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씨엔블루. 밴드의 포맷을 갖춘 그룹이라니 무척 반가웠다. 일본 인디즈에서 실력을 갈고 닦은 밴드라는 보도 자료는 더욱 이색적이었다. 그들의 타이틀곡인 ‘외톨이야’가 표절시비에 휘말리면서 장기하와 얼굴들 이후 다시 한 번 인디라는 단어가 여기저기에 언급되고 있기에 개인적으로 앞으로 눈여겨봐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나에게 이들의 연주력이나 표절에 관해 언급할 자격은 없다. 그들의 라이브를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대화를 나눈 적도 없다. 또한 화성을 장기적으로 꾸준하게 제대로 배운 적도 없기에 표절에 관해서도 깊게 썰을 풀지 않을 것이다. 아니, 못한다.
내가 걱정되는 것은 또 한 번의 마녀사냥이 행해지지는 않을까 하는 점이다. 표절에 관한 것과 이들이 인디 운운하며 인디를 마케팅 수단으로 가져가려 한다는 것, 라이브 시 핸드 싱크를 한다는 것 등에 대한 욕을 씨엔블루 당사자들에게 할 생각이라면 조금 절제토록 하자. 어떠한 특정 부분에 대해 비판을 할 생각이 있다면 그들의 기획사에 하는 것이 어떨까. 분명 씨엔블루는 기획사에 의해 살균 처리가 된 기획 상품이다. 그러므로 어디까지가 씨엔블루 당사자들의 모습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기획사가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를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논쟁거리가 되었단 몇 가지 사항에 대해 조금 짚어보자.
씨엔블루와 인디밴드. 인디란 인디펜던트의 약자로서 '특정 세력이나 자본 집단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문화 양식을 펼침'을 뜻한다는 것은 이미 많은 이들이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인디라 부르는 인디 음악도 그것에 준한다. 하지만 최근에 ‘인디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답을 위와 같이 해주기엔 조금 찝찝한 것이 90년대의 모습과 2000년대의 인디가 보여주는 모습이 조금 다른 형태로 흘러가는 느낌이 있어서(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다) 인디를 논할 때 기정의 된 정의를 가지고 썰을 풀자니 약간은 불만족스러웠다. 인디를 정의할 때 많은 부분에서의 정의가 이루어지지만 최근의 한국의 상황에선 ‘Indie as ethos’만이 유효하다고 하고 싶다. 자신의 곡을 직접 쓰고 레코딩, 믹싱, 마스터링 등의 일련의 과정을 PM(Project Manager)이 되어 진두지휘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갖춘 혹은 시도를 하고 있고 노력하는 모습. 세부적으로 나간다면 레코딩 등의 기술적인 부분은 분화가 이루어지긴 했지만 사운드 디렉터의 역할이나 프로듀싱의 역할은 온전히 창작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자 자세이며 윤리이다. 그것이 인디라는 이름을 걸고 행해지는 모든 행위의 범주 안에 속해 있다면 말이다.
씨엔블루의 기획사는 그들을 마케팅 할 때 인디를 논하는 것을 자제해 주었으면 한다. 기획사의 유무가 인디의 여부를 가르는 것이 절대 아니다. 기획사가 어떠한 마인드를 가지고 소속 가수를 노출 시킬 것인가가 중요하다. 일본 인디즈에서의 활동은 아무래도 좋다. 그 배후에 어떠한 내부 사정과 액션 플랜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걱정이 되는 것은 이대로라면 ‘인디’라는 단어는 지극히 허상이요, 환상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이미지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들만의 잘못은 아니다. 언젠가 인디가 이렇게 작위적으로 세상에 내놓여질 것을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만하고 있었던 관계자들에게도 문제는 있다.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앞으로가 중요하다.
한 가지 기쁜 것은, 씨엔블루의 보도 자료에서 보았던 문구다.
‘천편일률 가요계의 새로운 대안’이라는 것과 ‘일본 인디즈에서 실력을 갈고 닦은’ 이 두 가지 문구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대중음악계가 천편일률적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구나, 라는 것.
그 대안으로서 ‘밴드’라는 포맷이 제시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속에 인디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
이 모든 것이 주류 기획사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
소모적인 힘겨루기는 그만하고 이제 모두 함께 힘을 합쳐 바꾸어 봅시다.


음악을 하는 사람이건, 글을 쓰는 사람이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건,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건 그 어떤 형태로든 뭔가를 창작하는 사람에게는 ‘뮤즈’라는 존재가 있습니다. 존 레논에게는 오노 요코가 그러했죠. 뭔가를 낳는다는 행위에 대한 절대적인 존재. 혹은 목표. 동기. 혹자는 피난처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기도. 누군가는 창작물의 진정성 여부를 따질 때, 이 뮤즈의 존재 여부를 면밀히 살피곤 합니다. 뮤즈가 없다는 것에 대해 혹은 없어졌다는 것에 대해 누군가는 약에 손을 대기도 하고 누군가는 심적인 고통을 못 이겨 결국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더군요. 뮤즈라는 존재는 메말라 붙어버린 가슴에 창작의 자양분을 마련해주기 마련인데 대부분의 창작자들은 그것의 부재를 견디기 힘들어 하는 것 같습니다. 방황이나 매너리즘은 거기에서 비롯되곤 했죠. 그러다 뮤즈의 존재가 서서히 살아나고 있음을 느낄 때면 그 동안 억눌려왔던 모든 감정이 한 번에 폭발하곤 합니다. 가장 조심해야 할 때는 바로 이때입니다. 뮤즈는 민감해서 상대방의 폭발하는 감정을 수용하는 것에 대해 상당히 인색하거든요. 뭐든지 스텝 바이 스텝입니다. 서두르지 마세요. 뮤즈에 대한 사랑을 서두르지 마세요. 절대.
뮤즈는 사람이 될 수도. 사람이 아닌 무엇인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음악을 예로 들어보죠. 역사적으로 대중이 선호하는 음악은 대부분 그들의 공감대를 살 수 있었던 음악이 많았습니다. 사랑 타령에 대한 노래가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아왔죠.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마다 뮤즈의 대상은 다르지만 결국엔 하나로 귀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뮤즈는 곧 사랑이다’라는 말은 옳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그의 대우명제인 '사랑이 아닌 것은 뮤즈가 아니다.'라는 말은 성립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겠군요.
너무 논리적으로 따지지 맙시다.
이렇게 얼버무리겠습니다.
떠나버린 뮤즈에 대해 미련을 갖거나 힘들어 하지 맙시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떠나버린 뮤즈를 기다리고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지만, 그것이 만약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어버렸다면 그들을 담담하게 보내주는 것이 미덕입니다. 그들은 우리들의 부모님이 될 수도 있겠군요. 혹은 먼저 떠나버린 자녀가 될 수도. 애완동물이 될 수도. 아끼던 물건이 될 수도. 없어진 감정이 될 수도. 헤어진 연인이 될 수도.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물론 억견일 수도 있습니다만- 뮤즈가 없는 창작물은 결국 대부분이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결과물 이라는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당신은 우리가 주는 이것을 뮤즈로 삼고 그것의 노예가 되어야만해! 그래서 당신은 그 뮤즈에 대해 충성을 다해야해!’ 라는 제도권의 ‘일부’ 존재들에게 속지는 맙시다. 진심을 알아차릴 수 있는, 뮤즈를 제대로 볼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고 가질 수 있는 눈과 귀와 가슴을 가지도록 합시다. 성숙해지자는 이야기죠. 글을 쓰는 분이건 악기를 연주하는 분이건 아니, 숨을 쉬며 살아가는 것에 의미를 두신 분이시면 뮤즈 하나 정도는 가슴에 품고 살아가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당신은 뮤즈를 가지고 계십니까. 아니, 달리 여쭈어보겠습니다.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나요?

해피로봇레코드 소속의 노리플라이는 보컬과 건반을 담당하는 권순관과 기타와 프로그래밍을 맡고 있는 정욱재로 구성된 듀오다. 2008년 3월 싱글앨범 <고백하는 날>을 발표한 후 1년 3개월이 지나고 정규 1집 <Road>를 발표한 것은 불과 얼마 전 일이지만 이들은 몇몇의 컴필레이션 앨범 참여와 다수의 공연활동을 통해, 1집을 발표하기 전부터 이미 음악팬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루시드폴 혹은 유희열의 음악을 듣는 듯 섬세하고 여린 소녀의 앳된 감수성이 주를 이루며 피아노를 중심으로 한 모던록 사운드를 들려준다. ‘뒤돌아 보다’를 통해 2006년 제 17회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은상을 수상, MBC의 한 버라이어티에 ‘고백하는 날’이 삽입되기도 하였으며 ‘조금씩, 천천히, 너에게’가 <남과 여... 그리고 이야기>의 타이틀곡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침체된 한국 대중음악시장에 아주 약간의 희망이 보이고 있다. 현재 대중음악 시장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뮤지션이 활동을 할 수 있는 인프라 구축 부분과 소장할 만한 양질의 음악 콘텐츠의 생산 부분인데 이 중에 좀 더 근본적인 것은 후자다. 때문에, 인디씬을 중심으로 해서 우수한 창작성이 돋보이는 질적으로 뛰어난 음악이 계속해서 생산되고 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물론 이것은 다행히도 메이저 시장에서도 볼 수 있는 추세다. (대중음악 시장을 메이저와 인디로 보는 이분법을 딱히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편의상 이렇게 작성했다. 그리고 아래에서 나올 창작성 내지는 실험성과 대중성을 나누는 것 또한 모순되는 부분이 있지만 이 역시 일단은 편의상 나누어 작성하겠다.) 침체된 음악 시장을 다시 활성화시키기 위해 풀어야 할 과제가 많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콘텐츠의 질’ 다시 말해, ‘창작이 주가 되는 콘텐츠의 생산’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고 싶다. 하지만 이 창작의 정도가 너무 과해 그것은 ‘실험성’만이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고 ‘대중성’은 낮은 점수를 받기 십상이었다. 사실 음악에서 대중성이라면 뭐니 뭐니 해도 ‘귀에 쉽게 잘 들리는 것’을 미덕으로 함이 옳을 것이다.(음악에 있어서의 대중성이라는 개념은 특정 뮤지션이나 노래에 대한 대중들의 ‘인지도’를 말함이 아니다.) 대부분이 ‘그들만의 리그’에서 머문다거나, 소위 아방가르드 했던 또는 듣기 불편해서 쉽사리 접근하기 힘들었던 뮤지션의(특히나 인디씬에서의) 음악은 언젠가부터 대중성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좀 더 쉽게 잘 들리기 시작하였다는 말이다. 가깝게는 짙은, 에피톤 프로젝트 등이 그러했다. 창작성과(좀 더 나아가면 진정성) 대중성의 교집합을 드디어 찾아낸 것이다. 인디씬이 태동된 것을 90년대 중후반으로 본다면 10년하고 좀 더 지난 이제야 그 접점을 발견했다는 말이다. 지금은 참 소중한 시기임에 틀림없다.
노리플라이의 음악 역시 창작성과 대중성, 그 사이의 접점을 잘 찾아낸, 오랜 시간의 연구를 통해 나온 결과물이라고 말하고 싶다. 앞서 말하길, 대중성의 핵심은 ‘귀에 잘 들리는 것’이라 했는데 그것은 현재 유행하는 후크송과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노리플라이의 음악은 귀에 잘 들리는 멜로디를 가지고 있지만 후크송의 코어인 ‘반복구절’은 발견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음악이 귀에 잘 들리는 것은 이들만의 세련된 작법에 연유하고 있을 터. 기복이 뚜렷한 멜로디 라인을 만들 줄 아는 것은 이들이 지닌 가장 큰 힘이며 바로 그것이 귀에 잘 들리는 음악을 만들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나 싶다.
이들은 또한 전통적인 록(Classic Rock 또는 Roots Rock)의 명제였던 ‘록의 중심악기는 기타’라는 것에서 한 발짝 멀리 떨어져있다. 노리플라이 음악의 중심엔 피아노가 굳게 박혀있다. 물론 피아노가 중심이 된 록 사운드의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과거 오메가3의 음악 또한 그 중심에는 피아노가 있었지만 그것은 실험성에 더 큰 비중이 있었다. 그때 태동한 이러한 피아노 록 사운드가 이제는 대중성을 보완하여 본격적으로 발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같이 대중성을 내세운 피아노가 중심이 된 록 사운드는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 예상한다.
물론 모던록의 영역에서 볼 때 주류는 델리스파이스와 언니네이발관을 필두로 한 기타팝(Guitar Pop)밴드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에피톤 프로젝트를 작은 시작으로 하여 노리플라이를 본격적인 구도자의 위치에 올려놓아, ‘모던록의 주류는 이제 기타가 아닌 피아노를 중심으로 한 록 사운드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억견일까? 현재 음악공연이나 앨범이 ‘여성성’을 마케팅으로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참고로 한다면 기타보다는 피아노가 그 특유의 감수성에 적합하다고 말하고 싶다.
주지했다시피, 피아노를 중심으로 한 록 사운드가 앨범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몇몇 곡에서 들을 수 있는 리얼 스트링은 앨범을 좀 더 풍성하게 해주는 요소다. 앨범의 부제답게 ‘길’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그것은 사전적 의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다양한 의미로 쓰이고 있다. 피아노 연주로 시작하여 순차적으로 드럼과 기타가 합세하여 비교적 빠르게 후렴구까지 이어지는 첫 곡 ‘끝나지 않는 노래’는 군더더기 없는 곡 구성이 매력적이다. 이들의 싱글 앨범에도 수록되었던 ‘시야’는 편곡을 거쳐서 재수록 되었다. 영화 ‘오펄 드림’에 삽입된 본 앨범의 타이틀 곡 ‘그대 걷던 길’은 지난 해 12월 ‘이하나의 페퍼민트’에서도 선보인 적이 있는 곡이다. 곡 자체에 큰 기복은 없지만 앨범 전체의 감성적인 컨셉을 대표하기엔 무리가 없어 보이며, 전반에 걸친 스트링 연주는 앞으로 튀어나오지는 않는 대신에 얇고 은근하여 절제미를 느낄 수 있다. 그 밖에도 후렴구의 절정이 돋보이는 ‘World’, 새로운 녹음 작업을 거쳐 수록된 ‘뒤돌아 보다’. 곡의 시작과 끝 부분의 지하철 소리 샘플이 흥미로운 ‘Fantasy Train’은 곡의 텍스쳐와는 다르게 몽롱한 느낌이 든다. 저음의 첼로 선율이 인상적인 ‘흐릿해져’, 보사노바 풍의 ‘오래전 그 멜로디’에는 오지은이 보컬에 참여했다고. ‘Violet Suit’는 기타를 맡고 있는 정욱재의 취향이 다소 진하게 묻어 나오는 곡이다. 앨범의 부제와 같은 제목을 가지고 있는 ‘Road’는 힘 있는 후렴구가 인상적이며, 다소 차분한 느낌과 구성미를 느낄 수 있는 세련된 스트링 편곡의 ‘바람은 어둡고’를 끝으로 앨범은 마무리 된다.
이제 막 1집을 낸 이들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젊은 뮤지션 둘이 모여 이러한 ‘작품으로서의 앨범’을 제시하였다는 것과, 단지 거기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대중성을 찾아내었다는 것 그 자체에 큰 점수를 주고 싶다. 듀오라는 장점을 살려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을 멀리하되 각자 개인의 내공을 더 쌓으며 정진한다면 유희열이나 전람회처럼 자신들의 음악뿐만이 아닌 여러 후배들에게 ‘길’을 제시해줄 수 있는 그런 멋진 선배가 될 수 있을 것이 분명하다. 동시에, 대중음악씬에 좋은 방향으로의 변화를 줄 수 있는 움직임의 핵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기대를 해본다. 노리플라이는 한국대중음악의 ‘젊은’ 희망이다.

작년 2월 정규 1집 앨범 [Pax]를 발표한 밴드 로로스가 총 3곡이 수록되어 있는 EP앨범 [Dream(s)]를 발표했다. 그들은 얼마 전 제6회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올해의 신인상’을 수상하였다. 로로스가 작년 한 해 한국 대중음악계의 가장 큰 ‘수확물’이라는 언급은 더 해봤자 입과 손가락만 아플 것 같다. 이번 EP앨범에서 로로스 특유의 몽롱함과 절정에 달할수록 휘몰아치는 그들의 공식은 그대로 계승되고 있으며 좀 더 서정성 짙은 음색의 건반과 스트링, 곡을 풀어나가는 문장 구성력은 진화한 부분이라고 봐도 될 듯하다.
로로스의 음악을 장르적 용어로 설명할 때에는 ‘포스트 록’(Post Rock)이 가장 잘 어울린다. 포스트라는 용어는 어떤 현상의 흐름에 있어서 기존의 것을 계승하거나 버릴 것은 버리고 진화시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포스트 록이라는 용어자체에 그 특유의 장르적 특성이 묻어나오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개방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포스트 록은 록음악을 기반으로 하되 그 외의 다른 음악 장르에서 음악적인 여러 가지 요소를 버무려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을 들려주는 그 ‘실험성’에 가장 큰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억지스러운 썰을 더 풀어보자. 새로움을 제안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Post’는 ‘Alternative’(협의가 아닌 광의적인 ‘대안’의 의미)와 교집합을 이루는 부분이 있다. 얼터너티브라고 했을 때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것이 런던 뒷골목의 Punk나 시애틀의 Grunge정도가 될 수 있는데, 펑크는 ‘대안 없는 저항’이었고 그런지는 런던에서 발화한 펑크의 포스트 역할로서 ‘저항이 있는 대안’을 보여주었다. 그에 비해 로로스의 음악은 ‘저항이 없는 대안’이라고 하고 싶다. 그들의 앨범을 듣거나 라이브를 보면 소위 말하는 ‘보수적’인 집단에 대한 혹은, 사회적인 이데올로기 면에서의 반항 혹은 저항은 느끼기 힘들다. 그들의 음악은 저항이 없는 순수한 음악적 대안(포스트)에 대한 제안서를 내밀었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로로스 그들이 기존의 음악적 혹은 시스템적 양식에 대한 저항 의식을 가지고 음악활동에 임하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저항이 있는 얼터너티브(음악적 영역에서의 혹은 협의로서의)가 ‘원본’이라고 하고 거기서 파생된 ‘복제물’의 성격을 보인 여러 가지 음악적 장르들을 ‘이미지’(Image)라고 하자. 그리고 로로스의 음악은 이미지의 복제물, 다시 말해 원본의 핵심이었던 ‘저항’이 빠져버린 시뮬라끄르라고 말하고 싶다. ‘저항 빠진 대안’이라. 내파되어 버린 얼터너티브 씬의 또 다른 형식일 수도. 억지일 수도. 저항 없는 대안이라는 점에 부정적이다 라는 식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로로스 그들은 ‘무엇’에 대한 대안을 찾는 과정에서 그들의 유니크를 확립하고자 했을 것 이라는 말을 하고자 함이다. ‘무엇’이라는 대상이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대상인지 혹은 다른 것인지, 그에 대해 저항하고 있는지 혹은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음악적 대안’을 보여주고 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렇다’라고 확신할 수 있다.
음악적인 대안이라. 그들이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법론에 있어서 기존의 고정관념을 가볍게 ‘무시’해 버린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첫째는 플레이 타임이요, 둘째는 곡 구성이다. 그들은 길게, 천천히 이야기 한다. 6하 원칙이라는 형식적인 울타리 안에서 숨 가쁘게 ‘고백’해야 하는 것이 아닌, 처음에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수줍고 조용하게 그리고 천천히 말문을 열기 시작해 보이지 않는 존재와 주거니 받거니 하는 중에 어느새 절정에 다다른다. 그들의 고백을 다 듣고 나면 최소한 5분이다. 이게 정규 1집이었다면 [Dream(s)]에서는 그 ‘고백’의 길이가 한 트랙당 적어도 10분을 넘나든다.(청자에 따라서는 곡이 길다는 부분 그 자체로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겠다) 곡의 길이가 길어지니 그 구성이 복잡해지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곡의 길이가 길어짐에 따른 중구난방의 구성이 된다면 그것만큼 졸작이 없겠지만 탄탄한 연주력과 팀워크에서 나오는 이들의 구성력은 탁월하다.
노래보다는 연주 그 자체에 포커스가 더 맞추어진 이번 EP에서는 왜곡된 기타의 퍼즈 사운드와 드로닝, 깊은 현악기의 울림, 절정으로 다가갈수록 몰아치는 심벌과 와우 페달이 걸린 상태에서 휘갈기는 기타 등 그들의 음악을 이루고 있는 모든 문법적 요소들은 그대로 계승되었지만 전작에 비해 그 정도가 더 심해졌고 특히 곡 전반의 흐름을 리드하는 듯한 드럼의 완급조절은 여전히 발군이다. 트랙 3개를 나누어 놓았지만 귀를 기울여 들어보면 1번 트랙부터 3번 트랙까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는 점도 알아두면 좋을 것이다.
음산한 분위기 안에서 딜레이 걸린 기타, 적당한 공간감이 느껴지는 드럼으로 시작되는 첫 번째 꿈. 서서히 고조되다 한 방 한 방 몰아치는 구성은 1집의 그것과 비슷하다. 12분이 넘는 대곡으로서 기타의 노이즈를 뒤로 한 채 마무리 된다. 그 노이즈를 그대로 받아서 시작되는 두 번째 꿈은 ‘악몽’의 느낌을 준다. 비교적 플레이 타임이 짧은(그래도 7분을 넘기지만) 두 번째 트랙은 노이즈를 뒤로하고 분산된 화음의 건반으로 시작하여 입자감이 강한 드라이브의 기타가 뒤따르고 질주하는 탐탐의 난타가 청자로 하여금 그야말로 내면의 침잠(沈潛)을 겪을 수 있게끔 해줄 것이다. ‘My Bloody Valentine’류의 슈게이징의 냄새가 가장 짙은 세 번째 꿈에서는 끊이지 않는 기타 노이즈가 인상적이다.
그들의 음악에 대해서 어떻게든 장르적 정의를 해야 할 터인데 참 애매하다. 포스트 슈게이징 정도로 해두고 싶은데 간혹 들리는 이질적 냄새라니, 나누어진 갈래나 틀에 근거해서 경계선을 긋고 싶어도 그러할 수가 없다. 단지, 개방적인 상태에서 실험이 계속 진행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포스트 록’ 정도로 해둘 뿐이다.
이번 EP에서는 로로스가 음악적으로 어떻게 다가오고 있는가 하는 호기심을 가지는 것도 좋겠지만 이들이 말하는 ‘Dream’의 시니피에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그 부분에 대해 접근해가는 것도 썩 괜찮을 듯싶다. 이번 앨범은 음악도 되고, 소설도 되고, 영화도 되고, 각자의 꿈도 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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