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년교주의 음악의 재구성 - H Ver.
이즘 성원호 평론에 대한 반론
<Run Devil Run>
우선 누구나 다 아는 사실 하나. 소녀시대의 <Run Devil Run>은 케샤가 '가이드 버전'에 참여했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하나. 우리가 '가이드 버전'으로 알고 있는 이 곡은 사실 케샤 본인 앨범의 곡 선정 작업에서 제외된 '데모 버전'이었다. 이 팩트를 전제로 한 이즘 성원호의 평론(클릭)은 하나의 요소로 언급해야 할 그 팩트 자체에 함몰되면서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결국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 문장이었을 것이다. '패션에 기울인 유니크하며 독창적인 매력을 음악에 아주 조금만이라도 투영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나 이 결론은 부당한 근거위에 서 있다.
성원호는 소녀시대의 <Run Devil Run>이 '케샤의 데모 버전을 고대로 빼다 박았다'면서 이를 비판한다. 그러나 이는 엄연히 말해서 비판의 기준으로 성립될 수 없다. 케샤가 데모 버전을 녹음했다고 하더라도 이 곡은 Busbee, Alex James, Kalle Engstrom 등 다국적 작곡가들의 합작품이다. 그는 글에서 인트로와 클랩 사운드, 곡의 길이나 이펙트가 같다고 말하며 본인의 주장을 뒷받침하려 하지만 이는 작곡의 범주이지 독창성의 범주가 아니다. 소녀시대가 케샤의 데모버전을 따라했다는 식의 비판을 하기 위해서는 <Run Devil Run>의 '최초 버전'과 케샤의 '데모 버전'을 비교해서 케샤가 '데모 버전'에 부여한 그녀만의 독창성을 밝혀야만 한다.
두번째로 그는 가사의 내용을 걸고 넘어진다. '케샤의 가사에선 자신을 농락한 남자에 대한 강력한 분노와 경고, 실행 의지를 엿볼 수 있'지만 '소녀시대의 가사는 단순히 나쁜 남자 이야기'이며, 버스 부분에선 추격 의지가 실종되었는데 갑자기 코러스 부분에서는 도망가라고 하는 등 전개가 매끄럽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케샤의 '데모 버전' 가사와의 비교에 의한 성원호 본인의 자의적인 해석일 뿐이다. 소녀시대의 <Run Devil Run>의 가사는 나쁜 남자에 대해 '더는 못 봐 걷어차 줄래'라고 말하는 도도하고 시크한 여자들의 경고이다. 그리고 이는 케샤의 '강력한 분노와 경고'와는 다른 매력을 풍기고 있다.
보컬의 문제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앙칼지고 악에 받친 듯 비아냥대는 케샤의 보컬과 달리 소녀시대 9명의 보컬은 어떠한 우월함도 보이지 못한다.'면서 '후렴구를 탄력 있게 당겨 부르고 다층 구조로 구성한 점은 곡을 찰기 있게 해준 일등 공신으로 이는 케샤의 보컬 스킬을 답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소녀시대의 <Run Devil Run>을 케샤의 데모버전에 소녀시대의 목소리만 얹은 습작 같은 싱글로 판결내리고 있다. 물론 3분 21초의 노래를 9명씩이나 부르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불만이기는 하지만 현존하는 걸그룹 가운데 소녀시대만큼 보컬이 괜찮은 걸그룹도 없는 게 사실이다. 강력한 분노를 실행하려는 케샤의 보컬과 도도하게 걷어 차 주겠다고 경고하는 소녀시대의 보컬 스타일이 다른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물론 '독창적인 매력을 음악에 아주 조금만이라도 투영해줬으면' 하는 성원호의 바람 자체는 타당하다. 본인들의 색깔이 결여된 상황에서 별 다른 차별점 없이 똑같은 스타일의 곡을 보이는 아이돌 음악은 분명히 문제이다. 또 그러한 문제를 소녀시대의 <Run Devil Run>에서 찾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결론이 부당한 근거위에 서 있다는 것이다. 성원호는 처음부터 케샤의 '데모 버전'을 원 텍스트로 지정하고 소녀시대의 곡은 이를 모방한 텍스트로 규정하면서 그 잣대로 <Run Devil Run>을 판단했다. 그러다보니 가사와 보컬이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개인 감상평이라면 모르겠지만 평론이라면 이래서는 안 된다.
내가 보기에 소녀시대의 <Run Devil Run>은 분명 좋은 곡이며 소녀시대의 노래 가운데 가장 괜찮은 완성도를 가지고 있다. 꽉 들어차 있는 퍼커션과 변화하는 리듬이 곡의 맛을 살리고 있다. 2분 27초경에 '얘 나 같은 애 어디도 없어'로 시작하는 불만과 경고의 가사들은 보컬이 9명이나 되는 장기를 십분 발휘해 각자가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9명이 한 목소리로 오빠를 찬양하던 기괴한 모습보다는 각자 마음 속 말들을 토로하는 듯한 보컬은 분명히 매력적으로 보인다. 호불호가 갈릴 수는 있겠지만 분명한 건, 이 곡이 습작 따위로 취급받을 만큼 엉성하지는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별점 : ***
출처 : 소년교주의 음악만화 블로그
원문 : http://blog.naver.com/boysrun/90085001517


소년교주의 음악의 재구성 - H Ver.
이미지 메이킹의 부재
<너 때문에 미쳐>
비트의 활용을 제법 영민하게 하고 있다. 초반부터 미친듯이 내지르면서도 음마다 붙여진 가사와 신시사이저의 사용으로 곡의 끊임없는 긴장을 주는 것도 잊지 않고 있다. 멤버들의 가창력 부족은 오토튠의 사용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으며 반복되는 가사들은 집중도를 높여준다. 또한 'Oh Oh Oh Oh'의 가사는 전작이었던 'Bo Peep Bo Peep'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며 리스너들의 귀를 사로잡는 강렬한 후크의 역할을 충실하게 하고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너 때문에 미쳐>는 상당히 깔끔하게 만들어진 곡이다.
그러나 '비트의 속도감으로 끊임없이 긴장을 유발하며 강렬한 후크로 이목을 사로잡는다'의 공식에 따르는 정직함은 도리어 함정으로 작용한다. 질문 하나. <너 때문에 미쳐>와 <Bo Peep Bo Peep>의 차이점은? 전자가 섹시함을 강조했고 후자가 앙증맞음을 강조한 것 말고 다른 점이 있을까? 질문 둘. 티아라와 여타의 걸그룹과의 차이점은?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보다는 노골적인 벤치마킹 노선을 택하고 있는 티아라가 여타의 걸그룹과 다른 점이 있을까? 이 질문들이 수렴되는 하나의 결론은 '이미지 메이킹의 부재'이다.
결국 이는 기획사의 디렉팅과 마케팅의 문제이며 더 나아가 이들이 가지고 있는 음악적 관념과 소신의 문제이다. 물론 관념과 소신이라고 해서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그저 상업성과 더불어 음악적 고민도 함께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상업성만을 노리며 소속 그룹을 트렌드에 맞게 패션과 설정만 달리하는 봉제인형으로 취급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고 자각하지 않는 한, 티아라의 헛발질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별점 : *1/2
출처 : 소년교주의 음악만화 블로그

소년교주의 음악의 재구성 - L Ver.
깜찍한 소녀들의 모습과 톡톡튀는 발랄한 느낌의 사운드라는 조합은 정확히 대중들이 소녀시대에게 기대하는 것과 일치하는 사항이겠죠. 이번 정규2집의 타이틀 싱글인 <Oh!>는 그런 면에 있어서 충분히 합격점입니다. 언제부터인가 공식화 된 걸그룹의 복고풍 디스코 법칙까지 그대로 이행하고 있죠. 무엇보다도 'brend new sound' 가사의 인트로는 몰입도가 굉장합니다. 밋밋했던 <소원을 말해봐>의 도입부와 비교해 봤을 때 그 차이가 더 확연히 느껴지는 한방입니다.
그러나 인트로가 지나고나면 곡의 문제점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우선 인트로와 버스의 연결이 엉성합니다. 같은 곡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전혀 다른 전개여서 황당할 정도죠. 황당함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버스에서 코러스로 넘어가는 부분도 또한 뜬금없이 덜컥 바뀌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변화무쌍의 수준을 넘어서는 전개가 3분여 되는 곡에서 계속적으로 일어납니다.
가사는 끔찍한 수준입니다. 'Oh! Oh! Oh! Oh! 오빠를 사랑해!'의 가사 연결은 대체 누구 머리에서 나온 건지 궁금할 지경이예요. 전체적인 가사도 오빠를 사랑한다는 내용으로 소녀시대의 든든한 지지기반인 삼촌팬들을 의식한 듯 보이지만 대부분 실패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소속사에서 삼촌팬들의 욕망을 정확하게 해석하고 있지 못한 듯 보여요. <Gee>에서의 풋풋한 소녀들의 모습과 <소원을 말해봐>에서 소원을 들어주는 달콤한 소녀들의 속삭임은 <Oh!>에 이르러서는 오빠를 위해 머리도 하고 화장도 하며 매달리는 소녀로 변모합니다. 심지어 '어떻게 하나 이 철없는 사람아'는 전형적인 트로트 가사여서 말 그대로 분위기를 확 깨는 모양새입니다.
솔직히 <소원을 말해봐>까지는 실수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음 타이틀 싱글의 수준은 나아질 거란 기대가 있었어요. <다시 만난 세계>와 <Gee>때의 완성도는 그만한 기대감을 갖기에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무려 '정규'2집에서의 타이틀 싱글이 이 정도라니 이제는 실수가 아닌 실패로 보이고 있습니다. 소녀시대의 네임벨류에 기대어 흥행에는 또 성공하겠지만, 90년대 걸그룹들이 실패한 그 포지션이 다시 되풀이되는 데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닌 듯 보입니다.

소년교주의 음악의 재구성 - L Ver.
잘 만든 컨셉의 노래도 필요하다.
<백지영 - 내 귀에 캔디 (Feat. 택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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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곡을 들으면서 자연스레 엄정화의 <D.I.S.C.O>가 떠오르더군요. 두 곡의 공통점이 뭐냐구요? 잘 만든 컨셉의 노래라는 거죠. 사실 <D.I.S.C.O>는 업템포의 재미있는 곡이기도 하지만 패션적인 감각이 남다른 엄정화가 톡톡튀는 의상과 메이크업을 하고 꽤 그럴 듯하게 예쁜척을 해낸다는 이미지적인 재미도 있었거든요. 손발이 오그라드는 가사의 <총 맞은 것처럼>을 부른 백지영이지만 사실 그녀의 전성기 때를 떠올려보면 충분히 이런 부분들을 살릴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 안 해>와 <총 맞은 것처럼>의 연타로 어느 정도 재기의 압박감이 가신 모양인지 그녀는 다시 주무대였던 댄스로 돌아왔습니다. 그 것도 곡의 재미와 이미지적인 재미라는 두 가지를 잘 조율해서 말이죠.
<내 귀의 캔디>는 일단 쿵쾅대는 빠른 속도감의 비트로 귀를 압도합니다. 그러면서도 리듬감 또한 잘 살려내고 있어 리스너로 하여금 저절로 몸이 반응하게끔 하는 곡이예요. 전자음의 사용도 적절하고 오토튠으로 만든 기계음의 보컬 역시 노래와 잘 녹아나고 있습니다. 클럽에서 들으면 딱 좋을 만한 노래입니다.
무엇보다 발군인 것은 캐릭터 설정입니다. '짐승돌'의 이미지로 주가를 올리고 있는 2PM의 택연은 거친 목소리로 남성다운 매력을 한껏 뽑내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강한 이미지가 있었던 백지영은 한껏 요염한 매력을 보이며 여성스러운 모습으로 어필하고 있구요. 이 둘의 결합은 꽤나 흥미로운 시너지를 내고 있습니다. 순전히 백지영의 능력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곡의 완성도와 이미지 전략이 적절한 균형점을 내면서 좋은 즐거움을 주는 건 그녀의 몫이 상당히 커 보이는 군요. 가창논란에 표절논란까지 쓸 떼 없는 것으로 시끄러웠던 대중음악 시장에서 이런 재미를 주는 것도 참 고맙다는 생각이 듭니다.
별점 : **1/2
출처 : 소년교주의 음악만화 블로그
원문 : http://blog.naver.com/boysrun/9008465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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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을 별로 말하기 싫은 형편없음
<소녀시대 - 소원을 말해봐 (Gen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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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가지는 포괄적인 예술성과 내제된 이념성이 존재한다고 해서 프리재즈는 그들 스스로가 가지는 고유한 음악적 장르를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을 우선 전제한다. 요컨데 프리재즈는 '대중음악'이라는 것이다. 어떤 의미로는 철저하게 비 대중적인 음악이, 알고보면 '대중음악'이라는 아이러니한 진실은, 왜 우리가 ㅡ즉 대중들이 왜 프리재즈란 음악을 그렇게나 언짢게 마주했는가에 대한 물음에 최소한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하지만 대중음악이 전부 다 '대중 친화적'일 필요는 없다. 그리고 '대중 친화적인 음악'이 대중음악 전체를 대표하지도 않는다. 다만, 대중음악의 경쟁력은 '대중 친화적'일때 발현된다는 것인데, 요약하자면 음악이 대중 친화적으로 존재할 필요성은 없지만, 대중음악은 결과적으로 대중 친화적일때 발전되고 그 생명력을 얻는다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할 진실은 그 '대중성'이라는 잣대가 계량적 수치로 적용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전 세계적으로 몇 백만장 이상 나가면 '대중적', 그 이하로 나가면 '비 대중적'이라고 하는 잣대는 애초에 없다. 따라서 60년대 이후 완성된 프리재즈가 지금까지도 소수지만 뮤지션들에게 탄생되고 청자들과 소통되는 이유도, 적지만 그들을 지지하는 대중들이 분명 존재했다는 것이고 그 것이 프리재즈가 기본적으로 '대중음악'의 범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하나의 근거로 작용하지만, 반대로 존재의 이유도 반증한다.
아울러 여기서 우리는 과연 프리재즈라는 음악이 소수의 대중들에게만 통용된다고 해서 그 가치성이 떨어지는가에 대한 문제에도 봉착한다. 그것은 앞서 언급했든 대중음악의 경쟁력은 대중 친화적일때 발현된다고 한다면, 그 반대의 논리에서 비 대중적인 대중음악은 그 가치가 여타의 장르에 비해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파생적인 의문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만은 난 꽤나 단호한 어조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음악을 비롯한 다른 예술의 가치성은 사실 대중의 인기도와는 독립적으로 발현된다는 것이다. 예술의 진정한 가치는 수용자가 창조자의 결과물을 느낄때 생성되는 일종의 창의력 혹은 공감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확대된다고 한다면, 그러한 측면에서 사람의 고막에서 완성되지 아니하고 수용자의 머릿속에서 완성을 바라는 프리재즈의 특수성은 그 예술의 기본적인 가치에 매우 충실한 장르라 아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가치에 대한 논쟁만큼은, 적어도 프리재즈라는 장르는 꽤 자유롭지 아니한가 생각한다.
그렇다면 프리재즈란 장르는 현재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에 대한 발전성을 논해보자.
프리재즈는 사실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음악의 필수적인 요소인 '구성'을 두지 않는다. 흔히 말하는 조성, 박자, 형식을 배제한체 그야말로 자유스러운 즉흥을 추구한다. 그것은 1949년 레니 트리스타노(Lennie Tristano)의 창조 이후, 오넷 콜맨(Ornette Coleman)과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 에릭 돌피(Eric Dolphy)을 거치며 발전해온 프리재즈 음악이 가지는 커다란 특징 중에 하나다. 그러나 이 무형식의 개념은, 그 존재 자체로 하나의 형식을 가지는 아이러니를 가진다.
예를 들면 누드 비치(Nude Beach)다. 그곳은 아무런 제약도 없으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자연을 만끽하는 곳이다. 인간의 본연의 모습 그대로를 아무런 여과없이 보이는 장소이고, 인간의 자유스러움으로 일련의 사회적인 통념을 과감하게 배척하는 곳이다. 그러나 그 곳에 들어가기 위해선 하나의 약속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아무것도 입지 않아야 한다'는 또 하나의 암묵적인 '법칙'이다. 법칙을 배제하는 법칙이 존재하는 곳. 그곳이 바로 누드 비치이고, 프리재즈다.
따라서 재즈 연주자들은 프리재즈를 연주할때는 스스로를 과감히 던져버려야 하는 일종의 과단성이 필요하다. 쭈뼛거리며 자신의 국부를 가린다거나 새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주위만 서성거려서는, 그곳에 적응하지도 못할 뿐더러 그 존재자체의 가치에서 편승하지도 못하는 겁쟁이가 될 뿐이다. 따라서 대충 이 지점에서 대중들이 가지는 프리재즈에 대한 반감은 극대화되며, 밖에서 볼때 상식적인 키스 자렛(Keith Jarrett)의 피아노에 대한 대중의 열광도 반대로 극대화 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소리의 극한, 표현의 극한을 보여주며 통념에 반대하고 극단의 진보성을 말하는 프리재즈는 이제 소리의 창조에서 만큼은 막다른 벽에 도달하기 시작했다. 소리의 표현에 있어 그 극한의 표현은, 이제 음악의 감상의 범주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온 프리재즈의 진보성은 역으로 프리재즈가 앞으로 나갈길에 대한 심각한 딜레마에 봉착하게 했다. 멀리 갈것도 없이, 러시아 세르게이 쿠료힌 페스티발(Sergei Kuryokhin Memorial Festival)에서의 그들의 아방가르드적 표현형식을 보라.
따라서 프리재즈는 어느순간 뒤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걸어온 발자취를 되돌아 보는 것이다. 거기서 그들은 앞만보고 단거리 육상선수 처럼 달려왔다면, 이제는 그들이 지나온 이 머나먼 길에서 옆과 뒤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점이 프리재즈가 재즈의 지엽적 장르에서 이제는 당당하게 독립된 커다란 하나의 줄기로 발전하는 순간의 출발이며, 오늘 내가 하고 싶은 얘기도 바로 그것이다.
물론 당연하지만, 그 전까지의 연주자들이 일률적인 스타일로 누드비치에서 재즈와 프리를 연주하진 않았다. 세실 테일러(Cecil Taylor)와 돈 풀렌(Don Pullen)은 벗을 땐 완전히 다 벗어던지는 케이스였고, 키스 자렛은 작은 수영복을 입은 채 바다속에서 좀 처럼 나오지 않는 인 플레이(in-play)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혹자는 선라(Sun Ra) 처럼 옷을 다 벗어던지는 것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알몸인 채로 기괴한 퍼포먼스까지 서슴없이 감행하는 케이스도 있었으며, 야마시타 요스케(Yosuke Yamashita)처럼 위험천만한 수영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한 키스 티펫(Keith Tippet)처럼 적당한 선에서 우아하게 끊는 케이스가 있는가하면 미샤 멩겔베르그(Misha Mengelberg)나 알렉산더 폰 슐리펜바흐(Alexander von Schlippenbach)와 같이 꽤 호화롭게 즐기는 쪽도 있었다.
그리고 이젠 이러한 아티스트들의 과거, 그리고 현재의 다양한 행보와 결합하여, '프리'라는 대전제의 움직임 자체에 변화를 이야기하는 곳에 나의 관심은 집중된다. 이것은 연주자들에 시간흐름에 의한 세대교체로 이루어지거나, 음악적 연주방법만의 변화로서만 이루어지는 변화는 아니다. 그것은 프리재즈의 출발이 그러했듯, 일종의 '의식변화'이다.
그래서인지 최근에 프리재즈 연주자들은 '프리'에 자신의 음악을 한정시키는 것을 달가워 하지 않는다. 아까언급했던 '누드 비치의 무법칙의 법칙' 마저도 거부하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자면, 60년대의 '미국의 프리' 정서가 과연 현재에도 초국가적으로 발전을 얘기하는 재즈씬에서 그대로 통용되는가 하는 스스로의 물음이다. 결국 이러한 물음은 프리재즈 내에서의 발전을 말하게 되고, 그러한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빌리 뱅(Billy Bang)의 표현대로 프리재즈의 '내부구조'의 개념이 도출되기 시작하고 '구성즉흥'이라는 말도 회자되기 시작한다. 또한 이쯤되면 프리재즈에서의 자유형식이란 과거의 이념과 영원을 다루는 추상적 목표를 향해가는 질주가 아니라, 여타의 음악과의 조건없는 결합이나 목표없는 여정을 의미한다고 정의하는 것이 나는 옳다고도 본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제 프리, 그 자체가 음악의 테마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그 목표없는 테마는 다양한 결합과 형식을 낳게했고, 덕분에 '프리'를 위한 '프리재즈'는, 더 이상 '프리'에 얽매이지 않는다. 필요에 따라서는 약속을 하고, 구성을 만들며, 주제를 변화하고, 지역적 색감을 차용하기도 한다.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프리재즈는 그야말로 자유로움 속에 내 던져진 것이며, 이것이 사실 진정한 프리재즈의 참 모습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움직임이 지금 이 순간 펼쳐진 일은 아니며, 그 이전부터 꾸준히 회자되고 통용되었던 개념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움직임이 최근에 꽤나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은 나에게 꽤 고무적인 일이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최근의 기억속의 재천, 미연의 <Dreams from The Ancestor>가 각인되어 있음을 또한 기억한다.
결국 프리재즈에서의 발전과 진보는 너무나도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될 시장이 마련되었다. 이것이 내가 프리재즈가 장르의 파생이 아닌 장르의 주체로 보는 이유이며, 앞으로의 가능성을 더욱 기대하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정치는 통합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분열을 바랬고, 믿어왔던 정치인은 수시로 변질되며, 역사는 승자의 법칙으로 제멋대로 유린되어 왔다. 따라서 사람들이 기댈 수 있는 공유된 구심점은 결국 그 선택범위에 있어 한계가 있었고, 또한 그 선택의 범주에 있어 '대중문화'가 꽤나 많은 기여를 해왔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미국처럼 할아버지와 손자가 같이 검은색 '롤링스톤즈'의 티셔츠를 입고 함께 공연장을 찾는 그림 같은 풍경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가끔 세대 간을 초월하는 몇몇의 위대한 대중문화의 이름과 아티스트의 이름을 공유하며 서로를 이해한 것이다.
1975년 미국에서 식당을 운영하던 자신의 누나와 매형에게 신디사이저 한대를 요구하던 미군부대의 청년 기타리스트는, 그 악기를 바탕으로 아직까지도 한국대중음악계에 진보적 사운드의 표상으로 회자되는 '단발머리'를 창조했고 대한민국 국민들이 꼽은 대중음악 최고의 히트가요인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20세기 대한민국 음악계를 지배한 슈퍼스타의 위대한 탄생은 시작됐다. 윗세대에게는 '잊지 못할 기억'으로, 아랫세대에게는 '믿지 못할 신화'로 기억되는 그의 디스코그래피와 각종 기록은 그를 감히 '살아있는 전설'이라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지금 이 시대에서 그의 이름 석 자를 과연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가 이룩한 음악적 업적을 지금 대중들은 얼마나 공경에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는 분명 그의 음악세계와는 별개의 문제다.
아니,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말아 달라. 나는 지금 그가 과거의 영광에 비해 대중들의 기대에서 벗어남을 한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그는 2008년 작년 한해, 아니 정확히는 2008년 5월에서 12월에 이르는 <The History>의 7개월 동안의 순회공연으로만 33만 명을 끌어 모았다. 또한 현재 그의 18집 <Over the Rainbow>까지 발매된 그의 앨범 판매량은 2000여만 장에서 현재도 진행중이니, 사실 대한민국 음악계의 환경 하에서 그의 존재는 기적 같은 일이다.
그보다 더 앞선 지금은 폐간된 잡지인 'SUB'의 100대 명반 리스트의 경우에는 1집 단 한 장만이 실렸었다. 록 성향의 그들의 선정성향을 감안하더라도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중에 의한 리스트'를 표방하는 일련의 작업을 통해서, 우리는 과연 '대중음악'을 어떻게 인식하고 평가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파생된다.
물론 '다수의 지지'가 언제나 '옳은 지지'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칸트의 말대로 음악과 같은 문화에 있어서 다수의 일치에 의한 '경험적 보편성'은 결국 '이상적 보편성'을 지지한다는 말을 떠올리면, 대중음악 범주에 있어 '조용필'이란 위대한 아티스트의 음악은 대한민국의 전 세대를 아우르는 한국 대중음악 성향의 보편이다.
바꿔서 그가 발표한 18장의 음반의 음악성을 질을 논하고자 하더라도 그가 단 두장에 앨범만이 포함될 이유는 찾아보기 어렵다. 결국 굳이 이유를 찾자면 그는 너무나도 큰 슈퍼스타였다는 점이고, 엘리트성향의 진지한 감상자들이 보기에 트로트와 민요와 같은 그의 넓은 음악적 스펙트럼은 선정의 부담으로 다가왔을 것이라는 추측만 가능하다.
즉, '조용필은 위대한 대중가수이다. 그리고?' 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진 평론가 집단들은 과연 얼마나 존재했던가 하는 것이고, 또한 거기에 대해 관심을 가진 현재의 문화소비 세대는 또 얼마나 존재했는가 하는 것이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음악을 하는 수많은 젊은 뮤지션들의 음악적 영감과 대중들이 직접적으로 말할 수 있는 위대한 아티스트의 이름은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조용필의 두 배에 달하는 4장에 앨범을 올린 서태지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대한민국 국민인 '너'와 '내'가 함께 부를 수 있는 곡들 역시, '대장' 서태지 보다는 '가왕' 조용필의 앨범에 더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서태지는 물론이고 현존하는 '산울림'의 김창완, '들국화'의 전인권, '어떤날'의 조동익과 이병우, 한대수, 신중현 선생님이 가지는 또 다른 음악적 가치와 대중적 인기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분들과 조용필의 차등을 매기고자 함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우린 가끔 이렇게 전 세대가 함께 공유하고 있는 대중들의 음악적 가치를 너무 쉽게 잊어버리는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진지한 감상자들은 조용필에 음악에 대해 일종의 방관자적 입장을 취하기 시작하면서 그러한 점을 더욱 가중시켰다. 어째서 그들은 '대중음악'에 '대중의 보편성'을 배제하는 것인가.
대한민국 대중음악계에 단 한명의 슈퍼스타 조용필은 어느 날엔가 부터 TV에 출연하지 않는다. 한국에 있어 TV란 매체는 대중들에게 음악을 들려주는 거의 유일한 수단임을 감안하면, 그의 결정은 무모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현역이며 최고의 자리에서 지금도 군림중이다.
이것은 사실 '조용필'이란 아티스트 외에는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이것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분명 현재 문화 소비세대인 젊은 세대의 에너지 유입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들은 소비적인 메이저 음악과, 감성보다는 이성적 충족을 만족하는 인디씬과 특정 장르의 마니아층으로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을 인도하는 몇몇 평론가 집단은 예컨데 조금의 '뽕끼'도 허락하지 않는 냉혹한 집단임을 감안하면, 과연 그들에게 과거가 아닌 '현존하는 전설'에 대한 관심을 바라는 것을 그저 사치로 전락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들이 머물렀던 자리에는 수많은 음악이 남았고 그 수만큼이나 많은 이야기가 공존한다. 공존하는 이야기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세대를 관통하여 공유되었고, 이는 분명 우리시대가 가지는 가치이며 문화의 구심점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나누는 것이지, 외적인 음악적 기준을 들이대며 몇몇 집단에서 재단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음악의 퀄리티의 문제와는 다른 개념이다.
장인이 인정받지 못하는 시대. 시대가 외면받는 시대에서는 결코 '전설'은 완성되지 못하며 지속되지 못한다. 우리는 이미 형성되어 만들어진 문화적 구심점, 그것을 지켜나가야할 일종의 의무가 우리에게 존재함을 오늘은 한번쯤 생각해 보는것이 어떨까.

강허달림.
지난해 내게 감동의 울림을 선사한 여성 블루스 싱어송라이터다.
생소하지만 친근감이 느껴지는 이름이다.
본명은 아닐진데 무슨뜻의 이름일까?
“하늘에 떠있는 ‘달님’이 아니고, 앞으로 달리는 씩씩한 ‘달림’이란다^.^

그녀와의 첫 대면은 아주 우연히 홍대 앞 라이브 클럽 롤링홀에서 이뤄졌다.
아주 우연히라고 표현한 건 그녀의 존재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이다.
티벳구하기라는 모토 아래 이루어진 그 공연은 '한국의 인디뮤지션 사진집' 작업을
결심한 후 첫 대상이었다.
이유는 없다.
이틀동안 굉장히 많은 인디뮤지션들이 출연한다는 정보를 접했기 때문이다.

작년 한 해 그 클럽 공연을 시작으로 쌈지사운드 페스티발, 그렌드 민트 페스티발, 스컹크 헬 고별공연까지
상당히 많은 공연현장을 찾아다니며 100여팀의 인디뮤지션들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중요 인디뮤지션을 포함해 처음 접하는 뮤지션도 상당수다.
그 중 강허달림은 처음 접하는 뮤지션이었지만 가장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뮤지션이라 해도 무방하다.
아무 정보없이 롤링홀 무대에서 그녀의 노래를 듣게 되었다.
그때 그녀는 클래식 기타 세션맨과 함께 등장했다.

첫 인상은 굉장히 밝은 이미지였다.
인삿말을 하는 그녀는 시종 해맑은 웃음을 머금었다.

노래가 시작되었다.
일단 고막을 터뜨릴 듯한 밴드의 하드한 사운드에 귀가 얼얼하게 달궈진 상태였기에
담백한 어쿼스틱 사운드가 편안함을 안겨주었다.
그런데 클래식 기타 연주가 내 귀를 쫑끗하게 만들었다.
쉽게 들을 수 없는 고수의 튕김이었다.

허~
포크송을 부를 것으로 생각했는데 오랫만에 접하는 블루스다.
또한 강허달림 그녀의 보컬이 심상치 않았다.
멜로디라인도 귀에 쩍쩍 달라붙고 음색과 창법이 오랫동안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다.
이런 보이스 칼라와 묘한 떨림을 어디서 들었을까?!

노래는 분명 처음 듣는 곡인데 이상하리만큼 편한하다.
그래 이건 임희숙의 데뷔시절 음색에 빌리 할러데이의 바이브레이션을 절묘하게 섞어놓은 보컬이다!
'춤이라도 춰볼까', '기다림, 설레임' , '독백' , '미안해요'그녀의 노래가 이어졌다.
모두 그녀의 창작곡이다.

어 이거 굉장한데...
무대 뒷쪽에 있다가 자석에 이끌린 듯 관객들을 헤집고 앞으로 나갔다.
그녀의 멜로디는 마치 우연을 가장한 필연처럼 스물스물 순식간에 가슴으로 파고들어왔다.
그녀의 떨림에 살 떨리는 전율을 느끼면서 노래의 시작부터 마지막 노래까지 객석에서 숨죽이고 경청했다.

그녀의 노래는 때론 리드미컬하게 때론 끊어질듯 끊어질듯 애간장을 태우며 이어졌다.
이름이 뭐랬더라?
아~ 강허달림. 그녀가 한국 블루스 여왕으로 불리는 줄은 나중에야 인지했다.

그런데 노래를 한 참 듣다보니 밝고 해맑은 미소와는 달리 슬픔이 담겨있다.
이 여가수는 평범한 삶을 살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느낌이 왔다.
얼마만에 느껴보는 슬픔에 젖은 떨리는 보컬인가!
그 순간부터 그녀는 내게 주목해야될 가수로 각인되었다.

무엇보다 음악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여가수라는 느낌.
노래를 하며 행복해하는 그녀의 표정은 시시각각으로 변화했다.
그야말로 변화무쌍했다.
음색도 알토란 같으면서 허스키한 구석도 공존했다.

중학생 시절의 감성이 되살아난다.
그 시절 난 임희숙에 열광해 있던 아이였다.
어찌 저렇게 노래를 맛깔나게 잘 부른다냐!
그 시절 난 노래를 잘하는 여가수는 세상에서 제일로 이쁜 줄로 알았다.
임희숙이 그랬고 윤연선이 그랬고 박미성이 그랬다.
그 시절 내가 흠모했던 여가수 3인방이다.

쩝..그런데 나중에야 임희숙의 별명이 '여자 조영남'인 것을 알게 되었다^.^
뭐 어떠랴..저리도 노래를 잘하는데
사실 사진집 발간 전에 촬영한 인디뮤지션들의 사진을 블로그에 공개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또한 지금 진행하고 있는 9년간의 연구를 마무리하는 단행본 작업 때문에 사진 셀렉팅조차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작년에 그녀의 노래를 처음 접한 이후 그녀의 독집cd는 항상 내 곁에 함께 하는 친구가 되었다.
처음엔 틈틈이 내 감상실에서만 듣다가
결국 차량에 창작해두고 운전할때마다 정말 매일같이 들었다.
지루하기는 커녕 들을수록 새롭고 감칠맛이 나는 멜로디다.
그때부터 언제 강허달림과 인터뷰를 해야지 생각했다.
하지만 강허달림의 작년 앨범은 신보인지라
곧바로 내가 연재하는 '우리시대의 명곡 명반' 칼럼에 소개하는 건 시기상조라 생각했다.
해가 바뀐 2009년쯤 만나봐야 겠다고 마음 먹고 있었다.

그런데 몇 일 전 그녀가 내 블로그에 인사글을 남겼다.
너무 너무 반가웠고 몇 일 후 우린 1시간 정도 전화통화를 했다.
대화는 처음인데 작년 한 해 그녀의 음악을 귀에 달고 살아서 인가 낯설지 않고 오랜 친구 같았다.

이런 저런 음악이야기를 나눴고 3월 15일날 홍대 앞에 새로 개장한 클럽에서 작은 공연을 한다는 소식도 접했다.
이 이른 시간에 그녀의 공연사진 포스팅을 하는 이유는 그녀를 세상에 조금이라도 더 알리고 싶어서다.
이렇게 멋찐 음악은 더 많은 대중이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진집 발간때 공개하려 했던 사진들이지만...
전화 통화 후 반가운 마음에 부랴부랴 많은 사진 중 20장 정도를
셀렉팅해 공개하려고 마음 먹었다.
내가 느꼈던 그 감동을 많은 이들도 경험했으면 좋겠다.
사실 그녀가 구사하는 블루스 장르는 요즘 메이저 장르는 아니다.
80년대 중후반 신촌블루스에 의해 반짝 조명받은 적이 있는 80년대 스타일이라 해도 좋다.
하긴 블루스는 미국의 전통음악이라 할 수 있으니 80년대 스타일이라 규정하는 것도 무리일 수 있다.
그 보다 더 오랜 역사를 지닌 묵은 장르라 해야 될 것 같다.

왜 장르 이야기를 하냐면...
그녀의 음악은 10대나 20대 보다 30대 40대가 더 공감할 것 같아서다.
그래서 탁월한 창작곡으로 포진된 그녀의 첫 독집은 음악성에 비해
지난 해 그닥 화려한 조명을 받지 못한 것 같은 아쉬움이 크기 때문이다.
어쩌면 강허달림의 1집은 저주받은 걸작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감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신보는 평론가들로 부터 좋은 반응을 얻어냈다.
현재 한국대중음악상 후보로 여러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참 다행이다.
아니 나처럼 그녀의 음악에 감동한 이들이 제법 되는 것 같다.

예상한대로 그녀는 전남 순전에서도 한참 떨어진 깡촌 출신이라 한다.
가난한 소작농 집안에서 육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녀는 공부도 운동도 웅변도 잘했지만,
동네에서 알아주는 꼬마 스타가수였다고 한다.
그래 그러면 그녀의 노래가 더욱 이해된다.
가수의 꿈은 아주 우연하게 다가왔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선희의 '그래요, 잘못은 내게 있어요'를 듣고 난 후,그녀의 인생 목포는 가수로 정해졌다.
가수가 되려는 그녀의 꿈은 모두에게 헛바람으로 치부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꿈을 이루기 위해 기타 하나 배낭 하나 걸머지고 무작정 상경했고 자신의 꿈을 이뤘다.

가수의 꿈을 이뤘지만 그녀의 음악인생은 이제부터다.
그녀는 오랫동안 ‘노래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고 한다.
그녀의 노래를 한 번 들어보라.
노래는 트렌드 음악이나 장르가 우선시 될 수 없다.
진정성이 있어야 감동을 안겨줄 수 있다.
강허다림의 노래엔 진정성이 있고 무엇보다 삶의 떨림이 담겨있다.
그래서 그녀의 노래는 감동적이다.
내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맺히게 했던 그녀의 '미안해요'를 꼭 들어보길 바란다.
3월 15일 홍대 앞 카페 벨로주에서 있을 그녀의 공연이 기다려진다.
나는 그곳에 친구들과 가자고 할 것이고 그날 그곳에 있을 것이다.
공연정보를 첨부한다.
공연안내
Cafe VELOSO Sunday 6PM Concert
2009년 3월 공연일정.
매주 일요일 오후 6시
(Door Open 오후 4시 / 공연 오후 6시 - 오후 8시30분 / 오후 8시30분 이후 카페 정상 영업)
Guest 공연 20-30분 / Main 공연 1시간 & more
공연입장료 15,000원 + 1 free drink (기네스,에딩거,산미구엘 draft beer & 기타 음료)
3월1일(일)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 + 시와
3월8일(일) 이장혁 (band) + 핑크 엘리펀트 (acoustic set)
3월15일(일) 강허달림 (band) + 이영훈
3월22일(일) 우주히피 & 펑카프릭부슷다
3월29일(일) 젠틀레인 + Guest Vocal 장정미 (매달 마지막주는 재즈 공연)
홍대 입구역 보다는 상수역이나 합정역에 더 가깝습니다.
지하철 2호선 합정역 6번 출구(상수동 방면)로 나오셔서 5분 정도 걸어오시면 코아마트가 나옵니다. 코아마트를 끼고 왼쪽으로 들어오시면 홍대 주차장길이 나옵니다. 나머지는 아래 약도를 참조하시면 됩니다.
지하철 6호선 상수역 1번 출구로 나오셔서 3분 정도 걸어오시면 마찬가지로 코아마트가 나옵니다. 코아마트 쪽으로 들어오시면 홍대 주차장길이 나옵니다. 나머지는 아래 약도를 참조하시면 됩니다.
카페 벨로주 전화번호는 02-323-7798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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