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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클 문화예술인/뮤지션인터뷰 74 POSTS


  1. * 웹진 에잇볼륨에 실린 황보령씨 인터뷰입니다.
    - 인터뷰 진행 : 에잇볼륨

    http://www.8volume.com/bbs/board.php?bo_table=interview&wr_id=13&pag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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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진 에잇볼륨에 실린 황보령씨 인터뷰입니다.- 인터뷰 진행 : 에잇볼륨http://www.8volume.com/bbs/board.php?bo_table=interview&wr_id=13&page=2
    ☆☆☆☆☆ | 에잇볼륨, 황보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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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픈 정서와 흥겨운 리듬 절묘한 조화 묘한 중독성
    [우리시대의 명반·명곡] 강허달림 1집 '기다림, 설레임' 2008년 뮤직 런뮤직 上
    한국 여성 블루스 보컬의 적자 평가
    잡초 같은 강인함으로 희망을 노래


    글=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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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판소리와 흑인의 블루스는 일맥상통하는 점이 많다. 두 가락은 질박한 민초들의 삶의 고갱이를 녹여낸 진솔한 가락이란 점에서 닮은꼴이다. 고된 삶을 반영한 노래는 대부분 슬프다. 하지만 두 장르에 각기 신나는 장단과 리듬이 살아 꿈틀거리는 이유는 삶이 버겁고 힘겨워도 결코 희망을 잃지 않은 잡초 같은 강인함이 있기 때문이다.

    목소리 자체가 곧 블루스로 평가받는 강허달림의 노래에는 슬픈 정서와 흥겨운 리듬이 공존한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가사와 리듬이 절묘하게 합체된 그녀의 노래는 묘한 중독성을 발휘하며 절망이 아닌 희망을 그려낸다. 강허달림은 지난했지만 희망을 잃지 않는 자신의 삶의 태도를 담은 블루스 트랙들을 통해 한국 여성 블루스 보컬의 적자로 평가받는다.

    임희숙의 데뷔시절을 연상케 하는 감칠맛과 빌리 할러데이의 처연한 슬픈 바이브레이션과 닮은 그녀의 보컬은 독특하다. 2008년 발표된 강허달림의 1집 [기다림 설레임]은 테크닉만이 넘실거리는 요즘 음반들과 차별적인 삶의 진솔한 향내가 ‘감동’적인 명반이다.

    강허달림의 본명은 강경순이다. 강은 아버지 성이고 허는 어머니 성이다. ‘달림’이란 이름은 밤하늘에 떠있는 그 ‘달님’이 아니라 씩씩하게 '달리는' 달림이다. 그녀는 2008년 1집 앨범을 내기까지 무려 10여 년 동안 무명생활을 이겨낸 질긴 생명력의 가수다.

    그녀는 전라남도 순천시에서도 한참 떨어진 시골인 승주군 상사면 용계리 죽전마을에서 태어났다.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수몰마을이다. 시냇가와 집 뒤에 있던 야산의 대나무 숲은 그녀의 자연친화적 인성을 조성시킨 음악적 DNA들이다.

    그녀는 명절 때마다 당산나무 밑에서 열린 ‘동네 노래자랑대회’에서 ‘눈물 젖은 두만강’을 구성지게 부른 꼬마 인기가수였다. 타고난 음악적 재능과 리듬감각은 동네잔치에서 장구를 치며 흥을 북돋았던 아버지의 한량기질을 되 물림 받은 자연산이다.

    가수라는 평생의 꿈을 품게 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친구 집 라디오에서 접한 가수 이선희의 '그래요, 잘못은 내게 있어요'를 듣고 난 후부터. 중학교 때 순천시로 나와 ‘기타 중창반’이 있는 순천여상에 진학한 것도 음악을 배우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타를 살 돈이 없어 연극반에 들어갔다. 연극반의 김선정은 처음으로 창작노래에 대한 인식을 심어준 친구다.

    시골소녀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했다. 일생일대의 용기를 냈다. 꿈을 이루기 위해 기타 하나를 둘러매고 무작정 상경했던 것. 작은 회사의 경리, 아르바이트는 물론 입시학원에서 근로 장학생을 하면서 신문배달을 하며 2년간 서울예대 진학을 위해 재수를 했지만 낙방했다. 좌절감이 컸지만 막 생겨난 서울 재즈아카데미 보컬과에 입학했다.

    그는 동기들 사이에서 왕따였다. 악보조차 제대로 읽지도 못했고 서구의 팝과 테크닉을 중시하는 동기들과 달리 자기 스타일의 판소리 발성을 고집했기 때문. 실제는 그녀는 공연 때 마다 자신은 늘 ‘왕따’였음을 고백한다. 학창시절 내내 시험지 답안지 유출 같은 사건이 터지면 무슨 이유에선지 선생님들은 자신을 범인으로 지목했다고 한다.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 책 읽기를 좋아했던 그녀는 수업 중에도 홀로 먼 산을 쳐다보기만 했던 3차원적 감성의 소유자였던 것. 고등학교 때 담임은 그녀를 ‘썩은 사과’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기타실력이 마음이 들어 교류했던 재즈아카데미 동기 김용희의 소개로 이태원의 카페 ‘저스트 블루스’에 오디션을 보러 가 채수용을 만났다. 그는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이중산을 능가하는 재야 최고의 블루스 기타리스트로 알려져 있다. 오디션 후 프로젝트 밴드 풀 문을 결성해 무대에 올랐다. 관객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하지만 고전적인 12마디 블루스(스탠더드 재즈곡)를 주로 하는 레퍼토리에 곧 공허함이 밀려왔다. 창작음악을 하고 싶었던 것. 연주 욕심이 강한 멤버들과 충돌은 필연적이었다. 또 왕따가 되었다. 이후 밴드에서 독립한 그녀는 오랜 기간 클럽 무대를 거치며 2003년 마침내 관록의 블루스 밴드 ‘신촌 블루스’의 보컬이 되었다.

    입력시간 : 2009-04-01 11:38:18 수정시간 : 2009/04/01 11:42:19




    그녀의 삶 대변하는 12곡의 블루스
    강허달림 1집 '기다림, 설레임' 2008년 뮤직 런뮤직 下
    절망·고통의 흔적 희망 메시지로 승화
    싱글 발표후 '사운드' 아쉬움 직접 앨범 제작사 세워 달래


    글=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그녀의 창작방식은 독특하다. 흥얼흥얼 순간적으로 튀어나오는 멜로디를 녹음하기 위해 항상 카세트 녹음기를 가지고 다닌다. 창작의 물꼬를 튼 것은 1995년쯤 ‘독백’을 처음으로 만들면서부터. 1집 발표 전까지 ‘지하철 자유인’등 4곡의 노래를 완성시켰지만 발표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녀가 거친 모든 밴드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 그런 면에서 밴드 풀 문의 베이스 박순철은 그녀에게 ‘너만의 멜로디가 있다’며 가능성을 인정해 주고 독려했던 소중한 친구다. ‘춤이라도 춰볼까’ 리플은 그의 도움으로 완성한 곡이다.

    2년간의 신촌블루스 활동 후 클럽을 맴도는 가수로 머물 것 같아 유학을 결심했다. 장충동의 한 찌개 집에서 하루 13시간씩 아르바이트를 하며 절치부심했다. 2005년 마침내 기회가 왔다. 카페 스튜디오70에서 그녀의 음악을 듣고 가능성을 발견한 기획사 ‘풀로 엮은 집’의 이윤호대표가 데뷔 음반을 제작했던 것.

    프로듀싱 개념도 없이 스스로 모든 음악과정을 맡아 싱글EP ‘독백’을 발표했다. 비록 대중적 반향은 미미했지만 일부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이끌어냈다. 이에 여러 곳에서 정규앨범 제작 제의가 들어왔다. 하지만 대부분 제작조건이 취약했다. 녹음진행 중에 뒤엎는 사태까지 발생한 것은 싱글 앨범 발표 후 가장 아쉬움을 느낀 ‘사운드’의 질은 결코 양보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과 사랑에 대한 고심으로 가득 찼던 3년간의 공백 후 중대 결심을 했다. 스스로 자신의 앨범을 제작하기 위해 인디레이블 '런뮤직'을 창립했던 것. 10년째 옥탑 방에서 살며 모아놓은 돈과 모자라는 돈 2천만 원을 대출했다. 지인이 운영하는 강남 양재동의 텔레만 스튜디오에서 녹음비용을 1/3가격으로 후원해주었고 KBS 관현악단 멤버 남영국이 프로듀싱을 맡아주었다.

    또한 언더그라운드 블루스 기타의 달인 채수영과 신촌블루스의 엄인호가 세션으로 참여해 힘을 보탰다. 2007년 3월에 제작에 들어간 1집은 이듬해 2월에야 가까스로 녹음을 끝냈다. 제작비가 부족해 녹음실, 프로듀서 스케줄에 맞춰가야 했기 때문.

    강허달림의 1집은 짙은 향내가 진동하는 토종 블루스 명반이다. 이 앨범에는 그녀의 삶을 대변하는 12곡이 담겨 있다. 11곡은 그녀의 창작곡이고 ‘꿈꾸는 그대는’은 인천 노래패시절에 감명을 받은 소나무(윤대형)의 곡이다. 29살 때 만난 한 남자와의 만남과 이별의 과정은 기다림과 극복의 미학이라는 음악적 감성을 제공했다.

    사랑의 아픔을 겪으면서도 끝내 자존심만은 잃지 않는 여성특유의 인내를 담고 있는 타이틀 곡 '기다림, 설레임', 탁월한 감성의 보컬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미안해요’ 같은 창작곡들은 그 결과물이다. 또한 경쾌한 리듬감이 탁월한 첫 트랙 '춤이라도 춰 볼까', 결코 좌절하지 않겠다는 그녀의 용기와 희망이 담긴 '독백'과 ‘옛 일기장’, 하늘과 바다‘는 쉽게 접하기 힘든 그녀의 명곡들이다.

    그녀의 노래에는 슬픈 정서와 비트 강한 경쾌한 리듬이 공존하며 상호작용을 한다. 그래서 청자를 때론 서정적 분위기의 노래에 푹 빠져들게 하고 때론 어깨를 들썩이는 흥겨움으로 인도한다. 절망과 고통의 흔적은 탁월한 리듬을 통해 극복되고 이내 희망의 메시지로 거듭나게 하는 힘은 강허달림 노래만의 차별성이다.

    강허달림은 1집에 대해 “속을 너무 많이 썩어 음반이 나왔을 때 보기도 싫었다. 프로듀서 이름이 첫 브클릿 인쇄에 누락되어 폐기시키고 다시 인쇄를 했다. 재킷도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몇 번의 작업을 거쳤다.”고 털어놓는다. ‘드러나지 않으면서 혼자 서있는 자아’를 표현한 1집의 독특한 이미지 재킷은 급히 소개받은 아트 디자이너 정경숙의 작품이다.

    1집은 네이버 오늘의 뮤직 ‘이주의 앨범’에 선정되고 제6회 한국대중음악상의 여러 부문의 후보에도 노미네이트되는 성과를 올렸다. 이후 입소문을 타면서 판매량이 계속 늘어 현재 3판 제작에 들어가 있다. “블루스는 운명적인 장르지만 특정 음악장르에 매몰되기보다 좋은 노래를 찾아가는 음악여정을 오래 하고 싶다.”고 말하는 강허달림은 우리시대가 주목해야 될 여성 싱어송라이터다.

    입력시간 : 2009-04-09 10:21:55 수정시간 : 2009/04/09 10:26:04



    슬픈 정서와 흥겨운 리듬 절묘한 조화 묘한 중독성 [우리시대의 명반·명곡] 강허달림 1집 '기다림, 설레임' 2008년 뮤직 런뮤직 上한국 여성 블루스 보컬의 적자 평가잡초 같은 강인함으로 희망...
    ☆☆☆☆☆ | 강허달림, 최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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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종희, 박준흠 (최규성)


    [우린 어디로 가는가], ‘세상에 대한 통찰’이 담긴 노래 또는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드는 노래



    펑크밴드 럭스(RUX)의 리더 원종희(보컬)는 2000년대 가장 과소평가 받는 뮤지션이자 왜곡된 모습으로 기억되는 뮤지션이다. 당장 포털사이트에서 럭스나 원종희를 검색하면 대표적으로 나오는 것이 2005년 7월 30일에 있었던 MBC 음악캠프 방송사건이다. 일명 ‘카우치 사건’으로 불려지는 그 사건 때문에 정작 럭스의 음악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들조차도 럭스의 이름 정도는 기억한다. 대략 ‘철없는 아이들이 벌린 개념 없는 행위’ 정도로 알고들 있는 그 사건은 럭스와 원종희에게는 두고두고 불명예스러운 상흔으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럭스와 스컹크(Skunk) 레이블을 그리 간단하게 얘기할 수 있을까?(왜곡된 채로 얘기되는 것이 타당한가?)


    만약 럭스의 정규 1집 [우린 어디로 가는가](2004/skunk)를 한국 인디음악씬에서 나온 음반들 중에서 ‘세상에 대한 통찰’이 가장 돋보이는 작품들 중에서 하나라고 감히 얘기한다면? 그래서 노브레인의 [청년폭도맹진가](2000/문화사기단)와 함께 [우린 어디로 가는가]를 한국 펑크음악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서슴없이 꼽는다면? 그리고 원종희를 이기용(허클베리핀), 이장혁, 연영석 등과 함께 200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대중음악 창작자로 꼽는다면? 만약 당신이 정말로 편견 없이 [우린 어디로 가는가]나 [Another Conception]을 들어본다면 수록된 몇몇 곡들에서 묘한(?) 감동을 느낄 것이고, 왜 지금 럭스와 원종희를 얘기하려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만치 원종희는 우리가 주목할만한 이 시대의 창작자란 사실은 명백하기 때문이다.


    럭스는 아주 천천히 성장한 밴드이다. 솔직히 얘기하면 럭스 1집 [우린 어디로 가는가]는 처음에 아무런 기대 없이 들었던 음반이다. 그런데 음반을 들으면서 “아, 원종희라는 사람은 가사를 문학적으로 훌륭하게 쓰는 사람은 아닌데 보통 그 나이 때 한국의 다른 또래들이 갖고 있지 않은 통찰력을 갖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가사를 들여다보면서 그걸 어떻게 체득하게 된 건가, 라는 의문 같은 게 있었다. 특히 <지금부터 끝까지>, <언제나 이 자리에>, <우린 어디로 가는가>, <전진>, <세상의 중심>, <전쟁>은 한국에서 굉장히 보기 드문 ‘세상에 대한 통찰’이 담긴 가사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좀 심하게 얘기하자면, 예전 20~30대 때 치열하게 운동했던 분들 중에서 40대가 되면서 변절한 사람들은 이런 가사를 보고 반성해야된다는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 흔히 말해서 인텔리가 아닌 펑크뮤지션이 이런 가사를 쓰는 게 나는 놀라웠다. 그래서 이런 가사들이 담긴 노래들이 나오게 된 그 과정이나 생각을 (시간이 좀 지난 감은 있지만) 직접 들어보고 싶었다. 이게 이번에 럭스의 원종희를 인터뷰한 계기이다.


    ※ 현재 ‘스컹크 레이블’은 운영에서 일정 부분 노선 변경이 있고, 스컹크 레이블에서 운영하던 라이브클럽 ‘스컹크 헬’은 2008년까지만 연다. 스컹크 헬의 고별 공연이 2008년 12월 24일(수)과 2009년 1월 3일(토)에 있었다. 한국 펑크씬에서의 중요한 움직임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다.


    일시 : 2008년 11월 14일(금), 오후 4시

    장소 : 홍대 스컹크 헬

    대담 : 원종희(럭스) VS 박준흠(가슴네트워크 대표)

    글 : 박준흠(가슴네트워크 대표)

    사진 : 최규성(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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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종희 (최규성)


    “펑크적인 사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회사를 만드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준흠 : 현재 근황은?

    원종희 : 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웃음) 서울예대 방송영상과라고... 영상촬영이나 제작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공부를 하고 있다. 학교는 안산에 있다. 서울예대가 서울에 없다.(웃음)


    박준흠 : 스컹크 레이블에 변화가 있다고 들었다.

    원종희 : 레이블에서 제일 큰 변화는, 올 해 4월쯤에 밴드들이 대부분 나가면서 또한 내가 내보내기도 하고 해서 현재는 소속 밴드로 2팀만 남았다. ‘럭스’하고 ‘백화난만조’라고... 그리고 2009년 1월에 라이블클럽 ‘스컹크 헬’이 없어지고 이 자리에 촬영스튜디오가 생길 것 같다.


    박준흠 : ‘백화난만조’가 무슨 뜻인가?

    원종희 : 나도 구체적으로 잘 모르겠다. 뭐 하얀 꽃이 만발한다, 그런 의미인 것 같은데. ‘칵크래셔(Cockrasher)’의 보컬리스트가 다시 만든 그룹이다.


    박준흠 : 그럼 현재 레이블만 남고 라이브클럽이 없어지는 개념인가?

    원종희 : 레이블도 간단히 얘기해서 90년대 후반의 모습으로, 다시 껍데기를 다 벗어버리고 원점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상태다.


    박준흠 : 90년대 후반의 모습으로 간다는 의미가 소속 개념을 없애겠다는 것인가?

    원종희 : 그렇다. 스컹크 레이블이 뮤지션들과 정식으로 계약을 하고 뭔가를 할 때는 음반을 발매 할 때나 뭔가 한 가지를 딱딱할 때였다. 하지만 ‘소속’ 개념으로는 특별한 계약을 하지 않았다. 달랑 A4용지 한 장에다가 “이 밴드는 스컹크 프로뎍션에 소속된다. 하지만 나가고 싶을 땐 언제든지 나간다.” 그런 식이었다. 그런데 그건 좀 좋지 않은 것 같다 싶어서 소속밴드들을 다 없앴다.


    박준흠 : 그 문제 같은 경우는 다른 인터뷰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소속밴드가 있게 되면 밴드들과 일을 할 때 소속되지 않은 밴드들에게 차별을 받는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는 문제들인가?

    원종희 : 그렇다. 보통 인디레이블들은 많으면 3~4명이 일한다. 그러니까 일하는 인원이 3~4명이면 또 그만큼 월급을 줄 수 있을 만큼의 일을 뭔가 크게 벌여야 한다. 그런데 일이 없는 상황에서 소속밴드가 5팀, 10팀이 되버리면 사실상 한두 명의 인원이 10팀의 밴드를 관리하면서 잘 해준다는 게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


    박준흠 : 혹시 지금 일신상의 변동, 즉 학업을 포함한 그런 변동 상황 때문에 시간을 낼 수 없는 문제가 걸린 것은 아닌가?

    원종희 : 음... 순서가 레이블을 정리하면서 내가 학교를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뭐 꼭 학교 때문에 레이블을 정리했다, 그런 건 아니다. 간단하게 얘기해서, 우리 레이블 소속밴드들의 멤버들이 나 빼고 다들 자기 개인적인 일들이 있다. 일을 한다든가 공부를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럭스 멤버뿐만 아니라 다른 팀들도 마찬가지이다. 스컹크에 소속되어서 공연 활동은 같이하되, 직업을 갖고 있거나 학교를 다니거나 하고 있어서 나도 그 입장이 되려고 한다. 나도 명목만 레이블 사장이다 하면서 다른 거 아무 것도 안하고 맨 날 여기 왔다 갔다 하면서 밴드들 걱정하고 하는 것보다는 그게 낫다. 나도 이 친구들이랑 똑같은 입장으로, 학교를 다니면 다니고 일을 하면 하는 식으로 밴드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박준흠 :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나?

    원종희 : 음, 계기라면... 펑크 레이블을 키워나가다 보니까 펑크도 키우면 키울수록 이게 어떻든 하나의 ‘회사’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펑크랑 회사랑은 안 맞는 것 같다. 즉, 펑크적인 사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회사를 만드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됐다.


    박준흠 : 그런데 예전에 회사 개념의 레이블을 만들었을 때는 지금하고는 생각이 달라서 만든 것 아니었나?

    원종희 : 아마도 그 때는 펑크로 세상을 지배하겠다는...(웃음) 펑크로 뭔가를 해보자, 하는 큰 뜻이 있었다. 지금은 마음은 똑같은데, 회사는 아니다.


    박준흠 : 원종희 씨가 만든 럭스 노래들 같은 경우에는 어떤 주장이라기보다는 ‘자기 얘기’를 하는 데 더 집중하지 않았나? 2004년도 정규 1집 같은 경우는 많은 부분이 본인의 ‘다짐’에 관련된 노래들이었다. 좀 전에 얘기했던 세상을 바꾸자(“펑크로 세상을 지배하겠다”)와 같은 ‘변혁’에 관련된 얘기는 여태까지 노래에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런 마음이 예전에는 원래 있었던 건가?

    원종희 : 아마 나이가 먹어서 그런 거 같은데...(웃음) 어릴 때는 뭔가를 좋아하면 밑도 끝도 없이 파고들면서 만들려고 노력을 하게 되지 않나. 그걸 만드는 진행 과정에서 내가 좀 치였다고 해야 되나? 이렇게 내 입으로 말하면 되게 초라해지는 건데...(웃음) 뭐라고 표현해야 되나?


    박준흠 : ‘기획’ 쪽의 일을 하다보니까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여러 문제점들이 발생했다, 그런 정도?

    원종희 : 맞다. 우리가 예전에 [3000 Punk](1999) 음반을 만들었을 때, “왜 음반이 만원이지? 삼천원에도 팔 수 있잖아?”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우리끼리는 나름대로 파격적이라고 생각하면서 만들어서 팔았다. 하지만 나중에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까, 처음에는 유통마진이나 이런 것들이 없어도 되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없으면 음반이 많이 안 팔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거랑 똑같이 기획이나 음반회사 시스템에 대해서도, “그 쪽에서 안받아주면 우리가 하면 되잖아, 우리끼리 해보자!” 하면서 만들어가던 게 작년, 재작년까지라면... “아, 이거는 그 사람들에게 맡기는 게 차라리 낫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게 그다음부터 최근까지다. 그러니까 우리가 타도하려고 했던 그 시스템, 체계 안에 있는 그 ‘악당’들이 알고 보니까 악당들은 아니더라.(웃음) 어떻게 보면 바보 같이 뒤늦게 알게 된 거다. 체험하면서.


    박준흠 : 그게 혹시 원종희 씨나 일부의 생각인가? 아니면 스컹크 헬에 관련된 펑크 뮤지션들이 공유하는 지점이 있는 건가?

    원종희 : 어떻게 보면 그게 내부에서 깨닫게 된 부분이 많다. 설명이 잘 맞을지 모르겠는데, 천국에 가면 사람들이 팔을 안으로 못 구부린다고 한다. 그래서 맛있는 음식들이 바닥에 깔려있는데 그걸 집어서 서로에게 주는 거다. 하지만 지옥에 가면 똑같이 사람들이 팔을 안으로 못 구부리는데, 아무도 먹지를 못하는 거다. 서로 안주니까. 우리는, 우리만큼은 특별했기에,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팔을 못 구부려서 서로에게 못 먹여주고 있지만 “우리는 할 수 있다. 우리는 진짜 우정으로 똘똘 뭉친 친구들이고, 우리만큼은 그렇게 서로를 배려하면서 잘 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해왔다. 그런데 그게 회사의 형태가 되면서부터 또 돈이라는 게 개입이 되고, 레이블이 조금씩 커지니까 “어, 우리도 안 되네”라는 걸 나중에 깨닫게 된 거다.


    박준흠 : 그 과정에서 내부적으로 안 좋은 일들도 있었나? 사람들끼리?

    원종희 : 그렇다. 그러니까 말도 많았고, 밴드도 8팀이나 있었는데 그 중에 어떤 팀은 누가 챙겨주고 어떤 팀은 안 챙겨준다는 말들도 오갔다. 그 반면에 뭐가 잘 될 때에는 작은 거에서 삐지고, 밴드들이...(웃음)


    박준흠 : 지금 얘기를 듣고 보니까 원종희 씨가 약간 사람 문제에서 치인 부분 때문에 힘들어서 방향을 좀 수정한 것 같다. 혹시 나중에 그런 부분(문제)까지 다 커버할 수 있는 역량이 생긴다면 다시 회사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걸 고려는 하고 있는 건가?

    원종희 : 지금으로서는 그런 생각을 안 한다. 예전 같이 스컹크 레이블을 키워서 밴드가 많아지고, 스컹크 레이블 타이틀의 빌딩에서 업무를 보면서 몇몇 팀들이 공연에 나가고, 매니저들도 있고, 그런 걸 꿈꾸지는 않게 됐다.


    박준흠 : 매니저가 따로 있었나?

    원종희 : 밴드 매니지먼트를 말하나? 내가 직접 했고, 중간에 이종혁 씨라고 그 친구도 밴드 하는 친군데 매니저 일도 했었다. 그 시도가 끝까지 잘 안되긴 했지만.(웃음)


    박준흠 : 라이브클럽 스컹크 헬을 정리를 하게 된 이유가 운영하는 동안 금전적인 어려움 같은 게 있어서인지?

    원종희 : 그것도 똑같은 이유다. 요즘에 뭐 BGBG, FF 등 펑크를 수용하려는 여러 클럽들이 많아지면서, 특히 FF랑 스컹크는 서로 마주보고 있지 않나? 서로 똑같은 밴드들이 공연하면서 매주 금요일, 토요일 같은 공연으로 경쟁하는 구도가 되더라. 그러면서 실질적인 수익은 대관으로 다 나오고. 그런 경쟁구도에 있기가 싫어서 클럽을 굳이 안 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 사람들은 뭐 클럽공연하면 클럽 사장만 돈 버는데 하면서 그런 얘기가 또 오가니까... 그럼 뭐 럭스도 같은 동등한 입장에서, 한번 초청당해 가면서 공연을 하는 입장이 돼보자는 생각에서 클럽을 정리하게 됐다.


    박준흠 : 이 근처에 빌려주는 연습실이 있지 않았나?

    원종희 : 그건 올해 7월에 팔았고, 클럽은 내년 1월에 없어진다. 그래서 12월 24일(수), 내년 1월 3일(토) 양일간 마지막 공연을 하려고 한다.


    박준흠 : 스컹크 헬의 모든 팀들이 다 나오는 건가? 고별공연으로?

    원종희 : 12월 24일은 새로운 밴드들을 포함한 14팀 정도가 올나이트 밤샘공연하고, 1월 3일엔 이 자리를 빛냈던 많은 밴드들이 참여해서 공연을 한다. 스컹크 헬 이전에는 원래 드럭이라는 곳이 있었으니까 이 자리에 가장 애착이 있을만한 밴드들이 선다. 사실 그걸 골라낸다는 것도 어렵지만 크라잉너트 형들도 “종희 너를 떠나서 너보다 우리가 그 자리에 더 애착을 느낀다”는 얘길 또 하니까. 크라잉너트, 껌엑스, 럭스 등 여러 팀들이 나온다.


    박준흠 : 예전 드럭 팀들까지 다 나온다 말인가? 그럼 ‘공간’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는 것인데, 결국 드럭 때부터 시작해서 스컹크 헬까지 왔던 큰 흐름이 마감이 되는 의미인가?

    원종희 : 그렇게 되는 거 같다.


    박준흠 :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겠다.

    원종희 : 나도 무척 아쉽다.


    박준흠 : 예전에 라이브클럽 ‘스팽글’의 고별공연(2000년) 때에도 좀 ‘짠’했던 게 있었다.

    원종희 : 여기는 지금 모양은 이렇지만 저기 구석에 보면 아직도 1998년도인가... 그 때 낙서해 놓은 것도 막 보이고 그런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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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종희 (최규성)



    “고 2때 학교를 안 가고 당구장 보일러실에 합주실을 만들어서 거기서 합주를 하고, 머리도 ‘닭머리’로 밀었다.”


    박준흠 : 럭스의 시작에 대해서 얘기해 달라.

    원종희 : 중학교 2학년 때(1994년) 이현의, 이승복이랑 ‘럭스(RUX)’라는 밴드 이름을 만들고 밴드 활동을 시작했다. 한창 성수동 이벤트 스튜디오에서 연습하다가 합주실에서 공연을 하기 시작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이현의랑 이승복이 밴드를 나갔다. 부모님들의 반대가 심했다.1)


    박준흠 : 1998년에 스컹클레이블을 만들었다. 그 때가 고등학교 3학년 때인가?

    원종희 : 그렇다. 1999년 2월에 졸업하고 그해 11월에 군대 갔다. 군 생활을 2년 2개월 해서, 2002년 1월에 제대를 했다. 군 생활을 햇수로 4년을 했다. 제대 후 1월에 바로 럭스를 재결성했다.


    박준흠 : 그 다음에 2003년 1월에 해체했다가 3월에 박건우 씨가 들어오면서 다시 활동을 한 건가? 그리고 박건우 씨는 ‘브라스만’ 출신이었나? [3000 Punk](1999) 앨범 보면, 브라스만 멤버로 돼있다.

    원종희 : 그렇다. 당시 이주현(현재 갤럭시 익스프레스 멤버) 형이랑 크게 싸웠고, 해체하자고 했다.


    박준흠 : 그리고 [3000 Punk] 음반에 참여한 ‘스파이키 브랫’에서 원종희 씨가 드럼을 친 걸로 나오는데?

    원종희 : 스파이키 브랫에서 드럼을 한 2년 가까이 쳤다. 럭스하면서 스파이키 브랫도 같이 했었다. 앨범도 내고.


    박준흠 : 초등학교 3학년부터 6학년 때까지 미국 생활을 한 걸로 안다. 음악을 그 때부터 좋아했다고 나오는데, 이게 향후 영어 가사를 쓰는데도 영향을 미쳤나?

    원종희 : 그렇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1989년) 미국에 갈 때는 영어 알파벳도 모르는 상태에서 갔었다. 부모님이 나를 미국인 학교에 보냈다. 전교생 중에서 한국인이 4명 정도였다. 미국 애들 중에는 영어 못한다고 놀리는 애들이 없었는데, 유독 한국 애들이 놀리고 그러더라. 그래서 초등학교 4학년 때 한국 애랑 맞장을 떴다. 내가 이겼다.(웃음) 그렇게 싸우고 어린 마음에 뭔가 되게 억울했다. 이겼는데도 그 억울함이 계속 있었던 거 같다. 왜 같은 한국 사람인데 그 애가 나를 싫어하지, 그러면서 열등감이랄까 그런 게 어렴풋하게 자리 잡았다. 그러면서 “아, 자부심을 가져야겠다”는 그런 맘이 생겼던 거 같다. 그리고 사촌형들이 혼혈인데, 큰아버지가 미국인이랑 결혼을 해서 사촌형들이 딱 봐도 미국인 같이 생겼다. 방학하면 어머니가 누나랑 나랑 영어를 배우라고 사촌형네 데려다 주곤 했는데, 그 때 제일 큰 사촌형이 밴드를 했었다. 그 형이 주차장 안에 합주실을 만들어놓고 합주했고, 나는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밴드 합주하는 거 구경하면서 ‘멋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 형들이 나한테 들려주던 음악들의 가사를 외우면서 놀고 그랬다.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 같은 노래들. 아무 것도 모른 채로 가사를 막 외우고. 핑크플로이드의 [The Wall] 앨범 같은 경우는 초등학교 3학년 때 가사 따라 부르면서 들었는데, 그렇게 듣던 게 초등학교 때 처음 음악을 접하기 시작한 거다.


    박준흠 : 그 사촌형 밴드가 펑크밴드는 아니었나?

    원종희 : 자기네는 펑크밴드라고는 말 안했던 것 같은데, 음악이 풋내기스러운 음악이었으니까.(웃음) 거의 미국 펑크밴드였던 것 같다. 그 사촌형은 지금 미국에서 빅터레코드라는 음반사에서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박준흠 : 그러면 미국에서 얼터너티브록 붐이 막 터질 때 초등학교 생활을 했다. 5학년 정도에 너바나의 [Nevermind] 앨범이 나왔겠다.

    원종희 : 그렇다. 내가 5학년 때 엠씨해머, 바닐라아이스가 유명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너바나의 <Smell Like Teen Spirit> 뮤직비디오가 TV에 계속 나왔다. 친구들이랑 대걸레 들고 학교에서 놀고2)...(웃음) 그게 5학년 때다. 얼터너티브록 붐이 확 치솟은 게.


    박준흠 : 그런데 미국에서는 그 때 초등학생들한테도 너바나가 영향을 미쳤나?

    원종희 : 초등학생들도 뭐 다 따라하고 놀고 그랬다. 초등학생 입장에서는 엠씨해머나 바닐라아이스나 너바나나 다를 게 없다. 아무 것도 모르는데 그냥 다 TV에 나오니까 재밌어서 학교에서 대걸레 들고 왔다갔다 하고...(웃음) 장난치고...


    박준흠 : 언제 한국에 다시 돌아왔나?

    원종희 : 초등학교 6학년 때 다시 돌아왔다. 6학년 2학기로 다시 들어갔다.


    박준흠 : 럭스 결성하기 전에는 듀스 음악을 좋아했다고 되어있는데, 혹시 그게 지금 원종희 씨가 창작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것 같나? 무슨 얘기냐면, 럭스 노래는 펑크인데도 좀 다르게 들리는 측면이 있어서이다. 흔히 말하는 ‘가요 필’이 있다.

    원종희 : 내가 듀스를 음악적으로 좋아했다기보다는 중학교 때 듀스를 좋아하는 게 유행이었기 때문에 랩도 외우고, 수학여행 가면 애들이랑 듀스 랩도 하고 그랬다.(웃음)


    박준흠 : 그 때 춤도 추고?

    원종희 : 그렇다. 밤 12시까지 애들이랑 놀이터에서 헤드스핀 막 하고, 독서실도 안가고 놀고 그랬다.


    박준흠 : 그러면 드럼을 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원종희 : 중학교 2학년 때 까지는 소위 뒤에서 노는 애들이랑 맨날 춤추고 그렇게 놀았다. 비트박스가 그때 한참 유행이었다. 그 때 이현의라는 친구가 앞에서 공부 열심히 하는 친구였는데 나한테 큰 맘 먹고 와서 “종희야, 내가 밴드를 할 건데 니가 드럼을 좀 쳐보지 않을래?”라고 했었다. 그래서 “오, 드럼 좋지. 그런데 드럼이 뭔데?” 그랬더니 그 때 핫뮤직에 나온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거 치는 거라고... 아, 되게 멋있겠다는 생각으로 하게 됐다. 초등학교 때 록음악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록밴드가 멋있다, 록음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친구들이랑 그렇게 노는 와중에 어떤 공부 열심히 하는 친구가 와서 드럼을 니가 쳐봐라 하니까... 어, 한번 해보자 심심한데... 그게 밴드를 하게 된 계기였다.


    박준흠 : 그 당시에 같이 음악 했던 친구들은 그만뒀는데 어떻게 프로뮤지션을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가? 아버님한테까지 그렇게 얘기할 정도였다고 했는데.

    원종희 : 그게 청개구리 심보도 컸던 것 같다. 다 못하게 하니까. 한창 사춘기 시절에는 부모님이 못하게 하면 되게 하고 싶지않나. 그리고 이현의, 이승복 이 두 친구가 밴드를 그만두겠다 하니까, 왜 그만둬? 난 할래 그러면서... 그게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박준흠 : 그 때 음악에서 ‘자신만의 뭔가’를 발견한 게 있었나?

    원종희 : 그렇다. 그 때 한참 카세트테이프에서 CD로 바뀌는 시절이었는데, 또 다른 공부 열심히 하는 친구가 자기가 CD플레이어를 사야하기 때문에 테이프을 개당 2백원에 팔겠다고 하면서 학교에다 갖다놓았다. 백개 정도를. 그래서 나는 록밴드 할거니까 나한테 팔아라하고 그걸 다 샀다. 한꺼번에 2만원어치를. 그냥 이것저것 음반 표지를 보다보니까 난 모르는 밴드였는데, 거기에 너바나에서 펄잼, 사운드가든, 스톤템플파일럿츠와 같은 얼터너티브 쪽도 있었고, 메탈리카, 카니발콥스와 같은 데쓰메탈 쪽으로도 있었다. 그 때 그린데이가 있었다. 하고많은 표지 중에서 그린데이 [Dookie](1994) 음반 표지가 되게 예쁜 거였다. 그래서 그걸 맨 처음에 들었다. 시커먼 펄잼의 [Vitalogy](1994) 같은 건 새까매가지고 틀어보니까 음악이 어둡고 이상하고 무서웠다. 그런데 그린데이의 [Dookie] 앨범은 들어보니까 음악이 되게 신났다. 어, 좋다 그러면서... 또 내가 영어를 좀 할 줄 아니까 그 <Basket Case>가 들리는 거였다. 그 가사가 처음에 “do you have the time to listen to me whine, about nothing and everything all at once” 이렇게 나오는데 가사가 귀에 촥촥 다 들어오는 거였다. 그 말들이 동감이 되는 거다. 그 때 그린데이 앨범은 테이프가 늘어나서 못들을 정도로 많이 들었다. 그게 아마 가사 부분에서 나한테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박준흠 : 첫 자작곡이 <스컹크>라고 돼있는데, 그게 언제 정도인가?

    원종희 : 중 3때 우리가 졸업공연을 했었다. 자작곡이 딱 하나 있었다. 왜 ‘스컹크’라고 지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그렇게 지었다.


    박준흠 : 이 ‘스컹크’가 동물 ‘스컹크’를 얘기하는 건가?

    원종희 : 그렇다.


    박준흠 : 대략 가사가 무슨 내용이었나?

    원종희 : 한글 가사였고, 되게 어두운 곡이었다. 밝은 멜로디에... 가사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대략 “어떻게 또 하루를 살아나갈까~” 이러면서... 중학교 3학년 주제에.(웃음) “아, 오늘아침 눈을 뜨면 생각하지. 내가 왜 사나” 막 이러고. 참, 그 안에 랩도 있었다. 욕설 ‘씨~~’...(웃음)


    박준흠 : 아버님은 음악 하는 거 계속 반대했다고 들었다. 가출했다는 얘기도 있던데. 당구장에서 생활하고 그랬다고?

    원종희 : 당구장에서 한 3개월 동안 일하면서 돈 모으고 그랬던 적도 있었다.


    박준흠 : 그게 고등학교 2학년 때?

    원종희 : 그 무렵이다.


    박준흠 : 어머님만 이해를 하셨나?

    원종희 : 어머니도 이해를 안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뭘 하든 간에 집에 들어와서 해라, 그런 심정으로 얘기했다.


    박준흠 : 그럼 어머니가 사업자등록증을 해주신 건?

    원종희 : 내가 고 2때 학교를 안 가고 당구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당구장 사장님한테 보일러실에다가 합주실을 만들어달라고 해서 거기서 럭스가 합주를 하고, 머리도 ‘닭머리’(모히칸 헤어스타일)로 밀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어떻게 어떻게 해서 나를 찾아내서 “집에만 들어와라”라고 얘기했고, 내가 ‘닭머리’를 딱하고 집에 들어갔다.(웃음) 아버지는 이제 할 말도 없고 “니가 드디어 이제 미쳤구나...” 그러셨다. 나는 학교 갈 생각도 없고 밴드를 하고 싶다고 크게 반항을 하니까 “니가 뭘 하든 집에 있어라, 집에서 밥 먹고 다녀라” 그러셔서... 그래도 어머니 아버지가 너그러우신 마음으로 그렇게 해주시니까, 내가 조금씩 설득이 되면서 학교도 다녀야겠구나라는 생각도 하게 됐고. 아버지는 학교는 다니면서 해라 그러시고, 나는 학교는 다녀도 머리는 안 밀겠다, 이런 걸로 실랑이 했다. 결국에는 군대를 갔다 와라, 하나씩만 해 달라... 부모로써 그렇게 말씀하셔서 그렇게 하나씩은 했던 게 내가 그렇게 비뚤어지지 않고 자랐던 계기인 것 같다. 뭐라 그럴까, 너그럽게 잡아주셨으니까.


    박준흠 : 여태까지 곡을 많이 썼는데, 그럼 어머님에 대한 곡을 써 볼 생각은 없었나? 못 들은 거 같은데.

    원종희 : <깨우지마>라는 곡이 있는데(1998년 [우리는 한마음(‘98 펑크대잔치)] 수록), 그게 “이젠 제발 날 그냥 내버려둬~” 그러고. 참 되게 철없죠.(웃음) 어머니한테 들려주면서 “그러니깐 깨우지 말란 말이야” 그러고, 참...


    박준흠 : 원종희 씨는 한동안 일명 ‘닭머리’라는 모히칸 헤어스타일을 했다가, 이후 모자를 썼다.

    원종희 : 아, 그게 ‘도리구찌’라고. 일본의 펑크팀들도 많이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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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종희 (최규성)


    “스팽글에서 공연을 하게 되면서부터 밴드가 자작곡을 만들어야 된다더라, 라는 얘기를 들으면서 자작곡을 많이 만들기 시작했다.”


    박준흠 : 라이브클럽에 서기 위한 오디션에서 몇 번 떨어졌다고 들었다. 첫 무대가 라이브클럽 ‘스팽글’이었나?

    원종희 : 홍대에서는 첫 무대가 스팽글이었다. 그 전에 신사동 ‘화이트 스튜디오’라는 합주실에서 몇 번 공연했다. 거기 제일 큰 방이 한 시간에 2만원이었나... 거기 사장님한테 얘기하고, 12만원에 6시간 빌려서 공연했다. 그게 중학교 3학년 때였다.


    박준흠 : 라이브클럽 ‘드럭’ 오디션에서는 왜 계속 떨어진 건가?

    원종희 : 나중에 얘길 들어보니까, 그 때 드럭에서는 민주적으로 소속 밴드들이 다 같이 투표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다 찬성을 했는데, 크라잉넛 멤버들이 계속 반대를 해서 떨어졌다고 하더라.(웃음)


    박준흠 : 그 당시에 드럭 오디션을 보는 팀들이 많았었단 얘긴가?

    원종희 : 그랬을 것 같다. 그 때 ‘껌’은 합격했다. 나랑 같은 중3이었는데.


    박준흠 : 그러다가 스팽글에서 공연한 게 1997년 정도인가?

    원종희 : 그랬을 거 같다. 드럭을 처음 알게 된 건, 누나 친구가 내가 밴드한다는 걸 알고서 홍대에 드럭이라는 클럽이 있는 데 가면 좋아할 거라고 소개를 해서였다. 오디션 떨어지니까 거기 말고 다른 클럽도 있다더라 해서 찾아갔던 게 스팽글이었다. 거기서 보람이 형(이보람. 밴드 ‘삼청’의 보컬/베이스)과 스팽글 사장인 성숙이 누나(조성숙. 후에 쌈지스페이스 내의 공연장인 ‘바람’ 운영)를 만났다. 내가 집이 없는데 여기서 자도 되겠습니까해서...(웃음)


    박준흠 : 스팽글에서는 공연 자주 했었나?

    원종희 : 많이 했다. 금요일에도 많이 하고, 가끔씩 토요일에도 하고.


    박준흠 : 그러면 자작곡은 고등학교 때 많이 만들었나?

    원종희 : 스팽글에서 공연을 하게 되면서부터 밴드가 자작곡을 만들어야 된다더라, 라는 얘기를 들으면서 자작곡을 많이 만들기 시작했다.3)


    박준흠 : 스팽글 같은 경우가 다른 클럽들하고 다르게 창작곡 연주를 많이 원했는데.

    원종희 : 맞다. 너네가 자작곡을 연주 해야지, 그러면서 조언을 많이 해줬다. 그래서 자작곡을 만들어야 된다는 압박을 받았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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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규성)



    “다른 레이블에 소속돼서 거기 레이블 사장과 싸우면서 니들 음악을 해라. 우리끼리는 놀자.”


    박준흠 : 스컹크 레이블 시작 부분에 관해 듣고 싶다. 1998년에 클럽 ‘하드코어’에서 럭스와 같이 활동했던 ‘결.애.사’, 송지욱 등과 [우리는 한마음(‘98 펑크대잔치)]4)을 제작한 것이 시작이었는데.

    원종희 : 문화라는 게 발전을 해가는 과정에서 하나의 새로운 콘텐츠에 대한 카테고리가 생길 때는, 아티스트들이 직접 홍보랑 매니지먼트 포함해서 발로 뛰는 모양새를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는 것 같다. 특히 펑크도 그렇고 인디 씬 전체가. 90년대 중반에 한국에 펑크랑 같이 인디(문화)가 왔으니까. 그 때 당시에 홍대에 드럭이 생기고 스팽글이 생기고 이러면서 뭔가 만들어지고 있던 그 시기에, 사실상 누구나 다 “음반은 어떻게 내지? 공연은 어디서 해야 되지? 합주는 어디서 하지?” 그러면서 서로 막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던 시기였다. 그 시대적 상황에 비해서 스컹크레이블은 그냥 다른 쪽은 안 보고 내부만 보면서 커왔던 거 같다. 그 때 분명히 인디레이블이란 곳이 있었고, 거기서 삼청교육대 음반도 발매해주고 여러 음반을 발매 해줬는데 우린 그걸 모르고 있었으니까.(웃음) CD 내는 건 둘째 치고 “테이프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걸 어떻게 만들지?” 이러고, 여기저기 합주실이 많이 생겼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합주실 만들어놓고, “공연을 드럭에서 안하면 또 어디서 해야 하지?” 하면서... 외부를 찾아다니기보다 우리가 만드는 것에 더 집중을 했던 거 같다. 그러다보니까 사실상 생겨야 할 건 스컹크레이블 안에서 한 번씩은 다 생겼다. 합주실, 공연장, 음악상품을 판매할 수 있는 온라인 샵이나 스컹크레이블 홈페이지, 그리고 그에 따르는 구조적으로 음반을 발매하기 위한 사업자등록증에서부터 바코드 생성까지. 유통도 직접 했었고.


    박준흠 : 스컹크 레이블 설립 이후의 진행은 어땠나?

    원종희 : 음반사가 되기 위한 기본은 다 한 번씩은 찔러봤던 거 같은데, 그렇게 하다보니까 매출과 생산원가를 맞춰야 하는 과제에 당면했을 때 이건 어찌 됐건, 한 명 아니면 두 명이서 일을 다 해야 되더라. 그래야지 이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생활을, 밥 먹고 자면서 일을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에 비해서 일은 점점 많아지고 커지고, 시대적 상황은 펑크가 부흥기였고 밴드들은 많았고, 스컹크레이블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많았고, 다 받아주고 싶은데 어떤 걸 기준으로 받아야 되는지도 모르겠고. 나는 럭스를 하고 있으니까 럭스랑 비슷한 생각을 하는 친구들을 받아야겠다 해서 받고 그 친구들의 음반을 발매해줬다. 그런데 한 명 아니면 두 명이서 홍보, 프로모션을 잘 하면서 밴드들 공연까지 챙기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에 음반을 발매해도 많이 판매를 하지 못했다. 실질적으로는 외부의 도움, 평론가분들이나 어떤 사람들이 그걸 발굴해서 다른 데로 끄집어내서 “어, 이거 좋은데” 할 때는 이게 좀 팔렸다. [3000 Punk]가 괜찮은 음반이다 이러면 KM-TV에서도 와서 인터뷰도 한번 해 주고. 하지만 그런 도움을 받지 못하면 확 죽더라. 자체 시스템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우리 펑크들이 독불장군식으로 우린 너희들 없이도 잘 할 수 있어 이러면서 2003, 2004, 2005년을 넘어오면서 잘 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은 했는데, 실질적으로 그렇게 되진 않았다. 밴드들은 “아무도 우리 음악을 듣지 않아도 우린 음악을 계속 할 거고, 아무도 우리 음악을 좋아하지 않아도 우린 공연을 계속 할 거다”라고 말은 했지만, 아무도 듣지 않는 그 음악을 만들기에는 열정이 계속해서 사그러들었던 게 펑크밴드들의 실정이었던 거 같다. 그렇게 죽 거치다보니까 특히 2005년 무렵부터는 ‘펑크의 시대’가 아니었고, 인디에서도 트렌드가 바뀌었다. 펑크밴드들은 이제 힘들만큼 힘드니까 남을 자들만 남고 힘들어 하는 자들은 다 빠졌다. 그 남은 자들마저도 우리가 음악을 하는 사람들인지 친구들인지...(웃음) 친구들이 무대에서 서로 노래를 하고 있는 건지, 밴드들이 사람이 안와서 이렇게 놀고 있는 건지. 반농담식으로 재밌게 놀다가 결국에 지금 이 시점에서 스컹크레이블은, 우리가 충분히 이 ‘시스템’을 봤고 충분히 이 ‘시스템’을 이해를 했다는 결론이 내려지면서 그럼 우리도 더 이상 ‘시스템’을 두려워하지 말자라는 생각을 했다. 시스템에 우리가 몸을 담고 속해도 되겠다 생각하면서 스컹크의 이상적인 방식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계기가 됐던 거 같다. 그게 2007년쯤이다.


    박준흠 : “시스템을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는 게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가?

    원종희 : 나도 럭스라는 밴드가 어느 레이블에 소속되는 게 참 싫기도 싫었지만 두려움도 같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과연 그들이 우리의 목소리를 제대로 받아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가 밴드도 이만큼 했고, 어떻게 굴러가는 지도 다 알게 됐다. 그러니까 녹음비가 얼마 정도 되고, 음반이 팔리면 유통마진이 얼마고 밴드한테 돌아가는 게 얼마 정도인지를 구체적으로 다 알고 있는 상황에서는 남들한테 맡겨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다.


    박준흠 : 그래서 최근에 럭스의 매니지먼트를 다른 곳에서 하는 것인가? 도프뮤직에서 럭스 홍보사진을 본 거 같은데.

    원종희 : 도프와 계약을 하면서 음반을 도프에서 발매를 하기로 했다.


    박준흠 : 그럼 3집이 도프에서 나오는 건가?

    원종희 : 그렇다.


    박준흠 : 그러면 스컹크레이블에 있던 다른 밴드들도 비슷한 입장인가?

    원종희 : 그렇다. 그런 것에 대해서는 스컹크의 입장을 제대로 설명해줬다. 우리가 좋다고 우리끼리 있지만 이건 우리끼리 해서는 일이 안된다. 왜 일이 안되냐면, 우리끼리는 일이 하기 싫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로 얼굴을 붉혀가면서 이렇고 저렇고 말하고 싶지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일을 같이 못한다. 일은 다른 사람들이랑 하자. 너희 음악도 충분히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좋은 음악이니까 다른데 가서 싸워라. 그러니까 다른 레이블에 소속돼서 거기 레이블 사장과 싸우면서 니들 음악을 해라. 우리끼리는 놀자. 스컹크레이블은 남겨두자. 스컹크레이블 만들어놓고 놀던 그 시절은 그대로 남기자고 판단한 거다.


    박준흠 : 그럼 여기 스컹크레이블에서는 당분간은 더 이상 음반을 안낸다는 건가? 레이블만 남겨두고?

    원종희 : 도프의 윤중이 형이랑 얘기를 한 게, 종희 너도 잘 아는데 뭐 나한테 이걸 맡기냐해서 “아, 우리는 음악만 할 거고, 우리는 도프에 충성을 다하겠다”(웃음) 이러면서 “우린 형이 시키는 거 안 하고 그러지는 않을 거니까 잘해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윤중이 형이 “그래도 스컹크를 도프의 산하로 남겨두자. 나는 부담스러워서 못하겠다. 럭스가 스컹크에서 안 나오고 도프에서 나오는 것도 내가 봤을 때는 웃기다. 그러니까 도프랑 스컹크 로고를 같이 띄우자. 그리고 도프 소속 밴드들 중에서도 앞으로라도 럭스랑 비슷한 스타일의 밴드들이 있다면 도프랑 스컹크를 같이 겸하자”고 말했다. 그런데 우리 스컹크는 일을 안 하는데 왜 스컹크 로고를 집어넣냐고... 그냥 뽀대로 넣자... 그렇게. 윤중이 형은 아무래도 펑크에서는 스컹크가 큰 비중을 갖고 있으니까 자기 개인적으로도 스컹크는 남겨두고 싶다고 해서, 도프랑 스컹크를 같이 하고 “내가 종희 너한테 조언을 좀 받겠다”라는 얘기를 했다. 조언 줄 건 없겠지만 그럼 그렇게 하자, 이렇게 정리됐다.


    박준흠 : 괜찮은 방식 같다. 원래 스컹크 쪽에서 나와야 될 음반을 도프 쪽에서 내게 됐을 때는 스컹크 로고 넣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원종희 : 굳이 도프가 아니더라도 GMC도 점점 확장을 하고 있고, 엄청 많은 레이블들이 우리 밴드들을 반겨주진 않겠지만(웃음) 그래도 밴드들이랑 같이 뭔가를 만들어가고 일을 해나갈 의사는 있다고 본다.


    박준흠 : 그런데 스컹크만큼 간섭을 안 하는 레이블과 계약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원종희 : 그렇기는 하다. 하지만 그만큼 또 일을 하게 되니까, 멀리 봤을 때 그건 분명히 밴드한테 득이 될 수도 있다. 외국의 예를 들면 배드릴리전이 만들었던 ‘에피탑’ 레이블이, 재밌게도 지금 메이저 음반사가 돼있다. 펑크라고 하기는 좀 그런데, 분명히 그쪽도 많은 걸 포기했을 거 같아요. 친구들과 비즈니스를 하다보니까 내가 너랑 먼저 친구였는지, 먼저 밴드와 레이블간의 관계였는지... 그런 것들을 포기하고 갔을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 엄청 많은 노력과 투자와 운도 따라주었을 것이다. 스컹크는 그러지 못했던 거 같아서 어떻게 보면 포기다. 우리는 성장하지말자, 그냥. 스컹크는 지금 소속밴드가 두 팀이 있으니까 세 팀이 늘어도 네 팀으로 늘어도 앞으로는 비즈니스를 하지말자는 취지로.


    박준흠 : 아까 평론얘기가 잠깐 나왔는데, [우리는 한마음]하고 [3000 Punk]에서 그런 얘기도 하지 않았나? ‘구차하게 평론의 대상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고...(웃음)

    원종희 : 그 때 그런 얘기를 했다.(웃음) 그런데 이게 음악을 떠나서 모든 예술도 같다고 해야 되나, 사람들의 속마음 깊숙이는 평가해 주기를 원하고 그것을 봐주기를 원하는 게 만인의 바람인 것 같다. 하지만 다치고 싶지가 않으니까, 자기가 소중하게 만들어 낸 자기의 창작물이 남들에 의해서 난도질 당하는 게 싫으니까, 그렇게 말을 내뱉는 데 어떻게 보면 일종의 위악이다. 나는 그렇게 판명을 지어버렸는데, 과연 그런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박준흠 : 평론 관련해서 얘길 좀 하면, 평론가마다 평론에 대한 입장이 다르다. 아주 개인적인 비평을 하는 사람이 있고, 나 같은 경우에는 음반가이드 역할을 하려는 게 더 강하다. 음반가이드 역할이란 게, 음악생산물이 많이 나왔는데 소비자들은 그 많은 생산물들을 다 접해볼 수는 없기 때문에 누군가가 중간에서 별점을 매기든 다른 어떤 방법을 쓰든 간에 정리를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음악산업 안에서의 매체 역할을 의미한다. 당장 한국만 해도 1년에 음반이 천 장씩 나오는데 그런 방법론이 있어야지 ‘정상적인 소비 구조’를 만들 수 있지 않겠나. 여기서의 문제는 한 평론가의 평론방법이 아니라 그 평론가가 과연 ‘일관성’ 있는 평론을 하는가의 문제이다. 심하게 얘기해서 어떤 평론가가 편파적으로 보일정도로 특정 취향을 강하게 드러내는 경우라도 그 평론가가 정확하게 일관성만 지켜준다면, 그 특정 취향에 동의하는 음악소비자들한테는 분명히 가이드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해서 ‘지당하신 말씀’만 읊조리는 평론이 더 문제이고, 색깔 없는 평론가들만 모여 있는 것은 음악씬을 생각한다면 해롭기까지 하다. 가장 이상적인 평론 환경은 각자의 태도와 취향이 분명한 평론가들이 다양하게 구성된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게 음악평론에 대한 내 개인적인 입장이다.

    원종희 : 그렇다. 그게 아마도 서로 꽤나 오래 지켜봤을 때 그 진가가 나오는 것 같다.


    박준흠 : 나 같은 경우는 평론에서 두 가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하나는 평론가로서 ‘일관성’을 지켜야 한다는 게 있고, 왔다 갔다 하면 안 되잖나... 또 하나는 뮤지션과 음악수용자 사이에 있는 평론가가 결정적인 순간에 누구의 편에 서 있어야 하는가의 문제인데, 내 생각에 음악평론가는 음악수용자 편에 서 있어야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원종희 : 그렇다. 음식평론가가 식당 편에 서있으면 안되겠죠.(웃음)


    박준흠 : 그러니까 음악평론가가 음악수용자 편에 선다는 얘기는 어떻게 보면, 여러 부류에게서 좀 욕을 먹을 소지가 있더라도 음악에 대해서는 냉정하게 평가를 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는 얘기는 특정 뮤지션을 영원히 지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이고, 뮤지션들하고는 항상 일정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솔직히 나라고해서 뮤지션들하고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겠는가?(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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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종희 (최규성)



    “내가 내 진심을 과연 어떻게 다 언어로 내뱉을 것이며 박준흠 씨가 생각하는 진심이 담긴 그 질문들과 나에게 영향을 주고 싶은 그걸 또 어떻게 다 표현을 할 것인가”


    박준흠 : 럭스 멤버들은 다 가사를 중시하고, 좋은 가사도 많다. 고등학교 무렵부터도 가사 쓰는 부분에 있어서도 남다른 생각이 있었나?

    원종희 : 남다른 생각은 없었다. 한국말로 뭔가 가사를 쓰는 게 되게 어렵더라. 그 단어를 뱉기가 민망하기도 하고. 그래서 최대한 안 민망하고 최대한 닭살 돋지 않는 가사들을 찾으려고 노력을 했다.(웃음) 그런 생각으로 가사를 썼던 거고, 그 외 뭐 별다른 건 없었다.


    박준흠 : [우리는 한마음](1998)이나 [3000 Punk](1999)에 있는 노래들은 영어 가사고, 그 다음에 나온 첫 번째 EP [I Gotta Go](2000)는 앞에 다섯 곡은 영어 가사고 뒤에 두 곡(<새><덤벼라 덤벼 이 개 씨발놈들아>)은 이주현 씨가 만든 한글 가사다. 혹시 이 음반에 담겨 있는 이주현 씨 노래들을 좀 다르게 받아들인 게 있었나?

    원종희 : 나도 이 음반에서 제일 좋은 노래를 꼽으라면 그 두 곡이다.


    박준흠 : 왜냐면, 이 음반을 처음 들었을 때 <I Gotta Go> 한 곡을 빼고는 초반 다섯 곡들은 다른 펑크밴드들의 노래하고 비슷하다는 생각했었지만, <덤벼라 덤벼 이 개 씨발놈들아> 같은 노래는 독특하다는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다.

    원종희 : 그 때 소리바다에 한창 엽기로 많이 뜨고 그랬다.(웃음)


    박준흠 : 이후 군대를 갔는데, 군대 갔다 와서 노래가 많이 달라진 것 같다. [I Gotta Go]하고 1집 [우린 어디로 가는가](2004)하고는 창작에 있어서 간극이 많아 보인다. 그 중간에는 어떤 생각들을 많이 했나?

    원종희 : 군대에 들어가서는 모든 이들이 그렇듯이 제대할 날짜만 기다리면서 제대하고는 진짜 밴드를 제대로 해야지 하면서 이를 갈았다. 2년 동안. 제대하고 나면 앨범도 많이 내고 공연도 많이 하고 재밌게 살아야지 하는 마음이 진짜 컸다. 그리고 군대 2년은 거의 스프링 같이 사람이 꽉 눌린 것 같다. 그러다가 제대하면서 2년 동안 눌렸던 게 펑하면서 튀는 거다. 그 때 군대에 있는 동안, 특히 상병, 병장 꺾이고 부터는 할 일이 없었으니까.


    박준흠 : 혹시 그 때 습작 같은 걸 했었나?

    원종희 : 그렇다. 행정보급관한테 허락받고서 콜라텍에 합주실을 만들어놓고 거기서 밴드도 하고 그랬다.


    박준흠 : 1집의 신곡들은 언제 만든 노래들인가?

    원종희 : 2001년 군대 병장 때쯤부터. 멤버들이 다 같이 휴가를 맞춰서 나와서 공연하고, 합주도 하고 그랬다. 그러니까 2001년부터 2004년 초까지 3~4년 동안 랜덤하게 만든 노래들이다.


    박준흠 : 이 음반에서 <지금부터 끝까지>나 <언제나 이 자리에>, <우린 어디로 가는가>, <전진>, <세상의 중심>, <전쟁>도 그 때 만든 건가?

    원종희 : 그렇다. 내가 23살 때 쯤.



    박준흠 : 솔직히 얘기하면 1집은 처음에 아무런 기대 없이 들었던 음반이다. 그런데 음반을 들으면서 “아, 이 사람은 가사를 문학적으로 훌륭하게 쓰는 사람은 아닌데 보통 그 나이 때 한국의 다른 또래들이 갖고 있지 않은 통찰력을 갖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가사를 들여다보면서 그걸 어떻게 체득하게 된 건가, 라는 의문 같은 게 있었다. <지금부터 끝까지>, <언제나 이 자리에>, <우린 어디로 가는가>, <전진>, <세상의 중심>, <전쟁>은 한국에서 굉장히 보기 드문 ‘세상에 대한 통찰’이 담긴 가사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대개 한국의 그 나이 또래의 청춘들이 ‘나이에 걸맞는 고민’이 부족한 상태로 살아서 원종희 씨의 가사가 돋보이는 것일 수도 있고. 또 한편으로 좀 심하게 얘기하자면, 예전 20~30대 때 치열하게 운동했던 분들 중에서 40대가 되면서 변절한 사람들은 이런 가사를 보고 반성해야된다는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웃음) 흔히 말해서 인텔리가 아닌 펑크뮤지션이 이런 가사를 쓰는 게 나는 놀라웠다. 그래서 이런 가사들이 나오게 된 그 과정이나 생각을 한번 들어보고 싶었다.

    원종희 : 아휴, 과찬이다. 그게 나는 그냥 밴드들을 만나면서 그 밴드들한테 느끼는 생각들이었다. 뭐 너무 광범위하게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나하나 짚어보면 우선 <지금부터 끝까지> 같은 경우에는 밴드를 끝까지 하자. 합주실에 앉아있다 보면 “얘네들이 지금은 밴드를 다짐 다짐하면서 하는데, 과연 이게 언제가지 갈까?” 그런 생각이었고, <우리는 한마음> 같은 경우는 “어떤 음악을 하든 간에 우리는 똑같이 한마음이구나”하는 생각. 밴드들이랑 같이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느낀 감정인데, 그게 또 어찌 보면 사람이 사람한테 느끼는 감정이었던 것 같다. 사람이 사람한테 느끼는 감정은 누구나 좀 비슷하잖나? 꼭 그게 밴드라는 타이틀을 벗어나더라도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얘기를 한 거였기 때문에 공감될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지 않았을까.(웃음) 나도 지금에 와서 옛날 가사들을 다시 보면 “아, 이게 이렇게도 해석이 되겠다”라는 느낌을 받으면서, “과연 내가 그때 이런 생각을 다 하지는 않았겠지”라는 생각도 한다.


    박준흠 : 해석이 달리 된다는 측면은 뭔가?

    원종희 : 그러니까, 분명히 나와 나의 아버지에 연관시켜서 그 가사를 쓴 게 아닌데, 나중에 내가 아버지랑 갈등을 하다가 방에 들어와서 내 음악을 듣다보면 “어, 이거 아버지랑 내 얘긴데”라는 느낌을 받게 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는 내가 되게 좋아하는 명곡들이 어떻게 보면 처음에 그 사람들이 만들 때는 그걸 의도한 게 아니었을 수도 있다. 영화도 예를 들어 어떤 장면이 있는데 영화평론가가 해석하기를 “아마 감독이 악당이 꼭 악당만은 아닐 것이다라는 걸 보여준 것이다” 했는데 사실 감독은 그 장면이 그냥 예뻐서 붙인 걸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게 잘 모르겠는 게, 어딘가는 그게 뇌리에 있으니까 표출이 되는 거겠죠? 내가 거창하게 거기에 대해서 얘기할 수는 없는 거 같다.


    박준흠 : 10대 때부터 혼자서 생각하는 시간이 좀 많았나? 왜냐하면 가사를 보면 원종희 씨는 세상을 보는 자기만의 시선이 명확한 것 같기 때문이다. 그게 거의 10대쯤에 결정된 생각이 아닌가라는 추측을 한다.

    원종희 : 흠... 듀스 때문에 그런가?(웃음) 꼭 그닥 내가 10대 때 혼자서 사색을 많이 한다든가 그렇게 유별나진 않았다. 집을 많이 나갔으니까.(웃음) 집을 많이 나간만큼 혼자 돌아다녔던 시간도 많았고, 모험심이 좀 강했다. 그래서 모험을 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했던거고, 그건 아마 10대들이 다들 겪으리라고 본다.


    박준흠 : 1집에 있는 ‘다짐’에 관련된 여러 노래들은 사회에서 기성세대가 보여주는 실망스런 모습 때문에 “난 그렇게는 안할 거야”라는 류의 다짐인데.

    원종희 : 그렇다. “그렇게 하고 싶진 않어.” 이러면서...


    박준흠 : 개인적으로는 어떤 부분이 살아가면서 하고 싶지 않거나 닮아가기 싫은가? 제일 되기 싫은 사람의 유형은?

    원종희 :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그러는 게 제일 싫다. 사람들이 분명히 본심은 같은데, 외형적으로는 공유하지 못하잖나, 그 ‘진심’을. 개개인별로는 모두가 다 잘살고 싶고, 잘하고 싶은데 그걸 못하는 게 제일 슬프다. 지금 이 공간에서 이렇게 숨 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나와 박준흠 씨는 이렇게 오랜만에 만나서 인터뷰를 하는데, 내가 내 진심을 과연 어떻게 다 언어로 내뱉을 것이며 박준흠 씨가 생각하는 진심이 담긴 그 질문들과 나에게 영향을 주고 싶은 그걸 또 어떻게 다 표현을 할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들고. 우리가 말로 하나씩 얘길 하는데 맴돌기만 하지 사람의 진심까지는 다가설 수 없는 그런 것에 대한, 그리고 결국 그걸 포기하는 사람들이 나는 정말 싫은 거다. 이 건물 1층에 청하사장이랑 나랑 진짜로 싸울 때, 이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 이유가 밑에서 시끄러우니깐 그래서 싫어하잖나.(웃음) 그런 게 나는 슬픈 거다. 이게 아까 말했던 천국과 지옥의 차이인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자기가 먹어야 되니까 남들한테 안주는, 그런 것들에 대한 회의? 아니면 되게 애착? 그걸 잡고 싶은데...


    박준흠 : 먹고살기 각박한 사회일수록 대개 사람들이 한 20대 후반만 돼도 진심을 숨기잖나. 그런 부분을 원종희 씨는 앞으로도 지양하겠다는 건가? 계속 나이가 먹어도 그 부분에서는 변치 않고 싶은 건가, 그런 다짐인가? 아니면 원종희 씨도 어쩔 수 없이 어느 정도 나이가 먹어가면서 일정 부분 변할 것 같나?

    원종희 : 그게... 그냥 변한다기보다 그게 안 되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이든 그걸 아무리 시도를 했다한들 실천화되지 않는, 하나의 ‘관념’ 속에만 있는 그 무엇인 거 같고. 그걸 안 버리고 계속 그 자세로 살아가겠다는 건, 그러니까 ‘자세’라는 건, 우리가 그 다음 음반 [Another Conception](2004)으로 만들었듯이 ‘또 다른 컨셉’을 취할 뿐인 거다. 내가 진심이 여기에 있다고 그 진심을 드러내고 살 수만 있으면 참 좋은데. 그렇게 살 것 같이 하면서 “아, 나는 세상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는 게 싫어요” 이러면서 맨날 기타치면서 그렇게 하는 게 그냥 외형의 컨셉일 뿐이다. 누군가가 뭐 깡패 같은 애들이 와가지고 그 기타 왜 이렇게 시끄러워 그러면서 다 때려부셨다고 했을 때, 그래도 “저는 비폭력입이다” 하면서 두들겨 맞으면서까지 경찰에 신고를 안 하고 그 컨셉으로 계속 그렇게 할 수 있을까?(웃음) 그러면 자기 컨셉을 바꾸게 되잖나? 또 어떤 큰 계기가 있어서 나는 돈 없이도 살 수 있다고 했는데, 돈 없다고 여자친구한테 채이고 하다보면 돈 버는 컨셉으로 자기 자신을 바꾸게 되고. 나는 1층 청하사장이랑 싸우기 싫은데, 그쪽은 날 볼 때마다 거 좀 치우고 살아 어쩌고 이러면서 막 화를 내니까, 그 상황에서 매번 “아유, 죄송합니다” 이러지 못한다. 나도 “뭐, 이 XX야?” 이러면서 싸우게 되는 거다.(웃음) 쌍욕하면서 싸운 적도 많다. 그러니까 내가 청하사장한테 어떻게 감히 진심을 말할 것이며, 청하사장도 진심은 있지만 그건 뭔 발치에 있는 거고. 실질적으로 외형의 컨셉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계속해서 얍샵하게도 사람들은 바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게 나이가 들었을 때, 내가 이제 사십이니까 아저씨답게 행동해야지 하는 것에도 크게 작용을 하는 것 같다. 사실 그 진심 안에 있는 그 사람은 똑같은 그 사람인데. 그렇게 컨셉을 바꾸는 것에 대해선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쩔 수가 없으니까.


    박준흠 : 원종희 씨가 지난 인터뷰에서 얘기했던, “실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선 함부로 얘기하지 않겠다”는 태도가 있는 것 같다. 이 노래들을 만들 당시에는 그래도 어떤 분노 같은 게 있었나보다.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거라든지...

    원종희 : 그런 게 있었다. 뭐 부딪치는 문제들마다 항상 그것들이 보였으니까. 그걸 가사로 많이 썼다.


    박준흠 : 그런데 서울예대 방송영상과 진학 이유가 아까 얘기한 펑크뮤지션으로서의 활동 부분 말고 다른 이유가 있나? 특별히 그 학과를 선택한 이유는?

    원종희 : 내 개인적으로는, 외부 도움으로 음반을 못 만들면 차라리 우리가 직접 음반 만들지 하는 오기가 있었고, 우리가 활동할 클럽이 없으면 우리가 직접 클럽을 만들지 하는 오기도 있었다. 그리고 뮤직비디오를 한번 만들어 보자는 것도 있었다. 꼭 오기라기보다는 재미가 있었다. 촬영하고 편집하고 영상물을 제작하는 게 개인적으로 많이 끌리는 부분이 있어서 학교를 한번 가보게 됐다. 또한 음악 하는 것과는 별도로 나중에 웨딩촬영이라도 하면서 돈이라도 벌 수 있으니까...(웃음) 뭔가 기술을 갖고 있어야 된다라는 생각도 있고, 배우고 싶었다. 우스개 말로는 MBC 음악캠프 사건(2005년 7월) 이후로 친구들한테는 내가 음악캠프 PD가 돼봐야겠다고도 얘기 했었다.


    박준흠 : 1980년생이니까 이십대 후반이다. 이제 내년에 한국 나이로 서른이 되는데, 좀 전에 한 얘기가 삼십대가 되어서도 펑크 뮤지션으로서 활동하는 걸 염두에 두고서 한건가? 아까 얘기한 부업 얘기는 농담으로만 들리진 않는다.

    원종희 : 그렇다. 진짜 진심이다. 꼭 웨딩촬영이 아니라도 홍보촬영, 강의영상물촬영 그런 게 괜찮더라. 이렇게 말하면 또 그 쪽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안 되는데.(웃음) 희소성도 있고, 촬영 잘하면 그만큼 돈도 벌 수 있고 하니까, 그걸 내 직업으로 갖고 밴드도 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박준흠 : 원래 스컹크에서 나온 앨범들은 사진하고 디자인을 원종희 씨가 많이 하지 않았나?

    원종희 : 그렇다. 내가 했다. 요즘은 전단지 디자인이랑 현수막도 내가 만든다. 되게 열정적으로 하고 있다.


    박준흠 : 이쪽에서 디자인 관련된 일을 하는 분으로 박진(전 바세린 기타리스트) 씨가 있다. 박진 씨는 앨범 디자인을 감각적으로 잘하는 것 같더라.

    원종희 : 박진 형은 디자인에 일가견이 있다. 자세히 보면 음악이랑 다 연관이 있는 거 같다. 우뇌가 발달한 사람이 그림도 좋아하고 음악도 잘하고 그런 거 같다. 진이 형은 특히 디자인을 잘한다. 바세린 거나 GMC에서 나오는 거는 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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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종희 (최규성)



    “우리는 무대에서 우리 걸 내뱉기 때문에 무대에서 내려왔을 때 돈을 안 준다고 해도 아쉬울 게 없다.”


    박준흠 : 럭스 음악의 특징은 무엇인 것 같나?

    원종희 : 그게 문제인 것 같다. 내가 특징을 잘 못 잡고 있는 게.(웃음) 요즘에는 내가 느끼는 게, 가사 말고 음악적으로 너무 비슷하다는 게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박준흠 : 그건 펑크라는 음악적 스타일의 한계 부분이지 않나?

    원종희 : 그 포맷의 한계인 것 같은데, 그걸 좀 극복을 하고 싶다.


    박준흠 : 어떤 식으로 극복하고 싶나? 생각하는 게 있나?

    원종희 : 요즘에 ‘고고스타’나 ‘텔레파시’, ‘갤럭시 익스프레스’ 같은 밴드들이 그걸 대신해주고 있는 거 같다.


    박준흠 : 갤럭시 익스프레스도 펑크밴드로 봐야 하나?

    원종희 : 펑크라기보다는 록밴드다. 은하계 록밴드...(웃음) 그런데 내가 봤을 때는 펑크인 거 같기도 하다. 아마 주현이 형이 음악이 들리는 거에 되게 민감하기 때문에 럭스에서 다 채우지 못한 것을 갤럭시 익스프레스에서 하고 있는 것 같다. 또 고고스타나 텔레파시 같은 밴드를 봤을 때도 새로운 것을 찾아가는 모습이 부럽긴 하다.


    박준흠 : 럭스가 그 정도까지 음악적인 외연을 넓히기는 어렵지 않을까?

    원종희 : 그렇다. 지금 멤버들이 다룰 줄 아는 악기가 기타, 베이스, 드럼, 보컬이니까. 럭스 음악을 얘기할 때, 우선 아쉬운 점은 그거다. 우리만의 특징이라면 아까 얘기했지만 가사를 웬만하면 들리게 노래를 하고 싶다는 것, 그리고 웬만하면 남 얘기 안하고 우리 얘기를 직접적으로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가수들이 남들의 대리만족을 위해서 자신들의 상황을 맞춰서 노래를 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예를 들면 자기는 연인과 헤어져 있지 않는데 헤어진 연인에 대해서 노래를 불러주면 헤어져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노래를 들으면서 슬퍼하잖나? 정작 가수 본인은 안 슬픈데. 그게 좋고 나쁘고는 아니고, 우리는 그 반대 경우다. 남들은 그렇게 생각 안하는데 럭스 멤버들이 생각하는 것을 노래로 만들면, 그 때 멤버들끼리 서로 얘기를 하고 동감을 하지 않겠나. 사람들한테 들려줬을 때 조금이라도 동감을 하는 사람들은 들어달라는 게 우리 음악의 특징이다. 남 얘기를 하는 건 참 힘들더라. 일하는 느낌이랄까? 내 생각에 일하는 느낌으로 가수를 할 수 있고, 일하는 느낌으로 노래를 할 수 있다면 충분히 그게 가능할 것 같고, 그게 완벽하게 다 채워지려면 돈도 벌어야 한다.(웃음) 내가 일을 했는데, 남들의 언어로 내가 대신 얘길 해주면서 “아이고, 힘들어라” 하고 무대에서 내려왔으면 돈을 벌어야지 집에 가서 소주라도 한 잔 마시고 그럴 것 아닌가. 일을 했으니까. 우리는 무대에서 우리 걸 내뱉기 때문에 무대에서 내려왔을 때 돈을 안 준다고 해도 아쉬울 게 없다. 우리는 우리 얘길 하고 내려왔으니 여러분도 여러분 얘기하고 싶으면 올라가서 얘기하고 오라고 말하고 싶다.


    박준흠 : 럭스가 개런티를 안 받고도 공연을 하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안 할 것 같다. 나도 팬서비스 차원에서 그렇게 하나 싶었다.

    원종희 : 특히 좋아하는 자리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아는 사람들, 만약 그런 사람들이 관객 중에 한 10~20%가 된다면 무대에서 노래할 수 있는 게 ‘발언권’이 주어진 상태인거다. 내 얘기를 하고 럭스의 얘기를 하고 럭스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니까. 일례로 MT 술자리에서 노래해, 노래해 그러면 아, 뭐... 그러면서 속으로는 잘해야지, 잘해서 한번 보여줘야지 하는 것도 있잖나?(웃음)


    박준흠 : 그러고 보니까 지금 대학교 1학년인데 학교에서 MT 갔다 왔나? 거기서 노래도 하고?(웃음)

    원종희 : 그렇다. 노래도 하고 그랬다. <내일의 다짐> 같은 거 부르고, 또 너무 시끄럽다 그러면 가요도 부르고...(웃음) 재밌게 놀았다.


    박준흠 : 아까도 계속 나온 얘기인데, 가사를 잘 들리게 하고 싶다는 것이 노래를 통해서 본인이 명확하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그런 것인가?

    원종희 : 자기주장인 것 같다. 다시 예를 들자면, 내가 청하사장이랑 싸웠는데(웃음) 나는 청하사장한테 이렇게 얘길 했는데 그 사람은 이렇게 말을 해, 그게 말이 안 되지 않냐하면서 가사를 만들어서 친구들한테 불렀다면 그건 속이 시원할 것이다. 친구들이 그걸 들으면서 “음, 맞아. 그때 싸울 때는 종희가 잘했어” 이렇게 얘길 해주면 좋겠죠. 자기 얘기를 하는 것 이상으로 바라는 게 있다면, 그들이 듣고 ‘동감’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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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규성)



    “웬만하면 신도 나면서 뭔가 음악이 새로운 걸 찾고 싶다.”


    박준흠 : 혹시 럭스 노래를 듣고 럭스가 약간 ‘정치적인 성향’의 밴드라고 바라보는 경우도 있나?

    원종희 : 그렇다. 예전에 서정민갑 씨가 5.18 관련해서 같이 음반(2006년에 5.18기념재단에서 만들었던 [5월의 노래])을 만들자고 해서 나는 아무 거리낌 없이 그냥 작업을 시작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서정민갑 씨가 럭스의 음악은 되게 선동적이고, 럭스의 음악은 운동권 음악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난 그때까지 그런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럭스의 가사들을 그쪽 퍼즐에다가 딱 끼워 맞추니까 많이 들어맞더라. <지금부터 끝까지> 같은 노래도 그렇고. 럭스의 음악은 운동권이고 좌익에 가깝다, 기존의 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오월의 노래>를 좀 불러달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여기저기서 얘길 들어보니까 5.18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더라. 그래서 “어, 이건 아닌 것 같아” 하는 판단이 들어서 이걸 우리가 구체적으로 더 들어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준흠 : 그래서 하다가 그만둔 것인가? 그 때 녹음까지 다 하지 않았나?

    원종희 : 그렇다. 내가 서정민갑 씨한테 피해를 많이 끼친 것 같다. 그때 내가 너무 섣불리 수락을 하는 바람에. 나는 당연히 5.18이면 20년도 더 된 얘기고, 오래 전 일이라서 해도 되겠다 싶었다. 분명히 지금도 억울해 하는 분들이 있고, 반대로 거기에 대해서 자기는 가해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기 때문에 내가 이 노래를 어느 한 편에 서서 부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절 가사와 2절 가사가 있는데 2절 가사 부분을 들어내고 1절 가사만 반복해서 다시 불렀다. 녹음한 게 아까워서. 돈도 냈고 해서.(웃음) 그게 지금 [스컹크 컴필레이션](2006)에 들어가 있는 노래다.


    박준흠 : 그게 그 때 녹음했던 그대로인가?

    원종희 : 그렇다. 2절은 안 부르고 1절만 두 번 블렀다.


    박준흠 : 그리고 나레이션도 추가로 있잖나?

    원종희 : 그 나레이션이 그 상황에 대한 우리 입장을 밝힌 거다. <오월의 노래>이니까 5.18에 대해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걸 한국말로 얘기하면 너무 닭살스러우니까 영어로 얘기한 거다.


    박준흠 : 그 부분에 대한 얘길 좀 더 해본다면?

    원종희 : 제 3자의 입장에서, 제 3자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그런가... 그 때 그 현장에 없었던 사람으로서 그 사건을 해석하자면, 분명히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고 수많은 사람들이 무차별적으로 당했고, 그런 일은 반복되면 안된다라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어떤 이유가 있었건 간에 거기서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 억울하게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은 희생자들이고, 그들은 보상을 받아야 될 필요가 있고. 사실 5.18 비숫한 일들이 해외에서도 많이 있었잖나? 남미 쪽에서도 그렇고. 이런 일들은 전세계에서 반복되고 있지만 더 이상 없어야 되고, 우리는 그때 5.18을 노래하면서 또 한번 경건한 마음으로 기억할 필요가 있다는 것.


    박준흠 : 그러면 음반기획이 어떤 형태였다면 럭스가 참여할 수 있었을 것 같나? 어쨌든 럭스는 본인들이 생각하지 않는 다른 방향에서 읽혀지는 게 싫어서 빠졌다는 얘기잖나?

    원종희 :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원래 기획의도가 그렇게 좌파적인 의도가 아니었던 것 같던데...(웃음) 내가 못하겠다는 생각을 한 게, <오월의 노래> 안에 전두환 씨에 대한 가사도 있고, 구체적으로 비꼬아서 말하는 내용들이 많더라. 그것들 때문에 내가 안 하려고 했던 거였다. <오월의 노래>를 불러 달라고 서정민갑 씨가 나한테 제의를 했을 때만 해도 그 노래가 구체적으로 어떤 가사인지 자세히 몰랐다. 알고 보니까 음반의 의도는 내가 추측했던 것은 아니었다.


    박준흠 : 5.18기념재단에서 기념 측면에서 한 거였다. 어쨌든 <오월의 노래>가 여태까지 럭스 노래들 중에서 편곡이 제일 화려한 것 같다.

    원종희 : 앨리스 인 체인스를 예전부터 좋아했었는데, 이 때 한참 그들 음악을 듣고 있을 때였다. 드럼치는 상현이 형도 그런 얼터너티브록 밴드들을 좋아한다. 그래서 우리 앨리스 인 체인스 같은 음악성으로 한번 가보자... 그래서.(웃음)


    박준흠 : 그 곡에는 기타도 3명씩 들어갔는데.

    원종희 : 그때 럭스 멤버가 상현이 형이랑 나밖에 없었다. 아, 태선이라고 지금 고고스타에 있는 그 친구가 막 들어왔을 때라서 멤버들이 없었을 때였다. 수많은 친구들이 다 피처링을 했던 시기였다. 이걸 녹음하던 시기에 그 친구들한테 그 앨리스 인 체인스 같이 만들어보고 싶다고 해서, 곡 기본 골격을 잡아놓고서 칵크래셔에서 가타 치는 승준이한테 막 좀 더 쳐...(웃음) 그렇게 만든 기억이 있다.


    박준흠 : 그런데 그런 식으로 왜 더 안하나?

    원종희 : 그게 신이 안 나더라. 그런 노래가 듣기에는 좋은데 라이브할 때 신이 안난다. 상현이 형이랑 내가 맨날 얘기하는 게, 이 <오월의 노래>가 듣기에는 우리 노래들 중에서 제일 안 거슬리는 거 같은데 라이브할 때 이렇게 재미가 없을 수 있냐고 항상 그랬다.


    박준흠 : 아까 럭스의 음악적 외연을 넓히는 문제를 얘기했었는데, 당연히 라이브가 전제되어야 하겠지만 스튜디오 EP 정도로 따로 만들 생각도 안 해봤나?

    원종희 : 아, 그것도 좋다. 음반에 대한 욕심은 항상 많은 것 같다. 그런데 웬만하면 신도 나면서 뭔가 음악이 새로운 걸 찾고 싶다.


    박준흠 : 럭스의 멤버가 원종희 씨 말고는 계속 바뀌었다. 그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럭스의 음악이랄까, 아니면 본인한테 잘 맞았던 포메이션이 어떤 시기였던 것 같나?

    원종희 : 음악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는 맨 처음에 강동일, 이대희, 이주현, 원종희 이렇게 했을 때다. 그 때는 맨날 합주실에서 연습하고 그랬었다. 합주가 너무 재밌었다. 계속 합주실에서 드럼도 쳐보고 이러면서 노래를 만들 때였다. 누구 한명이 악상을 갖고 오면 그걸 멤버들에게 풀어내는 게 아니고 계속 합주실에서 만들어가는 거 있잖나. 그게 음악적으로 제일 좋았던 것 같은데, 내 생각에는 멤버들의 상태가 다 음악적 발전 단계가 같아서 1에서 시작해서 2, 3, 4, 5 올라가던 그 시기라서 그렇게 재밌었던 것 같다. 그 이후로는 각 멤버들이 다 다르니까. 예를 들자면, 주현이 형은 베이스 레벨이 70인데 형민이는 드럼 레벨이 20이고, 나는 보컬 레벨이 한 50인데 박건우 씨는 기타 레벨이 55고... 이러면 합주가 재미가 없더라.(웃음) 자기는 상대적으로 얘에 비해서 잘하는 데 얘는 그걸 못 치니까 답답해서 합주를 못하겠는 거고... 그런 게 다들 있어서 주현이 형도 그렇고. 얘들이 실력이 늘어야 될 텐데 그러면서 밖에 나가서 담배 한 대 피고. 그래서 음악적으로는 초창기 때가 제일 재밌었다.


    박준흠 : 그런데 1집 [우린 어디로 가는가] 시기에 만든 신곡들은 원종희 씨하고 박건우 씨가 같이 만든 노래들(작사 원종희, 작곡 박건우)이 많잖나? 그리고 노래들도 잘 나왔다. 박건우 씨하고는 잘 맞았던 게 있었나?

    원종희 : 건우는, 음악이 결코 제가 좋아하는 음악 스타일은 아니었다. 건우가 가져오는 음악들은 되게 신기한 것도 많았고... 그런데 럭스에서 건우가 시도하고 싶었던 것들은 너무 기타 위주의 곡들이었다. 그걸 최대한 섞어냈던 게 건우랑 같이했던 곡들이었다. 그 당시에 나뿐만이 아니라 주현이 형도 “건우가 추구하는 스타일이 우리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닌 거 같아. 그렇지만 그걸 이런 식으로 소화를 시켜보자. 건우도 삐지면 안 되니까” 이러면서 자꾸 녹였다.(웃음) 건우의 기타 위주의 곡들을... <Old & New>나 <Knock You Down>, <Another Conception> 이런 곡들이 그랬다. 건우가 워낙에 기타에 대한 시도들이 컸기 때문에, 기타를 휘황찬란하게 만들어 오니까 그걸 암만 녹여도 신기한 곡이 됐던 것 같다.(웃음)


    박준흠 : 박건우 씨는 지금 어디에서 활동하나?

    원종희 : 텔레파시에서 활동한다. 한참 여러 밴드들을 하다가 지금은 텔레파시에서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건우는 예나 지금이나 새로운 걸 좋아하고 새로운 시도를 좋아하는데, 그 시도가 럭스가 시도하고 싶은 방향이랑 약간 달랐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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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종희 (최규성)



    “표현이 좀 너무 그런데... 남자들끼리도 그렇게 ‘걸레’가 되어가는 거다.”


    박준흠 : 한국에서 펑크음악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면?

    원종희 : 어려운 얘기다. 펑크의 철학, 허무주의와 같은 사상적인 부분은 사실 한국인들의 코드랑 잘 맞는 것 같다.


    박준흠 : 원래 한국이 1997년 IMF 사태 이후에 펑크가 번성했어야 하는데...(웃음)

    원종희 : 그런데 한국이란 나라가 잠뽕으로 한꺼번에 막 흡수를 하고 있는 이 단계에서, 과연 서양인들이 차근차근 밟아서 겪었던 착오들을 한국인들이 얼마나 순식간에 소화를 해나갈까 하는 건 참 모를 일이다. 미국에서는 거의 80년대 중반에 “이제 더 이상의 펑크는 없다”고 얘기들 했는데. 한국은 특히 인터넷까지 있는 이 시점에서 하루 만에 펑크를 좋아하다가 한 일주일, 한 달 정도 펑크를 듣다가 “에이, 이젠 펑크는 유치하다”고 생각하게 될 수도 있다.


    박준흠 : 그럼 한국에서 계속 펑크뮤지션으로서 삼십대에도 활동하겠단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존재할 생각인가? 어떤 자세로, 어떤 음악을 하면서?

    원종희 : 그냥 재밌게..(웃음) 지금까지 하던 것처럼 내 스스로 재밌어야 한다.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가 참 중요한 거 같다. 특히 우리 멤버들과 같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가. 몇 번 시행착오를 겪었었던 게, 그동안 내가 좋아하던 멤버들과 결별을 하곤 했으니까 웬만하면 새로 럭스에 들어온 친구들과는 ‘멋있는 인생’을 즐길 수 있는 자세로 밴드를 하고 싶다.


    박준흠 : ‘재미’에 방점을 많이 찍는 것 같은데, 혹시 재미없어지면 어떻게 할 건가?(웃음)

    원종희 : 재미없어지면 큰일 난다.


    박준흠 : 그럼 원종희 씨도 어떻게 보면 기획자 타입이니까, 본인이 재미없어지면 음악을 못하니까 재밌게 음악을 할 수 있는 조건을, 즉 ‘환경’을 계속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나?

    원종희 : 그렇다. 그래서 스컹크헬 클럽 문을 닫는 이유에 그 부분이 크다. 맨날 고민하면서 힘들게 이걸 유지해 나가는데, 게다가 밴드들이 그걸 그렇게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재미가 없다. 그래서 더 재밌게 밴드를 하기 위해서 스컹크헬은 없어도 되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모양새를 변화시켜 가고 있다.


    박준흠 : 원종희 씨는 펑크의 ‘유니티(unity)’라고 할까, ‘내부 공동체’ 부분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혹시 펑크 유니티라고 하는 집단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있어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모델’로서 보여주고 싶다든지, 또는 “니네가 사는 모양새를 보면 우리가 훨씬 인간답게 제대로 살고 있다” 이런 얘길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건가?

    원종희 : 그건 누구나 그럴 거 같다. 꼭 밴드를 안 해도, 시골에서 농사짓고 사는 사람들도 서울에서 막 치여서 사는 것 보다 여기서 사는 게 낫지 그러면서 배추를 따고 계실 것 같은데... 그거는 모든 이들에게 다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본보기가 되겠다, 이런 거는 본보기가 되고 싶어서 살고 있는 건 아니다. 내가 한번 사는 인생인데 남들에게 본보기가 되기 위해서 내 인생을 말아먹을 순 없다.(웃음)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지...


    박준흠 : 펑크 유니티에 대한 자부심 같은 건 있나?

    원종희 : 나는 항상 자부심을 갖고 있다.


    박준흠 : 그런데 굳이 비유를 하자면, 한국에서 대개 성인들은 재력이라든지 권력이라든지 이런 데서 자부심을 찾으려고 하지 않나? 그런 걸 볼 때, 원종희 씨가 펑크 유니티에서 그런 ‘소박한 자부심’을 얘기할 때는 사람들이 무시할 수도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원종희 : 대부분의 사람들이 빠지게 되는 고민이, 분명히 그들은 고등학교 때 친구도 있고 중학교 때 친구도 있고 유년기에 사귀던 좋은 친구들도 있는데 인생을 살아가다보니까 내가 잘돼야 사람들과 잘 되더라, 이런 문제 때문에 갈라지게 되는 것 같다. 나부터 살고 봐야 되더라. 일례로 노가다판에 나가서 일당 7만원씩 받고 일하는 게 친구들이랑 같이 있고 싶어서인데, 그리고 나는 분명히 내가 공부를 하면 일당 7만원이 아니라 연봉을 1억 정도도 받을 수 있을 것 같단 마음이 있지만, 내가 과연 이 친구들이랑 노가다판을 나가는 게 재밌어서 이러고 있나 아님 차라리 현재 이 친구들과 같이 있는 것도 좋지만 한 10년, 20년 정도 열심히 일해서 연봉이 1억, 10억 이렇게 된 후 친구들을 만난 것을 놓고 고민을 하게 되잖나. 그 때 대부분은 후자를 선택하게 되는 것 같다. 속으로는 미안하다, 친구들아, 내가 우선 잘 돼서 너희들을 나중에 챙겨 줄께 하면서 그 바닥을 떠나잖나.


    박준흠 : 그런데 대부분 안오잖나.(웃음)

    원종희 : 그렇다. 대부분 못 온다. 그렇게 단기간에 이뤄지지도 않고, 그걸 겪으면서 사람 머릿속이 또 변하니까. 나중에는 결국 그 노가다하던 친구는 어디간지 모르겠고 자기는 부자가 됐는데 밑은 안보이고, 자기는 현재 연봉이 10억인데 100억이 보이고... 그 때 7만원 벌면서 20만원 버는 사람을 부러워했던 그 마음이, 내가 지금 7만원이 아니고 20만원을 벌면 내 친구들한테 나눠줄 수 있을 텐데 했던 그 마음이, 그런 것들이 지금 내가 10억이 아니고 100억을 벌면 주변 사람들한테 나눠줄 수 있을 텐데... 그렇게 똑같은 마음으로 가는 것 같다. 그럼 다시 시발점으로 돌아와서, 내가 살아야지 친구들도 살더라는 그 마음가짐이 과연 옳았던 건지. 표현이 좀 너무 그런데... 남자들끼리도 그렇게 ‘걸레’가 되어가는 거다. 어릴 때 친구랑 “너랑 나랑 진짜 친구다” 이러다가, 고등학교 때 친구랑 또 그러고, 결국에는 40대, 50대 넘어가면서 “아, 진짜 우리는 변치말자” 이러고... 속으로는 “이렇게 말해놓고도 또 변하겠지. 얼마나 많이 변했는데”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게 후자를 선택한 쪽인 것 같다. 전자를 선택한 사람들에게는 엄청나게 가혹한 현실이 온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끝까지 그걸 지킬 수만 있다면 “비록 너나 나나 지금 7만원 벌지만 우린 할 수 있는데 안한 거지 못해서 안한 거 아니잖아” 이러면서 서로 소줏잔 기울일 수 있는 그게 있다면 참 좋았을 거 같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내가 아까도 말했듯이 “스컹크레이블 내부에서도 뭔가 있더라”했던 게, 레이블이 회사 방향으로 커지면서 이 유니티 안에서도 그런 일들이 없지 않아 있더라.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이렇게 떨쳐내고 저런 사람들은 저렇게 떨쳐내고 하면서 남을 사람들만 남아라 하면서 같이 있는 거다.


    박준흠 : 원종희 씨는 이미 오래 전에 ‘전자의 입장’에서 정리를 한 것 같다.(웃음) 그렇게 한 게 아까도 얘기했지만, 개인적으로 행복이나 재미 그게 더 확실할 거 같아서 선택을 한 건가? 그런 확신이 있어서?

    원종희 : 그렇다. 나한테는 그게 재미인 것 같다. 그 ‘의리와 우정’으로 느끼는 재미라는 건 진짜 말도 못할 정도로 크다.


    박준흠 : 흔히 말하는 ‘강호의 도리’, 그런 데 매력을 느끼는 건가?(웃음)

    원종희 : 꼭 그건 아니고, 남녀 관계도 의리가 있는 거고...


    박준흠 : 뭉뚱그려서 얘기해보면 펑크뮤지션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세상이 있는 것 같나?

    원종희 : ‘자기가 배척되지 않는 세상’을 원하는 거다.


    박준흠 : 그럼 음악 장르에서 펑크 쪽의 뮤지션들이 유독 그 부분에서 더 강한 집을 하는 것 같나? 아니면 차이가 별로 없는 건가?

    원종희 : 그렇게 확연하게 차이가 있지는 않을 것 같다.


    박준흠 : 그럼 다들 생각은 비슷한데, 몸으로써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게 펑크뮤지션들인가?

    원종희 : 그렇다. 직설적으로 뱉는다. 내가 펑크뮤지션이 아닌 뮤지션이 돼본 적이 없어서 다른 뮤지션들 입장을 잘 모르겠는데... 비슷하지 않을까?


    박준흠 : 특히 왜곡된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면서 남에 대해 간섭하기 좋아하는 한국 사회에서 펑크뮤지션이 된다는 건 대단한 결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례로 닭머리 같은 것을 했을 경우 한국에서 가장 문화적으로 포용력이 넓은 홍대에서조차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 같은데...

    원종희 : 예전에 우리 펑크밴드들이 단체로 다 같이 모여서 해운대 쪽에 간 적이 있었다. 아저씨 아줌마들이 “와따, 머리가 성게네, 성게” 그러고 풋풋하게 반응들 하시니까 재밌었다. 그런 걸로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진 않는다.


    박준흠 : 일상에서 부딪치는 일들이 실제로 많을 것 같은데. 가족하고도 그렇고 또 사소하게 시비 붙는 일도 있을 테고. 당장 닭머리 한 채 시내버스를 탄다든지 할 때도 그렇고.

    원종희 : 그걸 감당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 지나가면서 누가 “머리 한번 만져 봐도 돼요?” 그러면 “그러세요. 한 번에 천원입니다.” 뭐 이러면서...(웃음) 그렇다고 그게 제약이 되진 않을 것 같다. 밴드를 하는 데 큰 제약이 되진 않을 것 같고. 그냥 지나가는데 서로 안쳐다보고 지나가면 마음은 편하지만, 쳐다보고 뭐라고 한다고 해서 다치는 건 아니니까.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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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럭스 모습



    “모두에게 백배 사죄드리고 몇 년 감방에서 살라고 하면 살겠다. 즐겁게 음악만 하며 살았던 1년 전, 2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문화일보, 2005)


    박준흠 : 안 물어볼 수는 없고, MBC 음악캠프에 관한 얘기를 하겠다.(웃음) 그 방송 이후에 원종희 씨가 경찰조사 받으면서 기자들한테 했던 얘기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기가 지나서 했던 인터뷰를 보면 조금씩 입장 차이랄까, 그런 게 있는 것 같다. 지금은 그것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나?

    원종희 : 당시 공개적인 인터뷰나 그런 것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그때 보니까 내가 처음 경찰서에 연행됐을 때,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와갖고 “어떻게 된 겁니까, 입장이 어떻습니까, 지금 국민들한테 죄송할텐데 사과하실 생각입니까” 이런 질문을 했을 때, 나는 “저희가 잘못을 했다면 사과를 해야죠. 하지만 우리는 잘못한 거 같지 않아요” 이런 식으로 말을 한 게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많이 방송됐다고 그러더라. 그 당시에 나는 카우치에서 드럼을 치는 샤론이라고 오은정 씨 집에서 승범이 형이랑 몇몇 친구들이랑 같이 있었다. 되게 오랫동안 있었다. 그 때 그 카우치의 승범이 형이 웬만하면 종희 니가 여기 있어라, 나가지 말아라, 그리고 인터뷰는 하지 말아라 그렇게 얘길 했었기 때문에 나도 그래, 안할께 그러고.(웃음) 언론이라는 게 쉬운 게 아니고, 공개방송이라는 게 결코 쉬운 게 아니더라. 그 때는 몰랐다. 그냥 별 생각 없이, 뚝심으로, “공개방송이든 아님 뭐 관객이 두 명 있는 공연장이든 우린 멋있게 공연하고 내려가면 되는 거고. 우리가 우리의 무대를 보여주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한테 책임감을 느낄 필요가 있냐?” 이렇게 생각을 했던 것에 비해서 지금은 내가 하도 궁금하기도 하고 해서 방송영상학과를 들어가서 공부를 하고 있잖나?(웃음) 수업에서 방송이란 무엇인가, 언론이란 무엇이고 미디어란 무엇이고, 대중이란 무엇인가를 공부를 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는 참 쉽지가 않았던 것을 안다. 그렇다고 내가 그 때 그 시점으로 다시 돌아갔을 때, 후회가 된다거나 아니면 이렇게 행동했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는 건 일부러라도 기피하고 있다, 이왕 다 끝난 건데. 물론 그 때 언론과 매체를 다룰 수 있는 시각이 있었더라면 내가 좀 더 다르게 대처를 할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그 때를 안타깝게 생각하지는 않으려고 한다는 것.


    박준흠 : 앞으로 다시는 방송 나가기 힘들 텐데...(웃음)

    원종희 : 아, 내가 그 때 그런 말도 했어요. “앞으로 방송 안 나갈게요” 이러면서...(웃음) 뭐 안 나가겠다고 했으니까 안 나가야죠.


    박준흠 : 나는 그 때 다른 건 잘 기억이 안 나는데, 그 때 나왔던 많은 얘기들 중에서 원종희 씨가 했던 얘기가 생각난다. 뭐냐면, “지금 현실이 너무 감당하기 힘들어 죽을 지경이다. 사고를 일으킨 두 명의 당사자들은 이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뉘우치고 있다. 모두에게 백배 사죄드리고 몇 년 감방에서 살라고 하면 살겠다. 즐겁게 음악만 하며 살았던 1년 전, 2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이 얘기를 보면서 마음이 아렸던 기억이 있다. 이 얘기가 아까도 얘기했던 원종희 씨의 ‘진심’에 관련된 얘기라면 사람들도 그런 부분을 알아챌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거의 묻혀갔던 거 같다.

    원종희 : 언론이라는 게 그런 거 같다. 미디어에서 뭔가가 나왔을 때 대중심리라는 건 진짜 잔혹하다면 밑도 끝도 없이 잔혹하고, 또 아름다우면 엄청 아름답고... 그 포식자들 앞에서 과연 무슨 말이 허용될 것이며, 지금 당장 바로 앞에 있는 1층 가게 사람들이랑 싸우고 있는데 멀찌감치 화면 속에 있는 저 인물들은 죽어 마땅하겠죠. 뭔가 잘못했다 그러면, 죽는 모습을 보고 싶겠죠. 그게 대중심리인 거 같다. 그런데 거기서 정말 죄송합니다, 하면서 계속해서 말을 했더라면 어떻게든 그 대중매체 안에서 명맥을 유지할 수도 있었을까?(웃음) 그런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성은 못 느꼈다. 주변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여러 많은 것들이 문제가 됐었겠지만.


    박준흠 : 그 때 많은 관전평들이 있었잖나. 그 중에는 그 두 분이 숨는 모습이라든지, 굉장히 당황해하면서 무조건 잘못했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에 대해서 지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차라리 의연하게 대처를 하지... 그런 얘기들.

    원종희 : 나도 차라리 섹스피스톨즈 같이 인터뷰할 때 카메라에 침뱉어버리고, 꺼져라 하고, 그런 얘기도 했었다. 그냥 밀고 나가라고. 아마도 이게 아까 그 질문(“한국에서 펑크를 한다는 것에 관하여”)에 맞물릴 것 같다. 아마 그 친구들한테는 생각보다 언론이라는 게 무섭다는 걸 그 순간 알게 됐던 거다. 그 친구들이 무슨 생각을 어디까지 했을지는 몰라도, 그 무대 끝나고 바로 경찰에 연행돼서 카메라가 한 50대 정도가 와서 자기네들을 촬영하고 질문을 무차별로 던지고 하는 그런 상황을 생각 못했을 수도 있다. 그걸 다 생각을 하고 미리 예상을 했더라면, 의연하게 대처를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참 아이러니한 게 그럼 그걸 생각을 못했으면 왜 그렇게 행동을 했고, 과연 뭐가 또 재밌었고... 그 정도는 생각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거 같아요.


    박준흠 : 지금 그 두 분은 잘 있나? 음악 활동은 하는 건가? 카우치 음반 나온 지 한참 된 것 같은데?

    원종희 : 지금 활동을 안 하고 있다. 카우치에서 드럼 치는 샤론 오은정이 일본에 유학 가서 두 분만 남았다. 각자 일하고 있고, 밴드는 쉬고 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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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Ruckus Army] (2007)



    “좋은 가사고 좋은 노래고 좋은 음악이야, 좋아. 헌데 내가 듣기에는 좀 그래. 럭스의 음악은 힘들 때만 들어야 돼.”


    박준흠 : 작년에 나온 정규 2집 [The Ruckus Army](2007)에 대해서 얘기를 좀 더 하고 싶다. 이전 음반을 보면 작사자, 작곡자에 개인 이름을 써놓았는데 이 음반에는 다 럭스로 되어 있다. 이유가 있나? 음악도 전작하고는 좀 달라졌는데?

    원종희 : 그렇다. [우린 어디로 가는가], [Another Conception] 다음에 얘기하고 싶었던 얘기들이다. 작사자, 작곡자를 그렇게 쓴 건 [The Ruckus Army] 제목 같이 럭스 밴드멤버들 간에 우애를 더 다지면서 “우리는 이제 굳건하게 지내자, 서로 누가 작곡하고 작사하고 그걸 사람들한테 알리는 것보다 우리가 더 일체화되자”는 심정이 크다. 음악적으로 변했다거나 가사 내용에서 변했던 거는 사실상 노래 한 곡 한 곡으로 봤을 때는 그래프가 비슷하다. 진심의 목소리를 아무리 던져봤자 그걸 들어주는 건 표면에 없다. [우린 어디로 가는가]에서 우리가 진짜 진심이 담긴 가사들을 얘기했다면 [Another Conception]에서는 우리가 말한 진심 어린 이 가사들마저도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컨셉으로 보일 뿐이다. 그랬을 때 우리의 컨셉은 [The Ruckus Army]다 하면서 머릿속을 텅 비우고 우리가 말하는 가사들은 바보의 머리에서 나오는 거다, 라는 생각이었다.


    박준흠 : 왜 굳이 그렇게 얘기를 하려하는가?

    원종희 : 우선 같은 얘기를 계속 반복하고 싶지가 않았다. [우린 어디로 가는가]에서 꽤나 많은 것들을 이야기 한 거 같다. 그리고 가장 기초적인 포맷에서 럭스가 할 수 있는 음악들을 좀 다양하게 했던 것 같고, 그 이상으로 더 해보고 싶었기 때문에 더 파고들고 싶었다.


    박준흠 : [The Ruckus Army]에서 얘기되는 ‘성난 군중’이, 정확하게 무엇에 성난 군중이인가? 원인이 있으니까 성이 났을텐데?

    원종희 : 그냥 뭐랄까... 삶에 성이 났다. 성이 안 나면 재미가 없으니까.(웃음)



    박준흠 : 혹시 하고 싶은 얘기들을 안 하고 있는 부분이 있나? 왜냐면 1집에서는 너무도 명백한 얘기들을 많이 쏟아 냈고, 그래서 나이 차이가 나는 나 같은 경우도 공감을 했다. 나도 20대 때 저랬던 거 같은데 하는 생각도 하고. 그런데 [The Ruckus Army]는 뭔가 좀 두루뭉실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음악도 그렇고 가사도 그렇고. 그래서 그들에게 뭐가 달라졌을 까, 아니면 이미 어떤 시기를 지난 건가, 그런 생각도 든다.

    원종희 : ‘설득력’을 갖추고 싶은 부분이 큰 거 같다.


    박준흠 : 그러면 1집에서 얘기했던 방식이 설득력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건가?

    원종희 : 그렇다. 내가 굳이 내 입으로 얘기하자면, 요리로 쳤을 때 만약 이게 ‘인삼’이다 하면 맛이 없잖나. 쓰고 텁텁하고. 먹으면 좋은데 맛이 없는 요리를 만드는 것보다는 인삼이 안에 들어있는데 맛도 있는 거다. 그걸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을 거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Another Conception]에서도 한 번 했었고, [The Ruckus Army]에서는 또 한번 더. 인삼을 썰고 끓이고 이걸 안에다 박아 넣자, 어떻게, 하면서.(웃음) 인삼이 들어있으면 사람들은 그렇게 안 좋아할 건데, 그런 느낌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내 노래에 인삼이 들어있다고 하는 거라서 좀 거만하게 들릴 수는 있겠지만...(웃음) [우린 어디로 가는가] 음반도 우리가 박준흠 씨를 비롯한 여러 평론가들한테 의외의 호평을 들었다. 참 잘 만들었다, 가사도 좋고 등등... 그에 비해서 내 스스로가 이 음악을 듣기에는 금방 질린다. 그리고 가사들이 “끝없는 길 외로이 홀로서서, 정처 없이 자신을 돌아보네”(<언제나 이 자리에서>) 이런 말들이 너무 직설적이라서 살가울 정도로 따가웠다. 나도 그렇고, 내 주변 친구들이 듣기에도 그렇고. “좋은 가사고 좋은 노래고 좋은 음악이야, 좋아. 헌데 내가 듣기에는 좀 그래. 럭스의 음악은 힘들 때만 들어야 돼.” 이런 평가를 친구들한테 많이 받았다. 이건 아마도 인삼이 써서 그렇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럼 이걸 어떻게든 바꿔서 더 맛있게, 더 듣기 좋게 할 수 있을까. 그게 사운드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가사 내용에서도 분명히 그 안에 들어 있는데, 그걸 최대한 듣기 좋게 만들고 싶은 욕심이 [우린 어디로 가는가] 다음부터 있었다. 사실 [우린 어디로 가는가] 자체도 [I Gotta Go] 음반에 비해서 훨씬 더 많이 다져진 거 같다. 인삼 뿌리를 막 다져서, 그런 설득력을 갖추기 위한 노력이 가미된 게 [The Ruckus Army]라고 감히 말씀을 드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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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린 어디로 가는가](2004)



    “3집은 ‘인삼’을 좀 더 숨겨서 ‘설득력’을 생각하면서 노래를 만들려고 한다. 그게 많은 분들에게 실망을 준다면 어쩔 수가 없지만, 우리는 지금 그런 시점이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 계획이다.”


    박준흠 : 혹시 3집 곡 작업은 어느 정도 진행이 된 건가?

    원종희 : 지금도 그걸 계속 생각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그걸 잘 다져서 집어넣을 수가 있을까...(웃음)


    박준흠 : 내년 정도에 나오는 건가요?

    원종희 : 드렇다. 그걸 안 넣고 그냥 내뱉기에는 내가 너무 섭섭하고, 그걸 넣었을 때는 분명히 또 맥락이 계속 똑같기 때문에 식상할 수 있다고 본다. 조금 더 나아지고 진보된 걸 들려주고 싶은 게 우리 욕심이다.


    박준흠 : 청자에 따라서는 오히려 날 것 그대로를 원하는 사람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아무 치장 없이 본질적인 것만 딱 표현하는.

    원종희 : 날 것을 만드는 건 그 사람이 날 것이기 때문에 날 것을 만들 수가 있잖나? 그런데 그 사람이 날 것이 이제 아닌데, 계속해서 그 날 것을 만들려고 그런다면 과연 그게 날 것이 될까, 하는 고민도 있다.


    박준흠 : 결국 1집 노래 만들 당시하고 지금의 원종희 씨는 이미 많이 달라졌다는 얘기인가?

    원종희 : 그렇다. 걸레가 됐다.(웃음) 경험이 더 많이 생겼으니까 분명히 그 경험에 대한 걸 절대 무시를 못한다. 자기가 원래 하던 게 사람들에게 조금 좋은 인정을 받았다고 해서 억지로 자기 자신의 음악을 끼워 맞추는 건 안 좋다고 본다. 그 때 그 당시에 좋은 음악을 뽑아내기 위해서 고민하고 갈등하고 생각하면서 했듯이, 똑같은 시스템으로 계속 가보고 싶은 거다. 그러니까 그 때는 아무 것도 없을 때 고민하고 갈등한 결과물이고, 지금은 전작들이 있을 때 고민하고 갈등한 결과물이니까 진보라면 진보, 퇴보라면 퇴보겠지만 뭔가 달라지긴 달라지겠죠. 아쉽게도.


    박준흠 : 지금 얘기하는 건 강요나 그런 건 아니다. 당연히 평론가의 평에 맞춰서 음악을 한다거나 팬의 입맛대로 할 필요는 없다. 다만 예전의 에너지 넘치는 노래와 공연이 그리운 것이다.

    원종희 : 참 안타까운 게, 뮤지션 자체도 그걸 주체하기가 힘든 것 같다. 사실 ‘그 느낌’을 다시 살리려고 했을 때 스스로가 그 느낌을 잃은 거다. 아까 말했다시피 퇴보라면 퇴보라는 게, 음악을 하는 사람이 자기가 완벽해서 여러 가지를 할 수 있는데 그걸 하고 있는 게 아니잖나. 어쩌면 이것밖에 못하기 때문에 이걸 하고 있는 건데. 시간이 지났을 때는 풋내기 시절 했던 그걸 그 이후에는 다시 못 찾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그걸 단지 흉내만 내고 있을 때도 그렇고. 콕스패로우라는 밴드가 이번에 신보를 냈는데, 이게 듣고 싶지가 않더라. 너무 걱정 되서.(웃음) 지금 거의 십 몇 년 만에 신보를 냈는데, 내가 진짜 좋아하는 밴드가 나에게 너무 큰 실망을 안겨줄 것 같아서... 그런데 사서 듣는데 안타까우면서도 “참 그래도 멋있는 놈들이네. 음반을 냈으니까” 그런 생각을 했다. 또 이순간의 기록을 한 거잖나. 분명히 자신들은 그 음반을 냄으로서 60대에 다다르고 있는 자기 멤버들의 청사진을 한번 더 찍는 것이니까 내가 콕스패로우한테 실망했다고는 말을 못하겠더라. 여태까지의 청사진들이 쭉 나열이 되고, 이 중에 이 때가 제일 예쁜 것 같아, 할 수는 있어도. 60댄데 아직도 20대를 흉내 낼 수는 없으니까.


    박준흠 : 그럼 마지막으로 앞으로 나올 3집에 대해서 조금 더 얘길 해주면?

    원종희 : 3집은 [우린 어디로 가는가], [Another Conception], [The Ruckus Army] 그 이후의 이야기가 될 것 같고, 아까도 말씀드린 대로 ‘인삼’을 좀 더 숨겨서 ‘설득력’을 생각하면서 노래를 만들려고 한다. 그게 많은 분들에게 실망을 준다면 어쩔 수가 없지만, 우리는 지금 그런 시점이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 계획이다.


    박준흠 : 장시간 감사합니다.

    원종희 : 아휴, 너무 말이 많아 가지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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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종희, 박준흠 (최규성)




    1) 럭스 결성, 재결성에 관한 이전에 작성된 바이오그라피에 오류가 있다.


    2) <Smell Like Teen Spirit>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장면을 따라했다는 말임.


    3) ‘스팽글’은 90년대 말 인디씬에서 ‘모던록’의 산실 역할을 했고, 챔피언스의 [Champions](2007/석기시대) 수록곡인 <스팽글>에도 나오듯이 코코어, 허클베리핀, 마이앤트매리, 코스모스 등의 주무대였다.


    4) 럭스의 첫 번째 참여 음반이자 스컹크 레이블의 첫 번째 음반인 이 음반은 당시 신촌에 위치해 있던 ‘Rux Studio’에서 가정용 녹음기로 녹음된 음반이라고 한다. 최악의 음질과 로우파이 녹음상태를 자랑하는 이 음반에는 럭스 외에도 결.애.사, 레이지본, 송지욱, Koryo aggro boys의 노래들이 수록되어 있다.


    5) 원종희는 이전에 모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얘기도 했다. “한 1년에서 3년 정도 펑크로 살다보면 세상에 대해 관대해지는 마음이 생기는 것 같다. 선입견도 없어지고. 워낙 극단적인 환경에서 살다보니 그럴 수 밖에 없지만(웃음). 펑크를 좋아하던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자기 자동차 긁어놨다고 ‘어떤 개새끼야!’ 이러는 게 아니라 ‘젊은 애들 객기에 이랬구만’ 웃음으로 넘기고 끝낼 수도 있는 거고. 20~30년 지나면 할아버지들이 닭머리 보면서 ‘야, 우리가 젊었을 때는 최소한 20센티는 되어야 닭머리다’ 이럴 수도 있을 것 같고.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세상이 살만해지지 않을까 싶다.”


    6) 한 명은 카우치 멤버이고, 한 명은 스파이키 브랫 멤버이다. 언론에 거론된 대로 편의상 카우치만 얘기한다.



    원종희, 박준흠 (최규성) [우린 어디로 가는가], ‘세상에 대한 통찰’이 담긴 노래 또는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드는 노래 펑크밴드 럭스(RUX)의 리더 원종희(보컬)는 2000년대 가장 과소평가 받는 뮤지...

  4. [우린 어디로 가는가] (2004/Skunk)

    멤버 : 원종희(v), 박건우(g), 윤형식(b), 조상현(d)



    지금부터 끝까지

    (작사/원종희, 작곡/박건우)


    어차피 변한 건 없어

    그 누구도 상관 않겠지

    그래도 나 여기서 멈출 순 없어

    나의 길을 걸어가겠어


    나 이렇게 이 땅에 선채

    또 다른 오늘과 싸워 이기겠어

    지치지 않아 지금도 이렇게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는데


    여기 이렇게 우리 함께 하는데

    여기 이렇게 같이 걸어 왔는데

    언제든지 돌아가 순 있다 하지만

    난 절대 변치 않겠어




    언제나 이 자리에서

    (작사/원종희, 작곡/박건우)


    끝없는 길 외로이 홀로 서서

    정처 없던 자신을 돌아보네

    아무리 되돌아보아도

    아무리 후회한다 하여도

    다시 돌아간 순 없다는 걸 나 잘 알기에

    오늘도 또 다시 일어선다


    쉴새없이 지나간 시간속에

    놓쳐버린 자신을 돌아보네

    아무리 되돌아보아도

    아무리 후회한다 하여도

    다시 돌아간 순 없다는 걸 나 잘 알기에

    오늘도 또 다시 일어선다


    세월이 지나도 언제나 그대로

    내 자리 여기서 이대로...

    시간이 지나도 언제나 이대로

    내 모습 여기서 이대로...



    우린 어디로 가는가

    (작사/작곡 원종희)


    거리엔 이름 모를 사람들이 술에 취해 주정하며

    원인모를 고통속에 울부짖지만

    다들 나몰라라 앞만 보며 바쁘게들 지나가지

    대체 그들은 지금 행복한걸까


    어쨌건 생각대로 된 건 아직 아무 것도 없어

    그래 난 아직도 아무 것도 해낸 게 없어

    다시 일어나고 또 일어나고 계속 더 버텨가고...

    이런 게 바로 인생인걸까


    수도 없이 많은 세상 사람들 중에

    누가 더 행복하고 보람되게 살아온걸까?

    누가 성공했고 누가 전부 실패한걸까

    그중에 나는 어디에 속해있을까?


    그래 지금까지 놓쳐왔던 수많았던 순간들을

    이제 와서 돌이키며 후회하지만

    인생은 아직 많이 남아 있고 계속 후회하다가는

    병신 같이 주저앉겠지


    우린 어디로 가는가...

    우린 어디로 가는가...

    우린 어디로 가는가...




    세상의 중심

    (작사/작곡 원종희)


    지금껏 내가 이 세상의 중심이었건만

    중요한건 나밖에는 없었더라만

    스물세살 이제 와서 돌아봤더니

    나는 아무데도 쓸모없는 병신이었다네


    그 누구도 나를 위해 서지 않는데

    그 누구도 절대 양보하지 않는데

    모두다 너무 잘났는데 모두다 내가 중심인데

    아무도 서로 관심조차 갖질 않는데


    다시 나는 제자리인 걸

    이렇게 또 그대로인 걸

    언젠가 나도 인생을 한번 돌아보겠지

    그리곤 다시 후회하겠지


    개씨발 난 무얼 위해 살아왔던가

    수많았던 고통은 왜 참아왔던가

    괴로웠던 삶의 끝은 어디였던가

    씨발 나는 여태 무얼 위해 살아왔던가


    그 누구도 나를 위해 서지 않는데

    그 누구도 절대 양보하지 않는데

    모두다 너무 잘났는데 모두다 내가 중심인데

    아무도 서로 관심조차 갖질 않는데


    어쨌든 나는 이대로인 걸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는 데

    어차피 너도 니 인생을 똑같이 돌아보겠지

    그리곤 다시 후회하겠지




    전쟁

    (작사/원종희, 작곡/이대희)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다 해도

    그 누구도 옳지 않은걸

    너 어차피 목적 없이 걸어왔는데

    너 어차피 옳지 않은걸


    아무도 아무도 그 누구도 옳지 않아


    다들 서로 틀렸다고 헐뜯어대는데

    진리는 어디에도 없는 걸

    끝도 없는 싸움 속에 얻어지는 건

    후회밖에 남지 않는 걸


    아무도 아무도 그 누구도 옳지 않아


    사람들이 나의 말을 듣길 바라지

    어차피 나도 할 말은 없는데

    나 아무리 잘났다고 외쳐보지만

    나 어차피 옳지 않은걸


    아무도 아무도 그 누구도 옳지 않아




    우리는 한마음
    (작사/원종희, 작곡/이주현)




    럭스 [Another Conception - EP](2004/Skunk)

    원종희(v), 박건우(g), 윤형식(b), 조상현(d)



    Walk Along

    (작사/작곡 원종희)


    나의 소중함을 알기에, 너의 소중함을 알기에

    나 강요하지 않으리, 또 강요당하지 않으리


    나의 나약함을 알기에, 너의 나약함을 알기에

    나 짓밟지 않으리, 또 짓밟히지 않으리


    나 너를 인정하기에, 너 역시 나를 인정하기에

    두 팔을 뻗고, 단결을 외치자





    Knock You Down
    (작사/원종희, 작곡/박건우)


    [우린 어디로 가는가] (2004/Skunk) 멤버 : 원종희(v), 박건우(g), 윤형식(b), 조상현(d) //") //]]> 지금부터 끝까지 (작사/원종희, 작곡/박건우) 어차피 변한 건 없어 그 누구도 상관...
    ☆☆☆☆☆ | 가사, 럭스, 원종희
  5. 바이오그라피

    1994년. 중학교 2학년 때 원종희(드럼), 이현의(기타), 이승복(베이스)으로 럭스 결성. 한창 성수동 이벤트 스튜디오에서 연습하다가 합주실에서 공연을 하기 시작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이현의랑 이승복이 밴드를 나갔다.


    1997년. 원종희(보컬/베이스), 이현의(기타), 강동일(드럼)로 갖춰지고, 1998년까지 ‘스팽글’에서 활동. 이현의, 강동일 탈퇴 후 원종희(보컬), 이대희(기타), 이주현(베이스), 김석년(드럼)으로 재정비. 1998년 클럽 ‘하드코어’ 등에서 활동. ‘스컹크 레이블’ 창립. 1998년 가을 김석년 탈퇴, 강동일 재가입. 이대희의 군 문제로 삼인조가 됨. 1999년 원종희 군 입대.


    2002년 1월 재결성. 라이브클럽 ‘스컹크헬’ 개장. 이대희, 강동일 활동 중단. 원종희와 이주현 중심으로 세션들과 1년 정도 밴드 지속. 2003년 1월 해체 후 박건우의 가입으로 3월에 활동 재개.


    2004년. 이주현 탈퇴 뒤 원종희(보컬), 박건우(기타), 윤형식(베이스), 조상현(드럼) 라인업으로 정규 1집 [우린 어디로 가는가] 발표. (원종희는 Spiky Brats(드럼), 박건우는 삼청교육대, 윤형식은 Suck Stuff, 조상현은 Dup's Pain에서도 활동 중) 드럭 자리에 스컹크 헬 다시 개장. 그 후 스컹크헬에서의 무수한 공연과 각지에서의 라이브, 일본 펑크 페스티발, 럭스 정규2집, 뮤직비디오 촬영 등의 활동을 했다.


    2005년 6월. 10년만의 첫 단독공연을 갖게 되었다. 2005년 7월에는 MBC 음악캠프에 출연하여 방송사고에 연루되어 MBC 방송국에 의해 고소당하기도 했다. 11월에는 2회 한일 Oi 펑크 페스티발에 한국 밴드로 참여했다.


    2006년 2월. 평소에 조상현과 친하게 지내던 친구 이현희가 새로운 멤버로 밴드에 가담하게 된다. 4월에는 스컹크 전국 투어에 참여, 5월에는 Discocks 내한 공연에 참여했다. 8월에는 The Ruckus Army(성난 군중)이라는 타이틀로 새롭게 무장한 멤버들과의 두번째 단독공연을 갖게 되었다. 10월에는 일본 도쿄 로컬씬에서 권위를 자랑하는 Big Rumble 페스티발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2007년. 원종희(보컬), 이태선(베이스), 이현희(기타), 윤형식(기타), 조상현(드럼) 라인업으로 2집 [The Ruckus Army] 발표.


    2008년. 라이브클럽 ‘스컹크헬’은 12월까지 운영. 현재 ‘인삼’을 숨기고 ‘설득력’을 강화시킨 3집을 준비 중.




    디스코그라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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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 [I Gotta Go] (2000/Skunk)

    럭스 멤버들이 군입대하기 직전에 스컹크에서 처음으로 발매된 싱글음반. 블랙신드롬의 김재만 씨의 녹음실에서 녹음되었다.

    01. Go Away

    02. 45

    03. Sub

    04. I Gotta Go

    05. Save Your Self

    06. 새

    07. 덤벼라 덤벼 이 개 씨발놈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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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집 [우린 어디로 가는가] (2004/Skunk)

    01. Rux Never Die (Inst.)

    02. 지금부터 끝까지

    03. 우리는 한마음

    04. 언제나 이 자리에서

    05. 우린 어디로 가는가

    06. 전진

    07. 길거리

    08. Broken Nose

    09. 덤벼라

    10. Addicted

    11. 또 다른 얼굴

    12. 황금 물고기

    13. 새

    14. Old & New

    15. 세상의 중심

    16. 깨우지마

    17. Go Away

    18. Take E'm All (cover)

    19. 부둣가

    20. 전쟁

    21. Corea belongs to Me (cover)

    22. Broken

    23. 언젠가는

    24. Death or Glory (cover)

    25. Another Story (In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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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 [Another Conception] (2004/2005/Skunk)

    01. 내일의 다짐

    02. Walk Along

    03. Knock You Down

    04. The Skunxs

    05. Hate & Hate

    06. 새로운 시작

    07. Dead End

    08. Another Conception

    09. We'Re Only Gonna 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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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 Live] (2005/Skunk)

    01. The Skunxs

    02. Addicted

    03. Old & New

    04. Knock You Down

    05. From Now, Till The End

    06. We Stand Here Forever

    07. Hong-Dae Belongs To Me

    08. Dead End

    09. Walk Along

    10. We'Re Only Gonna Die

    11. The Streets

    12. Where We Go

    13. Go Away

    14. Broken Nose

    15. Jun-Jin

    16. Take Em' All

    17. Our Minds Are All The Same

    18. Common' Let's Fight

    19. Harbor Side

    20. Birds

    21. Golden Fish

    22. We Will Forever (Ghetto Bombs)



    사용자 삽입 이미지
    2집 [The Ruckus Army] (2007/Skunk)

    “음악에 대한 애정과 같은 마음으로 활동하는 뮤지션에 대한 존중과 온당하지 않은 세상에 맞서 싸우려는 정신은 여전히 변함없다. 이들은 스컹크 레이블을 통해 자신들의 모토를 ‘시스템화’ 시켜가는 중이고, 이미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럭스의 본 앨범은 정규 1집 [우린 어디로 가는가]에 비한다면 뭔가 아쉽다. 결정적으로는 <언제나 이 자리에서><지금부터 끝까지><전쟁>과 같은 ‘킬링 트랙’이 없다는 점이다. 럭스 1집의 가치는 단지 ‘정신’의 문제가 아니었다. 거기에는 한국 펑크록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트랙들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창작과 제작, 레이블운영을 동시에 해야 하는 뮤지션의 한계로 남지 않기를 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앨범이 2007년 필청 앨범이란 점은 분명하다.” 이는 이 음반이 나왔을 때 했던 단평이다. 헌데 현재 원종희는 제작과 레이블운영에서 손을 떼고 자신의 밴드에만 신경을 쓰는 구도로 정리를 한 입장이니 한편으론 미안한 마음이 든다.

    01. The Ruckus Army

    02. Our Life, Our Stage

    03. Footsteps Of Our Generation

    04. 19 & 22

    05. 하늘의 끝

    06. 21, 56, 45

    07. 세상의 중심에서

    08. And Again

    09. Blackout

    10. 진심 (眞心)

    11. 죽은동안

    12. Fight For Your Identity

    13. 결말의 대답

    14. Shout It Out

    15. Into Ashes



    SINGLE [Last 10 Seconds]

    럭스의 2008년 3월 싱글 [Last 10 Seconds]에는 <마지막10초>, <We the Victims> 두곡이 수록되어 있다. 전쟁으로 초토화된 한반도. 자본주의 50년. 자아를 찾을 시간도, 생을 고민할 시간도 빼앗겨버린 채. 민주주의, 평화주의, 캐피탈리즘과 물질만능주의, 편의점, 대형마트, 에미넴과 섹스엔씨티,.. 물밀려오듯 퍼부어대는, 끝나지 않은 세계전쟁의 문화폭격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는 우리, 문화사생아. 그 희생자들을 이야기 하는, 럭스의 짧은 만큼 굵은 싱글음반. (스컹크)

    01. 마지막10초

    02. We the Victims



    사용자 삽입 이미지
    V.A. [우리는 한마음(‘98 펑크대잔치)] (1998/Skunk)

    럭스의 첫번째 참여음반이자 스컹크 레이블의 첫 번째 음반인 이 음반은 당시 신촌에 위치해 있던 ‘Rux Studio’에서 가정용 녹음기로 녹음된 음반이다. 최악의 음질과 로우파이 녹음상태를 자랑하는 이 음반에는 럭스외에도 결.애.사, Lazybone, 송지욱, Koryo aggro boys의 노래들이 수록되어 있다. (스컹크)

    01. 부둣가

    02. 깨우지마

    03. 자물쇠

    04. 또 다른 얼굴



    V.A. 1998 [Asian H/C]

    삼청교육대의 이보람 씨의 권유로 참여하게 된 이 아시안 하드코어/펑크 컴필레이션 음반은 일본의 All Systems Fail record에서 Tim Yohannan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제작된 사회적인 의미를 둔 컴필레이션 음반이다. 한국에서는 Samchung, Nobrain, Weeper, Rux가 참여하였으며 럭스는 음반의 의미와는 무관하게 그냥 참여했다. (스컹크)

    13. 부둣가

    28. 깨우지마



    V.A. [아싸 오방 클럽 하드코어 2집] (1999/인디)

    90년대 말, 럭스가 활동하던 클럽 중 가장 활동을 왕성히 했던 곳은 신촌 이화여대 근처의 클럽 HardCore였다. 이 음반에는 당시 클럽의 운영자이셨던 최종철 씨의 권유에 의해 <황금물고기>, <대가리 없는 몸뚱이>, <길거리>로 참여하게 되었으며 음반의 속지에는 곡 제목이 잘못 인쇄 되었다. (스컹크)

    06. 대가리 없는 몸뚱이

    10. 황금물고기

    14. 길거리



    사용자 삽입 이미지
    V.A. [3000 Punk] (1999/Skunk)

    스컹크 레이블의 두번째 컴필레이션인 이 음반은 ‘Skunk Studio’(예전의 ‘Rux Studio’가 개명된 장소)에서 이보람 씨의 DAT 녹음기로 녹음된 음반이다. (스컹크)

    07. 45

    25. Sub



    V. A. [인디피아 Vol.2] (1999/인디)

    04. 물고기



    사용자 삽입 이미지
    V.A. [We Are The Punx In Kore] (2003/Skunk)

    기존에 펑크대잔치에 참여했던 밴드들과 20여개의 새 밴드가 참여하였으며 배다른형제 스튜디오 이동훈 씨의 도움에 의해 완성되었다. 32장의 부클릿과 80분 가량이 러닝타임을 자랑한다.

    07. 우리는 한마음




    사용자 삽입 이미지
    V.A. [2006 Skunk Compilation - Strike! Strike! Strike!] (2006/Skunk)

    더 이상 한 개의 음반으로 묶일 수 없을 정도로 커진 한국의 펑크씬에서 더욱 많은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스스로, 내지르라!!” 라는 강한 메세지가 담겨 있는 펑크대잔치 4집 음반에 럭스는 <AND AGAIN>, <WHEN I DIE>, <오월의 노래> 3곡으로 참여 하였다. (스컹크)

    06. And Again

    12. When I Die

    17. 오월의 노래



    바이오그라피1994년. 중학교 2학년 때 원종희(드럼), 이현의(기타), 이승복(베이스)으로 럭스 결성. 한창 성수동 이벤트 스튜디오에서 연습하다가 합주실에서 공연을 하기 시작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이...
  6. * 고뉴스
    용감한 형제, “형제 아닌 솔로 작곡가”
    백민재 기자 / 2008-11-20 08:45


    요즘 국내 가요 시장에서 가장 잘나가는 작곡가는 누구일까. 바로 용감한 형제다. 트랜디한 사운드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그는, 최근 댄스 음반 제작자들의 섭외 1순위다. 빅뱅의 ‘마지막인사’를 비롯해, 손담비의 ‘미쳤어’, 브라운아이드걸스의 ‘어쩌다’, 이민우(M)의 ‘남자를 믿지마’ 등은 모두 그의 작품이다.

    인터뷰를 위해 용감한 형제의 작업실을 찾았다. 방금 세수를 마친 그는 전날에도 곡을 만들다가 밤을 꼬박 새웠다고 했다.

    올해 3월 YG엔터테인먼트에서 독립한 용감한형제는, 브레이브 엔터테인먼트를 만들고 곡 작업에 여념이 없다. 후배 프로듀서(그는 작곡가보다는 프로듀서로 불리기 원했다) ‘또라이박’, ‘코끼리왕국’, ‘별들의전쟁’, ‘올빼미’ 등과 함께 본격적인 음악 프로듀서 회사를 꾸렸다.

    용감한 형제는 원래 강흑철-강동철 형제로 구성된 힙합듀오였다. 7년전, 두 사람은 용감한 형제로 데뷔하려 YG를 찾았다. 그러나 이후 가수 데뷔가 늦어지면서, 동생 강동철이 혼자 용감한형제라는 프로듀서로 전향하게 됐다. 렉시의 ‘눈물 씻고 화장하고’가 그가 만든 첫 작품. 이 때문에 사실상 용감한형제는 강동철 혼자라고 할 수 있다.

    동생 강동철은 “따로 떨어졌다고 해도, 그 ‘용감한 형제’라는 이름을 너무 가져가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용감한형제라는 이름을 쓰고, 형은 블랙소울이라는 이름을 쓴다”고 말했다.

    - 언제부터 음악을 시작하게 됐나?

    굉장히 늦다. 20살에 음악을 처음 시작했다. 고등학교는 1년도 못 다니고 자퇴하고, 클럽에서 일했다. 클럽에서 일했어도 음악 관련된 일은 아니었다.

    - 그럼 예전에는 작곡가가 아니라 무엇이 되고 싶었나?

    이거, 솔직히 이야기해도 되나? 건달, 조폭이 되고 싶었다.(웃음)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철없던 14~15살 때는 그랬다. 싸움도 많이 했고, 자랑은 아니지만 싸움을 진짜 잘했다. 그래서 조양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멋있게. 지금 생각하면 웃기다. 그때 나를 알던 사람들은 내가 음악 한다고 하면 안믿는다.

    - 갑자기 음악으로 빠진 특별한 계기가 있을 것 같다

    클럽에서 DJ하던 동생이 음악을 듣고 있어서, 나도 한번 들어봤다. 그 음악을 듣고 진짜로 뻑이 갔다. 사이프레스힐(미국 힙합 그룹)의 노래였는데, 이틀 동안 그 음악만 들었다. 그리고 동생에게 ‘이런 음악을 만들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물었고, 낙원상가에 가서 악기를 샀다. 그때가 20살 때다. 그 전에는 음악을 배워본 적이 전혀 없었다.

    - 7년 동안 YG에 있었다. YG를 찾아간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오버그라운드에서 가장 트랜디한 음악을 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데모 음반을 YG 한 곳에만 보냈다. 음반을 보냈더니 하루 만에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아마 재미있는 놈들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웃음)

    - 그때는 언더그라운드 마인드가 있었을 것 같은데

    많았다. 랩도 했는데, 사회비판적인 가사 엄청나게 썼다. 그런데 나는 언더그라운드와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특히 우리나라 언더힙합은 랩의 스킬이나 가사를 많이 따지는데, 나는 비트나 사운드를 굉장히 중요시 했다.

    - 언더그라운드는 사운드가 안좋다라는 말로 들린다. ‘자본이 없으니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내 생각은 다르다. 렉시의 ‘눈물 씻고 화장하고’를 만드는데 얼마 들었는지 아나? 15만원 들었다. Roland jv1010(사운드 모듈)로 만들었는데, 중고가 10만원이면 산다. 그거 하나로 다 만들었다.

    - 돈이 없어도 좋은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인가

    충분히 해결된다. 비트와 사운드는 악기의 가격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내 사운드가 좋다며 굉장히 비싼 악기를 여러 개 쓰는 줄 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에디팅에 신경 쓰느냐, 소스에 대해 얼마나 노력을 들이는가에 있다. 팀버랜드나 닥차일드도 마찬가지다.

    - 그렇다면 지금 용감한형제가 사용하는 악기는 뭔가

    야마하에서 나온 모티프 61건반이다. 난 이거 한 대 쓴다.(실제 그의 작업실에 있는 악기는 믹서와 스피커를 제외하면 달랑 키보드 한대였다) 이걸로 ‘마지막 인사’, ‘미쳤어’, ‘어쩌다’ 다 만들었다. 신품가격 250만원 정도? 중고는 200 이하다. 지금도 8곡 정도를 만들고 있는데, 다 이걸로 작업한다. 새 악기 나올 때마다 바꿔서 작업하는 작곡가들도 있는데, 난 이거면 충분하다.

    - 용감한 형제가 생각하는 좋은 곡이란 무엇인가

    간결한 소스를 좋아한다. 사용된 악기가 적은데도 음악이 꽉 찬 곡이 있다. 좋은 곡은 드럼, 베이스, 기타 하나씩만 들어가도 풍성한 사운드가 들린다. 그런데 좋지 않은 곡은 자꾸 이 악기 저 악기 집어넣는다. 사운드에 자신이 없으니까 악기를 자꾸 늘리는 것이다. 우리나라 대중음악은 멜로디가 굉장히 좋은데 반해, 편곡이 받쳐주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 최근 들어본 노래 중 인상 깊었던 곡은 무엇인가

    태양의 ‘나만 바라봐’, 이민우의 ‘멋진 인생’. 매우 새로웠다.

    - 늦게 음악을 시작했다. 만약 군대를 다녀온 25살의 남자가 갑자기 음악을 하겠다고 하면 히트 작곡가가 될 수 있나.

    노력하면 할 수 있다. 다만 한 5년 동안은 다른 사람 10년 정도 노력한 만큼을 해야할 것이다. 나는 YG에 있을 때 2년 동안 집에 가지 않고 작업실에서 살았다. 뭐 사람이니까 남들 노는 만큼은 놀지 않았겠나 생각할 수 있는데, 진짜 밖에 나가지를 않았다. 주말에나 한번씩 양현석 형이랑 클럽에서 술 한잔 하고. 다시 작업하고. 그땐 그냥 죽었다고 생각했다.

    - 솔직히 돈을 많이 벌었을 것 같다

    지난해 ‘마지막 인사’로 많이 벌었고, 올해는 ‘미쳤어’와 ‘어쩌다’로 많이 벌었다. 내 나이에 비해서는 많이 번다.

    - 온라인차트 10위권 안에 한 곡이 올라가면, 작곡가가 받는 수입은 어느 정도인가.

    기간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 1년에 1억5천에서 2억 정도. 한 달에 1천500만원 정도다.

    - 음반 제작자들이 까다로운 요구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음악이 한번 대박을 치면, 무조건 그 스타일로 가달라고 하는 제작자가 있다. 그러나 대중들은 한번 우려먹은 것은 잘 안듣는다. 나는 작곡가로서 그러한 부분을 이야기 한다. 물론 잘 안 먹히지. 제작자의 요구를 최대한 맞춰줘야 하는 입장이지만, 솔직히 내가 만들었다고 하기 쪽팔릴 때도 있다. 그렇다고 비슷하게 만들 수는 없고. 내 입장에서는 머리 터지는 거다. 이제는 그렇게 만들지 않을 작정이다.

    - 최근 온라인 음악시장의 가장 큰 문제점은 뭐라고 보는가

    대형 음악 사이트에는 미리듣기 기능이 있다. 그게 딱 앞부분 40초다. 이건 분명 문제가 있다. 1분 30초는 돼야 한다. 40초 안에 모든 것이 결정 나기 때문에, 전주가 조금 나오다가 바로 싸비(곡의 하이라이트)가 터지던지, 후렴구가 앞에 가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들으니까. 이렇게 되면 자꾸 비슷한 음악, 중독성 있는 음악들 위주로 갈 수 밖에 없다.

    - 지난해에 비해 올해 전체 음반 판매량이 늘었다. 음반시장이 조금씩 살아나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사람들이 듣는 귀가 많이 좋아졌다고 본다. 솔직히 좋은 사운드는 MP3로는 못 듣는다. CD로 들어야 한다. 이제 조금씩 대중들이 좋은 사운드를 가려듣기 시작했다고 본다. 이럴 때일수록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이 더 긴장해야 한다.

    - 본인의 음반을 준비 중이라고 들었다

    내년 상반기에 용감한형제라는 이름으로 프로듀서 음반을 낼 생각이다. 랩을 내가 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할 수도 있다. 미국 남부 힙합 사운드를 들려줄 것이다. 진짜 프로듀서 음반이라는 것이 뭔지 보여주고 싶다.

    - 발라드 같은 장르는 만들지 않을 생각인가

    마음먹으면 만들 수는 있겠지. 문제는 퀄리티다. 프로듀서는 좋은 음악을 사람들에게 들려줄 의무도 있다고 생각한다. 만들어도 잘 만들지는 못할 것 같으니, 당분간 난 내 스타일의 곡만 만들 생각이다. 물론 ‘브레이브 사운드~’도 계속 간다.

    - 작곡을 하려는 후배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일단 많이 들어야 한다. 나는 깨어있을 때는 늘 음악을 들었다. 화장실에서 들으려고 오디오를 설치했다가, 습기 때문에 두 대를 망가뜨렸다. 나는 트로트든 뭐든 다 듣는다. 남들이 좋지 않은 음악이라고 해도 좋은 부분만 가려서 듣는다.


    * 마이데일리
    작곡가 '용감한 형제', '2008 가요계를 이끈 그가 궁금하다'[창간인터뷰]
    2008-11-29 13:53:22

    [마이데일리 = 박영웅 기자] 2008년 가요계는 유난히 풍성했다. 톱스타들이 대거 복귀한 데 이어 아이돌그룹의 열풍은 올해도 계속 됐다. 국내 가요시장에서 현재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작곡가는 누구일까.

    트렌디한 사운드로 대중음악계를 이끌고 있는 '용감한 형제'가 단연 눈에 띈다. '용감한 형제'는 손담비의 '미쳤어', 브라운아이드걸스의 '어쩌다', 이민우(M)의 '남자를 믿지마', 유키스의 '어리지 않아' 등을 히트시키며 가장 '핫'한 음악으로 올해 가요계를 자신의 음악으로 가득 채웠다. 최근 음반 제작자들의 섭외 1순위로 떠오르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용감한 형제'를 만났다.

    '용감한 형제'란 독특한 필명을 보고 누구나 궁금증을 품기 마련이다. 실제로 형제일까. 강흑철-강동철 친형제로 구성된 '용감한 형제'는 7년전, 갱스터 랩듀오로 데뷔하고자 YG에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동생은 작곡가로 전향하고 형은 군 입대를 결정하면서 자연스레 동생 강동철 혼자서 '용감한 형제'로 활동하게 됐다.

    "원래 처음에는 재치있는 가사로 사회를 비판하는 랩을 선보이고 싶었어요. 하지만 양현석 사장님은 제 음악을 듣고 프로듀서로의 전향을 권유하셨죠. 가수로 데뷔하고 싶었지만 제대로 된 트렌디 음악을 해보고 싶은 제 욕심이 지금의 길로 이끌었어요. 이 길이 더 빠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의 음악인생은 20살 때 우연히 접한 미국 힙합 그룹 사이프레스힐의 노래로 시작됐다. 강한 비트와 날카로운 랩을 듣고 전율을 느꼈다는 그는 이후 흑인음악에 푹 빠져살았다. 지금은 감각적인 멜로디와 중독성있는 세련된 비트로 가요계의 트렌드를 이끌고 있는 그이지만 놀랍게도 따로 음악공부를 해본 적은 없다고 한다.

    "가슴을 자극하는 흑인음악의 울림은 제게 희열을 느끼게 해요. 음악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이론을 차근차근 공부한 것은 아니지만 저는 제 감각을 믿어요. 비싼 악기, 좋은 악기도 그리 중요한 건 아닌 것 같아요. 전 200만원 정도의 야마하에서 나온 모티프 61건반을 사용하죠. 이 건반 한대로 '마지막 인사', '미쳤어', '어쩌다'까지 다 만들었어요"

    용감한 형제의 첫 작품은 렉시의 '눈물씻고 화장하고'이다. 비록 크게 히트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힙합 리듬과 일렉트로닉 장르의 결합은 국내 가요계에 신선한 충격을 줬고, 이는 곧 가요계 전체에 급속도로 퍼져나가 하나의 트렌드로 굳어졌다. 렉시의 '하늘 위로', 빅뱅의 '마지막 인사', '바보' 등의 히트곡들 역시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하루에도 수많은 신곡이 터져나오는 가요계에서 그의 곡이 돋보이는, 그만이 갖는 경쟁력은 무엇일까.


    "우선 제가 하고자 하는 음악과 시대가 잘 맞물렸다고 생각해요. 운이 좋았던 거죠. 그리고 국내 가요계는 성급하게 서두르는 경향이 있어요. 외국에서 어느 장르가 조금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 많은 작곡가들이 맹목적으로 따라하죠. 충분히 연구하고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노력이 필요해요"

    '용감한 형제'는 대중음악계에서 못말리는 노력파로 통한다. YG에서 활동할 때 2년 동안 집에 가지 않고 작업실에서 곡 작업에만 매달렸다는 그는 "정말 그때는 죽을 각오로 임했다. 믿기 힘들겠지만 진짜 밖에 나가지도 않았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이후 그의 꾸준한 노력과 천부적인 감각은 빅뱅, 손담비, 브라운아이드걸스, 이민우 등 많은 가수들을 히트가수로 만들었고, 이는 댄스 음악 제작자들이 1순위로 '용감한 형제'를 찾게 되는 이유가 됐다. '용감한 형제'와 작업한 많은 가수들 중 빅뱅은 그를 지금의 자리로 이끈 일등공신이다. 오랜 기간동안 멤버들을 지켜봤다는 그는 "빅뱅은 정말 트렌디한 그룹이다. 나이는 어리지만 실력도 노력도 최고인 만큼 함께 작업하기가 수월한 편"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손담비에 대해서는 "엄정화의 '초대'를 연상시키는 섹시한 무대를 만들고 싶었고, '미쳤어'를 정말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 낼 수 있는 여가수를 찾고 있었다. 손담비에게서 깎이지 않은 원석의 느낌을 받았다. 지금은 잘 다듬어져 보석이 되가는 과정이라 생각한다"며 그녀의 무한한 가능성을 칭찬하기도 했다.

    이어 '용감한 형제'는 지금까지 접한 가수들 중 최고는 누구냐는 질문에 주저하지 않고 M이민우를 꼽았다. 그는 "가장 프로페셔널한 가수라 생각한다. 무대 위 퍼포먼스는 물론 음악 작업할 때도 사운드를 하나하나 섬세하게 체크하는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 '남자를 믿지마'를 함께 하면서 이민우는 저스틴 팀버레이크, 나는 마치 프로듀서 팀버랜드가 된 기분이였다"고 말했다.

    또 그는 비와 함께 작업해 보고 싶다는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비가 갖고 있는 대중성에 나만의 트렌디한 사운드를 입히고 싶다"는 그는 "비만이 할수있는, 비여야만 하는 음악으로 대중을 놀라게 하고 싶다"고 설명했다.

    올해 3월 YG엔터테인먼트에서 독립한 '용감한형제' 강동철은 현재 '브레이브 엔터테인먼트'라는 프로듀서 회사를 만들고 곡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원래 작곡가란 말보다는 프로듀서로 불리고 싶다는 그는 후배 프로듀서들인 '또라이박', '코끼리왕국', '별들의 전쟁', '올빼미' 등과 함께 본격적인 음악 프로듀서 집단을 꿈꾸고 있다.

    그가 독립한 후 작업한 '미쳤어', '남자를 믿지마' '어쩌다' 등의 곡은 모두 '브레이브 사운드~'라는 효과음으로 시작한다. "용감한 형제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브랜드를 뜻한다"고 설명한 그는 "곡의 도입부 효과음만 듣고도 내 음악이란 걸 보여주고 싶었다. 나만의 브랜드이자 프로듀서로서의 내 자존심이다"며 강한 자부심을 보였다. 실제로 '저메인 듀프리', '저스트 브레이즈' 등 미국 유명 프로듀서들 역시 이같은 효과음으로 자신들의 음악적 자부심을 표현하기도 한다.

    "우선 국내 가요계에 프로듀서 문화를 뿌리내리고 싶어요. 그리고 미국 유명 가수들의 곡 앞에 제 효과음이 나오게 해야 겠죠?"(웃음)

    박영웅 기자 hero@mydaily.co.kr
    [사진 = 프로듀서 '용감한 형제']


    * 고뉴스 용감한 형제, “형제 아닌 솔로 작곡가” 백민재 기자 / 2008-11-20 08:45 요즘 국내 가요 시장에서 가장 잘나가는 작곡가는 누구일까. 바로 용감한 형제다. 트랜디한 사운드로 최고의 주가를 올...




  7. 임주연의 별명은 ‘쥐’다. 쥐처럼 생겨서란다. 그렇다고 꼬리와 입 주위에 털이 없는 징그러운 시궁쥐는 아니고, 들쥐처럼 조그맣고 귀엽다. 그녀가 공연하는 모습을 보면 딱 자신이 치는 키보드만한 체구다. 그러나 그녀가 외모와는 다르게 단단하고 깊은 목소리로 노래를 시작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약간 놀라게 된다.

    괜찮은 신인들이 선물세트로 등장한 2007년, 그중에서도 3월에 나온 임주연의 데뷔 앨범은 그 강력한 포스로 나를 ‘뻑’이 가게 만들었다. 그녀는 한마디로 재능덩어리다. 그녀의 1집 [Imagination]은 20대 초반의 그것 자체다. <머릿속을>, <가려진 마음>, <무너지는>, <낙타송> 등 하나하나의 곡에서 느껴지는 세공되지 않은 순수한 잠재력은 풋풋하고, 약간은 어설프고, 매력적이다. 마치 잘 구워진 이탈리아식 피자를 맛보는 느낌이다. 임주연은 기름기 하나 없는 담백한 ‘도우(반죽)’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그녀의 피자는 아직 미완성이다. 그 반죽 위에 앞으로 어떤 토핑이 얹어지느냐를 지켜보는 것은 매우 설레고 즐거운 일이 될 것이다.

    내가 임주연을 만난 건 지난 6월이다. 그녀와 나는 인터뷰를 위해 만났다. 그녀의 말투는 느릿느릿하고 나사 하나 빠진 듯 어리버리했지만 솔직했다. 그녀는 죽었다 깨어나도 잔머리를 굴릴 수 없는 타입이다. 인터뷰 도중 우리는 서로의 음악 취향이 절묘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그날 이후 임주연과 나는 틈만 나면 음악얘기로 새벽을 작살내는 음악친구가 되었다.(나에게 픽시스(Pixies)를 좋아하냐고 먼저 물어본 사람은 그녀가 처음이다)

    임주연의 경력에 대해서는 구구절절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이곳 가슴 네트워크에도 이미 올라온 적이 있고, 아니면 임주연 홈페이지를 들여다보는 쪽이 더 빠를 것이다. 이 인터뷰는 월간 PAPER 7월호에 실렸던 인터뷰 기사의 1차 소스를 바탕으로, 6개월 동안 그녀와 내가 주고받았던 메신저 대화 내용을 가감해서 작성한 것이다.(직접 만나서 추가 인터뷰를 했으면 좋았겠지만, 임주연은 12월 한 달 동안에만 5개 팀의 건반 세션을 뛰느라 초죽음이 된 상태다…)



    세션을 몇 번 쯤 했는지 기억은 나는가?
    당연히 기억 안 난다. 년수로 5년 했다.(웃음)

    언제 처음 프로로 세션을 했는지?
    처음 한 건 2002년 봄여름가을겨울 공연이었다. 원래 강호정 교수님이 하셨는데 도중에 손가락을 다치시는 바람에, 그래서 나를 대신 추천하신 거다.

    나중에 ‘도저히 작업한 수를 알 수 없는 세션’의 반열에 들어가는 거 아닌가?
    에이, 그 정도는 아니다.(웃음)

    그렇게 남의 음악에 많이 참여하면 장단점이 있을 텐데…
    세션이라는 게 내 음악을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한테 맞춰주는 거니까. 나중에 내 음악을 할 때도 자꾸 쓸데없이 생각나서 안 좋다. 좋은 건 오랫동안 활동해 오신 분들 맨날 옆에서 보니까 그만큼 배울 게 많다는 점이다.

    혹시 부모님이 음악을 좋아하셨나?
    아빠가 음악을 좋아하셨는데, 원래 폼 잡는 걸 좋아하셔서 뭘 사도 꼭 있어 보이는 것만 사셨다. 음악도 있어 보이는 음악만.(웃음) 옛날부터 한국음악은 거의 못 들었고 팝만 들었다. 핑크 플로이드나 산타나, 딥퍼플, 스팅 같은 거. 다 아빠 때문에 이렇게 된 거다. 그리고 스매싱 펌킨스를 무척 좋아한다. 피아노 안 들어간 락 음악을 많이 들었다. 지금도 내 음악 할 때 이상하게 메탈리카나 마릴린 맨슨이 자꾸 떠오른다.(웃음)

    본인은 건반 치면서 피아노 안 들어간 음악만 들었다고?
    원래 피아노 나오는 노래를 진득하게 못 듣는다. 막 짜증난다. 아, 답답해.(웃음) 원래 기타 치고 싶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클래식 피아노를 쳐서 그냥 피아노 치고 있는 거다.

    어렸을 때부터 그런 음악 듣고 다니면 학교에서 왕따 취급 받았겠다.
    완전 그랬다. 고등학교 때 내 별명이 ‘또라이’였다. 맨날 이어폰 꽂고 가방에 워크맨 넣고 다니면, 애들이 뒤에서 쟤 가방에 이상한 거 들었다고, 열어보자고 수근거렸다. 수업 땡땡이 치고 강당에서 피아노 치다가 교장선생님한테 걸려서 싸대기 맞기도 하고. 고등학교 때 뭔가 의미심장하고 심오하기만 한 것들을 추종할 때, 애들이 ‘야야~ 포티쉐드의 베쓰 기븐스가 비관주의자래~’ 이러면 ‘우와아아아~’ 막 이러면서 광분했던 기억이 난다.(웃음)

    그럼 라디오헤드 같은 밴드도 좋아했겠다.
    물론이다. 'CREEP'은 가끔 공연 때 부른다. 콜드플레이의 'In my place', U2의 'Beautiful day' 같은 거 맨날 부르니까, 하루는 마이앤트메리의 정순용 오빠가 붙잡아놓고 진지하게 얘기했다. 언젠가 다시 생각하게 될 날이 온다고.(웃음) ‘너 노라 존스 같은 거 불러야 돼! 사라 맥라클란 같은 거 불러야 돼!’ 남자는 여자 꼬시는 노래를 불러야 하고, 여자는 남자 꼬시는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웃음) 나이 좀더 들어보라고 하더라.(웃음) 전에 한철 오빠 공연 때 게스트 하면서 스팅의 'SHAPE of my heart'를 무반주로 부른 적이 있다. 내 딴에는 ‘이거 정말 획기적이다! 크아~’ 이러면서 불렀는데, 나중에 남자선배들의 비난이 쏟아졌다.(웃음)

    피아노를 처음 배운 건 언제?
    7살 때부터 피아노 학원 다니면서 배우다가, 좀 지루한데다 돈도 너무 많이 들 것 같아서 고1 때 잠깐 그만뒀다. 그러다 나중에 집 바로 앞에 실용음악 학원이 생겨서 그걸로 바꿨다.

    어쩐지 음악이 옛날부터 몸에 배어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난 당연한 줄 알았다.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사는 줄 알았으니까. 유치원에서 피아노 본 순간부터 ‘난 피아니스트 될 거야!’라는 생각을 했다. 근데 노래하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 건 몇 년 안 됐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이 생활이라서 공연할 때도 별로 긴장 안 할 것 같다.
    노래할 때는 전혀 긴장을 안 하는데 말할 때 진짜 긴장한다. 노래 끝나면 뭐라고 말해야 되나 싶어서 부들부들 떤다. 다른 사람 공연 보면 관객이랑 자연스럽게 얘기하는데, 나 혼자서 횡설수설 떠들지 않나? 뭐라고 했는지 나중에 기억도 안 난다.(웃음)





    음악 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이 별로 반대 안 하셨겠네?
    아빠가 엄격하시다. 골프채나 야구배트 같은 걸로 맞으면서 컸다. 무조건 맞는 건 아니고 두세 시간씩 설교하고 나서 ‘몇 대 맞을래?’ ‘세 대요~ 엉엉~’ 이런 식이었다.(웃음) 근데 아빠가 내가 음악 하는 거 진짜 싫어하셨다. 물론 음악을 좋아하시지만, 음악 하면 딴따라다, 공부하기 싫어서 장난하는 거다, 이런 예전 세대의 사고방식 있지 않은가? 내가 장녀인데다, 미래가 확실히 보이는 직업도 아니니까. 내가 용돈 모아서 처음 산 CD가 전람회였는데, 집에 들어가기도 전에 아빠가 현관에서 밟아서 부숴버리신 적도 있다. 그리고 내가 예술고등학교 못 갈 거면 직업학교에도 실용음악과 있으니까 거기 보내달라고 했다. 그랬다가 머리털 다 뽑힐 뻔했다.(웃음) 아빠 외에도 집안 모두가 반대했는데 엄마 혼자 도와주셨다. 학원비도 몰래 주시고… 그래서 계속 할 수 있었다.

    힘들었겠다.
    무지 힘들었다. 늘 혼나는 게 생활이었다. 그때 아빠랑 사이가 너무 안 좋아서 하루에 ‘다녀오세요’랑 ‘다녀오셨어요?’ 이렇게 딱 두 마디만 하고 살았다.

    지금도 반대하시나?
    경쟁률 높은 학교에 한 번에 붙고 나니까 ‘쟤가 뭘 하긴 하는구나‘라고 처음으로 생각하신 거다. 서울예대 시험 치러 가는 날 아침에도 아빠가 ’네가 그 학교 붙으면 내가 열 손가락에 장을 다 지지고 성을 갈겠다‘ 이러고 나가셨다.(웃음) 근데 수험생 딸이 어쨌든 잘 되고 나니까 일단 기분 좋으시니까. 그때부터 180도 바뀌셨다. 지금은 좋아하신다.

    대학(서울예대 실용음악과) 때 교수님들 얘기 좀 들려달라.
    정원영 교수님한테 영향을 많이 받았다. 1학년 때 전공수업을 들었는데 곡 써오는 과제를 내주셨다. 그때부터 곡을 쓰기 시작해서 만든 노래들이 다 앨범에 들어간 거다. 정원영 교수님은 나한테는 적이 오빠랑 비슷한 정신적 지주다. 굉장히 자유롭고 선하신 분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걸 좋아하신다. 음악도 그렇고 생활도 그렇고. 한충완 교수님은 진짜 선생님 같다. 과묵하신데 재치도 있으신 분이다.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는 너무너무 소중한 가르침을 많이 주셨다.

    인복이 많은 것 같다.
    그렇다. 학교 가서 감사하게 생각하는 건 거의 그런 쪽이다. 교수님이든 학생들이든, 가뭄에 콩나듯 만난 선물 같은 사람들. 아, 수업 시간에 정원영 교수님한테 들은 얘긴데, 버클리 유학 시절에 한충완 교수님과 정원영 교수님이 같이 김광민 교수님 집에 자주 놀러갔단다. 근데 담배를 피우면서 담뱃재를 꼭 피아노와 벽 사이의 빈 공간에 털었다고 한다. 나중에 이사할 때 들켜서 막 맞았다고…(웃음) 학교 다닐 때 정원영 교수님, 한상원 교수님이 나 보면 이년 저년 불렀다. 정 교수님은 미친년이라고 하고.(웃음) 그러다가 집에 갈 때면 문자메시지로 하트 하나 날려주신다. 한 번 아프신 뒤에 많이 차분해지셨지만, 그렇게 장난을 좋아하신다.

    이적 씨는 어떤 사람인가?
    1학년 때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나가서 운 좋게 입상했는데, 그때 처음 만났다. 적이 오빠는 정원영 교수님 따라서 구경 왔었는데 내 곡이 마음에 들었나 보더라. 그래서 ‘급‘ 친해졌다. 이번 앨범에서 보컬 디렉팅을 해줬는데, 그것뿐 아니라 내가 첫 앨범 작업이라 아무 것도 모르니까 어떤 경험자로서 와준 거라 참 마음이 놓였다. 적이 오빠를 보면 ‘아, 저기 저렇게 오빠가 있구나’ 하는 생각에 위안이 많이 된다. 정신적 지주 같은 거다. 오빠는 방송이랑 완전히 틀리다. 내가 보기엔 방송에 나올 땐 늘 뭔가 갖추고 있다. 근데 사석에서는 착하고 재미있는 오빠다. 노래 들어보면 내 안에는 수만 가지의 내가 있다, 내가 겉으로는 이렇게 보이지만 속은 아니다, 맨날 이런 식이지 않나? 물론 그런 모습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친절하고 편한 사람이다. 그리고 적이 오빠가 술자리에서 ‘야야~ 우리는 이렇게 해야 되는 거야~ 그렇지 않니?’ 이러면서 후배들 몰고 다니는 타입이다.(웃음) 그래서 후배들이 좋아한다. 그리고 거의 5년을 알고 지냈는데 5년 동안 똑같은 옷만 입었다. ‘어, 새로 샀네?’ 이런 거 전혀 없다.(웃음)

    5월 앨범 발매기념 공연 때 모델 장윤주 씨가 게스트로 나와서 노래하던데?
    윤주 언니는 서울예대 1학년 때 정원영 교수님 수업을 같이 청강하면서 만났다. 언니가 사교성이 워낙 좋아서 애들이랑 다 친해졌다. 맨날 ‘야야, 누나가 고기랑 술 사줄께!’ 이러면서 애들 끌고 다니고.(웃음) 근데 윤주 언니가 음악을 좋아해서 집에 가보면 CD가 진짜 많다. 게다가 듣는 귀도 좋아서 명반들만 많다. 그런 쪽으로 저랑 코드가 맞는 게 있었다. 근데 어느날 피아노 배우고 싶다고 전화를 하더라. 그래서 1년 반 정도 레슨하면서 친해졌다. 근데 윤주 언니는 모델이기 전에 사람 자체가 아티스트다. 연습을 전혀 안 하고 노력하는 스타일이 아닌데, 모든 걸 감각적으로 타고났다. 가르쳐 주면 오히려 못 하고 그냥 들려줘야 잘 한다. 한번은 곡을 써서 나한테 들려줬는데, 너무 좋아서 디지털 싱글로 만들어 보라고 했다. 나랑 그런 관계로 지내고 있다. 그리고 윤주 언니는 진짜 웃긴다. 웃다가 의자에서 떨어진 적도 있다.(웃음)

    앨범 도와준 사람들이 다 학교 선후배들이라 편한 분위기였을 것 같은데.
    맞다. 나는 솔직히 아무 생각도 안 했다. 주위에서 다 알아서 해줬다. 너무 다행이다.

    프로듀서를 맡은 양시온(밴드 ‘브레멘’의 베이시스트) 씨는 그런 방면에 능력이 있나 보다. 공연 때 디렉팅도 해줬다면서?
    시온이는 자신의 독자적인 생각을 하기 전에 상황을 전체적으로 보고 준비를 할 줄 안다. 나는 곡 쓰고 노래한 것 밖에 없다. 시온이가 3일밤 꼬박 샐 때 나는 퍼 자고 있고.(웃음) 맞기도 많이 맞았다.

    맞다니? 왜?
    시온이가 막 때린다. 열 받으니까 때리지.(웃음) 자기 앨범도 아닌데 난 놀고 있고 자기는 혼자 고생하니까. 맞을만 했다.(웃음)

    앨범 편곡은 직접 했나?
    에이, 아니다.(웃음) 시온이가 거의 다 했다. <상상>과 <연인>만 내가 했다. 내가 편곡이랑 완전 말도 안 되게 안 친하다. 아무리 가르쳐줘도 못 써먹는다. 남들 음악 들을 때는 할 수 있는데 내 음악에는 전혀 적용 못 시키겠다. <머릿속을> 같은 경우도 원래는 뭐랄까… ‘중중중중―’ 하면서 기타 백킹이 깔리는 버전이었다. 난 그게 좋았는데, 애들이 전부 만장일치로 반대해서 바꿨다.(웃음)





    성격 탓이 아닐까? 좋은 소리를 발견하면 이게 전체적으로 어울리는지 아닌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어떻게든 구겨서라도 넣고 싶어할 타입일 것 같은데?
    구겨서 넣을 재간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난 그냥 아무 생각이 안 난다. 만약 생각이 나면 곡이 안 써지고. 뭘 계획에 따라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그런 거 같다. 난 왜 학교도 남들 다니는 거 똑같이 다니고 했는데도, 규율이고 규칙이고 계획이고 아무 것도 모르는 걸까.

    그런 것까지 직접 하고 싶은 욕심은 있나?
    내 앨범을 잘 안 듣는다. 잘이 아니라 지금은 아예 안 듣고 있으니… 그게 편곡 때문일 거다. 결과적으로 좋은 경험이었고 색다른 음악이 됐지만, 내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강하니까. 이기적이다.(웃음) 그걸 아예 몰랐었다. 1집 내고 나니까 ‘이게 이런 거였구나’ 하는 걸 알 것 같다. 녹음할 때는 예상에도 없던 일이었는데 내놓고 나니 완전히 새로운 장이 펼쳐지니까. 좀더 일찍 알았으면 하는 후회도 되고.

    미디 작업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미디도 나랑 별로 안 친한 거 같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음악작업을 할 생각이 전혀 안 든다. 장비도 사고 설치도 다 해보고 배우기도 해봤는데, 컴퓨터 앞에 앉으면 그냥 백지상태다. 그래서 괜히 프로그램 실행시켜놓고 길면 15분 뒤에 다시 종료한다.(웃음)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되는지?
    원래는 실용음악학원에서 학생들 가르쳤다. 3년 정도? 그러다가 두 달 전에 그만뒀다. 세션도 그렇지만, 맨날 남들한테 맞춰주는 게 생활이 되다 보니까 너무 갇히는 것 같아서다. 음악을 수단으로 삼아 돈을 버는 사람에 가깝지, 음악 하는 사람의 길에서는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시간이 남아돈다.(웃음) 그래서 영화도 보고 이것저것 재미있는 거 하고 다닌다. 요즘은 <프리즌 브레이크> 보다가 폐인 다 됐다.(웃음)

    창작하는 사람이라면 다 공감할 만한 얘기다.
    그게 진짜 안 좋은 것 같다. 직업이 되다 보면 요령이 생기니까. ‘이렇게 애들 가르치면 이렇게 하겠구나’, ‘저런 장르는 저렇게 치면 되겠구나’ 이런 건 전혀 음악적이지 않고 기술적이다. 물론 그런 것도 중요한 일이겠지만, 새로운 창작에 몰두한다기보다 만들어진 걸 포장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아직 어린 편이지 않나. 생활에 도움 된다고 계속 그렇게 살다간 음악인으로서의 삶은 2,3년 안에 끝나버릴 것 같다.

    어린 나이인데도 꽤 중심이 확실한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혼자 한 게 아니라 송홍섭 선생님이 정말 많은 영향을 주셨다. 그 분에게 지금까지 배웠던 선생님 중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 혼나기도 많이 혼났다. 건반 다 부서질 정도로. 근데 그게 화를 내시는 게 아니라 나한테 충격을 주려고 일부러 그러시는 거다. 그렇게 흔들림 없는 분이 계시니까, 난 힘들 때 마다 송홍섭 선생님을 떠올린다.

    3월에 앨범 나왔는데, 음악 스타일상 11월쯤 나왔더라면 더 좋았을 뻔했다.
    아, 겨울에? 맞다. 원래 12월에 맞췄는데 늦어진 거다.

    음악은 거의 우울한 테마인데, 평소 모습과 음악이 틀리다는 말 안 듣나?
    완전 듣는다.(웃음)

    그럼 음악이 왜 이런 건가? 이게 원래 임주연의 정서라고 할 수 있나?
    혼자 있으면 그렇게 된다. 사람들이랑 같이 있으면 떠드는데. 내가 되게 예민하다. 혼자 있으면 막 떠올리게 되지 않나? 지나갔던 일 같은 거. 오늘은 이랬지, 저번엔 이랬지, 그런 감정을 곡으로 쓰는 거다. 현재 얘기는 못하겠다, 성격상.

    애초에 앨범 낼 생각도 없었다고 들었다.
    맞다.(웃음) 그냥 과제 때문에, 아니면 혼자 여가생활로 곡을 썼는데, 그때가 이한철 밴드 할 때였다. 근데 한철 오빠가 내가 만든 노래 들어보더니 ‘너는 앨범 무조건 내야 된다!‘ 이러면서 혼자 흥분하더니, 난 가만히 있는데 알아서 서류 다 작성하고 절차 밟아서 문화콘텐츠 진흥원에 신청했다. 그러더니 앨범 제작비를 받아버린 거다. 돈 받았으니 앨범 내야 되지 않나.(웃음)

    일단 발 들여놨으니 계속 해야겠네.
    그러니까. 큰일이다, 큰일.

    근데 이제 와서 안 하면 재능이 아깝지 않나?
    아까운 것도 아깝고… 근데 좀 힘이 빠진다. 내가 계속 이런 사람으로 산다는 게… 뭐랄까, 음악시장도 그렇고 여러 상황을 볼 때 패기가 잘 안 생긴다.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에 음악을 듣고 자랄 때는 사람들이 다 음악을 음악으로 받아들였는데, 이제는 막상 내가 음악을 하게 됐는데 사람들이 음악을 장식품처럼 여기니까. 그냥 좋아하기 때문에 하는 건데, 아직 젊은데도 힘이 빠진다.

    본인 음악보다 세션이나 학원 나가는 게 경제적으로 도움 되지 않나?
    당연하다! 내꺼 해봤자 돈 버는 거 한 푼 없다.(웃음) 창작을 한다는 게 계속 꿈을 꿔야 하는 일 아닌가? 뭔가 희망에 부풀어 살면서 그걸 표현하는 직업인데, 그걸 제약을 많이 받는 거다. 그러니 좋은 음악이 나오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뭔가 돌파구를 찾아야지. 영어공부 열심히 해서 영국에서 1년쯤 살아보고 싶기도 하다. 나는 정말 접시 닦으면서라도 살 생각도 있다. 꼭 음악을 하면서 살지 않더라도, 여기를 벗어나서 그 쪽 공기를 마시고 숨을 쉬러 가고 싶은 거다. 지금 생각하면 앨범이 반짝반짝 닦아서 장식장에 올려놓은 훈장 같다. 그다지 많은 위안을 주지는 못하지만. 내가 욕심이 많아서 계속 앞으로 달려나가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니까… 지금 상황에서는 해결이 안 된다. 요즘 시대는 너무 최첨단을 달리고 있어서 감성을 중요시 하는 게 어려워진다. 요즘 누가 음악을 듣나?

    우리 같은 바보들이나 듣지…
    진짜 그런 생각이 든다. 아, 나는 왜 이렇게 바보 같을까. 이거 아니면 할 줄 아는 게 없다. 바보다.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에 비해 뒤쳐진 삶 같다. 음악이 멀어져서 허탈감이 온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이렇게 욕심이 많은데. 외로워서 죽어버리지 않을까.

    <연인>과 <낙타송>은 둘 다 사랑하는 사람에 관한 노래인데 분위기가 극과 극이다.
    그거야 싸웠을 때랑 좋았을 때니까…(웃음)

    <낙타송>은 왜 하필 연인을 낙타에 비유한 건가?
    남자친구가 낙타 닮아서 별명이 낙타니까. 오래 만났다. 5년 사귀었는데 지금 군대에 있다. 내년 5월에 제대한다. 그 친구도 음악 하는 친구인데, 진짜 아티스트 타입이다. 근데 걔네 집은 좀 유복한 환경이라 온실 속의 화초 같은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생활력도 없고. 그래서인지 생각하는 게 전부 음악적이다. 내가 삶에 찌들어있을 때 그 친구가 자기 소리를 내는 거 보면 ‘아, 이런 소리가 음악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앨범은 들려줬나? 남자친구가 뭐라던가?
    뭐… 별 얘기 안 하더라.(웃음)





    단독 공연 계획은 없는지?
    아직 모르겠다. 내 생각일 뿐인지도 모르지만 도와주는 친구들한테 사례를 제대로 해 주고 싶다. 다들 프로니까. 그 친구들도 나랑 똑같이 음악 하는 입장인데, 나야 알아서 세션도 하고 돈 벌지만, 대가 없이 하는 게 그 친구들한테도 힘 빠지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너무 미안하다. 그래서 준비가 확실하게 안 되는 상황이라면 공연이 힘들 것 같다. 그리고 그것보다 슬픈 건 공연을 해도 내가 어떤 에너지를 만회하는 수준까지 가지 못한다는 거다. 사람들이 음악에 빠져서 즐기는 분위기가 있으면 ‘나 이런 음악 하는 사람이야!’ 하고 자신있게 나갈 수 있는데, 그게 아니고 내 쪽에서 ‘저 이런 거 하는데 한 번 들어주실래요?’ 그때의 시선이나 뉘앙스 있지 않은가. 그게 힘들다.

    그럼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는 음악을 하기 위해 고민해볼 생각이 있나? 솔직히 이번 앨범이 누구 귀에나 쉽게 들어오는 음악은 아니다.
    그럴 것 같다. 고민을 하다 보면 접점이 생기겠지만, 지금 우리나라 음악의 주류를 전적으로 따라간다는 생각은 안 한다. 주류가 아니어야 하는 게 주류니까. 다양성도 없고. 대신 나만 할 수 있는 음악을 찾으면서, 어떻게 하면 쉽게 들리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할 것 같다. 사람들에게서 반응이 오면 힘이 생기니까.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싸비’라는 것 있지 않은가. 난 그게 완전 쥐약이다. 그런 걸 못 쓰겠다. 그나마 있는 것도 나중에 ‘골라라~’ 하면 ‘그런 게 있긴 있구나…’ 이러는 거고. 기본적으로 내 곡은 전부 그런 후렴이라는 게 없다.

    그게 임주연의 스타일인가 보지.
    그렇지만 그 말이 틀리면서도 맞으니까. 요즘 우리나라 주류 음악들은 좀 아니긴 하지만, 외국의 주류 팝들을 들을 때면 느낀다. 물론 ‘아우~ 이거 너무 틴에이지네~’ 하는 것들이 많지만, 그래도 그 속에서 이거 좋다, 그래서 이 곡이 세계적으로 유명하구나, 라고 딱 피부로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그냥 ‘에이, 내 스타일은 후렴이 없는 거야’라고 방관할 수만은 없다. 작품의 완성도 문제일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많지는 않아도 임주연의 이번 앨범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반응이 있다. 딱히 눈에 띄는 구석은 없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잊혀지지 않고 계속 머릿속에서 맴돈다고. 색깔이 없는 게 오히려 스타일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임주연의 음악은 좀 오래 시간을 두고 들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인트로-브릿지-싸비’ 같은 일반적인 가요의 공식을 당신에게 기대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글쎄, 그게 나한테 별로 기쁜 소식이 되지 않는다는 거다. 사람들이 그렇게 들어서 다행이지만 정작 본인의 소원은? 그건 지금 내 음악이 확실한 메리트가 없다는 말이 되지 않나? 내가 부르는 노래, 완전 신문지 같다. 그냥 책장 하나 넘기고, 또 다음 장 넘기고… 그러는 것 같다. 그 무미건조한 노래라니. 목소리만 해도 그렇다. 난 미스터 빅의 에릭 마틴이나, 화이트 스네이크의 데이빗 커버데일의 소울풀하고 파워 있는 목소리가 부러워 죽겠다. 진짜 폭포수 밑에서 득음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담배 많이 피우는데도 목소리가 안 변한다.

    그러다 목소리 바뀌기 전에 폐암 걸려 죽는다.
    모르겠다. 어쨌든 저 사람들 목소리 가지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다. 난 왜 저런 목소리가 아닐까. 내가 저런 목소리라면 정말 잘 할 수 있는데.

    임주연의 노래를 듣는 사람들에게 원하는 게 있나?
    정확히 그걸 모르겠다. 음… 내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럴 것 같다. 다른 사람에게 내 노래를 소개하면서, ‘얘는 뭐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그냥 그럭저럭 괜찮다’고 하지 않을까. 물론 그럭저럭보다야 더 좋다고 표현하겠지만. 나는 늘 그랬지만 너 별로 임팩트 없어, 라는 말이 상처가 되는 게 절대 아니다. 다만 돌아버릴 정도로 심각할 뿐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 되지?’ 아침에 일어나면 머릿속에 저 생각이랑 먹는 생각밖에 안 떠오른다.

    주위의 음악인들은 뭐라고 하는데?
    저번에 5월인가 4월인가 정원영 교수님을 굉장히 오랜만에 뵈었다. 안부인사 한두 마디를 꺼낸 뒤, 저 어떻게 할지 모르겠어요, 라고 다짜고짜 물어봤다. 그랬더니 교수님이 ‘넌 그냥 그렇게 하면 돼. 음악 많이 들어야 한다고 부담 갖지 않아도 돼. 연습 꼭 열심히, 많이 해야 한다고 부담 갖지 않아도 돼. 너 지금 하는 대로 그렇게 네가 좋은 거 찾아서 듣고 또 들어. 그게 너한테 잘 맞아’라고 단언하듯 말씀하시는 거다.

    정답인 것 같다.
    그렇지만 누군가 선생님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확실하게 말해주면 마음이 편할 것 같은데. 근데 가르쳐 달라고 조르면 다들 저리 가라고 떠밀고, ‘넌 혼자 그냥 그렇게 해!’라고만 하고… 맨날 혼자 버려져 있다. 난 정작 아무 것도 모르는데.

    글쎄, 내가 보기엔 임주연은 아무래도 인위적으로 손대면 안 되는 타입 같다. 놔두면 본능이 알아서 해주지 않을까?
    음… 그렇게 말해줘서 너무너무 고맙지만 잘 모르겠다.

    임주연은 임주연이 잘 하는 게 있을 테니까.
    잘 하는 거 없는데…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어진다.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은상 받았을 때 무슨 생각 들었나?
    왜 나일까, 라는 생각… 본선 올라갔을 때도 내가 왜 올라갔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김민기 씨 같은 쟁쟁한 심사위원들이 은상으로 뽑아주지 않았나? 게다가 어렸을 때부터 우상이었던 이적 씨가 나중에 찾아와서 ‘노래 좋다’고 말해줬다며? 그때 어떤 안도감 같은 걸 전혀 못 느꼈다는 말인가?
    전혀…

    바보…
    그러게 말이다. 나 어쩌면 좋지? 어쩌다 이런 성격이 형성됐을까? 정말 바보인 것 같다. 이 바보 같은 뇌를 어떻게 해야 될까? 한강에라도 뛰어들었다가 나올까.(웃음)

    나름의 돌파구는 찾고 있나?
    디어 클라우드라는 밴드, 내 친구들인데 얼마 전에 앨범 나왔다. 걔네들 회사 사장님도 자주 같이 만나는 편인데, 그 분은 뭐랄까, 굉장히 냉정하고 별 존재감 없으면서도 이상하게 사교적이다. 프로듀서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는 그런 사장님이다. 그래서 나도 그렇고 그 친구들도 굉장히 좋아하는 분이다. 얼마 전에 전 어떻게 해야 되나요, 라고 물어봤더니, 그 사장님이 일반적인 장사꾼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라면서 들려준 얘기가 있다. 내가 솔로의 그림을 잘 끌고 가지 못한다는 지적이었다.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하는 여자라는 컨셉으로 가기엔 너무 어려보이고, 뭔가 무게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다고.

    밴드든 프로듀서든 좋은 파트너를 만나야 할 것 같다.
    그 사장님도 주변 사람들과 밴드를 하라고, 난 곡을 쓰고 건반을 치면서 노래를 좀 더 확실하게 하는 보컬을 구하란다. 내 관객이 누가 되느냐, 망했다 혹은 성공했다의 커트라인이 될 내 팬층이 어떤 사람들이냐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고. 틀린 말 같지 않아서 좌절했지만, 나 말고 다른 사람도 그런 생각을 한다니 좀더 안심이 됐다고 할까.





    그럼 질문을 바꿔보자. 사람들이 내 노래를 이렇게 들어줬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은 있나?
    이것도 막연한데… 들으면 ‘아, 임주연이구나’라는 느낌? 진짜 막연함의 극치다.(웃음) 뭐 임주연은 노래에서 딱히 기억나는 부분도 없고 맥아리도 없는 그런 게 아니고, 좀더 확실한 자리를 갖고 싶다고 해야 하나. 파도에 쓸려서 없어져 버리는 모래성 같은 거 말고. ‘스타일이 하나도 없는 게 네 스타일이다’라는 말은… ‘너 음악 왜 하니?’와 같은 말로 들린다.(웃음) 내가 하고 있는 이 고민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게 아니라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다.

    어떤 책에서 읽었던 글이 생각난다. 옛날 중세 시대의 성당은 하나 지으려면 200년씩 걸렸다고 한다. 그러니 거기 벽돌을 쌓던 인부들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성당의 완성을 보지 못하는 거다. 우리는 결국 그 사람들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언제 완성될지 모르지만 어쨌든 누군가는 쌓아야 하니까.
    그 성당, 완성된다면 정말 좋겠다. 200년이 걸린다고 하더라도…


    사진제공_임주연 / 박주연 (or2kphoto@hanmail.net)


    임주연 홈페이지 : http://www.limju.com



    임주연의 별명은 ‘쥐’다. 쥐처럼 생겨서란다. 그렇다고 꼬리와 입 주위에 털이 없는 징그러운 시궁쥐는 아니고, 들쥐처럼 조그맣고 귀엽다. 그녀가 공연하는 모습을 보면 딱 자신이 치는 키보드만한 체구다. 그...
    ☆☆☆☆☆ | 임주연
  8. 김반장 (나도원)


    “레게가 우리의 기본임을 보여준 결과물이다”

    나도원 : [Love Record](2005)는 대중친화적이었고, [Psychedelicious City](2006)는 다각도의 실험을 시도한 EP였다. 그리고 정규2집 [Countryman's Vibration](2007)은 대중적인 감각과 다양한 실험을 모아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정반합의 과정을 거쳤다고 할 수도 있다. 신작의 밑그림은 언제쯤 그렸는가?

    김반장 :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 우리의 방향성에 대하여 심사숙고를 하면서 여기까지 온 것 같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2006년 11월 즈음부터 두 번째 앨범의 컨셉을 잡기 시작했다. 밴드 멤버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정서를 레게로 보았고, 레게를 사운드의 기본으로 삼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녹음에 들어간 것은 2007년 1월 말부터다. 그리고 ‘Countryman's Vibration’이란 타이틀은 2월 즈음에 서로의 합의를 통하여 정해졌다.

    나도원 : 이번 앨범은 진지함과 대중성이 자유로우면서 헐겁지 않게 묶여있다. 이처럼 느슨한 집중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김반장 : 우리가 치밀한 스타일은 아니다. 치밀한 계획을 세워놓고 곡을 만들거나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처음의 그림을 그대로 가져가야한다고 생각했으며, 그 느낌대로 밀고 왔기 때문에 관통력과 집중력이 있는 앨범이 되지 않았나 싶다.

    나도원 : <Reggae Rule The World (Version)>의 이주한, 최재문 씨의 혼 섹션(Horn Section)이 인상적이다. 멜로디는 이주한 씨가 만든 것인가? 이처럼 밴드 외의 음악인이 중요한 역할을 맡는 작업방식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김반장 : 잼 세션을 하고 (이)주한이 형과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내가 인트로 멜로디를 제시했고, 주한이 형이 그것으로 즉흥적으로 테마를 만들어냈다. 우리 밴드의 구성이 드럼, 기타, 베이스, 키보드, 퍼커션이다. 그러다보니 혼 섹션이나 믹스(mix)처럼 우리가 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이러한 부분을 밴드 외의 음악인이 참여하여 채워주는 방식에 대해선 열려있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

    나도원 : 다이다믹 듀오가 피처링한 <Love And Happiness>은 달게 들린다. 현재 주류권 음악의 흐름과 통하는 느낌이다. 이러한 곡은 자연스러운 것인가? 직설적으로 말하면 수록곡 중 몇몇은 타이틀곡을 의식하면서 만들었는가 하는 물음이다.

    김반장 : 사실 <Countryman>이나 <Silky Silky Love Song>이 타이틀곡을 생각하며 만든 곡들이고, 다른 곡들은 자연스럽게 나온 곡들이다. 이번 앨범은 레게가 우리의 기본임을 보여준 결과물이다. 그런 점에서 <Love And Happiness>가 전체의 흐름과 맞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1집의 연장선으로 본다면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내가 듣기에도 <Love And Happiness>가 요즘 어떤 정서와 맞는 게 있다고 여겨지는데, 전략적으로 그렇게 된 건 아니다. 만들어진 것을 보니 그렇게 되어있었다. 그런데 전혀 생각하지 못한 다른 트랙이 타이틀곡이 된 것을 보면서] 역시 뮤지션의 입장과 제작자의 입장은 다르구나 싶었다.

    나도원 : <Time For Love>, <Silky Silky Love Song>도 1집 곡들의 연장으로 보인다. 이런 곡들을 들으면 훵크·소울 밴드였던 ‘사랑과 평화’가 연상되는데, 필(feel)을 제대로 살리면서 대중적인 노선을 견지했다는 점에서 윈디시티와 유사한 면이 있다.

    김반장 : 사랑과 평화와 친하고, 특히 (이)철호 형과 매우 가깝다. 5년 전에 어느 거리를 지나다가 우연히 사랑과 평화의 무료공연을 보게 되었는데 아주 좋았다. 대기실로 찾아가 “아직 꼬마지만 음악을 하려는 사람입니다”하면서 인사를 했다. 지금도 한국에서 음악을 하는 것은 힘들지만, 뮤지션쉽이 전무했던 과거에는 더욱 힘들었다. 그 때부터 밴드를 해온 사랑과 평화이고, 또 우리에게 좋은 조언도 많이 해준다. 리허설에 임하는 자세라든지 멤버들이 친하지도 않으면서 무대 위에서만 친한 척 하는 건 사기라든지 하는 직접적이고 세세한 조언들도 해준다. 모두 공감하는 말들이다. 그리고 철호 형은 음악적인 철학과 신념이 투철하다. 그의 얘기를 듣고 있으면, 그 정도 나이에 그 정도의 열정과 철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지금까지 밴드를 해오면서 세파에 많이 힘들었을 텐데도 지금까지 음악 하는 재미를 잃지 않고 있다는 것 자체가 본받을 만한 뮤지션이다.

    나도원 : 윤갑열 씨가 EP [Psychedelicious City]부터 음반의 레코딩과 믹싱을 맡고 있다. 어떠한 과정에서 그렇게 되었는가? 이후 밴드사운드와 작업과정에 변화가 있었는가?

    김반장 : 음반시장이 점점 악화되는 상황이어서 EP 제작 시에 외부 엔지니어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양질의 결과물을 뽑아내야 했는데, 프로그래밍과 믹싱에 관심이 많았던 윤갑열 군이 자신이 해보겠다는 의사를 밝혀서 그가 엔지니어를 맡게 되었다. 비용절감에 대한 요구와 갑열이의 믹싱에 대한 재능이 자연스럽게 결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친구들에게 곡을 제공할 일이 있었는데, 그 때 작업을 하면서 갑열이의 실력이 점점 향상되는 것 같았고, 그래서 이번 정규앨범을 아예 맡게 되었다. 그리고 내부에 같이 음악을 하는 엔지니어가 있기 때문에 톤과 사운드에 대한 대화가 훨씬 편해졌다. 이전보다 엔지니어와의 대화가 수월해졌다고 할 수 있다.

    [Countryman's Vibration](2007)


    “진정성 있는 음악과 그렇지 않은 음악이 있을 뿐이다”

    나도원 : 이번 앨범은 아프리카계 아메리카인들의 음악과 영미권의 록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All Time Rockers (Rockers Dub)>의 싸이키한 무드와 마지막 트랙의 테크노 리믹스에서 보듯 폭이 좁지 않다. 특히 윤갑열 씨가 연주한 <Rising Sun>은 록 기타 연주곡에 가까운데, 이러한 스타일이 윈티시티 안에 수용되는 것인가?

    김반장 : [Love Record]의 마지막 트랙도 리믹스 버전이었고 EP에도 계속 리믹스 버전을 넣었듯이 정규트랙 외에 한두 트랙 정도는 믹스하여 싣는 방식을 택하고자 한다. 우리는 소울, 블루스, 레게를 좋아하지만 음악을 인종적으로 구분하여 보지는 않는다. 백인음악과 흑인음악으로 구분하는 시대는 지났다. 세상에는 좋은 음악과 그렇지 않은 음악이 있을 뿐이다. 우린 바닐라 퍼지(Vanilla Fudge), 레드 제플린(Led Zeppelin),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Rising Sun>에는 록뿐만 아니라 레게-팝의 요소도 섞여있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스타일이라는 점에서 우리 모두 결과물에 흡족함을 느꼈다.

    나도원 : 김반장 역시 ‘언니네이발관’과 같은 록 밴드에서 연주했었다. 그리고 ‘바이닐’을 거쳐 ‘아소토유니온’으로 이어졌다. 음악적 뿌리와 변화과정에 대해 말해 달라.

    김반장 : 열아홉 살 때에는 데스메틀 밴드를 했고, 모던 록 등을 들으면서 언니네이발관을 하게 되었다. 생각하건대 나는 음악을 거슬러 올라가며 받아들였다. 힙합세대임을 부인할 수 없는 나는 힙합을 들으면서 재즈와 소울 등의 유산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밴드를 하고 음악을 하면서 록, 소울, 블루스, 살사 모두가 하나의 음악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되었다. 요즘에는 ‘라이너스의 담요’를 비롯해서 많은 음악을 듣고 있다. 음악은 장르와 인종과 지역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성 있는 음악과 그렇지 않은 음악이 있을 뿐이다.

    나도원 : 그렇다면 김반장이 생각하는 좋은 음악은 무엇인가?

    김반장 : 한마디로 감동을 줄 수 있는 음악이다. 청자와 음악애호가에게는 취향의 문제일 수 있지만, 뮤지션의 입장에서 보면 깊이와 안목의 문제라고 본다. 그동안 모던 록에서부터 애시드 재즈, 소울-훵크 등을 해왔는데, 결국 버스라이더스(Busriders)를 같이 했던 멤버들과 윈디시티를 하면서 다시 레게음악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느끼는 것은 장르가 무엇이든 좋은 음악은 좋은 음악이고, 깊이 있는 음악은 깊이 있는 음악이라는 점이다. 뮤지션이 할 일은 복사와 재현이 아니라 체화기간을 통해 자기 스타일과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빨간색의 음악이 뮤지션을 거쳐 녹색으로 될 수 있듯이 뮤지션이라는 존재는 필터와 같다. 그 역할이 음악가다운 것이고, 또한 자신에게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생각은 내게 큰 변화이자 깨달음이다.

    나도원 : 레게에 집중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김반장 : 코스모폴리탄이나 지구촌이란 말이 있듯이 세계는 좁아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진전은 기업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방향으로만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레게음악은 민중의 억압적인 역사를 담고 있으며, 세계의 다양한 문화에 대한 존중을 지니고 있다. 자메이카 음악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일본과 태국의 예에서도 보듯이, 각 동네의 특색과 각 뮤지션의 취향에 의해 현지화 되어 있다. M-TV와 같은 거대미디어를 거치지 않고 세계적으로 퍼져나갔다는 점에서도 매력적이다. 또한 지금 젊은 세대들에게 유행하는 다양한 음악들의 뿌리이다. 케미컬 브라더스(The Chemical Brothers)와 매시브 어택(Massive Attack)과 같은 뮤지션들 역시 레게밴드의 전적을 가지고 있으며, 덥(dub)과 음향기법 등의 영향을 받았다. 이처럼 근저가 되는 음악이라는 점에서도 매력이 있다. 레게음악의 풍부한 베이스와 느릿느릿하지만 댄서블한 비트는 감동적이다.

    나도원 : 방금 김반장의 대답에 대하여 두 가지를 다시 묻고 싶다. 우선, 아소토유니온의 구성원들은 김반장과 윤갑열이 윈디시티를, 임지훈과 김문희는 펑카프릭 부스터(Funkafric Booster)를 만들면서 헤어지게 된다. 흔히 ‘음악적 견해차’라는 말을 쓰는데, 구체적으로 말해줄 수 있는가?

    김반장 : 처음에 (임)지훈 형의 아현동 작업실을 찾아가면서 만나게 되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음반들을 들려주면서 이런 음악을 해보자 했을 때는 명쾌하게 이루어진 부분이 있었다. 그렇게 아소토유니온의 사운드가 만들어졌다. 좋아하는 음악은 비슷했지만 음악을 대하는 관점의 차이가 아니었나 싶다. 내 입장에서 얘기하자면, 밴드가 오픈마인드를 가지길 원했지만, 나와 지훈 형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지 못했다. 밴드가 커지면 커질수록 서로 견제하는 부분이 더 커졌다. 음악적인 견해차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말하는 방식과 대하는 태도와 같은 성격차가 더 작용한 것 같다. 갈수록 그 갭이 커지다보니 밴드를 같이 하기 힘들어진 것이다.

    나도원 : 다른 하나는, 레게음악이 민중의 음악에서 출발했다고는 하지만 아프리카계 아메리카인의 음악과 중남미 음악이 한국에서는 제2의 재즈와 같은 수용과정을 거쳐 소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괴리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김반장 : 사회적인 현상과 뮤지션은 별개라고 본다. 한국사회에는 문화를 깊이 있게 다루지 않고 트렌디하게 이용하고 소비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재즈에 대해서처럼 문화를 바라보는 관점이 뒤틀려있다. 예전에 김흥국 씨의 <레게파티>나 김건모의 <핑계>처럼 레게풍 가요를 비롯해서 붐이 일긴 했지만, 당시에 레게를 제대로 알고나 있었는지 의문이다. 그것은 레게가 아니다. 단지 패션? 드레드락? 헤어스타일? 그것은 레게의 일부일 뿐이다. 레게는 단순히 소비해버리고 말아도 될 것이 아니라 매우 깊은 음악이다.

    나 역시 이러한 현상을 좋아하지 않지만, 한 뮤지션으로서는 관련이 없다고 본다. 사람들이 어떤 음악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아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뮤지션으로서의 나는 일단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뮤지션이 깊이가 있으면 좋은 음악을 할 수 있을 테고, 그 음악으로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레게 애호가이자 뮤지션으로서 내가 원해서 레게를 하고 있을 뿐이지 외부의 상황에 상관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도원 : 하지만 윈디시티의 음악에 담긴 태도와 윈디시티의 음악을 즐기는 팬층의 기호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한다.

    김반장 : 그렇다. 정치적인 의견이나 태도에 모두 동의하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모두 동의한다는 것도 이상하고. 다만 신념을 가지고 음악을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의 음악을 좋아한다면, 이 음악이 어떤 생각으로부터 나왔는지 관심을 가지게 되리라 본다. 그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렇다고 강요할 생각은 없으며, 음악을 즐겨준다면 그걸로 족하다. 우리 음악이 진보적인 이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전두환이나 김용갑 같은 사람들이 듣고 “음악은 괜찮은데?”라고 할 수 있길 바란다. 모두를 위한 음악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제시하고 싶은 새로운 애티튜드이다”

    나도원 : 앨범의 테마인 ‘컨트리맨’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구수하게 표현하자면 ‘촌놈’이 되는데, 여기에는 자연스러움이란 것과 어떤 태도가 담겨 있는 것 같다. 설명을 부탁한다.

    김반장 : ‘컨트리만’은 도시에 사느냐 촌에 사느냐하는 지역적 구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삶의 태도에 관한 말이다. 트렌드에 휩쓸리고 소비적이고 향락적으로 살면서 경쟁하는 도시와 사회라는 시스템이 행복을 줄 수 있느냐하는 근본적인 질문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런 삶은 인생을 풍요롭게 하지도, 행복하게 하지도 못한다. 사랑과 낭만도 없다. 자멸 뿐이다. 환경파괴도 마찬가지다. 길거리에 나뒹굴고 있는 쓰레기와 공장의 폐수와 이산화탄소만이 공해가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사람의 생각, 사람의 태도가 공해일 수 있다. 이러한 공해 속에서는 사람들이 절대 서로 존중하며 살아갈 수 없다. 외로움만 있을 뿐 감동이 없다.

    그렇다면 더 풍요롭게 살면서 사랑과 낭만을 느낄 수 있는 애티튜드(attitude)는 무엇일까. 그것이 컨트리만이다. 유행에 민감하지 않고 경쟁에 얽매이지 않는, 도시인이 보기에는 덜 문명화된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서로 존중할 줄 알고 자연을 존경할 줄 알며 소박한 멋을 안다. 이것이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인간형, 라이프스타일라고 생각했다. 또한 레게, 살사, 블루스는 도시가 아닌 시골에서 나온 음악들이다. 사람이 좀 더 인간성을 느낄 줄 알 때 나온 음악이다. 레게음악이 나온 자메이카의 환경은 특히 더 그렇고, 애티튜드 자체가 컨트리만적이다. 결국 컨트리만은 레게음악의 근본에 대한 얘기임과 동시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제시하고 싶은 새로운 애티튜드이다.

    나도원 : 경쟁하고 배척하게 만드는 극단적인 자본주의와 도시화에 대한 답임과 동시에 음악에 대한 윈디시티의 태도를 보여준다는 얘기로 이해된다.

    김반장 : 그렇다. 어떤 음악을 듣고서 이 음악을 만든 뮤지션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생각을 하지 않고, 몇 장 팔리고 몇 위까지 올라갔느냐와 같은 음악의 본질과는 무관한 것들로 음악을 보고 있다. 그러다보니 갈수록 음악이 얄팍해진다. 그런 음악들은 사람을 위한, 사람에 대한 애정이 있는 음악이 아니라 사람의 주머니를 겨냥한 음악이다. 어떻게 보면 더 심한 공해이고, 이런 공해를 듣고 자란 사람은 깊이 있는 음악을 할 수가 없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로 이루어진 것이 한국의 음악현실이다.

    나도원 : 사회가 소비자로서의 인간만을 강조한다. 그래선지 윈디시티는 상품으로서의 음악이 아닌 삶의 일부로서의 음악을 강조해왔다. 어떤 공연에서 “우리 음악은 MP3로 다운받아 들어도 됩니다”라고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

    김반장 : 음반을 산다는 것, 작품을 사고 대가를 치른다는 것은 작품에 대한 인정이기 때문에 신성하다. 음악을 하는 것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삶을 풍요롭게 하고 함께 교감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임을 각인시키면서 MP3는 절대 다운받지 말고 음반은 반드시 사라고 말하도록 만든다. 여기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그처럼 말한 것이다. 물론 순기능 외에 역기능도 크다. 뮤지션의 수고와 아트워크는 무시되고, 음악 듣는 행위가 인스턴트화되도록 한 면이 있다. 마치 하나의 게임데이터처럼 다운받아서 듣고 지워버리게 만든다.

    그런데 불과 5-6년 전까지만 해도 음악마니아들은 대부분 부자들이었고, 형편이 어려운 친구들은 그런 음악을 듣기 힘들었다. 이처럼 MP3가 음악을 퍼지게 하고 사람들에게 균등한 기회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는 의미에서 한 말이다. 너희 음반을 사지 말라는 말이냐, 고 하는 분들이 있는 것을 보면 아직 말하고자 하는 바가 제대로 전달되고 있지는 않는 모양이다. 물론 음악인에 대한 애정과 작품에 대한 존중이 있다면 당연히 음반을 사는 것이 맞다. 나도 다운받아 듣곤 하지만 일본에 가면 좋아하는 음반은 다 산다. 존중이고 존경이다. 다만 돈이 없으면 음악을 듣지 못한다는 자본주의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음악은 모두를 위한 거니까.

    나도원 : 윈디시티의 음악은 한국에서 세련된 스타일로 받아들여진다. 결국 ‘세련된 촌스러움’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반장 : 맞다. 소위 명품브랜드의 디자이너들도 소박한 그림에서 영감을 얻는다고 한다. 결국 세련됨이란 사람의 진정성에서 나온다. 사람들은 돈을 주고 그 진정성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원래 그 진정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낙서가 세련되었음을 알지도 못한다. 팔기 위한 세련됨을 위해 깎고 다듬는 것이 진정한 세련됨이 아니다. 음악 역시 깊이 들어가 보면 그러한 것들이 보인다. 도시로 가져와 예쁘게 꾸며놓았을 뿐, 그 안에 들어있는 에너지와 진정성은 이미 세련되어 있다. 윈디시티의 음악도 마찬가지로 세련됨을 위한 세련됨이 아니라 진정성과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택한 방법이다.

    나도원 : <Freedom Blues>에 진정성과 세련됨이 하나로 녹아있는 것 같고, 그런 점에서 윈디시티의 지향을 보여주는 곡이 아닌가 한다.

    김반장 : 그래서 맨 마지막 트랙으로 넣었다. 결국 내가 하려는 얘기가 무엇인가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곡이었기 때문이다. 주변에선 곡 분위기에 맞게 팔릴 수 있는 러브송으로 만드는 게 좋지 않았겠느냐는 말을 하고, 계산을 너무 안 한 것 같다는 얘기도 했다. 하지만 앞뒤생각을 다 하고 만든 곡이다. 하고 싶은 얘기를 담는 것이 뮤지션의 기본으로 봤고, 또 작사가로서 나의 얘기가 무엇인지 밝히고 싶었다.


    “직접적인 교감을 나누는 원초적인 음악의 형태를 유지하고 싶다”

    나도원 : 1집의 <No No No>, 그리고 이번 앨범의 <우리시대>에서 직설적으로 정치적인 의사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앨범 속지에 ‘이주노동자법 개정과 해외주둔군 철수’를 주장한 글을 담았다. 그렇게 직접적으로 발언하는 음악인이 많지는 않다.

    김반장 : 정치적 신념과 음악적 신념을 사람들과 나눔으로써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삶을 좀 더 풍요롭고 아름답게 하기 위해 어떤 방법이 좋겠느냐고 제안하는 것이다. 생각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지만, 넌지시 던짐으로써 한번 생각해보게 할 수는 있다. 한국에 음악 하는 사람들이 많음에도 어떻게 이러한 애티튜드를 가지지 않을 수 있는지 궁금하다. 우리 사회는 FTA타결이나 비정규직보호법 개악 등에 민감한 영향을 받고 있다. 홈에버사태를 보면, 그들이 우리 어머니들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가수들이 사랑노래만 부르고 있다. 자신의 음악 팬들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팬들의 주머니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단순히 생산자로서 소비만을 유도하며 사람들의 의식을 저하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도 있어줘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성을 말하지만 우리 음악 씬은 결코 다양하지 못하다. 간혹 음악에 이러한 생각을 담는 것이 의아하다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오히려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는 사회구성원임에도 어떻게 모른 척할 수 있는지 의아하다. FTA가 시행되면 3년 뒤엔 캐나다처럼 홈리스가 크게 증가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이런 일들을 외면하고 발라드만 부르는 것을 보면 그냥 공장 같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는다. 뮤지션이 아니라 공장이다.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자신의 얘기를 나누고자 하는 아티스트쉽을 외면하고, 자기안위를 위해 소비자들이 원하는 음악을 만들어 대가만 바라는 행태가 너무 오래되었다. 그것이 고착화되면서 이젠 잘못인지도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도원 : 음악을 생산하는 노동자로서 겪는 문제들도 있다. 예를 들어 음원수익분배구조의 정상화와 방송의 음악프로그램 개혁과 같은 문제들은 절실하고 시급한 문제들이다.

    김반장 : 내가 더 알아야 하는 부분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풍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려고 있다. 음악인들이 좋은 음악을 만들어내서 이 씬을 바꾸는 것 외에 말로 할 수 있는 부분은 많지 않다는 생각이다. 음악인이라고 한다면 음악과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 좋은 음악을 만들면서 의견을 말하는 건 옳지만, 음악은 말도 안 되면서 의견만 말한다면 차라리 강의를 하는 게 낫다. 언급한 것은 어떻게 보면 음악인에게 직접적인 문제라서 자칫 밥그릇 챙기기로 보일 소지가 있다. 장기적으로, 우리 음악을 통해 새로운 젊은 세대가 좋은 음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도록 영향을 준다거나 좋은 음악을 하는 사람들의 씬이 만들어지도록 일조하는 것이 맞지 않나 싶다. 노동법 등에 대한 문제는 보편적으로 공감하는 문제이면서 음악 씬의 문제와도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사람들이 다양성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된다면 한국의 폐쇄적인 방송구조나 음악 씬에도 변화가 생길 것이다.

    나도원 : 법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는데, 가진 자는 조롱하고 갖지 못한 자는 경멸하게 되는 것이 이 땅의 법이 아니겠는가.

    김반장 : 법과 사회체계를 함께 얘기하면 결국 사람들을 억압하는 기제다. 돈이 많으면 이길 수 있고 경제적으로 약하면 지는 게 법과 재판이다. 많은 사람들이 다 알고 있고, 실제로 그런 경험을 많이 한다. 법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의구심이 들고 정부와 대통령의 필요성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가지고 있다. 홈에버사태만 보아도 경찰은 자본가만 보호하지 노동자를 지켜주진 않는다. 직접 시위에 가보면 경찰의 역할이 무엇인지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노동자도 시민이다. 시민을 위한 경찰이라면서 자본가들의 이익을 보호해주고 노동자에게는 곤봉을 휘두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자본가 밑에서 일을 잘하고 있으면 시민이고, 그렇지 않으면 시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물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규제와 책임이 존재해야겠지만, 억압을 위해 법과 정부와 대통령이 존재한다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기업들의 이익과 국가기관의 효율적인 통제수단으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 필요성에 대해 회의적이다.

    박노자 씨가 말한 개인자율주의에 동의하고, 그러한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다. 개개인이 자신에 대해, 그리고 책임에 대하여 안다면 스스로가 정부일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삶도 아름다워지고 공동체도 풍요로워질 수 있다. 도시인들의 파편화된 삶은 사회적 병리현상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잘 정비된 법과 정부기관? 오히려 이러한 경향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요인들이다. 풍요로운 인생을 위해 개혁에 대한 확실한 생각을 가지는 것이 새로운 세대의 의무이다. 어제 TV로 이명박 씨의 인터뷰를 보니 기업에 대한 규제를 풀고 새로운 노사관계의 로드맵을 짜겠다고 하던데, 그 말은 기업의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해 노조활동을 제도적으로 억압하겠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는 힘든 노동을 안 해봐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한국과 세계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전면적인 무시다.

    나도원 : 윈디시티는 페스티벌의 단골 초대 손님이다. 그만큼 연령과 취향에 상관없이 ‘흥’을 풀어낼 수 있는 밴드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독특한 스타일로 받아들여지지만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김반장 : 기본적으로 나는 댄스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음악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점에서 위대하고, 그래서 내가 음악을 하는 것 같다. 마빈 게이(Marvin Gay)와 같은 섹시한 음악이라든지, 육체적이고 아랫도리를 많이 움직이게 하는 음악을 사랑한다. 이러한 내가 정치적인 의식과 음악적 철학을 확고히 하게 된 것은 이 사회가 억압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춤추기 좋아하고 신나게 드럼 치고 노래하면서 사람들과 교류하기를 원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무언가 그것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그것이 시스템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댄스음악을, 한국에서 팔리는 얄팍한 댄스음악이 아닌 진정성 있는 댄스음악을 하고 싶은 사람일 뿐이다.

    나도원 : 거리공연처럼 소박한 연주를 생각하고 각종 집회에 참가하는 것은 간극을 좁히려는 노력인가?

    김반장 : 집회에 참가하는 것은 잘못되어가고 있는 이 사회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방관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음악인과 팬과의 간극을 좁히기 위한 시도는 아니다. 그리고 거리공연은 돈을 벌기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음악 자체로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공간을 좋아해서이다. 작은 카페에서의 공연이나 길거리 공연은 사람들과 호흡할 수 있는 공간과 기회를 마련해준다. 무대 위에서 사람들을 보면서 연주하는 것도 신나지만, 무대 아래의 동등한 위치에서 사람들과 직접적인 교감을 나누는 원초적인 음악의 형태를 유지하고 싶다. 이러한 원초적인 음악의 형태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고, 잃어버릴 수도 없다. 물론 그러한 공연에는 음악인들의 고생이 따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고 즐겁다. 음악의 기쁨은 사람들과의 소통과 교감에서 나온다.

    나도원 : 밴드 윈디시티, 그리고 인간 김반장의 계획에 대하여 말해 달라.

    김반장 : 9월에 일본 후쿠오카에서 열리는 선셋페스티벌 참가를 시작으로 여러 페스티벌 무대에 설 계획이다. 확정되진 않았지만 태국에서 열리는 페스티벌에 갈 수도 있다. 또 우리 음악을 좋아하는 런던의 어느 페스티벌 기획자가 러브콜을 보내오면 유럽의 친구들과 연주를 하러 가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여자친구를 사귀고 싶다. 너무 오래 혼자였는데, 일이 바빠서라고 생각했지만 그것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사랑과 낭만을 얘기하면서 정작 내 삶에는 사랑과 낭만이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음악, 사회, 또 나 자신에 대하여 더 많이 알고 싶다. 계속 왕성하게 움직이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야 좋은 음악을 만들 수 있을 테고, 좋은 음악을 만든다는 것은 내 인생이 좀 더 풍요로워진다는 것이니까.

    윈디시티 in 2006광명음악밸리축제 (권준경)

    김반장 (나도원) “레게가 우리의 기본임을 보여준 결과물이다” 나도원 : [Love Record](2005)는 대중친화적이었고, [Psychedelicious City](2006)는 다각도의 실험을 시도한 EP였다. 그리고 정규2집 [Country...
  9. 이기용


    “나도 햇볕을 원하고 웃음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나도원 : 어떻게 하루를 보내는가?

    이기용 : 새벽 3-4시에 잠자리에 들어 오전 10시나 10시 30분 정도에 일어나 씻고, 책을 좀 보다가 오후 1-2시 사이에 작업실에 나온다. 그리고 밤 11시 정도에 퇴근한다. 어느 시점이 넘어가면 음악이 업인지 아닌지를 선택해야하는 순간이 온다. 어설프게 이도저도 아니게 지나가는 시간들이 있는데, 나는 성실하게 해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작업실을 구하면서부터 토요일만 제외하고 일주일에 6일을 나온다. 연습을 일주일에 2-3번씩 정기적으로 하고 곡 작업도 한다. 음악 하는 사람은 혼자 있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한다. 산책도 좋아해서 사는 곳의 근방 4-5킬로미터 이내에 있는 모든 골목을 알고 있을 정도다.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기에 좋고 기분도 좋아진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노래를 만들면 흥분되어서 작업실에 가만히 있질 못하고 밖으로 돌아다니게 된다.

    나도원 : 최근 라디오 프로그램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게스트로 출연해 방송국 PD들의 자질 문제를 직설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들었다.

    이기용 : 라디오는 음악을 들려주는 매체다. 물론 쇼적인 측면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음악이다. 그런데 라디오가 음악과 척을 진지가 오래되면서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켰고,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이 들을만한 프로그램들도 한정되고 말았다. 그렇게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자리에선 PD 얘기를 하고 싶었다. 댄스건 주류음악이건 그 어떤 음악이건 간에 애정이 있는 사람이 방송을 맡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음악에 대한 애정과 고민이 없다면 좋은 선곡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학을 다니면서 매우 실망했던 것들 중에 하나가 인문대에서조차 비교적 진지하게 교양 차원에서 책을 보는 사람들이 거의 없더라는 점이다. 대부분 학점이나 입사에 관계된 것만 보기 때문에 깊이와 인문학적 소양이 나올 수가 없다. 마찬가지다. 공부만 열심히 하다가 음악적 소양과 깊이도 없이 방송국에 들어가 PD가 되니까 쓰레기 같은 라디오 프로그램들을 양산하게 된다. 아무도 말을 안했지만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방송이라고 그런 얘기도 못한다면 우습지 않은가.

    나도원 : 스스로 ‘비주류 중의 비주류’라고 말했고,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그러다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고상에 해당하는 ‘올해의 앨범’을 수상했다.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기용 : 인간적인 칭찬에도 기분이 좋아지듯 음악에 대한 칭찬은 기분 좋은 일이다. 스왈로우의 [Aresco]가 다음 해 시상식 후보에 들지 못했고, 약간 서운한 마음으로 그 앨범은 잊혀지겠구나 생각했다. (※ 제3회 한국대중음악상부터 시상 범위가 해당년도 10월 발매 작까지로 변경되었고 스왈로우 2집은 2005년 11월에 발표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후보에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사람들에 의해 불려져 나오는 듯해 반가웠다. 하지만 ‘올해의 앨범’에는 큰 기대를 못했고, ‘올해의 모던 록 앨범’을 받았으면 하는 마음은 있었다. 사실, 모든 앨범이 당시의 내 모든 것을 쏟아 부어 만들었기에 소중하지만, 스왈로우 2집은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힘을 다 빼고 극단적인 감정들은 다음으로 미뤄두면서 진동 폭이 크지 않은 감정을 담아보고자 했고, 이전과는 달리 소소하고 일상적인 모습을 담아보려는 것이 기본적인 방향이었다. 내가 그렇게 만든 앨범이 지금껏 한 장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상으로 인정을 받음으로써 자신감 같은 걸 얻게 되었다고나 할까.

    나도원 : 스왈로우라는 분신을 만든 것은 허클베리 핀으로는 하지 못한, 또는 하지 못할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기용 : 허클베리 핀은 록킹하고 그루브하게 가고 싶은 부분이 있다. 허클베리 핀 4집도 그러한 테마로 가고 있다. 그런데 혼자 있을 때엔 음악을 거의 안 듣거나 ‘앤디 윌리엄스’처럼 자극이 적고 스탠다드한 음악을 주로 듣는다. 음악은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인데 과연 ‘나’는 무엇이겠는가. 타인은 나를 이기용이라는 하나의 이미지로 받아들이겠지만 나라는 존재에게는 시간적인 역사가 있고, 어느 순간을 딱 집어 보면 지금의 이기용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존재하기도 한다. 그렇게 음반은 시간적인 의미와 함께 마디마디의 자신, 삶 속에서의 어떤 위치를 보여준다. 나의 세계는 과거와 현재의 세계와 만나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여러 느낌들을 음악으로 표현하고 싶다. 스왈로우에는 좀 더 개인적인 환상과 상상을 담는다. 허클베리 핀이 공격적이고 격정적인 감정의 상태를 담아낸다면 스왈로우는 그렇지 않은 나를 보여준다. <봄의 피로>나 <몇 세기 전의 사람들>은 허클베리 핀에서는 조금 하기 힘든 음악이었다.

    나도원 : 각각 허클베리 핀과 스왈로우의 곡이 되는 기준이 있는가? 허클베리 핀의 <Hey Come>은 스왈로우의 곡이 되었을 수도 있는 스타일 아닌가.

    이기용 : 허클베리 핀 3집이 앞서 말한 스왈로우의 감성과 좀 맞물려 있다. 그동안의 허클베리 핀을 정리한다는 의미가 있는 앨범이었고, 발표순서는 달랐지만 허클베리 핀 3집이 스왈로우 1집보다 먼저 녹음되기도 했다. 반대로 스왈로우 2집에서 어떤 곡들, 예를 들어 <밤은 낮으로>나 <너는 웃지 않고 난 웃었어>는 소영이가 불렀다면 좀 더 격정적이 되면서 허클베리 핀과도 그다지 이상하지 않게 어울렸을 곡들이다. 곡을 내가 만들다보니 그런 부분들이 좀 있는데, 어떤 곡들은 스왈로우와 허클베리 핀 사이에서 자리를 바꾸는 것이 더 적절하겠다는 생각도 있긴 했다. 물론 노래를 만들 때엔 기준이 있는데, 앨범을 내야할 시점은 정해져있다 보니까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곡들은… (웃음)

    나도원 : 1집 [Sun Insane]과 2집 [Aresco]에는 다른 두 지점이 있다. 무드에서는 전자는 낮게 침잠했고 후자는 여유롭고 편안해졌다는 것, 그리고 표현법에서는 전자가 미니멀했다면 후자는 밴드 사운드로 풍성하게 채웠다는 것이다.

    이기용 : 맞는 말이다. 스왈로우에서는 기본적으로 미니멀한 사운드를 지향하면서 소소한 감정들을 표현하고자 한다. 풍경에 대한 느낌들과 시간을 거슬러가는 느낌을 격하지 않게 표현하는 방법들을 생각한다. <몇 세기 전의 사람을 만나고>란 곡을 예로 들어보면 이렇다. 어떤 소울메이트를 상상해본다.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들만이 나와 가장 친밀한 영혼을 소유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우리나라 어디쯤에 나와 정말 잘 맞는 사람이 있는데 못 만나고 있을 수도 있다. 확장시켜서 몇 세기 전으로 올라가본다면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술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거기에 있을 수도 있다. 내 영혼이 잠시 사랑하는 사람 곁을 떠나 옛 친구를 만나고 다시 사랑하는 연인이 있는 현재의 침대로 돌아온다는 상상을 노래한 곡이다. 이런 이야기를 허클베리 핀에서는 잘 하지 않았다.

    이것을 1집에서는 미니멀한 형식을 갖춘 실험적인 시도로 이야기했다. <긴 방랑이 끝나는 아침>은 베이스와 드럼을 빼고 기타와 보컬로만 노래하고 <저녁의 룸펜>은 기타와 바이올린으로만 만들어본다거나 하는 시도들이 그것이다. <킹맨의 거짓말>, <Deja Vu>처럼 코드 두 개로만 만든 곡도 있고 <몇 가지 오해들>처럼 아예 코드 하나로 만든 곡도 있다. 그런데 2집은 바로 이러한 형식마저도 버려보면서 듣기에 무리 없이 만들고자 했다. 혼자 있을 때에 자연스레 골라 꺼내게 될 정도로 나도 자주 듣는 앨범인데, 그건 최근의 작업물이라서가 아니라 편안함이 있기 때문이다. 나도 햇볕을 원하고 웃음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런 모습들을 드러내고 싶었고, 당시 행복했던 내 인생도 담아내고자 했다. 그것이 음악 하는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다른 세계들의 만남에 대하여 고민한다.”

    나도원 : 물론 1집에도 <봄의 피로>, <저녁의 룸펜>, <Deja vu>처럼 좋은 트랙들이 있었지만 2집에서는 귀에 잘 들어오는 ‘송’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개인적으로도 <Three Season>, <내가 너를 따라 간다면>, <몇 세기 전의 사람을 만나고>, <밤은 낮으로>, <너는 웃지 않고 난 웃었어> 등 선호하는 트랙들이 많다. 제4회 한국대중음악상 싱글 부문에서도 너무 많은 곡들이 함께 거론되면서 표가 분산되어 오히려 손해를 보기도 했다. 보다 폭넓은 공감을 원했는가?

    이기용 : 의외였다. 기존의 내 감성을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배신감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솔직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니 어쩔 수 없다는 태도로 만든 앨범이었으니까. 그런데 나중에 결과나 평들을 보니 의아하기까지 했다. 썰렁하다고 욕먹는 사람이 “그래, 나 썰렁해”하면서 뭐라고 중얼중얼 편하게 만들었더니 그게 갑자기 터졌다고 해야 할까. (웃으며) 스왈로우 1집과 허클베리 핀 3집 [올랭피오의 별](2004)처럼 정말 최선을 다해 열심히 만든 앨범들은 냉대를 받더니 그냥 편하게 만든 앨범이 칭찬을 받고….

    보다 많은 사람들과의 공감이라는 측면은 내게는 상대적으로 비중이 작고, 그것을 목적으로 음악을 만들지 않는다. 물론 음반을 발표한다는 행위는 타인에게 보여주고 사랑을 받고 싶다는,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에서 나온다. 누구도 이런 욕망을 부정할 수 없다. 자기가 어렸을 때부터 음반을 꺼내고 녹음을 하며 음악을 들어온 행위가 무엇이겠는가. 기억이다. 존재에 대한 기억이다. 음악을 만드는 것은 기억되고 싶다는, 존재하고 싶다는, 나를 남기고 싶다는 근원적인 욕망에서 비롯된다. 나 역시 그렇다. 하지만 내 능력 밖의 것을 숙성되지 않은 채로 내보이려는 욕심은 부리지 않는다. 음악적인 훌륭함과 후짐의 차이는 극명하다. 극단적인 예로 비틀스의 훌륭한 곡들과 국민 로커라는 Y밴드의 노래의 차이는 명확하다.

    나도원 : 스왈로우와 허클베리 핀은 전반적으로 비관적이다. 스왈로우 2집도 밝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염세적이어서 밝아졌다기보다는 관조적인 되었다는 게 맞지 않나 싶다. 사람은 뭔가를 찾을 때 고통스럽지만, <밤은 낮으로>의 ‘쉬지 않고 지쳐가리’라는 말은 너무 가혹한 얘기가 아닌가?

    이기용 : 염세적이라는 말은 사실이다. 만화 『몬스터』에 ‘세상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걸리는 불치의 병, 그것은 바로 희망’이란 말이 나온다. 공감하는 얘기다. 나는 서로 다른 세계들의 만남에 대하여 깊이 고민한다. FTA와 같은 자본주의 세계의 흐름 한 편에는 소외된 사람들, 사회로부터 잉여인간으로 취급받는 사람들이 있다. FTA는 그들에게 가혹한 삶을 강요할 것이다. 노무현 정부 들어와 복지 등에서 좋아진 게 별로 없다. 물론 상대적으로 한나라당 보다야 지지하는 마음이 있지만 복지 시스템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으면 지지할 수 없는 것이다. ‘뇌’가 있는 사회라면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는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배려와 고민이야말로 중요하다.

    반면 그들이 느끼는 절망감, 괴리감, 이질감, 배신감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있다. 길거리에서 휴지를 줍는 할머니의 세계와 미용에 몇 백 만원을 투자하는 사람들의 세계는, 같은 나라와 같은 도시, 같은 공간에 존재하면서도 완전히 다르다. 물론 사람의 사고체계는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래서 다르다는 이유로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좀 더 좋은 걸 기대하려면 역시 고민해야하지 않겠는가. 이 다른 세계들이 어떻게 만나며, 그 세계들의 작은 접점은 무엇일까 하는 문제는 영원한 화두이다. 그런 면에서는 염세적이다. ‘쉬지 않고 지쳐가리’라는 표현은 여기에서 나왔다. 앞에서 말한 것들에도 불구하고 쉬지 않고 지쳐가면서, 내가 소진이 되어가면서라도 계속 그 쪽으로 가야한다는 얘기다. <밤은 낮으로>의 가사 역시 다른 세계들의 공존과 만남에 대한 얘기다. ‘밤은 낮으로, 낮은 밤으로….’ 가사 쓰면서 여러 의미를 담는다. 예를 들면 ‘언젠가 너희도 쓴맛을 봐야할 텐데’ 하는 얘기도 있고, 반대편에게는 ‘하다못해 죽음이라는 마지막 희망도 있습니다’고 하는 얘기도 있다. 죽음이 마지막 희망이 되는 사람들도 있다. 겪어보지 않고선 그 세계로 들어갈 수 없다.

    나도원 : 훌륭한 작사가라는 칭호를 받고 있다. 내용과 형식에서 은유와 파격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스왈로우의 <킹맨의 거짓말>, <Deja vu>의 내용적 은유, 그리고 <저녁의 룸펜>과 허클베리 핀의 <불안한 영혼>의 형식적 파격 등이 그것이다. ‘머저리’나 ‘머리야’ 같은 말이 가사로 쓰이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기용 : 사람이 만든 조직은 또 하나의 생명체가 되고 환상의 비전을 필요로 한다. 어떤 조직이든 그 방향을 좌우하는 사람, 즉 ‘킹맨’은 거짓말을 하게 되어있다는 얘기가 <킹맨의 거짓말>이다. 또 사회로부터 잉여인간이 된 이들의 세계에는 더 나아지리라는 기대와 희망도 없이 오로지 사라지고 잊혀져가는 삶이 있을 뿐인데, 그들이 자신의 얘기를 하게 된다는 가정을 해볼 수는 있다. 역사적으로 스파르타쿠스를 비롯해 국내외에 많은 선례들이 있지만, 모두 실패했다. 어디에서 본 것 같고, 있어왔고, 또 언젠가 일어날 수는 있지만 최종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곡이 ‘기시감’ 즉 <Deja vu>다. 그리고 사람이 염세적이 되다보면 자살에까지 이르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나도 거기에까지 생각이 가봤던 사람이라 잘 알고 있다. <불안한 영혼>의 ‘머리야’는 자신의 모습이 끝없이 혐오스러워지면서 이러한 환경에서 왜 살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게 되어 이대로 가면 죽어버릴 것 같아진 사람의 처절한 외침이다.

    하지만 굳이 내 가사를 주의 깊게 보거나 가사에 감동받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만들어놓은 세계와 음악을 듣는 사람의 세계가 만난다면 좋은 일이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불만은 없다. 내가 취한 하나의 방식과 스타일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나는 음악 하는 사람이지 시를 쓰는 사람은 아니다. 덧붙이자면 노랫말의 영역이 너무나 협소하다. 영화만 하더라도 살인부터 온갖 변태적인 소재들까지 되는데, 음악에서는 시적으로 누군가를 죽인다거나 뭔가를 불태운다거나 등등의 어떠한 상상력이 좀처럼 허용되지 않는다. 편협하고 후지다. 가사의 영역을 확대해야 한다.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그 방법이다.


    “자기 세계에 갇혀 다른 세계를 보지 못하는 것은 후진 사고방식이다”

    나도원 : 증오와 분노는 경멸과 냉소보다 뜨겁다. 당신의 음악은 그 사이 쯤에 자리하고 있다. 이 비관적인 현실 속에서 추구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기용 : 좀 더 나은 표현을 위해 늘 고민하면서 앞으로 성장해가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을 뿐이다. 음악적으로도 그렇다. 가사와 음악 스타일에 대하여 고민하면서 변화해가는 나의 느낌들을 표현하고 싶다. 현실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는 민중음악인들의 태도와 작업을 존중하기 때문에 그분들께서도 음악적 스타일에 대해 고민해주셨으면 한다. 음악인에게는 당연한 것이다. 음악은 먼저 음악적인 매력이 있어야 한다. 나도 마흔이나 쉰이 넘어서도 음악을 한다면 계속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나도원 : <어디에도 없는 곳>은 처음부터 한대수 선생을 의식한 곡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앨범의 흐름 속에서 다소 튀는 면도 없지 않다. 한대수 선생과 이기용 사이에 어떤 고리가 있다고 보는가?

    이기용 : 잠에서 깨어 기타를 들고 노래를 만들면서 바로 멜로디가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한대수 선생을 떠올렸다. 당시엔 일면식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찾아뵙고 부탁을 드렸다. 어제도 한대수 선생을 뵈었는데 그 자리에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음악 선배도 함께 있었다. 음악을 계속하는 것을 매우 힘들어하는 그 선배에게 한대수 선생이 “당신은 계속해야 한다. 음악을 하고 고민을 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며 질타 아닌 질타를 계속하더라. 한대수 선생은 나이가 들었어도 좋은 음악의 핵심과 음악에의 열망, 그리고 그 노력과 품위와 깊이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분들이 많지 않다. 물론 내가 영향을 받고 존경하는, 나와 같은 싱어송라이터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가깝게 느낀다.

    나도원 : 오랫동안 소수 의견이었으나 이제 이기용을 한대수, 김민기, 정태춘을 잇는 중요한 음악창작자로 보는 시각이 동의를 얻어가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기용 : 그런 말을 듣기 훨씬 전부터 존경해왔던 분들이다. 음악과 세계 그리고 그 사이의 나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 즉 핵심적인 부분에 있어서 본받을 것이 많은 분들이다. 그리고 그것이, 김민기 선생은 중단했지만, 한대수 선생과 정태춘 선생을 음악인으로 끝까지 살아있게 한 에너지라고 생각한다. 내가 존경하는 세 분의 이름 뒤에 내 이름이 이어지면서 계보를 잇는다고 하니까 기분이 묘해지는 일이다. 과연 벌써 그런 말을 들어도 되는지 어색하기도 하다. 물론 내가 ‘에릭 클랩튼’에게서 전혀 매력을 못 느끼듯이 경력이 많다고 모두 존경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내가 9집까지 좋은 앨범을 내다가 후진 10집을 만든다면 남들의 욕을 받아들이겠다는 자세를 갖고 있다. 그리고 그 분들이 이러한 자세에 영향을 주었다.

    시대적인 상황과 의미에 있어서도 그렇다. 우리가 지금 누구 덕분에 마음대로 노래를 할 수 있는가. 정태춘 선생의 음반사전심의철폐투쟁 때문이며, 이것은 정말 모두가 알고 기억해야할 부분이다. 그러나 음악으로 꼭 투쟁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음악의 어떤 기준이 될 필요는 없다. 한대수 선생이 투쟁하면서 음악하신 분은 아니다. 독재정권 시대에 월북 작가들의 작품들을 모두 금서로 해버린 적이 있는데, 이 얼마나 촌스러운 방식의 정치인가. 그렇듯이 80년대에 운동권에서 미국 팝 음악에 대해 취했던 태도도 세련된 방식은 아니었다. 음악을 대하는 것에서도 다른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결국 그 시대에서 한대수, 김민기, 정태춘 선생 모두 최선을 다했고, 그들 모두가 존경을 받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분들이다.

    나도원 : 작가주의 뮤지션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무거움과 작가주의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면서 이기용에 대한 평단의 지지에 거부감을 표하는 이들도 있다.

    이기용 :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주리라는 믿음이 있다. 만약 후진 앨범을 낸다면 그 때 욕해주기 바란다. 지금까지는 그렇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만약 누가 저 친구는 뭐가 저렇게 진지하고 비판적이며 시니컬한가, 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나와 다른 세계를 살았기 때문이다. 다르다고 얘기할 수는 있지만 후지다고 할 수는 없다. 나는 힙합 음악인들을 비방하지 않는다. 다르다고 비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타령 하는 노래들을 비난하는 것도 아니다. 사랑노래에도 격이 있을 뿐이다. 간혹 어떤 이는 나를 엄숙주의자라고 말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소외 속에서 살면서 그 비애를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자기 몸집보다 몇 배나 커다란 짐을 끌고 가는 할아버지를 보면서 동정심을 느낄 수 없다. 자기 세계에 갇혀 다른 세계를 보지 못하는 것은 후진 사고방식이다.

    나도원 : 기본적으로 밴드 뮤지션임에도 본인만 부각시키는 것에 대한 부담은 없는가?

    이기용 : 부담이 있다. 음악하기가 전반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밴드는 더욱 어려운 선택이다. 그럼에도 밴드를 하고 있는데, 나만 고생하는 게 아니라 허클베리 핀의 멤버들이 8-9년 동안 함께 고생해왔다. 내가 작사·작곡을 다 하고 편곡도 대부분 맡고 있지만 다른 멤버들의 스타일이 모두 묻어나와 음악이 된다. 함께 한 사람이 달랐다면 음악도 달라졌을 것이다. 나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들이 서운해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멤버들에게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지금 내 음악이 어디에 있겠는가. 허클베리 핀이라는 이름으로 갈 때까지 그들과 함께 할 것이다. 또한 밴드가 음악을 하는 데에 있어서 얼마나 멋있는 형태인지를 언젠가는 알게 되리라 생각한다. 역시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해결되리라 본다.

    2006 광명음악밸리축제


    “열정을 갖고 하되 아주 차갑게, 내 몸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그만큼의 세기로”

    나도원 : 허클베리 핀의 <죽이다>, <보도블록>, <사막>과 스왈로우의 <Deja vu> 등 혁명을 은유하는 곡들을 만들어왔다. 하지만 과격한 이미지를 탈피하고 싶어 했던 것으로 안다. 변한 게 아니라 굳이 내보이지 않으려 했던 것 같다. 정치적인 이미지를 과하게 씌우는 건 오히려 음악인에게 해가 된다고 보는데, 그러한 이유도 있었는가?

    이기용 :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정치적인 이야기를 음악에 많이 담아오긴 했으나 선동하지는 않았다. 내 스타일일 뿐이다. 단지 내 느낌과 생각을 음악에 담아내려는 사람일 뿐이다. 진보라는 것이 무엇인가. 상식이다. 상식적인 세상이 되는 것이 진보다. 상식적이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는 세상이 이상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자연스럽게 표현했을 뿐인데 마치 내가 급진적인 혁명주의자마냥 되는 것은 음악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도원 : 음악으로만 말하는 사람이라지만 사회당원이고, 뮤지션에게 열악한 조건이었음에도 지난 1월 19일 ‘시사저널 살리기 거리문화제’에도 참가했다. 이러한 활동은 시민으로서의 예의인가?

    이기용 : 앞에서 말한 부분이 있다고 해서 그게 두려워 피한다는 것도 우습지 않겠나. 시사저널 문제는 노조 집행부와 시사모 사람들이 형사고발을 당한 상태이고 원만한 합의와 복직이 이루어지기에는 전망이 비관적이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에 참여를 했고, MR을 틀어놓고 하는 공연임에도 기꺼이 응했다. 4월 20일, 시사저널 파업 100일째를 맞아 서울역에서 열리는 행사에도 참여한다.

    나도원 : 샤 레이블(Sha Label)을 운영하고 있다. 음악의 독자성을 지킬 수 있는 인디레이블이기도 하지만, 기성 시스템으로부터 거부당한 상황에서의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기용 : 세상이 ‘What a wonderful world’는 아니다. 그래서 안고 가야할 부분들이 있다. 레이블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우리 음반을 아무도 내주지 않아서였다. 아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 우리끼리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레이블을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다시 말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만들었고 홍보 면에도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그런 부분들을 상쇄시키고 남을 만한 것들이 있었고 우리 음악의 독자성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동안 레이블을 운영하며 레코딩 기술, 운영의 노하우와 능률, 그리고 약간의 자신감 등을 얻었다. 여러 가지 부당함도 잘 알기 때문에 나는 그렇지 않게 잘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허클베리 핀 4집 다음에는 스왈로우가 아닌 신인 싱어송라이터 뮤지션의 앨범을 낼 계획이다. 이름을 걸고 제작하게 되니만큼 잘 만들어야 할 것이다.

    나도원 : 음악에 발목 잡혔다고 한 적이 있다. 무엇이 현재까지 오게 하였으며, 앞으로 어떻게 음악을 해나갈 생각인가?

    이기용 : 사춘기인 중학교 2학년 때 아무도 없는 집에 멍하니 누워 뭘 하고 싶은지를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 날 세 개의 답이 나왔다. 하나가 음악, 또 하나는 글, 마지막 하나는 지금껏 한번도 입 밖에 내지 않은 무엇이다. 지금도 돈과 무관하게 하고 싶을 것을 하라면 그 세 가지다. 현재는 그 중 하나만 하고 있지만 아마 나중에는 다른 두 가지도 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상한 일이다. 의식적이 아니었는데도 음악을 하게 되었고, 이제 다른 곳으로 갈 수 없을 정도로 발목이 잡혀있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음악적인 욕망과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 사이에 내가 있다. 그 속에서 성장해갈 뿐이다. 사람은 변화해간다. 만약 세포 하나를 떼어내어 그 세포가 죽는다고 해도 내가 죽는 것은 아니듯이 말이다. 산책을 많이 하고 홀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덜 후회스러운 삶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그렇게 살면서 좋은 음악을 하고 싶다. 내게는 좋은 음악에 대한 몇 가지 기준들이 있다. 열정을 갖고 하되 아주 차갑게, 내 몸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그만큼의 세기로만 표현한다는 원칙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또 내 몸이 움직이지 않으면, 내가 반응하지 않으면 노래를 만들지 않는다는 것은 음악인의 기본적인 자세여야 한다. 이것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20대에서 30대 초반의 결과물이 자신의 베스트가 되어버리고 계속 내리막길을 걷는다면 치욕스러울 것 같다. 그렇지 않은 음악인이 되고 싶다.

    스왈로우


    ◆ 이기용
    1997년, 허클베리 핀 결성
    1998년, 허클베리 핀 1집 [18일의 수요일] 발표
    2000년, ‘섬’(김기덕 감독) OST 참여, 허클베리 핀의 명곡 <사막> 수록
    2001년, 허클베리 핀 2집 [나를 닮은 사내] 발표
    2004년, 샤(Sha) 레이블 설립
    2004년, 스왈로우 1집 [Sun Insane], 허클베리 핀 3집 [올랭피오의 별] 발표
    2005년, 제2회 한국대중음악상 ‘특별상’ 수상
    2005년, 스왈로우 2집 [Aresco] 발표
    2006년, 허클베리 핀 싱글 [Huckleberry Finn] 발표
    2007년, 제4회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앨범’, ‘올해의 모던 록 앨범’ 수상

    스왈로우 [sun insane]

    스왈로우 [aresco]

    이기용 “나도 햇볕을 원하고 웃음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나도원 : 어떻게 하루를 보내는가? 이기용 : 새벽 3-4시에 잠자리에 들어 오전 10시나 10시 30분 정도에 일어나 씻고, 책을 좀 보다가 오후 1-2시 사...

  10. ♣ Hollow Jan
    임환택(보컬) 이승민(기타) 이광재(기타) 정동진(베이스) 박상철(드럼)

    ※ 할로우 잰은 2007년 4월 14일 (토) 서울 SSAM에서 바세린과 조인트 공연을 한다.
    ※ 할로우 잰의 [Rough Draft in Progress]가 4월에 일본 전역에서 발매될 예정이다.


    “전에 했던 음악들 모두가 지금 할로우 잰까지 오게 된 과정이다.”

    나도원 : 지난 3월 1일의 단독공연을 매우 감동적으로 보았다. 그 때 인상적이었던 것 중 하나가 관객층의 구성이다. 무대 앞에서 같이 즐기는 사람들과 뒤에서 앉아서 보는 약간 연배가 있는 분들까지 다양한 관객들이 있었다.
    임환택 : 개인적으로는 관객이 많든 적든 간에 밴드가 보여줄 수 있는 건 무대에서 다 보여주고 싶은 게 내 욕심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이 한 명이든 백 명이든 내가 이런 음악에 이런 모션을 취하면서 이 부분에선 이렇게 해줘야 우리 음악이 좀 더 가슴에 와 닿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공연을 한다.

    나도원 : 옛날부터 공연을 할 때마다 와주던 사람들뿐 아니라 최근에 새로운 팬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걸 느끼는가?
    임환택 : 할로우 잰 이전에 다른 밴드 할 때부터 오셨던 분들이 밴드를 바꾸고 나서도 지금까지 계속 보러 와주는 경우도 있고, 새로 만나는 분들도 있고 그렇다.

    나도원 : 할로우 잰의 공연을 보니 클럽에 다니면서 공연을 즐기는 팬들과 라이브보다는 주로 음반으로 감상을 하는 사람들이 섞여있는 것 같았다. 그게 할로우 잰의 장점이 아닌가 싶다.
    임환택 : 우리 음악 성향 상 공연을 보면서 움직이거나 액션을 하는 건 솔직히 좀 무리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가만히 감상하는 것도 좋은 것 같다. 무대 위에서 그렇게 감상하시는 분들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더 감동을 받을 때가 있다.

    나도원 : 그날 49몰핀스(49Morphines)도 함께 무대에 섰는데 지금 49몰핀스의 보컬이 군대에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보컬 없이 하는 것도 독특하고 괜찮았다.
    임환택 : 그래서 지금 모든 밴드들이 49몰핀스에게 보컬을 없애버려라, 이런 식으로 얘기하고 있다. (웃음) 그 친구들 얘기를 들어보면 항상 보컬이 공연 날짜 일주일 전에 휴가를 나왔다가 복귀해서 계속 보컬 없이 공연을 하고 있다고 한다.

    나도원 : 음반을 낸 스크리모 팀은 49 몰핀스하고 할로우 잰 두 팀인데 특별한 교류가 있는가?
    임환택 : 원래는 함께 스플릿 앨범을 내기로 약속을 했었다. 근데 계속 미루다 보니 좀 늦어지고 있는데 언젠가는 나오리라 본다. 같이 스플릿 앨범을 내기로 약속을 하고 지금 녹음까지 다 해놓은 상태인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계속 늦어지고 있다.

    나도원 : 그 이유란 건 무엇인가?
    임환택 : 스플릿을 49몰핀스랑 우리 두 팀만 내는 게 아니라 미국과 일본 쪽 밴드들도 같이 하기로 했었는데 일본 쪽이 무산됐고, 그래서 유럽 쪽 밴드랑 하기로 했는데 그마저도 무산이 됐다. 그렇게 자꾸 미뤄지고 늦어지면서 쓰리웨이(3 Way)로 갈지 포웨이(4 Way)로 갈지 제대로 정하지 못하고, 그러다 보니까 밴드들도 지쳐버리고 그걸 추진하는 사람들도 좀 많이 지쳐있는 상태인 것 같다.

    나도원 : 할로우 잰이 보통 ‘한국 최초의 스크리모 밴드’로 불리지만 사실 49몰핀스가 정규 앨범에 준하는 EP를 먼저 발표했다.
    임환택 : 그런 호칭은 그냥 사람들이 만들어주는 것 같다. 49몰핀스가 우리보다 먼저 했던 건 분명한데 무슨 이유에서 우리를 그렇게 불러주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음악도 그냥 좋게 받아들여주는 분들이 많으면 그냥 좋은가보다 하면서 넘어가고, 우리 음악이 싫다고 하는 분들에게도 굳이 붙잡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다. 자기가 듣고 좋으면 그만인 것 아닌가.

    나도원 : 공연장에서 조민영 씨(바세린)와 임한묵 씨(녹다운) 등을 보았고, 세임올드스토리(Same Old Story)의 멤버들도 봤다. 다들 음악적인 교류가 있는 관계인가?
    임환택 : 다 친하고 다 아는 사람이고 하니까 공연 보러 오고 누가 단독 공연 한다 그러면 가서 한 번 보고 그러는 거지 음악적으로 특별한 교류 같은 건 없다. 그냥 다 친분으로 만나는 사이다.

    나도원 : 보통 록 밴드들이 공연을 할 때 무대 사이드에 서주는 문화가 있다. 그건 서포트의 의미도 있는데 할로우 잰 공연에는 다른 팀들의 공연에 비해 그런 인원이 좀 적어 의아했다.
    임환택 : 외국 하드코어 공연 보면 진짜 무대랑 관객의 선이 거의 없다. 우리는 하나다, 거의 이런 분위기니까. 그런데 거기에서 우리의 음악적인 장르의 한계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스크리모가 어떻게 보면 하드코어이지만,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따라서 하드코어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에, 하드코어나 메탈코어 공연에서처럼 무대 옆에 서주어야 한다는 생각들이 별로 없는 것 같다.
    (※ 인터뷰 후 김윤중 대표는 도프 엔터테인먼트 소속 밴드들의 공연에서는 뮤지션과 관객의 거리감을 줄 수도 있다고 판단하여 가급적 동료 뮤지션들의 무대 서포트 자제를 요청한다고 덧붙였다.)

    나도원 : 공연할 때 임환택 씨의 모션은 정말 인상적이고 독보적이다. 음악에 몰입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데 그런 모션은 어떻게 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임환택 : 내가 이전에 몇 밴드를 계속 해왔는데 전에 했던 음악들 모두 지금 할로우 잰까지 오게 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전에 비욘 디 에이지(Beyond The Age)나 소울테이크(Soultake)를 하던 당시에도 내가 진짜 원하는 게 이런 거구나, 라고 생각해서 그 밴드에서 음악을 했었고. 그런데 소울테이크 이후에 할로우 잰을 하기까지 공백기가 좀 길었다. 나름대로도 하고 싶었던 음악이 그때부터 있었고, 밴드를 결성하게 되면 꼭 이런 식으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그게 지금 할로우 잰이라는 밴드가 된 것이다. 가사도 예전에 썼던 것과는 많이 다르게 쓰고 있는데 가사를 쓰면서 공연할 때 이 가사에는 이렇게 부르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머리 속에 그려둔다. 그리고 무대 위에서 이런 모습들을 통해서 앨범으로 듣는 것과 라이브로 보는 것과의 차이를 두고 싶은 마음도 있다. 남들은 뭐, 우네, 질질 짜네, 창피하지 않느냐?, 타령춤 추냐?, 이런 식으로 많이 얘기들을 하는데 (웃음), 다 친한 사람들이 그러는 거니까 장난으로 받아들이고 남들이 놀려도 난 계속 이런 식으로 공연을 할 생각이다.

    서정민갑 : 그럼 그게 저절로 나오는 건가? 노래가 굉장히 긴데 이 부분에선 어떻게 하겠다, 이런 연습 같은 건 전혀 없는가?
    임환택 : 연습 같은 건 전혀 하지 않는다. 그냥 공연 올라갈 때 혼자서 생각을 좀 하고 드럼 치는 친구와 기도하고, 그러는 게 다다. 처음에는 무대에서 관객들을 보면 집중이 안 돼서 등을 돌리고 한 적도 있었고, 정말 집중이 안 될 때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눈을 감고 공연을 하기도 한다.

    나도원 : 공연할 때 향을 피우는 팀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데스메틀 밴드 마귀가 있었고, 일본의 엔비(Envy)도 향을 피우는 걸로 알고 있다. 할로우 잰도 공연을 할 때 향을 피우는데 거기엔 어떤 의미가 있나?
    임환택 : 어떤 의미라기보다는 예전에 나이아드(Naiad)라는 일본 밴드가 한국에서 공연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 친구들이 향을 피워놓고 공연을 하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 그걸 보고서 단순히 멋있으니까 우리도 따라해야지, 그런 건 아니었지만 기타 치는 이광재가 향 한 번 피워볼까?, 그렇게 얘기가 나와서 그렇게 공연을 하게 되었다. 맨 처음 향 피우면서 공연을 하는데 향냄새를 맡으니까 기분도 묘하고 집중도 더 잘 되는 것 같고, 우리 음악하고도 잘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후로도 계속 하게 됐다. 매번 공연 때마다 꼬박꼬박 향을 피우지는 않는데 뭔가 중요하다 싶을 땐 향을 피우고 공연을 한다.


    “우리에 맞춰서, 우리가 주가 되어 음악을 하자”

    나도원 : 옛날 얘기를 좀 해보겠다. 정동진 씨(bass)와 박상철 씨(drums)는 비욘 디 에이지에서부터 같이 활동을 한 걸로 알고 있다. 현재 할로우 잰의 멤버들은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가?
    임환택 : 내가 소울테이크를 나오고 나서 거의 한 1년 반 동안 공백기가 있었다. 그때 드럼 치는 상철이랑 동진이 형은 군대에 있었다. 둘이 군대에 있을 동안 나는 바깥에서 노래도 보내주고 하면서 제대하면 꼭 같이 하자, 난 이런 음악 하고 싶은데 어떠냐고 했더니 둘 다 좋다고 해서 밴드를 따로 안 만들고 둘을 기다리면서 기타를 구하기 시작했다. 그때가 유니온웨이(※ 한국의 대표적인 펑크/하드코어 공동체) 만들기 전이었는데 그쪽 친구들하고 어울리면서 만난 친구가 (이)광재였다. 광재랑 만나 얘기를 해보니까 생각하는 게 비슷했고 그래서 같이 하기로 했다. 그 한 달 후에 동진이 형이랑 상철이가 제대를 했다. 그렇게 멤버가 4명이 모였는데 기타를 한 명 더 구하자는 얘기가 나와서 광재가 아는 사람 중에 (이)승민을 데려왔다. 그 후에 2주 있다가 처음 합주를 하였다.

    나도원 : 그러면 임환택 씨만 군으로부터의 초대장을 받지 않은 것인가?
    임환택 : 아니다. 공익근무를 했다. 건강보험공단 본부에 있었다. 원래는 현역으로 들어갔었는데 훈련소에서 작업하다가 허리를 크게 다쳐 퇴소 조치를 받았고 다시 신체검사를 받은 후에 공익으로 가게 됐다.

    서정민갑 : 할로우 잰이란 이름은 언제 어떻게 만들었는가?
    임환택 : 우리가 결성하고서 한 3달 동안은 밴드 이름 없이 연습만 했다. 장난으로 합주실에 전화해서 임환택 밴드, 이광재 밴드, 이런 식으로 예약을 했었다. (웃음) 그러다가 데모 녹음한 게 (2004년) 2월쯤, 결성한지 4개월 후였는데 데모 녹음하기 전에 여러 가지 이름들을 생각하다가 할로우 잰으로 정하게 됐다. 그때 나왔던 이름들 중에 기억나는 건 할로우 픽스하고 할로우 잰 두개뿐이지만 그밖에도 많은 이름들이 있었다. 할로우(hollow)라는 단어가 음악하고도 잘 어울리는 것 같고 그래서 멤버들이 다수결로 정한 게 할로우 잰이었다.

    나도원 : 임환택 씨는 그동안 피쳐링을 많이 했다. 2003년에 바세린(Vassline)과 인터뷰를 했을 때 임환택 씨가 <Boredom In the Pressure>에 어떻게 참여하게 됐는지 물어보니 그냥 그 스튜디오에 있었을 뿐이다, 란 답을 들었던 게 기억난다.
    임환택 : 그때 소울테이크가 사운드 플랜트란 곳을 만들어서 다른 밴드들 녹음도 해주고 그랬다. 나는 믹서 만지고 하는 걸 배우고 싶어서 엔지니어 보던 형 옆에 붙어있었는데 바세린이 그때 그곳에서 녹음을 하고 있었다. 원래 그 노래는 바세린 EP에서 삼청의 (서)동혁이 형이 같이 불렀었고 그날 녹음할 때도 같이 해주기로 했는데 그 형이 안 와버린 거다. 난 졸려서 자고 있었는데 박진(바세린) 형이 노래나 한 번 해보라고 해서 한 다섯 번인가 노래 듣고서 같이 부르게 됐다.

    나도원 : 본인이 직접 음악을 하기 전엔 어떤 음악을 좋아했는가?
    임환택 : 본 조비(Bon Jovi) 좋아했었고 너바나(Nirvana) 뭐 이런 뻔한 음악들 좋아했었다.

    서정민갑 : 그럼 좋아했던 음악들을 혼자서 따라 부르고 연습하고 그랬나?
    임환택 : 그렇다.

    서정민갑 : 그 때도 홍대 쪽에 클럽 같은 곳에 다니면서 공연 보고 그랬었나?
    임환택 : 공연을 보러 다니진 않았다. 그냥 음악만 들었고 인디 밴드의 존재는 잘 몰랐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밴드를 시작할 즈음 [Our Nation] 1집이 나와서 그때 옐로우 키친(Yellow Kitchen)하고 크라잉 넛(Crying Nut)을 알게 됐다.

    나도원 : 그렇다면, 밴드 활동하면서 듣는 취향이 많이 변했다는 말인데….
    임환택 : 그렇다. 이것저것 듣다 보니까 좋아하는 음악과 장르도 생겼다. 그렇다고 옛날에 들었던 음악을 안 듣고 그런 건 아니다. 옛날에 들었던 걸 더 좋아한다. 가요도 좋아하고.

    나도원 : 환택 씨도 그렇고 다른 멤버들의 과거를 보면 예전에 했던 음악과 지금 하는 음악이 상당히 다르다. 어떤 계기 같은 것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임환택 : 나이하드가 제일 결정적이었고, 홉스폴(Hopesfall)하고 엔비한테도 영향을 많이 받았다. 멤버들이 거의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팀들이다. 근데 처음부터 이런 음악을 해야지, 하고 딱 정했던 건 아니다. 우리가 처음 밴드 시작했을 때 멤버들끼리 모여서 얘기를 많이 했는데, 이런 느낌에 이런 구성으로 음악을 만들자, 그렇게 얘기하면서 지금의 할로우 잰 음악 같은 게 나오게 된 것 같다.

    서정민갑 : 팀의 음악적인 방향에 대해서는 누가 주로 얘기를 하는 편인가?
    임환택 : 기타 치는 이광재가 많이 영향을 미친다. 거의 그 친구가 곡들의 뼈대를 만들어 온다. 일단 만들어 오면 멤버들이 거기서 곡을 아예 통으로 편집을 할 때도 있고, 그대로 갈 때도 있고 그렇다.

    나도원 : 오래전부터 국내외 밴드들은 곡을 만들 때 컴퓨터로 파일을 주고받으며 음악작업을 해오고 있다. 파일을 공유한 후에 각자 자기 파트 연습을 하고 거기에 살을 붙이는 식인데 할로우 잰도 그러한가?
    임환택 : 우리는 아날로그적이다. 디지털하고는 거리가 멀어 모여서 합주를 통해서만 곡을 만든다. MD 같은 걸로 녹음을 해서 들어보고는 이 부분은 구리네, 이런 얘기들이 있으면 다음 합주 때 바꾸든가 하면서 그런 방식으로 작업한다. 합주 때마다 좀 많이 바꿔가면서 틀을 잡아가는 스타일이다.

    서정민갑 : 합주는 얼마나 자주 하는가?
    임환택 : 처음 결성했을 때는 그래도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만나서 두세 시간 정도씩은 연습했지만, 지금은 모두 직장에 다니고 있어서 여의치가 않다. 솔직히 창피한 얘기지만 한 달에 한 번 할 때도 있고, 아예 못 할 때도 있다. 그래도 노래를 만들 때는 없는 시간 쪼개서 밤늦게 만나서라도 연습을 했는데, 요즘은 앨범 나온 지도 얼마 안 됐고, 또 멤버들 생활이 전부 다 과도기에 있는 상태여서 자주 만나기가 힘들다. 광재 같은 경우는 결혼을 해서 며칠 전에 아들을 낳았고, 베이스 치는 동진이 형도 결혼을 했다.

    나도원 : 2004년 [Hollow Jan demo]를 만들 때의 상황에 대한 얘기를 부탁한다.
    임환택 : 당시에 우리가 밴드를 만들었을 때 열심히 해보자, 이런 마음가짐이었다기보다는 알다시피 다들 그전에 이것저것 밴드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라 나름대로 회의감도 느끼고 한국에서 음악하기 힘들겠다는 생각을 다 했기 때문에 큰 욕심 없이 각자 직장 다니면서 주말에 모여서 노래도 만들고 시간 되면 공연도 하고 공연하는 것도 시간에 구애받지 말고 무조건 우리에 맞춰서, 우리가 주가 되어 음악을 하자, 라고 의견을 모았다. 그렇게 합주를 하고 노래를 만들다가 우리도 이제 데모를 만들어보자는 욕심이 생겼다. 판매할 목적이 아니라 그냥 우리끼리 들을, 우리끼리 소장할 목적으로 아는 사람을 통해 몰(M.O.L.)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하게 됐다.

    나도원 : 데모의 반응은 어땠는가?
    임환택 : 처음 데모를 만들 때는 팔 목적이 아니었는데 그때 마침 쌈사페가 있어서 우리도 이거 한 번 나가볼까라는 생각으로 ‘숨은고수’에 데모 음원으로 응모를 했다. 그리고 아는 사람이 그러지 말고 판매도 해보라고 해서 굳이 나쁠 건 없다는 생각에 공연을 하면서 판매도 했다. 소량의 데모를 갖고 다니면서 공연을 할 때마다 판매를 했는데 관객들이 좋게 봐주고 많이 사주었다.

    나도원 : 거기에 응모를 했다는 것은 처음 결성했을 때와는 달리 어떤 욕심 같은 것이 생겨서는 아니었는가?
    임환택 : 그냥 경험 삼아서였다. 재밌겠다 싶어서. 다른 밴드가 들으면 욕할지도 모르겠는데 참가하는데 의미를 두자는 식이었다.

    나도원 : 그럼 별 기대 같은 건 없었다는 것인가?
    임환택 : 솔직히 기대를 안 했다면 그건 거짓말일 거다. 붙으면 좋은 거고. 쌈사페에 나가게 되는데 그걸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우리는 진짜 붙을 줄도 몰랐고, 맨 마지막에 5팀에 뽑혔을 때 되게 좋았다.

    나도원 : 할로우 잰에겐 도움이 되었다고 보는가?
    임환택 : 그렇다. 상당히 많은 도움이 됐다. 그게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가 이렇게 정규 앨범을 낼 수 있게 해준 계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엔 우리가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앨범 내는 건 아니니까…”

    나도원 : 데모를 내고 다음 해에 싱글 [Hyacinthus Orientalis of Purple]을 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실 녹음상태라든지 그런 것들 때문에 긴가민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데모와 싱글을 발표하면서 음악적으로는 사실상 결판이 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이때 만들어진 음악적 방향성이 정규 앨범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본다.
    임환택 :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싱글하고 정규 앨범하고 비슷한 면도 있기는 하지만 다른 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도원 : 싱글에 실렸던 <Beside Oneself>는 라이브에서의 인기곡이다. 왜 정규앨범엔 싣지 않았는가? 다시 녹음을 해 정규앨범에 넣었으면 했는데 좀 아깝다는 생각도 있다.
    임환택 : 정규앨범을 만들기 전에 우리끼리 싱글에 있는 노래들은 넣지 말자고 얘기를 했다. 데모 같은 경우에는 말 그대로 데모니까 녹음상태도 열악하고 틀린 게 있어도 수정 안 하고 그대로 넣었기 때문에 정규앨범에 다시 넣었지만, 싱글 작업을 할 때에는 그래도 나름대로 어느 정도는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굳이 정규앨범에 넣을 필요를 못 느꼈다. 흡족하다는 건 아니고 그냥 손은 안 봐도 될 것 같아서……. 싱글 내놓고서 정규앨범에 다시 넣고 우려먹는 건 좀 그런 것 같았다. (웃음) 데모에 있는 곡들은 워낙 구려가지고 지금 손을 안 보면 어쩔 수 없이 나중에 가서도 좀 그럴 것 같아서 한 곡 빼고는 다 정규 앨범에 넣었다.

    나도원 : 싱글은 어떻게 만들게 되었는가?
    임환택 : 싱글은 BT레코드라는 곳에서 냈다. BT레코드의 사장님도 다른 밴드에서 음악활동을 하던 분이었는데 우리를 좋게 봐주셔가지고 한 번 내보지 않겠느냐 제의를 해주었다. 그 때는 우리가 곡수도 그렇게 많지 않았던 상태였기 때문에 정규앨범은 좀 무리였고, 그래서 데모에 있었던 라이브 트랙 둘하고 신곡 하나를 해서 싱글로 내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서정민갑 : 싱글에 대한 반응은 어땠나? 얼마 정도 나갔는지…….
    임환택 : 이게 처음에 500장을 찍었는데 지금은 다 나갔다.

    김학선 : 재발매 계획은 없는가?
    임환택 : 없다. 맨 처음부터 BT레코드하고 딱 500장만 찍고 더 이상 내지 말자고 얘기를 했었기 때문에 재발매 계획은 없다. 잘 찾아보면 어디에서 굴러다니고 있지 않을까? (웃음) 나도 케이스가 다 깨져서 새로 하나 갖고 싶다. 데모 같은 경우에는 우리 멤버 가운데 갖고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솔직히 그게 좀 허접하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 나름대로는 의미가 있는 건데 그걸 갖고 있는 멤버가 아무도 없다.

    나도원 : 한국에서 하드코어 계열 하면 GMC 레이블을 먼저 생각하게 되는데 GMC 쪽과는 얘기가 없었는가?
    임환택 : 지금은 도프(엔터테인먼트)에서 앨범을 냈지만 도프와 계약하기 전에 GMC 쪽에서 먼저 컨택이 들어왔었다. 근데 레이블 선택은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진 거니까 멤버들과 의논을 거친 후에 최종선택은 도프로 하게 됐다.

    나도원 : 도프에선 할로우 잰을 어떤 이유로 선택하였는가?
    김윤중 : 당시에 기존에 있던 장르 말고 좀 드문 밴드를 찾고 있었다. 남들이 잘 안 하는 실험적인 음악을 하는. 물론 이 친구들 음악은 실험적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일반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는 많이 벗어난 음악을 하는 팀이라 생각했다. 그런 밴드를 찾고 있던 참에 할로우 잰이 생각났다. 쌈사페 때 할로우 잰을 처음 봤는데 그때는 사실 별로 안 좋아했다. 공연을 보면서 그 당시엔 속으로 ‘뭐 저런 놈들이 다 있나?’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새로운 밴드를 찾다가 할로우 잰 생각을 하게 됐고, 음악을 찾아 들어보니 정말 괜찮았다. 그러던 참에 유니온웨이 공연에서 라이브를 보고 반해서 할로우 잰은 무조건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원 : 그래서 어떻게 잡았는가?
    임환택 : 도프를 통해 직접적으로 컨택을 받은 건 아니었다. 다른 분을 통해서 일단 얘기를 듣고 멤버들끼리 상의를 했다.
    김윤중 : 그게 아마 박진 씨였을 거다. 박진 씨에게 얘기를 했더니 “어, 우리도 지금 할로우 잰이랑 하려고 하는데, 이러면 바세린한테 지장 있는데…” 하면서 (웃으며) 좀 빼길래 반 협박조로 얘기를 했더니 알겠다고, 소개시켜주겠다고 했다. 최종결정은 할로우 잰 멤버들이 할 테니 우리는 결정을 기다리자고 얘기를 했고, 할로우 잰이 최종적으로 도프를 선택했다. (※ 바세린은 GMC 레이블의 대표적인 밴드이다. 또한 바세린의 음반유통 등을 도프 엔터테인먼트가 담당하며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

    나도원 : 근래 도프 엔터테인먼트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할로우 잰부터 스트라이커스(The Strikers), 세임 올드 스토리(Same Old Story)까지 그동안 쌓아왔던 것들이 작년부터 좋은 앨범으로 쏟아지고 있다.
    김윤중: 공연을 많이 보러 다녀서일 것이다. 라이브를 직접 보러 다니는, 거의 유일한 레이블이다 보니 아무래도 현장에서의 관객들 반응이나 느낌 같은 걸 직접적으로 접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좋은 밴드들에 대한 컨택이 가능하고, 또 밴드들 입장에서도 직접 공연을 보러 와주는 레이블을 더 좋게 봐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비즈니스 면이 아닌 음악 팬이 하는 레이블이라는 게 선택을 받게 하지 않나 생각한다. 나는 비즈니스맨 이전에 음악매니아다.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할로우 잰과 계약을 할 때 멤버들이 거만했다. (좌중 웃음) 데모에 있는 곡도 넣을 수 없다, 우려먹기 싫다, 이래가면서. 그런데 다행히 멤버들이 먼저 깨달아서. (웃음) 아니, 상업적인 측면이 아니고 정말 좋은 곡들을 데모의 열악한 퀄러티로 남기긴 너무 아쉽지 않은가. 제대로 된 환경에서 녹음을 다시 할 수 있는 기회를 노렸던 건데 다행히 데모에 있던 곡들이 고스란히 앨범에 들어가게 되어 매우 흡족하다.

    나도원 : 그래서 도프와 계약을 맺고 2006년 말에 [Rough Draft in Progress]를 발표했다. 앨범을 내면서 어느 정도의 기대를 했는가?
    임환택 : 기대 반 근심 반이었다. 싱글 냈을 때는 좋아해주시던 분들이 드문드문 보였었는데 정규앨범을 낸 후에 별로 안 좋아해주면 어떡하나 걱정이 좀 들었었다. 근데 결국엔 우리가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앨범 내는 건 아니니까, 그런 식으로 위안을 삼게 됐다.

    나도원 : 어느 정도 마음을 비우려고 노력했다는 말로 들린다.
    임환택 : 그렇다. 좋다고 얘기해주는 분들이 있으면 감사하다고 얘기를 드리고, 안 좋았다고 얘기를 하는 분이 있어도 열 받거나 그런 건 없다.


    “인간적인 음악을 하고 싶다.”

    나도원 : 앨범을 낸지 3개월 정도 되었다. 프로모션 기간으로 보면 무척 짧긴 하지만 현재까지의 반응은 어떠한 것 같은가?
    임환택 : 우리가 앨범을 내고 나서 공연을 많이 하질 못해서 솔직히 반응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일단 우리도 시간 되면 모여서 연습하고 공연 준비를 해야 하는 것 때문에 다른 것에 신경을 쓸 여력이 별로 없다. 지금 공연 날짜를 잡아놓았다 해도 멤버들 직장 문제 때문에 공연을 못 하는 경우가 생길 수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 신경을 많이 쓴다. 공연을 앞두고도 항상 대타를 뒤에 준비해놓아야 하는 게 우리 밴드의 현실이다 보니 반응 같은 건 일단 제쳐두고 먼저 밴드 운영에 신경을 써야한다. 그래서 솔직히 반응은 잘 모르겠다. 팬 까페나 홈페이지에서 보는 게 거의 다다.

    나도원 : 보통 앨범에 대한 반응이라 함은 보통 세 가지를 말한다. 수용자 즉 대중의 반응과 매체의 평가, 그리고 음반의 판매량이다.
    임환택 : 개인적으로는 생각했던 것보다 좋게 써주시는 것 같다. 크게 기대를 하셨던 분들은 좀 실망한 것 같기도 하지만. 그리고 음반 판매는 잘 모른다.
    김윤중: 일단 싱글 판매고는 넘어섰기 때문에 가시적인 성과는 있는 것 같다.

    나도원 : 일본에서도 발매를 앞두고 있다.
    임환택 : 씨어리 앤 프랙티스(Theory & Practice Records)라는 레이블이 있는데 그쪽에서 우리 앨범을 좋게 들어줘서 일본 전국 발매가 이뤄지게 됐다.

    나도원 : 스트라이커스가 한국에서 판매한 앨범의 9배를 일본에서 팔았다고 들었다. 바꿔 얘기하면 일본에서 팔린 것의 1/9 수준으로 한국에서 앨범이 팔린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할로우 잰도 일본 발매를 앞두고 모종의 기대를 하고 있진 않은가? 물론 스트라이커스가 보다 대중적이긴 하지만.
    임환택 : (웃으며) 우리는 좀 힘들 것 같다.
    김윤중 : 씨어리 앤 프랙티스가 네이처 리빙(Nature Living)이 속해있는 레이블이다. 그 레이블의 유통을 3D System이라는 일본 유통계의 2위 업체가 맡고 있기 때문에 탄력은 많이 받을 것 같다. 앨범 뿌리는 거라든지 홍보력 같은 건 괜찮을 것 같다. 1위가 JVC Victor고 2위가 3D이기 때문에 밴드에게 큰 기회가 온 게 아닌가 싶다.
    임환택 : 정말인가? 난 몰랐다. (웃음)

    나도원 : 정규앨범을 몰 스튜디오에서 작업하여 만들었다. 몰 스튜디오의 사운드와 밴드의 지향이 잘 부응했다고 보는가?
    임환택 : 아무래도 엔지니어를 맡고 있는 (조)상현이 형이 이쪽 음악을 좋아하시고 최대한 밴드가 원하는 사운드를 뽑아내주니까 싱글 때에도 맘에 들었었고, 이번 앨범 경우엔 뭐랄까 싱글 사운드가 좀 날카로웠다면 이번엔 정리되고 다듬어진 부드러운 느낌의 소리로 잘 나온 것 같다. 앨범 작업하면서 멤버들끼리도 거친 이미지보다는 좀 부드러운 사운드를 원했었는데 나름대로 잘 나왔다고 생각한다. 앨범 믹싱을 하면서도 멤버들의 직장 문제로 모두가 함께 사운드 얘기를 한 게 아니라 시간 되는 사람이 그때그때 가서 관여를 하니까 도저히 정리가 안 되기도 했다. 나중엔 조사장님이 멤버들끼리 의견수렴을 한 후에 한 명만 와서 얘기를 하라고 해서 조사장님하고 나하고 믹싱을 했다. 근데 믹싱한 결과물을 듣고 멤버들이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싫어하더라. (웃음) 그래서 멤버들 반응은 좋다, 싫다, 반반이다.

    나도원 : 앨범커버들이 인상적이다. 동일인물이 작업해온 것으로 알고 있다. 소개를 부탁한다.
    임환택 : 기타 치는 이승민의 후배의 친구인가 그렇다. 데모 만들 때 그분 그림을 처음 봤다. 느낌이 좋았다. 또 멤버들이 당시에 그냥 사진을 찍은 게 아니라 직접 손으로 그린 아날로그 느낌의 그림이 좋겠다고 얘기를 했기 때문에 그런 게 잘 맞아서 함께 하게 됐다. 이름이 정규혁 씨이고 닉네임이 싸나인(Ssanai)일 것이다. 그분이 그림을 그려주고 우리한테 보내준 것들을 보며 컨택을 했다. 우리 정규앨범 아트웍 작업을 하면서 무슨 대기업에 들어갔다고 들었다. 팬타포트 페스티벌의 그 별모양 디자인도 그분이 했고, 넬(Nell) 뮤직비디오 무대 세팅도 그분이 했다고 한다. 우리는 운이 좋았다. 우리랑 작업할 때까지만 해도 안 그랬었는데 시간이 지나다 보니 이제 몸값이 올라서 다음 앨범 때는 안 그려주실 것 같다. (웃음) 이번에는 뭔가 해드려야겠다 해서 페이도 드리고 했는데, 전에는 그냥 공짜로 해주셨다. 또 이번에 아트웍 하면서 일관성 있는 컨셉을 원했다. 그래서 믹싱도 안 끝난 노래들의 음원과 가사를 전달했고 그 분이 듣고서 느끼신 걸 그림으로 옮겨달라고 요청했는데, 정말 열심히 작업해주셨다. 우린 맨 처음에 몰랐는데 그 그림들이 다 컨셉이 있었다. 다운증후군 걸린 어린이들의 낙서세계라고 한다.

    나도원 : 앨범커버아트와 부클릿은 다 좋았는데 (웃으며) 왜 가사를 안 넣어서 팬들의 원성을 사고 있는가?
    임환택 : 가사를 넣으려면 페이지가 늘어나고, 페이지가 늘어나면 돈이 드니까. (웃음) 농담이고, 그냥 전부터 가사를 안 넣다 보니까 별 생각 없이 이번에도 안 넣었다.

    나도원 : 요즘 앨범에 여러 뮤지션들이 피처링하여 참여하는 예가 많다. 이것은 어느 정도는 프로모션/마켓딩 등을 위한 뮤직 비지니스적인 의도도 있다. 할로우 잰의 이번 앨범에도 조민영 씨(바세린)나 신우석 씨(바세린), 옥요한 씨(피아) 등 여러 뮤지션이 참여했다. 할로우 잰의 경우도 그와 같은 어떤 의도와 개인적인 친분이 함께 작용한 것은 아닌가?
    임환택 : 그냥 개인적인 친분의 차원이 더 크다. 바세린은 워낙 친한 형들이니까 우리 앨범 녹음하는데 노래나 하나 하지, 이러면서 하게 된 거였고, 요한이 형은 쌈사페 때 우리를 되게 좋게 봐줘서 참여를 해줬다.

    나도원 : 레이첼스(Rachel's)의 <Water From The Same Source>를 커버하게 된 아이디어는 어떻게 얻었는가?
    임환택 : 싱글을 녹음할 때였다. 새벽까지 <Hyacinthus Orientalis Of Purple>을 만들다가 다 같이 잤는데, 아침에 동민이 형이 일어나서 레이첼스의 음악을 틀었다. 동민이 형이 이런 류의 음악을 되게 많이 듣는 편이라서 레이첼스의 [Stems/Layers] 앨범을 틀어놨는데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비몽사몽할 때 나왔던 노래가 <Water From The Same Source>였다. 노래가 나올 때 다 앉아서 아무 소리 안 하고 집중하다가 노래가 끝나니까 다 좋다고 하면서 이 노래 누구 거냐고 물어보고는 모두 그 앨범을 샀다. 그랬다가 이번 앨범을 준비하면서 레이첼스 노래 커버하는 게 어떠냐는 의견이 있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제일 아쉽게 녹음된 게 이 곡이다. 멤버들의 의견도 그렇게 많이 반영되지 못했고, 원곡에 충실하면서도 우리 스타일을 많이 입히려고 했는데 생각만큼 잘 못한 거 같다. 멤버들이 많이 아쉬워하는 곡이다.

    나도원 : 할로우 잰은 즉흥적이고 무드 중심의 음악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곡이란 것은 치밀한 계획을 통하여 만들어지고 레코딩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이러한 구성은 처음부터 어떠한 의도성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임환택 : 이 부분은 일단 뼈대를 만들어 갖고 오는 사람이 얘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야 가사를 쓰고 이 멜로디에 이 단어가 들어갔으면 좋겠고 그런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니까 음악적인 면보다는 가사에 대해서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도원 : 하드코어의 영향뿐만 아니라 포스트 록이나 익스페리멘틀의 영향도 많이 느껴진다. 그런 포스트 록 밴드들의 음악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건지 아니면 한 단계를 거쳐, 이를테면 엔비 같은 팀처럼 그런 음악을 소화한 밴드들 통하여 영향을 받는 건지 궁금하다.
    임환택 : 멤버들이 하드코어를 한다고 해서 전부 하드코어만 듣는 건 아니다. 멤버들이 좋아하는 음악도 다 다르고. 단지 할로우 잰이라는 밴드를 하면서 공통적인 부분을 중심에 놓고 거기에 자기가 좋아하는 장르를 붙여보는 것이다. 아, 뭔가 중요한 얘기를 할 게 있었는데 지금 까먹어버렸다. (웃음)

    나도원 : 할로우 잰이 음악을 통해서 지향하는 게 있다면 어떤 것인가?
    임환택 : 인간적인 음악을 하고 싶다. 인간적인 음악을 하고 싶은데 우리 음악이 진짜 음악이라고 불릴 수 있을 만큼 될지 안 될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멤버들끼리 연습하면서도 아쉬운 게 되게 많았으니까.

    나도원 : 그러면 다음 앨범을 낼 때 더 해보고 싶은 것들이 있다면?
    임환택 : 뭐라고 콕 찍어서 말은 못 하겠지만, 아마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은 하고 있다. 기본 스타일은 유지하지만 형식 같은 게 바뀔 수 있는 거고, 확답은 못 하겠다. 앨범을 내고나서 신곡을 만들거나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확실히 얘기는 못 하겠지만, 멤버들끼리 오고간 얘기들 중에서는 바꿔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하는 얘기들도 있었다.


    “그들을 대변할 수 있다는 게 좋다”

    나도원 : 이번 앨범에 할로우 잰의 시작에서 지금까지의 과정이 응축되어 있고, 또 첫 앨범만이 가질 수 있는 힘과 매력을 담았기 때문에 자칫 이를 능가하는 작품이 안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우도 있다.
    임환택 : 이번 앨범에 대해 너무 좋게 얘기를 해줘서 부담스럽다. (웃음) 아직 신곡이 하나도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뭐라 얘기는 못하지만 좋은 음악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항상 하고 있다. 처음엔 우리끼리 놀려고 만든 거지만, 이제 앨범도 낸 이상 우리끼리만 좋아하는 앨범을 내서는 안 될 거 같다. 멤버들도 여기 있었으면 지금 내 얘기에 반대는 안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정말 음반 낼 필요가 없지 않은가.

    나도원 : 할로우 잰을 들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하며 감동을 받는다. 공감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자신만 느끼고 있는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도 같이 느끼고 있음을 발견하는 경우,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잘 모르지만 실은 이미 느끼고 있었음을 발견하는 경우이다. 할로우 잰은 이런 두 가지 경우에 모두 해당된다고 생각을 하는데 여기에 임환택 씨의 보컬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서정민갑 : 굉장히 절절하게 들리는 게 있다. 스스로 노래 부르면서 그런 감정을 얼마만큼 느끼는지 궁금한 부분이기도 하다.
    임환택 : 그런 감정은 공연 때마다 다 다른 것 같다. 똑같은 가사에 똑같은 연주에 똑같은 소리지만 어떤 날은 도저히 내 감정을 못 살릴 때가 있다. 그런 날은 솔직히 공연하기 싫다는 느낌을 많이 받기도 하는데 그럴 때 공연 보러 온 분들한테 굉장히 죄송하다. 노래 부를 때마다 느낌은 다 다르다.

    나도원 : 환택 씨의 노래가 그렇게 절박하게 들리는 건 본인의 삶에서 느끼는 절박함이라든지 고통 같은 게 있어서는 아닐까?
    임환택 : 맞다. 그런 것들도 어느 정도 반영이 되고, 가사를 쓸 때도 내가 주가 되는 얘기도 있고, 대변인의 역할을 하고 싶어서 안 되는 글 솜씨에 끄적인 것도 있다. 소리를 지를 때 내가 쓴 이 가사에, 내가 그때 이 가사를 쓰게 된 감정과 배경이 머리 속에 담겨져 있으니 노래를 부르다 보면 눈물이 날 때도 있다. 그런 것을 사람들이 좋게 봐주는 거 같다. 아까 전에 얘기해줬던 감동이라든가 그런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서정민갑 : 삶이라든지 그런 환경을 고통스러운 것으로 인식하고 거기에 끊임없이 부딪친다는 게 가사에서 많이 느껴진다. 실제로도 그런 생각들을 많이 하는 편인가?
    임환택 : 그렇다. 실제로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내가 살아가면서 또 내가 일을 하면서 느꼈던 것들 그리고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느끼는 부분이 있는데, 그런 것들을 일단 가사로 적어놓은 후에 내가 주가 아닌 다른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형식으로 바꾸고 단어 같은 것들도 바꾼다. 그러면서 멤버들에게 보여주고 의견을 물어본다. 그렇게 가사를 완성하면서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장 많이 한다.

    김학선 : 그런 정서가 비욘 디 에이지 때부터 계속 이어져온 것인가?
    임환택 : 아니다. 비욘 디 에이지 때랑 소울테이크 때랑 또 완전히 다르다. 비욘 디 에이지는 내가 좀 늦게 멤버로 합류했었는데 그때는 트윈 보컬 시스템이라 원래 있던 보컬 형이 가사를 다 써놓은 상태였고, 소울테이크의 경우도 비욘 디 에이지 해체하고서 뒤늦게 합류한 거였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가사를 그렇게 많이 못 썼다.

    김학선 : 그럼 비욘 디 에이지 데모에 있는 노래도 원래 있던 보컬이 쓴 거였나?
    임환택 : 그렇다. 그 형이 쓴 거였다.

    나도원 : 가사가 감정적이고 모호하기 때문에 이런 공감을 줄 수 있는 것 같다. 구체적이면 좁아지고 모호하면 넓어진다.
    임환택 : 사실 곡의 소재는 개인적인 것들이 더 많은 것 같다.

    나도원 : 그런 개인적인 얘기를 해주면 좋을 것 같다.
    임환택 : <Invisible Shadow>는 나의 아버지 얘기이다. 개인적으로 아버지와 사이가 좀 안 좋았다. 그렇지만 아버지라는 존재가 또 한 가정을 책임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 얘길 직접적으로 쓰면 좀 유치할 것 같고, 또 내가 직접적인 가사도 별로 안 좋아하기 때문에 좀 돌려서 한 번 더 생각해볼 수 있게 가사를 썼다. <Nachthexen>은 2차 대전 때 구 소련의 여자 조종사에 관한 얘기이다. 그 여자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그때 그 여자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가사를 썼다.

    서정민갑 : <Blaze The Trail>에서 “희망을 잃고 쓰러져가도 언젠가 다시 되돌아온다. 똑같은 삶. 똑같은 꿈. 언젠가 다시 되돌아온다.”라는 가사가 굉장히 감동적이었다. 이게 강박에 가까운 희망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할로우 잰 노래에서 말하는 희망이라는 게 어떻게 써지는 건지 궁금하다.
    임환택 : 힘든 사람들도 살아가면서 행복을 느끼는 게 있을 텐데 사람들은 그걸 잘 모르고 의식을 안 하면서 살아간다. 힘들 때 좋았던 과거를 떠올리면서 그때가 좋았지 하는 회상에 잠길 때가 많은데 그런 행복했던 기억마저 잊어버린다면 막말로 인생막장까지 가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내 인생이 지금 아무리 힘들어도 그때 기분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가사를 썼다. 그때 좋았던 때의 끈을 놓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Blaze The Trail> 가사를 쓸 때 제일 오래 걸렸는데 뭔가 이끌어주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서 고민을 많이 했다.

    서정민갑 : 시나 그런 것들에서 영향을 받은 것도 있나?
    임환택 : 시는 그렇게 보질 않았고 수필 같은 걸 많이 본다. 수필에서 작가가 표현하는 것들. 예를 들면 하늘, 구름 같은 걸 어떻게 표현하나 그런 걸 주로 많이 본다.

    나도원 : 한국어 가사를 쓰는 밴드들이 많아지고 있다. 할로우 잰 노래 중간 중간에 들리는 한국어가 사람들로 하여금 더 공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 같다. 한국어로 가사를 쓰는 것이 더 편한가?
    임환택 : 그렇다. 더 편하다. 영어로 부르면 더 멋있게 들리는 건 사실이지만, 멜로디만 듣고 이 노래 진짜 멋있다, 라고 얘기를 해도 가사를 모르면 그건 그냥 멜로디만 좋은 노래로 끝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어떤 노래를 듣고 진짜 멋있다고 생각했을 때 가사마저 멋있다면 더 큰 감동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난 (웃으며) 영어를 잘 못하기 때문에 한글이 더 편하다. 처음에 불렀을 때는 좀 어색했지만 지금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나도원 : 지금 얘기한 것들이 합쳐져 극단적인 절망과 슬픔 속에서도 희미한 희망을 찾아가는, 그러니까 일종의 페이소스나 카타르시스의 과정을 만들어주지 않나 하는 생각한다. 본인도 음악하면서 그런 것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임환택 : 솔직히 그런 걸 느낀다. 내가 모든 사람의 대변인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가사를 쓰면서 적은 수의 사람들일지라도 내가 그들을 대변할 수 있다는 게 좋다. 내가 어떤 가사를 쓰면서 가졌던 생각이나 느낌 같은 게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선 그대로 전달이 안 된다 해도 우리의 노래를 듣고 그 사람 나름대로 어떤 느낌을 받았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나도원 :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을 줄 수 있는 대변자, 라는 말로 받아들이면 되겠는가?
    임환택 :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대변할 수는 없는 거지만 뭔가 이용도구로 생각해줘도 괜찮을 것 같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 그것이다.”

    나도원 : 한국은 살기에 어떠한 사회 같은가?
    임환택 : 지금 한국에 살고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살고 있는 거고, 근데 미국 나가서 살아도 똑같을 것 같다. 경험이 제일 중요한 거 같다. 어떤 건 내가 죽어도 하기 싫은데 그래도 그걸 하고 나면 얻어지는 게 분명 있다. 경험만큼 중요한 건 없다고 생각한다.

    나도원 : 그 경험이란 것이 한국적 상황 때문에 생기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한국은 빈부격차도 심하고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노동량도 많다.
    임환택 : 물론 힘들다. 나도 노동자의 한 사람이다. 음악을 하려면 돈이 필요한 건 사실이고, 좋아하는 거 하려면 자기가 힘든 거 감수하면서 해야 하니까. 멤버들하고 할로우 잰 처음 만들 때도 모토가 그런 거였으니까 그때 얘기했던 걸 지키면서 살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도 밴드 해체 안 되고 계속 유지되고 있으니까 그걸로 만족하고 있다.

    김학선 : 그 모토는 어떤 걸 말하는 건가?
    임환택 : 각자 직장 다니면서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을 하자, 그리고 멤버 교체 하지 말고 멤버 하나가 공연을 못 할 상황이면 세션을 써서라도 밴드를 유지하자는 게 우리가 처음 밴드를 만들 때 생각한 것이다. 우리끼리 약속한 게 10년이다. 10년 동안 멤버 바꾸지 말고 밴드를 하자, 그리고 10년 동안 했는데도 아니다 싶으면 그때 깔끔하게 정리하자, 이렇게 얘기를 했는데 솔직히 10년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결혼한 친구들도 있고. (웃음)

    김학선 : 좀 직접적으로 얘기를 하자면 음악으로 돈 벌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다는 건가?
    임환택 : 그렇다.

    나도원 : 한국에서 음악 하기 힘들고, 특히 인디 밴드로 살기엔 더 힘들다. 한국에서 비주류 밴드로 산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도 비주류 밴드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임환택 : 고정된 수입원만 보장된다면 우리는 뭐 비주류 밴드로 살아가도 좋을 거 같다. (웃음) 좋아하는 거 해야지 싫어하는 거 억지로 포장해가면서 살 수는 없다.

    나도원 : (웃으며) 상당히 너그럽다.
    임환택 :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 그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다. (김윤중 씨를 보며) 이렇게 우리를 이해주는 기획자도 만날 수 있었고. (웃음) 솔직히 다른 곳들은 공연 들어오는 거 다 하라고 하지만, 우리는 출장 때문에 못 한다, 야근해서 못 한다, 이러면서 우리가 거의 결정한다. 그래서 레이블에 항상 죄송한 마음을 갖고 있다.

    나도원 : 한국 헤비뮤직의 음악적 경향과 성과로 보면 2000년대 들어 포스트-하드코어 계열이 주도하고 있다. 1990년대엔 정통 메틀과 스래쉬 계열이,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진 익스트림 계열에서 좋은 앨범이 많이 나왔는데, 이후엔 대부분 하드코어 쪽에서 나오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긴다고 보는가?
    김윤중 : 개인적인 생각을 얘기하자면, 메틀 계열에 비해서 하드코어 쪽에선 GMC나 유니온웨이와 같은 몇 개의 유니티가 있다. 밴드들끼리 친분은 친분이지만 음악적으론 자기들이 의식은 안 했다 해도 나름대로 경쟁이 됐던 거 같다. 그래서 메틀 이런 쪽보다는 하드코어 계열에서 더 발전한 게 아닌가 싶다.

    나도원 : 뭉치면서 경쟁한다, 라고 보면 될 것 같다.
    김윤중 : 그렇다. 메틀은 뭐랄까 구심점 같은 게 없이 따로따로 논다고 해야 하나? 그러다보니까 발전이 좀 더딘 것 같다.

    나도원 : 할로우 잰이라는 밴드와 각 멤버들에게 음악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임환택 : 개인적으론 음악이란 게 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면도 있다. 나 자신에게 뭔가 잘못된 게 있을 때는 채찍질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나도원 : 음악과 삶에서의 소망이 있다면?
    임환택 : 그냥 먹고살 수 있을 만큼 돈을 벌면서 이 밴드를 유지하는 게 소망이다. 좀 더 개인적인 소망을 얘기하자면 좀 큰 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 이제 빚도 갚고… (웃음)

    ♣ 디스코그래피

    데모


    ♣ 디스코그래피

    [Hollow Jan demo] (2004/demo)
    1. Tragic Flaw
    2. Be Out of Existence
    3. Scene No. X
    4. Empty
    5. Hateful Speech (live)
    6. Beside Oneself (live)

    싱글


    [Hyacinthus Orientalis of Purple] (2005/single)
    1. Beside Oneself
    2. Hateful Speech
    3. Hyacinthus Orientalis Of Purple

    1집


    [Rough Draft in Progress] (2006/ Dope Entertainment)
    1. Dvaita
    2. Spotless
    3. Nachthexen
    4. Tragic Flaw
    5. Invisible Shadow
    6. Empty
    7. Out of Existence
    8. Water from the Same Source
    9. Agnosticism
    10. Blaze the Trail

    ♣ Hollow Jan 임환택(보컬) 이승민(기타) 이광재(기타) 정동진(베이스) 박상철(드럼) ※ 할로우 잰은 2007년 4월 14일 (토) 서울 SSAM에서 바세린과 조인트 공연을 한다. ※ 할로우 잰의 [Rough Draft in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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