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년교주의 음악의 재구성 - L Ver.
삼촌들의 욕망을 위한 뻔한 답가
<소녀시대 - Oh!>
깜찍한 소녀들의 모습과 톡톡튀는 발랄한 느낌의 사운드라는 조합은 정확히 대중들이 소녀시대에게 기대하는 것과 일치하는 사항이겠죠. 이번 정규2집의 타이틀 싱글인 <Oh!>는 그런 면에 있어서 충분히 합격점입니다. 언제부터인가 공식화 된 걸그룹의 복고풍 디스코 법칙까지 그대로 이행하고 있죠. 무엇보다도 'brend new sound' 가사의 인트로는 몰입도가 굉장합니다. 밋밋했던 <소원을 말해봐>의 도입부와 비교해 봤을 때 그 차이가 더 확연히 느껴지는 한방입니다.
그러나 인트로가 지나고나면 곡의 문제점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우선 인트로와 버스의 연결이 엉성합니다. 같은 곡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전혀 다른 전개여서 황당할 정도죠. 황당함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버스에서 코러스로 넘어가는 부분도 또한 뜬금없이 덜컥 바뀌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변화무쌍의 수준을 넘어서는 전개가 3분여 되는 곡에서 계속적으로 일어납니다.
가사는 끔찍한 수준입니다. 'Oh! Oh! Oh! Oh! 오빠를 사랑해!'의 가사 연결은 대체 누구 머리에서 나온 건지 궁금할 지경이예요. 전체적인 가사도 오빠를 사랑한다는 내용으로 소녀시대의 든든한 지지기반인 삼촌팬들을 의식한 듯 보이지만 대부분 실패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소속사에서 삼촌팬들의 욕망을 정확하게 해석하고 있지 못한 듯 보여요. <Gee>에서의 풋풋한 소녀들의 모습과 <소원을 말해봐>에서 소원을 들어주는 달콤한 소녀들의 속삭임은 <Oh!>에 이르러서는 오빠를 위해 머리도 하고 화장도 하며 매달리는 소녀로 변모합니다. 심지어 '어떻게 하나 이 철없는 사람아'는 전형적인 트로트 가사여서 말 그대로 분위기를 확 깨는 모양새입니다.
솔직히 <소원을 말해봐>까지는 실수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음 타이틀 싱글의 수준은 나아질 거란 기대가 있었어요. <다시 만난 세계>와 <Gee>때의 완성도는 그만한 기대감을 갖기에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무려 '정규'2집에서의 타이틀 싱글이 이 정도라니 이제는 실수가 아닌 실패로 보이고 있습니다. 소녀시대의 네임벨류에 기대어 흥행에는 또 성공하겠지만, 90년대 걸그룹들이 실패한 그 포지션이 다시 되풀이되는 데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닌 듯 보입니다.


소년교주의 음악의 재구성 - L Ver.
잘 만든 컨셉의 노래도 필요하다.
<백지영 - 내 귀에 캔디 (Feat. 택연)>
이번 곡을 들으면서 자연스레 엄정화의 <D.I.S.C.O>가 떠오르더군요. 두 곡의 공통점이 뭐냐구요? 잘 만든 컨셉의 노래라는 거죠. 사실 <D.I.S.C.O>는 업템포의 재미있는 곡이기도 하지만 패션적인 감각이 남다른 엄정화가 톡톡튀는 의상과 메이크업을 하고 꽤 그럴 듯하게 예쁜척을 해낸다는 이미지적인 재미도 있었거든요. 손발이 오그라드는 가사의 <총 맞은 것처럼>을 부른 백지영이지만 사실 그녀의 전성기 때를 떠올려보면 충분히 이런 부분들을 살릴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 안 해>와 <총 맞은 것처럼>의 연타로 어느 정도 재기의 압박감이 가신 모양인지 그녀는 다시 주무대였던 댄스로 돌아왔습니다. 그 것도 곡의 재미와 이미지적인 재미라는 두 가지를 잘 조율해서 말이죠.
<내 귀의 캔디>는 일단 쿵쾅대는 빠른 속도감의 비트로 귀를 압도합니다. 그러면서도 리듬감 또한 잘 살려내고 있어 리스너로 하여금 저절로 몸이 반응하게끔 하는 곡이예요. 전자음의 사용도 적절하고 오토튠으로 만든 기계음의 보컬 역시 노래와 잘 녹아나고 있습니다. 클럽에서 들으면 딱 좋을 만한 노래입니다.
무엇보다 발군인 것은 캐릭터 설정입니다. '짐승돌'의 이미지로 주가를 올리고 있는 2PM의 택연은 거친 목소리로 남성다운 매력을 한껏 뽑내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강한 이미지가 있었던 백지영은 한껏 요염한 매력을 보이며 여성스러운 모습으로 어필하고 있구요. 이 둘의 결합은 꽤나 흥미로운 시너지를 내고 있습니다. 순전히 백지영의 능력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곡의 완성도와 이미지 전략이 적절한 균형점을 내면서 좋은 즐거움을 주는 건 그녀의 몫이 상당히 커 보이는 군요. 가창논란에 표절논란까지 쓸 떼 없는 것으로 시끄러웠던 대중음악 시장에서 이런 재미를 주는 것도 참 고맙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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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시즌용 음악의 한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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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을 별로 말하기 싫은 형편없음
<소녀시대 - 소원을 말해봐 (Gen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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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로봇레코드 소속의 노리플라이는 보컬과 건반을 담당하는 권순관과 기타와 프로그래밍을 맡고 있는 정욱재로 구성된 듀오다. 2008년 3월 싱글앨범 <고백하는 날>을 발표한 후 1년 3개월이 지나고 정규 1집 <Road>를 발표한 것은 불과 얼마 전 일이지만 이들은 몇몇의 컴필레이션 앨범 참여와 다수의 공연활동을 통해, 1집을 발표하기 전부터 이미 음악팬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루시드폴 혹은 유희열의 음악을 듣는 듯 섬세하고 여린 소녀의 앳된 감수성이 주를 이루며 피아노를 중심으로 한 모던록 사운드를 들려준다. ‘뒤돌아 보다’를 통해 2006년 제 17회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은상을 수상, MBC의 한 버라이어티에 ‘고백하는 날’이 삽입되기도 하였으며 ‘조금씩, 천천히, 너에게’가 <남과 여... 그리고 이야기>의 타이틀곡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침체된 한국 대중음악시장에 아주 약간의 희망이 보이고 있다. 현재 대중음악 시장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뮤지션이 활동을 할 수 있는 인프라 구축 부분과 소장할 만한 양질의 음악 콘텐츠의 생산 부분인데 이 중에 좀 더 근본적인 것은 후자다. 때문에, 인디씬을 중심으로 해서 우수한 창작성이 돋보이는 질적으로 뛰어난 음악이 계속해서 생산되고 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물론 이것은 다행히도 메이저 시장에서도 볼 수 있는 추세다. (대중음악 시장을 메이저와 인디로 보는 이분법을 딱히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편의상 이렇게 작성했다. 그리고 아래에서 나올 창작성 내지는 실험성과 대중성을 나누는 것 또한 모순되는 부분이 있지만 이 역시 일단은 편의상 나누어 작성하겠다.) 침체된 음악 시장을 다시 활성화시키기 위해 풀어야 할 과제가 많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콘텐츠의 질’ 다시 말해, ‘창작이 주가 되는 콘텐츠의 생산’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고 싶다. 하지만 이 창작의 정도가 너무 과해 그것은 ‘실험성’만이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고 ‘대중성’은 낮은 점수를 받기 십상이었다. 사실 음악에서 대중성이라면 뭐니 뭐니 해도 ‘귀에 쉽게 잘 들리는 것’을 미덕으로 함이 옳을 것이다.(음악에 있어서의 대중성이라는 개념은 특정 뮤지션이나 노래에 대한 대중들의 ‘인지도’를 말함이 아니다.) 대부분이 ‘그들만의 리그’에서 머문다거나, 소위 아방가르드 했던 또는 듣기 불편해서 쉽사리 접근하기 힘들었던 뮤지션의(특히나 인디씬에서의) 음악은 언젠가부터 대중성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좀 더 쉽게 잘 들리기 시작하였다는 말이다. 가깝게는 짙은, 에피톤 프로젝트 등이 그러했다. 창작성과(좀 더 나아가면 진정성) 대중성의 교집합을 드디어 찾아낸 것이다. 인디씬이 태동된 것을 90년대 중후반으로 본다면 10년하고 좀 더 지난 이제야 그 접점을 발견했다는 말이다. 지금은 참 소중한 시기임에 틀림없다.
노리플라이의 음악 역시 창작성과 대중성, 그 사이의 접점을 잘 찾아낸, 오랜 시간의 연구를 통해 나온 결과물이라고 말하고 싶다. 앞서 말하길, 대중성의 핵심은 ‘귀에 잘 들리는 것’이라 했는데 그것은 현재 유행하는 후크송과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노리플라이의 음악은 귀에 잘 들리는 멜로디를 가지고 있지만 후크송의 코어인 ‘반복구절’은 발견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음악이 귀에 잘 들리는 것은 이들만의 세련된 작법에 연유하고 있을 터. 기복이 뚜렷한 멜로디 라인을 만들 줄 아는 것은 이들이 지닌 가장 큰 힘이며 바로 그것이 귀에 잘 들리는 음악을 만들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나 싶다.
이들은 또한 전통적인 록(Classic Rock 또는 Roots Rock)의 명제였던 ‘록의 중심악기는 기타’라는 것에서 한 발짝 멀리 떨어져있다. 노리플라이 음악의 중심엔 피아노가 굳게 박혀있다. 물론 피아노가 중심이 된 록 사운드의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과거 오메가3의 음악 또한 그 중심에는 피아노가 있었지만 그것은 실험성에 더 큰 비중이 있었다. 그때 태동한 이러한 피아노 록 사운드가 이제는 대중성을 보완하여 본격적으로 발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같이 대중성을 내세운 피아노가 중심이 된 록 사운드는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 예상한다.
물론 모던록의 영역에서 볼 때 주류는 델리스파이스와 언니네이발관을 필두로 한 기타팝(Guitar Pop)밴드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에피톤 프로젝트를 작은 시작으로 하여 노리플라이를 본격적인 구도자의 위치에 올려놓아, ‘모던록의 주류는 이제 기타가 아닌 피아노를 중심으로 한 록 사운드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억견일까? 현재 음악공연이나 앨범이 ‘여성성’을 마케팅으로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참고로 한다면 기타보다는 피아노가 그 특유의 감수성에 적합하다고 말하고 싶다.
주지했다시피, 피아노를 중심으로 한 록 사운드가 앨범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몇몇 곡에서 들을 수 있는 리얼 스트링은 앨범을 좀 더 풍성하게 해주는 요소다. 앨범의 부제답게 ‘길’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그것은 사전적 의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다양한 의미로 쓰이고 있다. 피아노 연주로 시작하여 순차적으로 드럼과 기타가 합세하여 비교적 빠르게 후렴구까지 이어지는 첫 곡 ‘끝나지 않는 노래’는 군더더기 없는 곡 구성이 매력적이다. 이들의 싱글 앨범에도 수록되었던 ‘시야’는 편곡을 거쳐서 재수록 되었다. 영화 ‘오펄 드림’에 삽입된 본 앨범의 타이틀 곡 ‘그대 걷던 길’은 지난 해 12월 ‘이하나의 페퍼민트’에서도 선보인 적이 있는 곡이다. 곡 자체에 큰 기복은 없지만 앨범 전체의 감성적인 컨셉을 대표하기엔 무리가 없어 보이며, 전반에 걸친 스트링 연주는 앞으로 튀어나오지는 않는 대신에 얇고 은근하여 절제미를 느낄 수 있다. 그 밖에도 후렴구의 절정이 돋보이는 ‘World’, 새로운 녹음 작업을 거쳐 수록된 ‘뒤돌아 보다’. 곡의 시작과 끝 부분의 지하철 소리 샘플이 흥미로운 ‘Fantasy Train’은 곡의 텍스쳐와는 다르게 몽롱한 느낌이 든다. 저음의 첼로 선율이 인상적인 ‘흐릿해져’, 보사노바 풍의 ‘오래전 그 멜로디’에는 오지은이 보컬에 참여했다고. ‘Violet Suit’는 기타를 맡고 있는 정욱재의 취향이 다소 진하게 묻어 나오는 곡이다. 앨범의 부제와 같은 제목을 가지고 있는 ‘Road’는 힘 있는 후렴구가 인상적이며, 다소 차분한 느낌과 구성미를 느낄 수 있는 세련된 스트링 편곡의 ‘바람은 어둡고’를 끝으로 앨범은 마무리 된다.
이제 막 1집을 낸 이들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젊은 뮤지션 둘이 모여 이러한 ‘작품으로서의 앨범’을 제시하였다는 것과, 단지 거기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대중성을 찾아내었다는 것 그 자체에 큰 점수를 주고 싶다. 듀오라는 장점을 살려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을 멀리하되 각자 개인의 내공을 더 쌓으며 정진한다면 유희열이나 전람회처럼 자신들의 음악뿐만이 아닌 여러 후배들에게 ‘길’을 제시해줄 수 있는 그런 멋진 선배가 될 수 있을 것이 분명하다. 동시에, 대중음악씬에 좋은 방향으로의 변화를 줄 수 있는 움직임의 핵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기대를 해본다. 노리플라이는 한국대중음악의 ‘젊은’ 희망이다.

음악이 가지는 포괄적인 예술성과 내제된 이념성이 존재한다고 해서 프리재즈는 그들 스스로가 가지는 고유한 음악적 장르를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을 우선 전제한다. 요컨데 프리재즈는 '대중음악'이라는 것이다. 어떤 의미로는 철저하게 비 대중적인 음악이, 알고보면 '대중음악'이라는 아이러니한 진실은, 왜 우리가 ㅡ즉 대중들이 왜 프리재즈란 음악을 그렇게나 언짢게 마주했는가에 대한 물음에 최소한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하지만 대중음악이 전부 다 '대중 친화적'일 필요는 없다. 그리고 '대중 친화적인 음악'이 대중음악 전체를 대표하지도 않는다. 다만, 대중음악의 경쟁력은 '대중 친화적'일때 발현된다는 것인데, 요약하자면 음악이 대중 친화적으로 존재할 필요성은 없지만, 대중음악은 결과적으로 대중 친화적일때 발전되고 그 생명력을 얻는다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할 진실은 그 '대중성'이라는 잣대가 계량적 수치로 적용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전 세계적으로 몇 백만장 이상 나가면 '대중적', 그 이하로 나가면 '비 대중적'이라고 하는 잣대는 애초에 없다. 따라서 60년대 이후 완성된 프리재즈가 지금까지도 소수지만 뮤지션들에게 탄생되고 청자들과 소통되는 이유도, 적지만 그들을 지지하는 대중들이 분명 존재했다는 것이고 그 것이 프리재즈가 기본적으로 '대중음악'의 범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하나의 근거로 작용하지만, 반대로 존재의 이유도 반증한다.
아울러 여기서 우리는 과연 프리재즈라는 음악이 소수의 대중들에게만 통용된다고 해서 그 가치성이 떨어지는가에 대한 문제에도 봉착한다. 그것은 앞서 언급했든 대중음악의 경쟁력은 대중 친화적일때 발현된다고 한다면, 그 반대의 논리에서 비 대중적인 대중음악은 그 가치가 여타의 장르에 비해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파생적인 의문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만은 난 꽤나 단호한 어조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음악을 비롯한 다른 예술의 가치성은 사실 대중의 인기도와는 독립적으로 발현된다는 것이다. 예술의 진정한 가치는 수용자가 창조자의 결과물을 느낄때 생성되는 일종의 창의력 혹은 공감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확대된다고 한다면, 그러한 측면에서 사람의 고막에서 완성되지 아니하고 수용자의 머릿속에서 완성을 바라는 프리재즈의 특수성은 그 예술의 기본적인 가치에 매우 충실한 장르라 아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가치에 대한 논쟁만큼은, 적어도 프리재즈라는 장르는 꽤 자유롭지 아니한가 생각한다.
그렇다면 프리재즈란 장르는 현재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에 대한 발전성을 논해보자.
프리재즈는 사실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음악의 필수적인 요소인 '구성'을 두지 않는다. 흔히 말하는 조성, 박자, 형식을 배제한체 그야말로 자유스러운 즉흥을 추구한다. 그것은 1949년 레니 트리스타노(Lennie Tristano)의 창조 이후, 오넷 콜맨(Ornette Coleman)과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 에릭 돌피(Eric Dolphy)을 거치며 발전해온 프리재즈 음악이 가지는 커다란 특징 중에 하나다. 그러나 이 무형식의 개념은, 그 존재 자체로 하나의 형식을 가지는 아이러니를 가진다.
예를 들면 누드 비치(Nude Beach)다. 그곳은 아무런 제약도 없으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자연을 만끽하는 곳이다. 인간의 본연의 모습 그대로를 아무런 여과없이 보이는 장소이고, 인간의 자유스러움으로 일련의 사회적인 통념을 과감하게 배척하는 곳이다. 그러나 그 곳에 들어가기 위해선 하나의 약속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아무것도 입지 않아야 한다'는 또 하나의 암묵적인 '법칙'이다. 법칙을 배제하는 법칙이 존재하는 곳. 그곳이 바로 누드 비치이고, 프리재즈다.
따라서 재즈 연주자들은 프리재즈를 연주할때는 스스로를 과감히 던져버려야 하는 일종의 과단성이 필요하다. 쭈뼛거리며 자신의 국부를 가린다거나 새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주위만 서성거려서는, 그곳에 적응하지도 못할 뿐더러 그 존재자체의 가치에서 편승하지도 못하는 겁쟁이가 될 뿐이다. 따라서 대충 이 지점에서 대중들이 가지는 프리재즈에 대한 반감은 극대화되며, 밖에서 볼때 상식적인 키스 자렛(Keith Jarrett)의 피아노에 대한 대중의 열광도 반대로 극대화 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소리의 극한, 표현의 극한을 보여주며 통념에 반대하고 극단의 진보성을 말하는 프리재즈는 이제 소리의 창조에서 만큼은 막다른 벽에 도달하기 시작했다. 소리의 표현에 있어 그 극한의 표현은, 이제 음악의 감상의 범주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온 프리재즈의 진보성은 역으로 프리재즈가 앞으로 나갈길에 대한 심각한 딜레마에 봉착하게 했다. 멀리 갈것도 없이, 러시아 세르게이 쿠료힌 페스티발(Sergei Kuryokhin Memorial Festival)에서의 그들의 아방가르드적 표현형식을 보라.
따라서 프리재즈는 어느순간 뒤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걸어온 발자취를 되돌아 보는 것이다. 거기서 그들은 앞만보고 단거리 육상선수 처럼 달려왔다면, 이제는 그들이 지나온 이 머나먼 길에서 옆과 뒤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점이 프리재즈가 재즈의 지엽적 장르에서 이제는 당당하게 독립된 커다란 하나의 줄기로 발전하는 순간의 출발이며, 오늘 내가 하고 싶은 얘기도 바로 그것이다.
물론 당연하지만, 그 전까지의 연주자들이 일률적인 스타일로 누드비치에서 재즈와 프리를 연주하진 않았다. 세실 테일러(Cecil Taylor)와 돈 풀렌(Don Pullen)은 벗을 땐 완전히 다 벗어던지는 케이스였고, 키스 자렛은 작은 수영복을 입은 채 바다속에서 좀 처럼 나오지 않는 인 플레이(in-play)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혹자는 선라(Sun Ra) 처럼 옷을 다 벗어던지는 것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알몸인 채로 기괴한 퍼포먼스까지 서슴없이 감행하는 케이스도 있었으며, 야마시타 요스케(Yosuke Yamashita)처럼 위험천만한 수영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한 키스 티펫(Keith Tippet)처럼 적당한 선에서 우아하게 끊는 케이스가 있는가하면 미샤 멩겔베르그(Misha Mengelberg)나 알렉산더 폰 슐리펜바흐(Alexander von Schlippenbach)와 같이 꽤 호화롭게 즐기는 쪽도 있었다.
그리고 이젠 이러한 아티스트들의 과거, 그리고 현재의 다양한 행보와 결합하여, '프리'라는 대전제의 움직임 자체에 변화를 이야기하는 곳에 나의 관심은 집중된다. 이것은 연주자들에 시간흐름에 의한 세대교체로 이루어지거나, 음악적 연주방법만의 변화로서만 이루어지는 변화는 아니다. 그것은 프리재즈의 출발이 그러했듯, 일종의 '의식변화'이다.
그래서인지 최근에 프리재즈 연주자들은 '프리'에 자신의 음악을 한정시키는 것을 달가워 하지 않는다. 아까언급했던 '누드 비치의 무법칙의 법칙' 마저도 거부하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자면, 60년대의 '미국의 프리' 정서가 과연 현재에도 초국가적으로 발전을 얘기하는 재즈씬에서 그대로 통용되는가 하는 스스로의 물음이다. 결국 이러한 물음은 프리재즈 내에서의 발전을 말하게 되고, 그러한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빌리 뱅(Billy Bang)의 표현대로 프리재즈의 '내부구조'의 개념이 도출되기 시작하고 '구성즉흥'이라는 말도 회자되기 시작한다. 또한 이쯤되면 프리재즈에서의 자유형식이란 과거의 이념과 영원을 다루는 추상적 목표를 향해가는 질주가 아니라, 여타의 음악과의 조건없는 결합이나 목표없는 여정을 의미한다고 정의하는 것이 나는 옳다고도 본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제 프리, 그 자체가 음악의 테마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그 목표없는 테마는 다양한 결합과 형식을 낳게했고, 덕분에 '프리'를 위한 '프리재즈'는, 더 이상 '프리'에 얽매이지 않는다. 필요에 따라서는 약속을 하고, 구성을 만들며, 주제를 변화하고, 지역적 색감을 차용하기도 한다.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프리재즈는 그야말로 자유로움 속에 내 던져진 것이며, 이것이 사실 진정한 프리재즈의 참 모습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움직임이 지금 이 순간 펼쳐진 일은 아니며, 그 이전부터 꾸준히 회자되고 통용되었던 개념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움직임이 최근에 꽤나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은 나에게 꽤 고무적인 일이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최근의 기억속의 재천, 미연의 <Dreams from The Ancestor>가 각인되어 있음을 또한 기억한다.
결국 프리재즈에서의 발전과 진보는 너무나도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될 시장이 마련되었다. 이것이 내가 프리재즈가 장르의 파생이 아닌 장르의 주체로 보는 이유이며, 앞으로의 가능성을 더욱 기대하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출처: Pikaland
기존의 회화가 합리성과 맞닿아 있다면 고대 제술 의식적 전통과 맞닿아 있는 음악은 원초적 감정과 연결되어 있는 듯하다. 특히 로로스의 음악은 이성의 틀로 형식을 분석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는 듯하다. Pax 및 최근 EP 앨범에서 들려진 그들의 음악은 구조적으로 미니멀한 편성으로 점층적인 진행을 보이다가 트레몰로로 가득한 극점에 이르는, 일반적인 슈게이징 락의 전형을 따르고 있다. 즉, 질서에서 무질서로 나아가는 엔트로피 상태에서 다시 질서를 회복하는 네그엔트로피 상태에 이르는...
사실 슈게이징 락을 위시한 포스트 락의 음악에 이와 같은 문법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적절한지 모르겠다. 메시지는 없고 음악적 실체만이 있는 그들의 음악은 청자에 따라서 해석되고 자생적으로 번식되기 때문이다.
'음악을 다시 노래한다. 자연을 노래한다. 사람을 노래한다. 우주 어딘가에서 가능할 수도 있는 세계를 그린다.'
이야기함이 아닌 ‘노래한다.’ ‘그린다.’ 라는 단어는 태생적으로 명확한 실체가 없는 것. 텍스트를 빌린 해석을 통해서 대상을 획득하는 것이다. 로로스의 음악이 청자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여지는 해석을 통하지 않고 감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감정 속에 있다. 구체적 텍스트가 없는 그들의 음악은 사운드만을 위한 것. 그렇기 때문에 울림을 이루는 전체적 실체만큼이나 그 조합을 만드는 부분, 세션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것. 여섯 멤버 속에서 신디사이저와 스트링을 맡은 제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가 단순히 밴드의 사운드를 풍성하게 하는 것 이상으로 로로스의 음악적 가능성에 상당히 많은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Loro's - Doremi
특히 Pax에서 그녀가 작곡한 DOREMI는 로로스의 음악 중에서 가장 이질적이면서도 독특한 행보를 보여주었다. Squarepusher의 Lambic 9 Poetry를 밴드와 함께 커버한 후, 제인은 일렉트로닉적 요소가 포함된 음악을 하고 싶었다고 한다. DOREMI는 그가 사람들과 지내면서 느낀 것들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한다.
“재능이 넘치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어떤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일종의 ‘훈훈함’이라고 할까? 그 속에서 난 원래 가지고 있는 존재감 이상의 것들을 느끼고는 한다. 그리고 이 느낌뿐만 아니라 나의 신체도 확장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만일 이와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면 당신도 나처럼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GLAD TO MEET YOU"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이것이 DOREMI가 담고 싶은 것이다.“
DOREMI는 로로스 EP앨범에 수록된 Dream3의 의도된 엠비언트 사운드와 같은 요소들을 담기보다 RJD2에게 발견되는 인스트루멘탈 힙합적 요소와 Mogwai와 같은 포스트 락 밴드의 사운드에서 발견되는 요소에 로로스의 음악적 스타일을 가미했다고 한다. 그의 일렉트로닉 사운드에 대한 관심은 자신의 프로젝트인 Pika에서 잘 드러난다.
Pika - Robot Dreams
물론 로로스의 작업과 피카 프로젝트는 별개의 것. 일렉트로니카 사운드는 태생적으로 상징으로 이루어진 것. 실체가 없는 숫자들이 현실을 공명한다.
제인은 미국에 살면서 어렸을 때, 아시아인이었기 때문에 또래 애들한테 따돌림 당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를 견디기 위해서 그는 그때마다 세상을 상상해야만 했다고 한다. 즉 자신만의 세상을 진짜로 생생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필요했다고 한다. 로로스가 메시지가 없는 이미지를 노래한다면 Pika 속의 제인은 이야기를 한다. 그의 이야기 속에는 실제하지 않는 것들의 감정을 말한다. 현실에 없는 것들을 공감함으로써 그들의 존재를 노래 속에 프로젝트하는 것이다.
제인의 가치는 한국적 음악 토양에서 진보한 일렉트로니카 사운드가 없는 상황에서 묵묵히 자신만의 결과를 보여준다는 점이다.(비록 음반 발매는 없지만 공연을 통해서) 또한 그가 작곡한 DOREMI와 같은 곡에서 보여준 신디사이저와 락 사운드 사이의 조율은 앞으로 로로스의 음악적 방향에 많은 기대를 가지게 한다.
이밖에 파울 클레가 1931년에 '유령의 출발(Gespenster Abgang)'이란 작품을 통해 그 동안 자신을 옭매었던 바우하우스 도그마를 비롯한 과거라는 유령과의 이별을 고했듯이 로로스 역시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시규어 로스의 영향력과 이별할 수 있는 길에서 제인이 중요한 지점을 차지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Loro's
피카 프로젝트
튠 테이블 무브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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