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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클 음악연구/음악사 34 POSTS

  1. 제가 월간중앙에 연재하고 있는 한국이 낳은 불후의 대중가요 뮤지션 12인 4번째 칼럼이

    네이버 메인에 또 올라왔네요^.^

    지난번 이미자 편에 이어 두번째입니다.

    유료기사인지라 전문을 제 블로그에 올리는 걸 자제했었는데 이번에는 전문은 블로그에 올려드립니다.

    日 열도까지 울린 원조 한류 ‘歌王’ [조인스]

    기획연재 한국이 낳은 불후의 대중가요 뮤지션 12인 - ④조용필

    논쟁중인 댓글 (3)

    가수 조용필. 그에게는 ‘가왕’ ‘작은 거인’ ‘건국 이후 최고의 가수’ ‘국민가수’ ‘오빠부대의 원조’ ‘민족혼을 부르는 가수’ 등 수많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세기가 저물어가던 1999년 한국갤럽이 실시한 ‘20세기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 설문조사 결과 그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노래영웅으로 공식화됐다.

    관련사진


    1980년대 초 조용필의 공연 모습.

    영웅은 그 존재만으로도 대중에게 활력소가 될 수 있다.

    ‘영웅 만들기’에 목숨을 거는 일본인들과 달리 우리는 남을 인정하는 데 인색한 측면이 있다.

    오죽하면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다 있겠는가?
    그런 면에서 조용필은 지극히 예외적이다. 모든 사람이 약속한 듯 찬사를 보낸다.

    그에게 부여된 찬사와 더불어 오해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우선 1980년대 초 일본 무대에 진출한 조용필에 대한 오해 한 가지.
    일본에 가보면 일본의 중년세대들이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멋들어지게 애창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조용필은 한류 열풍을 타고 생성된 지금의 ‘욘사마’ 배용준 열풍에 필적할 만한 성공신화를 이룬 선구적 뮤지션이다.

    국제적 슈퍼스타의 반열에 오른 그의 위상에 걸맞게 그의 팬클럽은 일본·홍콩·대만 등 외국에도 상당수 존재한다.

    그는 대중음악을 통해 외국에 한국을 알린 민간 외교사절이다.
    그런 조용필에게 일부 대중은 “일본사람이 되려 했다”는 의혹을 보낸 적이 있다.

    일본에서 발매한 그의 수많은 앨범에 수록된 일본어 노래들 때문이다.

    원래 일본인은 모든 장르의 세계 각국 우수 인재들을 자국인으로 귀화시키는 데 선수다.

    국내 대중음악인 중 신중현도 귀화를 권유받았던 인물이다.

    하지만 조용필이 일본 무대에 진출했을 때 부른 레퍼토리들을 기억해보라.

    <한오백년> <간양록> 같은 한국민요에 바탕을 둔 가장 한국적 노래가 대부분이었다.

    그가 일본말로 많은 노래를 취입한 것은 사실이다.

    이는 국내 가수들에게는 난공불락의 요새 같았던 일본 대중음악계의 장벽을 허물고

    일본 대중 속으로 파고들기 위한 그의 적극적 전략이었다.

    이 시대 최고의 가창력을 보유한 가수라는 대목을 살펴보자.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조용필을 세상에 알린 대표곡이라면 <창 밖의 여자>는 1980년대를 그의 일인독주시대로 나아가게 한 필살의 노래였다.

    <단발머리>는 대중에게 추억을 선사한 노래였고, <친구>는 온 국민을 그의 친구로 만든 노래다.

    <꿈>과 <큐>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잃어버렸던 꿈을 되살려준 노래였다.

    그의 대부분의 노래는 이처럼 장르와 가사는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슬픈 정조의 한이 배어있다는 점이다. 가슴이 서늘해지는, 깊고 넓은 음역으로 토해내는 그의 노래는 그래서 한국적이다.

    그는 1977년 대마초 사건에 연루돼 활동 정지의 아픔을 겪었다.

    좌절할 수도 있었던 그때도 그는 음악에 매진했다.

    당시 그가 선택했던 창법은 우리 고유의 판소리 창법. 피를 토하는 연습을 통해

    그는 우리 가락의 깊고 한스러운 울림소리를 체득했고, 득음의 경지를 획득했다. 위기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반전시켰던 것.

    관련사진


    1988년 해외 공연을 마치고 귀국한 조용필에게 팬들이 사인을 요청하고 있다.

    민요에 바탕을 둔 노래로 일본 공략

    조용필은 ‘오빠부대의 원조’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전성시대였던 1980년대 소녀 팬들이 마치 노래 가사의 일부처럼 터뜨렸던 “꺅~” 하는 비명소리에 대한 선명한 기억 때문이다.

    <단발머리>도 그를 ‘영원한 오빠’로 만들어준 아줌마부대가 열광하는 노래다.

    하지만 ‘오빠부대의 원조’라는 평가는 오해다.
    극성 소녀 혹은 여성 팬들로부터 ‘오빠’라는 환호를 받은 가수로는 조용필에 앞서 1970년대에도 남진·나훈아가 존재했고,

    그보다 훨씬 앞선 일제강점기에 ‘서정가요의 제왕’으로 칭하는 남인수도 있었다.

    당시 그들의 공연이 있는 날에는 밀려드는 여성 팬들로 인해 극장은 인산인해를 이뤘고,

    귀를 따갑게 하는 괴성과 극장 유리창 파손은 기본 통과의례였다.

    특히 남인수의 경우 공연 후 그를 모셔가려는 인력거가 극장 주위에 장사진을 이뤘을 정도였다.

    1980년대의 조용필이 ‘오빠부대의 원조’가 되기에는 우리 대중음악의 역사가 그리 만만치 않다.

    팬클럽의 경우도 그렇다.

    1970년대에 이미 남진은 대규모 팬클럽을 보유했고, 단체로 대형 야외모임을 개최해 이슈가 되기도 했다.

    남진보다 앞선 ‘최초의 댄스가수’ 이금희도 특이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1966년 <키다리 미스터 김>을 크게 히트시킨 그는 180cm가 넘는, 당시로서는 ‘키다리’들로 구성된 팬클럽을 보유했을 정도다.

    오디션에 탈락하는 굴욕 맛보기도

    조용필은 ‘가왕(歌王)’이라고 불린다. ‘가수들의 왕’이라는 말이다.

    단순히 노래 잘하고 인기가 많다는 이유라면 그 같은 호칭은 부적절할 수도 있다.

    인기와 가창력은 기본이고, 그는 실험정신에 시대정신까지 잃지 않은 가수였다.

    조용필의 노래는 지난 40년 동안 한국인의 지치고 아픈 마음을 위로해준 가락이었다.

    특히 한국인의 정서를 담아내려는 그의 노력은 기성세대의 절대적 호응으로 이어졌다.

    ‘가왕’은 그의 노래에 위로받은 이들이 부여한 정당한 호칭일 것이다.

    그런데 ‘엘레지의 여왕’으로 불리는 이미자까지는 공감하겠는데, 이 좁은 나라의 가요계에 무슨 황제와 여왕이 그리 많은지 모르겠다.

    ‘발라드의 황제’ ‘트로트의 황제’ ‘알앤비의 제왕’ ‘록의 제왕’ ‘섹시 퀸’ ‘댄스 황제’ ‘댄싱 퀸’ 등….
    좋아하는 가수에게 극한의 찬미적 표현을 붙이고 싶은 대중의 애틋한 마음은 알겠지만 이 정도면 확실히 남발이다.

    그렇다면 최고의 찬사를 헌사받은 가왕 조용필의 40년 음악인생은 언제나 장밋빛의 연속이었을까?

    아니다.

    우리의 음악영웅도 대중적 인지도를 획득하기까지 힘겹고 고통스러운 기간이 한참 있었다.

    지금도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사별후 독신으로 외롭게 살고 있다.

    모든 것을 이뤄낸 것 같아 보이는 그의 인생도 실제로는 창작의 산고와 더불어 고독하고 외로운 시간의 연속일지 모른다.

    힘겨운 과정을 극복했기에 그의 존재가치가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데뷔 시절 에피소드 몇 가지를 소개한다.

    어린 시절 조용필은 친구들 사이에 ‘풀빵’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모나지 않은 둥글둥글한 성격 때문이었다.

    그는 열 살 때 뒤늦게 찾아온 홍역으로 인해 왼쪽 눈의 시력을 잃을 뻔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심야 라디오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외국 팝송을 즐겨 듣기 시작했고, 이후 기타 배우기에 빠져들었다.

    중2 때 서울 정릉으로 이사했다.
    국민배우 안성기는 경동중학교 2학년 때 같은 반 친구다.

    경동고를 졸업한 그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음악에 인생을 걸었다.

    구체적 행동은 가출이었다.

    집을 나온 조용필은 동네 친구 3명과 동대문 근처에 허름한 창고를 개조한 월세 방을 얻어 록 그룹을 결성했다.

    ‘애트킨스’다. 열심히 연습했지만 일자리를 얻기는 쉽지 않았다.

    노래할 무대를 찾기 위해 경기도 문산의 용주골로 들어갔다.

    흑인 병사와 양공주들이 던져주는 팁으로 생활했던 그 세월은 그의 음악인생에서 가장 가혹한 시절이었다.

    클럽 무대에서 실전감각을 익히던 그때. 수소문 끝에 업소로 찾아온 가족에게 이끌려 고향으로 돌아갔다.

    반 년 동안 원치 않는 대학입시 준비를 하며 잠시 음악을 접어야 했다.

    장르를 넘나드는 음악세계 “대중의 노래 부르고파”

    또 다시 가출했다. 이번에는 경기도 광주의 무명 하우스 밴드에 잠시 합류했다.

    연주활동만 했던 그가 노래를 부르게 된 것은 보컬을 맡은 멤버의 군 입대 때문이다.

    리드보컬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대타로 우연하게 무대에 섰다. 가수로서의 첫발이었다.

    이후 해체 직전의 밴드 ‘화이브 핑거스’를 거친 조용필은 멤버 충원 오디션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신 적도 있다.
    천하의 조용필이 말이다. 1970년의 일이다.

    록 밴드 ‘비스’의 베이스였던 손정택은 “지금은 대 스타이지만 당시 조용필은 기타 실력이 모자라고

    보컬이나 음악 스타일이 헤비메탈을 추구하는 우리와 맞지 않아 떨어뜨렸다”고 회고했다.

    그때까지의 조용필은 미완의 대기였다는 말이다.

    이후 록밴드 ‘김트리오’의 멤버가 된 조용필은 1971년 5월 선데이서울컵 전국 그룹사운드경연대회에서

    가수왕을 수상하며 전환기를 맞는다.

    독집까지 발표했지만 폭넓은 대중적 인지도를 획득하지는 못했다.

    1971년, 최초로 그의 육성 노래 4곡이 담긴 데뷔 음반 ‘뮤지칼 사랑의 일기/사랑의 자장가’에는

    그의 이름이 ‘조영필’로 표기돼 있다.

    그의 이미테이션 가수 이름과 같다.

    인쇄 과정에서의 실수였지만 웃음을 머금게 한다.

    1976년 재취입한 <돌아와요 부산항에> 발표 이후 스타로 떠올랐던 그는 대마초 파동에 연루돼

    음악인생에서 최대 위기를 맞이했다.

    조용필의 회고다.

    “당시 남산의 지하 취조실로 끌려가 주전자고문 등 갖은 고문을 당했다.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한 절망감에 이 땅을 뜨고 싶었다.”


    조용필은 장르를 규정하기 힘든 가수다. 록을 뿌리로 트로트·포크·발라드·댄스·퓨전·동요·민요 등

    모든 음악 장르를 섭렵한 만능 뮤지션이다. 어떤 이는 조용필 자체가 하나의 장르라고 말하기도 한다.
    실제로 그의 공연에 가보라. 시작부터 끝까지 히트곡 퍼레이드다.

    관객들이 원하는 그의 노래를 다 부르려면 밤을 새워도 모자랄 것이다.

    그야말로 그의 공연은 장르가 총망라된 대중음악의 성찬장이다.

    대중음악인이 대중친화적 장르와 노래를 구사하는 것이 하등 이상할 것은 없다.

    하지만 조용필의 대중친화 일변도 음악세계에 대해 아쉬움을 피력하는 이가 제법 있다.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은 확고하다.

    “음악은 아이디어·영감 등이 중요한 것이지, 자기 삶이 순탄치 않고 좀 그렇다 해서 음악에 연관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가수는 한 명의 ‘엔터테이너’이고 ‘노래 연기자’입니다. 가수로서 인정받으려면 젊은 층에서부터 노년 팬까지 좋아할 수 있도록 민요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는 내 장르로 들어가겠지만 내 삶을 곡으로 만드는 일은 없을 것 같아요. 나는 대중이 ‘저것은 바로 내 노래야’ 라고 느끼는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축구선수 이회택의 도움으로 만든 히트 앨범

    1976년 4월25일 발매된 <돌아와요 부산항에> 초반.
    조용필의 대표곡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말이 필요 없는 국민가요다. 하지만 우연하게 부른 이 트로트곡이 대중적 인지도와 좌절을 함께 안겨줄 운명의 노래가 될 줄은 조용필 자신도 몰랐다. 1960년대 말에 탄생한 이 노래는 취입 역사가 복잡하다. 최초로 이 노래를 부른 가수도 조용필이 아니다.

    조용필보다 2년 앞서 1970년 유니버샬레코드에서 <돌아와요 충무항에>라는 제목으로 통영 출신 김성술이 작사해 김해일이라는 예명으로 처음 발표했다. 충무항을 소재로 삼은 가사만 다르고 곡은 똑같다. 조용필이 첫 녹음을 한 1972년만 해도 이 노래를 취입한 가수는 김석일 등 몇 명의 가수가 더 있었다.

    1972년 조용필의 첫 독집 <조용필 스테레오 힛트 앨범>은 100만 원을 호가하는 진귀한 음반이다. 이 음반은 전체적으로 팝 스타일이 기조를 이룬다. 약관 22세의 청년 조용필의 앳된 목소리에 통기타 두 대로 연주한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수록 여부가 신기한 트로트 버전이다.

    그저 통속적인 사랑노래였다. 가사도 우리가 아는 버전과 달랐다. 1976년 재녹음 당시는 조총련계 재일동포들의 고국 방문이 사회적 화두로 뜨거웠던 해였다. 통속적인 사랑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이 같은 사회적 분위기를 타고 “그리운 내 님아” 부분을 “그리운 내 형제여”로 수정돼 시대상을 담은 노래로 환골탈태해 조용필에게 일생일대의 전환점을 안겨주었다.

    어쩌면 명곡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지금껏 사장되었을지도 모를 운명이었다. 조용필의 1976년 히트 앨범에 얽힌 사연이다. 믿기 힘들겠지만, 당시 그의 매니저는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을 역임한 국가대표 축구선수 출신 이회택이었다. 막 기획사를 출범한 록 밴드 ‘영사운드’ 출신의 제작자 안치행에게 그가 조용필의 음반 제작을 부탁했다.

    이에 안치행은 킹레코드에 제작을 의뢰했다. 하지만 뮤지션 출신으로 최초의 제작자가 된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박성배 사장(일명 킹박)은 “노래가 너무 일본 놈 스타일이어서 안 된다”며 박대했다. 예상치 못한 난관에도 안치행은 오기로 음반 제작을 강행했다.

    조용필의 노래만으로 앨범을 내기에는 곡이 모자랐다. 이에 록 그룹 ‘영사운드’의 기성곡을 채워 넣어 1976년 4월 빨간 바탕에 조용필의 장발 사진이 담긴 초반이 나왔다. 방송에 홍보조차 하지 못한 이 앨범은 새벽다방 등 소위 다운타운가를 통해 부산을 시작으로 급속도로 반응이 생겨났다. 4개월 후 깔끔하게 머리를 정리한 조용필의 사진으로 디자인을 교체해 재발매한 음반은 100만 장 판매라는 금자탑을 세웠다.

    이후 수많은 가수들에 의해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리메이크 열풍을 탔다. 1978년에는 동명의 영화가 제작되었고, 1979년에는 세계적인 폴모리아 악단에 의해 연주곡으로도 취입됐다. 호사다마라고 할까? 유명세를 탄 조용필은 1977년 장충체육관의 그룹사운드경연대회 공연을 끝으로 대마초 사건에 연루돼 활동 금지의 아픔을 겪었다. 1979년 해금 후 활동은 재개했지만 그는 한동안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의식적으로 부르지 않았다.

    저작권 침해 소송에 휘말렸던 이 노래는 2006년 3월 가사의 일부 표절을 인정하는 판결이 내려져 충격을 던졌다. 만약이라는 가정은 그다지 의미가 없는 설정이겠지만, 만약 이 노래를 조용필이 부르지 않았다면 일본은 물론 대만 가수 등려군까지 리메이크한 이 아시아의 명곡은 지금도 지하에 잠들어 있을 것이 분명하다.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전 <한국일보> 기자이자 프로 사진가. 7080 음악열풍을 주도한 공연기획자.

    희귀 음반을 비롯한 대중문화자료 수집가. KBS·SBS·CBS·교통방송 등에서 음악프로그램 진행. 현재 대학에 출강하는 한편, 각종 신문·잡지·사보에 대중문화 관련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제가 월간중앙에 연재하고 있는 한국이 낳은 불후의 대중가요 뮤지션 12인 4번째 칼럼이 네이버 메인에 또 올라왔네요^.^ 지난번 이미자 편에 이어 두번째입니다. 유료기사인지라 전문을 제 블...
    ☆☆☆☆☆ | 조용필
  2. 장기하와 모던 록 밴드 언니네이발관이 2009년 한국대중음악 정상에 우뚝 섰다.


    올 한국대중음악상의 mvp라 할 수 있는 올해의 음반을 수상하는 언니네 이발관 이석원. 시상은 지난해 mvp 이적이 했다. @최규성



    어제 12일 오후 7시 서울 대학로 학전 블루 소극장에서 개최된

    제6회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이들은 나란히 3관왕을 차지하며 기염을 토했다.

    올해 시상식은 지난 2월26일 서울 건국대학교 새천년관 대공연장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연기된 끝에

    이날 규모를 대폭 축소해 열렸다.


    3관왕 수상 후 울먹이는 장기하. 이날 시상식의 하이라이트 순간이다. @최규성

    지난 해 '싸구려 커피'로 인디씬의 대반란을 주도했던

    장기하는 올해의 노래, 최우수 록 노래, 네티즌이 뽑은 올해의 음악인(남자)을 ,

    이석원이 리드하는 언니네이발관은 올해의 음반, 최우수 모던록 노래, 최우수 모던록 음반을 수상했다.

    대중음악상의 mvp라 할 수 있는 '올해의 음반'은 언니네이발관이 선정되었다.



    언니네 이발관의 경우 뛰어난 앨범의 완성도로 이미 3관왕 이상의 다관왕 수상이 어느 정도 예견되었지만

    무엇보다 장기하의 3관왕 수상은 놀라웠다.




    싱글 그러니까 노래 부분에서는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가 지난해 가장 뛰어난 노래로 선정된 셈이다.
    장기하는 이날 올해의 노래를 수상한 후 “변변치 않은 노래에 상을 줘 감사하다”며 “정말 신에게 영광을 돌리고 싶다”는

    수상소감을 전했다.

    올해의 노래까지 수상하며 3관왕에 등극했을땐 본인도 예측하지 못했는지 덤덤했던 이전의 수상소감과는 달리

    감격의 눈물까지 보여 관객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그의 트레이드인 무표정이 무너지는 순간은 진정 인간미를 전해주는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그가 시상식에 '얼굴들'과 함께가 아닌

    홀로 나온 것은 작년에 발표한 음반이 솔로 싱글이기 때문이다.


    언니네이발관은 “앨범을 만들면서 힘든 시간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고 의견교환 과정에서 멤버들과 많이 싸웠는데

    이것으로 다 보상을 받는 것 같다. 감사히 받겠다”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

    또한 리더겸 싱어 이석원은 "한 사람을 위해 만든 개인적 노래가 그 사람만 빼고 음반을 구입한 2만여명을 비롯해

    다른 많은 사람들만 들은 것 같다."고 말해 말못한 사연에 대한 궁금증을 더했다.
    또 태양, 토이, W&웨일, 미연&박재천이 2관왕을 차지하는 알찬 결과를 얻어냈다.



    태양은 그룹 빅뱅이 아닌 솔로 앨범 ‘핫’(Hot)으로 최우수 알앤비&소울 노래와 음반 부문을 섭렵했다.

    중국 스케줄 관계로 무대에 서지 못한 태양은 영상을 통해 "참석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정말 안타깝다.

    내겐 큰 의미가 있는 수상"이라고 소감을 전했다.



    미연 박재천 부부의 2관왕 수상은 그들의 음악을 오래전 부터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온 사람으로써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박재천은 서태지가 등장했을 때 사주팔자란 아트록으로 대중음악을 시작해 좌절했던 뮤지션.

    중앙대 작곡과 출신의 그는 현재 한국 프르재즈계를 리드하는 타악기의 장인이다.

    음악파트너이자 평생의 동반자인 미연은 그의 중앙대 작곡과 후배다.




    공로상은 1970년대 말 등장해 한국 록에 새 지평을 연 그룹 산울림에게 돌아갔다.

    산울림의 맏형 김창완은 수상에 이어 특별 공연으로 시상식의 휘날레를 장식했다.

    그가 공로상을 수상하러 입장했을 때 관객들은 기립박수로 응접했다.





    또한 선정위원회 특별상은 국내 유일의 아트포크록 뮤지션 김두수에게 돌아갔다.

    김두수의 경우 지난해 발표한 '열흘나비'앨범이 일본에서 발매된 음반인지라

    앨범에 담긴 수준높은 음악에 비해 장르나 선정기준에 대해 논란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오랜기간 자신의 음악세계를 매진해온 진지한 음악적 태도에 대해 많은 평론가들이 손을 들어준 결과다.

    그의 4집 '자유혼'은 100대 명반에 선정된 바 있다.



    그는 "앨범제작에 도움을 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는 짧은 수상소감으로 장내를 술렁이게 했다.

    너무 짧은 소감이었기 때문.

    하지만 오히려 그만의 카리스마를 전달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다만 앞으로 신보를 발매해 수상을 다시 할 경우엔 수상소감을 준비하는 팬서비스도 생각해주시길^.^

    얼굴 공개를 선호하지 않은 그가 퇴장할 때 우연하게 잡힌 이 사진은 시상식에서 조차

    그림자 이미자로 표현 할 수 있는 가장 김두수 다운 사진이 아닐까 싶다^.^


    그에게 상을 줄 수 있는 시상식.

    그게 바로 한국대중음악상의 존재가치를 웅변하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다시한번 시상식 경쟁부문에서 그의 모습을 재회할 수 있길 소망한다.




    시상식은 윤도현, 이하나의 공동 진행으로 2시간 넘게 이어졌다.

    시상식 때 마다 느끼는 점 하나.

    소위 주류로 분류되는 가수들의 시상식 불참은 여전히 아쉽고 짜증나는 대목이다.

    인지도나 음악성 모두 정상급의 뮤지션이라 할 수 있는 윤도현, 이적, 에픽하이의 시상식 참석은 상대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는 인격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명실상부한 권위와 명예가 동반되는

    진정한 한국대중음악상의 존재가 아쉬워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다소 진행이 어색한 면도 있었지만 그만큼 순수함을 느낄 수 있었던 윤도현 이하나의 사회 @최규성


    시상식 중간 중간 축하공연도 이어졌다.

    첫 무대는 w&웨일.



    w&웨일은 댄스&일렉트로릭 부문 2관왕 수상자다.



    다음 무대는 최우수 록음반 부문 수상사 갤럭시 익스프레스.



    록 장르부문의 수상자 답게 갤럭시 익스프레스는 객석으로 뛰어들어 연주해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파워풀한 사운드에다 쇼맨쉽까지 겸비한 이 밴드는 지난 해 록 애호가들로부터 굉장한 주목을 받았던 밴드다.

    축소진행된 시상식의 다소 어두운 분위기를 이들은 다소 오버스런 무대 한방으로 단숨에 해소시켰다.

    아주 흥미로운 축하공연이었다.


    세번째 축하무대는 언니네 이발관.

    수줍음이 여전한 이석원의 무대.

    그의 무대를 지켜보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마지막 무대는 산울림 김창완.

    아니 이제는 김창완 밴드다.

    과거와 현재의 음악을 골고루 들려주었고 앵콜까지 받았다.



    이번 시상식에서 아쉬운 대목 한 가지.

    다시 들을 수 없는 감성과 뛰어난 송라이팅 능력을 증명했던 강허달림의 1집이

    여러부문의 후보노미네이션에는 올랐지만 결국 수상하지 못한 점이다.

    과연 세월이 흘러 2009년 음반 중 여전히 듣고 싶은 음반을 고르라면 나는 주저없이 그녀의 음반을 선택할 것 같다.

    하지만 어느 부문이건 여러가지 시선과 선택을 통합해 최고로 선태받아 정점에 선다는 것은 인력으로 되는 일은 아닌 것 같다.

    용기를 잃지 않고 더 좋은 더 완성도 높은 앨범을 내주길 바란다.

    상이란 받으면 좋은 것이지만 어짜피 아티스트는 상을 목적으로 음악을 하는 존재는 아니니까!




    이건 여담이긴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각 부문별 수상자들을 보며 장르자체가 심사대상에서 제외된 포크나 트로트 장르에 대한 이야기다.

    미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대중음악의 중심이자 원류라 할 수 있는 포크 장르와

    장르적 미덕이 상실된 천박한 음악이 판치는 것이 사실이지만

    한국인의 정서적 뿌리라 할 수 있는 트로트 장르가 심사대상에서 계속 제외되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만약 포크와 트로트 신보중 수상작으로 선정할만한 앨범이 없다면 수상작을 선정하지 않으면 된다.

    그 자체로 그 장르에 몸담고 있는 뮤지션들에겐 자극이 될터이니까.

    하지만 장르자체를 대상에서 제외시킨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이는 장르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된 것은 혹 아닐지 모르겠다.


    끝으로 지난 한 해 좋은 앨범으로 우리들의 마음을 위로해준 모든 뮤지션들에게 감사드리고

    힘들고 어려운 와중에도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을 위해 애써주신 모든 분들께 수고했다는 인사 건내고 싶다.


    각 부문별 수상자는 다음과 같다.

    ▲올해의 음반=‘가장 보통의 존재’(언니네이발관)

    ▲올해의 노래=‘싸구려커피’(장기하와 얼굴들)

    ▲올해의 음악인=토이

    ▲올해의 신인=로로스

    ▲선정위원회 특별상=김두수

    ▲공로상= 산울림


    ▲최우수 영화TV음악 음반=‘차마고도’

    ▲최우수 모던록 노래=‘아름다운 것’(언니네이발관)

    ▲최우수 모던록 음반=‘가장 보통의 존재’(언니네이발관)

    ▲최우수 재즈&크로스오버 연주상=미연&박재천

    ▲최우수 재즈&크로스오버 재즈음반=‘보야지’(나윤선)

    ▲최우수 재즈&크로스오버 크로스오버음반=‘드림즈 프롬 더 엔세스터’(미연&박재천)

    ▲최우수 팝 노래=‘뜨거운 안녕’(토이)

    ▲최우수 팝 음반=‘모놀로그’(김동률)

    ▲최우수 록 노래=‘싸구려 커피’(장기하와 얼굴들)

    ▲최우수 록 음반=‘노이즈 온 파이어’(갤럭시익스프레스)

    ▲최우수 알앤비&소울 노래=‘나만 바라봐’(태양)

    ▲최우수 알앤비&소울 음반=‘핫’(태양)

    ▲최우수 댄스&일렉트로닉 노래=‘R.P.G. 샤인’(W&웨일)

    ▲최우수 댄스&일렉트로닉 음반=‘하드보일드’(W&웨일)

    ▲최우수 랩&힙합 노래=‘된장국’(다이나믹듀오)

    ▲최우수 랩&힙합 음반=‘누명’(버벌진트)

    ▲네티즌이 뽑은 올해의 음악인=장기하(남자), 윤하(여자), 원더걸스(그룹)

    장기하와 모던 록 밴드 언니네이발관이 2009년 한국대중음악 정상에 우뚝 섰다. 올 한국대중음악상의 mvp라 할 수 있는 올해의 음반을 수상하는 언니네 이발관 이석원. 시상은 지난해 mvp 이적이...
    ☆☆☆☆☆ | 한국대중음악상
  3. 목요일 마지막 생방송을 마치고 나오다 녹음부스에서 방송녹음을 하고 있는

    cbs 올댓재즈의 진행자 이정식을 보았다.



    열심히 녹음하는 모습이 근사해 창 밖에서 사진을 담았는데 담당인 정피디가 날 발견하고 부스 밖으로 나왔다.

    "오늘 마지막 방송이셨나 봐요?!"

    그리고...

    "이정식선생님도 지난 13년 동안 진행해 온 all that jazz를 그만두시게 되었어요.

    저도 시사프로로 옮기게 되었구요"


    이정식님의 마지막 방송 녹음 장면 @최규성



    국내 유일의 라디오 재즈프로그램인 '이정식의 올 댓 재즈(연출 정우식, 매일 0:00~2:00)'는

    CBS FM(93.9MHz) 개국과 함께 생명을 유지해온 장수 심야 재즈전문프로그램이다.

    그러고보니 EBS FM의 성기완의 방송도 이번 개편에서 사라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나라 전체의 경제가 장기적으로 불황이다보니

    요즘 방송 신문 할 것 없이 무척 힘든 분위기다.

    TV쪽은 돈 들어가는 진행자들을 내보내고 경비절감차원에서

    방송에 소속된 아나운서들을 진행자로 대폭 기용하다보니 재미와 수준이 현저하게 떨어졌는데...

    라디오방송에 까지 그 여파는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전문가 진행자의 빈자리는 어김없이 방송국 소속 아나운서들이 채우고 있는 현실이다.

    요일별로 전문가를 초대해 진행하는 고정코너도 대부분 폐지하는 분위기다.

    "음악으로 승부하겠다"고 하지만 그저 신청곡의 나열일 뿐이고

    실은 제작경비를 줄이기 위해 선택한 고육지책일 뿐이다.


    방송 스튜디오에서 고별방송하는 이정식님 @최규성


    여하튼 13년씩 한 방송을 진행해 왔다면 CBS의 심야 간판프로그램의 DJ인데 어찌 이리 간단하게 하차시킬 수 있을까!

    물론 방송국 측에서 간판DJ의 하차를 결정하기 까지는 고심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정식으로 이정식의 마지막 방송 사진을 담아 기록하는 것이 좋겠다 싶어 부스로 들어갔다.



    부스 안의 그는 언제나 처럼 동심의 미소를 지어보였지만

    어딘가 아쉬움으로 꽉 찬 슬픔이 있었다.

    13년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그 긴 시간에 젊음을 바쳤으니 프로그램에 대한 애정이 대단했을터인데

    얼마나 서운할까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려왔다.


    그래도 그는 웃음을 지어주셨다. @최규성


    이정식은 나랑 동갑이다.(그런데 그가 훨씬 어려보인다^.^)

    나비축제로 유명한 함평이 그의 고향이다.

    14살 중학생때부터 섹스폰을 연주하기 시작해 고등학교도 졸업하기 전 도망치듯

    서울에 와 봉천동 살롱에서 음악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재즈와 국악의 접목은 물론 대중가요를 재즈로 해석하는 음악적 실험은 물론

    어려운 음악으로 여기는 재즈에 대한 오해를 풀기위해 쉽게 대중적 해석도 잊지 않은 뮤지션이다.

    현재 수원여자대학 실용음악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 읽히는 이정식님의 웃음 @최규성



    그가 음악을 시작하게된 계기는 이렇다.
    "우리 집은 동네에서 축음기가 제일 먼저 들어왔다.
    아버지가 직업 군인이셨는데, 줄곧 미군부대에서 음반을 가져다 들으셨다.
    그러면 나는 피리나 하모니카로 음악을 따라 연주하곤 했는데 중학교(함평중학교)에 입학하니 밴드부가 있더라.
    사실 있을만한 곳은 아닌데(웃음).
    한국전쟁 때 미군 군악대가 쓰던 악기를 학교에 기증해 생긴 밴드부였고 그 때 처음 색소폰을 불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졸업반 때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고 숙식해결해 준다는 신문광고를 보고 전화해 봉천동 살롱에서 첫 연주를 시작했다. "

    이정식님과 정피디. 서로에게 수고했음 확인하는 진한 악수 @최규성

    그는 '올 댓 재즈'를 13년째 진행하면서 재즈 아티스트인 곽윤찬, 나윤선 등을 국내 무대에 처음 소개했다.
    또 유럽의 재즈와 분위기를 국내에 전하기도 했다.
    그는 떠나가지만 국내 유일의 라디오 재즈 전문방송은 그대로 존속된다.
    그의 방송을 아끼는 애청자들이 올댓재즈 게시판에 남긴 아쉬움들은
    그가 재즈의 대중화에 힘써온 결과일 것이다.
    애청자들의 마음을 옮겨왔다.
    이정식님의 이 환한 웃음을 기억했음 좋겠다. @최규성

    -이 무슨 날벼락 같은 얘기입니까.
    13년간 해오신 방송을 마무리 하신다니요...
    돌아보니 라디오를 듣기 시작한 지난 15년 중에 CBS를 알게되고,
    all that Jazz를 알게 된지도 오랜 시간이 지난것 같습니다.
    개편때마다 방송시간은 약간씩 달라져도 틀면 늘 그 자리에 계셨었는데...
    고등학생을 거쳐 대학생, 사회인으로 오기까지
    한결같이 그 자리에서 Jazz라는 낯선 장르를 가르쳐주었던 소중한 방송
    그리고 그 방송을 이끌어 주신 이정식님 그동안 심야에 고생하셨습니다.
    남은 날까지 마무리 잘 지으시고요, 정말 좋은 방송 감사합니다.



    -잠이 오지 않아 뜬 눈으로 보내다가
    2시가 넘었기에 오랜만에 올댓재즈를 틀었어요.
    반가운 시그널 음악과
    왠지 학교 선배님같은 정식님 목소리가
    조용한 방에 울리는데 어찌나 반갑던지요.
    무얼 해도 풀리지 않던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어요.
    멀리 여행을 다녀왔을때
    변하지 않은 동네 모습에 마음이 놓인 기분 같았달까요.

    예전 공부하면서 힘든 시간을 함께 지켜준
    올댓재즈와 정식님이기에 더욱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 후로 매일매일 녹음해서 챙겨듣고 있는데
    어제 녹음한 방송 듣다가 깜짝 놀랐어요.
    너무 속상하네요.
    조금 더 자리를 지켜달라고 아이처럼 떼를 쓰고 싶은 심정이에요.



    -이정식님이 그만두시는 걸 오늘 알았네요.
    올댓재즈의 팬으로서 정말 슬퍼효. 에엥..
    매일 새벽을 따뜻하게 지켜주시던 이정식님의 목소리를
    너무 너무 그리워하게 되겠네요.
    언젠가 다시 돌아오셔서 우리를 아주 아주 기쁘게 해주실 것 같아요.
    정말 그렇게 되리라 믿쑵니다!
    아아.. 허전한 소식들으니 마음이 쓸쓸해요. ㅠ,ㅠ
    건강하시구요-
    언제나처럼 좋은 음악 많이 만들어주세요-
    두 번이나 제 신청곡 받아주셔서 참 기뻤어요^^
    고맙습니다.
    새벽의 그 목소리, 따뜻한 맘으로 기억하고 있을게요.




    -정식 님,
    정식 님이 항상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있신 것이
    저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르시죠.
    책상에 불을 밝히고 외로움과 싸우던 시간도
    남자친구를 처음 만나 설레고 밤새 통화하던 때도,
    그리고 속상했던 며칠 전도
    정식님 목소리와 음악들이 함께 했었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사연 더 자주 보낼 걸 그랬네요.
    항상 계실 것 같아서 여유를 부렸나봐요.

    정식님, 고맙습니다.
    조용한 새벽을 채워주시던 목소리 담아둘께요.
    늘 건강 유의하세요.
    항상 기도할께요.



    -제가 재즈를 더 가까이 접할 수 있도록
    그동안 많이 도와주셔서 너무 너무 감사드려요.
    헤어짐은 아쉽지만 정식님에게 좋은 것이라면 기꺼이 보내드려야겠지요.
    앞으로는 무대에서 자주 뵐 수 있도록 노력해야 겠네요.^^


    -우연히 채널을 맞추어 밤의연인처럼 자주 듣곧 했는데 아쉬워요.

    이별은 또다른 시작이겠죠.

    항상 좋은 일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재즈에 문외한인 저에게 공연도 보여주셔서 행복한 나날도 만들어주셔서 고마웠어요.




    -간밤엔 놀랬구, 잘못들은거 아닌가 했는데...
    여기와 보니 그건 아니네요;;
    올댓째즈는 존재하는데 이정식님은 그만두신다니,
    흔히 표현하는 앙꼬없는 찐빵같아요.
    무슨 사정때문에 그만 두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많이 섭섭합니다.
    또 여태까지 많은 음악 들려주신것도 고맙습니다.



    -96년이었죠, 아마.
    CBS 개국소식을 듣고 라디오 주파수를 맞췄을 때
    [0시의 재즈]를 통해 밤공기를 가르고 흘러나왔던 재즈의 선율,
    그 감미로움과 벅찬 기쁨과 놀라움을 기억합니다.
    프로그램을 진행하시던 정식아저씨의 정겨운 목소리를 들었을 때의
    반가움이 아직도 생생하구요.

    호반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던 야외공개방송 생각도 나네요.
    그 공개방송마다 달려가서 공연을 봤었는데 말이죠.
    김정훈 피디님 생각도 나고,
    윤찬오빠와 희연아저씨와 함께 했던 당시 이정식퀄텟의 연주도 생각나고,
    좋아하던 정원영한상원 밴드, 웨이브, 인터플레이 등의 공연을 봤던 기억들까지..
    새록새록 솟아납니다.

    (생각난 김에 그 오래전 [0시의 재즈]의 공개방송 사진을 찾아봤어요.
    아.. 그 사진들은 다 어디에 간걸까요.
    한참을 뒤져도 나오지 않아서 결국 추억의 사진을 첨부하진 못하겠네요..)

    그렇게 시작된 [0시의 재즈]와의 인연이 ATJ로 이어진지도 어언...
    올해로 13년째가 되는군요.
    그때와 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일일이 언급하기 어려울만큼 많은 추억이 [0시의 재즈]에 묻어있고
    언제 들려도 반가운 친정과 같아서 생각나면 들려보곤 했던 이곳에는,
    늘 구수하고 정겨운 목소리의 정식아저씨가 계셨어요.

    그런데 이제 그 목소리를 만날 수 없다는 얘기를 들으니까
    제가 참... 뭐라고 할 말이 없습니다.
    아직까지도 믿을 수가 없고, 섭섭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어서
    정말 확실한 거냐고 정피디님께 물어보기까지 했네요.

    확정된 거니까 방송에서 말씀하셨던 거겠죠...
    우리가 아쉬워한다고 해서 돌이켜질 상황은 아닌 건가요..
    그래서 결국. 아저씨에게 어려운 인사를 전하게 되었네요.



    -정식아저씨의 그동안의 수고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따뜻한 햇빛이 스며들고 있는 창가의 꽃 한다발을 드립니다.
    13년 동안 한자리를 지키시며 디제이를 하신 분에게
    13년 동안 애청자를 자칭했던 제가 지금 드릴 수 있는게 이것 뿐이어서 죄송하지만ㅠ.ㅠ

    언제 어디서나, 멋진 재즈뮤지션으로, 섹소포니스트로
    우리의 곁에 있어주세요. 그럴 걸 기대하며.
    조만간 라이브 하시는 곳에 찾아뵐께요.



    -매일새벽 2시에 93.9로 주파수를 맞추면 정식님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던 일상도 어느덧 세달...
    정식님 덕분에 뭔가 어려울거라는 편견을 가졌던 재즈가 너무 좋아졌답니다~
    물론 정식님이 가셔도 올댓재즈를 듣겠지만 이렇게 떠나신다니 섭합니다..ㅠ
    정식님 목소리가 그리울거에요^^ 건강하시고 건승하시길~



    -언제나처럼 올댓재즈를 듣고 있는데...
    정식님이 갑자기 그만 두신다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랬습니다
    정말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어요....
    라디오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들 그렇겠지만...
    매일같이 듣는 라디오 디제이는 정말 친구 이상이랍니다....
    올댓재즈 곧 이정식님이었는데...
    너무 아쉽네요...
    올댓재즈 덕분에 재즈를 알아가고 있고...아직 더 알아가야 하는데...

    물론 프로그램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시지만...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 없군요....
    잠시 달콤한 휴식기를 가지시고 꼭 돌아와주세요~
    꼭 다시 라디오...재즈프로그램으로 만나길 바랍니다



    -언제나처럼 올댓재즈 시그널과 함께 정식님 목소리를 그리워할 겁니다..
    순간 순간이 아쉽네요...



    -항상 새벽 1시~3시 사이에 운동을 하면서 외로이 살과의 전쟁을 치루는 저에게

    외로움을 달래주시던 이정식님의 목소리가 너무 그리울 꺼에요...
    항상 좋은 음악 많이 들려주세요. 화이팅!



    -정녕 이별인가요 재즈 불모지에1시간이 2시간의로 늘리고 재즈를 사랑하는 모든이에게 ..

    특히 불면증이나 저같이 밤을낯처럼 일하는사람들은덧없이 행복 했읍니다.

    특히 재즈초자인 저같은 사람들에게 올바른 재즈 상식을 알게해 주어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지난13년간 참수고 많으셨읍니다.


    -일찍 잠들어 너무 일찍일어났을때 제일먼저 라디오를 켜면 무슨 노래인지는 잘 알 수 없어도

    정식님의 재즈에 대한 풍부한 식견과 재즈선율이 곁들어진 음악에 매료되곤 했었는데
    갑자기 1부 마지막 멘트에서 3월부터 진행자가 바뀌신다는 방송이 나오네요..



    -13년이나 해오셨다구요?
    그 긴 시간을 새벽이 오기전 잠못이루는 많은 사람들의 안식이 되어주셨다니, 절로 숙연해지네요.

    거꾸로 생각해보면 13년을 이 방송을 위하여 밤을 희생하신 분이네요.

    3년도 아니고 13년이나..


    -가신다니 제힘으로 붙잡을 수는 없지만
    그동안 팬의 한 사람으로 즐겨듣던 프로인데
    낮고 잔잔한 그 목소리를 이 시간에 들을 수 없다니 정말 섭섭하네요.


    -오늘 녹음한 방송을 듣다가 갑자기 그만둔다고 하셔서 약간 놀랬습니다.

    이정식님을 빼놓고 올댓재즈를 얘기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말이죠.

    올댓재즈에서 정식님의 구수하고 편안한 목소리를 더이상 듣지 못한다는 것이 못내 아쉽네요.

    국내 최고 재즈뮤지션으로서 초대손님으로 나오신 음악관련자 분들과 동네형처럼 격의없는 말씀을 나누실 때는

    재즈가 범접하기 어려운 음악이 아닌, 누구나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음악이라고 생각되어졌어요



    -야근이 외롭지 않았던 건 이정식의 올 댓 재즈 덕분이었는데...

    지금 라디오 듣다가 정식님이 3월 2일 자로 그만 둔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회원가입해서 글 남겨요.
    오랫동안 해오시던 프로를 그만두는 정식님도 그렇겠지만 애청자인 저희들도 너무 섭섭하고 아쉽습니다 ~~ (* *)
    그동안 좋은 음악 많이 들려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했어요. 그 포근한 목소리 늘 기억하겠습니다.



    -꼭 가셔야 하나요?
    그냥 서운한게 아니고 머랄까..싫으네요..
    항상 음악이 제곁에 있듯이 올댓재즈도 제 일부였는데..
    흑흑...
    "가시는길 고이보내드리오리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정말 절하고 싶을정도로 저에겐 소중한 프로였거든요..
    아마 저만큼 올댓재즈를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고 아끼는 청취자도
    없을꺼예요 ㅠ..ㅠ
    목소리와 프로그램에선 디제이론 못뵈겠지만 음악으로 색스포니스트 재즈인으로 만나요 정식님..

    목요일 마지막 생방송을 마치고 나오다 녹음부스에서 방송녹음을 하고 있는 cbs 올댓재즈의 진행자 이정식을 보았다. 열심히 녹음하는 모습이 근사해 창 밖에서 사진을 담았는데 담당인 정피...
    ★★★★☆ | ALL THAT JAZZ, 이정식
  4. 누군가를 기억하고 기억된다는 것은 아름답고 행복한 일이다.

    최근 대중문화계에 생겨난 아름다운 트렌드가 있다.

    떠나간 이들을 기억하는 문화다.

    그 대표적인 형태는 고인에 대한 책과 추모음반, 추모공연, 회고전 형식의 영상물 상영, 그리고 노래비다.


    떠나간 이를 아쉬워하고 기억하기 위해 이같은 작업이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새롭고 바람직한 대중문화의 흐름으로 평가할 만하다.

    사실 우리 대중은 쉽게 뜨거워지는 만큼 쉽게 잊어버리는 기억상실증이 극심한 것이 사실이 아니었던가.

    2009년 서울 정동길에 세워진 이영훈의 '광화문연가' 노래비 @최규성

    지난 주 이 같은 대중문화의 새로운 흐름에 가속도를 붙이는 뜻 깊은 행사가 서울 광화문에서 열렸다.

    이문세와 함께 80년대 팝 발라드 장르를 만개시켰던 작곡가 고 이영훈의 노래비 제막식이다.

    지난 해 세상을 떠난 그가 1년 만에 노래비와 아트 북으로 부활했다.

    그날 이영훈의 노래비는 '서울 사대문안에 세워진 최초의 노래비'라는 평가가 있었다.

    이에 일부 언론에서도 "대중음악 작곡가로선 처음으로 서울 시내에 노래비가 세워졌다."고

    기사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대중문화에 대한 아무 근거없는 최초 논쟁은 언제까지 게속될 것인가?


    자신들의 행사에 무게감과 소중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적어도 공적인 발표에는 정확한 팩트 정도는 확인을 하고 발표를 해야 진정한 가치가 부여될 것이다.

    이영훈의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그 노래비의 가치에 대해 폄하하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다.

    노래비 건립을 위해 애쓰신 분들의 노고가 어떠했을지에 대해서도 고마움을 느끼고

    그 수고는 백분 이해되고도 남는다.

    솔직히 1년 만에 건립된 예술적 가치까지 지닌 그 분의 노래비 자체는 감동이었고

    깔끔하게 기획되고 진행된 제막식 행사 또한 훌륭했다.


    그렇담 서울에는 과연 몇 개의 대중가요 노래비가 있을까?

    솔직히 정확한 현황은 나도 잘 모른다.

    현재까지 내가 확인한 대중가요 노래비는 5개다.

    다만 장르에 상관없이 국내 최초로 생겨난 노래비 또한 서울에 있다.

    윤석중의 ‘반달’이다.

    이 노래비는 서울 종로구 혜화동 창경궁 내에 있다.

    '반달' 시비는 서울시 광진구 구의동 어린이대공원 내에도 하나 더 있다.

    대중가요로 최초로 서울 '사대문 안'에 세워진 노래비는

    이영훈의 노래비가 아니라

    1994년 자랑스러운 서울시민 600인'에 선정된 작곡가 길옥윤(노래 패티김)의 ‘서울의 찬가’다.

    이 노래비는 1995년 10월 26일 서울 광화문 세종로공원에 세워졌다.

    서울의 찬가는 1966년 국내활동을 시작한 길옥윤이

    세계 유명도시는 그 도시를 찬미하는 노래가 다 있는데 왜 서울은 없는지에 대해

    평소 안타까운 마음이 간절해 작곡했던 노래이고

    국내활동을 개시 후 발표한 첫 노래이기도 하다.

    이처럼 이미 15년 전에 인접한 광화문에 건립된 대중가요 노래비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도

    확인하지 않은 채 '최초'를 언급하고 언론에서 이를 여과없이 수용된다는 것은

    불행하게도 데이타 부재로 야기되는 안타까운 우리 대중문화계의 현실이기도 하다.


    서울을 주제로 노래한 대중가요는 별로 없을 것 같지만 참 많다.

    대충 조사한 노래만 해도 이렇다.

    <서울주제 대중가요들>

    서울의 찬가 패티김

    서울-장은아 장재남, 이용

    서울서울서울-조용필,

    럭키서울-박경원

    서울이여 안녕-이미자

    마포종점-은방울 자매

    59년 왕십리-김흥국,

    비 내리는 명동거리(1970년 동명영화제작) ,

    돌아가는 삼각지

    안개 낀 장충단 공원-배호,

    덕수궁 돌담길-김상진등

    광화문 연가-이문세

    서울 길 아가씨-하춘화

    단장의 미아리고개-이혜연

    명동의 블루스-고운봉

    영등포의 밤-오기택

    이별의 영등포-김난아

    서울의 아가씨- 이시스터즈

    제3한강교- 혜은이

    안국동 아씨, 서울의 거리, 한강- 조미미

    서울이여 언제까지나-길옥윤

    서울의 태양-김세레나

    노량진의 밤-박일남

    서울의 제2고향-남일해

    서울의 밤-현성아, 한혜진

    영등포-이장혁

    이제 서울에 존재하는 노래비에 대해 자세하게 소개해보겠다.


    2008년 서울 대학로에 세워진 고 김광석의 노래비 @최규성


    작곡가 길옥윤의 '서울의 찬가' 이후 두 번째로 서울에 건립된 노래는

    마포의 근린공원에 세워진 은방울자매의 '마포종점' 노래비다.

    이 노래비는 1997년 12월 건립되었으니 벌써 햇수로 13번이 되었다.

    삼각지 거리에는 2001년 11월 고 배호의 노래비가 세번째로 세워졌고

    대학로에는 2008년 1월 고 김광석의 노래비가 네번째로 세워져 있다.

    그리고 지난 주에 제막식을 가진 고 이영훈의 노래비 순서다.

    5번째란 이야기다.

    그리고 작곡가를 기념하는 노래비도 서울에 있는 길옥윤의 '서울의 찬가'외에도

    대구에 황문평의 '빨간마후라' 노래비가 이미 건립되어 있다.

    이외에도 적절한 언론홍보없이 즉 소리소문 없이 전국 각지에 세워진 가수 작곡가 작사가들의

    노래비가 얼마나 더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2000년 이후 전국각지에는 수도 없이 노래비가 건립되고 있기 때문이다.


    노래비 형식은 아니지만 대중가요로 사랑받는 시인들의 시비 또한 서울에는 많다.

    소개하겠다.

    우선 대중가요로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김소월은 빼놓을 수 없다.

    서울에 있는 김소월 시비로는 서울시 중구 후암동 남산공원 내에 있는 [산유화]와

    서울시 강동구 고덕동 배재고 교정 [진달래꽃] 2개가 있다.

    모두 대중가요로도 사랑받았던 시들이다.

    바블껌의 이규대가 결성했던 남성사중창단 마일스톤스가 발표했던 박목월의 [나그네] 시비는

    서울시 종로구 당주동 로얄빌딩 앞에 있다.

    박인희의 노래로 사랑받았던 박인환의 시비 [세월이 가면]은 서울시 중랑구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다.

    2001년 서울 삼각지에 세워진 고 배호의 노래비 '돌아가는 삼각지' @최규성


    앞서 언급한 노래비 건립문화에 대해서도 언급해야 겠다.

    2000년대 들어 지방자치시대가 활성화되면서 뜨겁게 생성되고 있는 움직임이 있다.

    관광 자원의 일환으로 기획된 각종 지역축제와 노래비 건립이다.

    노래비는 지역홍보는 물론 새로운 지역축제를 탄생시키며 지역경제에 일조하고 있다.

    지명이 제목인 대중가요나 가사 중에 등장하는 지명이 등장하는 노래비는 부지기수다.

    지명이 등장하는 전국 방방곡곡엔 지난 2000년부터 어김없이 노래비가 세워지고 있다.

    현재 전국에 몇 개의 노래비가 건립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다.

    하지만 어림짐작해도 100개가 훨씬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제 세대를 초월해 사랑받는 국민가요는 단순한 노래의 개념을 넘어 지역을 상징하고

    중요 관광자원으로 무한 효용가치를 발휘하는 시대가 되었다.

    누군가를 기억하고 기억된다는 것은 아름답고 행복한 일이다. 최근 대중문화계에 생겨난 아름다운 트렌드가 있다. 떠나간 이들을 기억하는 문화다. 그 대표적인 형태는 고인에 대한 책과 추모...
    ☆☆☆☆☆ | 서울 노래비
  5. 덕수궁 돌담을 따라걷는 서울 정동길에

    마이크 모양의 소박한 노래비가 세워졌다.
    지난해 발란타인데이에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작곡가 고 이영훈의 음악을 기리는 노래비다.

    노래비 속에서 이영훈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우선 불과 1년 만에 발빠르게 그의 노래비가 세워져 반갑기만하다.

    이 노래비 건립을 위해 숨겨진 얼마나 많은 이들의 도움이 있을까를 생각하니 감사할 따름이다.

    1940~50년대 마이크 형태를 띤 노래비는 조성현작가의 작품이다.

    그가 제막식에 참석해 '무척 떨린다고' 인사를 했다.

    노래비는 고 이영훈의 얼굴과 지인들의 추모사,

    과거 고인이 만든 주옥같은 히트곡 제목과 '광화문연가' 가사 등이 적혀있다.

    제막식에 참석한 아내 김은옥은 "노래비 속 남편이 웃고 있어 더 좋다"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고 이영훈의 음악에는 광화문인근의 풍경이 많이 등장한다.

    정동길은 그가 살아 생전에 사랑했던 거리이고 그에게 음악적 영감을 제공한 공간이고

    지금도 그 거리 구석구석에는 그의 발자욱이 남아 있을 것이기에 의미가 있다.

    덕수궁 돌담이 자리한 정동길은 많은 대중에게도 애틋한 추억이 풍성한 서울의 명소다.

    덕수궁 돌담길을 이성과 한번쯤 걸오보지 않은 이가 그 누구던가~

    물론 덕수궁 돌담길은 꼭 헤어지게 된 다는 징크스가 있긴 하지만^.^


    그렇기에 그곳을 배경으로 노래한 이영훈의 음악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자신의 사랑했던 거리에 스스로 부활했으니 이 어찌 반가운 일이 아니련가.


    오후 2시 제막식에는 정동길을 찾았던 많은 시민들이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바로 잡을 일이 또 생겼다.

    어제 노래비 제막행사에서 이문세는 이영훈의 노래비에 대해

    "서울 사대문 안에 건립된 최초의 대중가요 노래비"라고 의미를 부여했었다.

    이에 일부 언론에서도 "대중음악 작곡가로선 처음으로 서울 시내에 노래비가 세워졌다."고 기사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미 오래전에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뒤켠에 길옥윤이 만들고 패티김이 노래한

    '서울의 찬가' 노래비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삼각지 거리에는 고 배호의 노래비가 또한 대학로에는 고 김광석의 노래비가 엄연하게 세워져 있질 않는가.

    그리고 작곡가 황문평의 '빨간마후라' 노래비 또한 대구에 건립되어 있다.
    나 역시 생전에 그의 음악을 사랑했던 사람인지라 그의 노래비에 의미를 부여함에 망설일 이유가 없지만

    잘못된 팩트로 대중에게 대중가요의 현재 위상을 혼동하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고 이영훈은 이문세라는 가수를 만났기에 음악인생을 만개시킬 수 있었다.

    이문세 또한 이영훈이라는 수준급의 작곡가를 만날 수 있었기에 입담꾼에서 최고의 가수로 거듭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곧 한국 대중가요의 수준이 한 단게 업그레이드되는 긍적적 결과로 이어졌다.

    그들의 음악은 외국의 팝에 견줄만한 것이었다.

    우린 이영훈 이문세 콤비의 음악을 팝 발라드라고 규정한다.

    노래비 건립에 주도적 역할을 한 이문세가 제막식 미니콘서트에서

    고인의 노래를 부를 때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모습은 그 자리에 있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아리게 했다.

    참으로 가슴 뭉클한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주도적으로 힘을 보태 고인에게 빛나는 우정을 확인시켜준 탤런트 박상원과 사회를 맡은 김승현의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진 것은 당연하다.

    2년여의 투병기간에도 자신의 히트곡들로 뮤지컬을 만들기 위한 작업을 계속했던 고 이영훈,

    1주기에 맞춰 고인이 곡을 쓰면서 남긴 메모와 일기 등을 묶은 책도 민음사에서 출간되어

    그의 노래비에 헌정되었다.


    이날 행사에는 이영훈의 유가족인 아내 김은옥과 외아들 이정환이 참석했다.

    객석에서 제막식을 바라보던 모자는 상기된 표정이었고 손을 꼬옥 잡고 있었다.

    그리고 오세훈 서울시장, 송대관 가수협회장, 백순진 싱어송라이터협회장,

    정훈희 가수협회 부회장, 노래비 추진위원장을 맡은 탤런트 박상원, 고인과 황금콤비를 이뤘던 가수 이문세, 국민배우 안성기,

    하모니카 연주인 전재덕, 최근 활동을 재개한 뮤지컬 배우 윤석화 등과 고인의 음악을 추억하는 시민 400여명이

    고 이영훈의 '광화문연가' 노래비 제막식에 참석했다.



    제막식에 이어 열린 기념 미니 콘서트에서는 이영훈이 작곡한 명곡들이 울려 퍼졌다.
    정훈희가 '사랑이 지나가면', 시각장애인 하모니카 연주가 전제덕의 '광화문 연가' 가 이어졌다.




    '

    옛사랑'을 부르던 중 목이 멘 이문세는 "울컥 한 건 감동스러워서다. 이영훈씨가 부럽다. 세상을 떠나고 더 많은 빛을 보게 됐다.

    대중음악가의 노래비가 4대문 안에 세워졌다는 데 감사하고 내가 깨어있는 이 세상에 감사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시종 상기된 표정의 이문세는 "타계 1년 만에 노래비가 세워진 것은 훈장과 같다"며 "영훈씨는 떠나서, 나는 살아서 훈장을 받았다. 바닥에 천을 깔고 노래했지만 시민 여러분이 멋있는 세트가 돼 줬다. 오래 잊지 못할 최고의 공연이었다.

    이곳이 정점이 되어 대중문화계에 기여한 분들을 위한 공간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하기도 했다.

    노래를 하는 이문세의 큰 눈망울에는 어느세 촉촉하게 이슬이 맺혀 있었다.

    그는 먹먹한 마음을 달리기 힘들어 잿빛 하늘을 응시하며 노래했다.

    그 모습에서 고 이영훈과 함께 수많은 밤을 지새며 노래에 몰두했던 지난 날이 느껴져 가슴이 뭉클했다.

    사회자 김승현은 "미래까지 사랑받았으면 좋겠다는 의미에서 아날로그 마이크 형태로 제작했다"며

    "마이크 아랫부분에 이영훈씨의 웃는 얼굴을 담았고 고인의 대표곡과 지난해 헌정 공연 때 친구들이 쓴 추모사 일부를 새겨 넣었다"고 소개했다.
    또 김승현은 "고인이 세상을 떠나기 전 자기 곡으로 만든 뮤지컬을 제작하는 꿈이 있어 투병 중에도 시놉시스를 썼다"며

    "그의 꿈을 친구들이 대신 이뤄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박상원은 "내년부터는 하이 서울페스티벌과 연계해 봄 혹은 가을 이영훈 음악제를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족대표로 감사의 인사말을 한 아들 이정환은 "광화문 돌담길에 아버지가 쓴 수많은 서정시의 흔적이 영원히 남게 돼 가슴이 벅차오른다"며 "이 노래비를 보고 '광화문연가'를 불러주고 추억하면 여러분과 내 마음속에 아버지가 영원히 계실 것"이라고 말했다.


    또 유족들은 헌화와 더불어 이씨의 1주기 기념으로 출간된 아트북 '광화문연가'를 노래비에 헌정했다.





    전재덕의 하모니카 연주에 맞춰 이문세는 오랫만에 활동을 재개한 윤석화와 함께 '난 아직 모르잖아요'를 불렀고

    시민들과 함께 고인의 대표곡 '광화문연가'를 합창했다.




    '광화문연가'가 울려퍼진 후 노란색, 흰색 풍선이 떠오르며 하늘을 수놓았다.

    밸런타인데이를 맞아 데이트를 나온 연인들을 비롯해 시민들은 함께 노래하며 고 이영훈을 추억했다.
    김승현, 박상원, 이문세는 행사를 마친 후 경기도 분당 남서울공원에 안치된 이영훈 씨를 찾아갔다.


    그는 우리 곁을 떠난 지 1년 만에 노래비로 완벽하게 부활했다.

    발렌타인데이에 떠난 그의 노래들은 영원히 연인들을 위한 연가로 영원할 것이다.

    고 이영훈의 음악은 고인이 좋아했던 정동길에서 사람들의 마음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덕수궁 돌담을 따라걷는 서울 정동길에 마이크 모양의 소박한 노래비가 세워졌다. 지난해 발란타인데이에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작곡가 고 이영훈의 음악을 기리는 노래비다. 노...
    ☆☆☆☆☆ | 광화문 연가, 노래비, 이영훈

  6. 자 이제 스컹크 헬 클럽의 고별공연 마지막 포스팅입니다~



    이 시리즈 포스팅을 계속 보신 분이라면 이제 이런 풍경은 익숙해 지셨을 듯^.^



    공연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정말 이런 모습이 끝도 없이 이어졌답니다~




    비록 드럭 시절의 시작은 보질 못했지만 이렇게 마지막을 기록할 수 있어 행복했답니다~




    사진으로나마 기록을 남겼으니 얼마나 다행인가요...

    이 사진들 중 몇 장을 선택해 금년에 발간예정인 <한국의 인디뮤지션>사진집에 수록하려합니다.



    이제 공연은 막바지...



    럭스와 크라잉넛의 우정어린 어깨동무 모습입니다.

    이 한 장의 사진이 고별공연의 마지막 순간 분위기를 잘 전달해 주는 것 같습니다.



    ㅎㅎ...어떻게 저런 포즈로 관객들 머리위로 날라다닐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입니다~



    자 제가 기록한 홍대 인디음악의 모태 스컹크 헬 고별공연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공연장을 떠나면서 담아본 스컹크 헬의 외경 모습입니다.



    이 포스팅을 올리면서 스컹크 헬을 끝까지 지킨 럭스의 원종휘씨와 통화를 했답니다.

    마지막을 잘 기록해줘서 고맙다고~

    저도 힘겨운 순간을 묵묵하게 이겨내고 지금껏 그곳을 지켜주어서 고맙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펑크록 장르는 비단 한국 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규모가 많이 축소된 상태라 하더군요.

    원종희씨의 말을 빌리면 미국에서 펑크록 전문 클럽은 2곳 밖에 남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하더군요.

    인구대비도 그렇고 한국과 미국의 모든 상황을 고려해보면 1곳이 남아있던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 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펑크 록 장르는 끝이 아니고

    다른 클럽과 무대에서 지속될 것이고 새로운 역사로 나아가는 시작이라 생각합니다.

    고별공연장에서 열광했던 모든 관객과 참여 밴드에게 기립박수를 보냅니다.


    그리고 긴 시리즈 포스팅 끝까지 관심가져준 분들께도 감사인사 드립니다.

    모두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이것으로 스컹크 헬 고별공연 포스팅을 마칩니다~

    자 이제 스컹크 헬 클럽의 고별공연 마지막 포스팅입니다~ 이 시리즈 포스팅을 계속 보신 분이라면 이제 이런 풍경은 익숙해 지셨을 듯^.^ 공연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정말 이런 모습이 끝도 없...
    ☆☆☆☆☆ | 스컹크 헬

  7. 열정적인 펑크록 밴드 럭스의 무대는 계속됩니다.

    리더 원종희의 얼굴은 어느새 땀으로 범벅이 되어갑니다.



    모름지기 모든 예술 장르의 감동은 진정성 여부인데...

    스컹크 헬 고별공연 무대는 바로 그것이 존재했기에 충분히 감동적이었습니다.



    노래 한 곡을 부르고 나면 땀으로 뒤범벅되는 무대.

    mr을 틀고 행사식으로 열리는 공연이 난무하는 요즘...

    이렇게 긴장감이 넘쳐 흐르는 무대야 말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하기 마련이죠.



    공연이 막바지로 내달으면서 스컹크 헬 클럽은 사우나를 방불케 하는 열기로 후끈 달궈졌답니다.



    기록하고 지켜보는 입장에서 어느덧 이 공연에 빠져들고 있음을....ㅎㅎ



    마치 어느 종교의 광신도처럼 무대위에서 파워넘치는 공연을 펼치는 럭스를 향해

    손을 휘젓고 외쳐대는 함성의 원동력은 무엇인지...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도 관객들도 모두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객석에 있을 때 처음 경험하는 이 광경에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었는데...

    차츰 익숙해 지더군요.



    이건 또 왠 복장^.^

    열기로 인해 그냥 서 있어서도 땀을 줄줄 흐르는 객석에서 특이한 복장으로 열광하는 관객을 발견했습니다~



    점점 더 머리위로 몸을 날리는 관객들도 늘어가고...



    거의 돌아가면서 한번은 다 객석으로 몸을 날려보는 것 같았습니다...ㅎㅎ



    객석과 마찬가지로 무대위의 열기도 뜨겁기 매한가지.

    공연 후 돌아가기가 섭섭했는지 크라잉넛 멤버들도 다시 무대위로 합류.



    젊음이 좋다했는데 그날 고별공연에 온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하나가 되는 기분좋은 분위기를 연출했습니다.



    럭스의 원종희도 기분이 업된 듯 역동적인 표정의 연속입니다.



    럭스의 다른 멤버들도 똑같은 심정인가 봅니다.

    카메라를 들이대기만 해도 그림이 아닌 것이 없으니..ㅎㅎ



    스컹크 헬의 마지막 무대는 럭스와 크라잉넛의 합동무대라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온 몸에 문신을 한 드러머의 모습이 조금은 썸뜩했지만

    이 공간에선 자연스럽게 수용되는 느낌^.^



    무대위는 그야말로 열심으로 스컹크 헬의 마지막 순간을 기록하는 몸짓이 가득찼습니다.



    객석은 그야말로 머리위로 돌아다니는 관객들의 퍼레이드...


    이제 홍대 인디음악의 모태 스컹크 헬 클럽 고별공연의 마지막 포스팅을 남겨두었습니다~

    열정적인 펑크록 밴드 럭스의 무대는 계속됩니다. 리더 원종희의 얼굴은 어느새 땀으로 범벅이 되어갑니다. 모름지기 모든 예술 장르의 감동은 진정성 여부인데... 스컹크 헬 고별공연 무대는...
    ☆☆☆☆☆ | 스컹크 헬

  8. 스컹크 헬을 지켜온 펑크록 밴드 럭스의 리더 원종희.

    크라잉넛 공연이 막바지에 달할 즈음...

    그는 무대 뒷 편 드러머 옆에서 스컹크 헬의 고별공연을 착찹한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눈물이 쏟아질 듯 한 표정으로 그는 역사속으로 사라지는 스컹크 헬의 고별공연을 묵묵히 한동안 지켜보았다.

    이따금 감정을 억누르기 힘들어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사내같은 강한 이미지의 그도 정들었던 이곳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일이 그닥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날 고별공연의 사진을 내가 담겠다고 했었고 그는 흔쾌히 받아드렸고

    그리고 자체적으로 동영상으로 촬영했는데 공연 순간순간 캠코더에 담겨진 영상을 바라보곤 했다.



    혼신의 힘을 다한 크라잉넛 무대가 드디어 끝났다.

    지켜보던 럭스의 원종희는 환한 웃음으로 하이파이브를 날렸다.



    고별공연은 무료입장이었으니 출연 밴드들도 무료출연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관객과 뮤지션 모두 진심으로 스컹크 헬 고별공연에 임했다.

    그들이 나누는 악수에는 말할 수 없는 그들만의 진한 우정이 담겨 있어 보였다.



    저 표정을 보라.

    정말 가슴 뭉클한 사내들만의 진한 우정이 담겨있지 않은가.

    스컹크 헬 고별공연은 그런 무대였다.

    모두가 한 마음으로 아쉬움을 가진....



    하물며 시작부터 끝까지 이 무대를 지킨 크라잉넛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싶다.

    백만금을 받고 다른 무대에 출연한다해도 그날 처럼 무언가를 폭발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크라잉넛 공연 후 마지막 순서인 럭스의 무대가 이어진다.



    마지막 무대인 럭스의 리더 원종희가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크라잉넛은 공연이 끝났지만 섭섭한 마음을 감추질 못했다.



    이제 마지막 무대 럭스의 순서다.



    이미 바세린, 크라잉넛의 무대를 통해 진이 빠졌을 것 같았던 관객들은 또다시 럭스의 등장에 힘을 낸다.



    럭스의 피날레 무대가 시작되자 관객들은 무대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무대의 열기는 순간적으로 급상승...

    원종희의 카리스마 넘치는 무대가 이어졌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음을 느꼈기 때문일까.

    무대는 격정의 소용돌이로 들어가는 듯 했다.



    아마도 이 격렬한 반응은 홍대 인디음악의 시작이었던 이 무대가 사라짐을 관객들도 똑같이 아쉬워하는 듯 했다.



    감정을 억제하기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였던 원종휘는 응어리진 무엇을 토해내듯

    열정적인 무대를 이끌어갔다.



    관객들도 똑같은 마음으로 스컹크 헬의 뜨거운 분위기를 이끌어냈다.



    당분간 이런 공연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분위기는 뜨거웠지만 왠지 슬픈 마음이 생겨났다.



    모두 포효하듯 소리치고 외쳤다.



    여하튼 나로서는 처음 경험한 그날 스컹크 헬 펑크 록 공연의 이미지는 너무나 강렬해 지워지질 않는다.

    스컹크 헬을 지켜온 펑크록 밴드 럭스의 리더 원종희. 크라잉넛 공연이 막바지에 달할 즈음... 그는 무대 뒷 편 드러머 옆에서 스컹크 헬의 고별공연을 착찹한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눈물...
    ☆☆☆☆☆ | 드럭, 스컹크 헬, 원종희

  9. [대중문화] 국민가수 이미자 50년 노래의 비결
    주간조선 설합본호 칼럼
    ▲ photo 조선일보 DB
    국민가수 이미자가 데뷔 50주년을 맞았다. 화려한 외모의 가수도 아닌 그녀가 반세기 동안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아온 원동력은 무엇일까? 한때 그녀의 탁월한 가창력의 원천은 ‘돌출된 입 때문’이라는 황당한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는 단순히 노래 잘하는 가수이기 때문에 ‘영원한 동백아가씨’로 자리매김 되었을까? 과연 그럴까?

    미국인들은 로큰롤의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의 성대를 영구보존해 해부해 보고 싶어했고,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의 뇌를 해부해 특이한 구조를 발견하고 싶어했다.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목소리’로 극찬을 받았던 이미자도 오래 전 일본에서 ‘사후에 성대를 영구보존하여 해부학적으로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고 해 대중적 화두가 된 적이 있다. 1993년 실제로 검사가 이루어졌다. 대중적 호기심을 자극한 ‘이미자 성대의 비밀’을 풀어보고자 한 TV방송사가 이대부속병원 음성관리소에 이미자의 성대 분석을 의뢰했던 것. 당시 성대, 음폭, 발성, 공기 역학 부문으로 정밀 검사를 했다. “이미자의 성대는 점액질이 풍부하고 훈련이 아닌 천부적인 창법, 발성법을 체득하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처럼 이미자의 매력적인 목소리는 일반인과 차별적인 성대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 사실로 판명되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목소리는 분명 신의 선물일 것이다. 단 한번 멜로디를 들으면 곧바로 소화해 내는 타고난 절대음감 또한 신의 축복일 것이다. 거기에다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는 진지한 태도는 이미자를 국민가수로 지탱시켜온 원동력이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음역(音域)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가수들은 나이가 들면서 겉멋이 든 창법으로 듣는 이를 짜증나게 하지 않던가. 특히 연습이 부족한 상태에서 무대에 올라 고역(高域) 처리에 부담을 느껴 습관적으로 객석에다 마이크를 들이대는 ‘나쁜 습관’을 보이는 가수들을 우리는 수도 없이 보아왔다.

    칠순이 코앞이지만 한결같은 미성에 꾸밈없이 소박하고 진지한 이미자의 무대는 그래서 감동을 안겨준다. 이미자의 노래는 마치 ‘순박한 시골 누이’ 같다.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의 노래에서는 가식이나 기교를 찾을 수 없다. 꾸밈없는 그녀의 음색이야말로 이미자 노래의 최대 무기가 아닐까!

    오랫동안 주류음악의 권좌를 차지해온 트로트는 동시에 ‘천박하다’는 장르적 멸시를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이미자조차 트로트를 포기하고 팝가수로 변신하고 싶었던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트로트에는 시대의 아픔을 치유하고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준 장르적 미덕이 있었기에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천편일률적인 멜로디와 천박한 가사로 일관된 요즘의 트로트는 장르의 미덕을 망각하고 있다. 오죽하면 이미자조차 자신을 트로트 가수가 아닌 전통가요 가수로 불러달라고 했을까!

    물론 장윤정, 박현빈 등 젊은 가수들이 젊은 감각의 트로트로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지만 장르적 미덕을 회복한 정도는 아니다. 이미자의 편안하고 꾸밈없는 트로트 가락은 시대를 초월해 당대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해준 친구 같은 존재였다. 그에게 ‘엘레지의 여왕’ ‘한국 대중가요의 대명사’ ‘국민가수’ 등 수많은 찬사가 따라다님은 당연한 일이다.

    흔히 이미자는 끊고 맺음이 분명한 직설적인 성격에 사생활 공개를 꺼려 인터뷰하기 힘든 가수로 유명하다. 그녀의 자녀들도 집에서 엄마의 노래 연습을 본 적이 없다. 놀랍게도 45주년 기념공연이 처음 본 엄마의 무대였다고 한다. 이미자는 일과 가정의 구분이 정확한 사람이다. 일을 떠나서는 철저하게 주부이자 엄마의 역할에 충실한 삶을 견지해 왔다. 이처럼 분명한 자기 관리는 대중에게 확고한 신뢰감을 심어주었다. 여장부 같은 성격이지만 남편에게 순종하는 고전적 여성상 또한 놀라운 대목이다. 실제로 그녀는 남편에게 받은 모든 월급봉투를 보관하고 있다. “그 무엇보다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이라고 단언하는 대목에선 인간적 친근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10살의 이미자는 부산 피란민 시절 국제시장 앞 동아극장에서 인기가수 백난아의 공연을 보면서 가수의 꿈을 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57년 KBS 라디오 노래자랑대회. 교복을 입고 갔다가 ‘학생 출전 불가’라는 이유로 퇴짜를 맡고 다음날 엄마 옷으로 갈아입고 출전을 하는 대담성을 보였다. 여고 졸업을 앞둔 1958년. 단발머리에 까만색 싸구려 운동화를 신고 최초의 민영TV 방송 HLKZ의 ‘예능 로터리’에 출전해 최고상을 받으며 정식가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초창기 그녀의 가수활동은 순탄하지 않았다. 싸구려 출연료를 받고 지방 무대를 돌아다니며 선배들 양말을 빨고 온갖 잔심부름을 도맡아 해야 했다. 여관방이 너무 추워 몰래 도망을 친 적도 있었다.

    1960년대 초반 스카라극장 건너편 국제다방이나 모나미다방은 가수를 비롯한 음악관계자들의 집합소. 주목을 받는 가수였지만 경제사정이 곤궁했던 이미자도 이곳에서 일거리를 찾으며 레코드 회사를 기웃거려야 했다. 1964년 작곡가 백영호의 추천으로 ‘동백아가씨’를 취입할 기회를 맞이하며 음악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마련했다. 당시 35주 동안 인기차트 1위를 점령했던 동백아가씨의 대박 행진은 가요계 판도를 뒤바꾸는 일대 사건이었다. 그 해 겨울, 대학생들이 주고객층인 충무로 음악감상실 ‘세시봉’에서는 진귀한 풍경이 연출되었다. 트로트를 천시했던 그곳의 젊은이들이 ‘동백아가씨’를 합창으로 불렀던 것. 장르를 넘어 그녀의 노래가 지닌 마력을 증명해주는 대목이다. 1965년 말 동백아가씨는 라이벌 레코드사들의 시기와 질투 속에 방송금지 처분이 내려졌지만 후속곡 ‘흑산도 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등 무려 4곡이 연말 결산 톱 10곡에 선정되며 인기 퍼레이드는 거침없는 행진을 계속했다.

    그녀는 파월장병이 손꼽는 초청 1순위 인기가수였다. 1965년 첫 베트남 파병 부대 위문 공연단에 뽑힌 이후 5년 동안 장병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그녀의 애절한 노래 가락은 장병들의 눈물샘을 여지없이 자극했다. 이때의 공로로 1973년 방한한 베트남 티우 대통령은 그녀에게 최고문화훈장을 수여했다. 최초로 외국의 문화훈장을 수여받은 가수로 기록된 이미자는 이후 국내외에서 3번이나 훈장을 받은 가수로 등극했다.

    이미자는 상복도 많았다. 1964년부터 1970년까지 MBC 10대 가수상의 단골 수상자였고 그중 3번은 가수왕에 등극했다. 당시 여자가수 지망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미자의 창법을 모델로 삼았다. 2002년 국내 가수로는 처음으로 남북 동시 생중계된 그녀의 ‘평양 특별공연’은 한민족 모두의 심금마저 울렸다.

    그녀의 노래가 온 민족의 사랑을 받은 이유는 타고난 실력에다 꾸준한 연습, 진지한 음악적 태도, 건실한 생활이 합체되었기 때문이다. “음악을 정식으로 배우지도 않았건만 신곡취입 때 작곡가가 피아노로 들려주는 곡을 처음 한번 들어보고 그 다음엔 스스로 불러보면 끝이었다. 그리곤 감정까지 적절하게 표현하며 바로 취입할 수 있는 유일한 가수”라는 작곡가 고봉산의 극찬은 데뷔 50주년을 맞은 그녀에게 어울리는 헌사일 것 같다.


    /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월간중앙 2월호에 기고한 이미자 기사가 네이버 메인 뉴스에 올랐네요~



    50만분의 1 확률
    해도 해도 너무하네

    [대중문화] 국민가수 이미자 50년 노래의 비결 주간조선 설합본호 칼럼 ▲ photo 조선일보 DB 국민가수 이미자가 데뷔 50주년을 맞았다. 화려한 외모의 가수도 아닌 그녀가 반세...
    ☆☆☆☆☆ | 이미자

  10. 계속해서 크라잉 넛 무대입니다.

    가슴 뭉클했던 이 장면을 다시 보니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되살아납니다~



    이날 무대에서 크라잉 넛 공연을 지켜보며 이 밴드의 감회가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스컹크 헬의 고별공연이 아쉬워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너무도 열심히 연주하는 모습에서 펑크록에 대한 인식을 다시 가지게 되었다고 할까~



    역시 진정성을 가진 무대는 긴장감이 있는 법이고 누구보다 관객들이 가장 먼저 아는 것 같았습니다.

    점점 더 몸을 날리는 관객들이 늘어갑니다.




    객석은 그야말로 흥분의 도가니.

    이번에는 관객이 아닌 뮤지션의 기타가 관객의 머리 위로 헤엄치는 진풍경까지 벌어졌습니다.



    뮤지션과 함께 머리를 흔들어대고 누구하나 멈춰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전원이 머리를 흔들어대는 굉장한 장면을 사진을 표현하지면 슬로우셔터 밖에 더 있겠어요^.^

    보조 스트로보까지 쳐서 이 장면을 잡았답니다~



    크라잉 넛 무대때 펼쳐졌던 인상 깊었던 관객들이 멋찐 장면 몇 장 더 기록하렵니다~



    자 이제 크라잉 넛의 무대도 막바지를 향합니다~



    정말 굉장했던 순간들~



    공연을 마치고 아쉬워하는 모습에서

    홍대 인디음악의 모태 같은 공간이 사라짐에 대한 아쉬움이 관객들에게도 강하게 전달되는 것 같았습니다.



    크라잉 넛은 자신들의 무대가 끝난 후에도 떠나지 않고

    마지막 휘날래 무대인 럭스의 무대를 함께 했답니다~



    자 크라잉 넛 무대에 이어 스컹크 헬 고별 공연의 대미를 장식하는

    럭스의 무대가 이어집니다~

    계속해서 크라잉 넛 무대입니다. 가슴 뭉클했던 이 장면을 다시 보니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되살아납니다~ 이날 무대에서 크라잉 넛 공연을 지켜보며 이 밴드의 감회가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 | 드럭, 스컹크 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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