도의 열의와 성의라면 머지않아 만화전문지의 표준이라고 불리울만한 멋진 책을 만나게 되는 일도 한낱 꿈은 아닐 것이라 감히 이야기해 본다. (그리고, 그 무렵에는 그 외로운 길에 경쟁자라도 등장하길 바라는 얄미운 기대도 함께.)


- 나온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현재 반응은 어떤가요.

= 판매 자체는 여타의 상업 잡지의 창간에서 볼 수 있는 그런 폭발적인 반응은 없습니다. 그러나 매체를 통한 홍보성 기사들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힘을 얻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책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려 주고 있어서 참 뿌듯하게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 물론 앞으로 계속해서 더욱 좋은 책을 만들라는 질책도 함께 따르고 있지만 말이죠.

- 다음호(여름호)에 대해 맛뵈기 예고를 해주신다면?

= 참여 작가진에 있어서 지난 봄호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일 수 있는 작가진을 구상하고서 청탁 중입니다. 하지만 확정된 것은 아직 말씀드리기가 조금 어렵네요. 특집 기사 또한 마찬가지인지라... 음... 그러고 보니 딱히 드릴 말씀이... ^^;;

- 이전 [계간만화]에서 문화관광부의 만화산업 진흥 5개년 계획에 대한 분석 및 제언 기사가 참 좋았던 기억이 있는데요. 장기적인 계획이고, 만화계 전체에 미치는 영향도 적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는 만큼, 한 번 다룬 것에 그치지 말고 지속적으로 다루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갖고 있습니다. 그와 관련된 진행상황들의 취재나 지적되고 있는 문제점들에 대한 문광부 담당자들의 입장을 들어보는 인터뷰 같은 것은 계획이 없으신지요.

= 물론 계획은 하고 있는 부분입니다만, 생각처럼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ㅠㅜ;;

- 만화의 작가진은 좀 더 다양한 작가를 소개하기 위해 이전 호와 최대한 겹치지 않도록 하시는 방향인지, 아니면 작품의 질과 내용에만 중심을 두고 그러한 제한 없이 결정하시는지요.

= 일단 여름호까지는 겹치지 않도록 신경을 쓰고 있는 중입니다. 가을호부터는 여름호 이후 반응을 보고서 결정을 할 예정이구요.

- 어느 정도 안정적인 활동을 보이고 있는 작가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이 주목받는 기회를 만드는 것에 비중을 두시려는 편입니까?

=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일단 만화계 전체의 다양한 작품을 소개하는 것에 주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대 선생님급의 작가부터 신인까지, 소년과 순정의 장르 구분이 없이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고자 합니다. 그 와중에서 신인의 비중이 조금 높게 나타난 것은, 아무래도 신인의 경우 아직 주류에 영입되지 않은 다양한 표현을 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기에 저희가 자연스럽게 청탁을 하게 되었던 것이구요.

- 장기적으로 볼 때, 정부지원으로 발행되는 잡지는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 홀로서기를 하고, 정부의 지원은 또 다른 새 잡지의 창간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은데요. 여기에 동감하시는지, 만약 동감하신다면 이런 쪽으로 어떤 로드맵이나 비전을 갖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 동감은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중이구요. 하지만 결국 그 문제는 판매를 통한 것 이외에는 스폰서를 따는 것인데... 현재로서는 어느 쪽이든 만만치 않은 게 사실입니다. 일단 올해는 단지 더욱 좋은 [계간만화]를 만드는 일에 집중할 계획이구요, 차후의 일은 내년초부터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기자님 개인적으로 현 만화계 상황에서 가장 불만족스러운 부분은 어떤 것이고, 시급히 고쳐졌으면 하는 부분은 어떤 것인지요.

= 너무나 여러 가지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사항인지라 무엇부터 말씀을 드려야 할지를 모르겠네요. ^^;; 시간적으로 되짚어 보자면... 대여점이 생긴 상황에서 여러 출판사들이 무분별하게 일본만화를 수입해서 대여점 체제를 확립시킨 상황이 그러하고, 더불어 만화 총판과 출판사의 권리금을 통한 관계의 유지도 그러하거니와, 현재의 상황에서 이에 대한 명확한 입장의 이해도 하지 않으며 자신의 입장만 이해해주길 바라는 창작자와 출판사 그리고 독자들, 그리고 음반시장과 마찬가지로 창작을 하는 이에 대한 권리를 이해해 주지 못한 채 법적으로 하자가 없으면 다 좋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독자들 등등... 너무나 이야기할 사항이 많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시급하며, 가장 불만족스러운 부분이라면... 일단은 산업적인 측면에서 접근을 했을 때, 만화라는 장르 자체에 대한 낮은 문화인식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개인적인 견해에서는 대여점과 빌려보는 만화체재를 정착시킨 것도 따지고 보면 높은 소장욕구를 만들지 못한 출판사와 독자들의 관계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만드는 곳에서도 좋은 만화를 좋은 품질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그에 적합한 돈을 주고 독자들이 사도 손해봤다는 느낌이 없어야 하는 것인데... 이제야 그런 시도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고 보입니다. 이런 시도가 점점 늘어나서 일본 단행본에 얽매이지 않는 우리나라의 고급 만화시장이 형성되었으면 하고 바랄 따름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만화계의 메이저 시장 및 출판사에서도 새로운 분위기가 형성되었으면 합니다.

더불어 아직까지도 멈추지 않고 쏟아져 나오는 일본만화에 대해서도 쿼터제를 통해서 대응하는 방법과 같은 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 국내 작가들의 고료는 얼마 되지도 않으며, 나오는 시기도 상대적으로 느린 편인데, 싼 수입료를 통해서 짧은, 일정한 기간마다 나오는 출간이 되는 일본 만화와는 비교가 힘든 게 현실이거든요.

또 문화적인 면에서 이야기해 보자면... 만화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소개해 줄 수 있는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 눈에 잘 띄는 주류 만화만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 다양한 접근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길 희망합니다. 이를 통해서 독자들은 다양한 문화를 체험하는 기회를 가지며, 창작자들은 꼭 주류 만화에 편승하는 것보다 독특한 자신의 영역을 확보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음... 좀 많이 흥분한 것 같네요.. ^^;;

- (아직 여쭙기에는 이른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만화정론지를 표방하시는 만큼, 언제나 좋은 이야기만을 하실 수는 없고, 특정 회사 혹은 특정 단체, 특정 작품에 대해 불만스러운 점을 이야기해야 하는 경우도 있을텐데요. 그런 부분에 대한 현실적인 두려움이라거나.. 현장에서 뛰는 기자로서 피부로 느껴지는 부담이라든가 하는 것이 있나요.

= 아직까지는 그런 부분이 없었습니다만, 언젠가 조금 더 깊은 부분을 건드리다보면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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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처럼 하릴없이 인터넷의 바다를 떠다니던 서퍼보이 M씨는 갑자기 힘이 빠졌다. '그래도 그림은 쫌만 더하면 한승희가 될 수 있겠는 걸?', '간간이 등장하는 나레이션들도 신선함은 떨어지지만 꽤 감각적이잖아?' 빈약한 주제의식에 투덜거리던 자신을 나름대로 위로하며, 그녀의 작품들을 읽어나가던 M씨로 하여금 이빈이란 작가에게서 완전히 정을 떼게 만든 그 만화. "G-I-R-L-S"가 어느 웹페이지의 청소년에게 권하는 만화 목록의 맨 처음에 떠억 하니 놓여 있었던 것이었다. 몇 달 전 지하철에 앉아 그 책을 읽던 때의 불쾌함이 한꺼번에 다시 몰려오고 있었다.

과장되지도 걸러지지도 않은 생생한 여고생들의 일상을 볼 수 있다는 찬사를 받고 있던 그 작품에는 - M씨의 기억에 따르면 분명 - 결코 추천될 수 없는 아니, 추천되어서는 안 될 빌어먹을 에피소드가 포함되어 있었다.

출석부로 학생의 뺨을 후려치고, 반이 떠들썩하다고 반장을 구타하던 윤리 선생이 병원에 입원한 자신을 찾아온 옛 제자에게 "나에게 찾아 올 시간이 있으면 검정고시라도 쳐서 고교졸업자격을 취득하라"고, "아이의 가정환경 조사자료에 어머니의 학력을 중졸로 기록하게 할꺼냐"며 언성을 높이는 대목에서 등장인물들은 모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그걸 바라보는 M씨의 입가에서는 어제 먹은 밥알이 곤두서는 역함을 참지 못한 채, 식도를 거꾸로 넘어온 냄새나는 신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 이제 이 만화의 가르침을 똑똑히 들어라. 식사 중에 똥 얘기를 예사로 늘어놓던 비위강한 M씨의 속을 단번에 뒤집어 놓은 이빈의 파워풀한 걸작 [Girls]의 메시지에 귀 기울여라.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세상의 형편없는 어머니들이여, 모두 부끄러워하라. 자식을 쪽팔리게 하는 당신의 일자 무식과 결코 검정고시 이외에는 해결책이 없는 당신의 현격한 부모로서의 자질부족을 절감하라. 그리고,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우리의 귀여운 여학생들에게 꼭 일러둘 말이 있다. 참아라. 견뎌라. 네게 강요되는 수많은 비합리와 네게 행사되는 끝없는 폭력은 모두 널 위한 것. 무조건 참아라. 끝까지 견뎌라. 그곳을 졸업하지 못하면 넌 애시당초 좋은 부모가 되기는 그른 것이니. 자나깨나 너희의 졸업만을 생각하셨다던 그 선생님이 왜 두발을 단속하고, 복장을 단속하고, 공장에서 찍어낸 인형처럼 학생들을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려해서 너희들이 학교로부터 도망치고 싶게 만들었는지 따위는 궁금해 마라. 왜 쉬는 시간에마저 만화책과 대중음악이 금지되는 - 교양은 없고 지식만 있는 - 전인교육으로 너희들을 숨막히게 만들었는지 따위는 따지지 마라.

다 철없던 우리를 위해서였다는 한마디에 감동해라. 속 깊은 선생님의 따스한 폭력에 그저 머리를 조아려 감사해라. 우매한 대중을 계도하겠다며, 제멋대로 자르고 붙이며 예술을 재단하려는 심의에 동의해라. 아직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이르다며, 저급한 의식 수준의 국민들을 향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총질하던 군사독재정권의 당위성을 인정해라. 국가를 절대절명의 위기로 몰고 갔을지도 모르는 수많은 혼란의 위험들로부터 어린 백성을 구출해주었던 모든 사회적 폭력 앞에 무릎 꿇어 경배하라. 그들이 이룩한 진보와 발전의 눈부신 이 세상을 보라.

본디 질시와 투기가 심한 우리 여인네들을 그나마 도덕적인 존재로 유지시켜 주었던 칠거지악의 가르침을 숙지하고, - 남들 보기에 - 화목한 가정을 위해 여자와 북어는 사흘에 한번씩 두드려 패야한다던 우리 아버님들의 혜안에 탄복하라. 당할 때는 불만스럽겠지만 지나고 나면 모두 우리를 위한 것. 그때는 알 수 없었던, 그 기분 나쁜 귀싸대기 뒤에 숨어 있던 깊은 사랑을 느끼며, 우리가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었을 때, 우리 역시 우리의 아이들에게 우리가 만든 기준을 강요하며 우리가 받았던 광폭한 사랑을 그대로 되돌려 주어라.

어떤 경우에는 폭력도 정당화 될 수 있다?

자신이 세워놓은 기준에 맞춰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는 자를 낙오자로 규정짓고, 폭력을 행사해서라도 - 형식적으로라도 - 그 기준에 도달하는 학생을 만들려하던 윤리 선생의 작태는 자신의 가치 기준이 결국 옳을 거라는 근거 없는 아집과 속이야 어떻건 일단 세상이 보기에 그럴듯한 겉모양의 제품을 양산하려는 빛나는 장인정신의 소산일 뿐이다. 물론 비열한 것은 비단 그만이 아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우연히 자리하게된 동창생들과의 만남에서 M씨는 분명히 보았다. 고등학교 3학년 당시, 아이들을 개 잡듯 하던 옆 반의 담임과 매 한번 들지 않던 자신의 담임을 비교하며 "왜 자신의 담임은 옆 반 담임처럼 자신을 패지 않았었냐"며 좀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 탓을 그에게 돌리던 개새끼(아니, 개년이라고 해야하나?)를 M씨는 분명히 보았다. 이건 차라리 새디스트와 메저키스트의 환상적인 조화였던 것이다.

M씨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Girls] 같은 책이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이 아니다. 어느 잡지의 인터뷰에서 "한 컷 한 컷을 아트(art)처럼 그리고 싶다"는 멋진 멘트를 날리던 작가가 M씨의 헛소리 따위에 기분 상하기를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작가는 '난 그저 현실을 그렸을 뿐이야~'라고 천연덕스럽게 대꾸 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그것이 결코 감동적이거나 추천 받을 만한 현실이 아니었다는 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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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세스 안나]


[프린세스 안나] 앞 - 유년의 끝


"길고 어두운 마루의 끝에는 반쯤 말라버린 넓은 잎을 가진 식물의 화분이 놓여 있고 닫지 않은 좁은 창으로 희미한 빛이 들어오고 있다. 오랫동안 수리하지 않아 마루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고 금이 간 벽돌담 위로는 야생으로 자란 강낭콩과 담쟁이가 쓸쓸한 바람에 흔들린다. 마루의 끝을 돌아서면 그 곳은 정말 빛이 들지 않는 모퉁이다. 자라난다는 것은 그런 모퉁이를 소리 없이 돌아서는 것과 같다. 찬란한 오후의 마지막 진한 햇빛은 어두운 마루의 음울 속으로 가라앉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좁은 창가의 화분은 천천히 시들어버린다." - [프린세스 안나] 중


그들은 왜 내게 떠나야만 한다고 했을까

또래의 아이들보다 키가 무척 작은 아이. 여기저기 집들뿐인 그 넓은 동네에 친구라곤 하나뿐. 그리고, 어느 해 여름인가... 웃으며 바닷가로 떠났던 아이의 친구는 돌아오지 않았어. 마당에 있던 앵두나무를 좋아하고, TV프로그램이라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막힘없이 외워대던 아이. 제 키만한 알루미늄 배트를 휘두르며 혼자 홈런! 홈런! 외쳐 대더군. 50원짜리 동전 하나만으로도 작은 손엔 가득, 채 몇 분도 안 되 다시 나올 오락실을 신이 나서 달려가던 아이. 빠-다-다-당- 골목 가득 흰 연기를 내뿜으며 달려가는 소독차 뒤로 손 흔들며 뛰어 사라져버렸어.....

소년이여, 울지 말기를. 기대는 적을수록 좋은 것. 키만큼이나 속이 깊은 꺽다리 친구 하나. 덩치만큼이나 마음이 넓은 뚱땡이 친구 하나. 그 외엔 모두 스쳐보낼 것. 설령 그들이 널 잊어도 네가 잊은 많은 걸 생각해낼 것.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들이 전부는 아닌 걸. 진정 소중한 것들을, 잃으면 되찾을 수 없는 것들을, 꼭 잡고 있을 것. 그리고, 그 무엇보다 너를 지킬 것.

어른이 되고싶지 않더라도, 쓰러지지 말기를. 사는 것은 항상 힘들어만 지는 것. 숨이 가쁘면 잠시 쉬어가는 걸, 앞이 보이지 않으면 뒤를 보는 걸, 기억하기를. 삶에 마지막이란 없는 것. 설령 그대 영원을 믿지 않을지라도 소중함은 알아둘 것. 설령 그대 돌아갈 수 없을지라도 지워버리지는 말 것.


잃어버린 건 나

힘들었었니. 내가 널 떠나 있던 동안. 그냥 가 버리지 그랬니. 그렇게 아팠으면서. 왜 넌 조금도 변하지 않았니. 네겐 소중했나봐... 일곱 살의 봄이었던가. 새 인형을 얻기 위해 마당에 묻어 버렸던 더러운 헝겊 인형을 넌 여전히 가슴에 안고 있었어.

한 살 또 한 살 나이를 먹어 갈 때마다 넌 조금씩 슬퍼 보였어. 내 키가 자랄 때마다 이상하게 넌 자꾸 작아져 갔어. 내 얼굴에 화장이 짙어질수록 너는 창백해졌어. 그렇게 야위어 갔어. 노란 가로등 아래 처음 입 맞추던 날, 넌 어두운 골목 끝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어.

어딘가로 향하던 기차 안에서 넌 삶은 계란 하나를 조용히 내 무릎에 놓아주었어. 가끔은 네가 웃던 모습이 생각나 미칠 것만 같아. 이젠 네 손을 잡고 돌아가고 싶어. 아련한 기억 너머 그곳으로 그냥 널 따라 가고 싶어.


[프린세스 안나] 줄거리 요약 - 불행은 어디에서 오는가


어쩐지 디즈니의 화이트 스노를 보고 있는 것 같아.

어린 여자아이는 누구나가 예뻐하는 것이니까, 아주 어렸을 때에는 엄마와 함께 백화점에 구두를 사러가거나 커다란 푸른 배추를 배달해주는 사람들이 집안으로 들어오면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받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의 여자아이들의 인생은 다르겠지만 따뜻한 난로가 있는 마루에서 스노 화이트의 그림 조각 퍼즐을 갖고 놀 때의 시간은 그저 끈끈하고 달콤한 포도젤리 같은 거다. 그 속에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포도향기가 여자아이들의 삶에 가득하고 따뜻한 마루나 엄마의 초록빛 울 스커트는 영원히 거기에 있는 듯이 느껴진다.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였을까.

성장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공주처럼 사랑 받던 어린 여자아이도 마찬가지다. "이 아기가 자라면 정말로 모든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받겠어요. 이 귀여운 눈동자를 보세요." 이제 아무도 엄마에게 그런 이야기를 건네지 않는다. 대신 사랑 받기 위해 몸부림치고, 왜 나를 사랑해주지 않느냐며 울부짖는 초라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일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유 없이 사랑 받는 일 따위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누군가가 웃는 얼굴로 높이 안아 올려주거나 호두가 든 새것인 아이스크림을 내미는 정도의 사랑에 만족하지 못하게 된 때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 같기도 하다. 화사한 스노 화이트와 달콤한 포도젤리 같은 기억은 이제 불행의 숲을 조금 더 어둡게 보이도록 만들뿐이다.


소녀가 되어서도 프린세스로 남은 것은 안나뿐이었다.

"도대체 왜 다른 여자들은 되는데 당신 여동생만은 안 된다는 거야." 아버지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엄마는 이 문제에 와서는 아버지를 설득한다거나 화를 낸다거나 싸우고 싶지 않다. 엄마는 그런 아버지의 자유분방함을 못 이겨하며 우리들을 떠났다. 아직 아이들이 어린데. 엄마는 기차를 타러가면서 한번쯤은 이런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에는 참을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아버지가 외국으로 떠나버렸을 때 이모는 스물세살이었고, 아직 어린 아이들 네 명의 엄마가 되어야만 했다. 그것은 이모에게 남편이 아무 말 없이 뉴욕으로 떠나버린 것보다 더욱더 참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야간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노란 제복을 입는 구두회사에서 일하고 있던 스무살의 언니는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던 곧 서른이 되는 마르고 검은 얼굴을 가진, 한번 결혼한 경력까지 있는 남자와 결혼하게 된다. 비가 오는 늦은 가을날 집 앞 골목에서 언니는 젖은 머리칼로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고 있다. 남동생은 아픈 여동생의 겨울코트를 사주기 위해 신문배달을 했던 일도 있다. 그리고 이모는 결국 그 돈으로 고장난 대문의 자물쇠를 수리하고 안나의 화실비를 냈다.

부엌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던 이모는 화실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서는 안나를 불렀다. "내가 얼마나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줄은 네가 잘 알고 있지. 네 언니도 대학 같은 데는 갈 생각도 못해봤어. 네 동생들도 생각해봤니. 다 떨어진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가는 네 남동생이나 한겨울 내내 겨울 코트도 없이 다니는 저 아이를 봐, 넌 뭐든지 다하지. 대학도 갈 거고 미술학원에도 다니잖아. 밤에는 한번도 집에 돌아오는 일이 없고. 넌 네 아버지를 닮았어. 가까운 사람들을 불행하게 하지."

아버지는 말을 타고 황야를 달리는 것처럼 거침없이 살았다. 이 세상의 어느 것도 그가 달리는 길을 막을 것이 없었다. 한때는 서울에서 꽤 유명한 건축 설계사였던 아버지는 사실은 화가가 되고 싶어했다. 아버지는 아내의 동생과 결혼하고, 그녀가 아이를 낳은 몇 달 뒤에는 화가가 되기 위해 뉴욕으로 떠났다. "내 딸들은 다 예쁘고 강하다. 아무도 함부로 하지 못하고 서울에서 가장 자신 있는 여자가 된다. 네 동생들도 마찬가지야. 말을 타고 달리는 것처럼 거침없이 사는 것이 좋다. 남자를 선택할 때면, 그는 모택동 같은 남자라야 한다. 프린세스는 왕과 결혼하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안 돼." 아직 어린 안나에게 아버지가 말하고 있다. 하지만, 도대체 강하고 아름다운 것은 무엇일까, 그런 것이 과연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살아나가는 것이 아주 힘들다는 것, 어떤 환상도 성공하지 못하리라는 것, 오랜 시간이 흐르면 지나간 일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핑크와 안나를 이 세상에 하나뿐인 공주처럼 사랑하고, 이 세상 끝나는 마지막 날까지 안나와 함께 있을 노아가 곁에 있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아" 이것은 안나가 처음으로 화실에서 밤의 거리로 나오면서 깊은 어둠을 향해서 하였던 말이다. 이 세상에는 두려운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결국 소녀가 되어서도 프린세스로 남은 것은 안나뿐이었다.

여자들을 위한 잡지에 남자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면, 여자들은 절대로 남자를 변화시킬 수 없고 남자의 양말색에 관한 기호조차도 진정으로 원하는 대로 할 수 없으리란 것에 대해 말하고 싶어진다. 모든 트러블이란 것은 이기심 때문이지 그 남자는 애초에 애정도 없고, 사디스틱한 성향 때문에 당신에게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당신이 싫기 때문이다. 이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당신은 그 남자가 그런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면서, 마지막에는 연극으로 울부짖는다. 당신은 은연중에 자기의 인생이 연극조로 되어가는 것을, 당신이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는 것을 즐기고 있다. 그 남자가 사디스트가 아니라 당신이 마조히스트인 것이다. 아기를 낳고 버림받았다고 호소하면 누구나 동정해주고 성적으로 약한 당신이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건 당신에게 도덕적 우위를 인정해줄 수는 있겠지만 진정으로 당신이 원하는 바는 아니다. 말을 타고 중국의 황야을 달리는 젊은 날의 강청의 것처럼 거침없는 생은, 영원히 당신에게 오지 않는다.


검은 개는 숨죽여 당신의 가장 행복한 그림자를 쫓는다.

행복은 아주 작은 균열로도 쉽게 허물어져, 바닥이 보이지 않는 불행에 잠긴다. 불행은 불행을 부르고,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끈적이는 늪처럼 견고한 틀 속에서 깊이 더 깊이 잠들어간다. 끝이 없는 불행. 지쳐간다. 이 세상은 슬프고 또 슬프다. 마치 저 강물과도 같다. 젖은 머리칼과도 같다. 아무것도 이루어지는 것은 없고 안전한 곳은 하나도 없다. 오래지 않아 잊혀질 이런 날들을, 살아간다.


[프린세스 안나] 뒤 - 강하고 아름다운 것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림 같은 소설, 소설 같은 그림

"과연 누가 자신이 안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나. 어둠의 나라를 방황해보지 않은 여자아이는 또 누구인가. 폐허에서 태어나지 않았다고 누가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나. 술래가 되어 저녁의 어두운 골목길을 달려가다 보면 그늘과 그늘, 땅거미와 땅거미, 서성이는 미친개와 빈집들. 아이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눈알 빠진 인형의 주홍빛 머리칼이 천장에서 툭 떨어진다. 매를 맞아도 울지 않는다. 텅빈 저녁의 거리를 끝없이 달려간다. 이제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가엾은 나의 노아... 죽는 날까지 나는 두리번거린다. 그런 안나의 눈동자가 어떤 것인지 나는 궁금했었다. 변병준의 그림에서 나는 그것을 보았다." - 배수아


톤의 사용이 극도로 자제된 변병준의 그림은 마치 판화를 보는 듯하다. 늘 비가 오는 듯 상처난 화면은 그 자체로 습하고 어둡고 우울하다. 흰자위가 드러난 눈의 사람들은 반쯤은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더 이상은 잃을 게 없다는 듯, 이젠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듯, 절망과 허무와 분노에 잠겨있다. 과거와 현재의 명암이 선명히 대비되는 원작과는 달리(각각 어린 시절의 밝고 행복한 기억과 어둡고 불행한 현재를 대변하는 '디즈니의 스노 화이트'와 '겨울, 전쟁으로 불구가 된 사람들'은 수 차례 반복되는 원작의 대표적인 이미지들이다.), 변병준의 그림체는 어린 시절을 그려내는 경우에도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그리는 도입부에서조차 따뜻함보다는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행복에 대한 불안의 그림자가 화면을 지배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아버지, 이모, 엄마 3인 사이에 존재하는 감정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해낸 - 만화 [프린세스 안나]의 존재 의의를 입증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 SCENE #1의 크리스마스 저녁 에피소드는 단연 압권이다. 물론 원작도 "어린 여자아이는 누구나가 예뻐하는 것이니까…"와 같은 회상조의 첫 문장이 디즈니의 스노화이트를 보는 듯한 행복한 풍경은 그저 과거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주며 출발하긴 하지만.

처음 서점에서 그녀의 소설을 집어들었을 당시, M씨는 텅빈 글을 읽고 싶은 강렬한 욕구에 사로잡혀 있었다. 싸구려 캐릭터와 유치찬란한 스토리의 순정만화들조차 무슨 생각이 있는 듯 한 두 마디씩 꼭꼭 끼워 놓곤 하는 그럴싸한 나레이션들이 너무도 짜증스러워졌을 무렵이었다. 차라리 아무 철학도 담지 않고 현실에 대한 아무런 은유나 풍자도 없이 그저 읽는 자체로 재미를 주는 그런 글을 M씨는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택한 것이 변병준의 만화 [프린세스 안나]에서 용기를 얻은 배수아의 초기 단편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M씨의 선택은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그녀가 매우 메시지가 강한 소설을 쓰는 작가라고 생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소설은 충분히 불편했다. 생각나는 대로 써내려 간 듯,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들은 특별한 순서와 경계 없이 뒤섞여 있었고, 서술어의 종결어미 역시 내용상 시제의 제약을 벗어나 과거형과 현재형이 혼재되어 있었다. 전통적인 서사적 글쓰기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꽤나 당황스러운 느낌으로 다가설 만한 생경함의 마력이 M씨를 사로잡는다.

배수아의 소설은 회화적이다. 근작 [그 남자의 첫사랑]에 이르러서는 많이 희석된 느낌이지만, <프린세스 안나>가 수록된 그녀의 2번째 단편집 [바람인형]은 삽화 한 점 없이 깨알같은 글씨만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종종 한 폭의 서양화 혹은 어두운 단편영화의 한 시퀀스를 연상시키곤 한다. 마치 나완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감정이 배제된 차가운 묘사와 짧은 문장, 그리고 다소 불친절하고 난해하게까지 느껴지는 이야기 전개가 대단히 인상적인 그녀의 소설이 주는 느낌은 한마디로 '이미지로서의 글쓰기'라고나 할까.


고흐가 왜 귀를 잘랐는지 아는가

[프린세스 안나]는 어떤 의미에서 [달과 6펜스](서머셋 모옴)의 외전이다. [달과 6펜스]가 화가가 되기 위해 가족을 버리고 다른 나라로 떠난 주인공을 통해 예술가란 일반적인 도덕 관념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사람들이며, 그들은 진정 원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세상에서 그에게 지운 책임의 무게 따위는 순식간에 벗어 던질 수 있는 자유롭고 열정적인 사람들임을 보여주었다면, [프린세스 안나]는 그들이 버리고 간 -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간혹 예술가가 되고 싶어한다거나 예술가와의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는 사람들을 보게 되면 세상에 강하고 아름다운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말하고 싶어진다. 예술가는 세상으로부터 배운 인간다움 - 혹은 인간으로써 마땅히 지켜야할 덕목들 - 으로부터 철저히 어긋나있는 자신의 내면에 대한 자각과 동시에 시작되는 끊임없는 자기혐오와 세상을 획일적으로 재단하려는 일반인들의 폭력으로부터 도망치는 극심한 대인공포에 평생을 시달려야 한다. 그런 지독한 고통 속에서도 '그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바로 예술가다. 태어나면서부터 해도 되는 일과 해선 안 되는 일을 가르치는 교육이 주입되는 상황에서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예술가의 삶이란 행복하거나 즐거운 어떤 것이 아니다. 그들의 삶에는 안전한 행복을 원하는 보통 사람들이 탐낼만한 어떤 매력도 없다. 예술가란 결코 되고 싶어할 만한 그 무엇이 아니며, 되고 싶다고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회라는 조직체의 입장에서 본다면 예술가는 범죄자와 똑같이 해롭다. 자유롭고 정열적인 동시에 선하고 도덕적인 예술가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을 비웃는 자유로움을 가진 그들을 부러워하고 동경하는 일이 가능한 것은 그들로부터 한발 물러나 바라보고 있을 때뿐이다. 당신을 향해 불꽃처럼 타올랐던 그들의 열정적이고 낭만적인 사랑은 어느 순간 다른 대상을 향해 그렇게 타오를 것이고, 그의 당신에 대한 욕망이 사라짐과 동시에 당신은 아내라는 혹은 가족이라는 이름만으로 더 이상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사랑, 도리, 윤리... 그럴싸한 명분으로 세상이 자신에게 지워준 어떤 책임감도 그는 주저 없이 거부한다. 당신이 부러워하고 동경했던 그들의 강함과 자유로움과 솔직함이 당신을 습격하는 때가 비로소 오는 것이다. 예술가란 철저히 자신의 가치기준에 의해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자신이 동의할 수 없는 세상의 규범과 도덕 따위에는 얽매이지 않는다. "저런 짐승만도 못한..." 그런 손가락질 따위는 두렵지 않다. 원하는 작품을 위해서 살인이 필요하다면 살인을 하고, 마약이 필요하다면 마약을 해야한다. 자, 당신은 그래도 예술가를 존경하는가? 예술가가 되고 싶은가? 당신은 고흐가 왜 자신의 귀를 잘랐는지 아는가? 강한 것이란 결국 무언가를 상처 입히게 마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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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 벼랑 끝을 향해 가고 있다고 해도.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을꺼야. 네가 나의 하나뿐인 친구라 해도. 소중한 가족이라고 해도. 나는 결코 아무것도 하지 않을꺼야. “내가 보기에 그 길은 아주 위험해.” 몇 번을 반복해서 말해 주겠지. 한번쯤은 네 손목을 잡아 볼지도 몰라. 하지만, 그 이상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꺼야. “이건 내 인생이니, 상관하지 말라구.” 손을 뿌리치며 화를 내든, 아니면 눈물을 글썽이며 변명을 늘어놓든, 네가 계속 벼랑을 향해 걸어간다면, 그때 나는 너를 떠날꺼야. 네가 벼랑에 다가가는 속도보다 더 빨리, 너에 대한 나의 애정을 거둘꺼야. 더 이상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꺼야.


도대체 무엇을 더 할 수 있겠어.

진정으로 그를 아끼고 사랑한다면, 그리고 그가 - 내가 보기에는 - 분명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면, 그의 바지 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든지, 납치해서 감금을 하든지, 심지어는 때려 굴복시켜서라도 멈추게 만들어야 한다는 거야? 강제로라도 벼랑에서 떨어져 죽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거야? 3류 드라마에 나오는 악역 부모들처럼, 대학에 가기 전까지는 아이를 책상 앞에 가두고, 배경이 좋지 않은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자식의 뺨을 때리고, “두고봐라. 너도 결국에는 내가 옳았다는 걸 알게 될꺼다.” 자신감 넘치는 고함을 지르며, 그렇게 되야 한다는 거야? 믿어지지 않겠지만, 그들도 모두 자식을 사랑해서 그러는 거야. 사랑하는 자식이 젊은 날의 철없는 치기로 인생의 벼랑을 향해서 가는 것처럼 느껴지니까, 그렇게 화를 내고 자신의 뜻을 강요하는 거라구. 누구에게나 벼랑의 의미와 위험은 모두 다른 거니까,


결국 고통받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뿐이야.

술을 마시든, 담배를 태우든, 마약을 하든, 그것은 그가 선택한 그의 인생이니까. 그런 것들이 자신을 망쳐놓을 거라고 생각지 않는 것이든, 망가질 것을 알아도 두렵지 않아서 용감무식하게 살아가는 것이든, 망가질 것이 두렵긴 하지만 당장의 즐거움을 포기 못하는 것이든, 그건 그가 결정한 그의 인생이니까. 순간의 쾌락을 쫓든, 원대한 이상을 쫓든, 그걸 강제로 막을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는 거니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한심해 보여도, 그에게는 그 나름대로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테니까. 그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내 뜻대로 움직이는 인형이 되어 달라고 할 수는 없는 거니까. 결국 고통받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 뿐이야. 그가 건강하기를 바라는 사람들 뿐이야. 그가 불행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 뿐이야. 그가 자신이 생각하는 제대로 된 삶을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 뿐이야. 역지사지, 그 이상의 이해가 불가능한 인간에게 있어서, 자신과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결국 고통받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 뿐이야. 그를 사랑할수록, 사랑하면 할수록 더 고통을 받을 뿐이야.


영화 [인터스테이트]에 이런 에피소드가 있어.

가출한 아들을 찾아 나선 한 어머니와 함께 주인공은 벤튼시라는 곳에 도착하게 되었지. 한 나이트클럽에서 아들을 발견한 어머니는 “제발 집에 가자”고 애원하지만, 아들은 이미 유포리아(마약)에 취해 몸을 흔들어대며 이렇게 대꾸하는 거야. “웃기지마! 난 유포리아가 있어... 이게 최고야. 꺼지란 말야! 그냥 내버려 둬, 좀!!” 둘의 실갱이를 말리던 경찰은 이 도시에서 아들(방년16세)은 법적 책임을 질 수 있는 나이에 해당되므로, 그가 여기 있길 원하면 떠나도록 강요 할 수는 없다며 어머니에게 물러설 것을 권하지. 어머니는 경찰관에게 “저 아이는 아직 어린애라서,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하소연해보지만, 경찰관은 단호하게 답해주었어. “아니죠. 알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곳곳에 경고 표지판을 붙여두는 거지요.” 실제로 이 도시에는 ‘유포리아는 소량에도 중독성이 있음’을, ‘유포리아를 끊으면 죽음에 이를 수 있음’을, 그러므로 ‘합법이지만, 사용하지 말 것을 강력히 권고’하는 표지판이 곳곳에 있었고, 라디오를 통한 안내방송 또한 지속적으로 방송되고 있어 우연히 이 곳을 방문한 사람조차 그러한 공지를 접하지 못할 확률은 거의 없었고, 또한 유포리아가 배포되는 건물이나 지역에 출입하는 사람들에게는 경찰이 입구에서 그러한 주의사항들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있었어.

장면이 바뀌면, 그 어머니와 주인공은 경찰서에서 보안관의 설명을 듣고 있어. “이 마을은 심각한 마약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린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봤죠. 거래와 사용의 처벌. 감옥에 보내보기도 하고... 하지만 한가지로 귀착되더군요. 어떤 인간들은 도무지 통제가 되질 않아요. 그래서 급진적인 해결책을 마련했습니다. 유포리아. 인조 마약이지만... 중독성이 강하고,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사용하지 말라고 경고했죠. 하지만 말했듯이... 어떤 놈들은 어쩔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거 한 번만 하면 완전히 걸려들게 되죠. 그럼 우리가 그들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건 그들은 통제할 수 있는 것이고, 우린 별로 비싸지 않게 가격을 정합니다. 그래도 살 여유가 안 된다면... 길거리에서 일하면 되요. 휴지나 줍고, 화장실 청소하고, 그러면 유포리아를 줍니다. 멋진 성과가 아닌가요? 이 마약은 매우 강하고 성적욕구도 없애주죠. 작년에는 이 도시에서 강간이 단 한 건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건 너무한 것 같다고. 그들(마약중독자들)은 그들 자신이 뭘 포기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며 고개를 가로젓던 주인공에게 보안관은 묻지. “그들이 선택한거야. 그들이 비참해 보이니? 그들은 단순히 행복한 삶을 살고 있어. 아무것도 결정할 필요 없이 책임감도 없고... 아무 문제될 게 없지. 그들만의 답을 찾은 거야. 네 삶이 그들의 삶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니?”

모든 설명을 다 듣고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무슨 짓이든 할 테니 제발 아들을 보내달라”며 막무가내로 매달리는 어머니에게 보안관은 3가지 가능한 선택을 제시해. (1)아들을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곳으로 떠난다. 만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면 포기할 수 있을 테니까. (2)자식에게서 삶의 의미를 찾을 생각을 버리고, 자신의 인생을 가치 있게 할 다른 무엇인가를 찾아본다. (3)유포리아. 마약은 모든 고통을 잊게 해줄테니. 자, 그 어머니는 과연 어느 것을 선택했을까?


네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리고, 내가 그런 너를 무심하고 차갑게 대하면. 사람들은 아마 네가 약자라고 생각할꺼야. 언제나 제멋대로인 내게, 너의 바램을 냉정히 무시하는 내게, 언제나 네가 먼저 인사하고, 웃어주고, 선물하고, 도와주면. 사람들은 아마 네가 뜨거운 가슴을 가졌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만일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가 자신을 소중히 하지 않을 때마다, 나는 무척 화가 날텐데. 아무리 그를 사랑하더라도 그걸 막을 권리가 내겐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더욱 괴로울텐데. 그가 힘들 때마다, 그가 아플 때마다, 나는 너무나 고통스러울텐데. 아무리 그를 사랑하더라도 도울 수 없는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더욱 비참할텐데. 나는 결국 그를 포기하고 말텐데.

내가 느끼는 고통의 크기가 너보다 크기 때문인지, 아니면 나의 인내와 희생이 너보다 작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모든 것을 각오하고 사랑할 수 있는 네가, 그런 모든 것을 견디며 사랑하는 네가, 벌겋게 끓는 쇳물 속에서도 형체를 잃지 않는 강철처럼 강한 네가, 나는 너무 부럽다. 사랑을 하면서도 그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네가, 그런 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네가, 나는 정말 너무 부럽다.


세상에는 타고난 유리턱도 있는 법이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사랑할 수 있는 너와는 달리,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하나의 다리를 공유한 샴쌍둥이처럼 한 몸이 되어버리는, 그러므로 그의 아픔이 자신의 아픔처럼 고통스럽고, 그와 이별할 때는 자신의 한 쪽 다리마저 함께 잃어버리는, 그런 사람도 있는 법이야. 그 끔찍한 상처가 치유될 수 없도록 영원하고, 잊혀질 수 없도록 집요해서, 그런 상처를 만들었던 감정이 다시는 몸 안으로 들어올 수 없도록 면역이 생겨버리는 거야. 남은 한 쪽 다리마저 잃어버릴 수 없다는 절박함이 본능적인 방어기작을 작동시켜 버리는 거야.

나는 이대로가 좋아. 현재에 만족해. 그냥 내버려둬. 모두가 너와 같은 것으로부터 행복을 느끼리라는 생각은 오만이야. 네가 누군가에게 사랑한다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처럼,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도 그래야만 하는 절실함이 있다는 거야.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마음이 변했든, 변하지 않았든. 영원히 사는 사람은 없는 거니까. 이별은 어떤 식으로든 오게 되어 있는 거니까. 그걸 견뎌낼 자신 없을 뿐이야. 정을 쌓으며 살고 싶지 않아. 아름다운 추억 같은 건 싫어. 그러면 그럴수록 이별을 견뎌내기는 더욱 어려워지니까. 즐거움이 있어 고통도 감수할 수 있다는 너와는 달리,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즐거움을 포기할 수 있다는 거야. 냉정할 정도로 맺고 끊는 게 분명하다는 건, 완전히 끊지 않고는 애정과 관심과 그에 따른 고통의 크기를 조절할 수 있는 냉정함이 없다는 거야.

내가 마음을 열고 너처럼, 사람들과 상처받고 위로 받으며, 사랑하고 사랑 받으며, 그렇게 아웅다웅 살아가게 되는 것은 내게 해피 엔딩이 아니야. 그건 자신의 수집품 목록에 하나의 이름이라도 더 추가하려던 너의 이기적인 욕심이 부른 나의 죽음일뿐이야. 사랑해. 사랑해.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취해 퍼붓던 너의 이기적이고도 끈질긴 공격에, ‘혹시...’ 하는 마음에, ‘어쩌면...’ 하는 방심에, 단단했던 껍질이 조금씩 부서지고 온 몸이 서서히 녹아 내린 나의 파멸일 뿐이야. 너는 만신창이가 된 나의 시체를 안고 “이젠 너도 행복하지”하며 웃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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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씨의 눈은 12살 때부터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하여 1년 뒤에는 마이너스의 시력으로 곤두박질쳐 지금에 이르렀다. 그것 때문인 것 같다. 그가 세상에 대해서 삐뚤어지기 시작한 것은. 흐릿한 시야는 흐릿한 사고를 만들고 흐릿하고 삐뚤어진 사고는 또 그만큼의 흐릿하고 삐뚤어진 성격을 만든다. 그는 여태껏 그렇게 살아왔다. 안경이나 콘텍트 렌즈 따위는 끼지 않는다. 세상의 이 흐릿하고 삐뚤어짐을 그도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가 보는 그 흐릿하고 삐뚤어진 세상 안에서... 그는 아마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었나 보다.


왜 사랑해야 하는가.

M씨가 세상으로부터 지겹게 들어온 가르침. 부모를 사랑할 것. 형제를 사랑할 것. 남편을 사랑할 것. 아내를 사랑할 것. 자식을 사랑할 것. 참, 어떤 가수는 이런 황당한 노래도 불렀지. 우리 모두 사랑하자. 굶주림에 시달리는 지구반대편의 아이도. 전쟁으로 죽어 가는 먼 나라의 이웃도. 심지어는 눈물로 참회하는 흉악한 범죄자까지. 설혹 그들이 그럴만한 자격이 없다 여겨진다 할지라도. 가능한 모두를 사랑하자. 사랑은 행복한 평화를 가져 올 테니.... 그러고 보니 궁금해지는데, 그들이 진정 원했던 것은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사랑이 가져다 줄 자신의 행복이었을까.

부모를 사랑하고, 아이를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그것이 정말 당연한 거라면. 그것이 정말 자연스러운 거라면. 왜 그들은 그렇게 기를 쓰고 그것을 가르치려 했을까.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날 때부터 정해진 누군가를 그저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일까. 집보다는 사회에서 훨씬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이 무한경쟁사회에서 가족이라는 이름만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일까. 사랑해야 하는 것일까. 술만 들어가면 순식간에 개로 변신하던 그 누군가도 이제 아빠가 되고, 남편이 될텐데.. 아버지란 이름으로, 가족이란 이름으로, 아무렇지 않게 사랑 받게 되는 것이 당연한 걸까. 도대체 그렇게 이기적인 말이 어딨어! 사. 랑. 해. 야. 한다니.

사랑이 증오보다 위대하고 아름답고 올바르고 정의로운 아니, 적어도 눈꼽만큼이라도 나은 감정이란 근거는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이야?

그건 모두 사랑 받을 자격도 없으면서 사랑 받고 싶어하는 자들이 만들어낸 강박관념일 뿐이야. 바로 죄 많은 사람들이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을 만들어 낸 것처럼. 나는 저 녀석을 이만큼 사랑하는데, 저 녀석은 그것에 고마워하지도 않고 날 사랑하지 않으면 어쩌나. 자신이 준 만큼의 사랑을 되돌려 받아야만 하는 그런 이기적인 인간들이 만들어낸 경제법칙일뿐이라구. 사랑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결코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겠다던, 피할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다던 M씨가 무슨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러면 안 된다", "그러면 못쓴다" 이제껏 쓸데없는 잔소리를 들어야 했던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더 자연스러운 것인가 하는 것은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 틈에서 콤플렉스를 가져야 하는 건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하는 M씨였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같았고 그만 틀렸으니까. 이렇게 막 되먹고 털끝만큼의 정도 없는 애로 태어난 것은 그의 잘못은 아니다.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것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가능한가? 동시에 두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 어떤 한 사람을 분명히 사랑하고 있는데도... 다른 한 사람을 또 사랑할 수 있는 걸까? 이런 것도 사랑일까?!

사랑한다면 한 사람만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지. 누구든 다른 사람에게는 느낄 수 없다고 하지. 누군가와 이별하고 난 후에는 또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수는 있지만, 누군가를 사랑하는 중에 다른 이를 사랑해서는 안된다 하지. 서로에게 충실하려 노력해야 한다고 하지. 순간적인 감정을 쫓는 사랑. 그건 옳지 않다고 하지. 그런 열정은 시간이 지나면 식게 마련이라지. 사랑이 식으면 그때는 정으로라도 사는 거라지. 사랑이 식었다 헤어지는 건 아니라 하지. 자신과 꼭 맞는 누군가를 찾기보다는 조금씩 양보하고 고쳐가면서 서로에게 맞춰 가는 게 현명하다고 하지. 자신을 잃어버리면서, 그렇게. 사랑하기 위해 또 사랑 받기 위해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고 하지. 열심히. 그리고, 부지런히.

이렇듯 사랑에는 '사랑해야한다'는 강박관념 외에도 수많은 부가적인 조건들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나 참, 기가 막혀서... 어떤 멍청한 양반이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는 모욕적인 망언을 내뱉은 이후로, 노력에 환장한 이놈의 세상에서는 사랑도 노력이라니... 수다스럽던 M씨도 이젠 할 말을 잃는다.

제길, 감정이 이데올로기가 되어야하는 건 비극이야.

사랑, 사랑, 사랑... 아마도 이 괴물 같은 단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진실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말이란 결국 거짓을 위해서 존재하는 거니까.


해피엔드

그는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말없이 또 정신없이 책을 바라보고 있었고, 한참 후에야 이것이 다른 순정만화들에서 이미 수없이 예고되었던 해피엔딩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결말에 기분상할 사람은 이 세상에 그 밖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도. 그제서야 그는 책을 덮었다. 하긴 아무리 제목이 크레이지 어쩌구 라고 해본들 정상인이 그린 만화에서 도대체 무얼 기대한단 말인가. 그는 그저 정상인들이 우글대는 - 그리고 비정상인도 정상인으로 교화되어야 한다는 자상한 가르침을 담고 있는 - 또 한 편의 만화를 읽었을 뿐이었다. 뭐, 그리 특별한 경험도 아니었잖아?

하지만, 미친 사랑에 해피엔딩이라니... 이건 좀 무리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M씨가 살아본 세상은 미친 사랑에 순순히 해피엔딩을 내 줄 만큼 만만한 곳은 아니었으니까. 이 만화를 그린 아줌마는 아마도 다른 세상의 사람일꺼야. 한참을 이리저리 합리화해보려고 하지만..., 어. 쨋. 든. 이 만화는 - 특히 그 시건방진 제목은 - M씨를 위시한 수많은 크레이지 인들에 대한 모독이었다.


이빈 in 헐리우드

다섯 권이나 되는 책을 읽고도 정작 만화 자체에 대한 얘기는 한마디도 안은 채 헛소리만 늘어놓고 있던 그는 이제서야 황급히 몇 마디 덧붙이기로 한다. 우선 작품의 전체적인 내용은 사랑에 대한 자신만의 엄격하고 낭만적인 가치기준을 신봉하던 한 소녀가, 현실은 다르다며 대충 이 정도면...하는 일반적인 사랑의 기준에 동의하는 평범하고 행복한 아가씨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담은 전혀 언크레이지한 비극이라고나 할까. 주인공의 해피엔드에 방해되는 캐릭터들은 역시나 드라마가 종반을 향해 치달으면서 순조롭게 제거되고 있는데(정녕 함께 행복할 수는 없는 겁니까?), 지미의 죽음과 얽힌 제반의 극단적인 상황 설정은 그 자체로 어느 정도 작가적 역량의 부족을 드러내주고 있다 하겠다. 어릴적 기억 속의 그(혹은 그녀)와 성장한 후 다시 인연이 된다는 진부한 순정만화 코드 역시 눈에 거슬리고, 다소 과포화 된 듯한 나레이션 컷들은 때때로 드라마 내로 흡수되지 못한 채 일러스트의 느낌을 주기도 하며,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그림 역시 매력적이지 않은 캐릭터(신혜정의 담임선생님을 보라)에서는 부자연스러움을 드러내고 마는 일반적인 순정만화체의 약점을 아직 그대로 안고 있다. 이빈. 아무리 긍정적으로 보아도, '천계영의 미래' 이상의 평가는 가당치 않아 보인다.

삐뚤어진 인간에게 삐뚤어지지 않은 감상은 바라지 마. 본심 따윈 상관없이 정반대로 말을 뱉어야만 속이 풀리는 청개구리인거지. 그게 그의 성격이야. 흐릿하고 미련도 많은 주제에 삐뚤어진.

Posted by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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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생] - 결론은 없어


안 돼! 저걸 놓치면 끝장이야!

저걸 놓치면 정말 끝장이야, 끝장. 이제 막 정류장을 떠나려던 버스를 향해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달려가고 있었어. 아까 사거리의 횡단보도를 건너면서부터 한 두 사람씩 잰 걸음으로 속도를 올리기 시작하더니,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모두가 100m 달리기 시합이라도 하듯 달리고 있는 거야. 나 역시도 사람들 틈에 묻혀 벌써 두 블록이 넘는 거리를 죽을 힘을 다해 뛰고 있었지. '이제 거의 다 되...' 손에 닿을 듯한 거리의 버스를 앞에 두고 잠깐 마음을 놓아 버린 사이, 철푸덕- 나는 그만 발이 꼬이며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하는 야구선수 마냥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어. 부르릉- 물론 버스는 떠나 버렸지. 아프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버스를 놓쳐버렸다는 사실이었어. 아침도 못 먹고 쓰린 배를 움켜쥔 채 서둘러 나왔었는데... 언제나 아슬아슬 하긴 했지만, 이제까지 한번도 놓친 적은 없었었는데... 이젠 어떻게 해야 하지... 아.. 어떡해... 맥이 탁 풀리고, 눈 앞이 캄캄해지고 있었어. 그런데,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저 버스... 어디 가는 거였더라?'


그동안 나는 여러 가지 일에 눈을 감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로 가득한, 그 어떤 틈도 없어 보이던 만원의 지하철과 버스 속으로, 언제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밀고 밀리며 몸을 밀어 넣고 있었어. 함께 발 맞추고 있으니 괜찮다고. 무리에 섞여 같은 곳을 향해 달리고 있다는 것만으로 안심이라고 생각했었어. 늦었어. 늦었어. 혼자 뒤떨어진 듯한 느낌. 그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불안함, 초조함, 열등감. 순서대로 정해진 계단을 오르고 내쉬던 안도의 한 숨. 결코 멈출 생각도 바꿀 의지도 없으면서, 습관처럼 내뱉던 불평들, 불만들. 그런 것들이 뒤엉켜 끈임 없이 반복되고 있었던 것 같아.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 힘들긴 하지만 결국에는 늘 그랬듯 당연히 들어갈 줄 알았던 - 그 곳에서 밀려 떨어져 나온 후, 당혹스런 표정으로 한참을 멍하니 주저앉아 있다가, 나는 생각하게 되었어. (아니, 생각은 항상 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 생각하는 일 외에 달리 하는 일이 없게 되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 무엇에 늦었던 걸까. 어디에 늦었던 걸까. 왜 난 아무 것도 하고 싶은 게 없지. 나는 어째서 확신에 찬 표정으로 한 곳을 향해 달려가지 못할까. 이래서.. 결국 무엇이 될 수 있을까. 평생 취직도 하지 않고 아르바이트로 일하면서, 중고 게임이나 하고 비디오나 빌려 보며 살아가고 싶어. 젊은 날 무엇 하나에 미쳐 본 적 없는 나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열정을 바칠 대상 하나 없던 내 인생은 정말 한심한 걸까. 버스에 이미 몸을 실은 친구들은 땀이 줄줄 흐르고 숨이 턱턱 막히는 그 비좁은 공간에서 몸을 겨우 비틀어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영어 단어장을 꺼내면서,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기도 했어.

넌 정말 시간도 많다. 쓸데없는 것 같은 일들로 사색하며 즐길 수 있으니까.

하지만, 언젠가 내가 보았던 웃음.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이리오라며 손을 내밀었을 때, 그 아이가 내게 보여주었던 웃음. 나는 그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없었어. 잘난 체 하던 나를 비웃었던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처지를 달관했던 것일까. 자신감의 표현이었는지, 단순한 억지 웃음이었는지. 강한 자의 미소? 아니면 약한 자의 비굴한 웃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의미를 알 수 없었어. 아니, 다시 생각해보면 나는 내 웃음의 의미조차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규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삶이란 쓸모 없고 판단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어. 아니 어쩌면 그 자체가 쓸모 없는 것일 지도 몰라. 살아가려고 발버둥칠수록 죽어가고 있다고 느껴지기도 하니까. 이성을 따른다면 고통이 따르고, 본능에 내맡기면 대가를 감당해야 해. 이성과 본능 중 어느 것을 따라 살아야 할까. 그런 질문은 바보 같아. 이성도 본능도 모두 똑같은 생각일뿐이야. 필요에 따라 이름만 달리 붙인, 같은 머릿속의 같은 생각일 뿐이야. (그래, 네 말처럼) 나는 두리번거리고 있었지만, 사실은 무얼 찾고 있는지도 몰랐어. 왜냐하면, 무얼 찾기 위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살기 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걷고 있는 것이 바로 살아가는 것이니까. 결승선 같은 것은 없어. 달리고 있다고 해도. 이기고 지는 것도 없어. 나는 경주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 고민을 해봐도 나아지는 것은 없을지 몰라, 하지만 고민한다는 그 자체가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건 아닐까. '결국' 무엇이 될까. '결국' 어떻게 될까. 그런 건 잘 모르겠어. 그저 '우선' 어떻게 해보는 것이 좋을까. 그런 것들만이 있을 뿐이지. 지금의 나의 생각으로는.


Shimoku Kio의 [5년생]

매끄럽지 않은 턱선, 부자연스러운 옷 주름, 비틀거리는 인체비례(얼굴이 몸통에 비해 너무 작다든가, 팔뚝의 굵기가 두껍다든가 하는) 같은 간간이 눈에 띄는 약점을 지적하지 않더라도 이 작품의 그림은 화려함과 유려함으로 눈길을 끌만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작가의 전작들로부터 통일성과 일관성이 향상된 발전의 산물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이고, 수더분하고 일견 평범하게까지 느껴지는 이 그림이 극도의 현실성을 매력으로 하는 이 작품의 내용적인 측면을 고려했을 때는 오히려 장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우라사와 나오키나 양경일이 이 작품의 작화를 맡았다면, 내 옆의 현실보다는 브라운관 속의 드라마 또는 스크린 위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들지 않았을까. 그들의 그림은 보다 극적인 아름다움과 강력한 에너지를 표현하는 데 장점이 있을 것 같다.) 간혹 뭉텡이들의 집합을 구체화 시켜 완성하는 인체 데생에서 여전히 뭉텡이의 느낌이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인체나 옷에서 그물선 형태가 아닌 빗금 형태를 취하고 있는 명암 펜터치가 어색한 질감과 회화적 데생의 느낌을 주기도 해서, 덜 다듬어진 듯한 인상을 받기도 하지만 그다지 밉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림체뿐만 아니라 거대한 클라이막스 없는 구성과 대화나 생각을 중심으로 차분하게 진행되는 이야기 전개 역시 이 작품이 현실적인 연애담 이상의 위치에 성공적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도록 돕고 있는데, 극적 긴장감과 카타르시스를 포기하는 대신 현실의 돌발성과 복잡성을 캐치하고,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기보다는 좀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다양한 사고를 유도하고 있다. 유사한 예로 꼽을 수 있는 하라 히데노리의 [내 집으로 와요]와 비교해보더라도, 열혈만화적 코드나 대결·성장만화적 요소들이 깨끗이 제거되어 있다는 차이점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고, 서영웅이 그리는 연애물을 상상해본다면, 좀 더 집요하되 교훈적이고 계몽적인 면이 거의 없는 어정쩡함과 불명확함을 상대적인 특징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캠퍼스 러브 스토리]만큼은 아니지만 등장인물들은 생각이 많은 편이고, 한 에피소드의 대부분이 별다른 행동 없이 두 사람의 대화만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고 그 와중에도 종종 한 컷 안에 두 번의 대화 교환이 보일 정도로 대화가 이 작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카메라의 위치를 수시로 변경하면서 다양한 앵글을 선보이는 관계로 대화가 오래 지속되더라도 지루함이 느껴지지는 않고, 대화교환이 많더라도 속도면에서 적절한 완급조절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진행이 급하다거나 억지로 우겨넣는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무려 90페이지에 걸쳐 두 주인공이 자기 기만을 벗겨내는 대화를 나누는 <벌거벗은 마음>은 실제로 벌거벗은 모습으로 진행된다는 점도 재미있지만, 그러한 오랜 대화가 - 예상했던대로 - 아무 효력을 미치지 못하는 한 페이지의 결말이 주는 반전 아닌 충격이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또한, 내용상으로는 <벌거벗은 마음>만큼 두드러지지 않지만, <최후의 만찬>에서 아키오와 요시노가 요리를 하며 나누는 대화에서 별 상관 없는 여러 화제가 뒤섞여 진행되는 흐름과 <생각>에서 전화통화 중인 두 사람의 의식적인 억지 웃음과 자연스러운 시무룩함을 노골적인 대조 없이 연결시켜 서먹함을 표현해내는 부분은 오히려 이 작품의 진가이자 독보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단순히 줄거리나 캐릭터만을 가지고 이 작품이 '현실적'이라는 꼬리표를 얻은 것이 아니란 이야기다.)

또한, 비디오 게임으로 밤을 새우고, 아침거리도 좀 살 겸 성인비디오도 빌릴 겸 잠깐 나갔다 온 사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여자친구의 전화가 자동응답기에 녹음되어 있는 것을 듣고는 "하필이면 꼭 나 없을 때 전활하냐!"고 혼자 신경질을 부리는 장면에, '난 왜 아무 것도 하고 싶은 게 없지... 아무 것도 하고 싶은 게 없어'라는 진지한 독백이 이어지고, 그 위에 "그래도, 비디오는 봤다. 꽝이었다. 그래도 끝까지 봤다."라고 유머러스한 나레이션이 포개지는 <형태도 없다>의 후반부가 보여주는 사고의 흐름은 장르적 공식과 극적 장치로 일관하는 드라마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섬세함과 자유로움을 간직하고 있다. (그렇기에, 연애담의 형식을 빌려 한 자아 내의 이성과 본능 사이 혹은 확실한 목표의식과 체념적 여유로움 사이의 충돌과 화해를 담아낸 것으로도 볼 수도 있는 작품이지만, 오히려 평범한 연애담으로 바라볼 때 이 작품은 더 큰 가치를 갖게 되지 않을까.)

그 밖에도 요시노와 헤어진 뒤 요시노와 만나서 사귀기까지의 시간을 보여주는 스토리 전개라든가, 요시노가 칼에 찔리려는 찰나 "지금 당한다 싶은 그 바로 순간에. 법률은 뭘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던 학생시절 아키오의 모습을 교차 편집시키는 연출, <마녀3> 에피소드에서 문을 닫는 요시무라의 모습과 아키오의 귀를 클로우즈 업하는 컷 연결, 초췌한 모습으로 하품을 하는 <사고정지> 에피소드의 마지막 컷도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Posted by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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