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네트워크 로고

검색

검색하기

컨텐츠 모음

중요글

  1. 인천펜타포트아츠페스티벌 개막공연(7.31)에 초대합니다.

    안녕하세요. 2010 인천펜타포트페스티벌 총감독 박준흠입니다.   어제까지 록페스...
  2. 2010 인천펜타포트페스티벌 사무국 소개

    ‘결의(決意)’에 찬 표정 또는 ‘천진난만(天眞爛漫)’한 순간   축제를 만든다는...
  3. 2010 인천펜타포트 아츠페스티벌 라인업 (45팀)

    이제 2010년 인천펜타포트아츠페스티벌 프로그램과 라인업이 결정되어서 소식을 전합니다....
  4. 가슴네트워크 10주년 기념축제 현장 스케치

      가슴네트워크 10주년 기념축제(2009 가슴네트워크축제)가 성황리에 마무리 되었습니다...
 

아티클 영화/영화.애니메이션 63 POSTS

  1. 소년교주의 영화의 재구성


    귀결되는 인물들, 멈춤과 가동의 미학

    <포도나무를 베어라>




    뜬금없는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앞에 더 있어야 할 말을 생략한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감독이 영화를 보면서 풀어야 할 일종의 수수께끼로 던져놓은 것인 줄 알았는데 또 그건 아닌 모양이다. 영화에서 주인공 수현이 수도원에 들어가서 처음 밥을 먹는 장면에 나오는 요한복음 15장 5절은 제목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나 다름없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너무 쉽게 설명이 나와 버리는 것을 보니 수수께끼는 아닌 모양이다.

    난 민병훈 감독의 전작은 보지 못했다. 그래서 감독이 어떻게 발전하고 있고 어떤 일관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전작들의 제목(<벌이 날다>, <괜찮아, 울지마>)에 <포도나무를 베어라>까지 연결해서 보면(감독은 스스로 이 영화들을 두려움에 관한 3부작이라고 명명했다.) 모두 쉬운 느낌의 제목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감독이 쉽게 제목을 정하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바꿔 말하면 관객들이 영화를 쉽게 보기를 원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게 과연 뭘 뜻하는 거지?’와 같은 호기심의 유발. 영화 만들기에 대한 감독의 진지함이 엿보인다.

    그 진지함은 영화 전반에 녹아들어 감독이 표현하고 싶은 어떤 상을 보여준다. 현란한 촬영기법은커녕 흔한 디졸브 조차 찾아보기가 어렵다. 음악조차도 오프닝과 엔딩에서 동일하게 흘러나오는 피아노소리가 거의 전부다. 악을 쓰며 난동을 피우는 게 명연기라고 생각하는 요즘 배우들과 비교했을 때 <용서받지 못한 자>의 신인 서장원에서부터 노련한 기성배우 기주봉까지 모두 일상적인 모습 그대로를 연기한다. 아니 연기자들의 연기가 절제되어 영화에 고루 섞인다는 표현이 더 맞는 것 같다. 철저한 컨트롤을 통해 최대한 현실적으로 표현하려고 한 감독의 의지가 엿보인다.

    줄거리도 그리 단순하지는 않다. 카톨릭 신학대학생 수현(서장원)은 여자친구였던 수아(이민정)와 힘든 이별을 통해 마음을 다잡고 신부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면서 뭔가 방황하는 것처럼 보이는 강우(이호영)를 신경 쓰지만 별로 달라지는 게 없다. 그러던 중 수아가 보낸 청첩장과 십자가 목걸이를 받게 된다. 힘들어하고 있던 수현은 대나무 숲으로 들어가는 강우를 발견하고 뒤 따라가고 그 곳에서 강아지를 발견해 몰래 키우게 된다. 그러나 강아지가 죽을병에 걸린 것을 알게 된 수현은 강아지와 수아에게 받은 십자가 목걸이를 대나무 숲에 버리게 된다. 그리고 신학교를 그만 두겠다는 강우를 보며 수현은 마음이 흔들린다. 그 때 위독하다는 어머니 때문에 집으로 와 어머니와 하룻밤을 보낸 수현은 수아와 비슷하게 생긴 여자를 발견하고는 수아에게로 찾아가지만 그녀는 수현에게 다시는 자신의 앞에 나타나지 말라며 매몰차게 가버린다. 이에 고통스러운 수현은 신학교로 돌아와 학장신부에게 학교를 그만 두겠다고 하고 학장신부는 ‘확신하는 것과 흔들리는 것도 구별 못 하냐’며 방학 중 수도원으로 갈 것을 권유한다. 그 곳에 가서 수현은 문신부(기주봉), 사랑에 빠진 수련수사 정수(성열석) 등을 만나 새로운 생활을 하고 그러던 중 수도원 안에서 수아를 닮은 헬레나 수녀(이민정)을 만나게 된다. 아픈 헬레나 수녀에게 치유기도하기를 매몰차게 거절한 수현은 수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수련원으로 돌아와 헬레나 수녀의 치유기도를 해준다. 그리고 헬레나 수녀로부터 자신의 용서를 받아달라는 부탁을 들어주게 되고 다시 신학교로 돌아가는 기차에 탄 수현의 멈췄던 시계가 움직인다.

    표현하려는 내용은 자칫 상투적일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종교와 사랑을 억압과 자유의 메타포로 사용해서 고통과 번민에 휩싸인 인물의 반응을 보자는 식이다. 하지만 등장하는 주변 인물들이 흥미롭다. 신학교에서 등장하는 강우는 갈등 끝에 신학교를 그만둔다. 수도원의 수련수사 정수는 그 안에서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고 결국 수도원을 떠난다. 문신부는 포도주의 유혹을 끊지 못해서 틈틈이 포도주를 마시고, 수도원에서 만난 헬레나 수녀는 수녀가 되기 위해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수도원에 들어왔다가 남자친구의 사망소식을 듣고 고통스러워한다. 모두 개별적인 사연과 성격들을 지니고 있지만 이는 주인공 수현에게로 한 데 모이고 귀결된다. 등장인물들은 수현의 또 다른 분신들인 것이다. 신학교를 그만두고 싶은 건 강우가, 사랑 때문에 고민하는 건 정수가, 수현이 신부가 된다면 가정해볼 수 있는 미래의 모습은 문신부가, 그리고 수아의 죽음으로 받는 죄책감은 헬레나 수녀가 보여주고 있다. 복잡한 듯 보이는 줄거리지만 실제로 줄거리는 주인공 수현을 클로즈업하기 위한 인물들의 서사가 겹쳐진 것뿐인 것이다.

    그렇기에 인물들의 서사가 차곡차곡 쌓여진 영화의 클라이막스 장면은 인상적이다. 수현과 똑같은 사연을 가진 헬레나 수녀가 자신의 남자친구와 닮았다면서 수현에게 대신 용서를 빌고 수현이 그 용서를 받아주는 장면은 결국 수현이 죽은 수아에게 가졌던 죄책감을 동시에 털어버리는 것이 된다.

    이것은 영화 내적으로 존재하는 또 하나의 특이한 점과 맞물린다. 병에 걸려 누워있는 사람들이 쉽게 병이 나아서 일어난다는 점이다. 초반에 수도원을 성지로 만들자는 소식을 듣기위해 걸음을 옮기던 문신부에게 한 여자가 다가와서 요청한다. 우리 딸아이가 아프니 기도를 해 달라고. 처음에는 수도원의 존립에 정중히 거절하던 문신부는 결국 여자를 따라 딸이 있는 집으로 간다. 그리고 기도를 끝낸 문신부에게 딸은 작은 손을 신부에게로 내민다. 그러나 신부는 그 아이의 손을 피하고 황급히 집을 떠난다. 자신의 기도가 진실 되지 못한 터였다. 그러나 수현이 동행한 두 번째 기도에서 문신부는 딸이 다시 내민 손을 잡는다. 그리고 딸은 건강을 회복한다. 헬레나 수녀도 마찬가지다. 수아의 죽음을 직접 확인한 수현이 죄책감에 고통스러워하며 직접 헬레나 수녀를 찾아가 울면서 치유기도를 한다.(이 장면은 클라이막스와 더불어 최고의 명장면이다.) 그리고 헬레나 수녀는 건강을 회복한다. 수현이 처음 수도원에 들어왔을 때 “가볍게, 깃털처럼 가볍게”라고 누워서 말했던 수도원의 수사도 영화가 끝날 때쯤에는 건강을 되찾는다. 세상의 인과율에 배반적인 이 모습들은 ‘멈춤’과 ‘가동’의 비유다. 그 당시에 죽을 것 같았던 ‘멈춤’도 실제로 하느님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죄책감에 시달리며 신학교를 그만 둘 것을 고민했던 수현의 ‘멈춤’도 이와 같다. 헬레나 수녀의 용서를 받아들임으로 인해 수현은 새롭게 다시 ‘가동’한다. 영화의 마지막. 기차를 타면서 수현의 멈췄던 손목시계가 다시 움직이는 것은 이러한 ‘가동’을, 화면이 어둠속에 명멸하고 째깍거리는 시계 초침의 소리만 남으며 영화가 막을 내리는 것은 ‘가동’의 연속성에 대한 영화적 표현이다.

    상징들이 너무 문학적이어서 아쉬운 부분들도 있다. 신학교를 떠나고자 하는 강우의 뒤를 쫒다가 대나무 숲에서 발견하는 강아지는 결국 죽을병에 걸렸고 수현은 이 강아지를 수아에게 받은 십자가 목걸이와 함께 버린다. 하지만 감정적으로는 아무런 정리도 없었던 수현에게 십자가 목걸이는 다시 돌아오게 되고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이를 목에 걸고 다니던 수현은 헬레나 수녀에게 용서를 받고 감정적으로 정리되고 나서야 비로소 목걸이를 스스로 푼다. 이러한 상징은 영화미학에 대한 진지한 감독의 고민을 보여주지만 진지해서 영화적으로 보이기보다는 문학적으로 읽힌다. 하지만 상징을 걸고넘어지기에는 나름대로 전개되는 상황과 맞아 떨어지며 시너지 효과를 보이는 부분도 있기에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특히 폐쇄적인 신학교와 이와 비교했을 때는 오히려 개방적인 느낌을 주는 수도원(신학교에서는 친구들과의 관계 정도밖에는 나오지 않지만 더 다양한 인물상과 심지어는 사랑까지 나누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수도원이라는 점으로도 그렇다.)이라는 흔치 않은 배경을 통해 인간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두려움과 그로 인한 무거움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박수를 치고 싶다. 인간은 신과는 다르게 항상 고민하는 무거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끊임없이 자신의 무거움을 덜어내야 하는 것이 인생 아닐까. 오늘도 별이 바람에 스치우는 까닭이다.


    출처 : http://blog.naver.com/mstripmstory (클릭)

    소년교주의 영화의 재구성 귀결되는 인물들, 멈춤과 가동의 미학 &lt;포도나무를 베어라&gt; 뜬금없는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앞에 더 있어야 할 말을 생략한 것 같...
    ☆☆☆☆☆ | 포도나무를베어라
  2. 찰리와 초콜릿 공장

    • 팀버튼, 찰리와 초콜릿 공장, 2005.

    이혜미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세상에 거대한 초콜릿 공장이 있다면 어떨까? 초콜릿으로 출렁거리는 호수, 초콜릿으로 만들어진 풀과 열매. 초콜릿으로 이 세상이 달콤했으면 좋겠다는 상상은 어렸을 적 누구든지 해봤을 것이다. 드디어 그 상상이 콘텐츠화 되었다.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2005년 미국에서 개봉을 했다. 첫 주, 3,770개 극장에서 개봉하여 주말 3일 동안 5,618만 불의 수입을 기록하였다. 미국에서 대성공을 거둔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서도 그 성공의 도미노를 이룬다. 영화를 보는 약 두 시간 내내 사방에서 캔디의 진득함을 느껴지는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 평론에 앞서, 그 원작인 로알드 달의『찰리와 초콜릿공장』과 비교를 해보기로 하겠다. 작품에서 풍기는 달콤함의 근원을 알아본 후, 팀버튼 감독의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알아보도록 하자.


    # 공통점
    1) 놀라운 상상, 상상이 실현되는 장소, 로알드 달의 초콜릿 공장
    소설과 영화를 보면 모두 작가 로알드 달의 상상력이 그대로 묻어나 있다. 어렸을 적, 한 초콜릿 회사에서 신제품을 테스트하기 위해 제공하는 초콜릿을 선물로 받은 로알드 달은 기분 좋은 상상을 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직접 초콜릿 장인이 되어 ‘엄청나게 맛있고 달콤한 초콜릿’을 만드는 것이다. 이 상상은 소설과 영화 속에서 실현된다. 냉장고에 넣지 않아도 녹지 않은 아이스크림, 빨아먹으면 10초마다 색이 바뀌는 카라멜. 소설과 영화의 공통점은 바로 이것이다. 작품 속 초콜릿공장은 작가 로알드 달의 발칙한 상상이 실현되는 장소라는 것이다. 공장안에서 작가의 상상력이 극대화된다. 이 놀라운 상상력은 영화 속에 환상적인 미장센으로 그대로 옮겨진다.
    초콜릿공장의 의미는 또 있다. 아이들과 부모들이 벌칙을 당하는 장소이다. 작품 속에는 찰리를 포함한 네 명의 아이들이 등장을 한다. 이 네 명의 아이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달달한 음식을 입에 달고 사는 아우구스투스 굴룹, 껌을 입에 달고 사는 바이올렛, TV와 오락을 달고 사는 마이크 티비, 부모님에게 요구사항을 입에 달고 사는 버루카. 이 네 명의 아이들의 행동과 자식들을 보호하기에 급급한 부모들의 태도는 타인의 눈을 찌푸리게 만든다. 작가로 대변되는 윌리 웡카는 이들에게 깜찍한 벌칙을 준다. 초콜릿 공장에 초대된 아이들의 행동이 스스로를 벌칙을 당하게 만든다. 작가는 직접적으로 나서서 벌칙을 주지 않는다. 아이들을 초콜릿 공장으로 데려간 행동밖에 하지 않는다. 자신이 손을 쓰지 않고도 아이들의 행동은 스스로를 벌칙의 구덩이 속에 넣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과 영화 속 대사를 통해서 윌리 웡카가 벌칙의 배후에 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윌리 웡카가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깜찍한 벌칙을 주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소설
    노랫말을 곧이곧대로 믿으시면 곤란합니다. 아무 뜻 없이 지껄이는 것뿐이니까요

    *영화
    꼭 리허설을 해본 것 같은 모양새인데? 무슨 일이 생길지 알고 있었던 건 아니겠죠?


    2) 어른이 된 로알드 달, 조할아버지로 나타나다
    소설과 영화 속 어른들은 모두 아이들의 동심을 지켜주기 위해서 노력을 한다. 버릇이 없는 네 명 아이들의 부모들도 마찬가지로 말이다. 많은 어른들 중에서 작가 로알드 달로 대변되는 어른은 한 명이다. 어렸을 적, 초콜릿 연구원이 되고 싶었다던 작가 로알드 달. 작품 속에서 꿈을 이루었기 때문에 작품 속 윌리 웡카가 작가 로알드 달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니까 초콜릿 연구원 ‘로알드 달’은 ‘윌리 웡카’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작품의 대하여 中>

    하지만 나는 작가가 윌리 웡카가 아니라, 조할아버지를 통해서 제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생각을 한다. 어른은 어렸을 적, 누구나 아이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동심이다. 어른들은 커감과 동시에 동심을 가슴 속 구석에 접어두고 현실에 적응을 하면서 살아간다. 작품 속 조할아버지는 찰리가 황금티켓을 쥘 수 있게 노력을 한다. 자신의 전 재산이었던 동전을 가족들 몰래 찰리에게 건네주고 함께 초콜릿 바를 벗겨본다. 조할아버지는 찰리가 초콜릿공장 견학의 꿈을 버릴 수 없게 조력을 하는 인물이다. 그는 황금티켓을 구했을 때도 찰리보다 더 기뻐하며 춤을 춘다.

    *소설
    이제 모험을 한 번 더 해 보는 거야. 어떠냐, 응?

    *영화
    너랑 나랑 마지막 티켓에 한 번 더 걸어보자

    동심을 가져본 사람만이 아이의 환상을 지켜주기 위해서 노력한다. 작품 속 어른들은 찰리의 동심이 다칠까봐 걱정을 많이 하지만 걱정 이상의 노력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할아버지는 적극적으로 찰리를 돕는다.
    윌리 웡카는 어린 로알드 달의 꿈이 실현된 인물일 뿐이다. 꿈의 인물과 작가로 대변되는 인물과는 다르다. 어린 로알드 달의 꿈은 윌리 웡카로 나타났으며, 성인이 된 로알드 달은 조할아버지로 나타났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아이의 동심이 다치지 않게 노력을 하는 조할아버지가 작가가 된 로알드 달이다.
    그렇다면 소설과 영화는 공통점만 있는 충실한 각색일까? 저번 리포트에는 영화가 소설의 모든 요소를 각색한 충실한 각색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번 과제를 위해서 두 번의 영화 시청과 소설 정독을 한 결과, 영화는 소설을 다원적 각색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설과 영화에는 차이점이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작가 ‘로알드 달’과 감독 ‘팀 버튼’이 중요시 한 부분이 다르다는 것이다.


    # 차이점
    1) 소설: 욕구와 동심의 동등화 / 영화: 동심의 극대화
    소설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서는 동심과 욕구가 동등화 되고 있다. 소설 속 찰리는 길거리에서 50펜스짜리 은화를 짚는다. 그리고 그대로 초콜릿을 파는 가게로 달려간다. 찰리는 50펜스로 초콜릿을 산다. 그리고 황금티켓을 확인을 뒤로 하고 초콜릿으로 굶주린 배를 채운다. ‘천천히 먹어라, 씹지도 않고 그렇게 삼키다 배탈이 날라’ 라고 말하는 가게 주인의 말을 통해서 찰리는 동심보다는 식욕이라는 욕구가 앞서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식욕이라는 욕구가 앞서 있다는 것은 다음 내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찰리는 거스름돈 5페니 동전 아홉 개를 보면서 아홉 개 중에서 하나를 더 써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여기서는 식욕이 아니라, 돈을 더 쓰고 싶은 욕망이 앞서있다. 작가가 그린 찰리는 동심이 가득한 착한 아이였다. 작가가 동심으로만 찰리를 그려냈다면 배를 채우지 않고 바로 황금티켓을 찾으려고 했을 것이다. 죄책감을 느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찰리는 또 하나의 초콜릿을 샀고 황금 티켓을 발견한다. 그리고 환호를 한다.
    작가는 소설 속 찰리에게 동심 이전에 식욕이라는 인간의 욕구를 부여했다. 이는 영화와는 차이를 보인다.
    영화 속 찰리는 길거리에서 주운 돈을 들고 초콜릿가게로 달려간다. 그리고 초콜릿을 하나 사서 바로 황금티켓을 확인한다. 배를 일단 채우고 황금티켓을 확인하는 소설과는 다르다. 감독 팀 버튼은 소설 속에 드러나는 인간의 욕구를 배제하였다. 여기에서 작가가 중요시 했던 점과 감독이 각색할 때 중요시 했던 점이 드러난다. 작가 로알드 달은 동심이전에 식욕이라는 인간의 욕구를 배치했고, 감독 팀 버튼은 인간의 욕구를 배제한 채 동심을 극대화한 것이다.

    *소설
    동심 → 식욕(욕구) → 동심

    *영화
    동심 → 동심 (동심의 극대화)


    2) 소설: 일방적인 아이의 동심 / 영화: 소통을 통한 가족의 의미 찾기
    소설과 영화의 차이점은 하나 더 있다. 소설을 각색한 영화에서 감독 팀버튼은 가족의 의미를 더 부여했다. 소설과는 달리 영화 속 윌리 웡카에게는 콤플렉스가 있다. 그것은 바로 ‘가족’이다. 가족이라는 단어를 쓰지 못하는 윌리 웡카는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진다. 어린 웡카는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지 못한 채 성장해 나간다. 어른이 된 웡카는 자신의 바람대로 초콜릿 공장을 차리게 되고, 자신의 상상대로 초콜릿을 만들게 된다. 하지만 공장의 새 후계자로 정한 찰리가 가족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면 공장을 받지 않겠다고 말을 한다. 웡카는 혼란에 빠진다. 자신에게 가족이란 자신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명령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웡카는 결국 찰리의 도움을 받아서 아버지를 찾아간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게 된다. 가족은 명령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웡카는 찰리를 통해서 점차 참된 가족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영화
    가족은 창의적인 분위기 조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
    할머니에겐 할머니 냄새와 비누냄새가 나요


    찰리는 가족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진 웡카에게 가족의 의미를 알려주었다. 원작자 ‘로알드 달’과는 달리 감독 ‘팀버튼’은 동심에 가족의 의미를 더 첨가를 했다. 영화에서 웡카는 찰리의 꿈을 실현시켜주는 인물이며, 찰리는 웡카에게 가족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인물이다. 즉, 소설 속에서 웡카가 찰리에게 꿈을 실현시켜주는 것과는 달리 영화에서는 찰리 또한 웡카에게 가족의 꿈을 실현시켜준다. 소통을 통해서 말이다.

    *영화
    1)찰리 ↔ 2)웡카
    1) 찰리는 가족에 대한 사랑을 가진 인물이다. 웡카에게 가족의 의미를 알려준다.
    2) 웡카는 동심으로 가진 인물이다. 찰리의 꿈을 실현시킨다.

    그렇다면 왜 소설 원작과 영화는 차이점이 발생하는 것일까? 이것은 의외로 간단한다. 원작자와 감독의 생각 차이와 직업의 특성 때문이다. 일단 직업의 특성부터 말을 하겠다. 위에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소설 속 움파룸파는 원시인의 복장을 하고 나온다. 그리고 영화 속 움파룸파는 우주복을 입고 나온다. 작가 로알드 달은 ‘글’로서 사람들을 유혹해야하지만, 감독 팀버튼은 ‘영상’으로서 사람들을 유혹해야만 한다. 그러기 때문에 시대성을 쫓아가며 미장센을 염두 해두어야 하는 팀 버튼은 의상까지도 신경을 써야했다는 것이다.
    각색을 할 때 소설의 주인공, 스토리 전개는 그대로 하되 감독의 메시지를 투영하는 것이 바로 다원적 각색이다. 감독 팀버튼은 로알드 달이 담아내려고 했던 것 그 이상으로 메시지를 영화 안에 담았다. 앞에서 언급을 한 가족의 의미가 그 예이다. 그리고 작가가 소설 속에 담았던 인간의 욕구에 대한 부분은 배제시켰다. 팀 버튼이 보기에는 소설 속 찰리가 돈을 줍자마자 가게로 달려가 초콜릿을 사서 배를 채우는 부분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팀 버튼에게 이 내용은 사족이었을 것이다. 192페이지의 내용을 120분 내로 그려내기 위해서는 감독의 과감한 선택이 필요하다. 감독은 글로 표현이 된 원작을 부연설명 없이 영상으로 나타내야 한다. 각색하는 과정에서 내용의 첨가나 삭제가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소설 원작과 영화는 차이점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아이들에게는 동심을 지켜주고, 어른들에게는 동심을 되살려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아이들은 상상이 현실로 실현되는 이 작품을 통해서 감수성을 지켜나갈 수 있다. 그리고 어른들은 어린 시절 초콜릿을 먹으면서 상상했던 일들이 실현되는 것을 보면서 메마른 동심을 촉촉하게 적셔나갈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찰리의 초콜릿 공장 한 켠 에서는 아이들의 동심을 붙잡아주는 카라멜과 어른들의 동심을 살려주는 캔디가 만들어지고 있을 것이다. 맛으로 유혹을 하는 세상, 그 세상이 작가와 감독이 바라는 세상이 아닐까.


    찰리와 초콜릿 공장

    소 설

    영 화

    공통점

    1) 초콜릿 공장

    놀라운 상상, 상상이 실현되는 장소

    네 명의 아이들과 그의 부모들이 벌칙을 당하는 장소

    2) 어른이 된 로알드 달 : 조할아버지

    차이점

    1) 초콜릿 가게

    욕구와 동심이 공존하는 공간

    동심이 극대화되는 공간

    2) 찰리

    욕구와 동심을 가진 인물

    동심을 가진 인물

    3) 윌리 웡카

    동심을 가진 인물

    가족에 대한 콤플렉스 극대화

    4) 찰리와 윌리 웡카의 소통

    일방적

    쌍방적

    지금까지 팀버튼 감독의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 가득 깔린 달콤함의 근원(내용)을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원작을 제외한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만 두고 생각을 해보자.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 은 걸작일까? 앞서 한, 내용상의 분석이 아닌 연출력을 토대로 검토해보자.

    # 걸작 아닌, 걸작 : 팀버튼의 <찰리와 초콜릿 공장>
    미국 개봉 시, 미국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두고 엄청난 걸작은 아니더라도, 걸작이라고 말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팀버튼 감독의 뛰어난 연출력에 찬사를 보냈고, 역시 헐리웃 작품이라는 말을 하였다. 엄마들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극장가를 찾았으며 꼭 봐야할 영화 리스트에 이 영화를 올렸다.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눈이 즐거운 영화이다. 동화책 속에서 상상으로 만들어낸 환상이, 눈 앞에 그려진다.
    실제로 특수효과 팀은 초콜릿의 확실한 재료 혼합 비율을 밝히진 않았다. 물과 식이섬유소에 식용 색소를 섞어, 다양한 조명하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완벽한 색을 찾아냈다고 말했다. 시카고 트리뷴의 마이클 워밍턴은 “이 기발한 영화는 결코 자본이나 기술에 빠져 허우적대지 않는다.”라고 말을 했다. 나는 이 말에 주목을 한다.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헐리웃 요소를 모두 갖추었다. 기술적인 면에서나 내용적인 면에서 상당히 우수하다. 아기자기한 음악 선별, 환상적인 의상과 특수효과, 미술적인 면이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면서 헐리웃 영화로서의 자존심을 보여줬다. 캐릭터 간의 행동과 심리표현 등 연출력의 우수함도 보여준다. 헐리웃 영화의 자질을 충분히 갖추었다.
    하지만 헐리웃 영화의 모든 요소를 갖추었을 뿐, ‘그 이상’을 갖추고 있지 않다. 내가 작품의 걸작을 판가름하는 것은 기술과 내용을 넘어선 ‘가능성’과 ‘실험성’이다.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기존 헐리웃 영화가 가진 요소를 다 갖춘 ‘충실한’ 영화에 불과하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메시지이다. 팀버튼이 관객에게 주려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어린이에게 희망을 주고, 어른에게는 내재된 동심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일까. 이 영화는, 앞에서 말한 희망과 동심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메시지가 없다. 물론, 감독이 그것을 의도한 것이라면 할 말은 없다. 영화를 본 관객에게 이 영화에 대해서 물어본다면, 당연히 연출력에 대해서만 말을 할 것이다. 연출 이외의 것은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비록 ‘실험성’과 ‘가능성’면에서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큰 점수를 얻지 못했지만 훌륭한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관객 동원 수가 훌륭한 영화의 기준이 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의 공감대를 형성했다는 점의 기준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다방면에서 인정을 받고 있는 이 헐리웃 영화는, ‘헐리웃 영화’의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실험과 모험 그리고 가능성을 찾기 힘들었다. 그래서 나는 걸작 아닌, 걸작이라고 본다. 전자 ‘걸작’은 메시지의 결여를 뜻하는 것이고, 후자 ‘걸작’은 메시지를 제외한 헐리웃 요소를 갖추었다는 것을 말한다. 빛 좋은 개살구라는 말을 쓰고 싶다.
    이것은 최고보다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더 높게 평가하는 것과 부합하는 이치가 아닐까.

    찰리와 초콜릿 공장 • 팀버튼, 찰리와 초콜릿 공장, 2005. 이혜미 세상에 거대한 초콜릿 공장이 있다면 어떨까? 초콜릿으로 출렁거리는 호수, 초콜릿으로 만들어진 풀과 열매. 초콜릿으로 이 세상이 달...

  3. • 창감독, 고死: 피의 중간고사, 2008.

    이혜미

    사용자 삽입 이미지

    국 공포영화에서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이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에서 공포영화는 흥행과는 거리가 멀다. <장화,홍련, 2003.>, <아파트, 2006.>, <헨젤과 그레텔, 2007.>, <기담, 2007.> 등 여름에 공포영화는 봇물 쏟아지듯 개봉을 했지만 딱히, 흥행성공을 했다. 라고 보는 작품은 없었다.
    올해 2008년에는 작년과 다르게 공포영화의 홍수를 이루지 못했다. 유일무이하게 개봉된 공포영화는 창감독 감독의 <고死: 피의 중간고사, 2008.> 이다. 유일한 공포영화여서 그런지, 이 영화는 개봉 2주 만에 약 130만 명의 관객을 돌파했다. 두 달 남짓한 촬영 기간에 순수 제작비 12억 원의 저예산 영화치곤, 더욱이 공포영화임을 감안했을 때 엄청난 성과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잘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2008년 최악의 영상예술 작품으로 이 영화를 뽑는다. 지금부터 <고死: 피의 중간고사, 2008.>이 최악의 영상예술 작품인 이유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 기술적 접근
    1) 공포물인가, 스릴러물인가: 슬래셔 방식을 기초로 한 접근
    공포영화의 공식이 ‘슬래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슬래셔영화라는 말을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슬래셔 방식이란, 살인마와 함께 고립된 사람들이 잔인무도하고 독특한 방식으로 하나씩 살해당하는 것을 말한다. <고死: 피의 중간고사, 2008.>도 슬래셔 방식이 쓰인다.
    <고死: 피의 중간고사, 2008.>는 학교 갇힌 학생과 선생님 24명. 주어진 시간 안에 정답을 맞추지 않으면 여러분의 친구는 죽게 됩니다. 라는 메시지를 시작으로, 한정된 시간에서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얼핏 보면 슬래셔 영화의 형태를 잘 갖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슬래셔의 두 요소 ‘고립 상황’과‘살인’중 전자를 충족되질 못하였다.‘고립’은 범인이 만들어낸 특수한 상황이다. 범인의 통제가 철저하게 이루어지며, 학생과 선생님으로 대변되는 가해자는 그 통제 안에서 고립된다. 그리고 고립을 통해서 공황상태를 느껴야한다.
    하지만 <고死: 피의 중간고사, 2008.>안에서 범인(경비원)은 자신이 만든 통제에 오히려 걸린다. 여자 선생님을 죽이려는 부분에서, 실패를 해 자신이 상처를 입는다. 범인의 통제가 느슨하다는 것이다. 범인조차 자신이 만든 상황을 컨트롤 하지 못하고,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공황상태는 덜하다. 학생들과 선생님은 범인과 대치된 고립된 상황, 언제 죽을지 모르는 긴장감과 초조함 속에서 밥을 먹는다. 그리고 여유를 가지고 엠피쓰리 음악을 듣는다.
    이 영화의 장르는 공포, 스릴러물의 혼합이다. 아니, 그렇게 발표가 되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고립과 공황상황을 제외한 ‘살인’만이 존재한다.‘살인’으로 공포감을 조성하려고 했더라도, 그 공포감으로 공황상태를 자아내기는 한계가 있다.
    결국 공포감과 공황 모두 충족시키지 못한 어중간한 느낌이며, 작품 관람 후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 학생들만이 기억에 남는다.


    2) 감독의 위트인가, 오점인가: 엔딩 스크롤
    엔딩 스크롤은 영화에서 마무리의 역할을 한다. 한껏 부풀어 오른 영화의 분위기를 집약시켜, 관객의 가슴 속에 여운으로 남게 한다.
    이 영화의 엔딩 스크롤은 특이하다. 범인인 경비원과 그의 아내가 사발면을 먹으면서 “힘들지?" "아니야." "조금만 참아, 이제 다 끝나가." "김치 익었네." 라는 대화를 한다. 관객은 이 코믹한 대화에서 웃는다. 대화가 코믹하다는 것이 아니다.
    강당에서 비리를 감추고 있던 남자 선생의 행각이 발각되고, 선생이 칼에 찔려 죽임을 당하는 긴장감이 극도로 달했을 때 갑자기 등장한 이 대화가 코믹하다는 것이다. 긴장감이 극도로 달한 상황과 범인 부부의 인간적인 면이 불협화음을 이룬다. 이 엔딩 스크롤이 감독의 위트라고 볼 수 있지만, 감독의 위트라고 보기에는 당황스럽다. 범인은 경비원 부부지만, 그 우이에 있는 실질적인 범인이 밝혀지고 죽임을 당하는 긴장감을 한 번에 무너뜨린다.
    선생님이 살인자였다는 반전, 거기에 이들에게 도움을 주었던 경비원이 범인이라는 반전.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것은 좋다. 하지만 경비원 부부의 인간미가 묻어나는 대화는 치밀함을 떨어트리며, 영화의 몰입감을 한 번에 놓아버리게 만든다.


    # 내용적 접근
    1) 군더더기 인물: 앵글의 낭비, 치밀함 저해
    이범수(황창욱), 윤정희(최소영), 남규리(이나), 김범(강현)은 주인공으로 배정이 되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인물들의 역할과 그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았다.
    이범수(황찬욱)은 제자를 죽인 살인자이다. 범인이 죽음의 게임을 계획하게 한 원인을 제공한 인물이다. 극 중에서 꼭 필요한 인물이다. 이 인물의 행각이 학생을 죽음의 게임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기 때문이다.
    윤정희(최소영)은 22명의 아이들을 안정시키는 역할이다. 자신의 친구가 죽어나가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아이들을 스스로를 통제를 못한다. 그런 이들을 진정 시키고 이성적으로 상황에 대처하여, 문제를 풀어나가게 도움을 준다. 영화 전개에 있어서 필요한 인물이다.
    문제는 남규리(이나)와 김범(강현)이다.
    남규리(이나)는 2년 전, 죽은 지원의 룸메이트였다. 지원의 죽음 원인을 환기시키는 인물이다. 이나와 지원과의 지난날을 회상함으로써 ‘지원’을 표면화 시킨다. 하지만 영화 홍보에 남규리는 ‘호러퀸’으로 소개가 되었다. 주인공이 마치 이 인물인양 알고 있는 관객도 있다. 인기가수의 스크린 데뷔라는 것에 맞춰져, 영화를 홍보하였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모호함이 영화를 난해하게 만든다.
    김범(강현)은 문제아 이지만, 영어에 있어서는 천재적인 인물이다. 그 뿐이다. 이 인물의 역할은 다른 20명의 학생들과 다를 게 없다. 카메라는 김범(강현)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물론 20명의 학생들에게 모두 집중하는 것보다 한 학생에게 집중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카메라는 죽어나가는 학생들에게도 초점을 맞춘다. 그 학생들에게 맞춘 카메라의 앵글은 합당하다. 죽음을 앞둔 학생들에게서 긴장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김범(강현)은 오히려, 전개의 치밀함을 떨어뜨린다. 영화를 다 보았을 때, 이 인물은 도대체 왜 나왔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이 인물의 배치는 오류이다.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고, 그 필요성조차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긴장감을 떨어뜨린다.

    2) 공포인가, 슬픔인가: 소재의 부적절성
    수능을 앞두고, 엘리트만을 모아서 진행되는 수업. 부모에게 돈을 받고, 성적을 위조하는 선생. 그 부조리함의 희생양이 된 학생(지원). 성적을 위시하며 학업에 대한 압박 등 입시에 시달리는 학생들이 공감할 법한, 소재를 차용을 했다.
    감독은 “영화제작자라면 매년 잘 만든 공포영화 보여주는 게 관객들에 대해 책임감을 다하는 일일 것이다.”라고 말을 하였다. 공포영화에서 중요한 건 ‘재미’라는 말이다. ‘공포’와 ‘재미’가 공포영화의 목적이라면, 입시에 대한 압박을 느끼는 학생들을 공포를 자아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면 이 영화의 소재는 잘 못 되었다.
    누군가는 공포영화의 소재가 공포만 자아내면 되지 무엇을 더 바라냐는 말을 할지도 모른다. 대표적인 공포영화 <쏘우>를 예로 들어보자. 쏘우도 <고死: 피의 중간고사, 2008.>과 비슷하게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존재’를 소재로 썼다. 무거운 소재를 썼지만 더 이상 죽음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라는 메시지가 있지 않은가.
    러닝타임 85분 내내, 입시에 대한 아이들의 압박감이 깔려있다. 이것은 입시라는 소재가 이미 수단을 넘어섰다고 볼 수 있다. 입시라는 소재는 무겁고, 예민하다. 이 영화에는 입시생들의 고난에 대한 ‘메시지’는 없고, ‘살인’만이 있다. 청소년 관객과 청소년을 자식으로 둔 부모 관객들은 살인을 지켜보면서 공포를 느낄 것인가, 아님 슬픔을 느낄 것인가.
    2008년에 개봉한 유일한 공포영화였기 때문에, 기대를 많이 하였다. 하지만 앞에서 지적한 요소들로 인해 실망도 많이 하였다. 앞으로 멋진 공포영화가 개봉됨을 기대한다

    • 창감독, 고死: 피의 중간고사, 2008. 이혜미 한국 공포영화에서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이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에서 공포영화는 흥행과는 거리가 멀다. &lt;장화,홍련, 2003.&gt;, &lt;아파트, 2006...
  4. 윤인호, The Game, 2007

    - 이혜미 | 2009/01/08 21:12

    윤인호, The Game, 2007

    - 이혜미 | 2009/01/08 21:12

    more..

    The Game

    • 윤인호, The Game, 2007.


    이혜미


    마치 세상을 살아가는 명제인 듯 둔갑해 버린 말들이 있다. 바로 인생은 한방이다. 인생이 마라톤이냐, 도박이지. 라는 말이다. 하루하루가 노력으로 점철된다고 믿는 현실주의자에게는 미안하지만 실제로 인생이 마치 게임처럼, 한 번에 승부수가 난다면 어떨까? 우연히 찾아온 상황에 인생은 한 방이야. 부르짖으며 순간의 운을 기다리는 사람들. 그들이 원하던 바를 현실로 나타낸 영화가 있다.

    그 동안 ‘도박’을 소재로 한 영화는 많았다. 2006년에 개봉된 타짜가 대표적이다. 굳이 ‘소재’가 아니더라도 도박은 영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소품’이었다. 건달들을 소재로 한 영화가 판치던 2002년. 도박은 그들의 장난감이자, 영화를 꾸미는 아기자기한 소품이었다. 드라마에도 ‘도박’이 소재(올인, 2003), (타짜, 2008)로 진즉 등장했다. 그러므로 ‘도박’은 참신한 소재가 아니다.

    하지만 도박의 ‘도구’가 화투, 카지노가 아닌 휴대폰이라면 어떨까? 휴대폰으로 아무 숫자나 눌러서 사람의 성별을 알아맞히는 도박이라면? 소재의 참신성은 떨어지나, 소재의 ‘도구’가 참신한 영화 <더 게임>. 지금부터 영화 <더 게임>을 파헤쳐, 속에 내재된 메시지를 찾아보고 오점을 꼬집어보겠다.


    # 파헤치기

    1. 살벌, 발칙한 게임의 사유는 무엇인가 : 감 정

    영화 <더 게임>은 젊은 육체를 가지고 싶은 회장 ‘강노식’과 돈이 필요한 가난한 길거리 화가 ‘민희도’의 발측하고 살벌한 게임을 에피소드로 한다.

    ‘강노식’은 사채업인 청솔기업 회장이다. 인생은 도박이다. 라는 말이 인생을 좌지우지 하는 위대한 명언이라 생각한다. 그는 더이상 회사를 이끌 수 없다. 바로 노환 때문이다. 회사를 계속 쥐고 있기 위해서, 그는 일생일대의 커다란 게임을 하려고 한다.

    가난한 길거리 화가 ‘민희도’는 소박하다. 가진 재능이라고 하나있는 ‘그림그리기’를 가지고 대학로에서 그림을 그리고, 사랑하는 애인과 만나는 것으로 충분히 행복하다. 그런 그에게 필요한 것이 생겼다. 바로 ‘돈’이다. 선친의 부도 빚에 괴로워하는 애인을 위해서이다. 그래서 청솔기업의 회장 ‘강노식’의 게임 제안을 받아들인다.

    ‘젊은 육체’가 필요한 강노식과 ‘돈’이 필요한 민희도의 게임에는 ‘욕심’이라는 감정이 전제된다. 언뜻 보기에 ‘욕심’이 게임의 궁극적인 사유라 보인다. 하지만 ‘욕심’은 사유가 아니라, 부수적인 수단이다. 강문수과 희도에게 ‘목적’은 따로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게임을 하게한 사유는 무엇인가. 뜻밖에도 그것은 물건도 사람도 아닌, 감정이다.

    1) 외로움

    강노식에게 세상의 믿을 것이라고는 없다. 그나마 가장 친한 지인도 그의 진심을 왜곡해서 받아들인다. 아내도 그의 회사를 노리기만 한다. 강노식은 외롭다. 그가 ‘외로운 존재’라는 사실은 영화 곳곳에서 ‘직접적’으로 그리고 ‘간접적’으로 발견된다.


    친구의 대사 中: 자넨, 죽을 때까지 외로운 사람으로 살 거야


    강노식이 민희도의 인생을 망쳤다는 것을 알게 된, 친구가 노식에게 던진 말이다. 직접적인 ‘대사’를 통해서 그가 평생을 외롭게 살아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외로움으로 살 것이라는 것도. 외로움의 정서는 ‘장면’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도 나타난다.


    # 아무도 없는 거실, 물고기에게 밥을 주면서 쓰러지는 노식

    # 돈으로 여자들을 사서, 쇼윈도에 가두어 두는 노식


    결국 노식이 회사 경영에 집착했던 이유는, 살벌한 게임을 집도한 이유는 ‘외로움’ 때문인 것이다. 혹자는 비약이라고 말을 할지 모른다. 하지만 평생이 외로웠던 노식이 주은아와의 만남으로 행복을 느끼는 장면을 보면, 마지막에 돈(회사)이 아닌 주은아와의 평범한 삶을 사는 장면을 보면 비약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즉 노식의 게임의 사유는 ‘외로움’의 감정에서 시작한 것이다.

    민희도도 외로움과 뗄 수 없다. 한 순간의 게임으로 육체를 잃어버린 희도는 외톨가 된다. 자신의 애인도, 몸도, 생활도 빼앗겨 버렸다. 즉 자신의 본질(자아)을 빼앗겨버림으로써 외로움을 느낀 것이다.

    희도와 노식 둘 다 ‘사람’에게 외로움을 느낀다. 그 것이 타인에게서의 외로움과자신에게서의 외로움이라는 차이점이 있지만 말이다.


    2) 기억

    이 들이 게임을 한, 두 번째 사유는 ‘기억’이다.

    자신의 본질 ‘강노식’이 아닌 자신의 껍떼기 ‘민희도’를 사랑하는 여자 은아. 노식은 주은아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기억’을 갖고 싶다.

    희도는 자신의 육체를 빼앗겼지만, 은아와 사랑했던 ‘기억’은 빼앗기고 싶지 않다. 결국 이들은 ‘기억’을 건 두 번째 게임을 한다.

    앞에서 거론했듯 이들이 게임을 한 사유는 ‘외로움’과 ‘기억’에서 파생되어 ‘욕심’에서 비롯된 즉, 세 가지 감정 때문이다. 나는 문득 ‘외로움’과 ‘기억’ 그리고 ‘욕심’의 상관관계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3) 외로움과 기억 그리고 욕심의 상관관계

    외로움과 기억 그리고 욕심은 어떤 상관관계를 유지하고 있을까? 나는 이 세 가지 요소들이 삼각구도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세 가지 요소들이 만든 삼각구도 안에 강노식과 민희도는 들어가 있다. 대신 그들이 서있는 위치는 다르다. 서있는 지점은 감정의 시작점이다. 강노식의 감정은 외로움을 시작으로 욕심 그리고 기억으로 흐르고, 민희도의 감정은 욕심을 시작으로 기억 그리고 외로움으로 흐른다.

    강노식에게 본질은 ‘외로움’이다.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욕심’을 부렸던 것이고, 그 욕심은 멈추지 못하고 ‘기억’을 탐낸다.

    민희도에게 본질은 ‘욕심’이다. ‘욕심’을 채우려 하지만, 실패하여 자기 자신으로부터 ‘외로움’을 느꼈고, 외로움의 심화는 ‘기억’을 잃을지도 모르는 순간에 직면하여 ‘기억’을 지키기 위해서 고군분투한다.

    즉 뗄레야 뗄 수 없는 삼각 범주 안에 놓은 두 사람은, 게임의 희생양이 될 수 밖 에 없는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욕심, 외로움, 기억의 삼각구도>


    2. 최후의 승자는 누구인가? : 점선과 선의 관계

    게임에는 흑과 백처럼 승자와 패자라는 ‘이분법’이 존재한다. 무승부는 없다. 무승부가 나오면 승자와 패자가 갈릴 때까지 게임을 지속한다. 그렇다면 영화 <The Game>의 최후의 승자는 누구이며, 패자는 누구인가?

    희도의 기억마저 소유하게 되어 은아와 평범한 삶을 살게 된 강노식이 승자일까?

    언뜻 보기에는 게임의 본질적인 사유인 외로움을 덜게 된, 강노식이 승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무승부도 아닌, 애초부터 승자와 패자가 없는 게임이었다고 생각한다.

    희도의 삶은 평온하고 행복하기만 했다. 게임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전반적인 행복지수가 높은 그의 일생에서 게임은 ‘찰나’였다. 찰나의 선택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육체 즉 ‘자신’을 빼앗긴 희도. 짧은 생을 마감하긴 했지만, 사랑을 경험하였고 행복과 안정을 만끽하며 살았다.

    강노식은 젊은 육체도 얻고, 두 번째 게임을 통해서 ‘기억’마저 얻어 은아와 함께하게 된다. 하지만 자신이 고통을 준 젊은이 희도는 ‘핏줄’이었다. 육체와 기억을 얻어 행복할 것처럼 보이지만, 근본적인 문제였던 ‘외로움’을 없애지 못한다. 오히려 그 감정은 극대화 되어, 자식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괴로움’으로 발전을 했다. 평생을 외로움으로 싸워온 그에게 ‘괴로움’이라는 덤이 주어진 셈이다.

    나는 희도는 짧지만 ‘직선의 삶’을 살았고, 노식은 길지만 ‘점선의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삶이 ‘직선’이고, 행복의 정도가 ‘선의 진하기’라고 봤을 때 말이다. 삶이 행복했지만, 한 순간의 게임으로 모든 걸 읽은 희도. 은수를 곁에 두며, 오래 살 것이지만 외로움과 괴로움으로 점철된 어두운 그림자를 벗어날 수 없을 노식. 이들을 승자와 패자로 가를 수 있을까? 그저 직선과 점선의 관계로 볼 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희도와 노식의 삶>


    지금까지 영화 <The Game>을 파헤쳐보았다. 외로움과 욕심 그리고 기억과 외로움에 대해서 고찰을 할 수 있었던 이 영화에도 아쉬운 점이 있었다.



    # 꼬집기

    1. 육체가 바뀌었는가, 뇌가 바뀌었는가 : 옥의 티

    이 영화는 섬세하다. 희도와 은아의 대화명이 ‘다빈치’와 ‘모나리자’인 것에서 감독의 섬세함을 엿볼 수 있다. 미술가 ‘다빈치’와 그가 사랑했던 ‘모나리자’와의 관계를 희도와 그의 여인에게 투영한 것이 말이다. 하지만 섬세한 감독의 손길이 닿아있는 이 영화에도 오점이 발견이 된다.

    김노식와 희도는 첫 번째 게임에서 ‘육체’를 바꾸게 된다. 노식의 뇌와 척수를 희도의 육체 속에 이식을 시키고, 희도의 뇌와 척수를 문수에게 이식시킴으로써 말이다. 하지만 인물의 대사에서 그 오류가 나타난다.


    희도의 대사 中 : 뇌를 바꿔치기 당했어요 / 노식의 대사 中: 젊은 친구와 뇌를 바꾸었습니다


    처음에 뇌를 바꾸었다면, 노식은 희도의 기억을 얻기 위해서 욕망을 불태우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희도 또한 육체를 되찾기 위해서 고군분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약간 부족한 감독의 섬세함이 나타난 오점이다.


    2. 투탑(two-top)인가, 원탑(one-top)인가 : 주인공

    처음 카메라의 앵글은 게임에 휘말리게 된 ‘희도’에게 맞춰진다. 희도에 맞춰진 카메라 앵글은 희도의 주위를 비추며 그의 불행과 지인들의 불행까지 쫒는다. 하지만 러닝타임의 90%가 진행될 때 까지도 희도를 따라다녔던 카메라의 앵글이 갑자기 노식에게 옮겨져 버린다.

    사실 카메라의 앵글이 희도에게 더 많이 집중되었다고, 그가 주인공이라고 단정 지을 순 없다. 영화 전반적으로 희도의 ‘행위적 비중’이 크다고 보면, 노식 또한 ‘사유적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행위적 비중’이라고 하면, 희도가 육체를 찾기 위해서 고군분투한 것을 말하며, ‘사유적 비중’이라고 하면, 노식의 외로움과 괴로움으로 점철된 삶에 대한 사유를 말한다.

    그래서 희도의 ‘행위적 비중’과 노식의 ‘사유적 비중’이 막상막하를 이루면서 이 영화는 ‘투탑’의 주인공을 앞세웠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엔딩이 노식에게 맞춰져서 이루어진다. 앞에서 ‘행위적 비중’이 컸던 희도에 관한 언급이 없이 말이다. 관객들은 그저, 희도가 기억마저 잃은 채 죽음을 맞이 했다고 예상만 할 뿐이다.

    엔딩이 노식에게만 집중이 되었기 때문에, 앞에서 쭉 존재했던 희도의 그림자가 갑자기 증발해버린 것처럼 보인다. 영화 전반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했던, 희도의 ‘행위적 사유’에 대한 마무리 언급정도는 해줬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영화 러닝타임 90% 내내 이루어진 희도의 ‘행위적 비중’과 노식의 ‘사유적 비중’의 팽팽한 줄타기가 갑자기 흐지부지해진 것 같다.


    3. 반전인가, 위트인가 : 엔딩

    이 영화는 ‘예상치도 못했던 반전’이라는 커다란 명찰이 붙으면서 홍보가 되었다. 희도가 노식의 핏줄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 홍보이다. 내가 ‘염두’라는 말을 쓴 것은 엔딩이 반전보다는 위트의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희도와 은아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온 장면이 비춰지면서, 두 번째 게임의 승자가 희도인가? 생각을 하는 찰나, 수술대에 오른 희도와 노식의 장면이 나온다. 수술을 집도하게 된 김의사의 대사를 통해서 노식이 기억을 얻게 된다는 사실과 희도가 노식의 핏줄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고, 그 장면이 나오자마자 영화는 엔딩스크롤이 올라간다.

    반전이라고 치부해버리기에는 미흡하다. 오히려 반전은 희도가 육체를 되찾고, 은아와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온 것 처럼 보이나, 실제도 그 희도가 노식이라는 사실이다.

    반전은, 그 반전이 가져오는 파장까지를 말을 한다. 하지만 감독이 비밀무기인 듯 자랑스럽게 꺼내놓은 반전은 파장을 일으키지 못했다. 놀라움과 경악의 수반 없이, 감독 스스로가 반전이라고 치부하는 이 부분. 과연 반전이라고 볼 수 있을까? 나는 감독이 툭 뱉은, 위트에 가깝다고 생각을 한다.

    사람들은 게임을 왜 하는 것일까? 숱한 게임으로 인해 인생이 무너지고, 자포자기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도 말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사람들이 게임을 하는 이유는 돈이 아닌 외로움이 아닐까란 생각을 해본다. 외로움이란 지독한 놈에게 평생 시달리는 것보다, 한 순간의 위험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인생은 한방이라는 ‘도박’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내 분석은 도박보다는 인간 내면에 관한 것이다. 감독은 소재를 게임으로 잡긴 했지만, 사람이 가진 본질인 외로움과 괴로움을 파헤치려고 했다. 영화 <The Game>은 인간의 내면을 두드린, 그래서 슬픈 소리를 자아낸 영화라고 결론내리고 싶다.

    more.. The Game • 윤인호, The Game, 2007. 이혜미 마치 세상을 살아가는 명제인 듯 둔갑해 버린 말들이 있다. 바로 인생은 한방이다. 인생이 마라톤이냐, 도박이지. 라는 말이다. 하루하루가...
    ☆☆☆☆☆ | 더 게임, 더게임, 윤인호, 이혜미
  5. 소년교주의 영화의 재구성


    배트맨과 조커, 그리고 투페이스의 평등

    <다크나이트>



    처음 이 제목을 듣고 당연히 ‘Dark Night’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배트맨과 그의 영원한 숙적이자 희대의 악당 조커가 고담시를 배경으로 맞서는 것이 영화의 줄거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영화의 제목은 ‘Dark Knight’였다. ‘K’라는 알파벳 하나로 단어의 뜻이 밤이 되고 기사가 되는 셈이다. 이 어의 없는 말장난은 그러나 배트맨이라는 캐릭터의 태생적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다. 애초부터 영웅으로 태어나 빨강과 파랑의 뛰어난 색채감각을 자랑하는 슈퍼맨과는 달리 배트맨은 검은 박쥐 갑옷으로 스스로를 감추는 ‘밤’의 속성을 갖추어야만 고담을 지키는 어둠의 기사가 될 수 있다. 여기까지가 배트맨이라는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원래 속성이며 매력이기도 하다.

    여기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배트맨의 모습을 고뇌하는 인간으로 더 심화해서 그리고자 한다. 중요한 건 ‘영웅’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점이다. 실제 전작 <배트맨 비긴즈>부터 <다크 나이트>까지 등장하는 배트맨의 모습은 차라리 중무장한 인간에 가깝다. 영웅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약하고 평범하며 심지어는 심적으로도 끊임없이 괴로워하고 고뇌하는 나약한 모습이다. 이 정도면 자기 몸 하나 건사하는 것도 대단해 보일 정도다. 하지만 배트맨은 자신의 집사가 ‘멈출 수 있을 때 멈춰라. 그렇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다.’고 말해도 계속 영웅이기를 자청한다. 고담의 평화를 위해서라지만 실제 명목은 자신을 위해서다. 고담이 평화롭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가 흔들리는 것이다.

    이러한 배트맨의 캐릭터를 기본으로 진행되는 영화는 질식할 것 같은 고담을 배경으로 쉬지 않고 달린다. 촬영과 편집은 꽤나 근사하고 시나리오와 캐릭터 열전은 매혹적이다. 앞서 질식할 것 같다는 수식 어구를 붙였지만 이는 묘사하는 분위기와 괜찮은 색 보정 때문이지 배경이 고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의 배경은 굳이 고담일 필요가 없어 보인다. 그저 한 대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인 것 같은 촬영 덕분이다. 그리고 꽤 무겁지만 늘어지지 않고 군더더기가 없는 이유는 편집 때문이다. 그 다음이 시나리오인데 영화는 전체적으로 괴테와 같은 고전철학을 주제로 하고 있다. 감독의 의도에 효과적이고 잘 사용된 것도 사실이지만 쉽게 물기 어려운 떡밥이다. 그 이유는 애매모호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철학적 명제는 전작에 이어 본격적인 배트맨의 활동과 조커의 등장이라면 얼마든지 등장할 수 있고 또 등장할만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떡밥을 물면 영화에 대한 해석이 쉽게 꼬일 수 있다. 그래서 중요해지는 것이 캐릭터이다. 솔직히 이 영화는 배트맨, 조커, 투 페이스만 가지고도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게다가 투 페이스는 유치해서 더 쉽다. 사람을 죽이는 데 동전 던지기 타령이라니.) 이는 줄거리만 봐도 알 수 있다.

    배트맨(크리스찬 베일)은 힘들게 영웅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다가 정의감으로 뭉친 검사 하비던트(아론 에크하트)를 보게 되고 그가 자기와 같은 어둠 대신 합법적으로 고담의 정의를 지켜줄 수 있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온갖 악행과 테러를 저지르는 조커(히스 레저) 때문에 고담은 혼돈에 빠진다. 그는 배트맨이 가면을 벗고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도시를 계속 파괴하겠다고 선언한다. 배트맨은 고민 끝에 자신의 정체를 밝히겠다고 하고 하비던트는 자신이 대신 배트맨이라고 선언하며 압송되어간다. 우여곡절 끝에 배트맨이 이를 구하지만 결국 하비던트는 애인 레이첼(매기 질렌홀)과 함께 납치되고 배트맨이 하비던트를 선택하게 되어 레이첼은 죽고 하비던트는 얼굴의 반쪽을 상한다. 결국 조커의 회유에 하비던트는 투 페이스가 되어 복수를 감행한다. 조커의 또 다른 파괴 계획을 막은 배트맨은 복수를 하려는 하비던트를 막으려 하지만 그는 죽음을 맞이한다.

    세 캐릭터만으로도 줄거리가 거의 설명될 정도다. 극단적인 지점들의 충돌. 하지만 그 충돌은 서로 관통하는 지점 속에서 등을 맞대고 있다. 이는 조커의 대사가 명확하게 보여준다. “네가 날 완전하게 해.”

    우선 배트맨은 공공질서의 유지와 평등이라는 절대적인 선을 추구하며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거의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이로 인해서 처음에는 범죄율이 낮아지고 어느 정도의 효과를 발휘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나아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단지 감춰지고 숨는 것일 뿐이다. 조커가 나타나서 혼란을 조장하고 배트맨의 정체를 밝히라고 하자 사람들은 앞 다투어 배트맨의 정체를 밝혀야 한다고 아우성치고 범죄율은 다시 높아진다. 나아진 게 없는 셈이다. 결국 배트맨은 ‘내가 옳은 것인가?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라는 내면적인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이 고민은 배트맨이라는 가면을 썼기에 따라오는 필연적인 것이다. 박쥐 가면을 흉내 낸 자경단을 싫어하지만 스스로가 범법자로 활동하는 자경단이며(그래서 “너가 우리랑 다른 게 뭔데?”라는 자경단의 질문에 배트맨의 대답은 고작 “적어도 나는 하키 보호대는 안 해.”라는 대답밖에는 하지 못한다.) 절대적인 선을 추구하지만 스스로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대표적인 고담시의 자본가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화중에 원인모를 곳으로 빠져나가는 기업자금을 조사하며 사장이 범법자인 배트맨이라고 밝히려는 사원이 등장하는 데 어쩌면 기업의 부정행위를 밝히려는 내부 고발자일 수 있는데도 영화는 그를 돈에 타락한 인물로 그리며 좌절시킨다. 이 정도면 비슷한 무엇인가가 떠오를 법도 하지 않는가? 그렇다. 배트맨은 삼성 이건희 회장과 굉장히 비슷하다. 일자리를 창출하고 나라 경제를 위해서라는(이윤창출의) 절대적인 목적을 위해 각종 비리를 저지르는 온갖 수를 사용한다는 점과 김용철 변호사라는 내부 고발자에 의한 기업의 비리 고발과 좌절이 그렇다. 다른 점이 있다면 배트맨은 기회가 된다면 스스로의 자리를 포기하고 싶어한다는 것이고 이건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배트맨의 자기 모순성을 일깨워주며 즐거워하는 게 바로 조커다. 흔히들 조커를 절대적인 악으로 생각하지만 그보다는 카오스 그 자체로 보는 편이 훨씬 정확하다. 그는 파괴의 혼돈으로 모든 이가 평등해진다고 생각하는 무정부주의자이다. 그래서 그는 배트맨과 노는 게 재미있다. 배트맨은 자신이 생각하는 절대적인 선의 목적 때문에 모순적일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 결코 영웅이 될 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커는 배트맨에게 또 말한다. “사람들이 보기엔 너도 괴물이야. 나처럼.”

    투 페이스는 실질적으로 이 영화의 주제에 해당하는 캐릭터다. 그래서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유일하게 바꾼다. 검사 하비던트는 배트맨이 영웅을 그만해도 되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법 제도 안에서의 평등의 정의를 꿈꾸며 실천해오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투 페이스로 변해 버린다. 운명은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라며 양면 다 앞면으로 새겨진 동전을 가지고 다니던 그는 타버린 한쪽면의 동전을 가지고 복수를 실행한다. 그런데 그 복수는 평등의 복수다. 이쯤 되면 극단적인 지점들의 충돌이 한 가지로 모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평등이다. 과연 현대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정한 평등은 과연 실현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인 셈이다. 여기서 감독은 위험하지만 궁극적인 답변을 선택한다. 법 제도 안에서는 불가능하다. 배트맨과 조커의 대결에 가려지고 존재감도 약하게 만들어 쉽게 알기 어렵게 했지만 굉장히 절망적이게도 결국 감독이 생각한 주제의 초점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결국 보수적인 할리우드 자본으로 만들어진 영화의 결론이 법 제도 안에서는 평등의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므로 감독 또한 이게 위험하다고 생각했는지 직접적인 대답을 회피한다. 그게 이 영화의 가장 아쉬운 점이다. 영화의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조커는 실험을 한다. 고담을 빠져나가려는 두 척의 배에 폭탄을 설치한 것이다. 그리고 폭탄의 기폭장치는 각자 상대편의 배에 주고는 정해진 시간까지 터트리지 않으면 두 배에 있는 폭탄 모두가 터질 것이라고 협박한다. 한 마디로 너희가 살기위해서는 상대편의 배를 터트려라가 되는 셈이다. 한 쪽 배에는 죄수들이 있고 또 다른 배에는 일반 시민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끝내 서로의 기폭장치를 누르지 않았고 두 척의 배는 모두 정해진 시간을 넘겨서도 터지지 않았다. 아무리 배트맨의 정체를 밝히라고 아우성을 쳐도 결국 시민들에게는 양심이라는 정의가 존재한다는 아주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할리우드 영화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영화의 진정한 결말은 법 제도 안에서의 평등을 실현하려던 하비던트의 몰락이자 투 페이스로의 죽음이다.

    비록 용기가 없었지만 다수 대중들이 보는 블록버스터를 이 정도의 경지로 끌어올린 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 영화에서 언급을 빼 놓을 수 없는 건 신들린 연기를 펼친 조커 역의 히스 레저다. 조커의 혼돈이 배트맨의 자기 모순성과 하비던트의 법 제도 안에서의 평등의 한계성을 자각하게 하는 것이기에 그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유작이라서 굉장히 안타까울 뿐이다. 그의 죽음 덕분에 조커와 이 영화는 더욱 전설이 될 듯하다. <타이타닉> 기록을 넘어서는지의 여부는 나의 관심 밖이고.

    출처 : http://blog.naver.com/mstripmstory (클릭)

    소년교주의 영화의 재구성 배트맨과 조커, 그리고 투페이스의 평등 &lt;다크나이트&gt; 처음 이 제목을 듣고 당연히 ‘Dark Night’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배트맨과 그의 영원한 숙적이자...
    ☆☆☆☆☆ | 다크나이트
  6. 소년교주의 영화의 재구성


    컬트 영화에 대한 오해와 여고생들만의 괴담

    <여고괴담2 - 메멘토 모리>



    1998년도에 나온 박기형 감독의 데뷔작 <여고괴담>은 침체기였던 한국공포영화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불러 일으키면서 흥행에 성공한다. 이는 입시 지옥이라는 벼랑 끝에서 같은 두발과 복장으로 서로에 대한 구분을 지운 채 그저 학교의 한 자리를 메우고 있는 존재 정도로 인식되어져 버린 학생들과 학교에 대한 사회적 메세지의 효용성을 충분히 구현하여 다수 관객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박기형에게는 이 메세지와 공포를 엮어낼 만한 능력은 부족했었던 것 같다.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는지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흡사 <전설의 고향>에 나올 법한 천둥번개의 등장과 여자들의 비명이 어우러진 괴담만을 만들어 내면서 유일한 족적인 '점프컷'을 남긴다. 그러나 학교에서 자행되는 괴담은 계속적인 현실적인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고괴담은 김태용, 민규동이라는 두 신인감독에 의해서 그 두번째 이야기가 만들어지게 된다. 안타깝게도 흥행에는 실패했으나 이 영화를 관람한 많은 사람들은 굉장한 완성도라면서 이 영화에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두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첫째는 '이 영화가 보편적인 학교에서의 괴담이 될 자격이 있는가?'이고 둘째는 '이 영화의 완성도는 정말로 뛰어난 것일까?'이다. 그리고 간단하게 대답해 보자면 둘 다 아니라는 것이다.


    먼저 영화의 제목 <여고괴담2 - 메멘토 모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죽음을 기억하라.'고 말하고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죽음을 기억하라. 그래야 네가 살 수 있다.'인데 이는 전편인 <여고괴담>보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학생들에 대한 사회적 메세지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두 신인감독은 고민에 빠진 듯 하다. 질문이 직설적이라서 관객들에게 주제를 강요하는 꼴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이 영화는 보편적인 여고의 모습이 아닌 여고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제한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공포가 아닌 괴담을 컬트라는 장치를 통해 구현한다. 결국 주인공과 그 주변 등장인물들은 입시 지옥이 코 앞인데도 치열하게 공부하지 않아도 되고 쉽게 선생님과 사랑을 나누어도 되며 손을 꼭잡고 옥상을 돌아다니며 레즈비언임을 직접적으로 들어내도 된다. 어짜피 이 영화는 여고 자체의 괴담이 아니라 여고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괴담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영화는 보편적인 학교에서의 괴담이 될 자격이 없다.


    게다가 컬트적 요소는 직설적인 메세지를 어느 정도 숨기고 있지만 드문드문 그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굉장히 촌스럽다. 교환일기까지는 좋았는 데 알약은 심했고 학생들간의 갈등을 유발하는 것까지는 좋았는 데 그런 모습을 효신(박예진)이 커다란 얼굴을 드러낸 채 바라보는 건 이야기적 측면으로 보나 그래픽 측면으로 보나 좀 우습다. 여기에 일반 관객들의 컬트 영화에 대한 오해가 있다. 컬트 영화라고해서 네레티브가 빈약하거나 그래픽 수준이 낮아도 된다는 생각은 심히 잘못된 것이다. 조약한 그래픽은 사용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 네레티브적인 요소도 마찬가지다. 소수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다수 학생들의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컬트는 독특함을 구현하는 도구는 될 수 있어도 제한적인 이야기를 보편적인 이야기로 확장시킬 수 있는 장치는 아니다. 결국 김태용, 민규동 두 감독의 영화적 완성도의 욕심은 그저 욕심으로만 그칠 뿐이다.(이 이후에 민규동은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으로 답보적인 모습을, 김태용은 <가족의 탄생>으로 한걸음 더 나아간 모습을 보인다.) 다만 직설적인 메세지의 효용성은 아직 사회적으로 충분하기에 이를 감정적으로 그려낸 이 영화에 많은 사람들이 찬사를 보내는 모양이다.


    교육의 현실은 차갑다. 냉기류 속에 학생들은 90년도에 만들어진 어떤 공포영화 속 모습과 별반 차이없이 아직도 힘들어하고 있으며 많은 아까운 목숨들이 사라져가고 있다. 죽음을 기억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죽음이 없는 학교가 만들어졌으면.





    출처 : http://blog.naver.com/mstripmstory (클릭)

    소년교주의 영화의 재구성 컬트 영화에 대한 오해와 여고생들만의 괴담 &lt;여고괴담2 - 메멘토 모리&gt; 1998년도에 나온 박기형 감독의 데뷔작 &lt;여고괴담&gt;은 침체기였던 한국공포영...
    ☆☆☆☆☆ | 여고괴담2, 컬트영화
  7. [최규성의 대중문화 산책] 처음 열린 '경찰영화제'

    정의 사도·비리 공범 '경찰의 맨얼굴'을 보다
    경찰 다운 영화 53년 역사 한눈에… 옛 추억 새록새록

    서울 도심에서 이색적인 영화제가 열렸다. 2일부터 사흘간 종로구 신문로 2가 경찰박물관에서 열린 ‘추억의 경찰영화제’다. 한국에서 경찰과 조직폭력배 영화의 역사는 액션 영화의 전통만큼이나 오래됐고 지금도 충무로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에 처음으로 열리는 경찰영화제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과거엔 조폭의 이미지가 김두한, 시라소니 등 협객 캐릭터이거나 악의 상징이었다. 경찰은 일관되게 민중의 지팡이, 정의의 사도였다. 경찰의 이미지는 아무래도 안팎으로 검열의 대상이었기 때문이었다. 둘 사이의 고정된 틀은 1993년 ‘투캅스’ 이후 무너졌다. 누가 정의고, 누가 악인지 구분이 모호해졌다. 심지어 요즘 영화 속 경찰 캐릭터는 ‘부패 경찰’을 넘어 흡혈형사 나도열까지 등장해 상상을 초월한다. 조폭 또한 마찬가지다. 학교와 절, 여자 조폭으로 끝없이 소재 영역을 넓혀 나간다.

    '장군의 수염' 최고의 수작

    이번 영화제는 경찰박물관 개관 1주년 기념으로 마련된 행사. 개막식에는 배우 장미희, 유지인, 이경진, 박중훈, 허준호, 양동근, 남궁원, 백일섭, 박상면, 노주현과 감독 이두용, 남기남 씨 등 많은 영화관계자들이 참석했다. 모두 경찰을 소재로 한 영화와 인연이 있는 영화인들이다. 이 중 박중훈와 허준호는 홍보대사로 위촉되어 감사패와 더불어 경찰복까지 선물로 받았다. 박중훈은 '투캅스' 1, 2편,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등 5편의 영화에서 형사 역을 맡은 단골 출연배우. 그는 “투캅스를 찍었을 때만 해도 부정적 경찰상을 묘사했다는 비난의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는 경찰의 좋은 모습을 보여줘서 고맙다는 칭찬을 들었다. 경찰이 예전에는 경직된 조직이었다면 이제는 이런 영화제를 만들 정도로 유연해진 것 같다”며 "이번 경찰영화제를 계기로 앞으로도 경찰이 친근한 이미지로 시민들 앞에 다가설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영화제 기획자인 장진영 경찰박물관장은 “작년에 박물관이 건립되면서 본격적인 자료 수집에 들어갔다. 대한뉴스에서 경찰과 관련된 부분을 뽑아 경찰의 역사가 담긴 영상자료를 만들면서 영화인들이 그려낸 우리 경찰들의 시대상이 궁금했다. 영화이기 때문에 과장된 부분도 있겠지만 경찰역사를 정리하는 좋은 기회라 생각해 올해 초부터 경찰영화를 만든 감독, 배우, 작가들을 한자리에 초대하는 자리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영화전문가들이 아닌 탓에 이들이 반 년간 영화제를 기획하고 준비하는 과정에 난관이 많았다. 상영 작품들도 원본 필름 대신 일반에 출시된 비디오나 DVD 소스를 사용해 화질과 음질이 걱정됐다. 그러나 장 관장은 “옛날 영화들이라 화질이 나쁘지만 오히려 깨끗한 화질보다 비가 오는 화면을 보여주는 것이 더 귀하다고 생각해 그대로 상영했다”고 말한다.

    영화제가 계속된 사흘 동안 `피아골'(55년), `홍콩에서 온 마담장'(69년), `경찰관'(78년), `성야'(88년), `인정사정 볼 것 없다'(99년), `와일드카드'(2003년) 등 10년을 단위로 총 6편이 상영됐다. 박물관측에서 파악한 해방 이후 한국 최초의 경찰영화는 53년 ‘애정산맥’이다. 헌데 스틸 사진만 남아 있고 필름이 없었다. 그래서 때마침 DVD로 발매된 55년작 ‘피아골’이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 빨치산 토벌이 주제라 군대 관련 영화일 것 같지만 실은 지리산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 총경의 이야기다. 또한 토벌 수기를 쓴 전북경찰국 공보주임이었던 김종환 씨가 이강천 감독과 함께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경찰영화 중 최고의 수작으로 꼽히는 작품은 68년 개봉된 이성구 감독의 ‘장군의 수염’. 국내 최초로 애니메이션과 실사를 뒤섞은 실험적인 영화다. 당시로는 특이하게 경찰관의 인간적인 모습을 그렸다. 한 가정의 평범한 가장인 경찰관이 자살로 결론을 내린 젊은 사진기자의 죽음을 둘러싸고 주변인을 수사하면서 어쩌면 이 사회의 부조리가 저 젊은이를 죽였는지 모른다는 메시지를 담아 ‘오발탄’과 견줄 만한 영화다.

    영화 속에는 당시 남대문 경찰서의 좁고 초라한 형사과의 풍경이 그대로 담겨 있어 귀중한 경찰 영상 자료로도 뜻이 깊다. 하지만 어렵게 작품은 구했으나 미국으로 이민간 감독을 찾을 수 없었고 또한 주연 배우인 신성일, 윤정희도 개막식에 참석하지 못해 ‘홍콩에서 온 마담 장’으로 상영작이 교체되었다. 출시된 적이 없는 명작을 관람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아쉬움이 지워지질 않는다.

    매주 토요일 무료상영도

    70년대에는 마약과 관련된 B급 액션영화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여호신’, ‘특별수사반 박쥐’. 68년 박종호 감독의 ‘형사수첩’에서 경찰들은 선의 상징이었다. 75년 ‘바보들의 행진’을 어떤가. 장발 대학생을 단속하는 장면을 자세히 보면 우습게도 경찰 자신이 장발이다. 감독이 은유적으로 공권력을 비꼬는 장면이다. 당시 그 이상의 표현은 불가능했다. 78년 작품인 이두용 감독 장동휘 주연의 ‘경찰관’은 그해 대종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경찰의 애환을 담았기에 경찰관들이 꼽는 걸작이다. 93년 ‘투캅스’는 비리를 저지르고 돈을 챙기고 악의 집단과 결탁하는 부정적인 경찰 이미지를 그린 파격적인 영화였다. 99년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프랑스 도빌 영화제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한 영화로 영상미가 압권이다.

    추억의 경찰영화제의 숨은 공로자는 경찰영화를 정리해 제공한 안규찬 씨.
    “처음 의뢰가 왔을 때 경찰의 부정적 이미지가 강한 투캅스나 주홍글씨는 배제했다. 그런데 (박물관측에서) 경찰이 관련된 영화는 어떤 영화라도 상관이 없다고 말해 놀랐다”며 “액션 오락영화에서도 범죄자와 경찰은 반드시 등장하지만 그것을 경찰영화라고 말하긴 힘들다. 경찰 직업의 애환이나 현장성이 주가 되어야 경찰영화다. 그러다 보니 현재 필름이 남아 있거나 비디오나 DVD로 제작된 국내 경찰영화는 고작 83편에 불과했다”고 발굴 뒷얘기를 소개했다.

    영화제 상영작에 대한 아쉬움은 크다. 작품성보다는 감독과 배우가 개막식에 참석하느냐 여부가 상영작을 선정하는데 중요한 요소였다. 그래서 재미나 완성도를 기대하고 보는 관객이라면 적잖이 실망했을 영화제다. 하지만 옛날 영화 속에 등장하는 과거 우리 사회의 풍경과 자화상을 보면서 그때 그 시절의 추억을 느껴보고자 했다면 의미 있는 자리였을 것이다.

    한편 경찰박물관은 11일부터 매주 토요일을 `경찰영화 상영의 날'로 정해 `흡혈형사 나도열' 등을 무료로 상영한다.


    글·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최규성의 대중문화 산책] 처음 열린 '경찰영화제' 정의 사도·비리 공범 '경찰의 맨얼굴'을 보다경찰 다운 영화 53년 역사 한눈에… 옛 추억 새록새록...
    ☆☆☆☆☆ | 경찰영화제
  8. 컬트 중의 컬트 조도로프스키감독의 걸작 2편의 국내개봉이 의미하는 것은...

    <최규성의 대중문화 산책> 미주한국일보 쉬즈 2007년 3월


    90년대 한 때 영화에 미쳤던 적이 있다. 코흘리개 어린아이 때부터 극장문턱을 닳도록 드나들었던 아이였지만 극장에선 개봉하지 않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영화들을 보는 재미란 짜릿했다. 그 시절 할리우드 영화는 정말 시시했다. 그때 내 영혼을 저격한 영화들은 컬트영화였다. 일반의 평가와 관계없이 소수의 집단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이 영화들은 80-90년대 당시 영화마니아들이라면 열악한 화질의 불법 비디오를 통해 한번쯤은 보았으리라. 이처럼 컬트영화는 1960년대 저항문화의 영향을 받은 일부 영화작가들의 저예산 영화들로 기존 상업영화의 배급망을 타지 못하고 대학가의 소극장을 중심으로 광적인 팬들이 형성된 영화를 말한다.



    그 시절 내겐 모든 영화를 소장하고 싶은 컬트영화의 양대 산맥이 있었다. 칠레의 조도로프스키감독과 이태리의 빠졸리니감독이다. 이 두 감독의 모든 영화는 정말 상상을 불허하는 굉장한 영상을 뽐냈다. 그야말로 환상특급이었다. 하지만 국내에서 정식 개봉한 영화는 상당부분 삭제된 조도로프스키감독의 ‘성스러운 피’ 단 한편 뿐 이었다. 아마도 1990년 칸영화제 공식 선정되며 최고의 영화로 추앙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빠졸리니 감독의 ‘살로 소돔의 120일’이라는 영화는 두 번 보기 힘들 정도로 지독한 컬트영화다. 소년소녀들을 감금해 생각의 자유조차 빼앗은 상태에서 인분을 먹이고 살가죽을 벗겨내는 장면은 구토가 나올 지경이었다. 바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파시스트를 비판한 영화를 만든 그는 영화개봉 후 실제로 피시스트들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전해지는 전설적인 감독이다.


    그 시절 감탄을 불러냈던 컬트영화가 수도 없지만 ‘2001년 오딧세이’로 유명한 영국감독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장치의 오렌지’와 일본의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감각의 제국’도 걸작이었다. 이 모든 컬트영화들의 공통점은 너무도 폭력적이고 자극적이고 야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도저히 개봉할 수 없는 영화들이었다. 오죽하면 이런 영화들이 정식으로 국내 개봉을 하는 날은 ‘문화독립일’이 될 것이라고 했을꼬.



    세상 오래살고 볼 일이다. 진짜로 ‘문화독립일’이 현실이 된 것을 보면. '폭력의 피카소', ‘영화계의 이단아’로 불리는 그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감독의 <엘 토포>와 <홀리 마운틴>이 동시에 이 땅에서 정식 개봉을 했다. 영화가 처음 개봉되었을 때 이 영화들은 성적 표현수위와 신성 모독 등의 문제로 수입 허가가 불가한 영화들이었고 오랜 세월과 함께 필름 보존 상태마저 불량해졌지만 최근 기술의 발달로 고화질 필름 복원이 되어 30년 늦게 한국 개봉이 이뤄진 것이다.


    조도로프감독도 내한했다. 지난 5일 국내 개봉(15일)을 앞두고 6박7일 일정으로. 기자들과 간담회장에 나타난 팔순을 바라보는 그는 백발이었다. 장난기가 넘치는 그는 통역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연신 농담을 던지면서 “현실과 상상 중에 더 중요한 것은 당연히 상상이다. 오늘 내 말을 창조적으로 이해해 달라”고 했다. “내 영화는 의상, 음악, 편집, 시나리오, 심지어 연기까지 나 혼자 책임진다. 난 스스로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라는 생각한다. 항상 당대 주류 영화와는 정반대의 작품을 만들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이가 드니 이제는 보는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1929년 칠레의 볼리비아 국경에서 태어난 러시아계 유대인인 그는 독특한 정신세계를 영화 속에 담으며 팬터마임, 연극, 소설, 만화, 출판, 그리고 타로카드 점술 등 폭넓은 예술 영역을 넘나드는 세계적인 아티스트다. 서커스단 배우의 아들로 태어나 산티아고대학에서 심리학과 철학을 공부하다가 1953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팬터마임을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영화는 앨프리드 히치콕, 조지 로메로 감독의 작품에 감동을 받아 1968년 충격적인 영상을 담은 ‘환도와 리스’로 데뷔했다. 최근에는 ‘엘 토포’의 속편격인 ‘아벨카인’을 찍고 있다.


    먼저 1970년, 서부극 형식의 전위 영화를 통해 성경, 폭력, 권위, 성 등의 금지된 주제들을 가지고 초현실적 영상미를 보여준 영화<엘 토포>는 어떤 영화인가? 이 영화에 감명 받은 ‘존 레논’이 배급권을 사들여 미국전역에 개봉관을 확대해 ‘심야영화의 새로운 트렌드’를 창조하며 컬트 마니아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영화다. 하지만 <엘 토포>는 판권분쟁으로 인해 일본에서 발매된 레이저디스크 외에는 제대로 된 비디오 한 편 존재하지 않았다. 다행히 지난 2002년 갈등이 해소되면서 5월이면 감독의 DVD 컬렉션까지 발매된다니 불법복제 비디오를 통해 영화를 봤던 이들에게는 만감이 교차할 것 같다.



    1973년 발표한 최고 걸작 <홀리 마운틴>도 기독교와 동양철학, 우주와 창조주, 인간에 대한 독특한 세계관이 표현 된 영화다. 이렇게, 세계 영화사에 초특급 컬트영화로 기록된 <엘 토포>와 <홀리 마운틴>의 국내 정식 개봉은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국내개봉한 컬트영화 중 이 두 작품만큼 충격적인 영상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지 않을까. 그의 작품 중, 국내에서 유일하게 심의를 통과했던 <성스러운 피>는 일부장면이 삭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단 5일 상영에 그친 문제의 작품. 그래서 더 충격적인 영상을 담고 있는 이 두편의 개봉은 심의논란까지 예상되며 관객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더구나 보존상태가 불량했던 필름을 HD고화질로 리마스터링해 선명한 화질로 감상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는 DVD로 보고 확인한 한국영화의 매력이 자신의 방한에 결정적이었다고 털어놓았다. 통역의 도움을 받아 ‘왕의 남자’ ‘괴물’ ‘한반도’ ‘친절한 금자씨’ ‘음란서생’ 등의 영화를 거명하면서, 그 작품들에 매혹됐다고 고백했다. 조도로프스키는 “같은 철학, 같은 장면을 반복하는 할리우드 영화는 마치 13세 어린이를 위한 영화 같다”며 “감히 영화적 새로움은 한국에 있다고 확신한다”고 한국영화를 극찬했다. 자신을 “연어처럼 항상 물살을 거스르려는 사람”이라고 소개한 그는 “영화를 통해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강조했다.


    반가운 소식이 또 있다. 독일의 세계적 거장 빔 벤더스 감독도 지난 2000년 부산국제영화제 방문 이후 7년 만에 15일 막을 열 '빔 벤더스 특별전'에 맞춰 내한할 예정이다. 거장들의 줄을 이은 방문을 보니 이제 한국은 조금은 침체의 느낌도 있지만 분명 세계적인 영화강국으로 성장했다는 확신이 든다. 뿌듯한 기분이다.


    /글.사진=최규성 대중문화컬럼니스트 oopldh@naver.com

    컬트 중의 컬트 조도로프스키감독의 걸작 2편의 국내개봉이 의미하는 것은... &lt;최규성의 대중문화 산책&gt; 미주한국일보 쉬즈 2007년 3월 90년대 한 때 영화에 미쳤던 적이 있다. 코흘리개...
    ☆☆☆☆☆ | 조도로프스키감독
  9. [최규성의 대중문화 산책]

    윤정희 데뷔 40돌 특별전 추진
    한국영화 지켜온 '영원한 배우' 팬들이 준비한 큭별한 무대


    600년 만에 찾아왔다는 ‘황금돼지의 해’인 2007년 12월, 영화계에 뜻깊은 행사가 조용하게 준비되고 있다.
    1월 1일로 데뷔 40주년을 맞이한 여배우와 관련된 행사이다. 주인공은 남정임, 문희 씨와 함께 ‘6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 1세대를 구축했던 윤정희(62) 씨다. 1976년 재불 피아니스트 백건우 씨와 결혼한 그녀는 지난 연말 지인들이 마련한 결혼30주년 행사가 일간지에 소개될 만큼 여전히 대중문화계의 관심 인물이다. 윤 씨는 67년, 22세 때 영화 <청춘극장>으로 데뷔한 이래 지금도 각종 국내외 영화제의 심사위원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60년대 영화인이다.

    윤 씨의 데뷔 40주년 기념 특별전을 준비하고 있는 이는 2004년부터 자발적인 인터넷 팬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영화기획자 안규찬(45) 씨. 배우 개인의 4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은 국내 영화계에선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다. 과거와의 단절이 심한 영화계 현실에선 더욱 그렇다.


    특별전은 무엇보다 안 씨 자신이 윤 씨의 영원한 팬임을 자처하기에 가능했다. 현재 안 씨가 소장하고 있는 윤 씨의 영화비디오 자료는 100편(총 출연작은 300여 편) 정도. 영화계에선 ‘없는 영화가 없는 사람’으로 유명한 그는 금년 상반기에 인터넷 영화 사이트 CLASSIC MOVIE LIBRARY도 오픈할 예정이다.


    특별전을 열게 된 진짜 이유가 궁금했다. “외국의 유명 배우들은 다들 기억하면서 한국의 훌륭한 배우들은 너무 쉽게 잊어버리는 현실이 안타까웠어요. 반짝 인기 후 결혼해 사라지는 여배우들이 대부분입니다. 헌데 유명 피아니스트의 아내가 된 후 해외에 살면서도 한국영화에 애정을 가지고 40년 동안 한국 영화계를 지켜오고 있는 그녀가 얼마나 중요한 배우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어요.” 특별전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지난해 여름, 국내 팬들에 의해 홍콩여배우 진추하의 <사랑의 스잔나> 개봉30주년 행사가 열리는 것을 보고서다. 그때 ‘아, 나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지난해 말 청룡영화제 심사를 위해 귀국한 윤 씨를 만나 “좋다”는 짧은 대답과 환한 웃음을 얻어냈다. 그는 99년, 20세기 한국영화를 빛낸 명콤비에 선정된 윤정희 씨와 김수용 감독을 초대해 한국고전영화 감상회를 개최한 적이 있었다. 70명 정도가 모인 단출한 모임이었지만 열기만은 대단했다고 한다.


    윤정희 씨의 데뷔 40주년 특별전을 준비중인 안규찬(오른쪽)씨가 윤정희씨와 함께 찍은 기념사진.


    무료로 진행될 이번 행사는 그가 운영하는 네이버 팬 카페와 고전영화카페 회원들과 함께 준비한다. 상영작으로는 일반인이 볼 수 없었던 미출시 희귀작 2편을 선정할 것이라고 귀띔한다. 윤 씨가 출연한 영화의 하이라이트나 영화주제가가 나오는 부분도 따로 준비 중이다. 초대 인사로는 윤정희, 백건우 부부와 명콤비 김수용 감독이 0순위. 윤 씨가 출연한 60년대 영화의 주제가를 부른 이미자, 남진, 나훈아, 정훈희, 문주란 등 당대 최고 가수들도 초대할 예정이다. 그리고 요즘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동명이인 탤런트 윤정희도 초청 대상으로 염두에 두고 있다.


    윤정희 씨처럼 국내 영화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배우는 없다. 동시대의 대다수 여배우들은 스타가 되기 전 대부분 단역배우나 조연 탤런트의 과정을 거쳤다. 6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였던 문희, 남정임 씨도 그랬다. 1966년 여름, <청춘극장> 영화제작을 앞두고 합동영화사는 여주인공 오유경 배역을 공개 모집했다. 지망생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당시 22세의 윤 씨는 2,000여 명의 경쟁자를 제치고 신데렐라가 되었다. 주연으로 출연한 윤 씨의 데뷔작 <청춘극장>은 67년 서울 국제극장에서 개봉해 당시로서는 경이로운 27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안규찬 씨가 7세 때 본 첫 영화는 윤 씨의 두 번째 출연작 <강명화>(1967). “당시 윤 씨는 인형처럼 예쁜 여배우였어요. 어머님과 친구분들이 모였다 하면 윤정희 윤정희 하시길래 관심을 가졌죠.” 윤 씨의 데뷔영화인 강대진 감독의 <청춘극장>은 안 씨도 보지 못했다. 영화필름이 분실되었기 때문. “윤정희, 강수연, 장미희는 타고난 배우입니다. 세 사람 모두 정식으로 연기 공부 없이 데뷔해 최고의 연기를 펼쳐냈어요. 예술이란 90%는 타고난 재능이고 나머지 10%는 노력이라 생각합니다.”


    74년 윤 씨는 중앙대에서 영화석사 학위를 받았지만 영화의 본고장인 프랑스 파리3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학사와 석사 학위를 따냈다. 백건우 씨와의 만남은 72년 독일 뮌헨올림픽 때 문화사절단 일원으로 영화 <효녀심청>으로 방문했을 때 이뤄졌다. 유학과 더불어 사실상 은막을 떠났던 윤 씨는 20년 후인 94년, 영화 <만무방>으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해 영화계를 또 한번 깜작 놀라게 했다. 50줄에 들어선 여배우로선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는 국내외 각종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25회 수상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은막의 여왕’이다. 98년엔 김지미, 최은희, 남정임 씨와 함께 한국영화 명배우 ‘베스트10’에 선정되기도 했다.


    4월께 윤 씨 귀국시점에 맞춰 개최


    깜찍하고 세련된 도시여성에서 억센 시골여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도 뛰어난 연기력을 선보였던 윤정희 씨. 데뷔 40주년 기념 특별전이 팬들에 의해 개최된다는 사실 또한 한국영화계에 새로운 이정표가 될 전망이다. 아직 특별전의 장소나 날짜는 확정되지 않았다. 올 4월쯤 윤 씨의 귀국 시점과 맞물릴 것 같다. 안규찬 씨는 윤 씨에 대해 “한국영화의 맥을 이은 가장 중요한 여배우 중의 한 사람이다. <독짓는 늙은이>, <감자>, <내시>에서의 연기는 굉장했다. 80년대 영화와 차별되는 토속적인 에로틱 연기는 아무도 따라올 수 없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비비안 리에 비견할 만하다”고 평한다.



    “앞으로 한국영화의 뿌리찾기 차원에서 장미희 등 중요한 여배우들의 특별전을 계속 마련할 예정”이라고 포부를 밝힌 안 씨는 “데뷔 40주년이 된 윤정희 씨는 올해 신성일 씨와 100번째 영화를 찍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다”는 흥미로운 소식도 함께 전했다. 같은 배우와 100번째 영화라면 지금까지 99편의 영화에 함께 출연했다는 의미. 놀라운 일이다. 100번째 영화촬영이 성사된다면 아마도 기네스북에 오를 진기록이 아닐까. 특별전이 열릴 12월이 기다려진다.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최규성의 대중문화 산책] 윤정희 데뷔 40돌 특별전 추진한국영화 지켜온 '영원한 배우' 팬들이 준비한 큭별한 무대 600년 만에 찾아왔다는 ‘황금돼지의...
    ☆☆☆☆☆ | 윤정희
  10. [영화] 여자, 정혜

    - 나도원 | 2005/03/27 18:00

    [영화] 여자, 정혜

    - 나도원 | 2005/03/27 18:00


    푸른 은행나무들, 아파트 베란다의 화초들, 오래된 보도블록 틈새로 삐죽이 나온 풀과 여름의 공기를 담뿍 담은 ‘여자, 정혜’는 초록빛이다. 마냥 싱그럽다기보다는 축축한 그늘이 드리워진 초록빛.

    재미없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여자가 있다. 말수 적고 표정변화 많지 않으며 머리카락과 속눈썹에 집착하는 습성이 있는 것 말고는 평범해 보인다. 그런데 신혼여행 갔다가 신랑을 두고 몰래 돌아와서 이상한 애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이상하긴 하다. 계속 지켜보자니 얼굴만 아는 남자를 쫓아가 대뜸 집으로 초대하는가 하면 술 취한 젊은 남자를 모텔로 데려가 재워주기도 한다. 어릴 적 고모부에게 성폭행을 당한 상처가 있었음을 알고 보니 평범한 여자라 쉽게 말하긴 미안해진다.


    한 사람을 따라다니며 관찰하는 ‘여자, 정혜’는 일상을 담은 조용한 영화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혜에 대한 정보가 하나둘 제공되고, 그가 스스로에게 변화를 주려했던 시도들이 실패한 후 모종의 행동을 계획하면서부터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한다. 스릴러의 구조가 이렇다. 급기야 공원에서 고모부와 나란히 앉아있는 정혜의 핸드백에서 칼이 나오는 순간 긴장은 극대화된다. 현재와 과거를 엮어놓은 구조와 화면도 치밀하고, 사소한 소음들 역시 무의미하지 않고 시간을 표시하고 있다. 퇴근 버스 라디오에선 ‘배철수의 음악캠프’가 흐르며 저녁 시간에 틀어놓은 TV에선 ‘생방송 화제집중’이 들린다. 모두 초저녁 프로그램들이다. 또 여름의 냄새를 담은 사실적인 영상도 아름답다. 일상을 사실적으로 담고자 했던 한국 영화들이 대개 이야기에만 집중하면서 세밀함과 시각적 아름다움에는 무심했던 것과는 다르다.

    얼마 전 개봉했지만 타이틀이 영 매력적이지 못했던 ‘인게이지먼트’의 감독은 ‘델리카트슨 사람들’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 ‘에일리언 4’ ‘아멜리에’로 유명한 장 피에르 주네. 국내에선 그의 영화를 주로 이야기나 메시지 쪽으로 접근하면서 상징을 찾으려는 것 같지만 사실 시각적 장치들과 발상에서 탁월하고, 특히 상상력 넘치는 영상에도 주목해야하는 감독이다. 이는 영화평론에서 텍스트를 위주로 한 문학적·철학적 해석이 주가 되면서 간과되어온 부분이다. 그 동안 익혔던 온갖 검술을 오이채나 무채를 써는 데에 활용하는 통에 시각적 이미지와 색의 실험은 부차적인 것처럼 열등하게 보는 경향이 생겼다. 시각적 쾌락을 제거하고 문학적으로 말하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이 과대평가 받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여자, 정혜’의 내용에만 집중하여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분석하고 비난하는 것은 썩 적절하지가 않다. 오해를 하나 풀고 넘어가자면, ‘여자, 정혜’에서 묘사된 심리와 사소한 행동들은 여성만의 특성이 아니다. 사실 많은 부분들이 ‘남자, 도원’이라 했어도 유효했을 묘사들이다. 게다가 여성작가 우애령의 ‘정혜’가 원작인데, 그 쪽으로 향했어야 할 담론이 형성되고 있다. 물론 주인공의 이름 ‘정혜’가 마지막에 타인에 의해 처음으로 불려지는 장면은 보기에 따라선 불편할 수 있고, 시종 가까이 따라잡는 카메라가 마치 몰래카메라라도 되는 양 볼 것을 강요하는 것 역시 그럴 수 있긴 하다.


    다시 ‘여자, 정혜’의 클라이맥스. 관객은 그녀가 등산용 칼을 챙겼던 것을 기억하고, 그녀의 핸드백에서 그 칼이 느리게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 앞서 고양이를 놓아줬던 이유도 드러난다. 정혜는 칼을 쥐고 격렬한 동요와 갈등에 휩싸이지만 친척 아저씨는 이 사실을 모르고 묵묵히 앉아있을 뿐이다. 던질 테면 던져보라던 녀석에게 차마 돌을 던지지 못하고 쥐고만 있는 꼬마처럼 정혜는 부들부들 떤다. 그리고 이 때 알프레드 히치콕의 ‘새’에서 한가로이 담배를 피워 무는 여인의 등뒤로 검은 새들이 하나둘 모여드는 장면에 맞먹는 긴장감이 조성된다.

    ‘여자, 정혜’는 구조상으론 서스펜스를 동반한 조용한 스릴러로 볼 수도 있고, 일상을 다룬 그간의 영화들에 비한다면 대중적이며, 시각적으로도 만족스럽다. 대단하진 않더라도 있어도 좋을 법한 스타일. (참, 새끼고양이는 어디로 갔을라나…)

    푸른 은행나무들, 아파트 베란다의 화초들, 오래된 보도블록 틈새로 삐죽이 나온 풀과 여름의 공기를 담뿍 담은 ‘여자, 정혜’는 초록빛이다. 마냥 싱그럽다기보다는 축축한 그늘이 드리워진 초록빛. 재미없...
    ☆☆☆☆☆ | , 문화 칼럼, 여자, 영화, 정혜
413-720 경기도 파주시 아동동 283. 팜스프링 아파트 114-504, 발행편집인 : 박준흠
Copyright © 1999-2008 가슴네트워크, gaseum.co.kr/gaseum.com. All rights reserved. 문의 : gaseumnetwork@gaseu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