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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클 출판 38 POSTS


  1. 백석 詩 해석

    추일산조 / 광원 / 청시


    이혜미



    추일산조(秋日山朝)


    아츰볕에 섶구슬이 한가로이 익는 골짝에서 꿩은 울어 산울림과 장난을 한다

    산마루를 탄 사람들은 새꾼들인가

    파란 한울에 떨어질 것같이

    웃음소리가 더러 산 밑까지 들린다

    순례중이 산을 올라간다

    어젯밤은 이 산절에 재가 들었다

    무릿돌이 굴어나리는 건 중의 발꿈치에선가


    ▶ 가을 아침볕에 나무의 작은 열매가 익어가고, 꿩은 운다. 꿩의 울음소리는 산울림이 되어 화자의 귓가에 울린다. ‘꿩과 산울림이 장난을 한다’라는 부분은 꿩의 울음소리가 산울림이 되어 ‘화음을 이룬다’라는 백석식 표현이다.

    화자의 시선이 카메라의 렌즈가 되어, 한 편의 영상을 보여준다. 산 아랫부분에 설치되어 있는 화자의 렌즈는 나뭇가지에 매달린 작은 열매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리고 꿩의 울음소리가 산울림이 되는 순간부터 카메라는 수직으로 이동을 한다. 산을 오르는 나무꾼들을 클로즈업하고, 그들의 말소리와 웃음소리에 따라 카메라의 렌즈는 하강한다. 산을 타는 중을 따라 다시 카메라의 렌즈는 상승하고, 중의 발걸음에 따라 굴러 떨어지는 잔돌에 다시 렌즈는 하강한다. 이렇듯 화자의 렌즈는 동심원을 그리면서 순환하고 있다. 마치 가을 아침에 상쾌한 대기의 순환처럼 말이다.

    이 시에 나타난 백석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섬세하고 정밀한 촉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작은 열매에 대한 섬세한 시각적인 이미지가 꿩의 울림소리로 극대화되고, 나무꾼들의 이미지가 그들의 웃음소리로 극대화된다. 작은 이미지가 청각으로 극대화된다. 섬세한 시각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두 번째는 사연을 감추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대로 말을 하되, 그 사연을 감추는 것은 지금까지 발표된 백석의 시들의 공통된 특징이었다. 나의 방식대로 ‘무언의 미’라고 말하고 싶다. 사연을 감춤으로서 독자로 하여금 상상할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다. 이는 시의 여운을 자아내고, 우수의 정서를 일으킨다.

    이 시의 미학은 마지막 행에 있다. <무릿돌이 굴러나리는 건>은 앞서 백석이 보여줬던 고즈넉한 가을산의 미세한 파문을 일으키는 행이다. 자신이 1행부터 만들어낸 분위기에 돌을 던져 작은 파문을 일으키는 건, 이 시의 절대적인 미학이다.

    왜 가을일까.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의 아침을 떠올려보자. 쌀쌀한 공기와의 대면이 마음을 시리게도 하지만, 어느 계절의 대기보다 상쾌하고 신선하다. 초가을 상쾌한 공기가 꿩 소리, 나무꾼들의 웃음소리, 무릿돌이 굴러 떨어지는 소리를 한층 극대화시킨다. 그 소리들이 더 선명하게 들린다. 백석은 한 자리에 서서 이 소리들을 들으며 가을산을 둘러본다. 마치 상쾌한 가을공기에 모든 걸 씻어내듯이.



    광원(曠原)


    흙꽃 니는 이른 봄의 무연한 벌을

    경편철도(輕便鐵道)가 노새의 맘을 먹고 지나간다

    멀리 바다가 뵈이는

    가정차장(假停車場)도 없는 벌판에서

    차(車)는 머물고

    젊은 새악시 둘이 나린다


    ▶ 이 시를 읽었을 때, 드는 느낌은 ‘떫다’이다. 이른 봄 / 노새 (말과 당나귀 사이에서 태어남) / 가정차장 / 젊은 새악시 / 이를 봤을 때, 아직 성숙되지 못한 단어의 ‘떫다’가 생각났다. 미숙함, 부재, 부재에 따른 쓸쓸함까지 잘 드러나 있다. 세 관념들이 꼬리의 꼬리를 물면서, 시각화가 두드러진다.

    제목 ‘광원’은 넓은 평원을 말한다. 백석은 광원이라는 종이에, 세 개의 단어를 던져놓았다. 아무것도 없는 황망한 곳에 이는 흙먼지는, 궤도가 좁은 철도는, 덜렁 놓인 차는 쓸쓸함을 극대화 시킨다.

    백석은 단지 흙먼지가 이는 것을 흙꽃이라고 표현한 것일까? 이른 봄이라 바람이 거세지도 않은데 말이다. 물론 흙먼지가 이는 것을 ‘꽃’이라고 표현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황망한 벌판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같다. 멀리 바다가 보이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벌판, 그곳을 지나가는 철도. 마치 궁합이 잘 맞는 삼합처럼 그럴싸한 그림을 만든다.

    경편철도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바퀴자국은, 쓸쓸함을 극대화 시킨다. 있다가 사라진 부재. 앞 서 발표된 시,「성외城外」에서도 보여 졌듯이 부재와 공백의 이미지가 강하다.

    백석은 이른 봄 얼음이 녹은 망연한 벌판을 조용히 읊조리고 있다. 그의 입에서는 담담함이 묻어나온다. 담담하게 감정을 배제하고 이미지만 딱 제시한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제시된 이미지에는 쓸쓸함이나 고독함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슨 말이라도 더 나올 법하지만 백석은 말을 아낀다. 행과 행 사이의 텀, 공백의 미. 그리고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는 무언의 미학. 백석은 독자들에게 바란다. 어떤 답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감정의 울림을 바라는 것이다.


    청시(靑柿)


    별 많은 밤

    하누바람이 불어서

    푸른 감이 떨어진다 개가 즞는다


    ▶ 별이 많아서 풍요로운 느낌이 들게 하는 밤. 서쪽에서 가을바람이 불어온다. 쓸쓸함을 몰고 온 가을바람이 나뭇가지를 살포시 건드리면, 덜 익은 감이 똑 떨어진다. 그리고 개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마지막 행은 이 시의 미학이다. 짖는 개는 두 가지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상승의 역할이다. 하늬바람에 떨어지는 푸른 감 때문에 3행전까지는 하강의 이미지가 강하다. 하지만 백석은 짖는 개를 등장시킴으로서 이미지를 다시 끌어올린다. 하강에서 상승의 이미지로 마무리를 지었다.

    두 번째는 자신이 만들어낸 분위기에 또 한 번의 미세한 파문을 만든다는 것이다. 앞의 시 <추일산조>에서와 마찬가지 의미이다. 별이 빼곡한 가을 밤. 하늬바람이 부는 것에서 가을밤의 적막함이 나타난다. 하지만 짖는 개는, 그 적막함을 깨버린다. 한없이 떨어지기만 한 감정을 대기 속에서 울려 퍼지게 했다. 가을에 따른 감정들을 밤공기에 맡긴 것이다. 밤공기에 몸을 맡긴 감정은 공기의 입자에 따라 멀리 멀리 퍼진다. 고요함 속의 폭발. 여기서 말하는 폭발이란 거대한 굉음을 내지는 않지만, 강력하게 공기 중에 뿌려진다.

    가을은 풍요의 계절인 동시에 하강의 계절이다. 하늘을 빼곡히 만드는 별을 통해서 ‘풍요’를, 떨어지는 떫은 감을 통해서 ‘하강’을 나타내고 있다. 시 한편에 상반되는 느낌의 두 시어를 썼다. 상반된 시어의 불협화음이 아닌 아름다운 가을노래를 자아내고 있다.

    이 시는 서사가 없이 이미지만으로 구성되었다. 그래서 인지 쓸쓸함이나 슬픔 같은 감정의 단면은 배제되어 있다. 가을 밤 그리 세지 않은 하늬바람에 간드랑간드랑 움직이는 나뭇가지, 거기에 멍멍 짖어대는 개의 소리가 들려온다. 가을의 고적이 실감난다. 적막한 가을 영상이 영사기 같은 백석의 눈을 통해서 돌아간다.


    백석 詩 해석 추일산조 / 광원 / 청시 이혜미 추일산조(秋日山朝) 아츰볕에 섶구슬이 한가로이 익는 골짝에서 꿩은 울어 산울림과 장난을 한다 산마루를 탄 사람들은 새꾼들인가 파란...
    ☆☆☆☆☆ | 광원, 백석, 이혜미, 청시, 추일산조
  2. 동화 원작 애니메이션 분석하기

    • 권정생, 강아지똥, 길벗어린이, 1999.

    • 권오성, 강아지 똥(Doggy Poo), 2003.


    이혜미

    “아이고, 더러워.” / “똥을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 “개똥은 약으로 쓸 수도 없어.” 우리는 종종 이런 말을 내 뱉는다. 더러워서 피하는 존재, 약으로도 쓸 수가 없을 정도로 하찮은 존재, 강아지똥. 불필요하며, 더러운 존재의 대명사인 강아지똥을 소재로 한 책이 있다. 권정생 선생님의 동화『강아지똥』은 세상에 쓸데없는 존재란 없음을 메시지로 담고 있다. 이 동화는 2003년 권오성 연출의 애니메이션 <강아지 똥>으로 발표가 되었다.


    얼핏 보면 충실한 각색이기 때문에, 차이점이 없을 것 같이 보이는 동화와 애니메이션. 하지만 동화책을 보고 애니메이션을 시청을 하면서 공통점은 물론,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부터 권정생 선생님의 동화『강아지똥』과 권오성 연출의 애니메이션 <강아지 똥>을 비교분석 해보겠다.


    # 공통점


    1) 하느님은 쓸데없는 물건은 하나도 만들지 않으셨어 = 주된 메시지

    동화『강아지똥』과 애니메이션 <강아지똥>은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는 가치가 있음을 주된 메시지로 삼고 있다.

    강아지똥은 자신이 쓸데없는 ‘똥’이라는 것에 상처를 받는다. 자신도 반짝반짝 빛이 나는 하늘의 별처럼 아름다운 존재가 되고 싶은데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아름다운 존재란, 더럽게 보이는 ‘똥’이 아닌 예쁜 형상을 가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강아지똥에게 아름다움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것’ 을 의미한다.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 고민을 하는 강아지똥은 마지막에 ‘민들레’의 살이 되어준다.

    강아지똥의 도움(양분)이 필요하다는 민들레의 말에, 강아지똥은 뛸 듯이 기뻐한다. 그리고 민들레를 폭 감싸 안아, 민들레에게 살이 되어준다. 결국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 같은 강아지똥은 한 송이의 민들레로 태어나는 것이다. 민들레 홑씨는 바람을 타고, 세상으로 뻗어나가 다른 민들레를 피운다. 이처럼 세상에 태어난 모든 것은 가치가 있고, 존재가 있음을 동화『강아지똥』과 애니메이션 <강아지똥>은 말하고 있다.

    동화와는 달리, 애니메이션은 <태어난 것은 죽으며 혼자 살아야해, 그것이 순리>라는 메시지도 담고 있다. 이것은 뒷부분, 차이점을 말할 때 거론하도록 하겠다.


    2) 작가로 대변되는 존재 : 행동으로 메시지 전달, 흙덩이 / 기회를 부여, 민들레

    동화『강아지똥』과 애니메이션 <강아지똥>은 작가로 대변되는 존재가 등장을 한다. 바로 ‘흙덩이’와 ‘민들레’이다. ‘흙덩이’와 ‘민들레’는 모두 작가로 대변이 되고 있지만, 하는 역할은 다르다. ‘흙덩이’는 ‘행동’으로서 강아지똥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고, ‘민들레’는 강아지똥에게 ‘기회’를 준다.

    ‘흙덩이’는 강아지 똥에게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를 한다.


    *동화

    내가 아주 나쁜 짓을 했거든…

    그 때 내가 키우던 아기 고추를 끝까지 살리지 못하고 죽게 해 버렸단다


    **애니메이션

    나 정말 나쁜 짓을 했어. 그래서 정말이지 너무 괴로워…

    감자와 고추를 죽였던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면서, 부디 강아지똥에게 착하게 살 것을 이야기 한다. 자신의 죽음을 당하는 것은 자신이 채소를 지키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그러던 중 자신이 있던 밭의 주인을 만나 다시 밭으로 간다. 행동으로 <하느님은 쓸데없는 물건은 하나도 만들지 않으셨어> 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흙덩이는 작가가 아니라, 그저 강아지똥과 같은 입장에 놓인 사물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흙덩이가 ‘작가’를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을 한다. 흙덩이는 과거를 참회하고, 밭으로 돌아가면서 몸소 세상에 쓸모없는 존재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흙덩이는 ‘작가의 목소리’를 ‘행동’으로 보여주어, 강아지똥에게 깨달음을 주고 있다.

    작가의 역할을 하는 또 다른 존재는 앞에서 거론을 했듯 ‘민들레’이다. 민들레는 강아지똥에게 ‘기회’를 주는 작가적 역할을 한다.

    흙덩이를 통해서 세상의 모든 것은 가치가 있다는 것은 알게 된 강아지 똥. 그는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도 고민을 한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혼란을 겪고 있을 때, ‘민들레’가 등장을 한다. 민들레는 강아지 똥에게 도움(양분)을 요청한다. 강아지 똥은 기뻐한다.

    쓸모없는 존재일 뻔 했던 강아지 똥에게 기회를 준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민들레 또한 ‘작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직접적인 목소리로 작가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강아지 똥에게 직접 ‘기회’를 줌으로써 강아지 똥에게 깨달음을 준 것이다.

    이렇게 동화『강아지똥』과 애니메이션 <강아지똥>은 주된 메시지와 작가의 목소리를 내는 존재 부분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차이점도 가지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차이점이라기보다 애니메이션이 원작에 비해 보충된 부분이 많다. 지금부터 원작에 보충된 애니메이션의 내용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 차이점


    1) 강아지똥의 감정표현: 소극적(동화) vs 적극적(애니메이션)

    첫 번째 차이점은 감정표현을 하는 강아지똥의 자세이다. 동화 속 강아지똥은 감정표현에 있어서 소극적이고, 애니메이션 속 강아지똥은 감정표현에 적극적이다.

    세 가지 상황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첫 번째 상황은 참새와 흙덩이가 강아지똥에게 하찮다고 말을 하는 상황이다. 동화와 애니메이션 속, ‘참새’와 ‘흙덩이’는 강아지똥에게 더럽고 하찮다라고 말을 한다. 동화 속 강아지똥은 그 말을 수용하고 좌절을 하고, 애니메이션 속 강아지똥은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의 하찮게 여기는 존재에 대해 적대심도 드러낸다.


    *동화

    “뭐야! 내가 똥이라고? 더럽다고?”

    강아지똥은 화도 나고 서러워서 눈물이 나왔어요.


    **애니메이션

    “그래, 똥이면 어때? 그게 어때서?

    그럼 넌 뭐야? 울퉁불퉁 시꺼멓고 도둑놈 같이 생겨서“


    동화 속 강아지똥은 자신이 가치가 없다는 말에 화가 나긴 하지만, ‘참새’와 ‘흙덩이’에게 반발을 하지 못한다. 수용한다. 그저 서러움에 눈물만 흘릴 뿐이다.

    애니메이션 속 강아지똥도 가치가 없다는 다른 존재의 말을 수용을 한다. 하지만 동화 속 강아지똥처럼 당하고만 있지 않는다. ‘흙덩이’에게 위와 같은 말을 하면서, 적대감을 나타낸다. 동화 보다 애니메이션 속 강아지똥이 조금 더 능동적이며, 감정표현이 솔직하다.

    두 번째 상황은 혼자가 된 상황에서의 강아지똥의 감정표현이다.


    *동화

    “난 더러운 똥인데, 어떻게 착하게 살 수 있을까?”

    …강아지똥은 쓸쓸하게 혼자서 중얼거렸습니다.


    **애니메이션

    “싫어, 떠나지마. 나랑 같이 있어줘, 제발…

    싫어, 가지마. 제발 가지마. 나만 두고 가지마”


    동화 속에서 흙덩이가 떠난 후, 강아지 똥은 외로움을 느낀다. 쓸쓸하게 몸을 웅크려, 떨어지는 눈을 맞는다. 쓸쓸하지만, 겉으로 표현을 못하는 소극적인 자세를 보인다.

    애니메이션에서 감나무잎과 대화를 하던 중, 바람에 감나무 잎이 날아간다. 흙덩이도 떠나고, 감나무잎도 떠나 버린 상황. 애니메이션 속 강아지똥은 각주7)처럼 솔직하게 감정표현을 한다. 혼자 있는 것은 싫다며, 제발 가지 말라고 감나무잎을 붙잡는다.

    마지막은 하느님에 대한 원망의 유무이다.

    동화 속에서는 자신을 똥으로 만든 하느님에 대한 원망이 드러나지 않는다. 누구의 탓을 하지 않고, 단지 자신이 똥이라는 사실에 슬퍼한다.

    애니메이션 속에서는 하느님에 대한 원망이 드러난다.


    **애니메이션

    “하느님은 왜 하필 똥으로 나를 만드셨을까.”


    앞에서 말한 것처럼, 동화 속 강아지똥은 감정표현을 못한다. 모든 상황을 수용할 수 밖에 벗는 소극적인 자세를 취한다. 애니메이션 속 강아지똥은 감정표현에 솔직하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바로 수용하지 않고, 거부(감정에의 호소)를 하는 자세를 취한다.


    *동화

    자신이 처한 상황 → 수용


    **애니메이션

    자신이 처한 상황 → 거부 (감정에의 호소) → 수용


    2) 애니메이션 속 또 하나의 메시지 <자연 적 순리>

    동화『강아지똥』과 애니메이션 <강아지똥>의 공통점을 ‘메시지’라고 앞서 말을 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 안에는 또 하나의 메시지가 담겨있다.

    ‘감나무 잎’을 등장시켜서 말이다. 감나무 잎은 강아지똥에게 하나의 이야기를 해준다. 자신이 태생과 엄마 나무 곁을 떠난 상황을 말이다. 엄마 나무 곁에서 떠나 세상 곳곳으로 떨어져야만, 엄마 나무는 또 다른 아기 나무들을 키운다는 것. 세상에 태어난 존재는 죽음을 맞는다는 것. 슬프지만 그것이 ‘삶의 순리’라는 걸 말한다.


    **애니메이션

    “슬프긴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누구나 한 번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는 단다…


    이것은 강아지똥에게 성장통이 된다. 흙덩이와의 헤어짐은 슬프지만, 감나무 잎과의 헤어짐은 슬프지만 그것은 받아들여야만 함을 깨닫는다. 자신뿐만 아니라, 헤어짐은 세상 모든 존재가 겪어야하는 성장통이며 순리이기 때문이다.


    3) 마무리의 방법 : 집약적 마무리(동화) vs 확산적 마무리(애니메이션)

    마지막 차이점은 이야기를 마무리 하는 방법에 있다. 동화와 애니메이션 모두 강아지똥의 양분이 흡수되어서, 자란 민들레를 통해서 마무리가 된다. 이 부분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동화의 엔딩은 민들레 싹이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한 송이의 민들레꽃을 클로즈업함으로써, ‘집약적 마무리’를 하였다.

    애니메이션의 엔딩은 민들레의 홑씨들이 세상 곳곳에 날아가는 것이다. 세상 곳곳에 날아가 세상을 아름답게 수를 놓는 홑씨를 통해서 ‘확산적 마무리’를 하였다.

    충실한 각색이기 때문에 별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강아지똥>. 이번 분석은 공통점과 차이점을 밝히는 시간이기보다는, 공통점과 보충된 부분을 찾는 시간이었다.

    세상 어디에서인가 자신이 가치가 없음을 느끼는 존재들이 있을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미물을 하찮게 여기지 말라는 메시지로 보이지만. 이 이야기는 사람에게 고대로 적용이 된다. 길거리에 있는 돌멩이든, 똥무더기에 핀 꽃이든, 사람이든 모든 존재는 가치가 있다. 읽으면 읽을수록, 구수한 된장의 냄새와 세상의 냄새가 묻어나는 <강아지똥>. 23살을 코앞에 앞둔 내가『강아지똥』을 보면서 진한 감동을 느낀 것은, 이 동화가 삶의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강아지 똥

    동 화

    애니메이션

    공통점

    1) 주된 메시지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는 가치가 있다

    2) 작 가

    작가의 메시지를 행동으로 전달: 흙덩이

    강아지똥에게 기회를 부여: 민들레

    차이점

    1) 강아지똥의 감정표현

    소극적

    솔직함, 감정에의 호소, 적극적

    2) 작품 속 메시지

    세상 모든 존재는 가치가 있다

    1) 세상 모든 존재는 가치가 있다

    2) 자연적 순리 (감나무 잎을 통해)

    3) 마무리 방법

    집약적 마무리

    확산적 마무리

    4) 강아지 똥의 상황 수용 자세

    바로 수용

    거부 (감정에의 호소) → 수용

    <표1. 동화와 애니메이션 분석표>

    동화 원작 애니메이션 분석하기 • 권정생, 강아지똥, 길벗어린이, 1999. • 권오성, 강아지 똥(Doggy Poo), 2003. 이혜미 “아이고, 더러워.” / “똥을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
    ★★★★★ | 강아지똥, 권정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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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어쩌면 그곳은 아름다울지도
    글쓴이: 야콥 하인
    옮긴이: 배수아
    펴낸곳: 영림카디널
    하트 점수: ♥♥♥♥





    "난 분명 죽게 되겠죠?"

    갑작스런 질문이었다.

    "난 죽고 싶지 않아요. 죽는 건 정말 소름끼쳐요."
    "아닐 거예요, 슈타르크부인. 우리 생각처럼 그렇게 끔찍하지만은 않을지도 몰라요."

    어머니가 대꾸했다.

    "도리어 어쩌면 그곳은 아름다울지도 몰라요. 아직까지 죽음에서 돌아온 사람이 없는 걸 보면." -73p-


    이상은님의 미발매 음반을 구했다. 너도 나도 경제타령을 애창곡으로 부르고, 자본의 부속물이 되어가고 있는 세상에서 내게 유일한 기쁨은 예술을 하고 예술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정판으로 구입한 이상은님의 음반은 역시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고, 나의 삶을 다시 한 번 힘껏 밀어올려준다.


    여유가 있으면 한적한 영풍문고 종로점에 들러 새로 나온 책들을 구경하는 것이 소소한 삶의 즐거움 중 하나이다. 몇 주 전에 영풍문고에서 발견한 야콥 하인의 <어쩌면 그곳은 아름다울지도>도 나의 지친 어깨를 토닥여주며 삶의 기쁨을 수줍은 선물로 건내준 좋은 예술 작품이었다.


    야콥 하인은 예전에 '야코프 하인'이라는 이름으로(그 사이 독일어 표기법이 바뀌었나 보다) 소개된 적이 있었다. <나의 첫 번째 티셔츠> 라는 소설을 통해 그를 처음 알았다. 내가 좋아하는 배수아씨가 번역해서 더욱 애착을 가지고 읽었던 그 작품은 무척 유쾌하면서도 작가의 정신의 날이 살아 있는 좋은 작품이었다. 그의 작품으로는 국내에 두 번째 소개되는 <어쩌면 그곳은 아름다울지도>의 번역 역시 배수아씨가 맡았다. 야코프와 배수아 이 두 작가의 조합은 썩 어울린다. <나의 첫 번째 티셔츠>처럼 이 번 작품 역시 번역이라는 것을 크게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읽혔다.


    <어쩌면 그곳은 아름다울지도>는 작가인 야콥 하인의 실화를 소설로 만든 것이다. 야콥은 그의 어머니 크리스티아네 하인의 죽음을 슬프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이면서 희미한 기억 저편에 기대어 있는 어머니의 역사를 한 발 한 발 찾아나선다. 독일에 거주하는 유대인으로서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던 어머니의 어머니 이야기. 어머니도 기억 못하는 어머니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아버지 요하네스, 그리고 어머니를 길러준 어머니의 새 아버지 차울렉 할아버지 이야기. 야콥은 어머니의 역사를 되뇌어 보는 동시에 자기의 유년시절 속의 어머니를 추억한다. 어머니의 유년과 야콥 하인의 유년이 자연스럽게 오버랩되면서 두 사람이 가진 생명의 끈이 이어진다. 어머니의 삶은 자식의 삶으로, 크리스티아네 하인의 역사는 야콥 하인의 역사로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것이다. 죽음이란 것을 우리는 늘 어떤 끊어짐, 끝이란 의미와 연결시킨다. 하지만 죽음이 정말 그런 단절을 뜻하는 것일까. 하나의 죽음은 또 다른 삶으로, 한 세대의 의지가 다음 세대에게로 흘러들며 결국 우리는 어쩌면 영원히 이어지는 기다란 고리를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려 했던 할아버지 요하네스의 의지가 어머니 크리스티아네에게 이어지고, 그리고 다시 야콥에게 이어지는 것처럼.


    "크리스티아네, 여기 와보니 결국은 히틀러가 이긴 것 같아." ~ "네가 말했던 한 때 있었다던 이곳의 재단사, 상인, 상점주인들, 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니? 유대인의 삶은 어디로 모습을 감추고 만 거야? 뛰어 놀던 아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으며 그 엄마들은? 모퉁이마다 모여서 담소를 나누던 노인들은? 그들은 어디에 있니? 그들이 여기 말고 베를린의 어디 다른 곳으로 옮겨 가, 거기서 유대인의 삶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는 거니?"


    어머니가 뭐라고 대꾸할 수 있었겠는가. 오직 침묵할 수 밖에. 이 곳 말고는 베를린의 그 어떤 거리에서도 유대인의 삶의 흔적을 보여줄 수 없으니까.


    "그래서 내가 생각한 거란다. 결국 승리자는 히틀러인 거야."


    마리온이 다시 한 번 말했다. -32p-


    정말일까. 히틀러도 죽고 수 많은 유대인도 죽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역사는 죽었지만 유대인의 역사는 살아 있다. 히틀러의 아이들은 골목길을 뛰어다니지 않지만 유대인의 아이들은 골목길을 뛰어다니고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기도 할 것이다. 홀로코스트를 지나치게 이용해 전쟁을 일삼는 이스라엘의 정치꾼들에게는 혐오를 느끼지만, 고통 끝에 살아 남아 자신들의 문화를 다시 일으키려고 노력하는 보통의 유대인들에게까지 적대감을 보일 필요는 없을 터이다. 야콥의 이야기는 어두운 일제 강점기의 터널을 힘겹게 빠져나온 우리네 어른들의 역사와도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이 있었다. 오늘날 '한국인다움'이란 무엇일까. 우리의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들이 제국으로부터 지키려했던 그 '한국인다움'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야콥은 유연한 사고를 보인다. 요하네스나 어머니의 어머니가 지키려 했던 '유대인다움'의 형식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의지를 이어받는 것이 아닐까. 반드시 유대인의 전통에 따라 결혼식을 올리고, 꼭 코셜 푸드(Kosher food)를 먹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그런 것을 지키려 했던 앞 세대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마음을 이어 가려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야콥은 거시사(홀로코스트) 속에서의 미시사(크리스티아네의 역사)를 이야기함으로써 어머니의 작은 삶이 지니는 의미를 확장시킨다. 야콥 하인의 담백하고 재치있는 문체를 따라 읽어가며 나는 내 어머니의 역사를, 그리고 아버지의 역사를, 또 한국인의 역사를 떠올렸다.

    야콥은 시종일관 목소리를 높이거나, 권위에 찬 지식인의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 없다.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사건으로부터 얻은 깨달음을 고조곤히 풀어놓을 뿐. 덕분에 때론 잔잔히 미소 지으며, 때론 가벼운 서글픔을 느끼며 가랑비에 젖어들듯 이 책을 읽었다. 책장을 덮으면서 나는 마법에 걸린 듯 읊조렸다. 그래, 어쩌면 그곳은 아름다울지도...

    대단한 삶의 철학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엄청난 업적을 가진 위인의 삶을 펼쳐놓지 않아도, 섬세한 문체로 마음을 휘젓지 않아도. 그러지 않아도 이렇게 가만히 젖어들 수 있는 아름다운 소설을 쓸 수 있는 것이었다. 나도 이처럼 가랑비를 닮은 소설을 쓰고 싶어졌다.



    제목: 어쩌면 그곳은 아름다울지도글쓴이: 야콥 하인옮긴이: 배수아펴낸곳: 영림카디널하트 점수: ♥♥♥♥ "난 분명 죽게 되겠죠?"갑작스런 질문이었다. "난 죽고 싶지 않아요. 죽는 건 정말 소름끼쳐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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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썩 듣기 괜찮으면서도, 또 가슴을 살며시 저며 오던 좋은 노래들을 부르던 그룹 '동물원'의 가사를 듣다보면 절로 "아~" 하는 탄식이 나올 때가 있는데요, 그들의 2집에 실렸던 재미있는 노래들 중에는 이런 가사가 있기도 합니다.

    "요즘 사는 게 어때? 글쎄, 그걸 어떻게 말하나-"

    이런 가사였는데. 자, 여기서 한 번 더 물어볼게요. "요즘 사는 게 어때?" 별다른 야심은 없습니다. 요즘 사는 것이 어떤지, 그저 한번 물어보는 것이지요.


    조금은 곤란한가요? 하긴, 이렇게 무책임한 질문이라니. '사는 것'이란 곧 우리의 삶일 지언데, 그것을 저렇게 뜬금없이 물어보는 제가 무례한 것이겠지요.(아, 원죄는 동물원의 동명의 제목을 가진 곡에 돌려야 될까요?) 그럼에도, 우리는 가끔씩 불가항력적으로 '요즘 사는 것'을 고민해 볼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비오는 골목을 우산 없이 뛰어가다가도, 핸드폰을 책상에 두고 온 것을 버스를 탄 후에야 할게 될 때에도, 괜찮은 음식점을 찾아다니기에는 시간이 부족해서 옆에 있는 김밥 집에서 홀로 쫄면을 삼킬 대에도, 그런 남에게 보이기 싫은 일상의 후미진 문틈에서 문득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게 될 때.

    사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본다는 말은 무척이나 이율배반적인 말이지요. 우리가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그렇게나 달달 외웠던 전지적 작가 시점하고 비슷한 것이라서, 갑작스레 내가 마치 '신'이 된 것인 마냥 나 자신의 스펙을 평가하는 겁니다. "얼굴? 솔직히 못생기진 않았는데 경쟁력 있다고는 절대 못하지. 몸매? 관리 좀 해야겠는걸, 이래서야 연애 한번 하겠어? 자산? 언제 이렇게 잔고가 비어버렸지. 가히 절망적인걸. 비젼? 글쎄, 불안할 뿐. 매일 준비하자, 준비하자 하면서도 아직 해둔 것은 하나도 없는 걸." 바로 이런 것이 자신을 객관적으로 본다는 말이에요. 아, 물론 이 예시는 더 내려갈 곳 없는 제 기준에서 작성한 것이니까 여러분들의 그것은 그래도 이것보단 '덜 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 장담하건데, 20 대 80 사회가 확실해 보이는 이 한국의 좁은 마운드에서 "전 그 2할 안에 들어있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몇몇을 빼놓고는 저것과 그다지 많은 차이가 없을 거라 이거에요. 요즘 같이 경기가 어려운 때에 홈런이란 정말 극소수의 운 좋은 이들이나 칠 수 있는 것이지, 사실은 출루하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 한, 말 그래도 어려운 시대 아닌가요?(우울한 시대라고 이야기 하면 정말로 우울해 질까봐 차마 우울한 시대하고는 못 쓰겠네요.)

    첫 소설집 [낭만적 사회와 사랑]부터 가장 근작이었던 소설집 [오늘의 거짓말]까지, 정이현 소설들은 거반 다, 지금까지 위에 쭉- 열거해놓은 모습의 사회, 그러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삶의 이야기 들입니다. 물론 [낭만적 사회와 사랑]에서는 약간씩 비틀어져있는, 살짝 그로테스크한 풍경들을 선보이기는 했지만, 본질적으로 우리의 일상에서 균열이 시작된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의 재현re-presentation의 일종이라 볼 수 있겠고, 그러한 (위악적인) 경향들은 그녀의 장편 [달콤한 나의 도시]부터는 눈에 띄게 옅여져서 최신작 [오늘의 거짓말]에 이르면 과장 없이, 이 시대의 일상으로 침잠해가는, 그 안에서의 균열을 묘사하는 방향으로 승화됩니다. 도시적 삶에서의 균열, 그것은 그녀의 가장 메리트 있는 지점이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단편들에서 부각되는 것이겠고, 오늘 우리가 이야기를 나눌 (그리고 두 소설집의 중간에 위치한) 그녀의 장편 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는 연애, 'ㅇ'자 두 개가 연이어 발음되는 것이 묘한 설레임을 주는 바로 그것, 연애 소설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정이현의 연애 소설이 fancy한 여고생적 상상력으로 가득 찬, 그런 솜사탕(혹은 사탕발림) 같은 이야기들의 향연은 -당연히- 아니랍니다. 자신의 데뷔작에서 과감히 시도했듯이, 정이현이 가장 처음에 들 무기는 누가 뭐래도 '까발리기'가 될 것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까발리기'라는 무기를 들고서, 이제 선택해야지요. 무엇을 까발릴 것인가? 어떻게 까발릴 것인가? 구워삶을 것인가? 확- 벗겨버릴 것인가? 천천히 벗길 것인가? 첫 소설집 [낭만적 사회와 사랑]이 현대 엿어의 자본주의적 욕망을 'cool하게, 대놓고서' 이야기 한 것이 마침 발칙하니, 좋았다면야 [달콤한 나의 도시]의 '까발리기'는 보다 자기고백적이며 또한 그만큼 내밀한 이야기들이 흘러나옵니다. 첫 작품의 위악적은 모습은 그만큼 희미해졌으며, 정이현은 어느새 평범하디 평범한 작중의 주인공 '오은수' 씨와 묘하게 겹쳐집니다.


    "골목은 20대 초반의 아이들로 바글거렸다. 초미니스커트를 입고 길쭉길쭉한 다리를 놀리는 기린 같은 여자애들 사이를 쪼그랑 할망구처럼 헤치며 나아가야 했다. '조심들 해라. 그렇게 높은 굽 신고 돌아다니다가 나중에 무릎관절 다 망가지니까! 암튼 요즘 애들은 겁도 없어.' 투덜대다 말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도 모르게 '요즘 애들'이라는 단어를 자연스레 사용하고 있었다. 발목에 스르르 힘이 빠졌다." / [달콤한 나의 도시], p20


    "서울은 안녕했다. 나만 제외한다면 언제나 안녕한 도시였으므로 별로 놀라울 것도 없었다. 그 한 귀퉁이에 숨겨진 내 작은 방도 어디로 사라지지 않고 거기 그대로 있었다. 전화기는 던져두고 간 대로 이불 속에 파묻혀 있었다. 액정화면에 '부재중전화 10통'이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회사, 김영수, 회사, 회사, 회사...... ...(중략)...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나, 어쩌지? 마음에 대고 가만가만 묻는다. 마음이 반문한다. 넌. 지겹지도 않니?" / [달콤한 나의 도시], p286


    [달콤한 나의 도시]가 [낭만적 사회와 사랑]의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뉘앙스의 소설로 완성되는 가장 큰 변곡점은 이곳, 그녀의 인물들이 '변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전작에서 그녀의 여성들은 자신이 이 사회를 살아가고, 어떤 정상성을 '가장'하기 위하여 한 치의 망설임도 없습니다(그런 그녀들에게 살인 정도는 해볼 만한 일이었지요). 이에 반해 [달콤한 나의 도시]의 '은수'는 그녀들처럼 대범하게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지도 못하고, 그들만큼의 매력을 갖추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는 정도도 무척이나 '노력'해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아는, 그런 서른한 살입니다. 그녀는 종종, 타인의 눈치를 보게 됩니다. 왜, 역시 우리가 고등학교 때 배웠던 롤-모델role-model이라는 단어가 있잖아요. 사회에서는 사회에서 주어진 역할에 맞게, 가정에서는 가정에서 주어진 역할에 맞게. 사회라던가, 가정이라던가, 이러한 크고 작은 조직들이 우리에게 부여해주는 역할에 맞게 사는 것이 고등학교 윤리나 사회시간에 배운 것 마냥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너도 나도 누구나 다 행복해질 수 있는 최적의 마스터플랜을 제공한다면 우리가 굳이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겠지요? 문제는, 그것이 그런 최적의 환경을 조성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간단하게, 그것, 무척 피곤하지 않나요?


    "아침 출근길, 어느 때처럼 지하철은 칙칙폭폭 지루하게 선로를 달리고 있다. 뒤로 가지도, 하늘을 날지도 않는다. 네모난 상자에 빽빽이 들어찬 시든 귤처럼, 혹은 나무궤짝에 겹겹이 줄 맞춰 누운 죽은 갈치처럼 실려 나는 영혼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다. 운 좋게 좌석을 차지하고 앉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이 칸의 승객들 대부분은 인간의 존엄권 수호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공간조차 확보하지 못한 채 그저 견디고 있을 뿐이다. 떠밀리거나 넘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 말고, 지금 여기서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 [달콤한 나의 도시], p50


    몇몇의 남자들이 그녀를 둘러쌉니다. 영화를 찍고 싶어 하는 태오, 마냥 친구 같으면서도 가끔씩 모호한 멘트를 날려대는 재준, 그리고 (그녀보다는 조금 스펙이 낫다 하지만 역시) 평범하기 짝이 없는 김영수. 결혼이 선택이라는 것 정도는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서른한 살 한국의 사무직 여성에게 부여된 롤-모델에 따르면, 그녀가 결혼하지 않은 것은 가족의 안녕과 사회의 평온을 헤치는 죄罪. 굳이 깊이 생각해보지 않는다면야, 반대할 이유도 없고요. 하지만, 롤-모델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 문제는 그것이 그렇게 행복하지 만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은수 씨의 절친한 친구, 재인은 남편과 이혼하기로 한 사실을 털어놓은 뒤, 이야기 합니다.


    "신혼여행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내가 잠깐 졸았었나 봐. 그날 워낙 피곤했으니까. 나도 모르게 옆자리에 앉은 남편 어깨에 기대는 자세가 되었는데, 글쎄 이 남자 제 어깨를 신경질적으로 홱 빼더라. 자기도 힘들었겠지. 그런데 갑자기 소름이 쫙 끼쳤어. 내가 무슨 일을 저질러버린 건지 똑똑히 실감이 난 거야. 난 결혼을 해버린 거야.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는 내 모습을 어릴 때부터 줄곧 상상해왔고, 결혼에 대해서도 남들만큼은 진지하게 고민해온 줄 알았는데, 그동안 결혼에 관한 내 고민은 온통 결혼식 자체에 쏠려 있었단 걸 깨달았어. 정작 결혼식 뒤에 하루하루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온통 깜깜하고." / [달콤한 나의 도시], p284


    9부로 이루어진 [달콤한 나의 도시], 일종의 에필로그인 9부 <정거장, 서울, 2006>을 제외하고, 거의 소설의 말미를 장식한다고 할 수 있을 8부, 그 부분의 제목은 <거의 모든 사랑의 법칙>입니다. 거의 모든 사랑, 바꿔 말하면 대부분의 사랑, 평범한 사랑의 법칙이라 할 수 있을까요. 아니, 어쩌면 그냥 '사랑의 법칙'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조금은 다른 결말의 사랑들도 있기에 여지를 남겨 두었겠지만, 우기가 보고, 들어온 많은 사랑의 결말이 그랬듯, 이 소설에서 역시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남겨집니다. 그렇게, [달콤한 나의 도시]는 그 역시 일종의 cliche임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정직할 따름이지요. 다만, 그렇게 cliche로 치부해버리기에는 또 아쉬운 것이 그녀의 소설입니다. 괜히 작중 인물의 이름이 같다는 것만으로 연상되어 버리는 허진호 감독의 영화, <봄날은 간다>. 그 전작이었던 <8월의 크리스마스>도 그러했지만, 그가 남들보다 더 뛰어난 story-teller이기 때문에, 더 뛰어난 camera-work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좋은 영화를 찍을 수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영화가, 그리고 영화 속의 몇몇 장면들이 정말이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던 것은, 남들이 쉽게 지나쳤던 것, 남들이 그냥 잊고 넘어갔던 삶의 미묘한 터치들. 그는 남들이 한걸음 더 갈 때, 잠시 서서 그 미묘한 바람을 잡아낼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손짓을 우리에게도 온전히 전달해줄 수 있던 것, 그것이 그 비결이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비슷한 연유로 정이현의 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도 그 미묘한 울림이 오랫동안, 오랫동안 유지됩니다. 앞서 언급했듯, 소설 속의 은수 씨, 그 주변의 남자들, 유희, 재인 같은 친구들과 가족들은 작가 정이현이 살아온 날들의 몇몇 달면들로 보입니다. 이것들은 순전히 픽션에 불과하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그러기에 그녀의 인물들은 너무나 섬세하게 다듬어져 있ㅅ브니다. 그렇기에, 그것이 특별하지 않은, 뻔한(혹은 뻔뻔한)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동시에, 그럼에도 깊게 스미는 이야기로 남아버리는 것이지요.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아침 출근길, 어느 때처럼 지하철은 칙칙폭폭 지루하게 선로를 달리고 있다. 뒤로 가지도, 하늘을 날지도 않는다. 네모난 상자에 빽빽이 들어찬 시든 귤처럼, 혹은 나무궤짝에 겹겹이 줄 맞춰 누운 죽은 갈치처럼 실려 나는 영혼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다. 운 좋게 좌석을 차지하고 앉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이 칸의 승객들 대부분은 인간의 존엄권 수호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공간조차 확보하지 못한 채 그저 견디고 있을 뿐이다. 떠밀리거나 넘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 말고, 지금 여기서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 [달콤한 나의 도시], p50


    몇몇의 남자들이 그녀를 둘러쌉니다. 영화를 찍고 싶어 하는 태오, 마냥 친구 같으면서도 가끔씩 모호한 멘트를 날려대는 재준, 그리고 (그녀보다는 조금 스펙이 낫다 하지만 역시) 평범하기 짝이 없는 김영수. 결혼이 선택이라는 것 정도는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서른한 살 한국의 사무직 여성에게 부여된 롤-모델에 따르면, 그녀가 결혼하지 않은 것은 가족의 안녕과 사회의 평온을 헤치는 죄罪. 굳이 깊이 생각해보지 않는다면야, 반대할 이유도 없고요. 하지만, 롤-모델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 문제는 그것이 그렇게 행복하지 만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은수 씨의 절친한 친구, 재인은 남편과 이혼하기로 한 사실을 털어놓은 뒤, 이야기 합니다.


    "신혼여행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내가 잠깐 졸았었나 봐. 그날 워낙 피곤했으니까. 나도 모르게 옆자리에 앉은 남편 어깨에 기대는 자세가 되었는데, 글쎄 이 남자 제 어깨를 신경질적으로 홱 빼더라. 자기도 힘들었겠지. 그런데 갑자기 소름이 쫙 끼쳤어. 내가 무슨 일을 저질러버린 건지 똑똑히 실감이 난 거야. 난 결혼을 해버린 거야.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는 내 모습을 어릴 때부터 줄곧 상상해왔고, 결혼에 대해서도 남들만큼은 진지하게 고민해온 줄 알았는데, 그동안 결혼에 관한 내 고민은 온통 결혼식 자체에 쏠려 있었단 걸 깨달았어. 정작 결혼식 뒤에 하루하루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온통 깜깜하고." / [달콤한 나의 도시], p284


    9부로 이루어진 [달콤한 나의 도시], 일종의 에필로그인 9부 <정거장, 서울, 2006>을 제외하고, 거의 소설의 말미를 장식한다고 할 수 있을 8부, 그 부분의 제목은 <거의 모든 사랑의 법칙>입니다. 거의 모든 사랑, 바꿔 말하면 대부분의 사랑, 평범한 사랑의 법칙이라 할 수 있을까요. 아니, 어쩌면 그냥 '사랑의 법칙'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조금은 다른 결말의 사랑들도 있기에 여지를 남겨 두었겠지만, 우기가 보고, 들어온 많은 사랑의 결말이 그랬듯, 이 소설에서 역시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남겨집니다. 그렇게, [달콤한 나의 도시]는 그 역시 일종의 cliche임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정직할 따름이지요. 다만, 그렇게 cliche로 치부해버리기에는 또 아쉬운 것이 그녀의 소설입니다. 괜히 작중 인물의 이름이 같다는 것만으로 연상되어 버리는 허진호 감독의 영화, <봄날은 간다>. 그 전작이었던 <8월의 크리스마스>도 그러했지만, 그가 남들보다 더 뛰어난 story-teller이기 때문에, 더 뛰어난 camera-work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좋은 영화를 찍을 수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영화가, 그리고 영화 속의 몇몇 장면들이 정말이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던 것은, 남들이 쉽게 지나쳤던 것, 남들이 그냥 잊고 넘어갔던 삶의 미묘한 터치들. 그는 남들이 한걸음 더 갈 때, 잠시 서서 그 미묘한 바람을 잡아낼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손짓을 우리에게도 온전히 전달해줄 수 있던 것, 그것이 그 비결이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비슷한 연유로 정이현의 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도 그 미묘한 울림이 오랫동안, 오랫동안 유지됩니다. 앞서 언급했듯, 소설 속의 은수 씨, 그 주변의 남자들, 유희, 재인 같은 친구들과 가족들은 작가 정이현이 살아온 날들의 몇몇 달면들로 보입니다. 이것들은 순전히 픽션에 불과하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그러기에 그녀의 인물들은 너무나 섬세하게 다듬어져 있ㅅ브니다. 그렇기에, 그것이 특별하지 않은, 뻔한(혹은 뻔뻔한)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동시에, 그럼에도 깊게 스미는 이야기로 남아버리는 것이지요.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빗속은 생각보다 아늑하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팔을 앞뒤로 흔들며 걷는다. 버스 정류장에서 발을 멈춘다. 저녁의 정거장, 길들은 여러 갈래로 뻗어 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다만 가장 먼저 도착하는 버스에 무작정 올라타지는 않을 것이다. 두 손을 공중으로 내밀어본다. 손바닥에 고인 투명한 빗물을 입술에 가져다 댄다.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서울의 맛이다." / [달콤한 나의 도시], p441


    다시, 첫 번재 질문으로 돌아와봅시다.(원죄는 동물원에 있으니까요.) "요즘 사는 게 어때?" 뭐 별 수 있나요. 또 한 번 쩔쩔 매겠지요. 요즘 사는 게 어떻냐고? 아니, 그걸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 있나.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설명하기 힘들어. 하지만 과연, 그것뿐일까요? 이것은 아주 개인적인 생각일 수도 있겠지마는, 저 짧은 질문에 우리가 당황해하는 것은 사실, 우리 삶이라는 것이 그렇게 남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잘- 살고 있지는 못하기 때문 아닌가요. 그저, 나 요즘 조금 힘들다고. 마음먹은 대로 일이 풀려가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이러면 괜히 밑 보일 것 같아서. 내 바닥까지 드러낼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우리가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이라는 것이 겨우 "글쎄, 그걸 어떻게 말하나" 인걸까요. 오늘 하루를 정리하며, 연애소설 치고는 조금 길기는 하지만, 정이현의 소설을 펼치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나와 비슷하기도, 아니면 조금 다르기도 한 그녀. 은수 씨와 그녀의 친구들, 그녀의 달콤한(혹은 쌉싸름한) 도시에 잠시 들르기로 하지요. 속 깊은 그녀의 고민도 들어주고, 내 고민들도 터놓고 이야기 하다보면, 어느새 밤이 샐지도 모릅니다.


    썩 듣기 괜찮으면서도, 또 가슴을 살며시 저며 오던 좋은 노래들을 부르던 그룹 '동물원'의 가사를 듣다보면 절로 "아~" 하는 탄식이 나올 때가 있는데요, 그들의 2집에 실렸던 재미있는 노래들 중에는 이런...
    ☆☆☆☆☆ | 달콤한 나의 도시, 정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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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략)... 나는 셋방이 물에 잠겨가는데 무슨 짓인가 싶었다. 빗물은 어느새 무릎가지 차 있었다. 나는 피아노가 물에 잠겨 가고 있다는 걸 깨달앗다. 저대로 두다간 못 쓰게 될 게 분명했다. 순간 '쇼바'를 잔뜩 올린 오토바이 한 대가 부르릉- 가슴을 긁고 가는 기분이 들었다. 오토바이가 일으키는 흙먼지 사이로 수천 개의 만두가 공기 방울처럼 떠올랐다 사라졌다. 언니의 영어 교재도, 컴퓨터와 활자 디귿도, 아버지의 전화도, 우리의 여름도 모두 하늘 위로 떠올랐다 톡톡 터져버렸다. 나는 피아노 뚜껑을 열었다. 깨끗한 건반이 한눈에 들어왔다. 건반 위에 가만 손가락을 얹어보았다. 엄지는 도, 검지는 레, 중지와 약지는 미 파. 아무 힘도 주지 않았는데 어떤 음 하나가 긴소리로 우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중략)... 사내의 몸에서 만두처럼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빗줄기는 거세졌다 잦아지길 반복하고, 검은 비가 출렁이는 반지하에서 나는 피아노를 치고, 발목이 물에 잠긴 채 그는 어떤 꿈을 꾸는지 웃고 있었다." / [침이 고인다] 中 <도도한 생활>, p41~42

    그녀의 선택은 분명합니다. '셋방이 물에 잠겨가고', '언니의 예전 애인이 술에 취해 현관에 쓰러져'있는,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김애란(의 인물)은 피아노를 치기 시작합니다. 그 것이 실제로 피아노를 치는 행위를 담보하는 지, 혹은 그녀의 '환상'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집니다. 이제 '그녀의 첫 이야기' 즉, 새로운 '주체'로서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어떤 뛰어넘음 -초월-입니다. 그녀가 도달한 공간은 '구조화' 되어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 그 곳은 '환상/상상'을 매개하여 건너갈 수 있는 차원입니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참을 수 없는 식욕을 느끼는' <칼자국>의 그녀도, '예전에 동경하던 학교 선배의 빈 집을 찾는' <네모난 자리들>의 그녀도, 김애란의 인물들은 이제 '다음'으로 넘어가는 통로에 접속합니다. 이전의 '배치'에게 그녀는 '안녕'을 고합니다. 물론 그 것은 완전한 '단절'이 아닌, 그녀를 짓누르던 '억압'을 넘어서려는 첫 시도입니다. 이로서, 김애란의 identity는 좀 더 확실해집니다. '환상'을 경유하여 '극복'으로. '대차자의 욕망'에서 벗어나, '향유'로. 그 것이 그녀의 전략이 아닐까요? 도회적 공간을 '환유적 이미지'의 연쇄로 표현해내는 그녀의 문체는 인물들과 '환상/상상'을 경유한다는 점에서 역시 놓칠 수 없습니다.

    "열차는 눈먼 물고기처럼 인천을 빠져나와 북쪽으로 달려갔다. 나는 노선도를 올려다보며 역사(驛舍)의 수를 꼽아보았다. 인천에서 의정부까지 50여 개의 역이 있고, 영등포와 신길, 종로를 지나면 서울 북쪽 어딘가에 내 방이 있다. 노선표의 불빛이 깜박거렸다. 자그마한 플라스틱 전구 위로 종착역까지는 녹색 불이, 이미 지나간 역 위로는 빨간 불이 켜졌다. 도시의 이름을 가진 점과 그 사이를 잇는 직선, 나는 그것이 카시오페이아나 페르세우스, 안드로메다라 불리는 이국 말로 된 성좌처럼 어렵고 낯설었다. 내가 모르는 도시의 별자리. (후략)..." [침이 고인다] 中 <자오선을 지나갈 대>, p117


    한 장, 한 장, 한 글자라도 놓칠 새라 가벼이 읽지 않고 넘겨간 페이지가 쌓이다 어느새 '마지막'이 다가옴을 느낄 때, 그 '동요'하는 마음을 놓치기 싫어서. '진동'을 그렇게 손쉽게 놓을 수 없어 조금씩- 조금씩 천천히 한 행, 한 행을 읽어나가다가 결국 더 이상 읽어 갈 글자 없이, 빈 공간을 만나게 되었을 때. 가슴 한 구석도 따라 비워져, 허한 마음을 감출 길 없어 그저 눈을 감고 몇 분이고, 누워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다 이내, 다시 한 번 책의 앞 장을 펼치고서. 그녀의 소설을 읽고 있자면, 조금씩 몸이 떠오릅니다.
    "(전략)... 나는 셋방이 물에 잠겨가는데 무슨 짓인가 싶었다. 빗물은 어느새 무릎가지 차 있었다. 나는 피아노가 물에 잠겨 가고 있다는 걸 깨달앗다. 저대로 두다간 못 쓰게 될 게 분명했다. 순간 '쇼바'를...
    ☆☆☆☆☆ | 김애란, 침이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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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애란과의 첫 만남은 그녀의 첫 소설집이었던 [달려라, 아비]에서였지요. 짧지도, 길지도 않은 단편들의 모음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소설은 <편의점에 간다>, 그리고 <노크하지 않는 집>이었습니다. 책 뒤에 붙어있던 어떤 비평가의 말마따나, 아비투스Habitus, 어떤 동질화된 취향으로서의 주체, 일상에서의 예기치 못한 작은 균열에서 어렴풋이 주체의 지워짐을 인식하게 되는 그녀들의 서사가 흥미로웠습니다. 무의식적으로 육체에 '각인'된 근대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Fiction의 형식으로서 녹여내는 솜씨가 무척이나 노련했습지요. 요컨대, 그녀의 cynical함에 꽃혔달까요?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제 머릿속 어딘가로는 분명 'rookie'라는 영단어가 빙빙 돌아다녔습니다. 동시에 전 열렬히 그녀의 그 다음 작(作)을 기다리게 되었지요.

    운수 좋게도, 두 번째 만남 역시 그다지 먼 곳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즐겨 보던 계간지, [창작과 비평]에 그녀의 단편이 실렸던 것이지요. <베타별이 자오선을 지나갈 때, 내게>라는 다소 긴 이름의 작품.(한참 뒤의 이야기지만, 이 단편은 <자오선을 지나갈 때>라는 다소 짧아진 제목으로 두 번째 소설집에 실리게 됩니다.) synopsis라 하면 -딱히 여유는 없는 삶을 살아가는 한 대졸 여성의 재수 시절에 대한 회상- 이라는 한 문장, 아주 간단하게 요약 할 수도 있는 노릇이지마는, 노량진을 경유하는 지하철 1호선에 대한 지극히 상상적인 묘사, 공들여 쓴 흔적이 역력한 '재수생'의 다층적인 감정이 담담하게 녹아있는 대사들, 또한 다소 비극적인 상황도 comedy적인 요소로서 치환시키는 잘 익은 위트까지. 그래서인지, 무엇보다 방금 뽑은 커피마냥 따스한 것이 일품이었지요. [달려라, 아비]를 읽으면서 catch하지 못했던 김애란의 다른 조각들은, 또 그 나름의 맛이 담뿍= 배어 있었지요. 첫 소설집보다 한층 푸근해진 톤에 매료된 저는,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해 -마치 습관적으로 일회용 커피 뽑아먹듯-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읽었습니다. 동시에 기다렸습니다, 그녀의 다음을.

    시간은 파노라마처럼 흐르고, 그 동안 몇 번의 가을과 겨울, 봄, 그리고 여름이 지나(어느새 입대를 하고) 해마다 태오난 곳을 다시 찾아오는 연어처럼 가을이 무사히- 찾아왔을 무렵. 이제는 제법 신산해진 공기가 생경한 어느 아침, 창가에 앉아 무심히 신문을 보던 저는 갑작스레 멍-해졌습니다. 그녀의 신작(新作)! 그 잠깐 동안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오고갔을까요. 잊고 있던(하지만 삼삼했던) 옛 고등학교 동창을 만날 것처럼, 가슴 한켠이 주체할 수 없이 설렜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곧 책을 구입할 기회가 생겼고, 책이라는 것에 가격이 매겨져있다는 것이 괜히 낯설어져서, 이 것 뭔가 굉장히 수상한 것이 아닌가? 하고 갸웃거리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이미 눈에 들어온 책, 놓칠 수 없다는 심정으로, 가장 처음 마음먹었던 것처럼 미련 없이, 아주 미련 없이 책을 계산했습니다. 적요(寂寥)한 밤, 종일 지켜간 몸이 겨우 후미진 공부방 구석에 혼자만의 공간을 꾸릴 때, 그때서야 책을 읽어갈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피식- 하고 웃으며, 때로는 살짝 눈시울이 젖어감을 감지하며.

    쌉싸래한 9월 하순, 그녀의 갓 나온 작품집 [침이 고인다]는 지금까지 그녀가 가지고 있던 달란트들, 이를테면, 담담한 일상에서 빼죽하니 튀어나와 있는 틈새를 포착해내는 영민함, 건조하며 남루한 도시의 삶을 상상적인 차원으로 승화시켜내는 작법, 늘 주변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는다면 건져 올릴 수 없는 생기 있는 대사들까지, "난 어느 하나 소모된 것 없다"고 가볍게 검지를 흔드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아니, 오히려 그녀는 좀 더 내밀해지고, 한 문장 한 문장 공손하게 다듬어왔으며, -꼭 그 것에 대한 보상은 아닐지라도- 그래서 더 높은 곳에서, 더 멀리까지 내다보게 된 것 같습니다. 첫 작품집의 표제작이었던 <달려라, 아비>등의 단편에서 가늘게 내비쳤던, 남성 부재(不在)의 가족 서사는 더욱 '여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진화합니다.(이는 젊은 여성들로 구성된 가족이 아닌, 어미-자식의 구성입니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이 전략은 흔히 feminine하다고 부르는 요소들에 대한 소멸로 나아갑니다. 여성에 대한 '상징적인' 오해 -혹은 기표- 들이 제거되는 가운데 강조되는 지점은 '어미'로서의 생명력을 지닌 여성이지요.) 그녀의 인물들은 이전보다 더욱 구체적으로 '도회적 동일성'의 늪에 포획된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낮은 곳으로 임한 것일까요, 그녀의 인물들은 전작들에 비해 더욱, 경제적 약자가 되어있습니다. 화폐적 불평등이 전제된 가운데, 가난한 자들의 욕망은 그 자신에게 반드시 결핍/부재로서 되돌아오게 되지요.(자본주의에서라면, 이는 경제적 능력과 관계없이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요.) 그러한 결핍에서 유래되는 피로감, 씻어낼 수 없는 고독은 <도도한 생활>, <성탄특선>, <자오선을 지나갈 때>, <기도> 등 단편집 전반을 통틀어 대부분의 작품에서 섬세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주체가, 타인의 욕망에 의하여 규정되고 작동하게 되는 메커니즘. 가끔씩, 우리가 '모든 것을 낯설게' 느끼는 것은 이런 구조화된 틀 속에서 '나도 모르는 새/문득' 균열을 목격하곤 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상징적 구조란 사실 '피곤'한 것이니까요. 뜻하지 않은 실재와의 조우(遭遇), '분열증'이 시작되는 곳은 이 지점입니다. 하지만, 그 '조우'에서 Cut을 외쳤던 전작 [달려라, 아비]의 경우와는 다르게, 김애란은 그 지점에서 몇 발자국 더 걸어 나갑니다. 작품집의 가장 첫 소설, <도도한 생활>의 마지막 부분을 잠시 인용하자면,

    - (2)에 계속
    김애란과의 첫 만남은 그녀의 첫 소설집이었던 [달려라, 아비]에서였지요. 짧지도, 길지도 않은 단편들의 모음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소설은 &lt;편의점에 간다&gt;, 그리고 &lt;노크하지 않는 집&gt;이었습...
    ☆☆☆☆☆ | 김애란, 침이 고인다
  7. 바쁘고 급변하는 디지털 세상의 삭막함 때문일까?
    시를 읽는 사람이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예전엔 봄 가을마다 문학의 밤이다 시 낭송의 밤이다
    시를 접할 기회가 참 많았다.

    그 시절, 시인이라하면 괜히 근사해 보였고 한번쯤
    문학소년 문학소녀 인 척 누구나 시인을 동경했다.
    그래서 누구나 시집 한권 쯤은 품고 다녔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시집을 들고 다니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나부터도 대중문화에 관심이 지대해진 후 문학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시들해진 것이 사실이다.


    정말 시가 읽혀지지 않는 세상이다. 그런데 세상엔 시가 넘쳐나고 시집이
    범람하니 참 묘한 시절이다.

    속된 말로 '강남엔 한집 건너 시인 아닌 아줌마가 없다'는 황당한 소문이
    떠돌만큼 주변엔 시인들이
    참 많다.

    시와 멀어질 만큼 내 감성이 메마른 것이니 누굴 탓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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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뭘 말하려고 이리도 장황설이 길까^.^

    나는 지금도 시집을 모으고 있다. 특히 예쁜 표지의 시집을 보면 가지고 싶어 환장을 한다.

    물론 내가 수집하고 있는 시집은 좀 특이하다.

    가수라는 직업을 가진 시인에 한정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시가 대중가요로 노래화된 시인의 시집에도 관심이 많다.

    우리가 아는 대중가요 중에도 사실은 시가 노래로 변한 경우가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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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타켓은 김소월이다. 그의 시집은 벌써 10여권을 모았다.

    국민시인인 김소월의 50-60년대 시집은 표지가 고색창연하고 참 예쁘다.

    단지 그것 때문에 주요 수집 타켓으로 삼았을까?

    아니다. 그의 많은 시는 오래전 부터 대중가요로 변신해 사랑받고 있기에

    대중문화 특히 음악쪽에 관심이 지대한 내겐 진정 매력적인 콜렉터스 아이템이 아닐 수 없다.

    '개여울''초혼''산유화''진달래꽃''부모''예전에 미쳐 몰랐어요''먼 후일''엄마야 누나야' 등등은

    모두 대중가요로 변신한 김소월의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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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래를 작사하고 작곡하는 사람들을 흔히 싱어송라이터라 한다.

    노래에 있어 가사말의 중요성은 말한다는 것 자체가 새삼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가수들 중에는 단순한 작사의 수준을 넘어 아름다운 시적인
    가사말을 발표한 사람이 참 많다.

    그 중 시집까지 낸 가수도 상당수다.


    대중가수로 최초의 시집을 발표한 사람은 70년대 혼성듀엣 전성시대를
    주도한 '뚜아에무아' 출신 이필원씨다.

    70년대 중반에 이미 그는 시집 ‘바람꽃’을 냈고 시노래를
    주 레퍼토리로 삼았던 동명의 포크록 그룹 ‘바람꽃’의 리더로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지난 해 그는 두 번째 시집 '내 영혼이'을
    발표해 주목 받았다.


    중가수 중 시집을 낸 사람은 또 누가 있을까?

    이필원의 파트너였던 박인희 그리고 김현식, 조동진, 정태춘,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 임지훈, 조성모, 정형근,

    구자형, 백창우, 김현성 등등 꽤 많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가수들의 시집만도 상당수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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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담 영화배우 중에 시집을 낸 사람은 없을까?

    이에 대한 호기심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난 단 한편의 영화배우 시집을
    수집하지 못했다.

    인터넷을 검색해도 영화배우 시인에 대한 정보가 꽝이어서 없다고
    단정하고 관심권 밖에 두었다.


    헌데....이럴수가!!! 있다. 시집을 낸 우리나라 배우가 있다.

    오랫만에 검색을 다시해 보니 2002년 3번째 시집
    <많은 날들이 지나갔다>(새로운눈刊)을 발표했던 배우가 있다.

    ‘백학기’라는 남자배우다.

    그는 배우가 되기 전 지방신문사와 KBS에서 일했고, 마흔을 넘긴 나이에
    영화배우가 되기 위해
    '그 좋은 직장'을 집어치운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이채로운 건 그가 이미 21년 전에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시인이라는
    사실이다.

    향후 그의 운명을 사전에 예고라도 한 듯 데뷔작의 제목이
    '삼류 극장에서 닥터 지바고를'이었단다.


    솔직히 영화배우로서 백학기는 이름도 생소하다.

    임종재 감독의 영화 <스물 넷>에 등장하는 그의 캐랙터는 차갑고,
    비열하고, 냉소적인 이미지다.

    그는 영화 속에서 나이 어린 프로그램 보조진행자에게 출연을 미끼로 몸을
    요구하는 악질 PD로 분했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면서도 어떤 욕망도 혹은, 득의 만만도 보여주지
    않는 허한 눈빛.

    비록 조연이었지만 캐릭터 소화력이 훌륭했고, 연기도 좋았다고 한다.

    그는 2006년 최근에도 배창호감독의 영화 길에도 출연했다.

    그렇담 그가 유일한 배우출신 시인일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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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백학기라는 배우가 시집을 냈다는 사실 또한 새롭게 알게되었다.

    이렇게 장구한 수다를 늘어놓고 있는 것은 오늘 내 품 안으로 살포시 안착한

    또 한 명의 영화배우 시집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평범한 대중도 인지할 수 있는 왕년의 유명 여배우다^.^


    근데 내 나이만큼이나 나이를 먹은 시집이다.
    주인공은 너무도 유명한 엄앵란이다.

    그가 숙명여대를 졸업한 한국 최초의 학사출신 여배우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1962년에 ‘사색의 구름다리’라는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했다는
    사실은 정말 몰랐다.

    주위의 영화전문가들에게 문의해도 금시초문이란다^.^


    그런데 몬드리안의 그림과 흡사한 근사한 표지 디자인을 뽐내는

    그녀의 시집은 인기가 좋았나 보다. 무려 3판까지 찍어낸 것을 보면.

    시집 속엔 모두 61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그 중 속편에 들어있는 한 편의 시가 눈에 박혀온다.

    제목은 <마리린. 몬로>다.

    한번 감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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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린. 몬로]-엄앵란 작시


    그 숫한 부귀도 영화도

    몬로 당신을 기쁘게 하지는 못했구료.


    [헐리욷]의 여왕님 처럼

    꿈속에 살았어도 종내 목숨을 버린

    몬로 당신은 아메리카의 비극입니다.


    오늘도 [헐리욷]과 우리 서울은

    아무 일 없이 소란 속에 돌아 가지만

    한 여자가 죽어 갔다는 신문보도가

    어쩐지 큰 고독을 싣고 옵니다.


    몬로

    한국 땅에도 다녀 갔던 인기 배우 [몬로]

    [마리린. 몬로] 그대는

    나에게 한줄의 슬픈

    시를 쓰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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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속 엄앵란 프로필과 사진



    어떤가?!

    흠모했던 세계적 여배우를 떠나보낸 먼 이국땅 한국 여배우의 마음이
    참 예쁘기만 하다.

    오늘 엄앵란 그녀가 내게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의 시집은 혹시 최초의 한국 영화배우 시집이 아닐까 하는
    기대 속에 내 보물창고로 모셨다^.^


    노랫말을 지어야 하는 싱어송라이터 가수들이야 시집을 낼
    환경적 요인이 충분하다고 생각되지만

    영화배우의 경우는 그렇지 않기에 배우 시인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최초의 시인가수인 이필원보다 10여년 앞서 근사한 시집을 낸
    여배우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정말 놀랍고 새롭다.


    과연 엄앵란 그녀가 한국 최초의 영화배우 시인일까?

    1962년 이전에 발표된 또다른 배우의 시집이 발견되기 전 까지는

    그녀는 그렇게 기록될 자격이 충분할 것 같다.

    그러고보니 97, 98년에 연속으로 발간했던 그녀의 자서전 성격의 수필집이
    기억난다.


    아무리 각박하고 시 한 편 읽을 여유가 없는 디지털 세상일지라도

    그래도 오늘 낡아빠진 엄앵란 그녀의 시집 한 권이 내 마음에 따뜻함을
    선사했다.

    바쁘고 급변하는 디지털 세상의 삭막함 때문일까?시를 읽는 사람이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예전엔 봄 가을마다 문학의 밤이다 시 낭송의 밤이다 시를 접할 기회가 참 많았다. 그 시절, 시인이라하면 괜...
    ☆☆☆☆☆ | 가슴네트워크, 시집, 여배우

  8. 여느 때처럼 하릴없이 인터넷의 바다를 떠다니던 서퍼보이 M씨는 갑자기 힘이 빠졌다. '그래도 그림은 쫌만 더하면 한승희가 될 수 있겠는 걸?', '간간이 등장하는 나레이션들도 신선함은 떨어지지만 꽤 감각적이잖아?' 빈약한 주제의식에 투덜거리던 자신을 나름대로 위로하며, 그녀의 작품들을 읽어나가던 M씨로 하여금 이빈이란 작가에게서 완전히 정을 떼게 만든 그 만화. "G-I-R-L-S"가 어느 웹페이지의 청소년에게 권하는 만화 목록의 맨 처음에 떠억 하니 놓여 있었던 것이었다. 몇 달 전 지하철에 앉아 그 책을 읽던 때의 불쾌함이 한꺼번에 다시 몰려오고 있었다.

    과장되지도 걸러지지도 않은 생생한 여고생들의 일상을 볼 수 있다는 찬사를 받고 있던 그 작품에는 - M씨의 기억에 따르면 분명 - 결코 추천될 수 없는 아니, 추천되어서는 안 될 빌어먹을 에피소드가 포함되어 있었다.

    출석부로 학생의 뺨을 후려치고, 반이 떠들썩하다고 반장을 구타하던 윤리 선생이 병원에 입원한 자신을 찾아온 옛 제자에게 "나에게 찾아 올 시간이 있으면 검정고시라도 쳐서 고교졸업자격을 취득하라"고, "아이의 가정환경 조사자료에 어머니의 학력을 중졸로 기록하게 할꺼냐"며 언성을 높이는 대목에서 등장인물들은 모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그걸 바라보는 M씨의 입가에서는 어제 먹은 밥알이 곤두서는 역함을 참지 못한 채, 식도를 거꾸로 넘어온 냄새나는 신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 이제 이 만화의 가르침을 똑똑히 들어라. 식사 중에 똥 얘기를 예사로 늘어놓던 비위강한 M씨의 속을 단번에 뒤집어 놓은 이빈의 파워풀한 걸작 [Girls]의 메시지에 귀 기울여라.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세상의 형편없는 어머니들이여, 모두 부끄러워하라. 자식을 쪽팔리게 하는 당신의 일자 무식과 결코 검정고시 이외에는 해결책이 없는 당신의 현격한 부모로서의 자질부족을 절감하라. 그리고,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우리의 귀여운 여학생들에게 꼭 일러둘 말이 있다. 참아라. 견뎌라. 네게 강요되는 수많은 비합리와 네게 행사되는 끝없는 폭력은 모두 널 위한 것. 무조건 참아라. 끝까지 견뎌라. 그곳을 졸업하지 못하면 넌 애시당초 좋은 부모가 되기는 그른 것이니. 자나깨나 너희의 졸업만을 생각하셨다던 그 선생님이 왜 두발을 단속하고, 복장을 단속하고, 공장에서 찍어낸 인형처럼 학생들을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려해서 너희들이 학교로부터 도망치고 싶게 만들었는지 따위는 궁금해 마라. 왜 쉬는 시간에마저 만화책과 대중음악이 금지되는 - 교양은 없고 지식만 있는 - 전인교육으로 너희들을 숨막히게 만들었는지 따위는 따지지 마라.

    다 철없던 우리를 위해서였다는 한마디에 감동해라. 속 깊은 선생님의 따스한 폭력에 그저 머리를 조아려 감사해라. 우매한 대중을 계도하겠다며, 제멋대로 자르고 붙이며 예술을 재단하려는 심의에 동의해라. 아직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이르다며, 저급한 의식 수준의 국민들을 향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총질하던 군사독재정권의 당위성을 인정해라. 국가를 절대절명의 위기로 몰고 갔을지도 모르는 수많은 혼란의 위험들로부터 어린 백성을 구출해주었던 모든 사회적 폭력 앞에 무릎 꿇어 경배하라. 그들이 이룩한 진보와 발전의 눈부신 이 세상을 보라.

    본디 질시와 투기가 심한 우리 여인네들을 그나마 도덕적인 존재로 유지시켜 주었던 칠거지악의 가르침을 숙지하고, - 남들 보기에 - 화목한 가정을 위해 여자와 북어는 사흘에 한번씩 두드려 패야한다던 우리 아버님들의 혜안에 탄복하라. 당할 때는 불만스럽겠지만 지나고 나면 모두 우리를 위한 것. 그때는 알 수 없었던, 그 기분 나쁜 귀싸대기 뒤에 숨어 있던 깊은 사랑을 느끼며, 우리가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었을 때, 우리 역시 우리의 아이들에게 우리가 만든 기준을 강요하며 우리가 받았던 광폭한 사랑을 그대로 되돌려 주어라.

    어떤 경우에는 폭력도 정당화 될 수 있다?

    자신이 세워놓은 기준에 맞춰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는 자를 낙오자로 규정짓고, 폭력을 행사해서라도 - 형식적으로라도 - 그 기준에 도달하는 학생을 만들려하던 윤리 선생의 작태는 자신의 가치 기준이 결국 옳을 거라는 근거 없는 아집과 속이야 어떻건 일단 세상이 보기에 그럴듯한 겉모양의 제품을 양산하려는 빛나는 장인정신의 소산일 뿐이다. 물론 비열한 것은 비단 그만이 아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우연히 자리하게된 동창생들과의 만남에서 M씨는 분명히 보았다. 고등학교 3학년 당시, 아이들을 개 잡듯 하던 옆 반의 담임과 매 한번 들지 않던 자신의 담임을 비교하며 "왜 자신의 담임은 옆 반 담임처럼 자신을 패지 않았었냐"며 좀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 탓을 그에게 돌리던 개새끼(아니, 개년이라고 해야하나?)를 M씨는 분명히 보았다. 이건 차라리 새디스트와 메저키스트의 환상적인 조화였던 것이다.

    M씨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Girls] 같은 책이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이 아니다. 어느 잡지의 인터뷰에서 "한 컷 한 컷을 아트(art)처럼 그리고 싶다"는 멋진 멘트를 날리던 작가가 M씨의 헛소리 따위에 기분 상하기를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작가는 '난 그저 현실을 그렸을 뿐이야~'라고 천연덕스럽게 대꾸 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그것이 결코 감동적이거나 추천 받을 만한 현실이 아니었다는 데 있었다.

    여느 때처럼 하릴없이 인터넷의 바다를 떠다니던 서퍼보이 M씨는 갑자기 힘이 빠졌다. '그래도 그림은 쫌만 더하면 한승희가 될 수 있겠는 걸?', '간간이 등장하는 나레이션들도 신선함은 떨어지지만 꽤 감각적...
    ☆☆☆☆☆ | G, Girls, 고장난 프리즘, 만화
  9. [프린세스 안나]

    - M | 2004/03/22 18:00

    [프린세스 안나]

    - M | 2004/03/22 18:00


    [프린세스 안나] 앞 - 유년의 끝


    "길고 어두운 마루의 끝에는 반쯤 말라버린 넓은 잎을 가진 식물의 화분이 놓여 있고 닫지 않은 좁은 창으로 희미한 빛이 들어오고 있다. 오랫동안 수리하지 않아 마루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고 금이 간 벽돌담 위로는 야생으로 자란 강낭콩과 담쟁이가 쓸쓸한 바람에 흔들린다. 마루의 끝을 돌아서면 그 곳은 정말 빛이 들지 않는 모퉁이다. 자라난다는 것은 그런 모퉁이를 소리 없이 돌아서는 것과 같다. 찬란한 오후의 마지막 진한 햇빛은 어두운 마루의 음울 속으로 가라앉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좁은 창가의 화분은 천천히 시들어버린다." - [프린세스 안나] 중


    그들은 왜 내게 떠나야만 한다고 했을까

    또래의 아이들보다 키가 무척 작은 아이. 여기저기 집들뿐인 그 넓은 동네에 친구라곤 하나뿐. 그리고, 어느 해 여름인가... 웃으며 바닷가로 떠났던 아이의 친구는 돌아오지 않았어. 마당에 있던 앵두나무를 좋아하고, TV프로그램이라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막힘없이 외워대던 아이. 제 키만한 알루미늄 배트를 휘두르며 혼자 홈런! 홈런! 외쳐 대더군. 50원짜리 동전 하나만으로도 작은 손엔 가득, 채 몇 분도 안 되 다시 나올 오락실을 신이 나서 달려가던 아이. 빠-다-다-당- 골목 가득 흰 연기를 내뿜으며 달려가는 소독차 뒤로 손 흔들며 뛰어 사라져버렸어.....

    소년이여, 울지 말기를. 기대는 적을수록 좋은 것. 키만큼이나 속이 깊은 꺽다리 친구 하나. 덩치만큼이나 마음이 넓은 뚱땡이 친구 하나. 그 외엔 모두 스쳐보낼 것. 설령 그들이 널 잊어도 네가 잊은 많은 걸 생각해낼 것.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들이 전부는 아닌 걸. 진정 소중한 것들을, 잃으면 되찾을 수 없는 것들을, 꼭 잡고 있을 것. 그리고, 그 무엇보다 너를 지킬 것.

    어른이 되고싶지 않더라도, 쓰러지지 말기를. 사는 것은 항상 힘들어만 지는 것. 숨이 가쁘면 잠시 쉬어가는 걸, 앞이 보이지 않으면 뒤를 보는 걸, 기억하기를. 삶에 마지막이란 없는 것. 설령 그대 영원을 믿지 않을지라도 소중함은 알아둘 것. 설령 그대 돌아갈 수 없을지라도 지워버리지는 말 것.


    잃어버린 건 나

    힘들었었니. 내가 널 떠나 있던 동안. 그냥 가 버리지 그랬니. 그렇게 아팠으면서. 왜 넌 조금도 변하지 않았니. 네겐 소중했나봐... 일곱 살의 봄이었던가. 새 인형을 얻기 위해 마당에 묻어 버렸던 더러운 헝겊 인형을 넌 여전히 가슴에 안고 있었어.

    한 살 또 한 살 나이를 먹어 갈 때마다 넌 조금씩 슬퍼 보였어. 내 키가 자랄 때마다 이상하게 넌 자꾸 작아져 갔어. 내 얼굴에 화장이 짙어질수록 너는 창백해졌어. 그렇게 야위어 갔어. 노란 가로등 아래 처음 입 맞추던 날, 넌 어두운 골목 끝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어.

    어딘가로 향하던 기차 안에서 넌 삶은 계란 하나를 조용히 내 무릎에 놓아주었어. 가끔은 네가 웃던 모습이 생각나 미칠 것만 같아. 이젠 네 손을 잡고 돌아가고 싶어. 아련한 기억 너머 그곳으로 그냥 널 따라 가고 싶어.


    [프린세스 안나] 줄거리 요약 - 불행은 어디에서 오는가


    어쩐지 디즈니의 화이트 스노를 보고 있는 것 같아.

    어린 여자아이는 누구나가 예뻐하는 것이니까, 아주 어렸을 때에는 엄마와 함께 백화점에 구두를 사러가거나 커다란 푸른 배추를 배달해주는 사람들이 집안으로 들어오면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받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의 여자아이들의 인생은 다르겠지만 따뜻한 난로가 있는 마루에서 스노 화이트의 그림 조각 퍼즐을 갖고 놀 때의 시간은 그저 끈끈하고 달콤한 포도젤리 같은 거다. 그 속에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포도향기가 여자아이들의 삶에 가득하고 따뜻한 마루나 엄마의 초록빛 울 스커트는 영원히 거기에 있는 듯이 느껴진다.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였을까.

    성장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공주처럼 사랑 받던 어린 여자아이도 마찬가지다. "이 아기가 자라면 정말로 모든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받겠어요. 이 귀여운 눈동자를 보세요." 이제 아무도 엄마에게 그런 이야기를 건네지 않는다. 대신 사랑 받기 위해 몸부림치고, 왜 나를 사랑해주지 않느냐며 울부짖는 초라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일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유 없이 사랑 받는 일 따위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누군가가 웃는 얼굴로 높이 안아 올려주거나 호두가 든 새것인 아이스크림을 내미는 정도의 사랑에 만족하지 못하게 된 때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 같기도 하다. 화사한 스노 화이트와 달콤한 포도젤리 같은 기억은 이제 불행의 숲을 조금 더 어둡게 보이도록 만들뿐이다.


    소녀가 되어서도 프린세스로 남은 것은 안나뿐이었다.

    "도대체 왜 다른 여자들은 되는데 당신 여동생만은 안 된다는 거야." 아버지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엄마는 이 문제에 와서는 아버지를 설득한다거나 화를 낸다거나 싸우고 싶지 않다. 엄마는 그런 아버지의 자유분방함을 못 이겨하며 우리들을 떠났다. 아직 아이들이 어린데. 엄마는 기차를 타러가면서 한번쯤은 이런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에는 참을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아버지가 외국으로 떠나버렸을 때 이모는 스물세살이었고, 아직 어린 아이들 네 명의 엄마가 되어야만 했다. 그것은 이모에게 남편이 아무 말 없이 뉴욕으로 떠나버린 것보다 더욱더 참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야간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노란 제복을 입는 구두회사에서 일하고 있던 스무살의 언니는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던 곧 서른이 되는 마르고 검은 얼굴을 가진, 한번 결혼한 경력까지 있는 남자와 결혼하게 된다. 비가 오는 늦은 가을날 집 앞 골목에서 언니는 젖은 머리칼로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고 있다. 남동생은 아픈 여동생의 겨울코트를 사주기 위해 신문배달을 했던 일도 있다. 그리고 이모는 결국 그 돈으로 고장난 대문의 자물쇠를 수리하고 안나의 화실비를 냈다.

    부엌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던 이모는 화실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서는 안나를 불렀다. "내가 얼마나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줄은 네가 잘 알고 있지. 네 언니도 대학 같은 데는 갈 생각도 못해봤어. 네 동생들도 생각해봤니. 다 떨어진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가는 네 남동생이나 한겨울 내내 겨울 코트도 없이 다니는 저 아이를 봐, 넌 뭐든지 다하지. 대학도 갈 거고 미술학원에도 다니잖아. 밤에는 한번도 집에 돌아오는 일이 없고. 넌 네 아버지를 닮았어. 가까운 사람들을 불행하게 하지."

    아버지는 말을 타고 황야를 달리는 것처럼 거침없이 살았다. 이 세상의 어느 것도 그가 달리는 길을 막을 것이 없었다. 한때는 서울에서 꽤 유명한 건축 설계사였던 아버지는 사실은 화가가 되고 싶어했다. 아버지는 아내의 동생과 결혼하고, 그녀가 아이를 낳은 몇 달 뒤에는 화가가 되기 위해 뉴욕으로 떠났다. "내 딸들은 다 예쁘고 강하다. 아무도 함부로 하지 못하고 서울에서 가장 자신 있는 여자가 된다. 네 동생들도 마찬가지야. 말을 타고 달리는 것처럼 거침없이 사는 것이 좋다. 남자를 선택할 때면, 그는 모택동 같은 남자라야 한다. 프린세스는 왕과 결혼하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안 돼." 아직 어린 안나에게 아버지가 말하고 있다. 하지만, 도대체 강하고 아름다운 것은 무엇일까, 그런 것이 과연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살아나가는 것이 아주 힘들다는 것, 어떤 환상도 성공하지 못하리라는 것, 오랜 시간이 흐르면 지나간 일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핑크와 안나를 이 세상에 하나뿐인 공주처럼 사랑하고, 이 세상 끝나는 마지막 날까지 안나와 함께 있을 노아가 곁에 있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아" 이것은 안나가 처음으로 화실에서 밤의 거리로 나오면서 깊은 어둠을 향해서 하였던 말이다. 이 세상에는 두려운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결국 소녀가 되어서도 프린세스로 남은 것은 안나뿐이었다.

    여자들을 위한 잡지에 남자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면, 여자들은 절대로 남자를 변화시킬 수 없고 남자의 양말색에 관한 기호조차도 진정으로 원하는 대로 할 수 없으리란 것에 대해 말하고 싶어진다. 모든 트러블이란 것은 이기심 때문이지 그 남자는 애초에 애정도 없고, 사디스틱한 성향 때문에 당신에게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당신이 싫기 때문이다. 이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당신은 그 남자가 그런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면서, 마지막에는 연극으로 울부짖는다. 당신은 은연중에 자기의 인생이 연극조로 되어가는 것을, 당신이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는 것을 즐기고 있다. 그 남자가 사디스트가 아니라 당신이 마조히스트인 것이다. 아기를 낳고 버림받았다고 호소하면 누구나 동정해주고 성적으로 약한 당신이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건 당신에게 도덕적 우위를 인정해줄 수는 있겠지만 진정으로 당신이 원하는 바는 아니다. 말을 타고 중국의 황야을 달리는 젊은 날의 강청의 것처럼 거침없는 생은, 영원히 당신에게 오지 않는다.


    검은 개는 숨죽여 당신의 가장 행복한 그림자를 쫓는다.

    행복은 아주 작은 균열로도 쉽게 허물어져, 바닥이 보이지 않는 불행에 잠긴다. 불행은 불행을 부르고,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끈적이는 늪처럼 견고한 틀 속에서 깊이 더 깊이 잠들어간다. 끝이 없는 불행. 지쳐간다. 이 세상은 슬프고 또 슬프다. 마치 저 강물과도 같다. 젖은 머리칼과도 같다. 아무것도 이루어지는 것은 없고 안전한 곳은 하나도 없다. 오래지 않아 잊혀질 이런 날들을, 살아간다.


    [프린세스 안나] 뒤 - 강하고 아름다운 것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림 같은 소설, 소설 같은 그림

    "과연 누가 자신이 안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나. 어둠의 나라를 방황해보지 않은 여자아이는 또 누구인가. 폐허에서 태어나지 않았다고 누가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나. 술래가 되어 저녁의 어두운 골목길을 달려가다 보면 그늘과 그늘, 땅거미와 땅거미, 서성이는 미친개와 빈집들. 아이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눈알 빠진 인형의 주홍빛 머리칼이 천장에서 툭 떨어진다. 매를 맞아도 울지 않는다. 텅빈 저녁의 거리를 끝없이 달려간다. 이제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가엾은 나의 노아... 죽는 날까지 나는 두리번거린다. 그런 안나의 눈동자가 어떤 것인지 나는 궁금했었다. 변병준의 그림에서 나는 그것을 보았다." - 배수아


    톤의 사용이 극도로 자제된 변병준의 그림은 마치 판화를 보는 듯하다. 늘 비가 오는 듯 상처난 화면은 그 자체로 습하고 어둡고 우울하다. 흰자위가 드러난 눈의 사람들은 반쯤은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더 이상은 잃을 게 없다는 듯, 이젠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듯, 절망과 허무와 분노에 잠겨있다. 과거와 현재의 명암이 선명히 대비되는 원작과는 달리(각각 어린 시절의 밝고 행복한 기억과 어둡고 불행한 현재를 대변하는 '디즈니의 스노 화이트'와 '겨울, 전쟁으로 불구가 된 사람들'은 수 차례 반복되는 원작의 대표적인 이미지들이다.), 변병준의 그림체는 어린 시절을 그려내는 경우에도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그리는 도입부에서조차 따뜻함보다는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행복에 대한 불안의 그림자가 화면을 지배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아버지, 이모, 엄마 3인 사이에 존재하는 감정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해낸 - 만화 [프린세스 안나]의 존재 의의를 입증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 SCENE #1의 크리스마스 저녁 에피소드는 단연 압권이다. 물론 원작도 "어린 여자아이는 누구나가 예뻐하는 것이니까…"와 같은 회상조의 첫 문장이 디즈니의 스노화이트를 보는 듯한 행복한 풍경은 그저 과거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주며 출발하긴 하지만.

    처음 서점에서 그녀의 소설을 집어들었을 당시, M씨는 텅빈 글을 읽고 싶은 강렬한 욕구에 사로잡혀 있었다. 싸구려 캐릭터와 유치찬란한 스토리의 순정만화들조차 무슨 생각이 있는 듯 한 두 마디씩 꼭꼭 끼워 놓곤 하는 그럴싸한 나레이션들이 너무도 짜증스러워졌을 무렵이었다. 차라리 아무 철학도 담지 않고 현실에 대한 아무런 은유나 풍자도 없이 그저 읽는 자체로 재미를 주는 그런 글을 M씨는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택한 것이 변병준의 만화 [프린세스 안나]에서 용기를 얻은 배수아의 초기 단편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M씨의 선택은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그녀가 매우 메시지가 강한 소설을 쓰는 작가라고 생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소설은 충분히 불편했다. 생각나는 대로 써내려 간 듯,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들은 특별한 순서와 경계 없이 뒤섞여 있었고, 서술어의 종결어미 역시 내용상 시제의 제약을 벗어나 과거형과 현재형이 혼재되어 있었다. 전통적인 서사적 글쓰기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꽤나 당황스러운 느낌으로 다가설 만한 생경함의 마력이 M씨를 사로잡는다.

    배수아의 소설은 회화적이다. 근작 [그 남자의 첫사랑]에 이르러서는 많이 희석된 느낌이지만, <프린세스 안나>가 수록된 그녀의 2번째 단편집 [바람인형]은 삽화 한 점 없이 깨알같은 글씨만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종종 한 폭의 서양화 혹은 어두운 단편영화의 한 시퀀스를 연상시키곤 한다. 마치 나완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감정이 배제된 차가운 묘사와 짧은 문장, 그리고 다소 불친절하고 난해하게까지 느껴지는 이야기 전개가 대단히 인상적인 그녀의 소설이 주는 느낌은 한마디로 '이미지로서의 글쓰기'라고나 할까.


    고흐가 왜 귀를 잘랐는지 아는가

    [프린세스 안나]는 어떤 의미에서 [달과 6펜스](서머셋 모옴)의 외전이다. [달과 6펜스]가 화가가 되기 위해 가족을 버리고 다른 나라로 떠난 주인공을 통해 예술가란 일반적인 도덕 관념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사람들이며, 그들은 진정 원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세상에서 그에게 지운 책임의 무게 따위는 순식간에 벗어 던질 수 있는 자유롭고 열정적인 사람들임을 보여주었다면, [프린세스 안나]는 그들이 버리고 간 -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간혹 예술가가 되고 싶어한다거나 예술가와의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는 사람들을 보게 되면 세상에 강하고 아름다운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말하고 싶어진다. 예술가는 세상으로부터 배운 인간다움 - 혹은 인간으로써 마땅히 지켜야할 덕목들 - 으로부터 철저히 어긋나있는 자신의 내면에 대한 자각과 동시에 시작되는 끊임없는 자기혐오와 세상을 획일적으로 재단하려는 일반인들의 폭력으로부터 도망치는 극심한 대인공포에 평생을 시달려야 한다. 그런 지독한 고통 속에서도 '그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바로 예술가다. 태어나면서부터 해도 되는 일과 해선 안 되는 일을 가르치는 교육이 주입되는 상황에서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예술가의 삶이란 행복하거나 즐거운 어떤 것이 아니다. 그들의 삶에는 안전한 행복을 원하는 보통 사람들이 탐낼만한 어떤 매력도 없다. 예술가란 결코 되고 싶어할 만한 그 무엇이 아니며, 되고 싶다고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회라는 조직체의 입장에서 본다면 예술가는 범죄자와 똑같이 해롭다. 자유롭고 정열적인 동시에 선하고 도덕적인 예술가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을 비웃는 자유로움을 가진 그들을 부러워하고 동경하는 일이 가능한 것은 그들로부터 한발 물러나 바라보고 있을 때뿐이다. 당신을 향해 불꽃처럼 타올랐던 그들의 열정적이고 낭만적인 사랑은 어느 순간 다른 대상을 향해 그렇게 타오를 것이고, 그의 당신에 대한 욕망이 사라짐과 동시에 당신은 아내라는 혹은 가족이라는 이름만으로 더 이상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사랑, 도리, 윤리... 그럴싸한 명분으로 세상이 자신에게 지워준 어떤 책임감도 그는 주저 없이 거부한다. 당신이 부러워하고 동경했던 그들의 강함과 자유로움과 솔직함이 당신을 습격하는 때가 비로소 오는 것이다. 예술가란 철저히 자신의 가치기준에 의해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자신이 동의할 수 없는 세상의 규범과 도덕 따위에는 얽매이지 않는다. "저런 짐승만도 못한..." 그런 손가락질 따위는 두렵지 않다. 원하는 작품을 위해서 살인이 필요하다면 살인을 하고, 마약이 필요하다면 마약을 해야한다. 자, 당신은 그래도 예술가를 존경하는가? 예술가가 되고 싶은가? 당신은 고흐가 왜 자신의 귀를 잘랐는지 아는가? 강한 것이란 결국 무언가를 상처 입히게 마련인 것이다.

    [프린세스 안나] 앞 - 유년의 끝 "길고 어두운 마루의 끝에는 반쯤 말라버린 넓은 잎을 가진 식물의 화분이 놓여 있고 닫지 않은 좁은 창으로 희미한 빛이 들어오고 있다. 오랫동안 수리하지 않아 마루는 삐...

  10. 니가 벼랑 끝을 향해 가고 있다고 해도.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을꺼야. 네가 나의 하나뿐인 친구라 해도. 소중한 가족이라고 해도. 나는 결코 아무것도 하지 않을꺼야. “내가 보기에 그 길은 아주 위험해.” 몇 번을 반복해서 말해 주겠지. 한번쯤은 네 손목을 잡아 볼지도 몰라. 하지만, 그 이상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꺼야. “이건 내 인생이니, 상관하지 말라구.” 손을 뿌리치며 화를 내든, 아니면 눈물을 글썽이며 변명을 늘어놓든, 네가 계속 벼랑을 향해 걸어간다면, 그때 나는 너를 떠날꺼야. 네가 벼랑에 다가가는 속도보다 더 빨리, 너에 대한 나의 애정을 거둘꺼야. 더 이상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꺼야.


    도대체 무엇을 더 할 수 있겠어.

    진정으로 그를 아끼고 사랑한다면, 그리고 그가 - 내가 보기에는 - 분명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면, 그의 바지 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든지, 납치해서 감금을 하든지, 심지어는 때려 굴복시켜서라도 멈추게 만들어야 한다는 거야? 강제로라도 벼랑에서 떨어져 죽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거야? 3류 드라마에 나오는 악역 부모들처럼, 대학에 가기 전까지는 아이를 책상 앞에 가두고, 배경이 좋지 않은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자식의 뺨을 때리고, “두고봐라. 너도 결국에는 내가 옳았다는 걸 알게 될꺼다.” 자신감 넘치는 고함을 지르며, 그렇게 되야 한다는 거야? 믿어지지 않겠지만, 그들도 모두 자식을 사랑해서 그러는 거야. 사랑하는 자식이 젊은 날의 철없는 치기로 인생의 벼랑을 향해서 가는 것처럼 느껴지니까, 그렇게 화를 내고 자신의 뜻을 강요하는 거라구. 누구에게나 벼랑의 의미와 위험은 모두 다른 거니까,


    결국 고통받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뿐이야.

    술을 마시든, 담배를 태우든, 마약을 하든, 그것은 그가 선택한 그의 인생이니까. 그런 것들이 자신을 망쳐놓을 거라고 생각지 않는 것이든, 망가질 것을 알아도 두렵지 않아서 용감무식하게 살아가는 것이든, 망가질 것이 두렵긴 하지만 당장의 즐거움을 포기 못하는 것이든, 그건 그가 결정한 그의 인생이니까. 순간의 쾌락을 쫓든, 원대한 이상을 쫓든, 그걸 강제로 막을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는 거니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한심해 보여도, 그에게는 그 나름대로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테니까. 그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내 뜻대로 움직이는 인형이 되어 달라고 할 수는 없는 거니까. 결국 고통받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 뿐이야. 그가 건강하기를 바라는 사람들 뿐이야. 그가 불행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 뿐이야. 그가 자신이 생각하는 제대로 된 삶을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 뿐이야. 역지사지, 그 이상의 이해가 불가능한 인간에게 있어서, 자신과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결국 고통받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 뿐이야. 그를 사랑할수록, 사랑하면 할수록 더 고통을 받을 뿐이야.


    영화 [인터스테이트]에 이런 에피소드가 있어.

    가출한 아들을 찾아 나선 한 어머니와 함께 주인공은 벤튼시라는 곳에 도착하게 되었지. 한 나이트클럽에서 아들을 발견한 어머니는 “제발 집에 가자”고 애원하지만, 아들은 이미 유포리아(마약)에 취해 몸을 흔들어대며 이렇게 대꾸하는 거야. “웃기지마! 난 유포리아가 있어... 이게 최고야. 꺼지란 말야! 그냥 내버려 둬, 좀!!” 둘의 실갱이를 말리던 경찰은 이 도시에서 아들(방년16세)은 법적 책임을 질 수 있는 나이에 해당되므로, 그가 여기 있길 원하면 떠나도록 강요 할 수는 없다며 어머니에게 물러설 것을 권하지. 어머니는 경찰관에게 “저 아이는 아직 어린애라서,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하소연해보지만, 경찰관은 단호하게 답해주었어. “아니죠. 알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곳곳에 경고 표지판을 붙여두는 거지요.” 실제로 이 도시에는 ‘유포리아는 소량에도 중독성이 있음’을, ‘유포리아를 끊으면 죽음에 이를 수 있음’을, 그러므로 ‘합법이지만, 사용하지 말 것을 강력히 권고’하는 표지판이 곳곳에 있었고, 라디오를 통한 안내방송 또한 지속적으로 방송되고 있어 우연히 이 곳을 방문한 사람조차 그러한 공지를 접하지 못할 확률은 거의 없었고, 또한 유포리아가 배포되는 건물이나 지역에 출입하는 사람들에게는 경찰이 입구에서 그러한 주의사항들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있었어.

    장면이 바뀌면, 그 어머니와 주인공은 경찰서에서 보안관의 설명을 듣고 있어. “이 마을은 심각한 마약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린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봤죠. 거래와 사용의 처벌. 감옥에 보내보기도 하고... 하지만 한가지로 귀착되더군요. 어떤 인간들은 도무지 통제가 되질 않아요. 그래서 급진적인 해결책을 마련했습니다. 유포리아. 인조 마약이지만... 중독성이 강하고,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사용하지 말라고 경고했죠. 하지만 말했듯이... 어떤 놈들은 어쩔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거 한 번만 하면 완전히 걸려들게 되죠. 그럼 우리가 그들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건 그들은 통제할 수 있는 것이고, 우린 별로 비싸지 않게 가격을 정합니다. 그래도 살 여유가 안 된다면... 길거리에서 일하면 되요. 휴지나 줍고, 화장실 청소하고, 그러면 유포리아를 줍니다. 멋진 성과가 아닌가요? 이 마약은 매우 강하고 성적욕구도 없애주죠. 작년에는 이 도시에서 강간이 단 한 건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건 너무한 것 같다고. 그들(마약중독자들)은 그들 자신이 뭘 포기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며 고개를 가로젓던 주인공에게 보안관은 묻지. “그들이 선택한거야. 그들이 비참해 보이니? 그들은 단순히 행복한 삶을 살고 있어. 아무것도 결정할 필요 없이 책임감도 없고... 아무 문제될 게 없지. 그들만의 답을 찾은 거야. 네 삶이 그들의 삶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니?”

    모든 설명을 다 듣고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무슨 짓이든 할 테니 제발 아들을 보내달라”며 막무가내로 매달리는 어머니에게 보안관은 3가지 가능한 선택을 제시해. (1)아들을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곳으로 떠난다. 만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면 포기할 수 있을 테니까. (2)자식에게서 삶의 의미를 찾을 생각을 버리고, 자신의 인생을 가치 있게 할 다른 무엇인가를 찾아본다. (3)유포리아. 마약은 모든 고통을 잊게 해줄테니. 자, 그 어머니는 과연 어느 것을 선택했을까?


    네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리고, 내가 그런 너를 무심하고 차갑게 대하면. 사람들은 아마 네가 약자라고 생각할꺼야. 언제나 제멋대로인 내게, 너의 바램을 냉정히 무시하는 내게, 언제나 네가 먼저 인사하고, 웃어주고, 선물하고, 도와주면. 사람들은 아마 네가 뜨거운 가슴을 가졌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만일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가 자신을 소중히 하지 않을 때마다, 나는 무척 화가 날텐데. 아무리 그를 사랑하더라도 그걸 막을 권리가 내겐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더욱 괴로울텐데. 그가 힘들 때마다, 그가 아플 때마다, 나는 너무나 고통스러울텐데. 아무리 그를 사랑하더라도 도울 수 없는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더욱 비참할텐데. 나는 결국 그를 포기하고 말텐데.

    내가 느끼는 고통의 크기가 너보다 크기 때문인지, 아니면 나의 인내와 희생이 너보다 작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모든 것을 각오하고 사랑할 수 있는 네가, 그런 모든 것을 견디며 사랑하는 네가, 벌겋게 끓는 쇳물 속에서도 형체를 잃지 않는 강철처럼 강한 네가, 나는 너무 부럽다. 사랑을 하면서도 그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네가, 그런 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네가, 나는 정말 너무 부럽다.


    세상에는 타고난 유리턱도 있는 법이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사랑할 수 있는 너와는 달리,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하나의 다리를 공유한 샴쌍둥이처럼 한 몸이 되어버리는, 그러므로 그의 아픔이 자신의 아픔처럼 고통스럽고, 그와 이별할 때는 자신의 한 쪽 다리마저 함께 잃어버리는, 그런 사람도 있는 법이야. 그 끔찍한 상처가 치유될 수 없도록 영원하고, 잊혀질 수 없도록 집요해서, 그런 상처를 만들었던 감정이 다시는 몸 안으로 들어올 수 없도록 면역이 생겨버리는 거야. 남은 한 쪽 다리마저 잃어버릴 수 없다는 절박함이 본능적인 방어기작을 작동시켜 버리는 거야.

    나는 이대로가 좋아. 현재에 만족해. 그냥 내버려둬. 모두가 너와 같은 것으로부터 행복을 느끼리라는 생각은 오만이야. 네가 누군가에게 사랑한다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처럼,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도 그래야만 하는 절실함이 있다는 거야.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마음이 변했든, 변하지 않았든. 영원히 사는 사람은 없는 거니까. 이별은 어떤 식으로든 오게 되어 있는 거니까. 그걸 견뎌낼 자신 없을 뿐이야. 정을 쌓으며 살고 싶지 않아. 아름다운 추억 같은 건 싫어. 그러면 그럴수록 이별을 견뎌내기는 더욱 어려워지니까. 즐거움이 있어 고통도 감수할 수 있다는 너와는 달리,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즐거움을 포기할 수 있다는 거야. 냉정할 정도로 맺고 끊는 게 분명하다는 건, 완전히 끊지 않고는 애정과 관심과 그에 따른 고통의 크기를 조절할 수 있는 냉정함이 없다는 거야.

    내가 마음을 열고 너처럼, 사람들과 상처받고 위로 받으며, 사랑하고 사랑 받으며, 그렇게 아웅다웅 살아가게 되는 것은 내게 해피 엔딩이 아니야. 그건 자신의 수집품 목록에 하나의 이름이라도 더 추가하려던 너의 이기적인 욕심이 부른 나의 죽음일뿐이야. 사랑해. 사랑해.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취해 퍼붓던 너의 이기적이고도 끈질긴 공격에, ‘혹시...’ 하는 마음에, ‘어쩌면...’ 하는 방심에, 단단했던 껍질이 조금씩 부서지고 온 몸이 서서히 녹아 내린 나의 파멸일 뿐이야. 너는 만신창이가 된 나의 시체를 안고 “이젠 너도 행복하지”하며 웃고 있구나.

    니가 벼랑 끝을 향해 가고 있다고 해도.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을꺼야. 네가 나의 하나뿐인 친구라 해도. 소중한 가족이라고 해도. 나는 결코 아무것도 하지 않을꺼야. “내가 보기에 그 길은 아주 위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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