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aura Dern
잘못 고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데이비드 린치가 감독이라는 것에 대한 호기심에 이끌린 것이지만, 데이비드 린치가 감독인 만큼 이 다큐멘터리가 평이하고 평화롭지만은 않으리라고 예상했어야 했는데 말이다. 첫 10분 동안은 이 비디오 테이프를 고른 것에 대해 후회만 하고 있었다. 이상한 반감 때문에 -아마도 스타 벅스에 여간해서는 가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로- 좀처럼 발을 들여놓지 않는 타워 레코드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한 탓에 발견한 이 영화는, 첫 10분이 지난 후, 상당히 불편한 심경으로 나로 하여금 비디오 플레이어의 스탑 버튼을 누르게 했다.
다시 이 비디오 테이프를 플레이시킨 것은 그로부터 한달 여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그때 타워 레코드에서 만났던 친구가, 부산, 토쿄, 홍콩, 타이페이를 돌아 다시 런던에 돌아오는 길이라고 알려온 때쯤이었다. 이번에는 ‘데이비드 린치’ 표 영화를 볼 마음가짐을 하고 맞닥뜨렸기 때문인지, 영화는 생각보다 순하게 들어왔다.
Nicolas Cage
영화의 처음은 로라 던(Blue Velvet의 Sandy, Wild at Heart의 Lula)과 니콜라스 케이지(Wild at Heart의 Sailor Ripley)의 전화통화 장면이다. 상당히 Wild at Heart 스타일로.
여자: You sound very far away. (굉장히 멀리 있는 것 같아)
남자: I can’t do it anymore. (나, 더는 못하겠어)
여자: What is it? (무슨 일이야?)
남자: I guess I’m sayin’ goodbye, is what I’m doing. (이제 안녕이라고 말하는 거야)
여자: Does that mean you don’t love me anymore? (더 이상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야?)
남자: I mean, I got a go. It ain’t nothin’ wrong with you. It’s just us I can’t handle. Good bye. (내 말은, 난 가야될 꺼 같아. 네가 싫은 게 아니고, 그냥 우리 관계가 나한텐 너무 힘들어. 안녕)
여자: Don’t say that. (그런 말 하지마)
남자: I got a go. (가야겠어)
여자: Please, please. (제발 가지마)
(click : 전화 끊기는 소리)
Julee Cruise
무서울 만치 익숙한 대화다. 닭살이 돋도록 감상적이기도 하면서 지극히 일상적이지 않은가? 이 ‘클릭’ 이후의 무대는 이 심장이 부서진 (heart-broken) 여자의 무의식의 세계다. 이 영화의 부제에서는 이것을 꿈의 세계라고 했지만, 꿈이라고 한다면 이건 대단한 악몽이고, 꿈을 통해 제시되는 지독하게 강박되고 계시적인 무의식의 세계다.
Julee Cruise는 은발의 가발에, 하얀색 쉬폰 드레스를 입은 인형 같은 모습으로 이 세계를 떠다닌다. 올라가는 것도 내려오는 것도 아닌, 오르락 내리락하지만 중간에 어쩔 수 없이 매달린 상태다. 그녀의 맑고 감상적이기까지 한 음성이 부서진 차, 철탑, 페허가 된 듯한 인더스트리얼의 어두운 세계 속에 울려퍼진다. 검은 색 팬티를 입고 검은 색 하이힐을 신은 여자가 철탑을, 부서진 차 안을 온 몸으로 애무하듯 유영하고, 한 남자가 와이어에 매달린 채 부자연스럽게 공중을 떠다닌다. 톱질을 하는 난장이, 손전등을 들고 무엇인가를 쫓는 기계공 차림의 남자들, 가죽이 벗겨진 빨간 색의 거대한 사슴, 하늘에서 내려오는 수십 개의 아기 인형들. 이들이 차례로 출몰하는 이 세계 속에 줄리 크루즈의 음성과 기계 소음들이 그로테스크하고 에로틱한 사운드와 공간감을 만들어 낸다.
stage 1
이 Industrial Symphony No. 1 프로젝트는 Wild at Heart 가 후반작업중이고 Twin Peaks 의 TV 시리즈 첫번째 시즌이 촬영을 시작할 무렵에 만들어졌다. 당시 이 프로젝트는 1989년 American New Music Festival을 위해 기획되었으며, 그 퍼포먼스를 촬영한 것이 이 비디오로, 그 이듬해인 1990년에 출시되었다. 이 프로젝트가 만들어진 시기를 감안할 때, 이 퍼포먼스는 Wild at Heart, Twin Peaks와 여러 가지 면에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심상치 않은 난장이의 출현, 꿈을 통해 세계를 해석하려는 것, 붉은 조명으로 가득 찬 공간 등등…… 이 퍼포먼스에 사용된 곡들은 대부분 그 이전에 발표되었던 줄리 크루즈의 앨범에 담겨져 있던 곳들이다. Up In Flames, I Float Alone, The Black Sea, Into the Night, I’m Hurt Bad, Pinky’s Bubble Egg, The Dream Conversation, The Final Battle, The World Spins … 작곡가인Angelo Badalamenti 는 당시 린치의 영화 Blue Velvet의 음악을 담당했었고, Wild at Heart와 Twin Peaks의 음악도 그의 작품들이다. 그리고 짐작할 수 있듯이, 그 이후의 린치 영화들의 음악들도 그의 손끝에서 빚어져 나왔다.
dwarf
린치는 이 프로젝트를 두고 ‘삼중으로 노출된 꿈’이라고 표현했다. 실연당한 사람들의 꿈. 공중을 떠다니는, 떨어지는, 그리고 위로 떠올라가는 것에 대한 꿈. 어떤 평자들은 린치의 아방가르드 예술 작품이라고도 부르는 이 퍼포먼스는 공연 당시 관객들을 휘어잡아 놀라움과 혼란스러움 속에 남겨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공연 이듬해에 출시된 이 비디오는 지금은 ‘기술적으로는 유통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구하기 무척 힘든’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 ‘매그놀리아’에서 묵시록의 실현처럼 하늘에서 떨어져내리는 개구리 우박도 아니고, 왜 이 희귀한 비디오는 내 손 위에 뚝 떨어져내린 것인가? 거기다 지금은 크리스마스 때이고 열흘 후면 새해다. 그 가장 평화롭고 고요해야할 일년의 한 절기에 왜 나는 실연당한 자들의 에로틱하고 기괴한 무의식의 꿈에 초대된 것일까? 그 부서진 심장의 기억이며 심산한 내면의 광경들은 조금도 내 감정을 울려대지 못하는 데 말이다. 어쩌면 이건 실연당한 자들의 꿈이 내 손 안에서 봉인되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혹은 실연으로 황폐해졌던 내 무의식의 세계가 비로소 문을 닫는 순간인지도 모를 일이다. <클릭>. 온 세상에 평화를……
Nikki for gaseum
Dec 2002
skinned dear
stage 2
baby doll
stage 3
Julee Cruise

Rory Gallagher
비가 내리는 데다 바람까지 거칠게 불고 있었다. 우산이 꺾어지지 않을까 조바심하며 바쁘게 걸었다. 본드 스트리트에서 옥스포드 스트리트 쪽으로. 복잡한 인파 속을 헤치고 걷다가 얼른 숨어들어가듯 들어간 곳은 HMV. 따뜻하고 바람도 안 불고 비도 피할 수 있고, 무엇보다도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다시 거리로 나서기 전에 여기에서 잠시만이라도 몸과 마음을 녹이리라 마음먹었다.
세일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겠다고 결심을 다지면서 여느 때처럼 비디오와 디브디 코너를 돌아봤다. 여전히 세일 중인 이소룡의 <정무문> 테잎이 몹시 시선을 끌었고, 뮤직 다큐 중에서도 몇 개가 시선을 부여잡았다. 결국 몇 분 동안 뮤직 다큐 코너에 붙박히듯 서 있다가 보니 어느 덧 나는 한 손에는 루 리드의 <transformation>을, 다른 한 손에는 로리 갤러허의 <Irish Tour 1974>를 잡고 있었다. 사실 그 순간까지 나는 로리 갤러허에 관해서 아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이럴 때는 나의 무식함을 탓해 주시라). 모험을 할 것인가? 내가 친근하고 좋아하는 그것으로 돌아갈 것인가? 나는 모험을 하기로 했다. HMV에서 상당히 자신 있게 추천하고 있는 데다가, 로리 갤러허라는 이름만으로 어필하고도 남는다는 인상을 주는 비디오 커버가, 나의 무식함에 관계없이, 그가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뮤지션임을 짐작케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알고자 하는 욕구는 왜 식욕이나 성욕처럼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로 여겨지지 않는 것일까? 그런 욕구가 없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인가?).
로리 갤러허는 아일랜드 출신의 기타리스트로 1970년 초반부터 시작해서 간 이식 수술 후의 합병증으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은 1995년까지 왕성하고 건전한(?) 음악활동을 해온 뮤지션이다. 70년대 초반 런던에서 Taste란 그룹을 결성 활동하다가 솔로로 나서면서 홀란드, 독일, 캐나다 등 주로 유럽과 북미 등을 돌며 라이브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30여년에 걸친 세월 속에 Rory Gallagher(1971), Deuce (1971), Live! In Europe (1972) Blueprint (1973), Tattoo (1973) Calling Card (1976), Photo-Finish (1978), Stage Struck (1980), Jinx (1982), Defender (1987), Fresh Evidence (1990) 등의 앨범을 발표했다. 그의 음반은 다 합쳐서 3천만 장이 넘게 팔려나갔고 전 세계에 충실한 팬들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만 얘기하면 그의 경력에 관해 굉장히 두리 뭉실하고 아둔한 설명만을 해댄 셈이다. 며칠만의 벼락치기로 로리의 팬들도 흡족해할만한 설명을 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이 Irish Tour 1974는 로리 갤러허 공연의 진수를 보여주는 뮤직 다큐멘터리로 꼽힌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진창 기타 연주가 이어지는 그의 공연을 정갈하면서도 흥미롭게, 그러면서도 음악적 묘미와 현장감을 그대로 전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테니 말이다. 이Irish Tour 1974 라는 영화로 판단하건대, 그는 정직하고 성실한 뮤지션이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면서 좀더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힛트송들을 내면서 유명세를 굳힌 다른 기타리스트들(여기서 굳이 이름을 밝히지는 않겠다…)에 비한다면, 그는 정말이지 자신만의 음악만을 고집한 기타리스트다. 자신이 사랑하고 즐기는 음악을 정말 마음을 다해서 했고,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거나 TV에 나서 온갖 폼을 다 잡거나 이런 것에는 일체 마음이 없었던 듯하다. 그렇다고 <인디>라는 강한 스피릿과 자의식에 쌓여 오만하거나 불안해한 것도 아니다. 인터뷰들에서 보면, 로리는 자신도 평범한 사람이라며, 왜 그런 명예나 부가 부럽지 않겠냐고 했다. 그러나 그저 자신에게는 그런 운이 안 따르는 것 같다고… 이렇게 솔직하고 편하게 얘기하고 있다. 항상 부드럽게 말하고 수줍음을 타는 편이었다는 로리는, 말의 허황함으로 자기 자의식을 포장하기보다는, 그저 자기가 원하는, 자기에게 맞는 삶을 살아나간 사람이란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Irish Tour 1974는 로리의 음악을 즐겨보는 데도 좋을 뿐만 아니라 (Walk On Hot Coals, Tattoo’d Lady, Who’s That Coming, A Million Miles Away, Going to My Home Town, Cradle Rock, As the Crow Flies, Hands Up, Bullfrog Blues 등의 곡들을 로리의 라이브 공연으로 들을 수 있다), 당시 아일랜드의 빼어난 정경들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영화의 처음을 여는 노란 색과 회색 빛이 감도는 바다 물결로 시작해서, 골목길, 집, 펍, 해안가, 시내, 정겹게 말을 거는 아이리쉬 팬들의 모습들이 외롭고 고요하며 스산하게 아름답다.
로리 갤러허는 아일랜드에서는 지금도 전설적인 인물 (뮤지션을 넘어)로 여겨진다고 한다. 아일랜드 출신의 밴드 U2가 가장 존경하는 뮤지션일 뿐 아니라, 크리스마스 때면 동네 마을 회관을 찾아와 공연을 하는 등, 애정을 갖고 클럽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일 만한 곳이면 어디든지 가리지 않고 찾아가 공연을 벌였던 덕에, 크리스마스 때면 사람들이 예수 다음으로 많이 기억하는 인물이라고. 그는 13살이었던 1963년 그 유명한 '61 sunburst Fender Stratocaster 기타를 중고로 구입했다. 당시 가격 100 파운드. 들리는 말에 의하면 아일랜드에서 그런 류의 기타를 산 것은 그가 최초라고 한다. 이미 그는 그때 첫번째 밴드에서 활동 중이었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 직후에는, 물론 이 영화는 극장에서 상영됐었다 (MTV며 비디오며 이런 것이 없을 때였다). 그 이후에는 팬들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가 아주 최근인 2001년에야 비디오로 만들어져 출시되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거의 30년 전에 만들어져서 이제야 팬들에게 돌아온 것이다. 그러니 이 비디오에 대한 그들의 열광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래서 이 비디오는 <로리 갤러허 : Irish Tour 1974>라는 말 이외에는 다른 어떤 말도 필요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이 영화의 감독은 토니 팔머. 1998년에는 Primal Scream이라는 feature film을 만들기도 했지만 그 전에는 주로 수준 있고 잘된 뮤직 다큐멘터리들을 만들어 왔다. <Wagner (1984) > <Maria Callas - The Life and Legend (1987)>, <Frank Zappa - 2000 Motels> 등도 그의 작품들이다.
이 뮤직 다큐멘터리는 중반 이후가 지나면 다소 지루해지는 감이 있지만, 조금 로리의 음악이 지루해질 때쯤이면 (나같이 그의 열성 팬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이런 순간들이 찾아온다) 이 cool Irish lad의 이야기들이며 무대 뒤의 장면들이 꼭 나타난다. 로리의 기타 연주법에 관한 얘기며, 아일랜드에 오면 벨파스트에 꼭 간다는 얘기며, 유명해져서 좋지만 그렇다고 자기가 보통하는 생활 - 저녁에 술 한잔하러 동네 펍에 간다든지 하는 그런 생활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며… 로리의 이야기들이 조근 조근 풀려나온다. 당시 로리와 함께 투어를 하던 베이스 기타리스트 Gerry McAvoy, 드러머Rod De'Ath, 피아니스트 Lou Martin 의 무대 뒤 모습들도 진솔하고 정겨운 사나이(?)들의 모습이다. 갈색 병에 담긴 기네스로 간간이 목을 축이며 여유롭게 공연을 준비한다.
로리의 살아 생전의 지명도나 인기가 어떤 정도였는지 나는 모른다. 그 20여년 간 나는 그에 관해 전혀 모르고 살았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 그를 기억하고 전하려는 사람들 - 그의 헌신적인 팬들의 노력은 인상적이다. 로리에게 헌정된 웹사이트들이 그의 전설을 - 그의 음악을 다음에 다가올 시간들에까지 남기려고 쉼없이 반짝이며 신호를 전하고 있다. 이 전자 신호의 그물망 속에서… (이번 크리스마스는 더블린의 어둑한 펍에서 기네스를 훌쩍거리며 보내게 되지 않을까? 운이 좋으면 제2의 로리 갤러허의 기타 연주를 듣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은 올해 들어 가장 더운 날이었다. 나는 그린위치 파크 잔듸밭에 누워 뒹굴거리며 오후 한나절을 보냈다. 이렇게 따가운 햇볕 아래 누워서 듣고 싶은 음악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언제나 Love의 Forever Changes다. 그리고 녹색 잎들이며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냥 이렇게 살아도 괜찮다고, 그저 이렇게만이라도 살아나간다면 괜찮은 것이라고 그렇게 느끼게 된다. Nico에 관해서는 잠시동안이지만 잊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Nico라면, 그렇다, Velvet Underground with Nico의 그 Nico다. 그 저음의 깊게 울리는 독일 액센트의 읊조리는 듯한... 그녀의 노래를 들어본 적이 있는지? 1938년 독일에서 태어난Nico의 본명은 Christa Paffgen 이다. 독일군이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2차 세계대전 중 죽었고,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와 숙모에 의해서 전후 폐허 속에서 자라났다. 16살 무렵부터 완벽하게 아름다운 타고난 외모 덕에 보그의 모델이 되고, 파리로 옮겨와서 모델 일을 계속했다. 그후 1960년 뉴욕으로 옮겨간 그녀는 배우가 되기 위해 연기를 배우고 <I'm Not Sayin>이라는 싱글을 낸다. 뉴욕에서 밥 딜런을 만나 앤디 워홀에게 소개된 그녀는 앤디 워홀 팩토리에서 제작했던 실험 영화들에 출연(?)하고 지금은 전설이 된 Velvet Underground에 참여하게 된다.
여기까지만 얘기하면 그녀의 인생은 타고난 완벽한 미모와 특이한 음색으로 성공한 아티스트의 성공담처럼 들린다(그리고 이 글은 여느 스타 아티스트의 경력을 소개하는 글처럼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이 다큐멘터리가 촛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그리고 어쩌면 내가 다루기 두려워하는 것은 그녀의 실패다. 그녀는 뉴욕에서 만난 알랭 들롱과 사랑에 빠지고 아들 Ari를 얻는다. 그러나 알랭 들롱은 Ari를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두 살 배기 Ari는, Nico의 보헤미안 같은 삶을 떠나 알랭의 어머니의 손에 맡겨진다. (이에 격분한 알랭
들롱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자신과 Ari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고-- what a jerk!-- 알랭의 어머니인 Edith Boulonge 여사는 Ari를 선택한다.)
개인적인 불행. 그후 그녀는 여기저기를 떠돌며 많은 연인과 추종자들을 두고, 실험영화들에 출연하고, 중년의 추한 마약중독자로 살아간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는 그녀의 음악을 멈추지 않는다. 영국의 맨체스터에서 결성한 작은 밴드와 떠돌며 공연을 하고 계속 음반을 낸다. 그리고 1988년 어느 날, 스페인의 작은 섬 Ibiza (지금은 여름의 가장 인기 있는 휴양지 -- crazy club scene으로 유명한)에서 뇌출혈로 갑자기 죽음을 맞는다. 이때 그녀는 마약을 끊고 깨끗해진(?) 후였다.
이 다큐멘터리 Nico Icon은 그녀의 삶에 관한, 그리고 그녀와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의 옛날 꼬마 시절의 사진들부터 모델 시절의 사진들, 그녀가 출연했던 영화들(프랑스 영화인 <스트립티즈>와 페데리코 펠리니의 <돌체 비타>, 앤디 워홀 팩토리에서 촬영된 영화들), 80년대 중반의 인터뷰까지 그녀의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녀의 음악들 신비롭고 깊은 음색에 시적인 가사들이 그 이미지들에 상응하며 코멘트를 더하면서 더욱 그녀의 Icon으로서의 이미지들을 고조시켜간다. 어쩌면 그녀의 실체는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 그리고 어느 누구도 진정으로 그녀를 알고 있었던 사람은 없는 것처럼, 그녀는 Icon이자 이미지로 남겨진다. 그래서 이 다큐멘터리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실제로 Nico를 이해할 수 있는 아무 근거도 주지 않으면서 피상적인 얘기만으로 그녀를 더욱 신비화하고 있다는 그런 비난을 받기도 했다.
유감스러운 것은, 이 영화가 어떤 포맷으로 촬영된 것인지에 대한 정보를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16mm 카메라, 혹은 좀 단순한 일반 비디오 카메라로 촬영된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35mm 로 촬영되었다, 지금 찾은 웹사이트에 의하면) 특히 두 나이 많은 할머니(?)들-- Nico의 숙모와 알랭 들롱의 어머니記 인터뷰에서 느껴지는 것은, 이 인터뷰어가 이들에게 아무런 부담감을 주지 않고, 격의 없는 것을 넘어 손녀에게 이야기하듯이, 솔직하고 확신 있게 아무 꾸밈없이 감정의 깊이를 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Nico의 숙모는 검정색 드레스에 정말 고전적인 스타일의 목걸이와 귀걸이, 그리고 머리를 틀어 올린 차림새로-- 1910년대 쯤의 흑백 사진에서 막 걸어나온 것 같은-- , Nico의 음악에 심취한 모습을 보여준다. Nico에 대한 애정과 아쉬움, 그리고 그녀 자신의 외로움과 강인함이 강렬하게 남는 장면이다.
전체적으로 완성도(충실한 자료화면과 효과적인 음악 사용)는 높지만, 좋은 의미에서 학생 작품이 아닌가하고 느껴지는 부분들도 있다. 중간 중간 인터뷰들에서 의미심장하게 들렸던 부분을 서브 타이틀로 이미지 위에 넣는다든지, 인터뷰하는 사람들의 동작들(차를 마신다든지 하는)을 클로즈 업으로 촬영해서 슬로우 모션으로 쓰는 장면들은 스타일리쉬하거나 두드러지게 실험적이지 않지만, 감정을 전이시키거나 몰입시키는 데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Nico의 모습과 더불어, Velvet Underground 초기 시절의 루 리드, 존 케일, 그리고 앤디 워홀을 볼 수 있다는 것 역시 이 다큐멘터리가 제공하는 즐거움 중의 하나다. 물론 짐 모리슨과 Nico 가 <The End>를 부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도 Nico가 거쳐온 대로 우리는 60년대를 거쳐와 볼 수 있다. 짐 모리슨이나 앤디 워홀처럼 Nico 역시 그 시대의 시대 정신을 보여주는 문화적인/그리고 음악적인 아이콘이 아닐까? 너무나 어두워 보이는 후반의 인생을 그녀는 어떻게 살아낸 것일까? 항상 마약에 절어 있었고 난폭하기까지 했지만,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때만큼은 놀랄만치 집중했었고 여전히 카리스마적이었다는 그녀.
이 다큐멘터리 중의 누군가는 말하길, 그녀는 항상 죽음으로부터 2분 간격으로 떨어져 있었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그녀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으며, 어느 누구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한다. 뉴욕 시절, 그녀는 그녀의 완벽한 블론드 머리를 검은 색으로 물들였다. 아름답다는 말을 듣기 싫어했고 정말 못생겼다는 말을 들으면 오히려 기뻐했다고. 그녀의 아들인 Ari는 그녀의 크고 아름다운, 혹은 기묘하고 강렬하게 보이는 바로 그 눈을 가졌다. 그가 말하길, Nico를 죽인 것은 아마 너무 뜨거운 햇볕이었을 꺼라고.
그 비난-- 이 다큐멘터리가 Nico를 이해할 수 있는 어떤 구체적인 정보나 합리적인 설명도 주지 않고 있다는--, 이 다큐멘터리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이 다큐멘터리의 성격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의 음악을, 그리고 그녀의 인생을 어떻게 설명하고 모두가 이해가능한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어떤 세속적인 틀로 그녀의 인생을 가쉽화해내는 게 가능할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녀의 음악이 당신을 사로잡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저 당신이 너무나 밝은 곳에 살고 있기 때문일 뿐.
August 2002
Nikki for gaseum

Monterey International Pop Festival
(지난 번 밥 딜런의 뮤직 다큐멘터리 <don't look back>에 관한 글에서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다큐멘터리의 거의 시작 부분, 밥 딜런이 런던에 도착해서 동료들과 런던 브리지를 건너는 장면이 있다. 누군가가 그때 노래를 한다(그게 밥이었는지는 확실히 모르겠다). Lon--don Bridge is falling down~, fall~ing down~, fall~ing down~ 이게 입에 익어서 나도 모르게 런던 브리지를 지날 때면 흥얼거리고 다녔는데, 지난 주 기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누군가가 런던 브리지 기차역 옆쪽 벽에 커다랗게 낙서를 해놓은 것을 보았다. London Bridge is falling down! 흠, 이런 식으로 밥 딜런의 다큐멘터리는 아직도 기억되고 있는 것인가 ---)
Monterey International Pop Festival 은1967년 6월 16일에서 18일까지 3일 동안 캘리포니아의 몬테레이에서 열렸다. 몬테레이는 샌프란시스코와 산타크루즈 사이의 태평양에 면한 해변가에 위치한 작은 도시. 이 몬테레이 페스티벌은 그 이후의 우드스탁, 라이브 에이드 등의 시초이자 모델이 된, 최초의 대규모의 국제적인 락 페스티벌이다. 이 최초의 락 페스티벌은, 문화적으로는 소위 말해 love generation 혹은 love crowd라고 불리는 젊은이들의 히피 문화가 집결, 문화의 전면에 등장하는 계기가 됐고, 음악적으로는 새로운 락 음악의 출현과 그
영향력과 상업성이 입증되는 역사적 순간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에서, 몬테레이 페스티벌을 기록한 펜 베이커의 또 하나의 뮤직 다큐멘터리 <몬테레이 팝>은, 지난 달 소개했던 그의 다큐멘터리<don't look back(밥 딜런의 1965년 영국 투어를 다루었던)>과 동일한 역사적, 음악적 순간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don't look back>이 밥 딜런의 음악과 콘서트보다는 밥 딜런 개인에게 촛점을 맞추고 있는, 보다 전형적인 인물과 사건 중심의 다큐멘터리라면, 이 <몬테레이 팝>은 락 페스티벌과 뮤지션들의 음악/연주를 그 중심에 두는 본격적인 락큐멘터리(rockumentary)의 시작이자 그 전형을 이룬 다큐멘터리다. 그런 만큼 <몬테레이 팝>은 다큐멘터리의 형식면에서도 <don't look back>과는 많은 차이를 보여준다. <don't look back>은 흑백 화면에 거친 입자, 급격한 줌인 줌아웃, 빠른 카메라 움직임 등을 보여주면서 현실적이고 건조한, 그래서 기이한 느낌마저 자아내는 화면들을 보여주는 데 반해, <몬테레이 팝>의 화면들은 칼라에 안정감 있으면서도 경쾌한 화면들을 보여준다.
<don't look back>이 도그마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면(실제로 그 영향 관계는 정반대이지만 도그마 영화에 더 익숙한 우리에게는 차라리 그렇게 느껴진다), <몬테레이 팝>은 락큐멘터리들에 친숙한 우리에게는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느낌을 자아낸다. 고전의 비극이라고 해야 하나? 그 자신이 고전을 이루어서 이후의 다른 영화들의 전형이 된 탓에, 이제는 그 자신이 애초에 가졌던 창조적인 향기를 후대인 우리들은 제대로 가름해낼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할까...
Simon & Garfunkel
3일 동안 계속됐던 이 페스티벌의 라인업은 거의 현재 락 음악의 시초들을 모두 망라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 영화에 공연 장면이 담긴 뮤지션들은 순서대로 Scott McKenzie, The Mamas and Papas, Canned Heat, Simon & Garfunkel, Hugh Masekela, Jefferson Airplane, Big Brother & The Holding Company, Janis Joplin, Eric Burdon & The Animals, The Who, Country Joe & The Fish, Otis Redding, Jimi Hendrix, Ravi Shankar 등이다.
이 공연에는 5만명의 젊은이들이 몰려들었고 ABC TV에게 tv right을 판매하는 등 총 20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이 공연은 자선 공연이었던 탓에 모든 뮤지션들은 돈을 받지 않고 출연했다. 이 공연의 실황 앨범은1993 년에 Best Historical Album부문 Grammy 상을 수상하면서 네 장 짜리 CD box set로 발매됐고, 이 영화 <몬테레이 팝>은 1997년에는 30주년을 기념하며 비디오가 재발매됐고, 35mm 필름을 재복구하여 2001년에는 미국 등지의 극장에서 다시 상영되기도 했다.
The Mamas and Papas
그러면 이제 영화로 들어가볼까? 영화의 첫 장면은 인터뷰로 시작된다. 히피 스타일의 한 소녀가 말하길, 이건 마치 부활절, 크리스마스, 아니면 생일날 같다고. 그 모든 밴드들의 연주를 다 들을 수 있다니! 그리고 흐르는 음악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또는 위트 있고 사랑스럽게도, If you come to San Francisco, summer time will be your loving day . . . all those who come to San Francisco, be sure to wear some flowers in your hair... 페스티벌 공연장에 모여든 젊은이들. 머리에 꽃을 꼽은 사람들. 젊은이들의 각양 각색의 옷차림과 그 자연스러움들은 캘리포니아의 밝은 햇살아래서 마치 한 명 한 명이 각기 다른 꽃들처럼 평화롭고 아름답다. 이 영화는 이 개성이 넘치는 평화로운 모습들을 하나하나 따뜻하고 차분하게 연결해낸다. 샌프란시스코 튠에 맞추어서.
비행기에서 내리는 The Mamas & Papas. The Mamas & Papas의John Phillips는 이 페스티벌을 주최한 사람 중의 하나다. 사무실에서는 어느 콘서트 영화에나 등장하는 혼잡하고 뒤죽박죽인 모습들이 보여진다. 무대가 준비되고, 사운드 시스템이 정비되고, 공연이 시작되고, 이윽고 밤이다. 캘리포니아 드리밍. 마마스 앤 파파스의 공연이다.
이 영화의 중반까지는 아직은 그래도 다큐멘터리 특유의 긴장감들이 느껴진다. 짧지만 중간중간에 들어간 대화 장면들이나 인터뷰들이 그런 긴장감들을 자아낸다면, 중반에 Jefferson Airplane의 공연 장면쯤 가서는, 음악들에 빠져들면서 영화가 뮤직 비디오처럼 바뀌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더 이상은 아무 대화나 인터뷰, 다른 소리들은 없다. 들리는 소리는 오직 음악 뿐.
Jimi Hendrix
공연에서의 음악 전후, 혹은 중간부에 공연장 주변의 풍경-- 젊은이들, 그들이 자고 먹고 놀고 사랑하는 모습들-- 을 음악을 따라가며 혹은 가사의 내용에 맞추어 드라마틱하게(!) 배치하고 있다. 그중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은 공연과 공연 사이 단 한번 아침의 새소리가 들리는 장면이다. 주위는 고요하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면서 들판에서는 사람들이 하나 둘 일어나고 있다. 그때 갑자기 공기를 가르며 비명 소리 같은 것이 들리면서 누군가 두렵게 달려가고 있는 장면을 보여준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지? 그리고 무대로 장면이 이어지면 -- 소리는 어느덧 음악으로 바뀌어Country Joe & The Fish 의 공연이다.
무대 위의 공연 장면이건 공연장 주변의 풍경이건 당시의 스테디 캠 장비를 장착하고 안정감 있게 그리고 충분한 시간을 두고 꼼꼼하게 막대한(?) 분량을 촬영했으리라 여겨진다. 핸드헬드도 없고, 퀵 줌도 없고, 카메라의 빠른 움직임도 없다. 그저 거기에 서서 차분하게 찍어냈다. 그리고 그것은 최소 5-6대의 카메라로 찍어냈기에 그런 방식의 촬영이 가능했으리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특히, 나는 이 영화의 무대 장면들이 좋다. 대개 뮤지션들의 꽉 찬 클로즈업 샷들로 이루어진 무대장면들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만큼 빨려 들어가 집중하게 한다. 별다른 무빙이 없는 대신, 여러 대의 카메라를 써서 촬영한 후, 편집 과정에서 다이내믹하게 편집한 것이 보인다. 어둠 속에서 깊은 명암을 두고, 조명 속에 얼굴의 아주 일부만 드러나는 모습을 그것도 비스듬히 뒤에서 촬영한 샷들을 클로즈업으로 길게 끌고 가는 장면들은 정말 보는 사람을 빨아들인다.
Janis Joplin
The Who의 공연. 기타, 앰프, 드럼이 부서진다. Jimi Hendrix. 기타와 섹스를 나누다가(?) 불을 지르고 부숴버린다. 음악도 음악이지만, 이건 굉장한 performance다. 현재의 우리에게는 이미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것들이지만. Janis Joplin은 <Ball and Chain>을 부른다. 열정적으로, 소리가 몸을 부수어버릴 듯 터져나올 때 그에 따라 움직이는 그녀의 발. 관객석의 Mama Cass (The Mamas and Papas의)는 Janis Joplin의 노래와 그 에너지에 압도된 경탄의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은 인도의 라가 마스터인 Ravi Shankar의 18분간의 연주다. 연주가 끝나자 모두 일어나 박수를 친다. 박수가 끝나지 않고 이어진다. 그렇게 <몬테레이 팝>이 끝난다. 조금은 싱거운 끝이다. 하지만 이 공연이 낳은 그 후의 결실들을 생각하면 정말 이건 대단한 시작이다.
Ravi Shankar
(올해의 글래스턴버리를 나는 여전히, 다시 TV로 보았다. 다 좋았지만, Coldplay와 Bell & Sebastian이 돋보였다. 1999년의 글래스턴버리 마지막을 장식했던 Skunk Anancy는 무엇을 하고있는 걸까하는 생각도 해보았고, 나는 언제나 한번 글래스턴버리에 가보나 하는 생각도 다시 해보았다. 혹시나 글래스턴버리에 가게 되면 연락을 주세요. If you go to Glastonbury, be sure to wear some flowers in your hair. Peace for everybody)
July 2002 nikki for gaseum

bob dylan : don't look back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너무나 런던 시내 한복판에 나가보고 싶다. 버스가 한 두대 다니고, 단체 관광객들이 보일까, 거리는 정말 조용할 것이다. 영국과 덴마크의 월드컵 경기가 10분 후면 시작한다. 한 옆에 켜 놓은 BBC1에서는 친근감 넘치는 게리 리니거와 그의 해설자들이 한참 신나게 얘기 중이다.)
이번 달부터 다음 달까지 2회에 걸쳐서, 지난달에 (Down from the mountain편에서) 지나가며 얘기했던 다큐멘터리 영화의 전설적인 인물, 펜 베이커의 대표적인 뮤직 다큐멘터리들을 -- Don't Look Back, Monterey Pop -- 다루어보기로 한다. 지금은 거의 고전이자 전설이 되어버린 이 두 영화를 다시 돌아보는 것은, 무려 세 가지나 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첫째, 다큐멘터리 역사상 소위 '씨네마 베리테'라는 새로운 스타일의 시작이자 더 광범위하게는 영화사의 새로운 미학을 여는 계기가 된 것이 이들 다큐멘터리들이다 (물론, 여기 이 코너에서 다룰 두 편의 뮤직 다큐멘터리 영화말고도 펜 베이커가 만들어 낸 다른 다큐멘터리들과 Leacock, 그리고 Maysles 형제들이 만들어 낸 다른 다큐멘터리들이 씨네마 베리테라는 범주의 핵심에 존재한다).
두번째로, 이 다큐멘터리들은 어떤 면에서 뮤직 다큐멘터리의 시초라고도 할 수 있다. 락 뮤지션이 다큐멘터리의 주제이자 소재가 되어 심각하게 다루어진 것은 이들 다큐멘터리들이 거의 최초라고 할 수 있다.
셋째로, 이 두 영화는 1960년대 말에 만들어지면서, 락앤롤 음악이 수준 낮은 저질의 십대의 소모품에서 현재의 위치(?) - 대중문화의 가장 중요한 영역이면서 심각한 사회적인 발언을 하고 상당한 문화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 로 상승/전환되어 가는 역사적인 순간을 목격/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d. a. pennebaker
(잠깐 TV 모니터로 시선을 돌려보니 벌써 영국 팀이 한 골을 기록했다. 이래서는 어째 시시한 게임이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겨우 15분이 지났으니, 더 지켜보기로 하자. 덴마크 팀 화이팅!)
여기 저기 펜 베이커가 이후에 한 인터뷰들을 찾아보니, 그 자신 역시 자신의 카메라가 그런 순간들을 기록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때 당시에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사실 락 음악에 대해 그다지 애정이 있거나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지도 않다. 밥 딜런의 매니저인 알버트 그로스맨이 그의 사무실에 들려 밥 딜런의 다큐멘터리를 - 1965년 그의 영국 투어 - 만들어 줄 것을 제안했을 때도 펜 베이커는 어디에선가 그에 관한 글을 읽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내내 카메라 뒤에서 그를 촬영하는 과정에도 밥에 대한 어떤 특별한 친근감을 느꼈다거나 그의 음악에 매료되었다거나한 것 같지는 않다. 이것은 그의 인터뷰에서뿐만 아니라 이 영화 내내 느껴지는 카메라와 대상과의 거리감과 긴장감에서도 나타난다.
소위들 말하길 씨네마 베리테의 촬영 스타일을 'fly-on-the-wall'이라고 한다. 바로 옆에서 같이 그 상황을 목격하는 것처럼 카메라가 생생하게 그 현장의 느낌을 전한다는 의미에서다. 그렇지만 내가 이 고전이 된 영화를 내 눈으로 목격하면서 본 바로는, 이 영화에서의 카메라의 시선은 차라리 'through eyes of a flying fly'의 느낌에 더욱 가깝다. 시종일관 핸드헬드인 카메라는 현장의 상황이 진행되는 것을 따라 급격하게 이리저리 시선을 옮기고, 샷의 크기가 계속 조정되고, 촛점이 나가는 것도 다반사. 롱샷과 함께 자주 미디엄 샷과 사람의 얼굴을 꽉 차게 클로즈업으로 잡는 샷을 이용하기 때문에, 사람들간의 긴장감이나 한 사람의 표정에서 나타나는 불안정감, 긴장감, 적대감 등을 속속들이 잡아낸다.
그리고 이런 면에서 이 영화의 시각적인 구성들은 현재의 도그마 일파의 감독들의 영화나 그 영향권 안에 속하는 영화들의 미학적인 느낌들을 떠올린다. 도그마 선언이 이 씨네마 베리테의 전통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구체적인 시각적인 느낌들까지 기시감을 느끼게 할 정도로 가까울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못했던 바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극적인 스토리가 없는 도그마 영화다. 물론 개성 있는 주인공인 밥 딜런이 있지만, 어떤 극적인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가장 극적인 순간이라면 밥 딜런이 타임 지 등의 중년의 기자들과 입씨름을 벌이며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걸 때다.
pennebaker and his partner chris hegedus
(전반전이 37분 지났다. 영국 팀이 어느 새 한 골을 더 넣어서 이제 0:2다. 비까지 주룩주룩 내리고 있고, 이젠 정말 시시한 게임이 될 것 같다.)
이 영화는 밥 딜런의 환상적인 퍼포먼스나 이 훌륭한 아티스트의 무대 뒤에서의 인간적인 측면을 보고 싶어하는 기대를 배신한다. 거의 종반부에 이르기까지, (물론, 군데 군데 그의 라이브 콘서트 장면들이 삽입되어 있지만), 그의 음악은 차분히 감상되는 대신, 잠깐씩 들리는 정도다. 거의 종반부에 이르러서 밥 딜런이 다른 아티스트들과 호텔 방에서 기타를 연주하며 함께 노래하는 장면에 가서야 카메라가 그의 음악에 애정을 갖고 차분히 음악을 기다리며 들어준다고 할까.
그리고 음악적으로 가장 사랑스럽고, 영화 내내 무척 유치하고 못된 면들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밥 딜런에 대한 일종의 애정과 존경심을 회복하게 만드는 장면은 거의 맨 마지막에 들어가서야 볼 수 있는 그의 무대 공연 장면이다. 그는 비로소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가 존경해마지 않는 그 전설적인 포크 싱어 밥 딜런으로 자신을 완성하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bob dylan and pennebaker
이 뮤직 다큐멘터리가 이후의 다른 뮤직 다큐멘터리들에 미친 절대적인 영향을 생각할 때, 이 다큐멘터리 자신이 현재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뮤직 다큐멘터리의 유형들을 많은 부분 벗어나 있다는 것은 흥미롭다. 아마도 가장 큰 차이점은 이 뮤직 다큐멘터리는 '영화'라는 것이다.
당시 이 영화가 만들어졌을 때는 대중 음악을 하루 종일 틀어주는 MTV같은 TV 채널의 출현은 꿈도 꾸지 못할 때였다. 공중 채널에서 뮤직 다큐멘터리를 방영할 것이라고는 당연히 생각도 못할 때였고. 따라서 이 영화를 상영할 기회는 오직 극장에 거는 것뿐이었을 때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는 우리가 TV 채널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뮤직 다큐멘터리들처럼 상냥하지 않다. 상냥하고 알기 쉽게 설명해주고, 뮤지션들의 음악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거나, 뮤지션들의 인간적인 면에 다가가려고 하는 인공적인 노력들을 하지 않는다.
거기다 이 영화는 흑백이고 인공적인 조명도 없다. 영화의 사운드 트랙처럼 어떤 감정적인 효과나 고조점을 이용하기 위해서 음악들을 쭉쭉 깔아놓지도 않았다. 오히려 도그마 영화들에서처럼 너무나 낱낱이 사실적이이서, 우리는 마치 이상한 사람들의 이상한 세계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시대는 1965년이다. 3년 정도만 더 보태면 이미 40년 전인 때다. 당시의 영국 사람들의 태도나 말투, 그들의 영어는 신선하다못해 이상하게(strange) 느껴진다.
밥 딜런의 인터뷰 장면들은 라디오 헤드의 meeting people is easy를 연상시킨다. 그 라디오 헤드들이 어쩔 수 없이 드러내던 불편함과 어색함. 매번 똑같이 반복되면서 멍청하게까지 들리는 인터뷰어들의 질문들. 물론, 이 씨네마 베리테의 카메라가 밥을 직접 인터뷰하는 일은 없다. 호텔 방이나 프레스 룸에서 밥 딜런이 기자들과 인터뷰에서 설전을 벌일 때, 그냥 거기에 있을 뿐이다. 인터뷰는, 투어를 하건, 공연을 하건, 뮤지션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밥은 당시 23살이며 자기 커리어에서의 새로운 국면으로 자신을 막 상승시키는 중에 있던 그는 때로는 날카롭게, 때로는 정말 멍청하고 말도 안되고 신경질적으로 인터뷰에 임한다. 이쯤에 이르러서는 정말이지, 인터뷰를 하는 게 뮤지션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인지, 혹은 그 인터뷰를 읽을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질 지경이다.
look back, don't look back : remake film of don't look back by Randy Bell and Junstin Rice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첫 장면은 신선하고, 마지막 장면은 아름답다. 첫 장면, 공사장(?) 옆, 밥은 'Subterranean Homesick Blues'의 가사 프레이즈들이 씌어진 카드들을 들고 서 있다가 하나씩 이 종이카드들을 떨어뜨린다. 영화 속에서 그는 직접 이 노래를 부르지 않고, 단지 사운드트랙 상으로 우리는 이 노래를 들을 수 있다. 음악이 끝나고, 모든 카드를 떨어뜨린 후, 밥은 화면의 왼쪽으로 비켜 나가고, 공사장에 서 있던 두 사람 역시 화면의 프레임 밖으로 걸어나간다.
마지막 장면, 그의 공연 장면이다. 무대와 관객석은 어둠 속에 잠겨 우리는 아무 것도 볼 수가 없다. 단지 두 가닥의 스포트라이트만이 무대 위의 밥 딜런을 비추고 있다. 그의 조명 속의 뒷모습이 화면의 왼쪽 아래로 점점 작아져 간다. 전체 화면은 검은 어둠 속이고, 우리는 그의 조명 속의 뒷모습이 화면의 아주 작은 부분에 남을 때까지 줌 아웃되는 것을 본다. 마치 우주의 저 멀리 어딘 가에서 빛이 내려와 어둠 속에 홀로 서 있는 그를 비추는 것 같은 느낌이다.
정말 마지막 장면, 차 안, 그는 런던의 밤거리를 내다보고 있다. 그의 그날 밤 콘서트는 무척이나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이제 정말 시작이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그의 길을 갈 것이다. 그리고 거의 40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그에 관해 아는 것은 그가 포크 음악의 신으로 불린다는 사실이다. . . 이 영화는 1998년 미국 내에서 재개봉됐고, 최근에는 dvd로도 출시됐다.
June 2002 nik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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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wn from the mountain
흑백의 고속도로. 달리는 차창 너머로 보이는 것은 들판 사이로 끝없이 펼쳐진 길뿐이다. 흑백의 고속도로는 칼라로 바뀌고. 밤의 어둠 속, 차는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도시로 들어간다. 백발의 주름진, 그러나 강건해 보이는Ralph Stanley는 산에서 내려와 그렇게 내슈빌에 이른다.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첫인상만 보고, 혹은 그 사람의 몇 가지 조건만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는 건 지극히 나쁜 일이다. 그렇지만, 솔직히 말해, 그 사람이 너무 잘 나 보일 때, 모든 좋은 조건을 다 갖추고 있는 것 같을 때 나는 너무 쉽게 그 사람에 대해 부정적으로 판단해버리곤 한다. 오히려 조건이 나쁘다거나 그 사람이 다소 못나 보이는 부분이 있을 때는 그렇지 않으면서.
처음 이 영화 Down From The Mountain을 봤을 때도 그랬다. 그저 그런 미국 컨추리 음악 공연 녹화 정도라고 얼른 판단을 내렸었다. '미국의' 유명한 감독 형제 코엔 브라더즈의 영화 사운드 트랙에 참여했던 뮤지션들의 공연을 다큐멘터리로 만든 영화. 그것도 Bob Dylan의 공연에 관한 다큐멘터리 Don't Look Back으로 전설적인 다큐멘터리 메이커인 펜베이커가 공동 감독이고, 미국에서는 영화관에서 개봉하기도 했던 영화. 그 공연 실황 앨범은 엄청나게 팔렸다고 전해지는. 그리고 미국 컨추리 음악에 대해 갖고 있는 나의 편견도 한 몫 했다. 그저 그런 음악에, 그저 그런 영화이면서 단지 '미국' 것이란 이유로 이런 대접을 받으며 잘난 척하고 있다고 삐딱하게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 정말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두 달 여의 시간이 지났을까, 답답한 유학 생활이며 진도도 안 나가는 공부에 짜증이 나고 우울하고 지쳐있을 때였다. 그 음악이 다시 듣고 싶어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 영화를 비디오로 플레이하면서 보았다기보다는 그냥 들어보았다. 이 따뜻한 위안의 느낌을, 고통받는 영혼의 슬픔들을 소박하게 토로하는 이 단순한 음악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O Brother, Where Art Thou?
이 뮤직 다큐멘터리 영화를 서너 번 본/들은 후에 이 음악들이 사운드 트랙으로 쓰였던 본래의 영화 --- 코엔 형제의 O Brother, Where Art Thou?로 되돌아갔을 때의 느낌은, 영화를 보고 사운드 트랙 앨범을 들을 때와는 반대였다. 보통 영화를 먼저 보고 사운드 트랙 앨범을 듣게 되면, 음악들에 연관된 영화의 장면, 느낌들을 연상하게 된다. 그래서 사운드 트랙 앨범이 일종의 영화를 다시 보는 것 같은 효과를 내는 것이라면, 이 경우에는 이 음악들을 듣기 위해 영화를 본 느낌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귀에 익은 음악들을 찾아내는 것이며, 내가 가졌던 음악의 느낌들이 영화 속에서 어떻게 표현되는가가 영화를 보는 나의 가장 주된 관심사였으니.
영화의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면, 때는 1937년 경제 공황기, 깊은 남부 미시시피. 죄수로 철로 작업을 하던 세 사나이의 탈주. 그들은 우연히 끝없이 펼쳐진 벌판의 교차로에서 기타리스트인 토미(Tommy Johnson)를 만난다. 토미는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댓가로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판 후다. 우여곡절 끝에 그들이 라디오 스테이션에서 토미와 같이 녹음한 음악이 히트하면서 조지 클루니와 그의 두 친구들은 자유를 찾고, 조지 클루니는 다시 가족들의 품에 안긴다. 이 영화는 호머의 오디세이를 미시시피, 1937년으로 옮겨 코믹하게 만든 영화라고 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다른 한편으로는, 이 음악들을 위해, 이 음악들에 대한 애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이 뮤직 다큐멘터리가 기록한, 내슈빌에서의 콘서트와 사운드 트랙 앨범의 디렉터인 T Bone Burnett은 1999년 봄, 코엔 형제와 함께, 이 영화에 참여해서 1930년대의 분위기를 다시 재현할 뮤지션들을 먼저 찾았고, 영화가 촬영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이 음악들을 바탕으로 영화의 기본적인 얼개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일부 뮤지션들은 영화에 직접 출연하기도 했는데, 영화 속의 기타리스트인 토미는 실제 기타리스트이자 가수인 Chris Thomas King이다. 또 전설적인 Fairfield Four는 이 삼인조의 탈옥수들이 마침내 추격자들에게 발각되어 죽음 직전에 이르는 장면에서 관 옆에 서서 노래를 부르는 바로 그들로 출연한다.
제2의 지미 헨드릭스라 불리우는 Chris Thomas King
이 음악들에 관해서 말해지는 컨추리 뮤직이나 블루스, 혹은 블루 그래스(bluegrass)라고 하는 음악에 관해서는 나는 잘 모른다. 누군가는 포크 뮤직, 민속 음악이라고도 부르는 이 음악은 1920년대 경제공황 때 처음으로 꽃피었었다고 한다. 그후, 블루스, 가스펠, 현악기 연주, 노동가 등과 섞이면서 발전해왔다고.
처음에는 The mountain music, the delta blues, gospel, the chain-gang chants였던 것들이 블루 그래스나 상업화된 컨추리 뮤직, 락앤롤로 전화해왔다고 한다. 당시 이 음악들은 보통 사람들의 일상 생활의 일부분으로, 특별히 뮤지션들이라기보다는 여기 저기 옮겨 다니며 각종 행사에 출연해서 연주를 하거나 이 스튜디오에서 저 스튜디오로 다니며 녹음을 해주는 그런 보통 사람들에게서 시작된 음악이라고. 현재는 메인스트림의 뮤직 인더스트리에서 밀려나, '산에 핀 야생화처럼', 작은 라디오 스테이션들을 통해서만 알려지는.
전설적인Fairfield Four
이 다큐멘터리 영화가 기록하고 있는 2000년 5월 24의 이들의 내슈빌에서의 공연은, 상업적인 목적에서보다는 컨추리 뮤직 명예의 전당(the country music hall of fame )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기획되었다. 이때는 이미 사운드 트랙 앨범의 판매가 호조를 보이고 있었고, 이 사운드 트랙의 디렉터인 버넷의 제안에, O Brother, Where Art Thou?를 통해 이 옛날 시기의 컨트리 뮤직에 대한 자신들의 애정을 표현하고자 했던 코엔 형제가 쾌히 동의하면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코엔 형제는 이 공연의 기록용 영화를 만들기 위해 펜 베이커와 함께 쟁쟁한 경력을 가진 다큐멘터리 감독들을 고용한다. 이 다큐멘터리의 다른 두 감독들인 nick doob, chris hegedus 는 일찌기 펜 베이커와 함께 유수의 다큐멘터리들을 만들어 온 베테랑들.
이들의 풍부한 경험 덕에, 그리고 아마도 풍요롭게 주어진 조건 (경제적, 기술적인 조건!) 덕에 이 영화는 여러 카메라에 의해 충분한 시간을 두고 안정감 있고 일관성 있게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 공연 중에는 세 대 정도의 카메라로 무대 위, 아래, 그리고 뒷쪽에서 차근히 촬영되었고, 공연 전의 뮤지션들의 리허설이라든지, 집에서의 인터뷰, 내슈빌의 거리 풍경 등이 차분히 촬영되어 공연 장면들과 편안하게 어울리도록 안착되어 있다.
The Cox Family
내슈빌의 공연장은 소박하고 보통 규모의 오래된 공연장이다. 이 공연을 위해 산을 내려온 랄프 스탠리는 작은 라디오 스튜디오에서 bluegrass 음악의 그 옛날의 시작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 진한 남부 사투리가 O Brother, Where Art Thou?에서의 조지 클루니의 다소 과장된 그것보다 정감 있다. Fairfield Four의 할아버지들(그들의 음악 경력은 거의 80년이 넘는다. 미국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의 사투리도 구수하다. If you want to hear something gooooo, sound goooooo, you should go to a church. O Brother, Where Art Thou?에 출연했던 Holly Hunter가 공연 직전, 산에서 내려온 랄프 스탠리와 악수를 나눈다. "공연 전인데 떨리지 않는가?"라고 묻는 그녀의 질문에, 이 꼬장꼬장해 보이는 백발의 할아버지는 "그러면, 당신은 연기를 시작하기 전 떨리는가?"라고 되묻는다.
홀리 헌터가 공연의 시작을 알리고 들어가고, 계속되는 무대의 진행은 이 전통음악의 연구가이자 그 자신 연주자이기도 한 John Hartford가 진행한다. 역시 구수하고 정감 있는 남부 사투리. 연주되는 음악들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친근하게 가수들을 소개하는 사이, 그 자신의 연주도 들려준다. 흥겹기도 하고 사무치게 서글프기도 한 바이올린 연주.
John Hartford의 무대에서의 모습
이 다큐멘터리에는 무엇보다도 공연 무대에서의 생생함이 잘 살아있다. 특히 뮤지션들에 굉장히 다가가 촬영할 수 있었던 이점 덕분에 이들의 무대 위에서의 감정의 느낌이 생생하게 잘 살아 있다. 이들의 공연에는 거대한 앰프나 신시사이저, 드럼 등의 공간이 필요 없다. 특수 효과나 이미지, 화려한 안무의 댄서들도 없고 몇 개의 간단한 악기들 --- 기타, 바이올린, 벤죠, 첼로 등이면 된다. 연주나 코러스도 각각 다른 뮤지션들이 넣어준다. 뮤지션들의 긴장한 느낌들이나 서로 호흡을 맞추기 위해 서로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느낌들까지도 생생히 느껴진다.
특히, 세 꼬마 소녀들(The Peasall Sisters)가 In the Highways (영화 O Brother, ... 에서는 조지 클루니의 딸 셋이 부르는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소녀들의 표정이나 감정들이 너무 생생하게 잡혀있어서 생경스러울 정도다. 셋 중 키가 삐죽 큰, 아마 나이 차이도 좀 날 것 같은 소녀의 사랑스러운 성숙함과 여유, 커다란 안경에 커다란 노란 색 리본을 머리에 달고 있는 두번째로 키가 큰 소녀 -- (여자아이?)의 긴장되고도 무표정한 느낌, 주근깨 투성이의 가장 조그만 소녀의 무표정한 ---자신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은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는 -- 모습.
이 다큐멘터리 영화가 뉴욕 맨해튼에서 개봉되기 이틀 전인, 2001년 6월 13일에 이들은 뉴욕의 카네기 홀에서 공연을 갖는다. 표는 매진이었고, 관객들의 반응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고 한다. 사운드 트랙 앨범은 작년 5개 부문 그래미상 후보에 올랐고, 이 내슈빌에서의 공연 실황 앨범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으며, 2002년 1월과 2월에는 미국 내 20개 도시를 돌며 순회 공연을 했다. 그리고, 물론, 뉴욕 카네기 홀에서의 공연 장면들은 이 영화에는 없다. 그래서 그들이 가장 큰 영예를 누리는 순간을 우리는 볼 수 없지만, 그들의 영예가 다시 부활하는 소박한 첫 순간을 우리는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공연을 진행했던 존 하필드가 우리에게 그의 생애 마지막으로 나누어주는 음악적 영감을 우리는 진정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존 하필드는 뉴욕 공연 두 달 전 이 슬픔의 세상을 떠났다.
May 2002 nikki
* Artist Links
www.emmylou.net
www.dantyminski.com
www.colinlinden.com
www.alisonkrauss.com
www.christhomasking.com
www.ceilimusic.com - The Whites
www.gillianwelch.com
www.coxfamily.com
www.johnhartford.com

EMIR KUSTURICA. 그의 이름의 스펠링은 생소했다. 그들의 음악이 생소했던 것처럼. 그리고 그들의 음악이 태어나고 자란 그 지역에 대한, 나의 무지에 대해 항의-- 풍자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에밀 쿠스트리차와 노스모킹 밴드
영화감독 에밀 쿠스트리차. 아마 한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그의 영화는 집시의 시간 (1989)이 아닐까? 그의 다른 영화들 : 블랙 캣 화이트 캣 (1998), 언더그라운드 (1995), 아리조나 드림 (1993), 아빠는 출장 중 (1985). 두 번의 칸느 영화제 수상, 한 번의 베니스 영화제 수상. 그리고 아주 기본적인 질문 한 가지 : 그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크로아티아? (그는 유고슬라비아 출신이다) 그는 집시의 일족인가? (아니다)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인터넷상에서 쿠스트리차 감독과 노스모킹 밴드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려 했을 때. 처음 나의 리서치 키워드는 Emile Kustricha. 관련 정보 없음. 갑자기 머리가 하얘지는 것 같았다. 그의 이름을 어떻게 표기하는가에 관한 한 아무 힌트도 나는 가진 바가 없었다. 그렇다면, no smoking band로는 가능할 것인가? 너무 흔한 이름인데? 휴, 이렇게 해서 나는 에밀과 그가 속한 노 스모킹 밴드의 보물 창고(공식 웹사이트)를 열 수 있었다. 그런데, 에밀 쿠스트리차를 어떻게 쓰는 거지? EMIR KUSTURICA. 그의 이름의 스펠링은 생소했다. 그들의 음악이 생소했던 것처럼. 그리고 그들의 음악이 태어나고 자란 그 지역에 대한, 나의 무지에 대해 항의-- 풍자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벤더스의 브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비웃는 영화라고 했던가.
기타를 연주하는 에밀 쿠스트리차
4월초, 이 영화를 본 곳은 런던 시내의 작은 아트필름 극장이었다. 열 명 남짓한 관객들과 함께. 무엇보다도 에밀 쿠스트리차의 영화라는 게 관심을 끌었고, 에밀 쿠스트리차의 밴드가 한다는 집시 펑크 락 음악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에 대한 호기심이 나를 그리로 이끌었었다. 그리고 몇 달 전 누군가가 이 영화를 소개하면서 빔 벰더스의 브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과 비교해놓았던 문구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내 머리 속에 남아 있는 상태였다. 벤더스의 브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비웃는 영화라고 했던가. 어쨌거나, 이 거장의 영화 감독이 만든 뮤직 다큐멘터리 영화가 어떨 것인가 하는 게 가장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예술적 기대가 좌절되는 순간, 그냥 그런 기대들을 순순히 포기하고 영화를 보기 시작하면서, 나는 이 영화가 갖고 있는 북적 북적대고 거친 흥겨움들에 빠져들고 있었다.
에밀과 보컬 닥터 넬 카라일릭
영화는... 실망스러웠다. 이 영화를 에밀 쿠스트리차라는 거장의 영화 감독이 만들어 낸 훌륭한 미적, 예술적 영화로서 파악, 감상하려는 모든 노력들을, 이 영화는, 좌절시키고 있었다. 그렇고 그런 뮤직 다큐멘터리 영화라고 해야 하나. 그러나 그런 예술적 기대가 좌절되는 순간, 그냥 그런 기대들을 순순히 포기하고 영화를 보기 시작하면서, 나는 이 영화가 갖고 있는 북적 북적대고 거친 흥겨움들에 빠져들고 있었다. 눈을 반짝이며 스크린을 바라보면서 수시로 깔깔거리며 웃어젖히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초반 30분 정도 조용하던 객석에서 나같이 사람들이 깔깔, 껄껄 웃어젖히고 있었다. 그건 비웃듯 웃는 피식 웃음이 아니라 누군가 몸을 간지럽힐 때 터져 나오는 웃음처럼 정말 순수하고 즐거운 웃음이었다. (그게 무엇인지 당신이 안다면).
누군가의 인터뷰에 끼어 들어 농담을 던지거나 갑자기 서로 설전을 벌이거나 비웃음을 던지거나. 이렇게 해서는 정숙하고 심각한 인터뷰의 아우라가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덕분에 우리는 이 아티스트들의 카메라 앞에서 정색하고 집중해서 말하는 모습이 아니라, 술자리에서 수줍게 자기 옛날 얘기를 하듯 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바이얼리니스트 데얀
영화 속에서 그들은 투어 여행 중. 밴드 멤버들의 어린 시절과 과거의 음악 경력에 대한 인터뷰들은 주로 그들의 투어 버스 (비행기가 아니다!)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버스가 작기 때문인 지 고정된 인터뷰 프레임 안에서 우리는 대개의 멤버들의 얼굴을 다 볼 수 있다. 단지, 인터뷰에 참여하는 사람은 카메라 바로 앞줄로 바꿔 앉는다. 그리고 바로 붙은 옆 좌석에도 항상 누군가가 앉아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밴드 멤버만 해도 10명, 그리고 사운드 엔지니어까지, 대개 11명의 모습을 어느 인터뷰에서나 볼 수 있다. 단지 그들의 위치가 바뀌고, 자세가 바뀌었을 뿐. 그리고 누군가의 인터뷰에 끼어 들어 농담을 던지거나 갑자기 서로 설전을 벌이거나 비웃음을 던지거나. 이렇게 해서는 정숙하고 심각한 인터뷰의 아우라가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덕분에 우리는 이 아티스트들의 카메라 앞에서 정색하고 집중해서 말하는 모습이 아니라, 술자리에서 수줍게 자기 옛날 얘기를 하듯 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들의 어린 시절이나 과거 음악 경력 이야기들에는 흑백의 8mm 카메라로 그 시절에 촬영된 모습들이 삽입된다. 그들의 자신의 음악 세계에 대한 인터뷰들은 그들의 라이브 무대에서의 연주 모습들과 오버랩된다.
그들의 라이브 무대 공연 모습들은 그들의 인터뷰나 또 다른 장면들과 연결되면서 정교하게 편집되어 있다. 인터뷰의 내용들에 맞추어, 특정 연주자의 연주 장면들을 연결시키는 것도 도입부와 전환부를 정확하고도 유려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연주 장면들은 그저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관객들이 그렇게 연주 내내 열광하고 또 함께 같이 흥겨워하는 (밴드에 대한 일방적인 열광이 아니라) 라이브 모습을 보는 것도 드물 뿐만 아니라, 그들이 무대에서 공연하는 자유스럽고 자연스런 모습과 그 음악을 듣는 것도 새롭고 신기한 경험이었다. 신기하고 좋아서 자꾸 자꾸 보고 싶고 듣고 싶은 심경이었기에 라이브 장면이 나올 때마다 조금 더 조금 더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역시 이 기분이 어떤 것인지 당신이 안다면).
이 서로 다른 모든 음악적 영향들은 이 발칸 지역의 역사가 얼마나 많은 다른 지역들과 연관되어 있는가를 반증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이 서로 다른 음악들을 실어 나르며 토착화시킨 데는 집시들의 역할이 컸다고.
드러머 스트리보
그들의 음악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다른 사람들의 말을 빌리면, 집시 테크노 락 뮤직이라고도 하고, 동유럽의 포크 락이라고도 하고, 미친 그리이스 - 유태계 결혼식 음악 같이 들린다고도 한다. 에밀 쿠스트리차 본인의 말을 빌리면, 그들의 음악은 발칸 지역에 존재하는 모든 음악 장르들이 혼합된 음악이라고 한다. 집시 음악, 세르비아, 루마니아, 헝가리, 알바니아, 보스니아의 음악에다가, 재즈, 아라비아, 터키, 러시아, 그리이스, 스페인, 독일, 인디아 음악의 영향이 겹쳐졌고, 또 거기에 락 음악이 섞여 들어가 있다. 그리고 이 서로 다른 모든 음악적 영향들은 이 발칸 지역의 역사가 얼마나 많은 다른 지역들과 연관되어 있는가를 반증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이 서로 다른 음악들을 실어 나르며 토착화시킨 데는 집시들의 역할이 컸다고. 마치 꽃가루를 실어 나르는 꿀벌처럼 그들은 여기에서 저기로, 저기에서 여기로 자유롭게 이동하며 서로 다른 지역들을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연결시켜 온 것이다.
노 스모킹 밴드의 밴드 멤버들의 배경 역시 그들의 이 특이한 음악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 영화감독인 에밀 쿠스트리차가 베이스 기타. 그는 재즈 음악을 별로 들어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재즈적인 연주를 한다는 평이다. 드러머는 에밀의 아들 스트리보(Stribo). 레게 음악을 가장 좋아한다. 섹스폰을 부는 내쇼(Nesho)는 재즈 연주자였다.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조키(Zoki)는 그 전에는 내내 장례식에서 연주했었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데얀(Dejan)은 정식 음악학교에서 공부했지만, 발칸 지역의 모든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 보컬을 맡고 있는 닥터 넬 카라일릭(Dr. Nelle Karajilic)은 깊고 굵은 음성을 가졌고, 이 밴드의 초창기부터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했으며, 주로 거리에 나가서 사람들이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을 그들의 언어로 담아서 표현하는 가사들을 쓴다.
서로 각자 다른 색깔을 갖고 있어서 그들의 음악은 곡마다 성격이 다르면서, 또 여러 층의 음악들이 겹쳐져 있다는 느낌을 준다는 게 그들의 음악에 대한 서구 비평가들의 중평이다. 서로 다른 것들이지만 손색없이 하나로 섞여 있어 서구식의 락 뮤직 개념으로는 장르를 잡아낼 수 없고, 그러면서도 라이브에서는 관객들을 그냥 의자에 앉은 채로 남겨두지 않는 미치도록 흥겹고 과격하고 유머스러운 음악을 만들어낸다는 것.
Unza Unza, 이렇게 이 말을 두 번 되풀이하면 우리 몸 안에서 단백질이 만들어지며, 특히 이 효과를 증진시키고 싶으면 이 음악의 리듬에 맞춰 춤을 추면 된다고 한다. 이것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효과라고
노스모킹 밴드의 프레스 커버리지
이 밴드는 유고슬라비아에서는 단순한 록 밴드 이상의 하나의 사회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여진다고 한다. 밴드 초기 시절부터 정치적인 풍자들을 서슴치 않았으며, 발칸 지역의 예민한 사회적, 정치적 상황 변화를 풍자적으로 고스란히 담아내는 가사에 그 지역의 특색을 독창적으로 살려낸 음악을 하고 있기 때문.
그들이 작년에 낸 음반 [Unza Unza Time]은 발칸 지역의 서로 다른 음악들을 4분의 2박자 음표의 싱글 리듬으로 묶어낸 것이라고 한다. [Unza Unza]는 그 비트음의 소리를 딴 것. Unza Unza, 이렇게 이 말을 두 번 되풀이하면 우리 몸 안에서 단백질이 만들어지며, 특히 이 효과를 증진시키고 싶으면 이 음악의 리듬에 맞춰 춤을 추면 된다고 한다. 이것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효과라고 (정말 이 밴드다운 농담이다). 이 영화 안에는 에밀 쿠스트리차가 이 음반을 내면서 만든, 비디오 클립을 제작하는 과정이 보여진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서는 이 클립의 완성본을 볼 수 있다. 1920년대 흑백 무성 코미디 영화의 스타일로 만들어진 이 비디오 클립은, 말 그대로 정신없고 왁자지껄하면서 괴상한 초현실주의적인 코미디 영화로, 그들의 음악과 함께, 초현실주의적으로만 느껴지는 발칸반도에서의 최근의 삶의 실존의 느낌들을 담아낸다.
이 밴드가 쿠스트리차의 밴드가 아닌 것처럼, 이 영화는 쿠스트리차의 (예술)영화가 아니라 이 밴드의 즐거운 영화다. 과격하고 못되고 미친 기운이 넘치는, 그렇지만, 즐겁고도 또 씁쓸한.
Unza Unza Time 앨범 커버
그래서, 당연히, 쿠스트리차 버젼의 브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보러 온 사람들은 실망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이 영화가 (그리고 이 밴드도 함께) 쿠스트리차의 명성을 팔아 관객을 끌어들이려는 기만적인 영화라고 이 영화에 대한 혐오를 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이 밴드의 음악을 쿠스트리차의 영화적 내용과 스타일에만 연결시켜 이해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그렇다, 이렇게 토를 다는 것이 평론가의 역할이다), 이 밴드가 쿠스트리차의 밴드가 아닌 것처럼, 이 영화는 쿠스트리차의 (예술)영화가 아니라 이 밴드의 즐거운 영화다. 과격하고 못되고 미친 기운이 넘치는, 그렇지만, 즐겁고도 또 씁쓸한.
april 2002 nikki

하지만 똑같은 범작이라면 이걸 하고 싶었다.
커트 코베인
가슴의 다시 여는 첫 장… 신선한 무엇인가를 건져올리지 못하고, 예전의 뜨거웠던 기억으로 뒷걸음질을 하는 것 같아… 미안한 기분이다. 그렇다고 걸작을 꼽지도 못했다. 그저 그런 범작의 뮤직 다큐멘터리로 시작하게 됐다. 다른 작품들을 공을 들여 찾아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저 그런 범작들만 손에 잡혔다. 나쁘지 않은. 그렇다고 특별한 뭔가가 있는 것도 아닌. 하지만 똑같은 범작이라면 이걸 하고 싶었다.
그들의 음악을, 그리고 그들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다. 잊혀지지 않을 순간을, 어떤 정점을, 그 감정을 받아들이는 어떤 관점에 대한 기록.
커트 코베인
뮤직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혹은 뮤직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지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 아마도 그 첫번째 이유는, 인기 있는, 혹은 자신이 좋아하는 뮤지션들과 그들의 음악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하는 욕망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그런 욕망에 부합하는 상업적인/산업적인 계산과 욕구. 실제로 현 시점에서 최상의 인기를 구가하는 밴드들의 뮤직 다큐멘터리는 그들을 속속들이 이해하고 소유하고 싶은 팬들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동시에, 밴드들의 인기의 지속과 증진에 도움이 된다. 두번째 이유는, 아마 첫번째 이유와의 연장선상에서, 그들의 음악을, 그리고 그들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다. 잊혀지지 않을 순간을, 어떤 정점을, 그 감정을 받아들이는 어떤 관점에 대한 기록. 그것에 상응해서, 뮤직 다큐멘터리를 보는(혹은 사는) 이유는, 소유와 이해, 그리고 기억하려는 욕망 때문일 것이다. 뮤지션들과의 교감, 혹은 그 음악이 빚어냈던 상호교감의 정점을 간접 체험, 공유하려는 욕망.
<Teen Spirit : A Tribute to Kurt Cobain>은 기억하기 위한 다큐멘터리다.
커트 코베인
<Teen Spirit : A Tribute to Kurt Cobain>은 기억하기 위한 다큐멘터리다.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 그에 관한 기억들을 정리하고 잊지 않는다는 것. 그런데, 이 다큐멘터리의 시작은 너바나의 어떤 음악 레코딩도, 아무 공연 장면도 이 다큐멘터리 안에는 실려있지 않다는 친절한 안내문으로 시작된다. 아무 노래도 없다…. 아무 공연도 없고.. 그러면 어떻게, 그의 음악에 관해 기억할 것인가? 그래서 이 다큐멘터리를 보는 경험은 의혹으로 시작됐다. 그리고 의심. 비극스럽게 죽은 자들을 베껴먹는 또 하나의 사기극을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하는.
너바나의 음악과 그들의 음악이 시애틀의 언더 그라운드 음악 씬으로부터 그렇게 높게, 메인스트림의 톱까지 뛰어오르게 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금은 당시 미국의 사회, 경제적인 사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지도 모른다.
커트 코베인
75분짜리인 이 다큐멘터리의 구성은 생각보다 단촐하다. 네 명의 주요 인터뷰어가 전체의 이야기를 끌어간다. Grant Alden(시애틀 언더그라운드 뮤직 씬을 주로 다루던 '시애틀 로킷'의 에디터), Charles Peterson(너바나의 사진을 찍었던 사진가), Ann Powers(미국의 대중지 '빌리지 보이스'의 편집자), 너바나가 처음 음반을 냈던 Sub Pub의 Jonathan Poneman. 그들은 개인적인 이야기들보다는, 시애틀 언더그라운드 뮤직 씬과 당시의 미국의 사회적, 음악적 기류에 기초한 나름의 분석들을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흠, 너바나의 음악과 그들의 음악이 시애틀의 언더 그라운드 음악 씬으로부터 그렇게 높게, 메인스트림의 톱까지 뛰어오르게 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금은 당시 미국의 사회, 경제적인 사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지도 모른다.
다큐멘터리의 첫 챕터는 '애버딘'이다. 시애틀 남쪽으로부터 백 마일 정도 떨어진 이 외지고 낙후된 주변의 타운에서 커트 코베인은 태어나고 자랐다.
커트 코베인
다큐멘터리의 첫 챕터는 '애버딘'이다. 시애틀 남쪽으로부터 백 마일 정도 떨어진 이 외지고 낙후된 주변의 타운에서 커트 코베인은 태어나고 자랐다. 후줄그레하고, 보는 것만으로도 절망스러워 보이는 이 타운의 풍경이 보여진다. 이 다큐멘터리의 주된 비쥬얼 이미지들은 이렇게 다소간 임의적으로 보이는 풍경, 사진, 일러스트레이션 등으로 이루어진다. 주된 인터뷰어 중의 한 사람인 포토그래퍼 찰스 피터슨의 사진들도 이 비쥬얼 이미지들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이런 임의적인 선택일 수 있는 비쥬얼 이미지들은 인터뷰어들의 지적이고 명료한 코멘트들과 합리적이고 경제적으로 맞아떨어지게 배치되어 있다. 그래서 너바나의 음악적 세계에 대한 이해를 심화, 확장시키는 시각적 이미지로 작용한다. 너바나의 직접적인 어떤 비쥬얼들도 이용할 수 없는 제한 때문에 고안해낸 방법이겠지만, 결과는 오히려 효과적으로 너바나에 대한 이해를 시각적인 상상력으로 확장시키는 긍정적인 결과를 낳은 셈이다.
왜 악기를 부수는가? 주된 리듬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커트 코베인
너바나의 TV 인터뷰 장면들이 세 개 삽입되어 있다. 비가 흩뿌리는 날, 어느 강가에선가 이 세 사나이가 쪼그리고 앉아 한 인터뷰. 프랑스 TV를 위해 한 것으로 보이는 인터뷰. 왜 악기를 부수는가? 주된 리듬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등을 묻는. 이 뮤직 다큐멘터리의 비디오 커버에는 "Director's cut : Include never-before-seen footage"라고 광고되어 있지만… 솔직히 어떤 장면이 그렇다는 것인지는 알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미 이 두 인터뷰들은 이미 커트 코베인 살아 생전에 나왔던 다른 다큐멘터리에서 이미 본 적이 있고, 다른 인터뷰 하나는 MTV 스튜디오(?)에서의 인터뷰로 보이는 데, 그렇다면 그 인터뷰가 방영이 안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너바나에 대해, 커트 코베인을 향해 이런 평이한 애정과 존경의 말들과 태도들을 붙여서는 안 되는 것 아닐까?
너바나
정말이지, 이 다큐에는 너바나의 공연, 연주 장면은 하나도 없다. (그래도) 그들의 초기 음악들, 연주들, <Where did you sleep last night?>이 백그라운드에 흐르기는 한다. 그러면서 중간 중간에는 팬들의 얘기들이 끼어 든다. 정말 멋진 밴드였다… 정말 멋진 기타 플레이어, 드러머였다… 그들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정말 그렇고 그런 말들과 정말 그렇고 그런 태도들. 너바나가 아니라 다른 어떤 밴드, 다른 뮤지션들에 대해서도 나올 수 있는 평이한 말들. 너바나에 대해, 커트 코베인을 향해 이런 평이한 애정과 존경의 말들과 태도들을 붙여서는 안 되는 것 아닐까?
커트 코베인을 '기억'하려는 나의 욕구를 그에 관한 기억을 너무 쉽게 구성하려는 이 다큐멘터리는 여전히 불만족의 상태로 남겨놓는다.
너바나
결국 이 다큐멘터리는 한 아티스트의 비극적 삶을 가장 고상하고 예술적인(?) 방식으로 이용해내지 못한다. 속이 뻔히 보이는 사기극은 아니지만, 그리고 애정과 지적인 성찰과 이해의 노력이 있지만, 너무도 분명하게 이 다큐멘터리는 너무 '쉽게' 만들어졌다. 더 많은 노력과 시간, 정성(그리고 더 많은 돈과 기술적 투자)을 드릴만큼의 애정과 성실성이 없었다는 것은 그래서 '너무 쉽게' 드러난다. 이렇게 해서, 커트 코베인을 '기억'하려는 나의 욕구를 그에 관한 기억을 너무 쉽게 구성하려는 이 다큐멘터리는 여전히 불만족의 상태로 남겨놓는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은 불만들을 토로하고 말 것이면서도 너바나의 이 다큐멘터리를 나는 기어이 택하고 만 것인가? 바로 옆에 놓여 있던 '마돈나'나 '에어'가 아니라.
unplugged in new york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은 불만들을 토로하고 말 것이면서도 너바나의 이 다큐멘터리를 나는 기어이 택하고 만 것인가? 바로 옆에 놓여 있던 '마돈나'나 '에어'가 아니라. 가장 뜨겁고 따가 왔던 상처를 다시 열어보며 그때의 아찔한 현기증과 고통을 '기억'하고 - '즐기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상처를 누군가와 공유하고 있다고 느끼고 싶어서. 뮤직다큐멘터리의 숨은 욕망. 채워지지 않은.
관련기사/웹사이트

마츠모토 레이지 역시 테츠카 오사무로 촉발된 일본 애니메이션의 초기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은하철도 999
일본 애니메니션의 대부 테츠카 오사무의 <우주 소년 아톰>이 일본 TV 애니메이션에서 거둔 성과는 이후 저패니메이션의 정착과 활성화로 이어졌다. 테츠카 오사무에 대한 지금의 평가들이 어떠한 식으로 양분되든 그가 뿌리내린 저패니메이션에 대한 공로는 인정받을만하고, 테츠카 오사무 이후, 많은 일본 만화 시장과 애니메이션 시장은 다양한 주제의식과 여러 가지 상업적 활로 등을 통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마츠모토 레이지 역시 테츠카 오사무로 촉발된 일본 애니메이션의 초기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에게 최고의 명성을 안겨준 작품은 자신의 원작 만화이자 린 타로 감독에 의해 애니메이션화된 <은하철도 999>이다. 국내에도 두차례나 방영되었던 이 작품은 기계인간의 시대를 배경으로, 주인공 철이의 복잡한 가계도(부모의 불륜과 야망을 비롯한 성인 취향의 설정들에 토대를 둔)에 기반하여 어머니를 닮은 메텔이라는 긴 머리 여인과 철이가 함께 떠나는 안드로메다 성운으로의 길고 긴 우주 기차 여행의 과정들을 다룬 작품이다. 정착하게 되는 행성들에서 여러 계급과 다양한 삶의 양상들, 특히 비참한 삶을 기계인간이 되는 것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여러 우주인들을 만나게 된다. 모두들 철이와 마찬가지로 기계인간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데, 결국 철이는 이 경유지들에서의 경험들을 토대로 기계인간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진정 인간다운 삶, 즉 죽음을 받아들여야하는 한정된 삶을 선택하게 된다.
단순한 테크놀로지의 시대를 넘어선 우주로 확장된 시대의 인간들의 삶의 비인간화라는 것은 이후의 일본 사이버-펑크 애니메이션들의 대다수가 차용한 주제의식이기도 하다
우주전함 야마토
마츠모토 레이지의 <은하철도 999>는 70년대 후반 대단한 인기를 끌게 된 일본 TV 애니메이션의 최고 작품 중의 하나로 평가되고 이후 극장판이 만들어졌다. 이 작품이 가진 매력 중의 하나는 메텔을 비롯한 여성 캐릭터들이 갖는 에로티시즘이기도 했고, 여러 경유지들에서 펼쳐지는 우주 생명체들의 삶이 인간의 삶과 욕망을 대변하는 그 자체라는 점들이기도 했으며, 한편으로는 삶의 영원성을 포기할 만큼 인간적인 그 무엇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자세이기도 했다. 단순한 테크놀로지의 시대를 넘어선 우주로 확장된 시대의 인간들의 삶의 비인간화라는 것은 이후의 일본 사이버-펑크 애니메이션들의 대다수가 차용한 주제의식이기도 하다. 마츠모토 레이지는 <은하철도 999> 이전에 78년 작품 <우주전함 야마토>로 인해 일본 극장가에서 대단한 흥행 성공을 거두기도 하였다. 이 작품은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세인들의 우려를 낳게 한 작품이기도 하였으며, 테츠카 오사무가 정면으로 마츠모토 레이지의 작품 세계를 비판하게 한 결정적 계기를 만든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나 마츠모토 레이지는 <은하철도 999>, <하록 선장>, <천년 여왕> 등의 일련의 우주 오딧세이아 시리즈들을 통해 자신의 작품세계의 견고한 기반을 쌓았다. 그리고 이 작품들은 한국과 일본의 삼사십대들에게는 추억의 애니메이션들로 기억되고 있다.
[Homework]는 프랑스 내에서의 새로운 일렉트로니카 군단의 붐을 주도
DAFT -A Story About Dogs, Androids, Firemen And Tomatoes
프랑스의 두 청년 기-마누엘 드 호헴 크리스토(Guy-Manuel de Homem Christo)와 토마스 방갈터(Thomas Bangalter)가 이십세를 전후로 해서 만들었던 앨범 [Homework]는 프랑스 내에서의 새로운 일렉트로니카 군단의 붐을 주도한 것에 그치지 않고 세계적인 흐름 중의 하나로 자신들의 프로젝트인 대프트 펑크의 스타일을 각인시키게 한 작품이다. 미니멀리즘의 적극적인 차용이라고 본인들이 밝힌 바 있는 이 작품은 하나의 아이디어로 10분에 다다르는 트랙들을 끌고 간 역량과 프로그레시브 하우스와 훵키 사운드의 결합, 강박증에 가까운 그 단순한 비트의 반복적 진행으로 플로어를 사로잡았다. [Homework]의 사운드는 이들의 익스페리멘틀리즘이 낳은 중독과 같은 비트를 선사했다. 또한 이 앨범 수록곡들은 여러 뮤직 비디오들로 장르의 통합과 전이의 새로운 지점들로 나아갔는데, 그 음악들이 가진 실험주의가 90년대 이후의 가장 실험적인 영상 작가들의 마인드와 견고하게 결합하였다. 스파이크 존즈가 만든 뮤직 비디오 <Da Funk>의 개 인간과 그 주변에 대한 기이한 내러티브, 미셀 곤드리의 아크로바틱 경연장의 세계 <Around The World>, 그리고 한편에서는 토마토 소스 스파게티의 제작과정과 요리법, 다른 한편에서는 레이브 파티에 대한 정부 규제를 항의하는 매니페스토를 담은 <Revolution 909> 등의 작품들이 출현하게 되었다.(대프트 펑크는 최근 바로 [Homework]에 수록된 뮤직 비디오들을 모은 DVD 타이틀 'DAFT -A Story About Dogs, Androids, Firemen And Tomatoes'를 발매했다.)
디제이 컬처와 현재의 레이브 코드 내에서 읽혀지는 테크노 계열의 음악들에 대한 자기반영적 고민들을 담은 [Discovery]
Digital Love
현재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대프트 펑크의 새로운 싱글 <One More Time>은 이들의 강화된 훵키 사운드, 미니멀리즘 대신에 택한 70, 80년대로의 회고적 무드, 로맨틱 팝과 라운지 스타일의 결합으로 전형적인 팝의 송라이팅을 군데군데 채택한 차별성을 명확하게 보이고 있는 작품이다. 훵키 기타 솔로의 80년대 버전 <Aerodynamic>과, 팝의 멜랑콜리아의 세계에 대한 재능을 드러내는 <Digital Love> 역시 대프트 펑크의 새로운 음악적 기착지점으로 이들의 새 앨범 [Discovery]가 도달한 비전이 [Homework]의 전혀 다른 의미에서 실험적 시도의 소산임을 보여준다. 디제이 컬처와 현재의 레이브 코드 내에서 읽혀지는 테크노 계열의 음악들에 대한 자기반영적 고민들을 담은 [Discovery]는 대프트 펑크의 수많은 음악적 아이디어와 성찰의 결과물이라 하겠다.
메텔이 미모의 베이시스트로 등장하고, 장발이 된 철이가 드러머로 등장하며, 마이클 잭슨을 닮은 인물이 키보디스트로, 애꾸눈이 아닌 하록이 기타리스트로 등장
daft punk music video
'헤비 메탈'을 통해 만화의 자국 정체성을 가진 프랑스의 테크노 듀오 대프트 펑크가 [Discovery] 수록곡들의 뮤직 비디오를 위해 선택한 것은 마츠모토 레이지이다. 메텔이 미모의 베이시스트로 등장하고, 장발이 된 철이가 드러머로 등장하며, 마이클 잭슨을 닮은 인물이 키보디스트로, 애꾸눈이 아닌 하록이 기타리스트로 등장하는 밴드가 <One More Time>을 부르며, 은하계의 모든 주민들이 이 밴드의 음악을 즐겁게 듣고 함께 춤을 춘다. 그런데 우주의 검은 무리들이 이 밴드의 네 멤버들과 악기들을 납치해가고(<Aerodynamic>), 미모의 베이시스트를 연모하는 기타 모양의 우주선을 조종하는 청년이 납치 사실을 알게 되어 검은 무리들의 뒤를 쫓다가, 검은 무리들이 밴드 멤버들을 데려간 지구에 불시착하게 된다(<Digital Love>). [Discovery]의 세 트랙이 일련의 시리즈물로 새로운 극으로 재구성된 이 뮤직 비디오들은 일본에서는 이미 대단한 화제를 불러모으고 있다. 또한 철이와 메텔의 우주 여행기가 전국민적 인기를 얻었던 국내에서도 대프트 펑크와 마츠모토 레이지의 결합은 대단한 임팩트를 선사한다. 돌아온 대프트 펑크가 회고적 무드의 70, 80년대의 팝과 댄스뮤직의 융합지점에서 만나게 되는 마츠모토 레이지는 대프트 펑크가 보여주는 새로운 전략 이상이다.
[Discovery]는 70년대의 시점에서 그려진 우주 시대의 인물들을 그려낸 일본 만화의 회고적 세계와의 만남
daft punk music video
[Homework]가 뮤직 비디오계의 젊은 야심아들과의 결합이었다면 [Discovery]는 70년대의 시점에서 그려진 우주 시대의 인물들을 그려낸 일본 만화의 회고적 세계와의 만남이다. 그 세계는 분명한 선악구도를 가지고 있고, 그 안에서 위기에 처한 아름다운 여주인공을 구하기 위한 기사가 등장하고, 또 다른 남자주인공은 자신의 용기를 보여주지만 결국 적의 엄청난 위력에 일단은 굴복하게 되고... 내러티브가 비록 진부한 맥락으로 흐르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 어찌 드라마틱하지 않고 흥미진진하지 않다 말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이 뮤직 비디오들에 넘쳐나는 사이키델릭의 분위기들을 만들어내는 디지틀 화소들의 위력은 지난 세대의 애니메이션들이 갖지 못한 영상적 강도 또한 가지고 있다. 프랑스의 일렉트로니카 에어가 만들어내는 애니메이션의 차용이나, 최근의 라이도헤드의 극히 미묘한 예술성의 극한을 맴도는 애니메이션 뮤직 비디오들을 비롯한 많은 애니메이션과 음악의 결합은 뮤직 비디오의 또 다른 영역으로 나아가고 있다.
대프트 펑크와 만난 마츠모토 레이지는 그 기이한 조합으로 인해 포스트모던 시대의 새로운 양상들을 드러낸다
daft punk
대프트 펑크와 만난 마츠모토 레이지는 그 기이한 조합으로 인해 포스트모던 시대의 새로운 양상들을 드러낸다. 문화적 융합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컨텍스트 하에서 결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으며, 마츠모토 레이지의 만화 캐릭터들이 반복되어 또 다른 의미로 나아가는 것은 대프트 펑크가 동반한 차별성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다. 대프트 펑크의 새 시대에 걸맞는 전략은 지난 세대의 일본 만화와 유로 디스코나 라운지 뮤직을 오늘에 다시 불러와 변주를 통해 지금도 유효한 가치를 드러냄과 동시에 비단 일렉트로니카 내부에서 뿐만 아니라, 음악사 내부에서 자신들이 가져야할 위치에 대한 탐색전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정형화된 스타의 이미지를 포착하는 대신에, 얼굴을 반듯이 찍어내는 대신에, 안톤 코빈은 모노크롬 사진 속에 영혼을 담고자 한다. 그의 사진 속에는 피사체의 인물이 놓여 있다기 보다는 그 인물의 내부의 울림이 있다. 그를 세계적인 작가로 만든 작품 중의 하나가 '엘리펀트 맨'을 공연 중이던 데이빗 보위를 분장실에서 찍은 것이다. 거기에는 피곤하고 지친 데이빗 보위의 모습이 있다. 외면적인 대상물만을 포착한다는 사진에서 사람들은 어떤 느낌을 얻고 그 안에 숨겨진 진실들을 포착하기 시작한다. 안톤 코빈의 사진을 통해 시각매체들이 갖는 또다른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세계적인 사진작가로 높은 명성을 얻고 있는 안톤 코빈(Anton Corbijin)은 네덜란드 태생이다(그의 이름은 '코-빈'이라고 발음된다고 한다). 55년 생인 그는 72년에 목사인 아버지의 카메라로 동네 밴드의 공연장에서 사진을 찍는 것을 시작으로, 즉 음악에 대한 사랑으로 사진과의 인연을 갖게 되었다. 네덜란드 음악잡지 Oor에서 일하던 그는 1979년에 런던으로 온다. 이유는 그가 너무나 사랑하는 밴드 조이 디비전을 가까이서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유명한 지하철 역에서의 조이 디비전 사진을 찍게 되었고, 영국의 음악 주간지 NME(뉴 뮤지컬 익스프레스)에서 사진작가로 일하다가 롤링 스톤즈, 존 리 후커, 브라이언 페리, U2 등의 수많은 뮤지션의 사진을 찍었다. 당시에 이미 지명도가 상당히 높았던 안톤 코빈은 자신의 성공은 바로 음악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사진작가들이 음악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그저 대중 홍보용으로 사진을 찍어댔기 때문에 정말 해당 뮤지션과 그들의 음악을 제대로 표현해내는 사진이 없었다고 했다. 실제로 안톤 코빈의 사진은 피사체가 된 뮤지션들의 음악을 찍어내고 있었다.
또한 비주얼 아트의 마술사인 안톤 코빈은 여러 뮤지션들의 이미지를 직접 만들어내기도 했다. U2의 보노는 '밴드의 이미지라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안톤 코빈을 통해서 시각적인 것의 힘을 알게 되었다'라고 했다. 안톤 코빈은 U2와 여러 장의 앨범 재킷 작업을 했는데 Achtung Baby의 작업을 기점으로 U2의 이미지를 완고한 아일랜드의 종교적 분위기로부터 완전히 탈피시켜 데카당스하고 세기말적인 분위기로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U2의 멤버들은 화장을 했고, 안톤 코빈은 이러한 변화를 통해 초현실주의적인 이미지와 대중 소비사회의 역군의 이미지, 그리고 뮤직 비디오 'One'에서 드러나듯이 퇴락한 시대의 쇠락한 개인들로 그려냈다. 이것은 디페쉬 모드와의 작업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발랄한 뉴웨이브 세대의 적자였던 디페쉬 모드의 생존은 아마도 그들의 이미지의 변화에 기인했을 것이다. 그저 펑키한 헤어스타일의 만년 청년같았던 디페쉬 모드가 섹슈얼한 이미지를 풍기기 시작했을 때, 그 뒤에는 모든 무대 디자인 전체를 일임했던 안톤 코빈의 손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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