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재 운영하고 있는 가슴네트워크는 1999년에 ‘대중음악비평웹진 가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이전에 ‘서브’라는 월간음악전문지를 창간해서 편집장을 하다가 처음으로 ‘내 자본’으로 창간해서 운영한 것이 ‘웹진 가슴’이었고, 벌써 햇수로 9년째 운영 중이다. 그리고 현재는 대중음악과 문화기획 전반을 아우르는 회사 개념으로 발전되었다.(웹진 가슴은 가슴네트워크 안에서 독립적인 음악매체로 운영되고 있음.) 내가 8년 전에 웹진 가슴을 만든 이후 현재의 가슴네트워크로 진화된 과정은 한국음악산업 안에서 ‘매체의 역할’을 고민했던 과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고 할 수 있다.
1999년 당시 웹진 가슴이라는 독립매체를 만든 이유는 비평매체를 온전하게 운영하기 위해서는 편집권이 자본주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점 때문이었고, 이를 이전 경험을 통해서 체득한 점이 가장 컸다. 일례로 잡지와 같은 매체가 운영되려면 판매수입과 광고수입이 있어야 하는데, 음악잡지에서 가장 큰 광고주는 바로 음반사들이라는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그러니 유가 음악잡지가 편집방향성을 ‘일관되고 엄정한 비평’을 통한 음반가이드로 설정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 단, 해외의 몇몇 잡지처럼 판매로 승부를 걸거나 처음부터 발행인이 적자를 감수하고라도 이를 용인한다면 가능하다. 그래서 온전한 비평매체를 만들고 싶었던 나는 스스로 발행인이 되기로 결심했고, 당시 인터넷 문화사업에 대한 희망 섞인 예측들이 있어서 그럭저럭 운영은 되겠다 싶었다. 하지만 2000년을 넘기면서부터 인터넷기업의 수익발생이 그리 만만치 않을 것이란 전망이 팽배했다. 그 시점에서 ‘웹진 가슴’의 운영을 비영리/비회원 방식으로 잠정 결정했고, DB를 만들어가는 것에 치중했다.
내가 온전한 비평매체를 고집했던 이유는 ‘음악산업’ 안에서 ‘비평’의 기능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이를 쉽게 얘기하면 “한국에서만 1년에 천장 가까이 나오는 음반들을 음악소비자들이 다 들어볼 수 없기 때문에 대신 음악평론가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분류를 해주고, 음악소비자들은 이를 믿고 가장 적은 돈으로 효율적으로 음반을 선택해서 만족감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인 목적은 음악소비자들에게 다른데 돈을 쓰는 것보다는 음반구매에 돈을 쓰는 것이 상대적으로 낫겠다는 생각을 계속적으로 갖게 해서 이들을 음악시장에 장기적으로 묶어 두는 것”이고, 이는 사실 고전적인 음악비평의 기능에 속한다. 또한 온전한 음악비평이 존재해야 음악산업이 ‘합리적’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여기고, 여기서의 ‘합리적’이란 지금과 같이 음악사업자(음반사, 이동통신사, 포털)와 주류매체(공중파방송 중심의 중앙매체)들만이 수익을 독식하는 것이 아니라 뮤지션과 관계자(공연기획자, 매체종사자 등)들까지 성장의 혜택을 공평하게 누리는 것을 말한다. 난 음악시장 성장을 절실히 바라지만 뮤지션이나 관계자들이 배제되는 구조는 원치 않는다. 아울러 음악시장 성장에는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여기서의 핵심은 ‘다양한 양질의 음악’이 음악소비자들에 공급되어 그들에게 만족감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비평과 함께 관심을 가졌던 것은, 90년대 초반 이후 한국에서 사라진 ‘음악전문방송’에 대한 부활 문제였다. 원래 FM방송은 AM방송에서는 불가능한 Hi-Fi 음질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론이었고, 그래서 FM방송 자체가 특별히 규정하지 않더라도 ‘음악전문방송’이다. 알다시피 한국에서 80년대까지만 해도 FM방송은 음악방송이었고, 편성에서 60% 이상은 해외 팝음악으로 채워졌었고, 전영혁이나 성시완과 같은 전문DJ가 대접받았다. 하지만 90년대 들어서서 TV의 엔터테인먼트 위주 편성방식은 FM방송으로까지 확대되어 지금은 굳이 FM방송이 왜 있어야하는지를 의심케 한다. 한데 여기서의 문제는 FM방송이 엔터테인먼트 위주 편성으로 바뀌면서 뮤지션들이 신보를 발매한 후 홍보를 할 채널을 잃어버렸다는 점이다. 그래서 ‘FM방송의 엔터테인먼트화’는 한국에서 해외 팝음반 시장의 몰락을 야기시킨 것 이외에도 인디뮤지션들을 포함한 앨범아티스트들의 상업성을 거세시키는데 한몫했다.(*1)
그런 이유로 정공법적인 방법을 생각했고, 그게 지금은 운영이 중단된 ‘가슴라디오’이다. 왜 메뉴명이 ‘라디오’였겠는가? 나름대로는 신보들과 함께 뛰어난 노래들을 소개하고 싶었고, 이는 비평적인 텍스트와 함께 음악을 직접 들어봐야 ‘구매욕구’가 생길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가슴라디오는 1년 전에 웹진 가슴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운영을 중단했고, ‘필자추천 싱글’과 같은 몇몇 음악듣기 코너는 여러 가지 문제로 운영을 중단했다. 지난 6월에 미디어서버의 문제 때문에 음악서비스를 중단 했는데, 서버를 교체하려다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작년 12월에 개정되어 올 6월 말부터 발효된 ‘저작권법’ 때문이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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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금도 시대 변화에 따라서 ‘FM방송의 엔터테인먼트화’가 이루어졌다고 항변하는 관계자들이 있지만 정말 그랬을까? 결국 이러한 편성방식은 10년이 지나서 시청률1%를 넘기지 못하는 TV음악방송프로그램 현실을 만드는데 일조했고, 대안으로 기껏 얘기하는 수준이 ‘가요 순위프로그램 부활’과 같은 본질적이지 않은 얘기들이다.
(2) 여태까지 가슴이 비회원제를 고집한 이유들 중에 하나는 음악서비스를 계속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비영리’임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고, 조심스럽게 인디뮤지션 중심으로 음원서비스를 해왔다. 앞으로도 자체 음악서비스를 하기 어려운 바, 유투브 등을 이용해서라도 음악서비스를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뮤직포럼’ 메뉴를 새로이 만들었다.
그런데, 그간 음악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고민을 어느 정도 해봤는지 심히 의심스럽다.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특히 주류음악씬의 거의 대부분은 아직도 ‘한국음반산업 몰락 이유’를 한결 같이 “온라인을 통한 음악소비자들의 불법복제”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이제 그런 얘기는 몇 년째 들어서 귀가 닳을 지경이다. 하지만 2000년 넘어서서 같은 기간에 “왜 한국만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음반시장이 급격하게 몰락했는지”에 대한 답변을 하지 못하고, 그 이유를 찾아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그런 사실조차를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다른 이유 때문에 애써 얘기를 하지 않는 것인지가 궁금하다.(*3)
시장이 몰락했다면 거기서 팔고 있는 상품들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점이 첫 번째 이유이다. 에둘러 이유를 어렵게 찾을 필요가 하나도 없다. 물론 그게 인디음반처럼 구조적으로 홍보, 유통 경로가 없어서 원천적으로 상업성을 획득하기 어려운 상황이 아니라면 말이다. 음반시장 몰락의 핵심은 90년대 중반부터 주류음반사와 주류매체들이 10대 팬덤 중심으로 음반시장을 ‘게토화’시켜서 장사하다가 이제는 그게 더 이상 먹히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왜냐하면 2000년대 들어서서 예전 소비자들의 일부는 돈 주고 음반을 사는 대신 인터넷을 통한 ‘불법복제’ 등으로 옮겨갔고, 그도 아니면 주류음악에 대한 관심 자체가 현격하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후자는 음악방송프로그램의 시청률이 1%대로 떨어진 현실이 이를 증명한다.(*4)
그렇다면 주류음악 관계자들이 말하는 ‘불법복제’ 문제는 음반시장 몰락의 부분적인 이유가 될 수는 있어도 핵심적인 이유는 아니다. 오히려 ‘소수’의 10대 소녀들만이 관심을 갖는 현재 주류음악 생산․유통 시스템이 가장 큰 문제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음반시장 뿐만 아니라 음악시장 전체도 기울지 모른다. 도대체 언제까지 ‘불법복제’ 타령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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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현재 전세계적으로 음반시장이 불황인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처럼 시장이 몰락한 경우는 사례를 찾기 힘들다는 점이다. 미국의 예를 보더라도 2000년에서 2005년에 이르는 동안 시장 감소는 25% 선이다. 그러나 1990년대 세계 음반시장 10대 강국에 들었던 한국만 유독 그 기간에 75%의 시장 감소를 보였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이 부분에 대해서 정확한 논의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다들 “전세계적으로 음반판매가 둔화되고 있다”라는 말을 하면서 한국음반시장의 붕괴를 ‘일반적인 현상’으로만 치부하고 있고, 더욱이 ‘인터넷 강국’이란 사실로 오프라인 음반시장이 더욱 빨리 급락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4) 이 과정을 거치면서 진정한 음악수용자(음악마니아, 돈을 주고 음반을 사는 사람)의 수는 급격하게 감소하였다. 80년대 음악수용자 층이 적어도 10~30대였음을 상기하면 되고, 영미권의 문화소비자 타겟이 30~40대 중산층임을 염두하면 된다. 한국에서 20대 이상 음악수용자가 거의 전멸하는 상황이 되었다면, 그건 1차적으로 기획/제작/유통 시스템의 문제이다. 90년대 들어서서 조성된 음악창작자들을 죽이는 시스템은 이제 주류제작자들을 죽이는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오고 있다. 더 늦기 전에 할 일은 좋은 음악창작자들이 살아갈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일에 동의하는 것이고, 이는 이들에 대한 이미지메이킹을 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밥 딜런이나 닐 영과 같은 이들이 ‘창작적인 측면’에서 신화가 되는 일은 미국의 음악산업을 키우는 방법에 속한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겠는가?

사실 첫 EP를 낼 때까지만 해도, 보드카레인(Vodka Rain)의 음악은 분명히 ‘락’으로 들렸다. 더 굳이 잡자면, 이들의 음악은 영국발(發) 밴드들로부터 출발해 자신만의 감성을 찾아가는 과정인 것처럼 보였다. <Deja-vu>, <Cat’s diary>, <Night Flight> 같은 곡들은 심플하지만 오밀조밀한 밴드 연주가 좋은 멜로디, 솔직한 가사와 맞물리면서 정서적인 공감대를 만들어 냈다. 전술한 요소들이 전형적인 브리티시 락의 특징이라면, 보드카레인은 여기에 90년대 가요를 연상시키는 멜로디, 개인 블로그처럼 일상적인 가사로 자신들만의 색을 덧입혔다. 물론 소소한 슬픔은 다소 과장되었고, 전개의 일부분은 Coldplay 등을 떠올리게 했지만, 락 밴드로서 보드카레인이라는 밴드의 정체성을 해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던 그들의 데뷔 앨범 [The wonder years]는, 어쩐 일인지 분명 같은 밴드의 음악인데도 꽤나 다르게 들린다. 이 또한 굳이 얘기하자면, 분명 브리티시 락의 느낌이 물씬 나던 이들의 음악이 갑자기 마이 앤트 메리 류의 그것으로 바뀐 것처럼 들린다. <아무래도 좋아>나 <사랑가> 같은 노래들의 말랑말랑한 달콤함만 봐도, 싱글로부터 다시 옮겨 온 <Deja-vu>, <Cat’s diary>의 (상대적으로) 거친 사운드와 분명히 대비된다. 음을 잔뜩 길게 빼 소리치듯 부르던 후렴구는 보다 자잘하게 갈라졌고 보다 완곡한 창법으로 한결 부드럽게 들리지만, 그만큼 곡들은 모서리를 잘라낸 듯 뭉실하게 들린다.
<첫사랑의 결혼을 듣는 나이>, <하얀 개가 있는 곳, 진도>처럼 디스토션 기타를 완전히 걷어낸 곡들은 블로그 친화적인 멜로디로 소년의 감수성을 노래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노래들이다. 타이틀곡 <친구에게>나 <아무래도 좋아> 같은 곡들은 또 어떤가. 델리 스파이스나 더더를 떠올리게 하는 쟁글거리는 경쾌함은 이후 한 번의 반전도 없이 지속되는데, 마치 메이저에 데뷔하는 인디 출신 락 밴드의 타이틀곡답다는 감상은 들어도 굳이 이 곡이 보드카레인의 곡이어야 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날 원해>, <A farewell song> 같은 곡들이 이전과의 연결고리로 보이긴 하지만, 이 곡에서도 감성의 분출은 분명, 의도적으로 감상의 편의를 위해 자제되고 있다.
이렇듯, 일전의 EP가 브리티시 락 특유의 ‘애매한 우울함’에 정서를 기댄 몇몇 곡들 - <Deja-vu>, <Cat’s diary>, <Nothing Special> - 로 주도되면서 자기 스타일을 확실히 했던 반면, 본 작은 각 곡에 들인 공이 귀에 확연히 밟힘에도 불구하고 너무 다양한 스타일의 혼재로 방향이 모호한 기획 앨범처럼 느껴진다. 이는 마치 보드카와 딸기 우유 사이에서의 미각적 갈등이랄까.
이것이 (홍보 문구 등을 보면 분명히, 최소한 기획사는 노리고 있는 것 같은) 주류로의 입성을 위한 선택이었다면 분명 나쁘진 않지만, ‘칭찬하고 싶은데 별 할 말이 없다’거나 ‘예전 모습도 좋았는데’ 정도의 아쉬움이 남는다고 하겠다. 이 앨범이 데뷔작이고, 그들이 해 오던 스타일이 있었음에도 굳이 ‘주류에 데뷔하는 밴드가 해야 할’ 법한 음악을 의식해 예상답안 같은 방향을 택해야 했는가 하는, 그런 종류의 아쉬움. 혹은, 그 때문에 곡들이 다들 평균점을 향해 달리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어중간함에 대한 아쉬움.
5곡의 EP에서 정규 앨범으로 넘어오면서 느껴지는 또 하나의 낯섦은, 이들 음악의 ‘익숙함’이다. 처음 몇 마디를 듣는 순간 곡의 전개 방향이 대충 그려질 만큼, 이 익숙함은 노골적이다. (사실 이는 이들의 첫 EP 때도 지적된 바 있지만, 그것을 ‘스타일’로 용인할 수 있을 정도의, 각 곡의 일관성이 존재했던 그 때와 다방한 스타일이 혼재하는 본 작의 경우와는 분명 차이가 있다.) 현악 세션, 피아노 소리 등이 종종 동원되어 앨범의 색을 다채롭게 해 주는 것 같지만, 곡들의 뻔한 전개는 이 다채로움을 ‘산만함’으로 만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앨범과 보드카레인이 그저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다. 마이 앤트 메리와의 비교는 그들에게 이후의 숙제로 남겠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기본기와 좋은 멜로디를 뽑아내는 능력은 분명 이들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앞에서는 분명 이들의 ‘익숙함’을 지적했지만, SG 워너비‘들’이 둥둥 떠다니는 현재의 주류 음악 속에서 이 정도의 ‘익숙함’은 차라리 친근함에 가깝다. 너무 유치하지도, 너무 외지지도 않은 그들의 균형 감각은 이후 그들의 음악 또한 큰 굴곡 없이, 안정적인 모습으로 계속될 거라는 기대를 하게끔 한다. (물론, 이 앨범의 성과가 그들의 음악적 입장과는 상관없이, 그 자체로 큰 외부요인이 되겠지만.)
어찌 보면 이 앨범을 둘러싼 (지극히 개인적인) 이런저런 불만들은 정말로 개인적인 차원의 것인지도 모른다. 한국의 메이저 시장에서, 인디 출신의 밴드가 성공적으로 데뷔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 고심을 필요로 하고, 또 그럼에도 얼마나 갈피를 잡을 수 없는지는 지금까지 수많은 밴드들이 처절한 실례로서 입증한 바 있지 않은가. 지금 보드카레인이 선택한 이 길 또한 그 속에서 얼마나 어필할 수 있을까… 그것이 마냥 걱정될 뿐이다. 가능성을 그저 가능성으로조차 보여줄 수도 없는, 창작자와 수용자 간의 깊은 소통의 단절에 대한 고심이 묻어 나오는, 괜찮지만 어딘가 아쉬운, 혹은 섭섭한 데뷔앨범이다.
※ 많은 분들이 말씀하신 바지만 역시 같은 말 한 마디. 대체 보드카레인의 음악과 ‘서울대 출신 아티스트’ 사이에는 어떤 함수관계가 있는 걸까. 홍보문구를 볼 때마다, 마치 UN의 김정훈을 ‘서울대 출신’으로 홍보하던 그 모습이 떠올라 그저 안쓰럽다. 굳이 가방끈 내밀지 않아도 충분히 괜찮을 한 밴드를 도매값으로 팔아넘기는 듯도 하고. 나라면 억울할 것 같다.

예상은 빗나갔다. 선택형 자살약 바이바이(buy-bye)의 시판이 허용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시판 직후부터 바이바이는 연일 판매량을 갱신했다. 바이바이의 성공은 무엇보다 자살 성공률에 따라 세 종류의 제품으로 나누어 판매한 데에 있었다. 각각 성공률 100퍼센트, 75퍼센트, 50퍼센트인 바이바이 삼종은 그 자체로 화제였고, 그 중 성공률 50퍼센트 바이바이가 소비를 주도했다.
“안녕을 사세요(buy-bye)”라는 친근한 카피를 내세운 광고도 주효했다. 특히 자살로 생을 마감한 유명인사들과 비슷한 모델들을 내세운 CF가 효과적이었다. 칼을 든 백인 미녀가 “바이바이가 있었다면 손목을 긋지 않았을 텐데…”라고 한다거나, 고층빌딩 꼭대기에 서서 “바이바이가 있었다면 뛰어내리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라고 읊조리는 CF는 바이바이의 장점을 잘 보여줬다. 또 총기자살로 생을 마감한 미국의 유명 뮤지션과 비슷하게 생긴 남자가 “바이바이가 있었다면 두개골을 부수지 않아도 되었을 걸…”이라고 중얼대는 CF도 있었다.
기존의 자살방법들을 대개 참담했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장기와 두개골을 파손시키는 방법이나 혈관을 끊어 과다출혈로 죽는 방법, 그리고 물에 뛰어들거나 목을 매 질식사하는 방법들은 심약한 사람들에게는 쉽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체에 심각한 훼손을 남겼다. 제법 낭만적으로 치부되었던 총기자살과 약물자살의 실상은 더욱 참혹했다. 모두 독한 용기가 필요했고, 실패할 확률도 높았으며, 때론 극심한 고통을 동반했다. 병원에서 약물주사를 통해 안락사하는 방법 말고는 자살이라는 동물적 행위 자체가 힘든 종류의 것이었다. 그런데 바이바이의 등장은 이것을 바꿔놓았다. 구매와 복용이 간편하고 일체의 고통이 없음은 물론 약간의 환각효과까지 있었다.
처음엔 바이바이의 처방을 누가 하는가가 문제였다. 의사가 해야 마땅하지만 사실 그들이 바이바이를 처방해준다는 건 스스로에게도 곤란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시판 허용 때와 마찬가지로 의사 처방이 필요 없는 약품으로 분류되었다. 대신 바이바이 구매자는 ‘채무 및 범죄가 없음’이라는 인증을 받아야 했다. 채무와 형사처벌을 피하기 위한 자살을 막기 위한 사회적-실은 사회를 위한- 안전망이라고들 했다. 또 고속도로 주행 중 바이바이를 복용하고 자살하는 사건들이 발생하자 운전 중 바이바이의 복용 및 소지가 금지되어 적지 않은 과태료와 함께 면허취소 등의 강력한 제재조치가 취해졌다. 방송은 바이바이 복용자에 의해 무고한 어린이들과 단란한 가족이 처참하게 사망하는 내용의 공익영상을 제작해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바이바이 포장에는 ‘어린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보관하세요’ 등의 경고문구 삽입이 의무화되었다.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십대들이 나이를 속이고 바이바이를 구입해 자살을 기도하는 일이 잇따르자 어느 칼럼니스트는 ‘죽음을 파는 시대에 고한다!’라는 제목의 제법 비장하고 비판적인 칼럼을 썼고, 각종 단체에서는 안티-바이바이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모 기독교 단체는 ‘바이바이 퇴치를 위한 구국기도회’까지 기획했다가 무슨 이유에선지 자진하여 철회하는 해프닝도 벌였다. 하지만 바이바이의 판매량은 매달 증가했다. 지하철 선로사고 급감 에 대한 보도나 사회적 비용절감에 대한 논의 등으로 순기능에 대한 인식도 확산되었다. ‘죽음을 파는 시대에 고한다!’를 쓴 칼럼니스트마저 바이바이를 먹고 자살하는 일이 발생하자-그는 50퍼센트 바이바이를 복용한 것으로 알려져 보다 체험적이고 비판적인 칼럼을 쓰려 했을 것이란 풍문도 있었다- 바이바이는 트랜드가 되었다. 이어 예쁜 여배우를 커버에 내세운 ‘바이바이와 함께 하는 음악 컬렉션’이 발매되고, ‘바이바이를 먹기 전에 꼭 보아야할 책과 영화 20선’, ‘바이바이와 떠나는 마지막 여행지 12선’ 따위의 책들도 출간되어 적잖이 팔려나갔다.
앞서 말했듯이 바이바이의 성공비결은 확률선택형이라는 데에 있었다. 특히 50퍼센트 바이바이는 자살에 실패한다 하더라도 자살기도를 통하여 몇 가지 목적-예를 들면 어떤 이들에게 슬픔이나 고통을 줘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환기시킨다거나-을 달성할 수 있었고, 실패했을 경우엔 새로운 삶의 기회를 부여받았다고 생각함으로써 다시 생을 시작하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었다. 물론 다른 경우도 있었다. 50퍼센트 바이바이를 5회에 걸쳐 복용하고도 살아남은 사람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확률적으로 가능한 일이라 3회 복용 후 생존자들도 종종 있었지만 5회까지 생존한 그는 특별히 취급되어 유명인사가 되었다. 제약사는 그에게 사은품으로 75퍼센트 바이바이 10정 구매권을 주었으나 사용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여섯 번째로 자살을 기도했을 때에도 그는 50퍼센트 바이바이를 복용했다고 한다. 그는 이 때 사망했다.
이처럼 치사율이 정확한 약을 만들어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고 제조법도 극비였다. 한때 경쟁사가 바이바이와 유사한 효능의 약품을 개발하여 시판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50퍼센트 바이바이보다 낮은 49퍼센트 자살 알약, 즉 ‘순한 자살’을 판매한다고 하여 전문가들 사이에 때 아닌 논쟁을 일으켰다. 확률이 반 이하라면 자살기도의 의미가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그러나 ‘순한 자살’ 49퍼센트는 좋은 판매성과를 보였고, 기존의 하얗고 약간 써보이던 바이바이 대신 ‘커피맛’ ‘딸기맛’ ‘쵸코맛’까지 개발하는 열의를 보였다. 이 때부터 바이바이의 시장점유율이 감소하였지만, 상황은 의외로 허탈하게 종료되었다.
‘순한 자살’의 실제 성공률이 광고와 달랐던 것이다. ‘순한 자살’ 49퍼센트의 성공률은 시판 초기엔 70퍼센트 정도였음이 드러났고, ‘커피맛’ ‘딸기맛’ ‘쵸코맛’ 개발 이후엔 4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사건으로 경쟁사는 과장광고 논란에 휩싸였으며 결국 ‘순한 자살’에 전량리콜이라는 특단의 조치가 내려졌다. 이후 바이바이가 다시 시장을 독점했지만 매출실적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고 수익증가율도 둔화되었다. 업계에서는 주 고객층 중 상당수가 이미 사망하였으므로 새로운 소비자 층을 만들어 내거나 소량생산과 고가마케팅전략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전망이 어둡다는 분석이 우세했다.
바이바이가 재기를 노리고 있을 이 무렵 선거열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선거 후 주문형 바이바이의 반짝 특수를 기대해고 있을 때, 일이 터졌다. 바이바이 제약사의 임직원들이 대거 구속되었다. 이 뉴스가 전해지자 일각에선 드디어 살인죄나 살인방조죄가 적용된다는 예단도 있었지만, 곧 약품허용 및 시판과정에서의 불법 로비 혐의임이 알려졌다. 다시 바이바이의 비윤리성에 대한 성토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것이 지난 정권의 유력인사와 정치인들까지 소환되는 정치 스캔들로 발전하자 포커스는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이후 바이바이 임직원들에 대한 재판 및 판결은 그다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다만 이 과정에서 바이바이의 공동개발자이자 제약사의 핵심임원이었던 인사에 의하여 바이바이가 자랑하는 정확한 자살성공률의 비밀이 공개되었다. 그리고 짤막하게 보도되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가장 중요한 작업은 치사율이 100퍼센트이며 고통 없는 약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 실험에 성공하자 다음은 쉬웠다. 100퍼센트 바이바이는 모두 이 약을 포장하여 판매했다. 75퍼센트 바이바이는 독약, 그리고 수면제와 환각제를 섞은 무해한 약을 각각 75대 25로 제조하여 판매했고, 50퍼센트 바이바이는 50대 50으로 제조하여 판매했다. 즉 가장 인기 있었던 50퍼센트 바이바이는 100개의 알약이 포장될 때 그 중 50개만 독약이었던 셈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유통금지 이후에도 성행하던 바이바이의 암거래는 자연스레 사라졌다.

개인적인 얘기를 먼저 해야겠습니다. 고백하자면 전 불싸조의 1집 앨범을 듣지 않았었습니다. 작년에 이들의 데뷔 앨범을 처음 봤을 때, 거기 그려져 있던 앨범 커버와 수록곡의 제목들, 그리고 불싸조라는 팀의 이름을 보며 굳이 이들의 음악을 찾아들을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처음 느낀 이들의 이미지는 인디 씬 초창기의 '이벤트 밴드'들, 즉 음악은 없고 이벤트와 쇼맨쉽으로 어필하는 그런 밴드들 딱 그것이었습니다. 거기에 팀의 베이스 연주자 조윤석은 그런 대표적인 '이벤트 밴드' 출신이었기 때문에 저의 생각은 곧 확신으로 바뀌게 됐습니다. 21세기에 아직도 이런 방식으로 음악 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하는 신기함이 들기도 했지만 그건 그냥 말 그대로의 신기함이었을 뿐입니다.
그 후에 제가 불싸조를 접하게 된 건 일본의 포스트 록 밴드 모노(Mono)의 내한공연에서였습니다. 그 공연에서 불싸조는 오프닝 밴드로 나왔었죠. 그때 들은 음악이 제가 처음 접한 불싸조의 음악이었습니다. 기타리스트의 횡설수설 멘트와 산만한 무대 진행을 보며 전 저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곧바로 튀어나오는 이들의 음악을 들으며 제 예상이 틀렸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어떤 음악을 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들었던 이들의 음악 한 곡은 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 산만함 속에서 뚜렷하게 들려오는 기타 멜로디는 저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그 인상적인 기타 멜로디는 곧 이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며 이들의 새 앨범을 구매하게 만들었고, 작년에 그냥 지나쳤던 1집 앨범까지 들어보게 만들었죠.
이들에 대한 정보를 찾으면서 밴드의 리더 한상철이 상당한 음악 애호가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지금은 폐간된 한 음악 잡지의 필자였으며, '삼식이(samsicke)'라는 아이디로 각 음악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던 꽤 유명한 리스너와 동일인물이란 걸 알게 된 것도 그 즈음이었습니다. 그의 이력을 확인하니 이 앨범에 담긴 다양한 음악적 스펙트럼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더군요. 앨범에서 'Fuck' 3부작 시리즈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는 <Too Big Too Fuck (#3)>와, 올해 초 사망한 힙합 프로듀서 제이 디에게 바치는 커버곡 <Time: The Donut Of The Heart (Jay Dee:1974-2006)>는 앨범에서 가장 인상적인 지점이며, 가장 의미가 있는 트랙이기도 합니다. <Too Big Too Fuck (#3)>에서 날 것의 사운드 사이로 들리는 기타 멜로디와 연약한 보컬은 이 앨범의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트랙이고, <Time: The Donut Of The Heart (Jay Dee:1974-2006)>는 한상철의 폭넓은 리스닝 배경을 떠올리게 하는 대표적인 트랙입니다. 그의 잡식성 음악취향은 이 앨범의 음악을 가리켜 '코믹로우모던개러지싸이키슈게이징' 사운드라 농담처럼 불러도 그리 농담처럼 들리지 않게 만들어줍니다. 그 외의 곡들 역시 거친 음들 사이에서 만만찮은 갈고리들을 하나씩은 품고 있습니다.
또한 앨범 곳곳에 삽입돼있는 한국 옛 영화들에서 따온 샘플링은 앨범을 듣는 또 다른 즐거움이기도 합니다. (한상철의 설명에 따르면 故김형곤이 출연한 <반달가면>과 최재성, 박중훈이 출연한 <내 사랑 돈키호테> 등의 영화 사운드트랙들에서 따온 거라 하더군요.) 곡들 사이로 튀어나오는 영화의 다이얼로그들은 때로는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만들거나, 때로는 웃음을 터뜨리게도 만들며 음향 효과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데, 그 가운데 "고거 참 감칠맛 나게 소리 잘한다."란 인상적인 대사는 이들의 음악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할 것입니다. 오해는 풀라고 있는 것이고, 이제라도 불싸조에 대한 저의 오해를 풀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오해를 풀 수 있는 장을 마련해준 모노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 할까요? 아니면 그 공연을 주최한 레이블에 감사하단 말을 해야 할까요? 하지만 무엇보다 오해를 풀 수 있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건 그날의 공연장에서 울려 퍼지던, 불싸조가 만들어낸 바로 그 기타 멜로디였습니다.

밸리진 기획 취지
김창기 이범용 [창고]
밸리진 기획 취지
‘2005 광명음악밸리축제’에서 3일간의 메인무대 컨셉은 ‘한국음악창작자의 역사’입니다. 그런 기획 하에 총6개의 프로그램 구성을 하였고, 10월 7일(금요일)에 하나뮤직 스페셜, 밸리 초이스, 10월 8일(토요일)에 인디음악 10년, 10월 9일(일요일)에 실용음악과난장, New Currents, 민중음악 30년 코너를 준비하였습니다. 처음에 메인무대 컨셉을 생각하면서 고심했던 점은,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음악전문축제’를 마련하기 때문에 이에 걸맞는 주제를 정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대중음악과 뮤지션을 논할 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이상하리만치 도외시되고 있는 것을 불러내서 본 축제에서 생명을 불어 넣어주고 싶었습니다. 그게 바로 ‘음악창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관점의 결여로 한국 최초의 싱어송라이터로 평가받는 모던포크의 거장 한대수와 같은 뮤지션이 동시대의 여타 가수들과 차별성이 없어 보이는 것이고, 정태춘이나 안치환을 아직도 민중음악뮤지션 범주 내에서 보는 것이고, 김창기는 그저 동물원의 보컬리스트일 뿐이고, 연영석으로 인한 노동음악 창작의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고, 인디씬의 이기용(허클베리핀)이나 이장혁, 원종희(럭스)의 노래들이 진짜 노래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분명히 ‘(진정한 뮤지션에 대한) 존중’이라는 단어가 빠진 한국음악계를 단적으로 말하는 것이고, 더 넓게는 한국 대중문화의 천박한 수준을 가리키는 것일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음악축제임에도 불구하고 다소 어려운 느낌의 ‘음악창작’이라는 단어를 핵심 키워드로 잡은 것이고, 이는 지금이라도 언급하지 않으면 더욱 더 창피한 지경이 될 것 같아서입니다.
하지만 난점은 있습니다. 한국대중음악을 이해하는 사람들이라면 메인무대 전체 프로그램 구성과 뮤지션 선정을 수긍하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설명이 필요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출연 뮤지션들이 공중파방송에 자주 나오는 부류도 아니고, 발표된 앨범을 기준으로 엄격한 선정을 하다보니 보통 언급되는 가수나 자주 이벤트무대에 오르는 가수들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005 광명음악밸리축제 사무국의 출연 뮤지션 선정 이유를 명확히 밝히고, 출연하는 뮤지션들을 좀 더 널리 정확하게 알리기 위하여 각 요일별(금,토,일)로 홍보용 책자와 부록CD를 만들 예정입니다.
축제 홈페이지의 밸리진 코너는 각 200p 분량의 CD부클릿 텍스트를 바탕으로 구성되는 컨텐츠이고, 2005 광명음악밸리축제의 성격과 지향점을 잘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2005 광명음악밸리축제’는 한국대중음악의 역사를 진정한 뮤지션들을 위주로 다시 쓰고 싶은 것입니다.
‘음악창작자의 역사’ 총론
한대수(1968)
‘음악창작자의 역사’ 총론
<대중가요>
대중가요의 사전적인 의미는 “서양음악이 도입되던 시절부터 대중 사이에서 즐겨 불려온 세속적인 노래”이다. 그래서 “한국에서의 대중가요는 서양음악의 수입과 더불어 시작된다”고 본다. 즉, 선교사들에 의하여 찬송가를 중심으로 한 서양음악이 들어오자(1885), 서양의 노래들이 번안되어 불리기 시작하였고, 보통 이를 창가(唱歌)라고 하였다. 그리고 대중가요를 노래하는 본격적인 가수의 등장은, 축음기가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1930년대 이후이고, 가요음반이 대중의 기호물이 되면서 연극배우들 중에서 막간무대에 등장했던 인기배우들이 대거 가요곡을 취입하였다.
하지만 용어적으로 볼 때 대중가요는 다소 모호한 분류항이다. 샹송, 칸초네처럼 ‘국가적인’ 개념도 없고 ‘음악장르’ 개념도 아니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대중가요의 영역 안에는 국악, 민요, 가곡뿐만 아니라 민중음악, 서구대중음악의 형식(록, 블루스, 재즈, 포크 등)을 차용한 ‘한국 대중음악’까지도 빠져 있다. 지금 대중가요는 거의 일제시대 때에 도입된 일본의 엔카에서 비롯된 트로트 계열의 음악과 서구대중음악의 형식 중에서 ‘한국형 댄스, 발라드’로 정착된 팝계열의 음악만을 가리킨다. 그리고 서구에서는 보통 음악을 크게 클래식과 팝으로 나누고, 팝을 다시 록, 재즈, 블루스, 소올, 포크, 트래디션널(전통음악), 팝(하위 장르로써의 팝), 힙합, 테크노 등의 장르로 분류하는데, 대중가요에는 그런 개념이 없다. 그래서 현재 대중가요라는 ‘용어’는 매우 지엽적인 분류에 머물고 있고, “대중가요는 저열하다”는 일반적인 인식 때문에 국악, 민요, 가곡을 부르는 뮤지션들뿐만 아니라 민중음악을 하는 뮤지션들도 대중가요의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것을 꺼리고 있다. 이런 이유로 90년대에 들어와서는 ‘한국대중음악’으로 명칭을 바꾸어 부르자는 논의도 있었다.
<대중음악>
90년대 중반 이후로는 대중음악에 대한 ‘비평’이 본격화되면서 대중음악과 대중음악인에 대한 개념과 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고 있는 중이다. 일례로 노래 부르는 ‘가수’ 중심의 논의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예전에는 대중음악의 구조를 ‘노래와 반주’로 보았고, 그래서 가수가 있고 반주자들이 가수를 보조해주는 식이었다. 하지만 지금 가수는 음악 구성에서의 한 파트일 뿐이다. 전체적으로 작사/작곡, 편곡, 프로듀싱, 보컬, 세션으로 구성된 음반제작에서 ‘보컬 파트를 담당하는 사람’으로 인식된다. 물론 솔로 가수를 보는 일반적인 시선은 그렇지 않겠지만, 이미 대중음악이 ‘산업’이 되어버린 지금 고도의 매니지먼트 시스템 하에서 존재하는 가수의 위치는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음악비평시 솔로 가수를 얘기할 때도 오히려 작사/작곡, 편곡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가수는 보컬리스트로써 세션과 함께 얘기되곤 한다. 즉, 음악비평에서 한 가수의 역량은 그가 갖고 있는 가창력이 아니라 얼마나 뛰어난 ‘창작곡’을 부르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고, 그의 보컬이 얼마나 뛰어난 ‘세션’과 화합을 이루는지 여부로 판가름이 난다. 그리고 이걸 기술적으로 가능케 하는 것이 녹음(레코딩, 믹싱, 마스터링)기사의 역량이고, 이를 전체적으로 조율하는 사람이 프로듀서이다.
<음악창작자의 역사>
영미권의 대중음악 역사에서는 보통 1960년대 초반 밥딜런(Bob Dylan) 이후를 앨범아티스트의 시대라고 말하고, 이는 싱글 단위가 아니라 ‘작품으로서의 음반’을 만드는 뮤지션들이 생겨났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대중음악을 만드는/보는 새로운 관점이고, 현재 대중음악비평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지칭하는 음악창작자는 ‘앨범아티스트’를 의미하고, 정확히는 1968년에 국내에 들어와서 활동하기 시작한 ‘한국 모던포크의 시조’이자 ‘싱어송라이터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한대수 이후의 앨범아티스트들을 말한다. 그래서 온전한 의미의 음악창작자라고는 지칭할 수 없는 한영애나 이소라도 [바라본다](1988/서라벌레코드)와 [눈썹 달](2004/T-Entertainment)이라는 훌륭한 앨범을 발표한 뮤지션이므로 여기 ‘음악창작자’의 범주에 넣었다. 즉, ‘앨범아티스트의 역사’라고 하지 않고 굳이 ‘음악창작자의 역사’라고 한 이유에는 그 용어가 낯설지 않음도 있지만 이번 광명음악밸리축제의 키워드인 ‘음악창작’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음악축제는 학술제가 아니고, 음악기획자는 학자가 아니므로 ‘음악창작자의 역사’ 또는 ‘앨범아티스트의 역사’라는 타이틀을 달더라도 ‘사료’로서의 접근에 충실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보통 음악매체가 (독단적인) 편집방향성에 의해서 뮤지션을 선택하고 그의 음악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처럼, 음악축제사무국은 자체의 ‘기획 포인트’에 충실해서 뮤지션들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자에서 거론된 뮤지션들만이 한국음악창작자들의 표본이 아닐 수는 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감히 ‘음악창작’을 키워드로 삼는 음악축제에서 선택한 뮤지션들이므로 여태까지 일반적으로 거론하던 ‘국민가수’ 선정이 타당한지, ‘뛰어난 가창력/연주’ 개념 등이 뮤지션을 평가할 때의 진정 본질적인 문제인지를 다시 생각할 여지를 주리라고 생각한다.
‘인디음악 10년’ 총론
허클베리 핀
‘인디음악 10년’ 총론
<‘인디뮤직씬’ 생성되기까지>
인디뮤직씬(Indie Music Scene)은 보통 인디뮤지션, 인디레이블, 인디음반유통망, 라이브클럽으로 구성된다고 보고, 여기에 이들을 다루는 매체와 필자들이 공존한다. 한국에서는 영미권이나 일본에서 '문화적으로/산업적으로' 정착된 '인디뮤직'의 개념이 들어와서 인디뮤직씬이 시작되었다기보다는 다분히 우발적으로, 특히 얼터너티브록의 전세계적인 인기에 힘입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너바나(Nirvana)와 같은 그런지록(Grunge Rock) 밴드의 인기 여파로 그 뿌리인 70년대 펑크(New York/London Punk)가 장르적인 재조명을 받았고, 이는 한국에서 인디뮤직이 초기에 펑크와 그런지록의 다른 이름으로 인식되었던 이유일 것이다. 즉, 인디뮤직은 '장르'가 아닌데도 말이다. 펑크(일반적으로 '런던펑크'로부터 유래된 펑크를 가리킴)가 '(라이프)스타일'과 '음악장르' 둘을 아우르는 단어라면, 인디뮤직은 '태도(뮤지션쉽)'와 '산업'이 결합된 단어로 볼 수 있다.
앞서 말한 한국에서 인디뮤직씬의 '우발적인 시작'은 첫 번째 라이브클럽이었던 '드럭(Drug)'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다. 드럭은 처음부터 라이브클럽이 아니었고, 인디뮤직씬 내에서 기능하는 공연공간의 모습도 아니었다. 클럽 드럭은 1994년에 영국의 전설적인 펑크밴드 클래시(The Clash)의 [London Calling](1979) 재킷 사진이 복사된 4절지에 '펑크록의 이상'이 격문처럼 쓰여진 포스터를 문에 붙이고 개장하였지만 당시는 정기적인 공연을 염두하거나 인디뮤지션들의 근거지 개념은 없었다.
초기 드럭의 공간은 뮤직비디오가 나오는 조그만 TV들을 소도구로 이용한 '바/카페'의 개념이었고, 단지 한쪽에 밴드들이 연주를 할 수 있는 그믈망이 앞에 처진 작은 장소가 마련되었다는 점이 달랐다. 이는 당시 신촌의 현대백화점 뒷쪽에 있었던 록카페들(우드스탁, 놀이를 하는 사람들, 도어스 등과 같이 매니아 취향의 음악을 들으면서 술을 마시고, 때로는 자발적인 가무를 하던)의 확장된 개념의 클럽이었다. 하지만 너바나의 여파로 그런지록이 인기를 얻고 70년대 펑크가 재조명을 받으면서, 특히 1994년 4월 8일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이 사망하여 '그런지의 전설'로 남으면서 한국에서도 카피밴드 수준의 그런지록과 펑크밴드들이 생겨났고, 이들의 연주가 수용될 수 있었던 드럭은 흔히 말해 드롭아웃(drop-out)들의 해방구로 회자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당시는 '공연장'의 개념만 있어서 어느 정도 전문적인 수준의 연주를 하는 밴드들(대개 헤비메틀 밴드들)은 무대에 설 수 있었지만 그 이하 수준의 밴드들은 대중 앞에서 공연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물론 라이브클럽이 '아마추어 밴드들이 공연하는 장소'는 아니고, 클럽마다 '오디션'을 통해서 최소한 어느 정도 연주 수준을 가진 밴드들을 무대에 세운다. 하지만 1994-1995년 당시 아마추어 카피밴드일 수 밖에 없었던 그런지/펑크밴드들도 공연을 할 수 있었던 '새로운 개념'의 장소로 라이브클럽이 그 역할을 했다는 점이 중요한 의미이다. 그 결과 한국에서 인디뮤직씬이 탄생될 수 있었다.
1995년 4월에는 드럭에서 커트 코벤인 1주기 추모공연이 열렸고, 이 때를 즈음해서 '드럭 밴드'라는 이름으로 정기 공연 체제가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이 해부터 크라잉 넛, 언니네 이발관, 델리 스파이스 등이 연주를 하기 시작했고, 그 중에서도 크라잉 넛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드럭은 점차 펑크록 중심의 클럽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드럭이 펑크록의 메카로 자리잡은 것은 1996년에 홍대 주차장거리와 명동에서 있었던 모잡지 주최의 '스트리트 펑크쇼'에 드럭의 밴드들이 주축이 되어 참여하면서부터이다. 이 당시 보여주었던 관중들의 폭발적인 열기는 매체를 타고 전파되었고, 이런 호응을 얻어서 드럭이 처음 만든 음반이 바로 [Our Nation](1996/드럭)이었다.(이 음반에는 크라잉 넛과 옐로우 키친이 독립적인 모양새로 참여하였다.) 이게 바로 인디레이블 '시스템' 이전에 만들어진 초기 인디 앨범이고, 그 해에는 '배드 테이스트'의 [One Man Band... Badtaste](1996/BMG)도 발매되었다.
드럭 개장 이후로는 홍대/신촌 일대에 많은 라이브클럽들이 생겨났고, 1997년에 인디레이블 강아지문화예술, 인디 등이 생기면서 인디레이블 '시스템'이 가동되었다. 그리고 1999년에 블루노이즈(www.bluenoise.com, 1월), 웨이브(www.weiv.co.kr, 7월), 가슴(woodwolf.cafe24.com, 11월)이라는 '독립매체'들이 생겨나면서 인디씬을 조명하는 기사와 동영상이 본격적으로 양산되었다. 이로써 본격적으로 한국 인디뮤직씬이 돌아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올 2005년, [Our Nation](1996/드럭)부터 따져서 '한국 인디뮤직 10년'의 역사를 기록하게 되었다. 그런데 너무나 조용히, 별다른 의미 부여도 없이 넘어가려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한국 대중음악의 '유일한 희망'으로까지 여기는 인디뮤직씬이건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1996-1998년 무렵 그렇게 입에 땀을 내면서 인디씬을 얘기하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고, 특집기사로 문화면을 도배하던 매체들은 왜 이렇게 잠잠할까? 카바레사운드를 찾아가던 TV PD들과 볼빨간을 인터뷰하던 기자들과 드럭의 문지방을 닳게 만들었던 필자들은 왜 당시 그런 기획을 했는지 궁금하게 만든다.
<새로운 패러다임 '홈레코딩' - 뮤지션 스스로가 '음반제작의 주체'가 되기>
1999년을 기점으로 초기 인디레이블을 주도했던 강아지문화예술과 인디가 시장의 한계에 부딪쳤고, 그로써 부진한 활동을 하면서 잠시 과도기가 있었다. 그 와중에 홈레코딩(home-recording) 기술과 관련 소프트웨어, PC(하드웨어) 발전에 영향받아 인디레이블 자체의 패러다임도 서서히 변해가기 시작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대개의 인디뮤지션들은 '자신이 운영하지 않는' 저자본 레이블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방식이었는데, 인디레이블이 메이저레이블과는 매니지먼트 방식이 다르더라도 소속 뮤지션들이 자본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러다가 스위트피(Sweetpea, 델리 스파이스의 김민규)가 문라이즈(moonrise) 레이블을 만든 2000년 이후로는 점차 홈레코딩이 보편화되면서 뮤지션들의 입장에서는 비로소 '자생적인' 인디뮤직씬이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스위트피의 1집 [Never Ending Stories](2000)를 필두로 전자양(Dencihinji) [Day Is Far Too Long](2001), 마이 언트 매리(My Aunt Mary) [2nd My Aunt Mary](2001), Where The Story Ends [안내섬광](2001), 토마스 쿡(Thomas Cook) [Time Table](2001)이라는 명반들을 발매하였던 '문라이즈'는 한국 인디씬을 한 단계 도약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본다. 왜냐하면 문라이즈의 결과물들을 보고나서 뮤지션들은 새로운 인디레이블의 패러다임을 실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고, 자신이 음반제작의 주체가 되는 것이 장기적으로 음악을 계속할 수 있는 방편이 될 수 있음을 깨닫았기 때문이다.
이 여파는 2002년 이후로 인디씬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3년만 보더라도 한국 음악씬을 통 털어서 수작으로 얘기되는 코코어(Cocore) [Super Stars](2003/쌈지), 푸른새벽(Bluedawn) [Bluedawn](2003/카바레사운드), 참피온스(Champions) [Tournament - EP](2003/거북홈레코딩스)와 같은 앨범들은 홈레코딩 작품들이었고, 이제 이들의 앨범이 단지 홈레코딩이란 이유로 퀄리티 문제를 따지던 시대는 지나갔다. 특히 타프카 부다(Tafka Buddah) [Trauma](2003/카바레사운드), 킵루츠(Keeproots) [Keepin' The Roots](2003/가라사대)를 위시한 대부분의 힙합 앨범들은 홈레코딩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인디가 아니더라도 2002년 최고의 앨범으로 평가받는 장필순 [Soony6](2002/하나)나 2004년 제1회 한국대중음악상에서 대상격인 '올해의 앨범'을 수상한 더더(The The) [The The Band](2003/Ezim)도 기본적으로 홈레코딩 앨범이다. 그리고 롤러 코스터의 앨범들이 홈레코딩인지 아닌지 누가 구분할 수 있겠는가?
<한국의 인디뮤직 10년, 우리에게 남긴 것>
인디뮤직씬이 우리(나)에게 남긴 것은 한국 대중음악에 대한 '희망'이고, 이 때문에 나 같은 음악필자들은 계속 글을 쓰는 것이 가능하다. 이 씬으로 인해 좋은 앨범들을 꾸준히 접할 수 있다는 음악매니아로서의 소박한 기쁨도 있지만, 이 씬으로 인해 그나마 한국 대중음악시장에서 '다양성'과 '질'이 담보되고 있기 때문에 대중음악이 '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참고 기다리고 또한 '모색'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음은 그간 인디뮤직씬에서 나온 손꼽을만한 명반들이고, 이게 지금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이다. 결국 10년이 지나도 사람들에게 얘기되는 음악은 '좋은 앨범'이고, '뛰어난 싱글'이다. 그러니 아래와 같은 음악들이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일 수 밖에.
‘대중음악 100대 명반’ 소개글
럭스
‘대중음악 100대 명반’ 소개글
이전에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 선정 작업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폐간된 대중음악전문지 서브(SUB) 1998년 12월호에 제가 연재하던 ‘Sub Special Text’ 마지막회로 이 기획을 했습니다. 당시 기획취지로 “과연 한국대중음악사를 진정으로 빛낸 뮤지션들은 누구이고, 음반들은 어떤 것일까? 우리는 여태까지 ‘Rolling Stone 선정 역사상 100대 명반’, ‘A.P. 선정 90년대 음반 90선’, ‘VOX 선정 올해의 음반 100선’ 등은 보아왔지만 국내 음악매체에서 이러한 것을 심도 있게 다룬 것을 본 기억은 없다. (중략) ‘음반 순위 매김’에 무슨 의미가 있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겠지만, 이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다시 얘기한다고 해도 거의 비슷한 얘기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음악평론가의 역할로 ‘음반가이드’를 첫 번째로 꼽는 저로서는 정말로 잘 뽑은 음반리스트가 음악매니아들에게는 현실적으로 가장 도움이 된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저 또한 어렸을 때 선배 음악평론가들이 음악매체에 올린 자신의 favorite album list 같은 글들을 참고하면서 음반을 모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때가 되면(?) 근사한 앨범리스트 작업을 해보기를 열망했었습니다. 음악평론가 이전에 음악매니아로서 좋은 선배 역할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거의 없어진 ‘오프라인 음악감상회’에서처럼 말입니다.
다시 7년만에 한국대중음악 명반 선정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1998년 당시와 현재를 비교해보면 다른 점들이 있습니다. 그 때는 인디레이블 시스템이 막 가동되었던 시기면서 델리 스파이스, 언니네 이발관, 허클베리 핀, 미선이 등의 밴드들이 인디씬의 대표 주자로 부상하던 시기였고, 지금은 앞의 밴드들을 중심으로 살아남은 여타 밴드들이 명실상부하게 한국대중음악씬의 중심축으로 자리잡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인디레이블 운영 방식도 홈레코딩 기술의 발전과 보편화로 인해 2000년 이후로는 뮤지션의 ‘자가 레이블’ 형태가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그래서 홍보와 유통시스템의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좋은 앨범 제작만큼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어서 한국의 인디음악씬은 한국대중음악의 미래이자 희망으로 부르고 싶습니다. 사실 지금 ‘음악창작’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 인디씬말고 그 어디에 있습니까?
2005년 이 시점에서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을 뽑으면서 역시 중점을 둔 것은 ‘음악창작자’와 ‘좋은 작품’입니다. 왜냐하면 대중예술을 얘기할 때 핵심인 ‘창작’이란 것을, 특히나 대중음악을 논할 때 사람들이 너무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대중음악에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같이 얘기하고 싶었고, “나는 왜 음악을 듣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하고 싶었습니다.
김창기의 [하강의 미학](2000/하나뮤직)을 1위로 선정한 것을 놓고 의견이 분분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김창기는 한대수, 조동진, 정태춘에서 인디씬의 이기용, 이장혁, 김민규 등으로 이어지는 ‘한국음악창작자의 계보’의 연결점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솔로 1집 [하강의 미학]은 [창고](1997/삼성뮤직)와 함께 김창기 음악의 결정체라고 생각합니다. ‘창작’이라는 관점에서 대중음악을 논한다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만약 이 부분이 어색하게 느껴진다면 그간 한국대중음악계에서는 오히려 노래와 뮤지션을 바로 보려는 시도들이 별로 없었음을 반증한다고 여깁니다.
한국 대중음악사 100대 명반
김창기 [하강의 미학]
한국 대중음악사 100대 명반
(박준흠 선정)
※ 추후 코멘트를 붙인 후 다시 게재하겠습니다.
※ 현재 축제사이트에서는 업데이트를 진행 중입니다.
1. 김창기 : 하강의 미학 (2000/하나뮤직)
2. H2O : Today I (1993/킹레코드)
3. 어떤날 : 1960․1965 (1986/서울음반)
4. 시인과 촌장 : 시인과 촌장 (1986/서라벌레코드)
5. 김현식 : 5집 (1990/서라벌레코드)
6. 전인권․허성욱 : 머리에 꽃을 “1979-1987 추억의 들국화” (1987/서라벌레코드)
7. 안치환 : 4집 (1995/킹레코드)
8. 한대수 : 무한대 (1989/신세계음향)
9. 장필순 : Soony6 (2002/하나뮤직)
10. 연영석 : 공장 (2001/맘대로레이블)
11. 산울림 : 2집 (1978/서라벌레코드)
12. 이상은 : 공무도하가 (1995/폴리그램)
13. 정태춘․박은옥 : 92 장마, 종로에서 (1993/삶의문화)
14. 김광석 : 다시부르기2 (1995/킹레코드)
15. 한영애 : 불어오라 바람아 (1995/디지탈미디어)
16. 허클베리 핀 : 18일의 수요일 (1998/강아지문화예술)
17. 플라스틱 피플 : Songbags Of The Plastic People (2003/카바레사운드)
18. 김광진 : 솔베이지 #04 (2002/서울음반)
19. 김창기․이범용 : 창고 (1997/삼성뮤직)
20. 럭스 : 우린 어디로 가는가 (2004/스컹크)
럭스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21. 유앤미 블루 : Cry... Our Wanna Be Nation! (1996/송)
22. 이정선 : 30대 (1985/한국음반)
23. 전인권 : 전인권 (1988/서라벌레코드)
24. 델리 스파이스 : Welcome To Delihouse (1999/뮤직디자인)
25. 언니네 이발관 : 꿈의 팝송 (2002/쿠조)
26. 위퍼 : Weeper (2001/원뮤직)
27. 코코어 : Boyish (2000/The Boo)
28. 푸른 새벽 : Bluedawn (2003/카바레사운드)
29. 동물원 : 2집 (1988/서울음반)
30. 조동진 : 5집 (1996/킹레코드)
31. 작은거인 : 작은거인 (1981/오아시스)
32. 김두수 : 자유혼 (2002/리버맨뮤직)
33. 노 브레인 : 청년폭도맹진가 (2000/문화사기단)
34. 미선이 : Drifting... (1998/라디오)
35. 봄․여름․가을․겨울 : Best Of The Best (1997/동아기획)
36. 이승렬 : 이날, 이때, 이즈음에.... (2003/플럭서스)
37. 이소라 : 눈썹 달 (2004/T-Entertainment)
38. 이장혁 : Vol.1 (2004/12Monkeys Records)
39. 코스모스 : One And Only (2001/석기시대)
40. 이문세 : 5집 (1988/킹레코드)
장필순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
41. 장필순 :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 (1997/킹레코드)
42. 한대수 : 멀고먼-길 (1974/신세계음향)
43. 듀스 : Force Deux (1995/월드뮤직)
44. 김현식 : 3집 (1986/서라벌레코드)
45. 신촌블루스 : 3집 (1990/서라벌레코드)
46. 한영애 : 바라본다 (1988/서라벌레코드)
47. 이상은 : 이상은 (1993/제일)
48. 정태춘․박은옥 : 정동진/건너간다 (1998/삶의문화)
49. 따로 또 같이 : 3집 (1985/서라벌레코드)
50. 들국화 : 들국화 (1985/서라벌레코드)
51. 신중현과 뮤직파워 : 1집 (1980/지구레코드)
52. 허클베리 핀 : 올랭피오의 별 (2004/Sha Label)
53. 산울림 : 1집 (1977/서라벌레코드)
54. 어어부 프로젝트 밴드 : 개, 럭키스타 (1998/펌프)
55. 어떤날 : 2집 (1989/서울음반)
56. 김민기 : 김민기 (1971)
57. 더더 : The The Band (2003/서울음반)
58. 다섯손가락 : 다섯손가락 (1985/서울음반)
59. 노이즈가든: Noizegarden (1996/베이)
60. 바세린 : The Portrait Of Your Funeral (2002/GMC)
비행선 [아름다운 비행 Part.1]
61. 비행선 : 아름다운 비행 Part.1 (2004/비행선)
62. 99 : 스케치북 (1998/강아지문화예술)
63. 크래쉬 : Terminal Dream Flow (2000/록)
64. 한상원 : Funky Station (1997/디지탈미디어)
65. 강산에 : 나는 사춘기 (1994/킹레코드)
66. 삐삐 롱 스타킹 : 원 웨이 티켓 (1997/동아기획)
67. DJ DOC : The Life... Doc Blues 5% (2000/디지탈미디어)
68. 이광조 : 세월가면 (1987/성음)
69. 주석 : Welcome 2 The Infected Area (2002/MP)
70. V.A. : 우리노래 전시회 1 (1985/서라벌레코드)
71. 연영석 : 숨 - The Breathe (2005/맘대로레이블)
72. 스왈로우 : Sun Insane (2003/Sha Label)
73. 아무밴드 : 이.판.을.사 (1998/인디)
74. 스위트피 : Never Ending Stories (2000/문라이즈)
75. 슬로우 쥰 : Grand A.M. (2004/롤리팝)
76. 마이 언트 매리 : 2nd My Aunt Mary (2001/문라이즈)
77. 바이닐 : Estrogenic Vibe (1999/인디)
78. 카리스마 : Warning (1988/서라벌레코드)
79. 홀리마쉬 : Infliction Of The Morbid Intention (2003/주신)
80. 시나위 : 5집 (1995/워너뮤직)
볼빨간 [야매]
81. 신촌 블루스 : 신촌 블루스 (1988/서라벌레코드)
82. V.A. : Rock In Korea Vol.1 (1989/성음)
83. V.A. : A Tribute To 신중현 (1997/서울음반)
84. 김현철 : 1집 (1989/서라벌레코드)
85. 가리온 : Garion (2004/Ales Music)
86. 롤러 코스터 : Absolute (2002/T-Entertainment)
87. 벌거숭이 : 벌거숭이 (1985/한국음반)
88. 사랑과 평화 : 2집 (1979/서라벌레코드)
89. 송골매 : 1집 (1979/지구레코드)
90. 서태지와 아이들 : 4집 (1995/반도음반)
91. 이현도 : D.O Funk (1999/디지탈미디어)
92. 이종만 : 이종만 (1988/현대음향)
93. 임지훈 : 임지훈 (1987/예음)
94. CB Mass : Massappeal (2003/크림)
95. V.A. : A Walk Around The Corner (2002/Io Music)
96. V.A. : Techno@kr (1999/21C Groove/Dmx Trax)
97. O.S.T. :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 (2002/Good International)
98. 윤도현밴드 : 2 (And Band) (1997/다음)
99. 은희의 노을 : Vol. 0.5 "Spring" (1999/카바레사운드)
100. 볼빨간 : 야매 (2001/Imstation)
연영석 [공장]

여린 기타로 울리는 생명의 노래
2000년대 민중가요 진영의 가장 큰 특징중의 하나는 지난 8~90년대 민중가요진영의 활동이 대체로 노래패 중심으로 이루어졌던데 반해, 이제는 솔로로 활동하는 개인창작자들의 수가 노래패의 수보다 많다는 것이다. 꽃다지, 노래공장, 맥박, 소리타래, 아름다운 청년, 우리나라, 젠, 좋은 친구들, 천지인, 희망새 등 적지 않은 수의 노래패(그룹)들이 여전히 활동을 하고 있지만 개인창작자들의 수가 그보다 두배나 많은 것은 이전과는 확실히 다른 점이다. 이것은 지난 9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된 현상인데 노찾사, 노래마을, 꽃다지 등 당시 노래운동을 대표했던 노래패에서 활동했던 창작자들이 팀활동의 중단으로 인해서이거나 개인적인 창작욕구를 펼치기 위해서 솔로로 활동하기 시작하며 나타난 경향이다. 권진원, 안치환, 이정열, 이지상 같은 경우를 예로 들 수 있을텐데 이러한 경향은 9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더욱 심화된다. 흥미로운 것은 기존의 노래패에서 솔로로 독립하는 경향이 대폭 확대되는 것과 함께 소수이지만 처음부터 솔로로 활동하는 민중가요 창작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박준, 연영석과 같은 경우 이들은 이전에 어떠한 노래팀에서의 활동도 없이 개인활동으로부터 민중가요계에 발을 딛기 시작했다.
이는 90년대 시민사회운동이 다양한 주제로 분화되며 재편된 상황과, 팀활동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자신만의 음악활동을 펼치고자 하는 창작자들의 욕구가 맞물리며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 이전에 노동과 민주, 통일 등의 담론을 중심으로 했던 사회운동이 여성, 인권, 생태/환경, 지역 등의 영역으로 확장되며 분화된 것은 단일한 패러다임 아래 뭉치는 방식으로는 승리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에 기반한 것이며 저항의 방식들이 보다 다양하고 세밀해져야 한다는 논리였다. 예전에는 하나의 조직이 모든 문제를 다 다루는 방식이었지만 이제는 각기 다른 조직이 서로 다른 문제를 가지고 싸우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와 맞물려 민중가요진영 역시 노래패 중심의 종합적이고 단일한 목소리를 내는 방식에서 각기 다른 목소리를 내는 방식으로 변모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오랫동안 팀활동을 하던 이들이 자신만의 다른 음악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결합되면서 지금처럼 개인창작자의 수가 노래패(팀)의 수보다 많아진 것으로 보인다.
개인창작자들의 수가 급증하면서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당연히 민중가요진영의 음악적 창작물이 다양해졌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민중가요 진영의 음악이 노동해방, 반미자주통일, 민주쟁취 등을 주제로 한 서정적인 노래와 행진곡 풍의 노래로 양식화되어 있었던 상황에서 다양한 개인창작자들은 기존 작품들과는 다른 이슈를 다른 음악적 양식으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대구의 '우리여기에' 출신인 박창근은 그 중에서도 연영석이나 유정고 밴드 등과 함께 90년대 이후 달라진 민중가요 진영의 흐름을 대표할 수 있는 젊은 창작자이다. 그가 1999년에 내놓은 1집 'Anti Mythos'는 음악적으로 다소 아마추어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생생하고 새로운 기운으로 가득 차 있던 앨범이었다. 기존의 민중가요와는 달리 세계와 존재의 본질에 대해 묻는 철학적인 가사와 다양한 질감이 동시에 묻어나는 보컬의 매력은 당시 대구에서 활동하던 박창근의 존재를 알리기에 충분했다. 그후 밴드 가객 등의 활동을 거쳐 6년만에 내놓은 2집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기회를'은 박창근의 음악적 지향이 보다 분명해진 앨범이다.
스스로 작사, 작곡, 편곡, 노래, 기타 연주, 음악감독 등 거의 모든 역할을 담당해서 내놓은 2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생태주의적 철학에 기반한 문제제기이다. 기존의 민중가요 진영에서 가지고 있던 환경에 대한 인식은 지나친 개발을 반대하고, 자연을 보호하고자 하는 일반적 의식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내용을 담은 곡은 꽃다지, 손병휘, 안치환, 한돌 등의 앨범에 담겨있는 몇몇 곡뿐이었다. 그러나, 박창근의 2집은 앨범의 중심적인 흐름을 생태주의적 철학에 기반한 노래들로 채운 전면적 생태주의 앨범이다. 그는 "햇볕 따사롭던 어느날 소녀 손에 쥐어진 소세지"와 "멋진 그녀와의 데이트"에서 먹는 "화려한 조명 아래 스테이크"를 예로 들며 "오늘도 그대는 남의 살을 몇 점이나 삼키셨"는지, "남의 젖을 몇통이나 마셨는지" 묻는다. 그는 "나의 삶이 너의 삶과 맞물려 있고 인간의 불행 또한 다른 생명체의 불행을 먹고 산다"며 육식 위주의 삶에 담긴 인간 중심적 사고에 강력한 비판을 제기한다. 버림받아 내팽겨진 꽃들을 외면하고서는 이땅 어디에서도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육식을 탐하지 않고 땅이 키운 곡식을 섬기며 살겠다고 고백한다.
이것은 지금까지 민중가요의 담론이 인간중심적 진보철학에서 출발한 것이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방식이다. 지금까지의 민중가요는 주류 시민사회운동이 그러했듯 인간 사회의 제도적 모순을 고발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철학적, 제도적, 정신적 방법들을 노래로 담아온 것이 대부분이었다. 한국사회에서 생태주의 운동이 일정하게 발전하며 공감을 얻어가는 데 반해 기실 생태주의 철학을 노래로 담는 작업은 드문 편이었다. 그러나, 지난 1집에서 '꽃이 피는 이유'와 '살아가는 이유'를 물어보고 싶어했던 가수 박창근은 인간이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라는 오만에서 벗어나 지상의 모든 생명체와 공존해야 한다고 노래함으로써 제도적 모순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 한국 민중가요 진영에 생태주의 철학을 선보이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다른 목소리를 내며 민중가요의 영역을 더욱 넓혀냈다. 이러한 현상이 바로 개인창작자들이 급증하며 나타난 민중가요 진영의 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군대와 사람들의 재앙이 있는 것이 다른 생명을 잡아먹는 인간의 잔인함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민중가요 진영뿐만 아니라 한국 대중음악 진영 전체에서도 거의 유일한 생태주의적 문제제기이다.
박창근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지난 1집보다 훨씬 잘 정리된 가사와 탄탄한 송라이팅에 기반한 단순한 편곡으로 담아내고 있다. 지난 1집의 노래말들이 다소 독백과도 같은 모호함으로 잘 와닿지 않았던 반면 2집의 노래말들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대체로 분명하게 전달함으로써 박창근의 가사쓰기 능력이 현저하게 향상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1집에서는 밴드 편성을 기본으로 장구, 북, 꽹가리, 가야금까지 썼던데 반해 2집에서는 기타 사운드를 중심으로 한 단순한 편성을 선택했다. 생태주의적 감수성의 곡들 이외의 개인적인 곡들이 좀 많고 악기 편성이 단조로워 중반이후 힘이 떨어지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지루하지 않은 것은 그만큼 탄탄한 송라이팅의 덕분일 것이다. 그리하여 1집에서 산울림 같은 펑크적 감수성을 맛볼 수 있었다면 2집에서는 포크락 가수로서 박창근의 가능성을 느낄 수가 있다.
하지만, 1집의 보컬에서 김광석의 질감을 느끼는 이들이 많았을 정도로 정직하면서도 깊이 있는 매력을 보여주었던 박창근의 보컬은 2집에서는 다소 높고 날카로운 발성으로 변화함으로써 박창근 보컬의 다양한 가능성을 완전히 발휘하지는 못한 느낌이다. 그렇다해도 현재 민중가요 진영의 개인창작자들 중에서 서른 넷인 그가 막내일정도로 새로운 창작자들이 등장하지 않는 안타까운 현실에서 뚝심 있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그의 존재는 매우 소중하다. 앞으로 민중가요 진영의 새로운 예술적 지평을 열어나갈 수 있는 존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박창근에게 좀 더 많은 애정과 관심을 주문하고 싶다.

새로 다듬고 엮은 전래동요 - 꼬부랑 할머니
지난 8-90년대를 주름잡았던 민중가요 진영의 작곡가나 음악감독들 대부분은 지금 현장을 떠났다. 여전히 노동현장을 지키고 있는 김호철과, 인터넷과 민중가요의 성공적인 결합을 보여준 윤민석의 존재는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여기서 빠트릴 수 없는 존재가 바로 백창우이다. 96년까지 노래마을의 대표로 활동했던 그는 포크그룹 <노래마을>을 통해 당시 민중가요 진영을 대표했던 노찾사와 김호철의 민중가요와는 다른 음악적 감수성을 선보였다. <노래마을>의 음악은 진보에 대한 철학과 신념에서 출발해 운동적 성격이 강했던 여타의 민중음악과는 달리 세상과 사람, 자연에 대한 따뜻하며 소박한 믿음의 서정성에 기초한 음악이었다. 그래서, 노래마을의 음악은 다른 민중가요들처럼 분명한 전망과 결의를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순수하게 어울려 사는 조화로운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당시 민중음악진영에 차별적인 음악세계를 구축했다. 이러한 노래마을의 음악적 차별성은 음악적으로 다소 복고적인 어쿠스틱 포크 사운드에 순화된 국악적 감수성과 동요적 순수성이 결합되어 형성된 것으로서 대부분 노래마을의 대표이자 작곡가 겸 음악감독으로 활동했던 백창우의 힘이었다. 이미 20대 초반에 임희숙의 절창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의 노랫말을 써낼 정도로 문학적 감수성도 뛰어났던 그는 노래마을을 통해 한국 포크음악에 진보성과 전통성을 성공적으로 융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최근에는 시노래모임 나팔꽃의 동인으로 시와 노래의 결합을 통해 서정가요의 맥을 잇고 있는 그는 음악작업의 또 다른 한축으로 어린이 동요작업을 꾸준히 진행해왔다. 노래마을의 음반을 낼 때에도 한두곡의 동요를 꼭 넣었던 그는 80년대 중반부터 굴렁쇠 아이들의 음반을 통해 어린이 노래작업을 펼쳐왔다. 이번에 나온 '새로 다듬고 엮은 전래동요-꼬부랑 할머니'는 자신이 만든 어린이 노래모임 '굴렁쇠 아이들'을 통해 진행해온 동요작업에 일단락을 하는 음반이다. 그는 지난 98년부터 본격적인 동요작업에 들어가 전래동요에 새로운 옷을 입힘과 동시에 권태응, 이문구, 이원수 등의 동시에 곡을 붙이고 또 어린이들이 쓴 시에 곡을 붙이는 방식으로 창작동요 작업을 진행하며 무려 스무장이 넘는 음반을 내놓았다.
백창우의 동요 음반은 최근 어린이 문화예술컨텐츠들의 예술성과 작품성이 비약적으로 높아지고 있는 경향속에서 예컨대 동화에 권정생이 있다면, 동요에는 백창우가 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동요작업이 도달할 수 있는 어떤 정점을 보여준다. 지금까지의 어린이 노래가 대부분 어른들이 쓴 교훈적인 노래를 잘 훈련된 소년소녀합창단이 노래하는 방식이었던데 반해 백창우는 솔직한 어린이 세계를 오롯이 담은 노래를 어린이다운 목소리로 노래하게 함으로써 어른들에게 빼앗겼던 동요를 어린이에게 돌려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동요에는 조금만 힘줘도 똥이 잘 나오는 자랑스런 내 똥꼬 이야기와 해바라기에게 보여주지 않은 내 잠지 이야기처럼 꾸밈없는 어린이의 목소리가 있다. 또한 맨날맨날 우리한테만 자라하며 내 허락도 안 맡고 국에 밥 말아버린 어른들에 대한 원망도 생생히 살아있다. 그러면서도 예쁘지 않은 꽃은 없다는 자연적인 성찰까지 함께 있어 어린이가 무시해도 좋은 어린아이가 아니라 제 힘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존재라는 것을 새삼 일깨워준다.
그리고, 백창우 동요의 차별성은 이렇게 개성 있는 노랫말을 음악으로 뽑아내는 탁월한 능력으로 비로소 완성된다. 그동안 대부분의 동요음반들이 단순한 클래식 반주나 미디사운드에 의존했던데 반해 백창우는 기본 밴드 편성에 장구, 꽹과리, 징, 해금, 대금, 소금, 피리, 새납 등의 국악기와 바이올린, 첼로, 클라리넷, 오보에 등의 서양악기를 섞고 카주, 템버린, 트라이앵글 등의 친숙한 타악기를 곁들임으로써 어떤 동요음악도 진행하지 않았던 퓨전적 실험을 과감하게 단행했다. 전체적으로는 포크 사운드를 기반으로 하지만 여기에 국악적 감성과 클래시컬한 감성이 잘 조화된 백창우의 동요는 많은 악기들을 동원하면서도 노랫말과 노래를 부르는 어린이들의 생동감을 잘 살리는 경계를 절묘하게 유지함으로써 동요의 순수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획득했다. 그는 동요음악도 음악으로서 무한한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면서 동요의 주인은 결국 어린이 자신임을 확인시켜줌으로써 결국 동요의 위상과 철학을 바꿔놓은 것이다.
이번 '새로 다듬고 엮은 전래동요-꼬부랑 할머니' 음반 역시 백창우 동요다운 매력이 살아있는 음반이다. 그간 그의 작업이 크게 전래동요 현대화와 아동문학가 작품 음악화, 그리고 어린이글 음악화라는 세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때 이 앨범은 지난 99년 백창우 동요작업의 새출발이 되었던 '새로 다듬고 엮은 전래동요' 음반과 짝을 이루는 전래동요 현대화 음반이다. 이 앨범에는 그동안 그가 채록해두었던 전래동요들 중 모두 34곡의 전래동요들이 담겨있다. 대부분의 노래는 굴렁쇠 어린이들의 목소리로 불려졌으며 일부의 곡에서만 김은희, 백창우, 이수진이 끼어 든다. 전래동요음반이라 국악적으로 훈련된 어린이들이 노래하는 것도 좋지만 직접 이 노래들을 부르며 놀 것 같은 어린이 목소리의 생생한 질감을 살린 것이 이 음반의 가장 큰 미덕이다. 각 지역 전래동요의 원래 말을 살려 쓴 것도 의미 있는 노력이다. 여기에 국악기와 양악기, 타악기가 곡당 4-5종류를 넘지 않게 절제하면서 다양한 악기를 적절하게 사용해 편곡함으로써 전래동요가 가진 다양한 매력은 효과적으로 표현된다. 특히, '껄껄 푸드득 장서방'에서 쓰인 꽹과리와 베이스 슬랩 연주, '꼬부랑 할머니'와 '돼지 부랄'의 건반 효과는 음악적 완성도를 높이는 매력적인 장치이다. 노찾사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여주었던 김은희의 깔끔하고 정겨운 보컬도 인상적이다.
북시디 형태로 나온 책자에 각 전래동요의 의미와 유래가 함께 실려있다면 더 좋았겠지만 사실 이만큼 완성도 높은 동요 앨범이 앞으로 나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앨범은 그동안 백창우 동요작업의 결실임과 동시에 김현성, 이수진, 정은주 등 <노래마을>과 <나팔꽃> 활동에 함께 했던 참여적 포크뮤지션의 공동결과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앨범을 고승하의 <어린이 예술단 아름나라>와 함께 동요쪽에 맺힌 진보적 음악운동의 결실이라고 보는 것도 과장된 표현만은 아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린이들이 이 노래들을 좋아하고 즐겨 부른다는 사실이다. 80년대 민중가요가 대중의 삶을 바꾸었듯 2000년대 동요가 어린이들의 삶을 바꾸는 씨앗이 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노래곡목들
새로 다듬고 엮은 전래동요 CD1 - 꼬부랑 할머니
1. 껄껄 푸드득 장서방
2. 망망 꼬방망
3. 가갸거겨
4. 가재
5. 띠띠고 신신고
6. 깎고 깎고
7. 깨롱 깨롱
8.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9. 잠자리 노래 엮음
10. 동아 동아 물 빼소 쨍아 쨍아 볕 나소
11. 꼬부랑달①
12. 꼬부랑 할머니
13. 네 할미
14. 이 빠진 아이를 놀리는 노래①
15. 이 빠진 아이를 놀리는 노래②
16. 부르는 사람이 임자인 노래
17. 쿵덕쿵덕 널뛰자
새로 다듬고 엮은 전래동요 CD2 - 고추 먹고 맴맴
1. 기러기
2. 돼지부랄
3. 인절미
4. 솔갬아 솔갬아
5. 한강물이 많나 바닷물이 많나
6. 저 건너 김서방네 지붕에 콩깍지
7. 널대문 직꿍 닫는대로
8. 통타령
9. 넘어간다
10. 꼬부랑달②
11. 새야 새야 파랑새야
12. 팽이
13. 떡 노래
14. 나물 노래
15. 외따기
16. 실구대 소리
17. 널뛰기

1996년, ‘드럭’에서 노 브레인(No Brain)에서 기타 치던 이를 유심히 본 적이 있다. 예의 차리지 않고 그 때의 인상을 말해보면 저런 이도 펑크를 하는구나, 였는데 그가 후에 바세린의 기타로 들어간 박 진이었다. 뉴메틀에서 출발, 올드스쿨 하드코어와 뉴스쿨 하드코어를 섭렵하는 과정에서 메틀의 기운이 커져간 바세린의 변화에 그는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이후 바세린은 로(raw)한 사운드 프로덕션에도 불구하고 호응을 얻은 [Bloodthirsty](2000)와 뛰어난 사운드의 [The Portrait of Your Funeral](2002)을 거치며 하드코어에 메틀 리프를 도입한 미국 동부와 유럽의 뉴스쿨 하드코어의 영향을 정리해냈다. [Bloodthirsty]에 서정과 공격성의 조화를 이룬 <독기> 같은 곡을 담았고, [The Portrait of Your Funeral]에는 하드코어 특유의 즉흥성과 폭발력에, 곳곳을 수놓은 우울한 아르페지오와 영화사운드트랙으로 유려한 흐름을 버무려내면서 격정과 저돌적 질주, 그리고 비장감이 감도는 무드를 절묘하게 조성했다. 그렇게 메탈릭 뉴스쿨 하드코어로 자리잡은 바세린이 이제 본격적인 메틀 선언을 했다.
메틀코어(metal-core)의 부각은 음악산업종사자들과 평단 일부, 기자들에 의해 전략적으로 조성된 측면도 있어서 그렇게 통칭되는 밴드들 중에는 음악적으로 진부한 예도 수두룩하지만 어느새 이 말은 유용한 광고카피로 이용되기 시작한 분위기다. [Blood of Immortality]의 메틀코어는 어떠한가. 스래쉬·데쓰 리프와 펑크, 뉴욕 하드코어(NYHC)와 멜로딕 데쓰메틀이 교차하는 [Blood of Immortality]의 첫인상은 강해졌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과격이라기보다는 ‘역동’에 가깝다. 꽉 찬 악곡구조와 좋은 사운드로 그려진 [Blood of Immortality]는 성격을 안배해 배치한, 그리고 세밀해진 에너지를 품은 곡들을 안고 있다. 나직한 현과 맑은 피아노가 흐르는 <Letalis Silentium>을 지나 <An Ode to My Friend>에서부터 더 무거워진 리프와, 나열이 아닌 구성에 의해 곡을 짠 변화가 드러난다. 바세린보다 더 어그레시브한 넉다운(Knockdown)에서도 기타를 잡고 있는 박 진, 그리고 조민영의 리프는 짧게 치고 빠지며 여전히 반전을 거듭하는 패턴을 통해 긴장감을 조성한다. <Affirmation for the Desperated>의 처절한 감성적 무드와 점층 고조되는 비장감은 후반에 충분히 끌어주는 소절의 반복을 통해 한껏 고조되고, 바세린에게는 이례적으로 4분 31초에 달하는 <Blood of Immortality> 역시 그러하다. 형식미를 갖추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지금까지의 바세린에게 아쉬웠던 건 앨범은 훌륭해도 꼽을 곡은 적었다는 것이다. 물론 <독기>, <In This Madness>, <Crane>처럼 격정적이고 근사한 곡들이 있었으나 대개 다시 타이틀을 확인하려고 CD를 찾을 때쯤이면 어느새 끝나버리길 반복하곤 했다. 그러나 이제 리프의 조합뿐 아니라 곡의 전개·구성에도 주의한 듯 구조가 완결성을 갖췄고, 낮고 강력해졌음에도 곡들이 저마다 인상적으로 기억된다. 멜로딕 데쓰 스타일로 통쾌하게 진입하는 <Assassin of Death>의 두터워진, 그리고 트레몰로로 자글대는 리프들과 그로울링의 조화도 싱겁지 않은 구조에서 빛을 발한다. 특히 이미 2003년에 녹음된 바 있는 이 <Assassin of Death>는 강렬한 임팩트가 있고, 멤버들의 역할분담도 말 그대로 기민하다. 또 전작처럼 <Fear Coming>과 <Caesar of An Occasion>에 사운드트랙을 입혀 차별화하고, 허밍에 가까운 여성보컬과 메틀 리프, 그리고 신우석(보컬)의 절규가 더해지는 의외의 트랙 <Saddest End of One Fine Morning>처럼 인상적인 순간을 심는 센스도 있다-약간의 농담을 더하면, 여성의 목소리가 삽입된 게 처음은 아니다. [The Portrait of Your Funeral]에는 소피 마르소의 음성이 숨겨져 있었으니-. 이전의 클린/어쿠스틱 기타 연주는 <Sanguinolentus Desperatio>로 축소되었지만, 경쾌한 펑크(punk) 메틀 <Flowers in the Sand> 중반에서 멜로딕 리프로 인상적인 순간을 만들 듯이 감수성은 그대로다.
마지막 트랙으로 적절하게 배치된 <Last Cadence>에도 역시 이례적으로 긴 기타솔로가 입혀졌는데, 전반적인 기타는 톤으로 연주를 가리는 수준이 아니라 자신감 있고 정직하며, 최현진(드럼)과 이기호(베이스)의 연주 역시 강력하고 세밀하다. 어떤 면에선 자신들의 [The Portrait of Your Funeral]에 미치지 못하지만, 메틀 앨범이라는 기준으로는 사운드와 연주, 특히 곡에서 사두(Sadhu)의 [the Trend of Public Opinion..](1996/지구)을 능가한다. 그렇다면 이제 생각해봐야 할 것은 하나다. 강성 메틀, 즉 스래쉬/데쓰 리프의 특징은 정교한 수학적 비례와 통일성에 의한 형식미에 있었고, 지적이고 현실적이기 때문에 정신이 앞서는 장르, 예를 들어 블랙메틀 등에서 수용할 때엔 적당히 쳐내야한다. 하드코어에 틀을 강조하는 전통적 스래쉬/데쓰 리프와 구성이 도입되며 간혹 근간을 가리는 것과도 통하는 이유 때문이다. <Caesar of An Occasion> 등은 예전 그 스타일이지만, 전체적으로 [The Portrait of Your Funeral]의 즉흥성과 격정이 감소했고, 그래서 [Blood of Immortality]의 북받침은 덜하다. 이 때 마지노선을 지켜내는 게 신우석의 보컬. 사운드의 강성화와 함께 신우석의 비장한 무드를 조성하던 내레이션은 대폭 줄인 대신 게스트 보컬들의 그르렁댐이 보조하지만, ‘감성적인(emotional) 메틀’이 되도록 하는 건 역시 그의 절규하는 보컬이다. 동료들의 싱얼롱 때문에 펑크/하드코어의 분위기가 물씬하기도 하여, 메틀의 형식파괴와 질서유지의 긴장을 유지하고, 하드코어의 활기와 기세가 틀에 매몰되는 것도 막아낸다.
우리는, 과잉생산 시스템이 과잉소비를 유도하고 과장이 범람하며, TV는 물론 광고전단지 덩어리나 다름없는 잡지들처럼 온갖 매체들이 소비를 재촉하고, 그 속에서 끊임없이 소비하는 것이 그럴 듯하게 사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세상에 산다. B급 영화와 B급 음악이 주류를 장악하고 있는 가공할만한 컬트 공화국에 산다. 무엇으로 선별해낼 것인가. 80년대 스래쉬 메틀의 재구성이면서 새로운 구호인 메틀코어의 등에 업힌 어떤 밴드들은 진부할 뿐이고, 90년대 유럽 멜로딕 데쓰의 벽을 뒤늦게 넘으려는 일부 뉴스쿨 하드코어 밴드들에겐 격정도 새로움도 없다. 정신이 빠진 외형적 완성에 감동이 없는 건 우리가 찬바람에 갈라지는 연한 피부와 나이 들면 막히고 터져 버리는 여린 혈관을 가진 사람일뿐이기 때문이다. 바세린의 ‘감성적 메틀코어’가 나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Bloodthirsty]와 [The Portrait of Your Funeral]에 이어 [Blood of Immortality]마저 통쾌했던 것이고, 이 앨범은 2004년 헤비뮤직 씬에서 단연 돋보이는 성과다. 바세린이 가담하여 축적하고 있는 역량은 탁류가 흐르는 씬의 발전에 기여할 테고, 그렇기에 좀처럼 수작을 만나기 힘든 헤비 뮤직 씬을 비롯하여 구멍이 숭숭 뚫려 있던 한국음악계에서 괄호 하나를 채우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드코어의 심장으로 분사하는 메틀의 피는 붉고, 그래서 더욱 뜨겁다. 달궈진 쇳조각처럼.

그레고리 펙과 오드리 햅번이 같은 침대에 묘한 표정으로 누워있는 사진 밑에 ‘그들의 짧고 수상한 동거’라는 카피가 쓰여진 포스터. 그리고 ‘팽팽히 밀고 당기는 심리 스릴러’라는 기사가 인터넷에 뜨고, 영화전문지에는 감독과 평론가의 심층 인터뷰가 ‘계급적 한계에 대한 관성적 굴복’이란 심오한 제목으로 게재된다. 2004년의 우리나라에서 ‘로마의 휴일’이 만들어졌다면 이런 것들을 보게 되진 않았을까 싶다. 일단 극장 문 앞까지만 끌어오고 그 다음은 책임지지 않는 홍보 방식을 근래에 자주 보게 된다. 개봉 첫 주 쟁탈과 흥행에 명운을 걸게 되는 현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상황이 이 지경이라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만약 ‘불가사리’가 이런 홍보 방식을 택했다면? 글쎄…. ‘불가사리’는 북한에서 1985년에 신상옥 감독 등이 제작한 영화로 1998년에 일본에서 상영되었고, 2000년에는 우리나라에서 정식 개봉된 첫 번째 북한 영화로 기록되었다. 괴수영화의 고정 팬들이 많은 일본에선 흥행이 성공적이었다고 한다. (조총련계 재일동포들의 단체관람도 무시할 수 없는 변수이다) 하지만 정작 한국에선 상영관 확보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흥행에도 참패했다. ‘쥬라기공원’과 ‘고질라’가 휩쓸고 간 마당에, 한국영화를 타임머신 타고 되돌아보는 듯한 구닥다리 필(feel)이 먹히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의 괴수전문 배우를 초빙해 연기를 시켰다한들 사람이 들어가 어기적대는 괴물도 어색하게 보였을 터.
그러나 간단히 무시할 영화는 아니다. 촌스럽긴 해도 미니어처나 특수효과도 의외로 괜찮고, 현대 대도시 중심의 일반 괴수영화와 달리 시대적·공간적 배경이 중세여서 그림도 신선하다. 언덕에 군사들이 뛰어다니고 저 멀리 불가사리가 엉거주춤 다가오는 모양새에선 제법 위압감마저 느껴진다. 재미있게도 열악함 때문에 B급 영화 매니아들에게 어필하게 되기도 했지만, 궁궐을 ‘표정변화가 불가능한’ 불가사리가 박살내는 스펙터클 등은 통쾌하기까지 했다. (솔직히 올드하고 B급 필이 나서 더욱 정이 가는 것이지만..)
원래 불가사리 이야기는 다소 민망한 민담에서부터 나라를 구하는 이야기에까지 여러 갈래가 있다. 쇠를 먹어치운다는 뼈대는 같으나 ① 어떻게 생겨나 ② 어떤 활약을 하다가 ③ 어떻게 사라졌는가는 저마다 다르다. 영화 ‘불가사리’에선 고려말 지배층의 수탈과 민중 봉기를 배경으로 ① 무기를 만들라는 관가의 명을 거스르다 죽어간 대장장이 탁쇠가 밥풀로 빚은 인형에, 그 딸 아미가 바느질을 하다 흘린 피가 스며 불가사리로 생명을 얻게 된다. 그리고 ② 백성을 수탈하는 관군을 제압하고 궁궐을 때려부수곤 ③ 아미의 희생으로 사라지는 것으로 각색되었다.
여기에 ‘불가사리’가 돋보이는 대목이 있다. ‘태권V’는 세계평화를 위해 싸웠고, ‘우뢰매’는 지구평화를 위해 싸웠으며, ‘날아라 거북선’은 우주평화를 위해 싸웠지만, 누구도 핍박받는 민중을 위해 싸우진 않았다. 그나마 ‘똘이장군’이 공산당이나 공룡과 싸우긴 했다. 시대극들도 대개는 임금을 중심으로 한 신하들과 궁중여인들의 권력쟁탈전이 주된 내용이었다. 국내외 드라마·영화들에서도 힘없는 자들을 돕는 의적이나 지도자들은 대개 출생의 비밀을 지니고 있으니 ‘알고 보니 좋은 핏줄이더라’는 식이다. ‘알고 보면 좋은 핏줄임에도’ 힘없는 자들을 돕고, ‘알고 보니 좋은 핏줄이라서’ 용모와 능력이 뛰어나다. 엘리트 지배 이데올로기의 재생산과 확장이다. 하지만 불가사리는 밥풀과 피로 만들어져 민중을 돕는 괴물일 뿐이다.
교육만 해도 그렇다. 우리나라의 도덕교육 목표와 교수 내용에는 평등 개념 교육만은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저 중·고등학교부터 기회균등이라는 모호한 ‘표어’를 가르치는 선이다. 기회균등? 고작 이것이 권리이자 지향이 되어야 할 평등이라고? 그것도 본격적인 경쟁 시스템에 편입되고, 성공과 실패의 대가에 대해 끊임없는, 때론 과장까지 첨부된 강조에 의하여 학습의 동기부여가 이루어지는 시기엔 푸석푸석한 냉소만 부를 뿐임은 경험으로도 아는 일이다.
불가사리가 병장기를 모두 없앤 후에 굶게 되자 백성들이 농기구와 가마솥까지 먹여야하는 상황이 되는 건 어떠한가. 변혁의 에너지가 소용을 다한 후 변질되는 속성을 짚은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신상옥 감독은 이것이 군비경쟁을 상징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래서도 ‘불가사리’는 낯설고도 신선했고, 착한 괴물 불가사리가 사라지는 장면은 애달프기까지 하다. 왜 이러한 ‘불가사리’같은 영화가 이 땅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었는지, 그리고 왜 대중영화로 만들어지지 못하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스타일 구린 건 둘째치고.) 불가사리가 이상한 옷을 입고 포즈를 취한 포스터, 그리고 ‘괴물 불가사리와 처녀 아미의 기묘한 동거’같은 카피였으면 그나마 통했을까.

200자평/중앙일보 기고.
박기영 5집 [Be Natural]
'싱어송라이터'가 존중을 받는 이유는 '자기만의 노래'를 만들어서 부른다는 데에 있다. 그런데 러브홀릭 노래인지, 박혜경 노래인지 헷갈리면 문제 아닌가? 차라리 러브홀릭에 가입해서 '한국판 아바'를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지? (세션이나 노래에 대한 감각 자체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01. 나비
02. 체념
03. 날개
04. The Day
05. Piano 앞에서...
06. Let It Grow
07. 불면증
08. 본능
09. Mercy (feat. 이승열)
10. My Favorite Song
11. 집착
12. 귀향
13. October
14. Last October
@@@ 기타 200자평 @@@
1. 자우림 [All You Need Is Love](2004/T-Entertainment) - 50%
자우림 앨범 7장, 김윤아 앨범 2장, 초코크림롤스 앨범 1장, 합쳐서 총 10장. 이런 중견 뮤지션의 타이틀곡이 기껏 '하하하쏭'이라니! 천박한 웃음과 어설픈 비판은 오히려 듣는 사람을 짜증나게 만든다.
2. 동방신기 [Tri·Angle](2004/SM Entertainment) - 30%
초등학생들은 변신/합체형 로봇전사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들을 좋아하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한데 "돌아서는 내 뒷모습이 지쳐 보이면 내게로 와 내 손잡으며 울어준 그대" 이런 진부한 가사는 대체 누구 들으라고 만든 것일까?
3. 거북이 [Turtles:3](2004/MCS Entertainment) - 35%
시종일관 '쿵짝쿵짝' 리듬에 "아싸 또 왔다 나 기분 좋아서 나 노래 한곡 하고" 외치는 노래를 좋아할 사람들이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고문 그 자체이다. 그냥 단순하고 특징 없는 댄스앨범인데, 또 '힙합' 운운하지는 않겠지?
4. Eminem [Encore](2004/Universal) - 70%
그는 현재 힙합씬에서 뿐만 아니라 엔터테인먼트계에서의 '거물'일지는 모르겠지만, 난 그의 랩이 별로 마음에 안 든다. 그리고 그의 디스(diss)도 슬슬 지겹다. 하지만 'Spend Some Time' 이후 노래들은 감상용으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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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고는
좀 뻔한 얘기 아닐까, 라고 생각했는데굉장히 와닿는 얘기네요.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건필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