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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총서 가슴네트워크총서 43 POSTS


  1. 박준흠 / 가슴네트워크 대표, 문화기획자


    사용자 삽입 이미지

    1992년 10월


    내 입장에서 보면, 개인적인 음악 청취 이력의 변동과 한국 인디음악 씬의 시작이 운명적으로(?) 맞물린다고 주장하고 싶다. 1992년 이 시기는 한국에서 ‘대중문화의 시대’가 막 꽃을 피우려던 시기였고, 그 즈음 문화계간지 상상, 리뷰 등도 창간되었으며, 문예아카데미 같은 곳에서 대중음악을 포함한 대중문화 강좌가 생겨났다. 그러면서 대중음악이 진지한 비평 대상이자 문화연구의 대상으로 편입되었는데, 이는 기존 음악평론가의 관점과는 다른 종류의 글들이었다.


    신촌 일원 음악 씬에도 변화가 있었는데, 바로 ‘록카페’ 문화가 생성된 것이었고, 이에 대한 연구는 밴드 허벅지의 리더였던 안이영노의 석사논문 등에서 볼 수 있다. 내 경우는 그 무렵까지 집에서 혼자서 음악을 듣다가 드디어 밖에서 음악 교우들을 찾으려고 음악감상 모임에 가입했는데, 그게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내 인생 항로를 결정적으로 바꾸는데 일조한 음악마니아 모임이었다. 이게 제갈량이 세상에 출사표를 던진 것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내 나름 많은 기대와 설레임으로 그 모임을 찾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이 모임은 신촌 현대백화점 뒤에 위치한 ‘우드스탁’이라는 록카페에서 매월 첫째, 셋째 일요일 2시에 음악감상회 겸 담소 등등을 했었는데, 돌아가면서 2~3명이 각자 50분 정도 분량의 감상회 준비를 해오는 방식이었다. 초기 4~5년은 매우 열심히들 참여했고, 지극정성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준비하고, 소개했으며 스터디모임 비슷한 것까지도 시도를 했었다. 때때로 주변의 록카페를 빌려서 밤새 놀기도 하고, MT 가서도 음악 듣던 기억이 난다.


    내가 이 모임을 알게 된 것은 월간음악잡지 핫뮤직 독자게시판에서 모임 창단에 관한 소개글을 보고서였고, 당시 ‘음악마니아로서의 매너리즘’에 어느 정도 빠져있던 터라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던 욕구가 있었다. 정말 어려서부터 팝음악을 듣기 시작해서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포크, 퓨전재즈, 월드뮤직, 올드록, 하드록, 스래쉬․데스 등 온갖 종류의 헤비메틀에 이어 40~50년대 스탠다드 재즈까지 어느 정도 섭렵을 하고 나니 더 이상 새롭게 들을 음악이 없다는 것에 대한 갑갑증이 그 매너리즘의 원인이었다. 어쩌면 고등학생 시절부터 대중음악 관련 일을 하고 싶었던 내게 30살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으니, 어느 정도 조급증 비슷한 것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 때 마침 내게 다가온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의 돌파구였다.


    이 모임 음악감상회를 통해서 몇 가지를 깨달은 것이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음악적인 트렌드’(정확하게 말해서 ‘현재의 음악을 듣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당시 모임에서도 최고령(?)이었고, 음악청취 스펙트럼도 다른 이들보다 훨씬 넓었을 뿐만 아니라, 세션이나 레코딩 상태 같은 것에 집중해서 들었기 때문에 흔히 말해 ‘제대로 된 음악’에 대한 감식안이 꽤 있다고 자부하는 편이었다. 국내뿐만 아니라 영미권 대중음악 거장들의 연주를 집중적으로 들었고, 음악잡지 보면서 남들이 좋다고 하는 음악은 어떻게든 들으려고 무던히도 애썼던 기간이 물경 15년이나 되니 나름 그 방면의 고수가 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모임 동생들이 그 당시 영미권의 주류 대중음악권으로 막 편입되기 시작했던 얼터너티브록, 펑크 음악을 소개하는 것을 들으면서 한동안 혼란에 빠졌었다. 나 같은 올드록 마니아들은 짐작하겠지만, 올드록 마니아 입장에서 얼터너티브록, 특히 펑크는 음악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나 레드 제플린(Led Zeppelin)과 같은 거대한 스케일의 기가 막히게 연주하고, 매우 훌륭하게 녹음된 음반들을 중심으로 듣던 음악마니아들은 이와 반대편에서 다른 음악적 가치를 추구하는 펑크는 그냥 소음 비슷했다. 1992년 당시를 회상하면, 영미권에서 너바나(Nirvana)의 전설적인 히트 앨범인 [Nevermind]에 왜 광분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랬으니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 클래쉬(The Clash)와 같은 ‘펑크 거장’의 음악들조차도 흥미가 없는 것이 당연했다. 1980년대 영미권의 언더그라운드, 컬리지음악 씬에서 움트기 시작한 가장 중요한 음악적인 흐름인 얼터너티브 음악에 둔감했다. 지금 지산밸리록페스티벌을 운영하는 옐로우 나인의 김형일대표도 모임 일원이었는데, 그가 소개하는 소닉 유스(Sonic Youth)의 [Dirty] 앨범에 수록된 <100%>를 처음 들었을 때 정말 ‘뜨악’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던 내가 4~5개월의 꾸준한 교화(?) 기간을 거치면서 1993년 봄 즈음에는 나 역시 얼터너티브록 팬으로 변했던 것 같다. 여기에는 R.E.M. 광팬이었던 박모양이 꾸준히 던져준 R.E.M. 음악의 영향도 컸다.


    결국 나는 운이 좋아서 당시 ‘음악적인 트렌드’에 충실했던 모임 동생들 덕분에 80~90년대의 중요한 대중음악 트렌드를 체감할 수 있었고, 더 중요한 것은 ‘몸으로 느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지금껏 음악평론가로 지내면서도 ‘콤플렉스’가 없는 편이다. 즉, ‘현재의 음악’을 단지 직업적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고, 좋아하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글을 쓸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현재의 음악’을 하는 ‘당대 뮤지션’을 발굴해서 조명해줘야 하는 소임을 가진 음악평론가에게는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단지 음악마니아라면 자기 취향 자체에만 충실해도 되기 때문에 ‘음악적인 트렌드’가 그리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하지만 크게는 자국의 대중음악산업까지 염두에 두어야 하는 음악평론가는 이 부분이 직업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이는 음악 모임을 통해서 우연찮게 깨달은 점이지만, 그 깨달음은 대중음악계 주변부에만 머물던 내게 중앙으로 진입할 수 있는 용기를 준 것 같다. 그래서 1997년에 대중음악전문지 《서브》를 만들던 당시부터 음악평론가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동시대 평론’을 해야 한다는 점이었고, 그 때까지도 다른 음악잡지에서 별로 다루지 않았던 영미권의 얼터너티브 음악과 한국 대중음악/인디음악을 주요하게 다루었다. 또한 1999년 11월에 가슴네트워크를 오픈할 때 가졌던 모토가 ‘지금, 여기, 우리의 가슴 열기’였다. 기억할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다시 돌아와서, 『한국의 인디레이블』 머리말에서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한국에서 ‘인디음악’과 ‘인디레이블’은 현재 어떤 의미인가?”이다. 인디음악을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 ‘한국 음악창작자의 역사’에서의 현재 지점으로 보는 시각은 고사하고, ‘현재 트렌드’(현재의 음악)로 보는 시각은 얼마나 있을런지. 1996년부터 시작된 1차 인디음악 붐은 다분히 언론의 선정적인 관심 때문이었지 음악 자체에 대한 관심 때문은 아니었다. 그래서 1999년이 되니 신기하게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매체의 관심도가 급격하게 떨어졌다. 이게 2007년까지 이어져 오다가 2008년에 와서는 장기하와 주변으로 인해서 다시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고 나서는 연초에 내게 몇몇 인터뷰 요청이 있었는데, 주요한 물음은 “장기하의 인기가 시들면 인디음악 붐도 꺼지지 않을까요?”였다. 이는 아직도 인디음악을 음악창작이나 음악트렌드, 음악산업 관점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하는 질문이다. 장기하 때문에 인디음악이 떴다고? 천만의 말씀. 한국에서 인디음악은 이미 ‘시대적인 트렌드’가 되었다. 장기하가 대중적인 관심을 일시에 증폭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그 조짐은 2000년에 델리스파이스의 김민규가 자신의 솔로 프로젝트인 스위트피(Sweetpea) 1집을 자신의 레이블인 문라이즈레코드(Moonrise Record)에서 내려고 할 때부터 ‘준비’되었다.1)



    [한국 인디음반 발매 현황]2) (박준흠, 가슴네트워크, 2007년 7월)

    연도/등급

    올해앨범

    필청앨범

    우수앨범

    주목앨범

    기타앨범

    소계

    1996

    1

    2

    0

    2

    1

    6

    1997

    1

    2

    5

    6

    3

    17

    1998

    1

    10

    11

    14

    25

    61

    1999

    1

    9

    8

    11

    33

    62

    2000

    1

    9

    13

    27

    53

    103

    2001

    1

    9

    20

    24

    71

    125

    2002

    1

    9

    22

    28

    68

    128

    2003

    1

    15

    26

    46

    87

    175

    2004

    1

    16

    25

    37

    111

    190

    2005

    1

    10

    27

    36

    136

    210

    2006

    1

    11

    33

    44

    164

    253

    2007

    0

    6

    12

    33

    72

    123

    총계

    11

    108

    202

    308

    824

    1453



    2002년 이후 본격화된 ‘홈레코딩 제작시스템’으로 인해서 2004년 무렵부터는 매년 발매되는 인디음반이 200장을 넘기고 있다. 그리고 2006년 무렵부터 각 인디레이블들이 신경 쓰는 것은 ‘음악적인 스타일’ 부분이고, 그래서 음반기획과 음반프로듀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을 정도로 장족의 발전을 해왔다. 이 흐름에 맞물린 것이 대형 대중음악페스티벌이다. 2005~2006년 필자가 예술감독으로 있었던 광명음악밸리축제에서 본격적으로 전문화된 ‘한국 대중음악 축제프로그램’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2005년에는 ‘하나뮤직 스페셜’, ‘밸리 초이스’, ‘인디음악 10년사’, ‘민중음악 30년사’, ‘뉴 커런츠’ 프로그램을 3일에 걸쳐서 진행했다.3) 이후 2006년에는 펜타포트록페스티벌, 2007년에는 그랜드민트페스티벌, 2009년에는 지산밸리록페스티벌이 생겨나서 기존의 쌈지사운드페스티벌(1999년), 자라섬재즈페스티벌(2004년)과 함께 한국 인디음악 씬을 키우고 있다. 장기하와얼굴들이 결정적으로 주목 받은 곳도 다름 아닌 2008년 쌈지사운드페스티벌이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대형 대중음악페스티벌 시장이 급성장한 일본의 사례를 보면, 한국도 이제 영화제에 이어서 그 흐름을 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올해 진행되고 있는 상기 음악축제들의 진행 경과를 보건데, 한국에서 적어도 향후 10년은 음악축제 성장이 지속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동반하여 인디음악의 성장세도 이어질 것으로 판단한다.




    2009년 10월


    그동안 수고하신 필자 분들과 사진을 제공한 해당 레이블, 사진작가 분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인터뷰에 성실하게 응해주신 레이블 대표님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또한 어렵게 매주 전면 지면을 내준 경향신문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30주를 진행하는 동안 시간도 많이 뺏기고, 여러 어려움도 있었다. 반면 그에 반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기사를 읽고, 관심을 가졌을까라는 의문이 든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또 한번 거대한 기록을 해냈다는 사실이고, 이게 ‘당대성’(현재 음악 기록)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 만족한다. 그런 점에서는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었다는 점 자체만으로도 내게는 큰 행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08~2009년, 두 번째 붐을 맞은 한국 인디씬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훗날 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도와주신 분들을 거론해야 할 것 같다. 먼저 이 책의 출판을 기꺼이 수용한 도서출판 선의 김윤태 대표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출판사로서는 정말 어려운 결정이었고, 대단히 고맙다는 인사를 거듭 전하고 싶다. ‘한국 대중음악의 현재’ 아카이브는 전적으로 도서출판 선의 도움이다. 그리고 ‘한국 대중음악의 현재’ 시리즈 디자인을 담당한 디자인이즈 추정희 실장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항상 성실함과 안정적인 퀄리티를 보여주는 디자이너를 만난 것도 내게는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사진을 기꺼이 제공한 레이블 측과 최규성, 이정실, 권준경 씨 등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귀중한 시간을 내어 인터뷰에 참여해 주신 12명의 필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이들의 프로필은 ‘참여 필진 프로필’ 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인터뷰에 응해주신 레이블 대표 분들에게는 말할 나위 없이 고마움을 느낀다. 이들로 인해서 이 책 출판이 가능했다.


    올해 11월 가슴네트워크가 10주년을 맞고, 공연, 전시, 세미나, 출판, 출반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2009 가슴네트워크축제’를 준비 중이다. 이를 도와주고 있는 최규성, 하나, 류형규, 문예진, 신나리, 도미노, 김민규, 김민정 씨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KT&G 상상마당, 공간 루, 파스텔뮤직, 일렉트릭뮤즈, Views, maniadb.com, 향뮤직에도 고마움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항상 곁에서 지지와 신뢰를 보내주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드디어 ‘한국 대중음악의 현재 Trilogy’가 끝났다.



    2009. 9. 30.

    문화기획그룹 & 문화예술전문매체 ‘가슴네트워크’ 박준흠




    1) 인터넷음악방송국 쌈넷에서 방송국장으로 있을 때 김민규 씨가 문라이즈레코드 마케팅 정책에 관해 조언을 구하려 온 적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1+1’ 형식으로 본 앨범에다가 문라이즈 컴필레이션 시리즈를 붙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었고, 이후 그런 방식으로 몇 장이 나왔다.


    2) 2007년 7월에 『인디음반가이드 2000』을 집필하기 위해서 조사한 한국 인디음반 발매 현황이다. 순전히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음반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이 보다는 약간 더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도 유통망을 통해서 발매된 인디음반들은 다 소장하고 있고, 일부 라이브클럽에서만 파는 음반들도 수시로 구입했기 때문에 큰 차이는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2009년 9월 시점에서 추정하건데 발매된 전체 인디음반은 2000장이 넘을 것으로 생각한다. 『인디음반가이드 2000』은 2010년에 발간할 예정으로 있다.


    3) 2005년 당시 출연진은 다음과 같다. 하나뮤직 스페셜(조동진, 장필순, 한동준, 버드, 오소영, 이다오), 밸리초이스(한대수, 이병우, 이상은, 이승열), 인디음악 10년사(델리스파이스, 허클베리핀, 마이언트매리, 이장혁, 코스모스, 몽구스, 스웨터, 슬로우쥰, 페퍼톤스, 푸른새벽, 카프카, 소규모아카시아밴드, 바세린, 49몰핀스), 민중음악 30년사(안치환, 연영석, 손병휘, 노찾사, 꽃다지), 뉴 커런츠(미스티블루, 13스텝스). 그리고 4개의 거리무대에서 파스텔뮤직, 튜브앰프, 비트볼레코드, 카바레사운드, 12몽키즈, 핑퐁사운드, B레코드, 롤리팝이 레이블 무대를 가졌다. 한마디로 2009년 현재 대형 대중음악축제 프로그램의 원형이라고 자부한다.




    <이미지 출처>


    ■ 표지, 내지 디자인에 아래 음반 이미지를 차용하였습니다.

    나루(Naru) [자가당착(自家撞着)] (2008/해피로봇)

    다방밴드 [돗대] (2005/일렉트릭뮤즈)

    루비라이트(Rubylight) [Love, On!] (2006/루비살롱)

    언니네 이발관 [비둘기는 하늘의 쥐] (1996/석기시대)

    얼스(Earls) [The Merrymaker] (2005/파스텔뮤직)

    키비(Kebee) [Evolutional Poems] (2004/소울컴퍼니)

    플라스틱 피플(Plastic People) [Folk, Ya!] (2006/일렉트릭뮤즈)

    V.A. [클럽 하드코어, 아싸 오방 첫 앨범!] (1998/인디)


    박준흠 / 가슴네트워크 대표, 문화기획자 1992년 10월 내 입장에서 보면, 개인적인 음악 청취 이력의 변동과 한국 인디음악 씬의 시작이 운명적으로(?) 맞물린다고 주장하고 싶다. 1992년 이 시기는 한...

  2. 그동안 수고하신 필자 분들과 사진을 제공한 해당 레이블, 사진작가 분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그리고 인터뷰에 성실하게 응해주신 레이블 대표님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또한 어렵게 매주 전면 지면을 내준 경향신문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30주를 진행하는 동안 시간도 많이 뺐기고, 여러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반면 그에 반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기사를 읽고, 관심을 가졌을까라는 의문이 든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또 한번 거대한 기록을 해냈다는 사실이고, 이게 당대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 만족합니다. 그런 점에서는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었다는 점 자체만으로도 제게는 큰 행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래는 그간 인터뷰에 응해주신 인디레이블 대표분들입니다. 이렇게 한자리에 모셔보니 정말 보기가 좋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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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피로봇 - 이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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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아지문화예술 - 공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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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붕가붕가레코드 - 고건혁, 윤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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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렉트릭뮤즈 - 김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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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디 - 김종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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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프뮤직 - 김윤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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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럭 - 이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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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림온레코드 - 박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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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롤리팝뮤직 - 서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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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비살롱 - 이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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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스터플랜 - 이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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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라이즈 - 김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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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사기단 - 차승우, 이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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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컹크 - 원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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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룬앤니들 - 최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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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트볼 -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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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빅딜레코드 - 정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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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빵 - 김영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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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레이블 - 이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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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울컴퍼니 - 배이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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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듬온 - 손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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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쌈지(쌈넷) - 천호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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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그뮤직 - 박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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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핀레코드 - 윤석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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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버맨뮤직 - 이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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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튜브앰프 - 이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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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기시대 - 전홍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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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쥬신프로덕션 - 김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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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바레사운드 - 이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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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퀸엔터테인먼트 - 이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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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일뮤직 - 전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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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튠테이블무브먼트 - 송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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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고뮤직 - 손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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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스텔뮤직 - 이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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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MC 레코드 - 이하석



    그동안 수고하신 필자 분들과 사진을 제공한 해당 레이블, 사진작가 분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그리고 인터뷰에 성실하게 응해주신 레이블 대표님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또한 어렵게 매주 전면 지면...

  3. ㆍ대중성 다지며 인디 전성기 노래하다

    메이저와 마이너 레이블의 가교 역할


    김민규 대표 ⓒ 이정실

    문라이즈 문라이즈 레이블은 2000년대 초반, 말 그대로 독립적이고 언더그라운드에만 머물러 있던 당시의 인디 레이블들 가운데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쳤던 레이블이었다. 레이블 대표였던 김민규(델리 스파이스)의 취향에 따라 주로 모던 록과 포크에 기반한 음반들을 발매하였고, 메이저와 마이너 레이블의 가교 역할을 하며 인디 신의 저변을 넓히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최근 그런 비슷한 위치에서 활동하고 있는 파스텔 뮤직의 원형을 제시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제는 보편화된 홈레코딩 시스템을 처음으로 정착시킨 레이블이기도 하다. 레이블의 음악적 특성상 큰 사운드는 필요하지 않았기에 집에서 소규모의 녹음 기기로 앨범을 제작·발매하며 적은 자본으로 앨범을 완성할 수 있는 시스템을 확립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인디의 전성기에 문라이즈가 있었다.

    문라이즈 레이블은 2000년에 델리 스파이스의 리더인 김민규가 자신의 솔로 프로젝트를 위해 처음 만들었던 레이블이다. 초반의 문라이즈 모습에서 아마추어리즘이 느껴졌던 것은, 이 레이블의 시작이 단순히 김민규의 솔로 프로젝트 앨범을 내기 위해 만들어졌던 것에서 기인한다. 모던 록 밴드였던 델리 스파이스와는 다른, 보다 내밀하면서 포크적인 감성을 담은 음악을 하고자 했던 김민규는 ‘스위트피(Sweetpea)’란 이름과 함께 자신의 음악을 간섭받지 않고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독자적인 레이블을 만들게 되었다. 딱히 레이블의 성격을 규정하지는 않았지만 이후 문라이즈에서 나온 대부분의 음반들은 소박한 사운드를 담은 모던 록과 포크의 자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노브레인

    스위트피의 정식 데뷔 앨범은 발매와 함께 큰 반응을 얻어냈다. 김민규 특유의 서정적인 감성과 어쿠스틱한 사운드가 결합된 이 앨범은 평단과 음악 팬들 모두에게 큰 지지를 얻어냈고, 문라이즈라는 레이블을 대중들에게 알릴 수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당시 많은 인기를 얻고 있었던 델리 스파이스라는 이름값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스위트피의 이 앨범에는 ‘I’m Not Certain, But You Are…’라는 제목의 보너스 CD가 한 장 삽입되어 있었는데, 이 CD에는 정순용(마이 언트 메리)의 솔로 프로젝트인 토마스 쿡(Thomas Cook)과 이한철, 그리고 이후 하나음악에서 솔로 앨범을 발표하는 이다오 등의 노래들이 들어있었다. 이 보너스 CD는 문라이즈 레이블의 특징을 보여주는 한 단면으로, 이 마케팅 방식은 이후 토마스 쿡의 앨범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니까 뮤지션의 솔로 앨범을 내면서 일종의 프로모션으로 이후 레이블에서 나올 뮤지션들을 소개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이 방식은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음반 구매자들에게 레이블의 홍보와 함께 문라이즈만의 음악적 색깔을 동시에 알려나갈 수 있었다.

    스위트피의 성공에 이어 두 번째로 앨범을 발표한 뮤지션은 마이 언트 메리의 리더 정순용이었다. 그는 김민규와 마찬가지로 솔로 활동에 대한 욕구가 있었고, 문라이즈를 통해 그 욕구를 해소할 수 있었다. 토마스 쿡이란 이름으로 만들어진 정순용의 솔로 앨범은 여러모로 스위트피의 앨범과 닮아있었다. 한 밴드의 리더로서 밴드 음악과는 다른 보다 개인적인 음악을 앨범에 담은 것이 그랬고, 또 솔로 앨범과 함께 보너스 CD를 담은 방식이 그랬다. 문라이즈 레이블의 두 번째 보너스 CD에는 스위트피의 노래를 비롯해 첫 번째 CD에도 참여했던 이한철, 이다오 등의 노래들이 들어있었다. 이후 문라이즈에서 앨범을 발표하는 전자양, 웨어 더 스토리 엔즈의 노래들이 들어있었다. 문라이즈는 이런 방식의 마케팅과 홍보를 계속해 나갔다.

    전자양과 웨어 더 스토리 엔즈의 앨범이 잇따라 발매되면서 문라이즈는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펴나갔다. 거의 활동을 하지 않은 전자양의 노래가 광고의 배경음악으로 쓰이는 행운도 뒤따랐고, 델리 스파이스의 김민규라는 배경으로 인해 다른 인디 레이블들에 비해 메이저 시장에 접근하기가 보다 용이한 편이었다. 또 일렉트로니카 음악을 했던 웨어 더 스토리 엔즈의 앨범은 모던 록과 포크에 한정돼 있던 문라이즈의 음악적 스펙트럼을 넓혀주었고, 이후 시부야 케이 스타일의 음악을 하는 하키의 앨범을 발매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이후 재주소년과 하키의 음반을 발표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던 문라이즈는 2000년대 중반부터 그 기세가 조금씩 꺾여가기 시작했다. 델리 스파이스 활동을 병행하고 있던 김민규는 문라이즈에만 신경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고, 김민규와 함께 문라이즈를 이끌던 마케팅 담당자마저 레이블을 떠난 결과였다. 현재는 레이블의 대표였던 김민규가 파스텔 뮤직과 계약을 맺고 활동하고 있는 관계로 문라이즈는 잠시 휴지기를 갖고 있는 상태이다. 재주소년과 하키 등이 소속되어 있지만 예전과 같은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마이 언트 메리 ⓒ 플럭서스


    문라이즈는 두 가지 측면에서 한국 인디 레이블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첫 번째는 문라이즈가 인디 레이블이란 개념을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알렸다는 것이다. 그 전에 존재했던 인디나 강아지문화예술 등의 인디 레이블들이 대중성이란 측면에서 한계가 있었다면, 김민규가 만들어낸 문라이즈는 감성적인 음악과 델리 스파이라는 지명도가 맞물리며 대중들에게 보다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문라이즈의 음악들은 공중파 라디오에서도 심심찮게 선곡될 수 있었고, TV나 언론 매체에도 노출될 수가 있었다. 이후 생겨나는 레이블들은 문라이즈의 이런 마케팅을 많이 참조하였고, 비슷한 노선을 추구하는 레이블들도 여럿 생겨났다. 두 번째는 홈레코딩 방식이었다. 이들은 레이블이 어느 정도 안정적인 운영에 들어갔음에도 홈레코딩을 고집했다. 해당 뮤지션이 자신의 힘으로 각자 레코딩과 믹싱을 하고 마스터링만을 전문 스튜디오에서 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최소한의 비용을 들여 최대한의 효과를 거두어야 하는 인디 레이블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었다. 문라이즈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증명해 보였다. 문라이즈의 이런 방식은 다른 레이블과 뮤지션들에게도 영향을 끼쳐 홈레코딩은 인디 신의 보편적인 방식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인디의 시작을 함께한 문라이즈 대표 김민규

    W ⓒ 최규성

    김민규는 한국 인디 음악을 얘기하는데 맨 앞자락 위치에 놓아야 할 뮤지션이다. 그는 델리 스파이스라는 밴드를 통해 인디 신의 실질적인 시작과 함께 했고, 인디를 대중들에게 알리는데 큰 공헌을 했으며, 인디에서 메이저라는 가장 모범적인 단계를 밟아나간 뮤지션이었다. 델리 스파이스라는 밴드가 지금 한국 음악사에서 갖는 의미에 비하자면, 그 시작의 이유는 너무나도 단순한 것이었다. 집에서 혼자 기타 연습을 하던 김민규가 자신이 연마한 기타 테크닉을 가지고 함께 합주를 해볼 밴드가 필요했던 것. 김민규는 PC 통신 사이트에 멤버 모집 공고를 냈고, 그 글을 본 윤준호가 찾아와 델리 스파이스라는 밴드가 탄생하게 됐다. 그렇게 델리 스파이스는 1997년 역사적인 데뷔 앨범을 발표하였다. 그 안에 담겨있던 ‘챠우챠우’는 한국 인디 신의 송가가 되었고, 델리 스파이스는 곧바로 인디 신을 대표하는 밴드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델리 스파이스로 활동을 하며 세 장의 앨범을 발표하면서 승승장구하고 있던 김민규였지만, 그에겐 다른 음악적 욕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밴드가 아닌 자신만의 음악을 마음대로 만들고 발표할 공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는 그가 좋아했던 영·미 지역의 인디 뮤지션들이 행하던 방법이기도 했다. 델리 스파이스 활동 도중 틈틈이 외국 여행을 하며 음악적 영감을 얻어왔던 김민규는 외국의 인디 레이블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 영향을 바탕으로 자신의 솔로 앨범 발매를 위한 문라이즈란 이름의 독립 레이블을 만들게 된다. 처음 시작은 단순히 스위트피라는 자신의 솔로 앨범 발매를 위한 것이었지만, 앨범의 기대 이상의 성공과 함께 주위의 동료 뮤지션들이 하나둘 가세하기 시작했다. 그는 한 밴드의 리더로, 또 한 레이블의 대표로 그 역할들을 충실히 수행해 나갔다. 현재 그는 스위트피의 3집 앨범 활동을 하고 있으며, 각종 페스티벌 무대를 위해 한동안 휴지기를 가졌던 델리 스파이스의 활동 역시 준비 중에 있다.

    <글 | 김학선 웹진 보다 편집장·진행 | 박준흠 가슴네트워크 대표>

    세상이 사기라 외치던 겁없던 그들

    문화사기단 아는 사람만 알던 ‘문화사기단’의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이들이 6년만에 컴백한 서태지에 대해 공식적으로 안티를 선언했을 때였다. 이 때문에 이들은 ‘서태지 안티를 통해 홍보를 노린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물론 정교한 비판의 논리가 없었던 것을 비판한다면 그 비판이 맞는 말이겠지만, 결국 펑크는 ‘무엇에 대한 반항’이라기보단 ‘반항’ 그 자체이기도 하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쩌겠는가.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그렇게 생겨먹었던 것을.

    펑크는 음악이면서, 동시에 태도였다. 섹스 피스톨즈가 그러한 이래, 펑크 뮤지션들에게 ‘태도’는 음악 외에도 늘 펑크가 펑크이기 위한 이슈로서 존재했다. 홍대에서 맨 처음 펑크 키드들의 몸부림이 시작되던 그 때, 그들은 오프스프링이나 그린 데이 같은 네오 펑크보다는 섹스 피스톨즈의 저돌적인 태도와 클래시의 음악을 본받고자 했다. 노브레인이 주축이 되어 1998년에 결성된 레이블 문화사기단은 정통 펑크 레이블로서 ‘음악’과 ‘태도’를 동시에, 가장 적극적으로 추구한 레이블들 중 하나였다. 노브레인의 ‘청춘 98’ 음반 발매와 함께 만들어진 이 레이블은 차승우(사진)의 군 전역 이후인 2000년부터 후배 밴드들의 음반을 활발하게 소개하면서 그 활동 범위를 넓혀갔다.

    자신들의 음반 활동과 함께 버닝 햅번, 배다른 형제, 푸펑충 등 신인 밴드들을 지속적으로 소개하고 이들의 앨범 또한 발매하던 문화사기단은 홍대 인디 신에서 펑크 열풍이 쇠락해가면서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고, 2002년에 잠정 해산하게 되었다. 이후 노브레인은 차승우의 탈퇴로 이전의 거칠던 ‘조선 펑크’에서 벗어나 다른 방향의 펑크 음악을 하고 있다. 이후 문화사기단에서 활동하던 많은 밴드들은 해체되었거나, 다른 밴드를 결성해 다른 레이블에서 활동하고 있다.

    <글 | 홍정택 가슴네트워크 필자·진행 | 박준흠 가슴네트워크 대표>

    아티스트 및 발매 앨범 - 문라이즈

    스위트피(Sweetpea) 델리 스파이스의 리더인 김민규의 솔로 프로젝트. 그는 밴드 사운드와는 다른 평소에 즐겨 듣던 외국 인디 팝 뮤지션들의 감성과 닮은 음악을 하고자 스위트피라는 솔로 프로젝트를 만들고 자신만의 레이블까지 만들었다.



    [Never Ending Stories] (2000) 밴드 사운드와는 다른, 보다 어쿠스틱한 사운드를 담고 있다. 델리 스파이스 시절보다 더욱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싣고 있으며 발매 당시 평단과 음악 팬 모두에게 높은 지지를 얻어냈다.



    [하늘에 피는 꽃] (2004) 1집과 비교해 모던 록부터 발라드까지 보다 다양한 음악을 담아냈다. 거의 혼자서 만들었던 1집과 비교해 동료 뮤지션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마케팅 역시 보다 적극적으로 이루어졌음. 1집보다는 대중적으로 더 어필할 수 있었다.



    토마스 쿡(Thomas Cook) 마이 언트 메리의 리더인 정순용의 솔로 프로젝트.

    [Time Table] (2001) 어쿠스틱한 사운드 속에서 정순용만의 멜로딕한 감각이 잘 살아있는 앨범. 혼자서 모든 곡을 만들고 대부분의 연주를 직접 했다.



    마이 언트 메리(My Aunt Mary) 홍대 클럽에서 오랫동안 활동을 해온 모던 록 밴드로, 홍대 인디 신의 시작과 거의 함께 해온 밴드. 3집 앨범으로 제2회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올해의 앨범’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nd My Aunt Mary] (2001)



    웨어 더 스토리 엔즈(Where The Story Ends) 코나라는 밴드에서 활동하던 배영준을 중심으로 결성된 일렉트로니카 프로젝트 밴드이다. 문라이즈 레이블의 기존 이미지와는 이질적인 일렉트로니카 음악을 함으로써 문라이즈의 음악적 영역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는 W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眼內閃光] (2001) 배영준이 해왔던 가요 멜로디와 일렉트로니카 사운드가 이상적인 조화를 이룬 앨범이다. 인간적이며 따뜻한 일렉트로니카 앨범이다.



    하키 웨어 더 스토리 엔즈에 이어, 기존 문라이즈의 색과는 다소 이질적인 시부야 케이 스타일의 음악을 하는 여성 뮤지션이다. 시부야, 라운지, 프렌치 팝 등이 조화된 음악을 들려주었다.

    EP [주워가줄래?] (2004)



    [이상한 얘기] (2004) 김민규가 직접 프로듀서를 맡은 앨범이다. 국내에선 쉽게 들을 수 없던 스타일의 음악이었지만 일본 뮤지션들과의 유사성 때문에 논란이 일기도 하였다.



    델리 스파이스(Deli Spice) 영화 ‘클래식’에 삽입되면서 더 유명해진 노래 ‘고백’이 담겨 있던 5집 [에스프레소] 활동 이후, 델리 스파이스는 긴 동면에 들어간다. 음악적 재충전과 각자의 프로젝트 활동으로 보낸 이 기간 동안 김민규는 ‘스위트피’로, 윤준호와 최재혁은 ‘오메가3’로 활동했다. 2005년 여름에는 밴드 결성 10주년을 맞아 기념공연으로 전국 투어를 갖는 등 바쁜 나날을 보냈다.



    [Bombom] (2006) 공백이 길었던 만큼 들려주고 싶은 얘기도 많았다. 이들은 무려 30여곡의 데모를 모은 후 최종적으로 엄선된 12트랙을 들고 스튜디오로 향했다. 봄은 그들이 그토록 원하던 유토피아라고 한다.

    문화사기단

    노 브레인(No Brain) 싱글 [청춘 98] (1998) 1집 [청년폭도맹진가] (2000)

    섹스 피스톨즈 트리뷰트 앨범 [Never Mind The Sex Pistols. Here‘s The No Brain] (2001) 2집 [Viva No Brain] (2001)



    푸펑충 2집 [Tough Like Metal] (2000)



    지랄탄 ‘99 & 리얼쌍놈스 1집 [마이너리그] (2000)



    펑크킬러(Punk Killer) EP [Animal Punx] (2001)



    런 캐럿(Run Carrot) EP [Oi!] (2001)



    아작(A-Zak) EP [Azak!!] (2001)



    글로벌 코퍼레이션(Global Corporation)

    EP [Return To The 77 Punx] (2001)


    <시리즈 끝>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902111444325&code=900315


    ㆍ대중성 다지며 인디 전성기 노래하다메이저와 마이너 레이블의 가교 역할 김민규 대표 ⓒ 이정실문라이즈 문라이즈 레이블은 2000년대 초반, 말 그대로 독립적이고 언더그라운드에만 머물러 있던 당시의...

  4. ㆍ우린 중도좌파, 배고픈 음악은 가라

    다른 고집보다도, 늘 레이블의 지속가능한 운영을 고민한다.


    인디 레이블 하면 으레 떠오르는 ‘치열하거나, 가난하거나, 그래서 궁상맞은’ 이미지들은, 제펫(Jeppet)이라는 이름으로 캐스커(Casker), 가재발 등과 함께 한국 일렉트로니카 1세대로 활동하던 윤석준이 설립한 루핀 레코드에서는 사실 조금 낯선 것들이다. 국내 대형 모바일과 온라인 콘텐츠 제공 업체 산하의 자회사로 등록되어 있는 루핀 레코드는 캐스커, 제펫, 포스티노(Postino), 블루 셔벗(Blue Sorbet) 등의 음반과 음원제작 사업 외에도 파티 프로덕션, 애니메이션 등의 영상음악 및 포스트프로덕션, 콘텐츠 배급 및 투자 사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업 포트폴리오를 지니고 있는 중견기업이다.

    온라인 음원사업의 가능성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오프라인 음반배급은 메이저 배급사에 맡기고 포털 사이트, 커뮤니티 사이트 등을 통한 음원판매를 통해 캐스커, 소울메이트 등의 음반을 히트 시킨 전례는 시장공략에 ‘적극적인’ 루핀 레이블의 특성을 보여준다. 혹자는 이런 번듯하게 ‘사업하는’ 모습에서 루핀 레코드의 인디 레이블로서의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핀 레코드는 배고프게 음악하는 것을 숙명처럼 알던 이전 홍대 인디 신을 경험하고 지나온 뮤지션이 인디 레이블의 지속가능한 생존과 발전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험을 거듭하며 만들어 온, 조금 독특한 형태의 ‘중도좌파’ 인디 레이블이라고 할 수 있다.

    루핀 윤석준 대표(사진)는 한국 일렉트로니카 1세대 뮤지션으로서 순수 일렉트로니카 최초의 레이블이었던 DMS 트랙스와 지 레코드가 잇달아 문닫는 것을 보면서 ‘이런 음반을 지속적으로 소개해 줄 수 있는’ 레이블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다른 인디 뮤지션들이 그렇듯, 그 또한 DMS 트랙스와 지 레코드에서 발매하려던 데뷔 앨범이 잇달아 무산된 이후 스미스 앤 모바일이라는 모바일 콘텐츠 제작 업체에서 음악 외의 일을 하게 되었다. 때마침 국내에 불어닥친 모바일 붐은 그와 그가 속한 회사의 사업을 비약적으로 성장시켜 주었고, 이 무렵 그는 문득 다시 음악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회사 대표에게 “레이블 사업을 해보고 싶다. 최대한 수익사업으로 발전시키겠다”는 합의 하에 루핀 레코드를 설립했다.

    음악 외에 다양한 경험을 쌓았던 그간의 시간은 그가 일렉트로니카 전문 레이블의 대표로서 한국에 일렉트로니카 뮤지션과 문화를 소개하는 것 외에도 더욱 다양한 수익 모델을 찾고, 이를 통해 사업기회를 넓힐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이제 일렉트로니카 외에도 다양한 장르의 뮤지션을 소개하고, 이를 통해 루핀의 브랜드를 재조명받고 싶다는 그는 ‘내가 이 일을 그만두게 되더라도 계속 살아남아 아티스트와 그들의 앨범을 소개할 수 있는’ 레이블로서 루핀 레코드를 만들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루핀 레코드를 처음 설립했을 때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제펫

    “처음에는 ‘제펫’이라는 이름으로 당시 우리나라 일렉트로니카 뮤지션 대부분이 활동하던 ‘DMS 트랙스’에서 활동하면서 작품도 내고, 앨범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2001년에 DMS 트랙스가 갑자기 문을 닫으면서 앨범 발매가 한 번 무산되었다. 이후 가재발과 전 DMS 트랙스 소속 분의 주도로 ‘지 레코드’가 만들어졌고, 거기서 가재발 2집, 캐스커 1집 등이 발매되었다. 나도 자연스레 지 레코드 소속이 되었고, 그곳에서 다시 앨범을 준비하게 되었는데, 앨범이 나올 때가 되니까 지 레코드가 또 없어지더라. ‘아, 난 내가 직접 레이블을 만들어서 내야 되나보다’ 하는 생각이 그때쯤 들었다(웃음). 지 레코드에서의 앨범 발매가 무산될 때 즈음 지인의 소개로 당시엔 생소했던 모바일 콘텐츠 비즈니스를 시작하게 되었다. 창단 멤버로 회사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일이 잘되어서 사업이 성공하니까 문득 레이블 운영이 하고 싶어졌다.”

    -기업체 내의 사업부서로서 있는 루핀 레코드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디 레이블이라고 할 수 있다고 보는가.

    “루핀은 회사 조직상으로만 사업부서로만 되어있을 뿐 엄연한 독립회사다. 모든 수지타산, 자금집행이 독립적으로 진행되고 비용정리도 따로 정산한다. 대개의 인디 레이블이라는 게 뮤지션 혼자서 만들고 소수의 커뮤니티가 꾸려가는 독립집단이 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우리 루핀 레코드는 그냥 음반만 내고 마는 레이블이 아니라는 걸 차별화의 요소로 삼고 싶었다. 그래서 이런저런 시도도 많이 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구심점에는 늘 ‘음악’이 있도록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려 했다. 유통상으로 인디와 메이저의 중간에 있는 중도좌파 레이블로서, 모바일과 온라인을 주로 하는 특징적인 레이블이 되고 싶었다.”

    -제펫 1집에 대한 시장반응은 어땠는지.

    캐스커

    “레이블을 만들고 제일 처음 만든 음반이 잘되어야 레이블이 오래 간다는 소리가 있는데, 엄밀히 말하면 제펫 1집이 시장에서 크게 성공하지 못해서 불안했던 게 사실이다. 2004년 6월에 루핀이 런칭하고, 제펫 1집 앨범을 발매했고, 그해 연말 카운트다운파티를 투자·주최했는데 다행히도 그게 대박이 났다. (참고로 윤 대표는 1999년부터 굵직한 일렉트로니카 파티들을 기획한, 국내 파티기획자 1세대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당시 호텔파티 집객이 2000명 정도면 성공한 케이스로 보는데, 우리 파티에는 당시에 4000명이 넘게 왔다. 그때 자연스레 그 파티가 이슈가 되면서 루핀의 이름을 알릴 수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2005년 캐스커의 2집을 내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2004년 파티를 할 당시에 프리 템포가 처음 내한했는데, 그때 라이센스를 맺지 않았던 게 후회되지는 않아도 아쉽기는 하다(웃음).”

    -루핀 레코드는 국내 인디 레이블 가운데 온라인 음원 시장 쪽을 가장 성공적으로 공략한 사례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온라인 음원 시장의 가능성을 어떻게 알았나.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유통은 직접 할 수 있으면 직접 하는 것이 제일 좋다. 하지만 우리는 타이틀의 수나 스케일 면에서 부족한 감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유통수수료라도 아끼기 위해서 오프라인 음반 유통을 다양한 메이저 배급사에 맡기는 대신, 모기업이 성공한 모바일 시장과 함께 온라인 음원 시장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물론 당시만 해도 음원의 디지털 유통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고, 매출이 나올 만한 수익 모델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오히려 ‘노다지’와 같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모바일 시장이 그랬다. 유행하는 애드립 같은 것을 벨소리로 만들어서 등록만 하면 수천만원씩 매출이 나왔는데, 언젠가는 이런 일이 모바일이 아니라 디지털 음원 유통 전반에 있어서 가능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모회사는 SKT, KTF 등의 BP(Business partner)로 활동할 만큼 모바일에서의 성공경험이 있었고, 나 또한 음악콘텐츠 사업부문을 총괄하면서 이를 직접 두 눈으로 보고 나니 확신이 생겼다. 당시만 해도 모바일이 디지털 유통의 메인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회사에서의 경험을 최대한 활용해 포털 사이트와 커뮤니티 사이트 등에 우리의 음악을 소개하고 다녔다. 남들은 라디오 PD한테 가는 시간에 우리는 온라인 사이트를 뛰어다니고, SKT부터 해서 통신사들까지 줄기차게 돌아다녔다.”

    -현재 온라인 음원 시장을 어떻게 보나.

    “시간이 지나면서 온라인 음원 시장, 더 나아가 대중음악 시장이 보편화된 것이 문제라고 본다. 산업으로 보면 그 어떤 산업도 크기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시장이 커지는 속도보다 경쟁이 심화되다 보니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더 붙는다. 예전에는 음반을 한 장 발매하면 10명이 수익을 나눠 가졌는데, 이제는 100명이 나눠 갖는다. 저작권협회에 등록되어 있는 곡, 작곡가 숫자는 내가 처음 시작하던 2004년과 비교해 현재 두 배가 넘는다. 옛날에는 음반을 내기 어려웠는데, 이제는 음악을 내기가 너무 쉬워졌다. 음반을 내기 귀찮으면 디지털 싱글만 발매하면 그만이다. 음악을 하는 입장에서 보면 공급과잉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전체적인 질도 좋아졌다. 이 덕에 유통회사는 협상우위가 생기니 좋지만, 그 때문에 정확하게 알려줄 창구의 기능이 상실된 것은 문제다. 유통사는 자신들과 친하거나 자신들이 소속으로 하고 있는 음악을 밀어줄 수밖에 없지 않은가. 공급은 많은데 이 때문에 제작자는 음악을 소개하기가 힘들고, 소비자는 공정하게 음악을 전달받지 못한다. 여기서 서로에 대한 불신이 생긴다. 다행히 최근 들어 독립 레이블 위주로 자체적인 유통, 홍보망을 구축해 나가고 있는데, 긍정적인 현상인 것 같다. 과잉공급의 시대에 좀더 활발한 활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다고 뮤지션으로서 음악의 완성도까지 버려가며 음악을 찍어내고 싶지는 않다는 고집도 있기 때문에, 그게 마냥 쉽지만도 않다.”

    -루핀 레코드 아티스트들의 특징이라면.

    “우리는 스스로 중도좌파의 레이블을 표방한다. 소속 뮤지션인 포스티노의 예를 들자면 그는 1집 음반을 낸 뮤지션이지만 동시에 100곡을 넘게 쓴 프로 주류 작곡가다. 이처럼 어쩌다 보니 기존에 활동을 많이 한 ‘내공이 있는’ 뮤지션들이 모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레이블의 전체적인 아우라가 좋아진다. 가끔 합의적인 일치를 이끌어낼 수 없는 부분들도 있다. 루핀은 전체적으로 일반 인디 레이블들과는 달리 회사 시스템을 철저하게 지키면서도 ‘남들도 다 하는 부분들’을 우리도 지켜내려는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

    -초기에는 일렉트로니카 전문 레이블의 색이 강했는데 요새는 장르를 별로 가리지 않는 편인 것 같다.

    블루 셔벗

    “시작할 당시에는 내 스스로 한국 일렉트로니카 1세대라는 자부심도 있었고, 주위의 뮤지션들도 대개가 일렉트로니카 장르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쪽으로 시작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그것밖에 몰랐고, 그게 좋았고 계속 그러려고 했다. 일렉트로니카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가 파티사업도 하게 되었고. 그러던 생각이 <소울메이트> OST를 기점으로 조금씩 바뀌게 되었다.”

    -장르가 다변화되면서 이전에 가지고 있던 색깔을 잃게 될 거라는 우려는 없나.

    “물론 그런 것이 있을 것이고, 지금도 그것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있다. 음악 스타일을 관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레이블의 발전과 소통에 정말 도움이 되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컸다. 루핀 레코드를 처음 시작할 때 굉장히 일렉트로니카 뮤지션으로서의 자존심이 강했다면, 지금은 우리가 레이블을 유지하고 이를 통해 좋은 음악과 아티스트를 계속 소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아티스트가 공연을 하고, 음반을 낼 수 있도록 지원해주고 환경을 조성해주면 그러는 와중에 레이블의 브랜드 가치가 창출되고 다 함께 시너지를 볼 수 있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레이블에서는 아티스트가 무조건 첫째라는 생각이 들었다.”

    -향후 루핀 레코드를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가고 싶은가.

    “일을 잘하는 인디 레이블들은 분명히 있다. 돈도 많이 벌고, 투자도 많이 하고, 아티스트들 대접도 잘해주고…. 하지만 대개의 인디 레이블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음악을 위해 다른 일을 함께한다. 나는 그런 건 싫다. 이왕 음악을 하기로 했다면 음악으로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최대한 다양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고 그것을 통해 정말 ‘음악과 관련된 일로 먹고 사는’ 레이블을 만들고 싶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이 일의 일환으로 애니메이션 포스트 프로덕션을 3년 전부터 꾸준히 해 왔고, 그것을 통해서도 수익을 냈다. 그리고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지만 투자사업도 다양한 방향으로 하면서 수익 다변화를 꾀하고 있다. 우리 또한 여전히 음반만 따지면 마이너스다. 다른 사업하고 다 더해야 수지를 맞출 수 있지만 그래도 하는 이유는 다른 인디 레이블 분들처럼 ‘음악이 좋아서’다. 레이블 사업을 지속하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면 ‘부끄러워서는 안 되니까’이다. 내가 아티스트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만든 레이블이니까,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한동안 음반이 안 나오는 경우가 있더라도 루핀 레코드가 없어지지 않도록 할 것이다. ‘명반’이라 할 만한 음반을 만들고 싶은 건 당연한 거고…. 하나 더 욕심이 있다면 이전과는 다른, 음악적으로 특화된 루핀만의 스타일도 만들고 싶다. 백조처럼 진짜 멋지게, 하지만 발밑은 땀나게 음악하면서 살고 싶다.”


    루핀 레코드 국내 아티스트·카탈로그

    현재 소속 아티스트: 제펫(Jeppet), 나코틱 블루(Narcotic Blue), 블루 셔벗(Blue Sorbet), 포스티노(Postino), 성운

    거쳐간 아티스트: 캐스커(Casker)



    출시 음반

    제펫(Jeppet)

    1집 ‘Romantic English Woman’ (2004) 루핀레코드의 창설과 함께 발매된 첫번째 음반. 트렌디한 라운지, 다운템포 트랙으로 감각적인 사운드를 들려준다.



    캐스커(Casker)

    2집 ‘Skylab’ (2005) 감성적이고 멜랑콜리한 서정성의 토대 아래 다운템포, 하우스, 드럼앤드베이스, 브로큰비트 등을 자유자재로 뒤섞으며 단순한 라운지·칠아웃 음악으로 규정할 수 없는 다채로운 사운드를 들려준다.

    3집 ‘Between’ (2006) 월드뮤직, 일렉트로니카, 다운템포, 하우스, 누재즈 등 다양한 장르의 벽을 넘나들며 그들만의 음악으로 재해석하는 캐스커가 전자탱고로 인간의 관계와 소통을 담은 음악



    성운

    1집 ‘몽향’ (2008) 가요적 대중성에 재즈의 구성을 가미한 음반으로 직접 사람의 손에 의해 연주되는 언플러그드 구성으로 만들어진 음반



    포스티노(Postino)

    1집 ‘A Letter From Postino’ (2007) 세련되고 감성적인 일렉트로닉 팝을 들려주는 포스티노는 이기찬, 윤종신 등 국내 최정상 인기가수의 트랙에 참여, 유수히 많은 히트곡을 선보인 작곡가 출신 싱어송라이터로, 타이틀곡 ‘동감’에서는 015B 정석원이 featuring에 참여하기도 했다.



    블루 셔벗(Blue Sorbet)

    1집 ‘Melodical Sounds of the Taste’ (2007) 스타일리시 퓨처뮤직을 표방하며 대중적이면서도 세련된 멜로디와 다양한 장르를 선보인 블루 셔벗의 데뷔 앨범



    V.A. ‘Chicaloca Compilation’ (2006)

    하우스, 힙합, 재즈, 브레이크비트 등을 넘나들며 여름에 어울리는 시원한 클럽뮤직을 들려주는 편집음반



    V.A. ‘015B Final Fantasy’ (2006)

    후배 뮤지션들이 재해석한 015B의 기존 히트곡들과 함께 015B의 신곡 2곡이 수록된 10년 만의 스페셜 음반



    OST ‘소울메이트’ (2006)

    드라마의 집필을 맡았던 조진국 작가의 선곡을 토대로 루핀 레코드 소속 아티스트들의 곡을 한데 엮어 만든 앨범. 6개월 이상 OST 판매순위 1위에 오르며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OST ‘소울메이트 Forever’ (2007)

    1집에서 먼저 만나 본 해외 아티스트의 곡들에 토와 테이의 곡과 루핀 레코드 소속 아티스트들의 신곡 등을 함께 담은 ‘소울메이트’ OST의 후속작


    <글 | 홍정택 가슴네트워크 필자·진행 | 박준흠 가슴네트워크 대표>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902041437475&code=900315

    ㆍ우린 중도좌파, 배고픈 음악은 가라다른 고집보다도, 늘 레이블의 지속가능한 운영을 고민한다.인디 레이블 하면 으레 떠오르는 ‘치열하거나, 가난하거나, 그래서 궁상맞은’ 이미지들은, 제펫(Jeppet)이라는...

  5. 아트마케팅 기업 쌈지의 ‘쌈지 아트프로젝트’

    게토밤즈

    1997년 11월 한국에서 일어난 ‘IMF 사태’를 아직까지도 대략의 발생 일자까지 기억하는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다. 첫 번째는, 32살이었던 당시 대중음악계로 전업하는 계기가 되었던 대중음악전문지 서브(SUB) 창간 작업을 하는 와중에 겪었던 최고의 악재였기 때문이다. 아마 저녁 먹다가 TV 기자회견을 통해서 정부 고위관리자의 발표를 접했던 것 같은데, 이 때문에 당분간 광고시장이 75% 줄어들 것이란 소문은 10월부터 본격적으로 창간작업을 하던 내게는 거의 패닉 상황을 안겨주었다. 결국 그해 12월24일에 창간호가 나왔지만, 짐작하다시피 당시의 잡지광고 시장은 최악이었다. 두 번째는, 그 ‘IMF 사태’ 이후 한국에 본격적으로 인터넷 인프라가 구축되면서 강남 테헤란로를 중심으로 일었던 ‘IT 벤처붐’ 때문인데, 그 시기의 끝물인 2000년 3월부터 인터넷음악방송국 ‘쌈넷’의 개국 작업을 했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IMF 사태’ 전후로 인생에 중요했던 두 가지 작업을 했던 셈이다.

    쌈넷은 90년대 당시만 해도 낯설었던 ‘아트마케팅’을 기업 차원에서 효과적으로 했던 패션잡화 회사인 ‘쌈지’가 만든 자회사이다. 쌈지는 ‘디자인과 예술, 상품과 예술의 인터미디어’를 표방하면서 회사 초기였던 92년경부터 예술가 지원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대표적으로 IMF 당시 가난한 예술가를 위하여 “예술이 브랜드에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캐치프레이즈로 만든 ‘쌈지 아트프로젝트’가 있다. 대중음악 쪽에서도 2008년 10회를 맞은 언더그라운드 록 페스티벌의 대표격인 ‘쌈지사운드 페스티벌’을 들 수가 있고, 여기 ‘숨은 고수’ ‘무림 고수’ 양대 프로그램은 인디뮤지션들을 대중적으로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이 페스티벌은 “감각 공유라는 점에서는 미술이나 전시회보다 록 페스티벌이 좀더 직접적이고 접촉적이고 효과적이다”라는 천호균 대표의 생각 때문에 시작되었는데, 이미 실질적으로 가장 오래된 록 페스티벌로 자리잡았다.

    포춘쿠키

    이후 쌈지는 IT와 관련한 사업 방향을 정했고 그것이 바로 ‘인터넷과 대중음악이 결합된’ 쌈넷이었다. 아마 98년부터 생겨난 여러 문화 관련 웹진, 인터넷방송국들을 예의주시하면서 내린 판단이었을 것이다. 쌈넷은 쌈지사운드 페스티벌의 주관사이면서 ‘쌈지 팝프로그램’을 맡는 회사가 되었다. ‘쌈지 팝프로그램’은 쌈지가 아트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언더그라운드 록밴드를 후원하는 프로젝트로 99년부터 가동했다. 매년 몇 개의 밴드와 음반을 공동 제작하고, 그들의 콘서트를 열어 음악성을 마케팅하는 동시에 쌈지 소비자들에게 음악을 서비스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처음 나온 음반이 황신혜밴드의 ‘Ver 2.5 특별시 소년소녀’였다. 하지만 이를 쌈지 홍보실에서 주관하는 것이 어느 정도 힘이 부치면서 전문성 있는 운영집단이 필요하게 되었고, 쌈넷이 이를 맡으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음반 레이블 형태로 발전했다. 이게 오늘날의 ‘55AM Music’의 모체인 인디레이블로서의 쌈넷이다.

    여기서 독자들이 하나 궁금해 할 수 있는 사항이 있다. 어떻게 쌈지의 대자본(?)이 투여된 쌈넷이 ‘인디레이블’일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인디음악’의 기준은 음악생산의 주체를 뮤지션이거나 뮤지션의 의견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제작자인 경우로 보기 때문에, 또한 쌈넷에서 그간 나온 음반들이 인디뮤지션 부류였기 때문에 쌈넷을 인디레이블로 보는 것이다.

    쌈지사운드 페스티벌의 주관사인 덕에 ‘숨은 고수’ 프로그램을 통해서 발굴된 신인들과 계약할 수 있는 이점이 있는 쌈넷은 음악사업 인프라가 인디레이블들 중에서는 가장 튼실한 편이다. 하지만 쌈지라는 회사가 모회사란 점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음악사업에서 운신의 폭이 넓지 않다는 단점도 있다. 당장 쌈지사운드 페스티벌만 해도 사업적인 방향으로 끌고 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디씬의 활성화를 위해서 쌈넷에 거는 기대가 있고, 그건 그간 아트마케팅으로 성과를 보았던 쌈지의 노하우가 접목되기를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천호균 쌈지 대표(사진)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쌈지는 “예술이 브랜드에 생명을 불어넣는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갖고 앞으로는 새롭게 ‘쌈지 농부프로젝트’를 진행하려 한다고 들었다. 아트프로그램도 함께 진행되나.

    “올해로 쌈지사운드페스티벌이 10년 되었다. 아트프로젝트의 전반적인 방향들이 그 때 그 때 바뀌어왔는데, 그럴 때마다의 특색은 그 당시에 좀더 소외된 쪽, 소외됐는데 내용은 있는 쪽으로 우리가 접근해갔다. 그 바뀌는 과정 중에 지금은 “농사가 예술이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변하는 시점에 ‘농사 테마’가 낀 것이다. 농사를 중심으로 농사를 예술 같이 생각하고, 농사를 사랑하는 예술가들, 쌈지가 농부를 사랑하는 그 마음을 고객들하고 얘기하자 해서 생긴 프로젝트가 ‘농부 프로젝트’이다. 이는 아트프로젝트의 전환 또는 업그레이드?”

    -그럼 농부프로젝트에서 향후 ‘쌈지 팝프로그램’(쌈지사운드 페스티벌, 쌈넷에서 하는 음반사업 등)이 기존 방향과 달라지는 게 있나.

    “음악 파트도 농부프로젝트 회의에 꼭 참석하라고 한다. 그래서 농촌에 농가나 민요나 이런 것도 있겠지만, 농촌은 그 나름대로 갖고 있는 민중성이 있잖은가. 그런 경향의 음악들에 대해 음악가들하고 얘기하면서 그런 부분을 보여줬으면 하는 희망이 있다. 미술 쪽도 그렇고. 우리가 폐교 사용 신청을 해놓고 있는데, 그 프로그램이 되면 거주를 하면서 의무적으로 한 달 정도는 농촌에 관련되는 일, 직접 농사를 짓는다든지, 그림을 그려준다든지, 그런 걸 작가들하고 협의를 할 계획이다. 좀더 적극적으로 아티스트들과 교류를 생각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이런 콘셉트로 진행된 경우는 없었다. 서울 근교의 추수가 끝난 논에 쌈지사운드 페스티벌 무대를 만든다든지 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다.

    “대형 페스티벌이 한국에서 많아지다 보니까 차별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올 해 쌈지사운드 페스티벌이 10주년이라 다르게 가자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아직은 한국에서 한 적이 없는 방식을 실험적으로 해보고 싶다. 지역 밀착형, 지방이나 지역 단체 등을 끼워서 다르게 해볼 생각도 있다. 단지 대중성이니 하는 큰 틀에서는 방향성을 좀 바꿔야 할 거 같다. 재래시장에서의 공연도 생각해 보고 있다. 장터, 뭐 각설이 같은 게 나올 수도 있고. (웃음)”

    -쌈지사운드 페스티벌이나 음반사업 쪽에 관심을 갖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있나.

    “음악으로 직원들하고 소통을 하고 싶었다. 처음에 쌈지사운드 페스티벌을 할 때, 초청 대상이 우리 회사 직원들, 협력 회사 직원들이 중심이었다. 그리고 가까운 소비자들하고. 그런데 그 당시에 황신혜밴드하고 대학로 학전에서 공연을 기획하게 됐다. 7회를 했는데 내가 7회를 다 가서 봤다. 항상 맨 뒷자리에서 보곤 했었는데, 볼 때마다 관객들이 반응하는 게 다르더라. 연극을 보는 것 같았다. 내가 적극적으로 음반을 만들자 해서 같이 음반도 만들고, 매장에서 판매를 시도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확장을 해서 그런 뮤지션들을 한 무대에 세우게 된 게 쌈지사운드 페스티벌이다. 소통을 하기 위한 도구로 음악을 사용했고, 그 방법으로 매일 듣는 걸로 소통하는 것보다는 뭔가 듣기 어려운 쪽을 같이 듣자고 생각했다. 그들이 주로 서는 무대 공연에서 자연스럽게 미술하고 같이 섞이는 계기도 됐다.”

    골든팝스


    -음반사업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

    “쌈넷이란 회사를 만들 때, 좀 전문적인 조직으로 음반비즈니스를 하면서 쌈지 마케팅에 도움이 되게 하자는 생각이었다. 쌈넷 음반사업의 기본적인 취지는 쌈지사운드 페스티벌에서 신인으로 나온 ‘숨은 고수’들 중심으로 음반을 만드는 게 원칙이다. 슈가도넛이나 이런 쪽에서 이상은, 언니네이발관 이런 쪽으로 자연스럽게 바뀌어 간 거다. 현재 음반시장 전체 상황이 너무 안 좋아지면서 어떻게 보면 지금 쌈넷은 쌈지사운드 페스티벌 기획회사로서의 존재 가치가 가장 큰 순위가 아닌가 싶다.”

    -음반사업 부문에서 어떤 뮤지션의 음반제작에 관심이 있나.

    -사실은 쌈넷이 다른 일반 레이블들처럼 처음부터 음반을 만들자, 그러기 위해서 레이블을 만들자, 해서 성립이 된 회사가 아니었다. 쌈지사운드 페스티벌이 있었고, 즐기기 위해서 재밌는 걸 하자해서 그렇게 하다가 어느새 쌈지사운드 페스티벌과 마찬가지로 커져버린 거다. 스스로 걸어가려던 것보다 더 커진 케이스다. 그래도 한 가지 고마운 것은 쌈지라는 이미지가 있어서, 좀 특이하다거나 생각이 있다거나 하는 뮤지션들이 찾아와 준다는 것이다. 그렇게 찾아와 주는 친구들을 픽업만 해도 특이한 쌈지만의 색깔을 가질 수 있었는데, 요즘은 그게 약간씩 변해가면서 그냥 레이블들 중의 하나로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도 고민을 하고 있다. 국악이라든가, 딴 데서 주목을 안 하거나 혹은 못 받거나 하는 쪽으로 관심을 돌려 다시 한번 원점으로 가서 원래의 ‘쌈지 색깔’을 찾아가보자는 목표를 갖고 있다.”

    -쌈넷에서 나온 음반에서 드러나길 바라는 쌈지 색깔이라는 게 어떤 건가.

    “뭔가 좀 ‘다르다’라는 얘기를 하는 것, 좀 촌스럽달까? ‘대중적이지는 않은데 대중적인 소재’를 찾는 것이다. 아직 ‘들어가지 않았지만 들어가야 할 것’들, 이걸 우리는 ‘소외’됐다고 하는데, 소외된 것들이 인정을 받고 그런 게 쌈지 문화의 신인이고 젊음의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볼 때는 뭔가 다르다는 말로 표현될 것 같다.”

    -여기서 ‘소외’됐다는 건 단순히 소외됐다는 게 아니라, ‘향후 5년이나 10년 이내에 빛을 볼 거라는 확신에서의 소외’이고, 그런 판단에서 사업을 진행하는 것은 아닌가.

    보이

    “뜨고 안 뜨고 보다는 그동안 검증된 것들만 보거나 고르거나 하는데, ‘쌈지의 눈’으로 검증시켜서 보여주는 그런 일정 부분의 역할이 예술문화와 관련된 쌈지의 입장이다. 그런 중에 농부가 나타난 거다. ‘농사가 예술이다’란 얘기는 예전부터 많이들 해왔던 얘긴데, 그걸 실천을 하는 것이다. 인사동도 그렇고, 헤이리도 그렇고, 매장으로 그걸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우선 우리 직원들만이라도 농사도 짓고, 농사지은 걸 먹고, 그런 분위기로 회사를 이끌어 가면 교육적인 효과도 있고, 환경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음악, 미술 등이 같이 엮여 갔으면 하는 게 쌈지아트프로젝트의 연장선상이라고 본다.”

    -쌈지 아트프로젝트에서 매년 10명씩 선정하는 미술가들을 보면 어느 정도는 미술계에서 중견 이상으로 올라간 것 같은데, 음악 쪽은 좀 다른 것 같다.

    “미술 쪽이 오래되다 보니 지원 폭이 좀 크다. 미술 쪽은 레지던스 프로그램이 있으니까 나름대로 경쟁력이 있는 것 같다. 레지던스를 신청할 때마다 대단하고, 작가들의 해외 활동도 훌륭하다. 그런데 개인적으론 그게 뭐 대단히 중요한가라는 생각도 든다. 결국 그 작가들이 큰 길을 걷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하면 관객들, 대중들하고 소통하는가’가 가장 큰 목적인데,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거다. 너무 전문적이 되다보니까.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음악은 쌈지 소속도 많지는 않지만 대중과 소통하는 데 미술보다 가까운 거 아닌가. 재밌는 건, 미술 전공하는 학생들도 쌈지에 기대를 많이 갖고 있고, 음악도 숨은 고수다 해서 신청이 많이 들어오는데, 실질적으로 쌈지의 본격적인 문화를 대변하는 쌈지의 상품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쌈지는 그냥 문화인 거다. 문화가 담긴 물건이 아니라, ‘문화’와 ‘물건’을 철저히 구분하는 것 같다. 그걸 우리가 경계를 하고, 너무 전문적으로 가는 걸 섞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상품과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생활 속의 예술, 예술 속의 생활’이 모토인데 그걸 실천을 못하고 있다 (웃음). 쌈지 농부 할 때는 실천을 좀 하자고 굳게 다짐하고 있다.”

    쌈넷(55AM, 쌈지) 발매 음반

    황신혜 밴드

    [Ver 2.5 특별시 소년소녀] (1999)



    어어부 프로젝트 밴드

    [New Hair] (2000)

    [21C New Hair] (2000)



    닥터코아(Dr. Core) 911

    [비정산조] (2000)



    허벅지

    [장미 허벅지] (2001)



    황보령

    [태양륜] (2001)



    허클베리 핀(Huckleberry Finn)

    [나를 닮은 사내] (2001)



    슈거도넛(Sugardonut)

    [Spinner Jump] (2002)

    [Speed King] (2003)

    [Phantom Pain] (2006)



    코코어(Cocore)

    [Super Stars] (2003)

    [Fire, Dance With Me] (2006)

    게토밤즈 & 스키조 (Ghettobombs & Schizo)

    [Star] (2003)



    네스티요나(Nastyona)

    [Bye Bye My Sweet Honey] (2004)



    포춘쿠키(Fortune Cookie)

    [행운의 시작] (2004)

    [Hills Like White Elephants] (2007)



    언니네 이발관

    [순간을 믿어요] (2004)

    [가장 보통의 존재] (2008)



    게토밤즈(Ghetto Bombs)

    [Rotten City] (2005)



    골든팝스(Golden Pops)

    [The Great Fictions] (2007)



    보이(Voy)

    [쉬어가기] (2007)



    백현진

    [Time Of Reflection] (2008)



    V.A.

    [쌈지 사운드 페스티벌 1999] (1999)

    [도시락 특공대 2. Behind Story] (2000)

    [2001 쌈지 사운드 페스티벌] (2001)


    <글·진행 | 박준흠(가슴네트워크 대표)>
    아트마케팅 기업 쌈지의 ‘쌈지 아트프로젝트’ 게토밤즈1997년 11월 한국에서 일어난 ‘IMF 사태’를 아직까지도 대략의 발생 일자까지 기억하는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다. 첫 번째는, 32살이었던 당시 대...

  6. ㆍ록·메탈 마니아들의 ‘오아시스’

    드림온

    수입 음반 전문점에서부터 시작된 꿈이 지속되다

    형제는 용감했다. 록음악계, 인디 레이블에서 선한 미소를 바탕으로 열정적으로 사업을 추진해온 박형주와 박병주 형제가 그들이다. 명동에서 록, 헤비메탈 수입 앨범을 전문으로 판매하던 레코드점 사업을 시작으로 결국 그런 종류의 음악을 직접 라이선스화해 발매하는 레이블을 이어오고 있다.

    껌엑스

    국내에 진출한 직배 음반사들과 대형 레코드사들의 레퍼토리 중에서 갈수록 헤비메탈, 익스트림 메탈 종류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고집스러운 메탈 마니아들에게 ‘드림온’이라는 이름은 그야말로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다. 처음엔 귀한 수입 음반을 구할 수 있던 레코드점을 운영하던 박씨 형제는 내친김에 정식으로 레이블을 차려 명동 사무실 시대를 열며 헤비메탈 전문 레이블로서의 입지를 굳혀가게 된다. 이제는 모두 국내 페스티벌 참여나 내한공연을 통해 그 실체까지 볼 수 있었던 다크 트랜퀼리티, 인 플레임스, 에덴브릿지 등의 질 좋은 라이선스 앨범에서부터 어느새 국내의 고참 헤비메탈 밴드 블랙 신드롬의 앨범이 드림온 레이블을 달고 시장에 나왔다. 이어 펑크 밴드 껌엑스의 앨범은 아예 일본에도 정식으로 소개되어 우리나라 시장에서보다도 훨씬 좋은 판매와 반응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게다가 출중한 록 기타리스트 강인오는 미국의 모 기타 전문 사이트에서도 그 유명한 기타리스트 조 새트리아니 등과 같은 차트에서 경쟁을 하는 등 국내 뮤지션과 밴드들도 드림온 레이블을 통해 소개되고 좋은 성과를 얻어내기에 이른다. 에어로스미스를 좋아했기 때문에 다른 것 생각할 것 없이 그들의 대표곡인 ‘Dream On’에서 이름을 따서 레이블을 차리게 된 박형주, 박병주 형제는 이제는 각기 레이블과 공연기획사 대표로서 협력 관계를 갖으며 사업을 분리하긴 했지만 우리의 록음악계에서 이들 형제의 존재와 열정은 각별한 편이었다.

    이제 드림온 레이블은 Park, Dream On, Boss Moon의 이름을 달아 각기 전문적인 장르와 영역의 음악을 발매하고 마케팅 하는 1인 체제의 인디 레이블이 되어 있다. 굳이 강요하거나 주문하지 않고 뮤지션과의 인간관계를 중시한다는 방침에서도 느낄 수 있듯 드림온은 이름 그대로 록 팬들과 뮤지션들의 꿈을 지속시키고 이루게 하며 그야말로 꿈을 키워주는 역할을 해오고 있다. 주택가 골목 안에 대문 밖으로는 아름드리 나무가 뻗어나와 있는, 드림온 박형주 대표의 멋진 양옥집을 찾았을 때에는 마침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어떻게 레이블을 시작하게 됐나?

    잇츠 할리데이

    “명동에서 수입 앨범을 취급하는 레코드점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가 딱 IMF 때였는데 1년쯤 하다 보니 재미도 없어졌다. 다시 뭘 할까 생각하는 중에 친구가 라이선스 음반처럼 앨범을 받아서 우리나라에 배급할 수 있는 능력이 될 것 같다고 해서 시작하게 됐는데 실제로는 1999년 1월쯤이었던 것 같다. 수입 앨범 판매 말고 레이블로 옮겨 가는 시점이었다.”

    -‘드림온’ 하면 형제가 운영하는 레이블로 기억된다. 초기의 구성원 소개와 어떤 변화를 겪으며 지금에 이르게 됐나.

    “초기에는 나와 친동생 그리고 A&R 담당하는 직원이 한 명 더 있었다. 그땐 다 알음알음 꾸려가던 시기여서 역시 잘 아는 친구한테 디자인을 맡겨서 했다. 그러다 식구가 한 두명 더 늘었다가 명동에서 서초동으로 이사해서도 그런 체제가 유지됐다. 2003~04년 쯤에 서초동으로 옮겼다가 2007년 5월에 다시 지금의 홍대 부근으로 옮겨왔다. 홍대에는 라이브클럽도 많으니까 제대로 일도 하며 공연도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못 보고 있다. 현재 레이블은 거의 내가 혼자 하는 1인 레이블 상태가 됐고, 동생은 완전히 공연기획 쪽으로 나서게 됐다. 이름도 다른 회사가 됐는데 M&P라는 기획사이다. 공식 첫 기획공연의 시작이 마이클 쉥커 밴드의 공연인데, 워낙 요즘이 불황기라 앞으로의 계획은 아직 모르겠다. 1인 레이블은 일단 편한 건 있는데 나 혼자 다 해야 되니 힘들긴 하다. 2007년 2월부터 그렇게 1인 체제가 됐다.”

    -레이블 이름이 기억하기도 쉽고 뭔가 희망도 품게 되는 친밀한 느낌이다.

    “이름을 지을 때 다른 생각은 별로 안 했다. 우리 형제가 워낙 에어로스미스를 좋아하다보니 대표곡인 ‘Dream On’이 바로 생각도 나고 해서 그렇게 짓게 됐다.”

    -록, 헤비메탈 전문 레이블 이미지가 강하다.

    “그 당시는 이상하리만큼 익스트림 메탈이 강세였다. 수입을 해도 그런 쪽이 구매력이 높았다. 처음 낸 앨범이 다크 트랜퀼리티나 인 플레임스가 된 것도 그런 바탕인데, 우리 형제 자체가 그런 장르 쪽을 특별히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때는 그런 게 잘 나가서 그랬다. 게다가 당시엔 유럽 레이블 쪽과 계약 일을 진행하는 게 쉽고 흔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데에도 좀 재미를 붙이기도 했다.”

    -전문가들도 드림온 레이블 내에 전문화로 레이블 이름이 분화되었다는 것은 잘 인지하지 못하는 편인데, 언제부터 어떤 형식으로 레이블이 나뉘어져 있는지 소개해 달라.

    내 귀에 도청장치

    “앨범 발매를 계속 하다보니까 어느 시점부터 차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음악 장르에 따라 구별을 해야겠다 싶어서 레이블 시작 후 1년여 정도 지난 2001년에 프리티 메이즈 앨범이 출시되면서 ‘Park’ 레이블이 만들어졌다. ‘Park’은 헤비메탈, 익스트림 메탈 전문이고 ‘Dream On’은 ‘Park’보다는 소프트한 정통 록, 모던 록 그리고 국내 뮤지션들을 위한 레퍼토리들을 갖기 위해서 성격을 분리했다. 하지만 우리의 메인 레이블은 ‘드림온’이다. 그리고 근래에 만들어진 ‘보스 문(Boss Moon)’도 있는데 이제 레이블 사업 10주년을 맞아 보다 다양한 것을 하고 싶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동안 고정관념이나 이미지 때문에 좋은 음악이나 앨범임에도 못 내는 등 손해를 좀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입장에서 ‘보스 문’을 만들어서 그쪽에서는 라운지, 인디 팝, 기타 팝 등 다양한 음악들을 만들어보려고 시작했다. 레이블 이름을 지으려고 별 생각을 다 하다가 내가 좋아하는 스페인 축구팀을 떠올리고는 ‘라울 곤잘레스’ 생각도 했었지만 결국 아는 선배이자 ‘(주)상상이상’이라는 디자인 회사 대표의 닉네임에서 착안해 로고나 이미지 등을 만들게 됐다.”

    -레이블 운영 10년을 겪고 지내오면서 요즘 가장 어려운 일이 뭔가.

    “2007년부터 혼자 하는 체제가 되면서 힘이 든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겠지만 일단 음반 판매량 감소가 타격이 크다. 게다가 우리는 주로 헤비메탈 위주로 발매하다보니 크게 주목받지도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디지털 시장에 대한 반감이랄까. 그런 것도 있었다. 지금은 완전히 시장 자체를 인지했는데 어떤 레이블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앨범을 냈을 때 판매량이 너무 줄었다. 2002년 월드컵 이후부터 완전한 하향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간 국내 공연시장과 각종 록 페스티벌에 관련 밴드들을 많이 참여시킨 편이다. 유명한 여러 해외 밴드들도 우리와의 일 관계 때문에 조건도 많이 양보하고 와 주었는데, 그동안 여러 록 페스티벌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요즘엔 많이 배제되어 있어 우리 레이블이나 밴드들도 이제는 등한시 되는 것 같다. 록, 헤비메탈 마니아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무대 자체도 많이 없어졌다는 게 안타깝기도 하다.”

    -장기 계획이나 목표는.

    “디지털 시장에 신경을 더 많이 쓰게 될 것 같다. 그리고 음반을 발매하지 못 하는 좋은 아티스트들을 발굴하기 위해서는 어차피 자본이 있어야 그런 쪽에 투자를 할 수 있는 것이다. 한쪽 파트에서는 보통 일반적인 사람들이 다 좋아할 수 있는 대중성 있는 음악을 많이 소개하면서 그것에 따르는 이익을 주목받지 못하는 음악 쪽에 투자하려고 한다. 요즘 제일 아쉬운 점이라면, 아무리 인터넷 시대가 됐다고는 하지만 록 전문지나 음악전문지 같은 활자 매체가 거의 사라졌다는 것이다. 인터넷은 단순한 노출 숫자나 나름의 장점도 있지만 구체적인 집중력과 충성도는 떨어진다는 생각이다.”


    퀸 엔터테인먼트

    원래 뮤지션이 되고 싶었던 꿈이 있었던 퀸 엔터테인먼트의 이문식 대표는 그야말로 다채로운 경력을 지닌 채 음악계에서 활동해온 인물이다. 우리나라에서 안정되게 전업 음악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름의 부업 정도는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간파하여 20살 어린 나이 때부터 클럽을 운영했다. 당시에 록 밴드로는 가장 대중적이고 유명하다고 생각했던 영국의 전설적인 밴드 퀸의 이름을 따서 이화여대 부근에서 현재까지 ‘퀸 엔터테인먼트’의 근거지가 된 ‘7시의 퀸’이라는 이름의 아주 작은 클럽을 시작했고, 이게 음악계에 발을 디디게 된 계기가 되었다.

    강인오

    그러다 대학교 학업과 군복무를 마치고 정식으로 집안 소유의 건물에서 비교적 수월하게 ‘퀸’이라 줄인 간판을 달아 바이자 클럽을 다시 열게 된 것은 1996년 그가 28살이 되던 해라고 한다. 그는 김경호 밴드의 백코러스를 했다는 특별한 경력도 있지만 트렌드 간파와 사업 수완이 출중해서 우리의 록 음악계와 라이브클럽가에서는 ‘비주얼 록’의 전문가 내지는 대부로도 불린다. 이제는 이대 후문에 자리하던 라이브클럽 ‘빵’도 홍대 쪽으로 자리를 옮긴 상황이라 신촌권에서 유일하게 유명 라이브클럽을 운영하는 업주가 되었다. 그간 그는 과감한 투자와 특유의 사업 기질을 바탕으로 사업을 다각적으로 확대해 왔다. 그의 사업 중 중심이었던 퀸 라이브클럽을 비롯하여 녹음스튜디오, 연습실 사업 등에도 손을 대왔고 국내 인디 레이블 중에서는 가장 확실하게 메이저 필드 방식의 대규모 매니지먼트 체계와 많은 자금을 투자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해서 독특한 비주얼적 요소와 외모, 스테이지 매너 등이 뛰어났던 내 귀에 도청장치, 라비디떼, 가이즈 등의 밴드는 마치 아이돌 그룹처럼 소녀 팬들이 따라 다니는 수준으로까지 만들어냈다. 현재 저비용 고효율의 방법으로 다양한 싱글들을 많이 제작하는 방향으로 레이블과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많은 밴드들을 소속시키고 관리하며 골드러쉬, 크로우, 이모티콘, 에어백 등 퀸 엔터테인먼트 스타일에 맞는 방식으로 밴드들의 싱글들을 위주로 제작하고 있다.

    아티스트 및 앨범 - 드림온

    블랙 신드롬(Black Syndrome)

    [9th Gate] (2001) 대한민국의 하드 록, 헤비메탈 씬을 지켜온 고참 밴드 중 하나인 블랙 신드롬의 중요한 재기작.



    껌엑스(Gum X) 1996년에 껌(Gum)이란 이름으로 시작된 3인조 멜로-코어 펑크 밴드.

    [What’s Been Up?] (2003)

    [Green Freakzilla?] (2004)



    13 스텝스(13 Steps)

    [This Is The Reality That We Confront] (2005)

    [The Curse Upon Liar] (2006)



    강인오

    전문 연주 앨범에 대한 인식이 모자란 국내에서 보다 해외에서 먼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기타리스트.

    [My World] (2005)

    [The Road] (2008)



    다운헬(Downhell) 국내 인디 레이블 중 하나인 도프뮤직을 처음으로 설립했던 마크가 결성한 강력한 헤비메탈 사운드를 추구하는 밴드.

    [At The End Of Death] (2006)



    다크 앰비션(Dark Ambition)

    [Tears Of Daewongoon] (2007)



    잇츠 할리데이(It’s Holiday)

    [U N Holiday] (2008)


    V.A. [Extreme 2006]



    - 퀸 엔터테인먼트

    가이즈(Guyz)

    [Get Away] (2003)

    [Crazy] (2005)

    [Sunny] (2006)

    [Diary] (2006)

    [You Mean Everything To Me] (2007)

    [Like A Movie] (2008)



    프리 마켓(Free Market)

    [난장] (2003)



    내 귀에 도청장치

    [Prana] (2004)



    라비디떼(L‘Avidite)

    [Contact] (2004)



    이현도

    [The New Classik ...And You Don’t Stop] (2004)



    골드러쉬(Goldrush)

    [Star★ing] (2007)

    [How Do You Feel] (2007)

    [I Don‘t Know You] (2008)



    크로우(Crow)

    [In Place] (2007)



    이모티콘(Emoticon)

    [Hit And Run] (2007)


    <글 | 성우진(음악평론가)·진행 | 박준흠(가슴네트워크 대표)>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901141500225&code=900315

    ㆍ록·메탈 마니아들의 ‘오아시스’드림온수입 음반 전문점에서부터 시작된 꿈이 지속되다형제는 용감했다. 록음악계, 인디 레이블에서 선한 미소를 바탕으로 열정적으로 사업을 추진해온 박형주와 박병주 형제...

  7. ㆍ우린 ‘펑크 열정’ 초심으로 돌아간다

    외부에 기대지 않고 자체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시스템을 구축


    스컹크뮤지션 숄티캣


    스컹크 레이블은 1998년에 라이브클럽 ‘하드코어’에서 활동하던 럭스가 중심이 되어서 설립된 ‘펑크 전문 레이블’이다. 이전에도 한국 펑크 1세대인 크라잉넛, 노브레인 등이 중심이 되어서 활동하던 ‘드럭’이 있었지만, 스컹크는 펑크 뮤지션들이 설립과 경영의 주체란 점에서 남다르다. 레이블 설립의 실질적인 주체였던 럭스의 리더 원종희는 당시 고등학교 3학년생이었고, 미성년자였던 관계로 어머니의 이름으로 레이블 사업자등록증을 냈다. 그러면서 바로 레이블 설립 작품을 만들었는데, 그게 럭스의 첫번째 참여 음반이기도 한 ‘우리는 한마음(‘98 펑크대잔치)’이었다. 이 음반은 당시 신촌에 위치해 있던 ‘Rux Studio’에서 가정용 녹음기로 녹음된 음반이었고 럭스 외에도 결.애.사, 레이지본, 송지욱, K.A.B. 등의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 가정용 녹음기로 녹음된 음반답게 가히 로우파이 사운드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이들이 뮤지션 신분이면서도 당시로는 드물게 스스로 레이블을 만들어서 운영하게 된 이유는 다소 황당하다. 94년에 라이브클럽 드럭이 열린 이후 한국에 본격적으로 인디 신이 탄생되었다. 그때 드럭, 재머스, 스팽글 등 라이브클럽이 생기면서 ‘뭔가’ 만들어지고 있던 시기에 뮤지션들 대부분은 “음반은 어떻게 내지? 공연은 어디서 해야 하지? 합주는 어디서 하지?” 하면서 서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시대적 상황에서 스컹크 레이블을 만든 주체들은 그냥 다른 쪽은 안 보고 내부만 보면서 커왔다고 한다.

    그 결과 레이블도 직접 만들었는데, 거기에는 거창한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니라 음반을 내주는 인디 레이블이 있다는 사실을 잘 몰랐다는 약간은 김 빠지는 이유라고 한다. 당시 이들은 “테이프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걸 어떻게 만들지”와 같은 지금 생각하면 순진할 정도의 고민을 했다고 한다.

    스컹크 대표 원종희 | 사진제공 최규성


    결국 외부에 기대지 않고 자체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시스템 구축의 어려운 방법론을 택했다. 그러다 보니 합주실, 공연장, 음악 상품을 판매할 수 있는 온라인숍이나 스컹크 레이블 홈페이지, 그리고 그에 따르는 구조적으로 음반을 발매하기 위한 사업자등록증에서부터 바코드 생성, 유통까지도 직접 했다. 그리고 지금은 이런 ‘시스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각자 다른 레이블로 들어가 음악을 하고 스컹크 레이블에서 놀던 시절은 그대로 남겨두자고 결정했다고 한다.

    현재 스컹크 레이블에는 럭스를 포함한 2팀만 남았고, 스컹크 레이블에서 운영하던 라이브클럽 ‘스컹크 헬’은 얼마 전 문을 닫았다. 스컹크 헬의 고별공연이 지난해 12월과 지난 3일에 있었다. 한국 펑크 신에서의 중요한 움직임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다. 스컹크 헬이 사라지기 전인 2008년 11월14일에 우리 시대의 중요한 음악창작자이기도 한 원종희 대표를 만나 ‘한국에서 펑크를 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스컹크 레이블에 변화가 있다고 들었다.

    “지난해 4월쯤에 밴드가 대부분 나가면서 현재는 소속 밴드가 ‘럭스’하고 ‘백화난만조’ 2팀만 남았다. 그리고 이달에 라이브클럽 ‘스컹크 헬’이 없어지고 이 자리에 촬영 스튜디오가 생길 것 같다. 레이블도 간단히 얘기해서 90년대 후반의 모습으로, 다시 껍데기를 다 벗어버리고 원점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상태다.”

    -90년대 후반의 모습으로 간다는 것은 소속 개념을 없애겠다는 것인가.

    “그렇다. 스컹크 레이블이 뮤지션들과 정식으로 계약을 하고 뭔가를 할 때는 음반을 발매할 때나 뭔가 한 가지를 정할 때였다. 하지만 ‘소속’ 개념으로는 특별한 계약을 하지 않았다. 달랑 A4 용지 한 장에다가 ‘이 밴드는 스컹크 프로뎍션에 소속된다. 하지만 나가고 싶을 땐 언제든지 나간다’ 그런 식이었다. 그런데 그건 좀 좋지 않은 것 같다 싶어서 소속 밴드들을 다 없앴다.”

    -소속 밴드가 있게 되면 밴드들과 일을 할 때 소속되지 않은 밴드들에 차별을 받는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는 문제 때문인가.

    “그렇다. 보통 인디 레이블들은 많으면 3~4명이 일한다. 그러니까 일하는 인원이 3~4명이면 또 월급을 줄 수 있을 만큼의 일을 뭔가 크게 벌여야 한다. 그런데 일이 없는 상황에서 소속 밴드가 5팀, 10팀이 되버리면 사실상 한두 명의 인원이 10팀의 밴드를 관리하면서 잘해준다는 게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나.

    “펑크 레이블을 키워나가다 보니까 펑크도 키우면 키울수록 이게 어떻든 하나의 ‘회사’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펑크랑 회사랑은 안맞는 것 같다. 즉 펑크적인 사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회사를 만드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됐다.”

    -‘기획’ 쪽의 일을 하다 보니까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여러 문제점이 발생해 생각이 달라지게 됐다는 건가.

    “우리가 예전에 ‘3000 Punk’ 음반을 만들었을 때, ‘왜 음반이 1만원이지? 3000원에도 팔 수 있잖아’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우리끼리는 나름대로 파격적이라고 생각하면서 만들어서 팔았다. 하지만 나중에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처음에는 유통마진이나 이런 것들이 없어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없으면 음반이 많이 안 팔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획이나 음반회사 시스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지난해까지는 ‘우리끼리 해보자’라면서 만들었지만 ‘아, 이거는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는 게 차라리 낫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최근이다. 어떻게 보면 바보 같이 뒤늦게 알게 된 거다. 체험하면서.”

    -스컹크 헬의 고별공연에 관해 얘기해 달라.

    “지난해 12월24일은 새로운 밴드들을 포함한 14팀 정도가 밤샘공연하고, 지난 3일엔 이 자리를 빛냈던 많은 밴드가 참여해서 공연했다. 스컹크 헬 이전에는 원래 드럭이라는 곳이 있었으니까 이 자리에 가장 애착이 있을 만한 밴드들이 선다. 사실 그걸 골라낸다는 것도 어렵지만 크라잉넛 형들도 ‘종희 너를 떠나서 너보다 우리가 그 자리에 더 애착을 느낀다’는 얘길 또 하니까.”

    -예전 드럭 팀들까지 다 나오고 스컹크 헬까지 왔던 큰 흐름이 마감이 되는 의미인가.

    “그렇게 되는 거 같다. 나도 무척 아쉽다.”

    -레이블은 어떻게 시작됐나.

    스컹크뮤지션 스파이키브랫츠

    “문화라는 게 발전을 해가는 과정에서 하나의 새로운 콘텐츠에 대한 카테고리가 생길 때는, 아티스트들이 직접 홍보랑 매니지먼트 포함해서 발로 뛰는 모양새를 피할 수가 없는 것 같다. 90년대 중반 한국에 펑크랑 같이 인디(문화)가 왔으니까. 그때 당시에 홍대에 드럭이 생기고 스팽글이 생기고 뭔가 만들어지고 있던 그 시기에, 사실상 누구나 다 ‘음반은 어떻게 내지? 공연은 어디서 해야 되지? 합주는 어디서 하지?’ 그런 의문을 갖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던 시기였다. 그 시대적 상황에 비해서 스컹크 레이블은 그냥 다른 쪽은 안 보고 내부만 보면서 커왔던 거 같다. 그때 분명히 인디 레이블이란 곳이 있었고, 거기서 여러 음반을 발매해줬는데 우린 그걸 모르고 있었으니까(웃음). 외부를 찾아다니기보다 우리가 만드는 것에 더 집중을 했던 거 같다. 그러다 보니까 사실상 생겨야 할 건 스컹크 레이블 안에서 한 번씩은 다 생겼다. 합주실, 공연장, 음악상품을 판매할 수 있는 온라인숍이나 스컹크 레이블 홈페이지, 그리고 그에 따르는 구조적으로 음반을 발매하기 위한 사업자등록증에서부터 바코드 생성까지. 유통도 직접했고.”

    -레이블 설립 이후의 진행은 어땠나.

    “음반사가 되기 위한 기본은 다 한 번씩은 찔러봤다. 매출과 생산원가를 맞춰야 하는 과제에 당면했을 때 한두 명이 일을 다해야 되더라. 그런데 그에 비해서 일은 점점 많아지고 커지고, 펑크 부흥기라 스컹크 레이블에 들어오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다 받아주고 싶은데 어떤 걸 기준으로 받아야 되는지도 모르겠고. 나는 럭스를 하고 있으니까 럭스랑 비슷한 생각을 하는 친구들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해서 그 친구들의 음반을 발매해줬다. 그런데 한두 명이 홍보, 프로모션을 잘하면서 밴드들 공연까지 챙기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에 음반을 발매해도 많이 판매하지 못했다. 외부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확 죽더라. 자체 시스템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우리 펑크들이 독불장군식으로 ‘너희들 없이도 잘할 수 있어’라고 호언장담하면서 2005년까지 넘어왔는데 실질적으로 그렇게 되진 않았다. 아무도 듣지 않는 그 음악을 만들기에는 열정이 계속해서 사그러들었던 게 펑크밴드들의 실정이었던 거 같다. 특히 2005년 무렵부터는 ‘펑크의 시대’가 아니었고 인디에서도 트렌드가 바뀌었다. 결국에 지금 이 시점에서 스컹크 레이블은 우리가 충분히 이 ‘시스템’을 봤고, 충분히 이 ‘시스템’을 이해를 했다는 결론이 내려지면서 그럼 우리도 더 이상 ‘시스템’을 두려워하지 말자라는 생각을 했다. 시스템에 우리가 몸을 담고 속해도 되겠다 생각하면서 스컹크의 이상적인 방식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계기가 됐던 거 같다. 그게 2007년쯤이다.”

    -“시스템을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는 게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가.

    스컹크뮤지션 칵크래셔

    “나도 럭스라는 밴드가 어느 레이블에 소속되는 게 참 싫기도 했고 두려움도 같이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과연 그들이 우리의 목소리를 제대로 받아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가 밴드도 이만큼 했고, 어떻게 굴러가는지도 다 알게 됐다. 그러니까 녹음비가 얼마 정도 되고, 음반이 팔리면 유통마진이 얼마고, 밴드한테 돌아가는 게 얼마 정도인지를 구체적으로 다 알고 있는 상황에서는 남들한테 맡겨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다.”

    -스컹크 레이블 내의 다른 밴드들도 비슷한 입장인가.

    “그렇다. 그런 것에 대해서는 스컹크의 입장을 제대로 설명해줬다. 우리가 좋다고 우리끼리 있지만 이건 우리끼리 해서는 일이 안 된다. 일은 다른 사람들이랑 하자. 너희 음악도 충분히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좋은 음악이니까 다른 데 가서 싸워라. 그러니까 다른 레이블에 소속돼서 거기 레이블 사장과 싸우면서 니들 음악을 해라. 우리끼리는 놀자. 스컹크 레이블은 남겨두자. 스컹크 레이블 만들어놓고 놀던 그 시절은 그대로 남기자고 판단한 거다.”

    -스컹크 레이블만큼 간섭을 안하는 레이블을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렇기는 하다. 하지만 그만큼 또 일을 하게 되니까, 멀리 봤을 때 그건 분명히 밴드한테 득이 될 수도 있다. 그냥 스컹크는 성장하지 말자는 것이다. 지금 소속 밴드가 두 팀이 있으니까 세 팀이 늘어도, 네 팀으로 늘어도 앞으로는 비즈니스를 하지 말자는 취지로.”


    스컹크 레이블 발매 음반

    껌(Gum)- Bogus Punk Circle! (1999)



    럭스(RUX)

    I Gotta Go (2000)

    우린 어디로 가는가 (2004)

    Another Conception (2004)

    2005 Live (2005)

    The Ruckus Army (2007)



    프로펠러 21(Propeller 21)

    We Are Moving On Forward (2004)



    버닝 헵번(Burning Hepburn)

    Burning Hepburn (2003)



    더티 스몰 타운(Dirty Small Town)

    All Together Now (2005)



    99 앵거(99 Anger)

    Who Comes First? (2002)

    The Anger And The Sadness (2004)



    카우치(Couch)

    Pogo Till We Fuckin Die!!! (2003)



    페이션츠(Patients)

    Hanging Revolution (2006)

    All The Patients Let‘s Go (2007)

    스파이키 브랫스(Spiky Brats)

    Proud And Strong (2004)



    석 스터프(Suck Stuff)

    City Rebels (2006)



    명령 27호

    Songs From The Six Gun (2007)



    칵 크래셔(Cockrasher)

    Kids Return Now (2007)



    V.A. [우리는 한마음(‘98 펑크대잔치)] (1998)

    럭스의 첫번째 참여음반이자 스컹크 레이블의 첫번째 음반인 이 음반은 당시 신촌에 위치해 있던 ‘Rux Studio’에서 가정용 녹음기로 녹음된 음반이다.



    V.A. [3000 Punk] (1999)

    스컹크 레이블의 두번째 컴필레이션인 이 음반은 ‘Skunk Studio’에서 삼청의 이보람의 DAT 녹음기로 녹음된 음반이다.



    V.A. [We Are The Punx In Kore] (2003)

    기존에 펑크대잔치에 참여했던 밴드들과 20여개의 새 밴드가 참여했으며 배다른형제 스튜디오 이동훈의 도움에 의해 완성되었다.



    V.A. [2006 Skunk Compilation - Strike! Strike! Strike!] (2006)

    더 이상 한 개의 음반으로 묶일 수 없을 정도로 커진 한국의 펑크 신에서 더욱 많은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스스로 내지르라”는 강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글·진행 | 박준흠(가슴네트워크 대표)>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901071509115&code=900315

    ㆍ우린 ‘펑크 열정’ 초심으로 돌아간다외부에 기대지 않고 자체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시스템을 구축 스컹크뮤지션 숄티캣스컹크 레이블은 1998년에 라이브클럽 ‘하드코어’에서 활동하던 럭스가 중...

  8. ㆍ빅딜로 만든 ‘한국힙합의 빅뱅’

    빅딜
    록스타 레이블과 초콜릿 뮤직 팩토리라는 크루와의 ‘빅딜’ 과정으로 탄생

    데드피

    빅딜 레코드는 한국 힙합 신을 이끌어가는 몇 안 되는 레이블 중 하나이자 가장 뚜렷한 음악 색깔을 지닌 집단이다. 그리고 사전적 의미처럼 빅딜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레이블의 시작은 아마추어 뮤지션들이 자작곡을 올리며 활발하게 교류하던 사이트 ‘밀림’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결성된 크루 인펙티드 비츠가 중심이 된 레이블 록스타와 초콜릿 뮤직 팩토리라는 크루가 긴밀히 교류해오다가 래퍼 데드피의 솔로 앨범을 계기로 두 집단이 합병하게 된 것이다(공식적인 레이블의 첫 결과물은 모리얼의 EP ‘The Greatest’이지만, 실제 빅딜 레코드를 출범시킨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데드피의 음반이었다). 그리고 이 앨범의 파급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데드피의 묵직하고 강력한 래핑과 메인 프로듀싱을 맡았던 랍티미스트의 로한 비트의 조화는 1990년대 이스트코스트 힙합 스타일을 충실하게 재현해내며 많은 힙합 마니아를 열광케 했고, 빅딜 레코드는 일약 힙합 팬들의 주목받는 레이블로 떠올랐다(랍티미스트는 원래 합쳐진 크루의 일원이었을 뿐, 빅딜 레코드와 계약을 맺지는 않은 상태였다). 그야말로 빅딜이 한국 힙합 신에 성공적으로 첫 발을 내디디는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빅딜 레코드는 아직 내부적으로 체계가 확실하게 잡힌 상태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음악을 창작하는 것에 뜻을 둔 뮤지션들만 모이다 보니 비즈니스적인 부분을 담당하거나 음반 제작을 진행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한 탓이다. 이 때문에 데드피의 앨범을 계기로 탄력을 이어갔어야 할 레이블의 다음 작품은 계속 미뤄지기만 했다. 시간이 흐르자 몇몇 사람들은 각자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레이블의 정비를 위해 나선 이가 바로 지금의 정환석 대표다. 당시 쇽 이(Shock-E)라는 이름으로 래퍼 활동을 하기도 했던 그가 자진해 대표직을 맡음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레이블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었다.

    2005년 래퍼 어드스피치가 데뷔앨범 ‘Elements Combined’가 좋은 반응을 얻었고 뒤이어 오늘날까지 빅딜 레코드 음악의 핵심을 쥐고 있는 프로듀서 마일드 비츠도 ‘Loaded’를 발표하며, 레이블의 인지도를 확실하게 올려놓았다. 2006년에는 마일드 비츠가 수준급의 스토리텔링 구사로 마니아들에게 호평받았던 래퍼 라임어택과 손잡고 듀오 프로젝트 앨범 ‘Message From Underground 2006’을 발표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다. 이 앨범은 평단과 음악팬들의 호평은 물론 제4회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힙합 음반’ 부문 후보에도 올랐다.

    이렇듯 거침없이 달려온 빅딜 레코드는 현재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 아무래도 음악 스타일이 마니아적이다 보니 좀더 다양하고 새로운 것을 해나가기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기존 스타일을 완전히 버리는 것은 레이블의 색을 바랠 위험이 있다. 빅딜 레코드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 한창 고민 중인 정 대표를 어느 바에서 만났다.

    -빅딜 레코드의 시작이 궁금하다.

    “그야말로 사전적 의미처럼 빅딜 과정을 거치면서 만들어졌다. 당시 인펙티드 비츠라는 크루가 중심이 된 록스타라는 신생 레이블과 초콜릿 뮤직 팩토리라는 크루가 있었는데, 프라이머리, 랍티미스트, 딥플로우 등이 록스타에, 그리고 나와 데드피 등이 초콜릿 팩토리 소속이었다. 그때 두 집단이 긴밀히 교류하면서 함께 작업을 해오다가 랍티미스트가 메인 프로듀싱을 맡고 데드피의 솔로 앨범을 내기로 하면서 합병하게 됐다. 사실 당시만 해도 빅딜 레코드는 어느 한 사람이 대표로서 이끄는 형태가 아니었고, 나도 개인적으로 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힙합 신에 본격적으로 몸담고 싶다는 생각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대표로서 레이블을 이끌게 된 건가.

    “어쨌든 뜻을 품고 레이블을 시작했으면 무언가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데드피 앨범 이후 일이 지지부진했다. 각자 개성이 강한 여러 명이 모여 있는 상태에서 중심을 잡아주거나 진행하는 일에 대해 책임을 질 사람이 없다 보니 의견 조율이나 제작 투자 부문에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나서야 할 시기였다. 그래서 ‘내가 책임질 테니 따라와라!’고 하고 사무실을 얻은 후, 레코딩 시설을 구축했다. 이를 계기로 내가 대표로서 레이블을 이끌게 된 것이다.”

    -빅딜 레코드의 장·단점은 뭔가.

    “소수에게 강한 충성도를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자 단점이다. 아무래도 많은 이가 보편적으로 좋아하기는 좀 힘든 스타일이다. 우리의 음악을 좋아해주는 팬들 중에는 외국 힙합음악도 많이 들어온 골수팬들이 많다. 이른바 힙합 커뮤니티의 오피니언 리더라고 할 수 있는 이들 말이다.”

    빅딜 뮤지션 멤버들


    -음악적 스타일을 바꾸는 것을 고민한 적은 없나.

    “바꿔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단지 다른 시도를 해보고 싶었는데, 이것을 빅딜 내부에서 하는 것과 외부적으로 하는 것 중 어떤 쪽이 더 옳은 선택일 것인가를 고민한 적은 있다. 결국 기존 빅딜의 색깔과는 다른 음악 스타일을 담았던 마르코의 앨범으로 내부에서 시도를 해봤는데 확실히 다른 타깃을 노리고 마케팅을 하면 다른 반응이 오더라.”

    -여전히 언더그라운드 힙합음악으로 온라인 시장을 효과적으로 뚫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힙합 팬들이 생각하고 있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정통성이 언더그라운드 힙합음악의 필요조건이라고 본다면, 절대 온라인에서 수익이 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언더그라운드 시장은 적은 소비층이 강한 충성도를 보이는 곳이다 보니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통성이라는 것을 담보로 하지 않아도 언더그라운드라는 영역에 존재할 수 있다면, 틈새시장을 노려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레이블을 이끌어가면서 가장 바라는 것은.

    마르코

    “빅딜 소속 친구들이 좀더 거시적 안목을 가지고 부지런하게 움직였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힙합 신에 바라는 건 뮤지션 못지않게 음악을 듣는 사람들도 더 많은 고민을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대중가요를 듣는 사람들은 몰라도 적어도 마니아라 불리는 이들이라면 책임의식을 가지고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냥 흘려듣기보다는 진지하게. 그래야 많은 뮤지션이 좀더 명분 있는 음악을 하지 않을까. 듣는 사람들의 수준이 높아지면, 수준 높은 음악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될 것이고 거기에 뮤지션들이 압박을 받음으로써 양질의 음악들이 계속 나올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최근 힙합 신에는 이런 부분이 부족한 것 같다.”

    -외부적으로 바라는 건 없나.

    “현재 문화 콘텐츠의 가치를 가늠하는 척도를 수익성에 대비하는 게 일반적인데, 이것은 바뀌어야 할 부분이다. 내가 보기에 정부가 음악 사업을 지원할 때 두 가지 기로에 서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신인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의 경우, 대중에게 알려지기 힘들지만 정말 좋은 음악을 하는 이를 발굴해 음악의 다양성을 알려줄 것인가, 아니면 메이저 기획사에서 나와 이른바 뜰 것이 어느 정도 보장된 신인에게 더 힘을 실어줄 것인가. 대부분은 후자의 경우로 결론이 난다. 일단은 그들도 눈에 보이는 사업성과가 있어야 하니까…. 올해부터 인디레이블 육성 지원사업도 없어졌지 않나. 그렇다면 인디레이블은 자생하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인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다. 난 점점 각자의 취향이 중요해지는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반향을 일으킬 수 있는 음악은 전혀 의외의 곳에서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은 우리나라보다 음악의 다양성이 떨어지는 곳이었기 때문에 한류가 조성될 수 있었던 거고, 대중문화의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에서 반응을 얻을 만한 음악은 오히려 인디레이블 뮤지션의 음악 중에 있을 확률이 높다. 이 부분을 너무 놓치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

    신의의지 2003년 초 ‘Chapter One: One Luv’라는 정규 앨범을 발표한 랩혼과 박지호로 구성된 투디알이 설립한 신의의지 레코드는 한때 언더그라운드 힙합 신의 대표적인 레이블 중 하나였다. 2003년 당시는 언더그라운드 힙합공연의 메카였던 클럽 MP가 문을 닫으면서 많은 뮤지션이 공연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때이기도 했다. 게다가 대부분 약한 기반을 바탕으로 힘겹게 음악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이에 후배 뮤지션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실력 있고 가능성 있는 이에게 더 쉽게 길을 열어주기 위해 레이블을 설립했다고 한다.

    신의의지가 처음으로 내놓은 결과물은 대구에서 활동하던 듀오 바이러스의 EP ‘Pardon Me’였다. 현재 대표적인 스토리텔링 래퍼로 인기를 얻고 있는 마이노스와 메카로 이루어졌던 이 듀오의 앨범을 계기로 레이블은 성공적인 첫 발걸음을 내디뎠으며, 이후 한국 최초의 온라인 앨범이었던 라임어택의 ‘Story At Night EP’에 이어 엘큐, 팔로알토, 알이에스티, 바이러스 등 소속 뮤지션들이 총출동한 컴필레이션 ‘People & Places Vol.1’ 등을 발표하며 점점 입지를 다져갔다.

    이렇듯 실력 있는 뮤지션들이 좀더 나은 환경에서 결과물을 발표할 수 있게 한 것만으로도 신의의지는 의미 있는 행보를 보였다고 할 수 있는데, 이와 함께 더욱 레이블의 가치를 높인 것이 바로 ‘더 쇼’라는 정기 공연을 주최했다는 점이다. 한 달마다 정기적으로 열렸던 이 공연은 당시 정기적인 언더그라운드 힙합공연이 전무하던 상황에서 신의의지 소속 뮤지션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에게도 자신과 음악을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상당했다. 그러나 신의의지는 팔로알토와 바이러스, 라임어택 등이 다른 레이블로 옮기면서 점점 입지가 좁아졌고 더 쇼도 중단되면서 위기를 맞았다.

    이후 2007년에 다행스럽게도 엘큐의 앨범과 새로운 더 쇼 공연을 시작하며 레이블이 다시 도약을 하는가 싶었으나 현재는 모든 소속 뮤지션들과 계약이 끝나 사실상 레이블로서 활동은 멈춘 상태다. 하지만 여전히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을 위해 비정기적으로나마 더 쇼를 주최하고 있으며, 특히 ‘강압적인 제약과 구속 없이 아티스트들의 음악세계를 존중하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장을 열어줄 것’(신의의지 홈페이지에서 발췌)이라는 신념 아래 한국 힙합 신을 이끌었던 레이블의 발걸음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힙합 팬의 가슴에 깊이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아티스트 및 앨범 - 빅딜

    모리얼(Mo’Real) [The Greatest] (2004)


    마일드 비츠(Mild Beats) 힘 있고 로한 힙합을 추구하는 빅딜 레코드 음악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로듀서. 라임 어택의 EP 이후 데드피, 어드스피치 등의 앨범에서 탁월한 프로듀싱을 보여주다가 2005년에 첫 번째 앨범 ‘Loaded’를 발표하며 언더그라운드 힙합 신에 잔잔한 파장을 일으켰다.

    [Loaded] (2005)

    [Never Sold Out] (2007)



    라임 어택 & 마일드 비츠(Rhyme-A- & Mild Beats)

    [Message From Underground 2006] (2006/신의의지&빅딜레코드)



    어드스피치(Addsp2ch) 2005년에 첫 번째 앨범인 ‘Elements Combined LP’를 발표해 좋은 반응을 얻었던 어드스피치는 상당히 여유 있는 래핑을 구사하는 MC다. 특히 그는 영상분야에서도 재능이 있어 뮤직비디오를 담당하고 있기도 하다.

    [Elements Combined LP] (2005)



    데드피(Dead’P) 2004년 ‘Undisputed’라는 데뷔 앨범과 함께 한국 힙합 신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묵직한 보이스컬러를 바탕으로 한 무게감 있고 유연한 플로를 자랑하며, 데뷔 앨범으로 힙합 마니아들의 커다란 호평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이후 입대 때문에 활동을 중단했다가 전역 후 새 앨범을 준비 중이다.

    [Undisputed] (2004)



    딥플로우(Deepflow) 랩, 비트 메이킹,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창작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래퍼. 라임 어택의 EP에 참여하며 주목받은 그는 빅딜 레코드 소속 이후 더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솔로 활동과 더불어 메스퀘이커(Mesquaker)라는 크루를 이끌며 여러 프로젝트를 기획 중이다.

    [Vismajor] (2007)



    마르코(Marco) 2인조 힙합그룹 모리얼(mo’REAL)로 데뷔한 마르코는 클럽에서 활동을 벌이다가 2003년과 2004년에 두 장의 EP를 발표하기도 했다. 역시 랩뿐만 아니라 프로듀서로서도 활동하고 있으며, 2007년에는 드디어 솔로 데뷔작인 ‘Music Is My Life’를 발표했는데, 기존 빅딜 레코드의 음악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도 섞여 있어 신선함을 안겼다.

    [Music Is My Life] (2007)



    - 신의의지

    바이러스 (Virus)

    [Pardon Me?] (2003)



    엘큐(Elcue)

    [Unofficial Experiment] (2003)

    [The Experiment 2] (2005)

    [초대 - The 1st LP] (2007)


    <글 강일권(웹진 리드머 편집장)·진행 박준흠(가슴네트워크 대표)>

    ㆍ빅딜로 만든 ‘한국힙합의 빅뱅’빅딜 록스타 레이블과 초콜릿 뮤직 팩토리라는 크루와의 ‘빅딜’ 과정으로 탄생 데드피빅딜 레코드는 한국 힙합 신을 이끌어가는 몇 안 되는 레이블 중 하나이자 가장...

  9. 마스터플랜에 이은 힙합 전문 레이블

    랍티미스트

    타일뮤직은 2005년 설립 이후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단숨에 음악마니아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벨 앤 세바스찬의 싱글 모음집을 시작으로 가리온의 싱글들을 잇달아 내며 음악적으로나 대중적으로 호평을 얻어냈다. 한편으로 윤키, 고트 앤 몽키 등 인디 속의 인디라 할 수 있는 아티스트들의 앨범을 발매하며 인디 신의 범위를 넓히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다른 인디 레이블에서도 쉽게 접할 수 없는 다양한 장르의 음반 목록은 타일뮤직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큰 특징이다. 단순히 판매량 같은 바로 앞의 결과만을 따지지 않고 보다 멀리 내다보고자 하는 타일뮤직만의 우직함이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우직함과는 달리 타일뮤직은 가장 트렌드에 민감하고 유행을 선도하는 레이블이기도 하다. 힙합 전문 레이블을 제외하고 타일뮤직은 힙합, 어반 뮤직 등 당대의 트렌디한 음악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레이블이었다. 또한 이제는 힙합 신에서 어느 정도 익숙해진 ‘리믹스 컴피티션(대회)’ 행사를 개최해 각자 자신의 방에서 연습에 몰두하고 있던 수많은 뮤지션 지망생들을 수면 위로 등장시키기도 했다.

    가리온 싱글의 성공을 발판으로 타일 뮤직은 윤키, 펑카프릭 부스터, 프라이머리 스쿨 등의 앨범을 제작하며 인디 신에서 가장 감각적이고 스타일리시한 레이블로서의 인식을 점차 넓혀갔다. 2007년 2월 발매한 랍티미스트의 앨범을 마지막으로 꽤 긴 휴지기에 들어갔던 타일뮤직은 올해 한대수 트리뷰트 앨범 ‘물 좀 주소’를 제작하며 다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현재 타일뮤직은 음반 레이블로서의 특성은 계속 살리면서도 영상, 출판, 뮤지컬 등 다채로운 문화 영역으로의 확대를 도모하고 있다. 단순한 사업 확장이 아닌 각 문화영역의 교류를 꾀하며 파이를 넓히고자 하는 것이다. 이 계획의 결과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지만, 분명 존중받아야 할 가치 있는 시도인 것만은 분명하다. 타일뮤직의 전수영 대표(사진)는 “음악과 다른 문화 산업이 함께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요즘 타일 뮤직의 활동이 예전에 비해 많이 뜸해졌다.

    “회사를 2005년에 설립하고 처음에 굉장히 공격적으로 마케팅을 해왔다. 그러다가 2007년 2월에 랍티미스트의 앨범을 낸 이후 올해 ‘물 좀 주소’ 앨범을 낼 때까지 활동을 한 게 거의 없는데, 그동안은 음반 사업보다는 뮤지컬 제작이나 공연 등 다른 부분에 신경을 많이 썼다. 지금 음반 쪽은 거의 재정비를 마쳤고 가리온과 ‘물 좀 주소’ 앨범에 참여한 판다풀의 EP를 준비하고 있다. 또 서영도씨나 강허달림씨의 블루스 앨범도 얘기를 하고 있는 중이니 곧 다시 예전과 같은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 레이블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일단은 좋아서 시작한 것이다. 좋아서 한 거긴 한데, 어떤 시스템 같은 것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레이블을 하기 전에 출판 일도 하고 영화 쪽 일도 하고 여러 가지 일을 했었는데, 작가들과 산업이 연결되는 어떤 지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음반 사업을 하면서 음원 같은 것들을 다른 산업 쪽과 연결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음악을 직접 만드는 프로듀서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초반부터 프로듀서들 위주로 계약을 했다. 엔터테인먼트 기업이 아닌 일반 레이블 수준의 규모였지만 거기에서도 다른 모델들을 제시할 수 있는 회사를 만들고 싶었다. 출판이나 뮤지컬 등 다른 산업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시스템을 바랐다.”

    -가리온의 <무투> 싱글이 타일뮤직에서 낸 국내 첫 음반으로 알고 있는데, 이 싱글이 음악적으로뿐만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었다고 들었다.

    윤키

    “상업적인 성공보다 주목할 만한 부분들이 몇가지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까지 한국에선 싱글이나 EP 이런 것들에 대한 개념이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싱글을 내고 그 싱글 안에서 여러 시도들을 했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다. 원곡뿐 아니라 비트와 아카펠라를 함께 싱글에 수록하고 또 아카펠라를 가지고 리믹스 대회를 열기도 했는데 그런 시도들을 통해서 블랙 뮤직 신을 좀더 다이내믹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지금 인디 신 안에서 음악을 듣는 사람들의 수는 어차피 정해져 있는 건데 그 한정된 수의 사람들에게 CD를 팔아봐야 크게 터지진 못할 것이다. 그게 싫으면 다시 메이저 시스템으로 가야 하는데 그건 우리가 할 수 없는 거고, 그래서 좀더 재미있게 가보자 하는 생각으로 이런저런 시도들을 많이 한 거다. 그게 우리에게는 분명 의미가 있었고, 사람들도 좋게 받아들여서 서로에게 좋게 작용을 한 것 같다.”

    -타일뮤직에서 아티스트를 선택하는 기준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

    “아까도 얘기했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은 프로듀싱 능력이 있는지 여부였다. 그게 아니라면 정말로 특별한 색깔이 있거나 우리가 가진 자원들과 함께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뮤지션들을 선택했다.”

    -타일뮤직의 가장 큰 특징은 다른 레이블들에서 다루지 않는 인디 신에서도 마이너한 장르의 음악들을 선택하고 제작했다는 것이다. 고트 앤 몽키나 윤키 같은 앨범은 안 팔릴 게 뻔한 음반들이었다. 상업적인 부담이 없나.

    프라이머리스쿨


    “왜 없었겠나?(웃음) 지나고 나서 신에 대한 책임감이나 이런 말로 포장할 수도 있는 거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다. 우리가 냈던 하나하나의 앨범들이 다 소중한 프로젝트들이고 거기에서 적자를 면하고 모두 수익을 낼 수 있다면 물론 좋은 일이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생길 수 있는 무형의 수익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음악들까지 수용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이미지를 만들 수 있고 우리가 원하는 사람들을 끌어 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제 음악 시장은 음반과 온라인 음원으로 시장이 나누어졌는데 타일뮤직은 현재 양쪽 시장의 비중이 어떻게 되나.

    가리온

    “처음엔 음반 쪽이 더 강하긴 했는데 이후에 온라인 음원 쪽을 정비해서 현재 균형을 맞춰가고 있다. 처음엔 우리가 온라인 쪽에 아는 게 별로 없었는데 좀 여러가지 살펴보고 이후에 정보도 얻고 하다 보니 예전에 비해서 확실히 수익이 늘어나고 있다. 아까 얘기한 리믹스 대회 같은 마니악한 재미를 줄 수 있는 시도들이 결국엔 온라인 사업의 수익이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온라인 시스템을 조금씩 알아갈수록 그런 기회들이 더 많이 생기는 것 같다.”

    -앞으로 어떤 레이블을 만들고 싶은가.

    “레이블로서 특화돼 있는 타일 뮤직은 계속 유지를 하겠지만 타일이란 회사 자체는 영화나 영상 등 종합적인 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기획사 성격이 될 것이다. 광고나 영화 작업을 할 때 우리 레이블에 속해있는 뮤지션들이 참여를 하고 기회가 된다면 출판이나 이런 기획에도 음악과 함께 연결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들려고 한다. 재능있는 사람들이 다양한 방면에서 모여 있으면 재미있는 일들이 생겨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그건 단지 음악 신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문화 흐름에도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타일뮤직 국내 아티스트

    가리온

    [무투] (2005) 1집 앨범 발표와 함께 메인 프로듀서였던 JU가 팀을 떠난 후 낸 싱글이다. 비평계 쪽에서도 큰 찬사를 받았고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음반 안에 아카펠라와 인스트라멘틀을 담아 리믹스 대회를 열기도 했다.

    [그날 이후] (2005) 첫 싱글의 성공 이후 발표한 두 번째 싱글. 소울 밴드 파워 플라워와 함께 노래하는 등 [무투]만큼이나 다양한 사운드들을 담았다.



    고트 앤 몽키(Goat And Monkey)

    [Mommy I Concrete With My Dad] (2006) 한국에서 존재 자체가 희귀한 IDM(Intelligent Dance Music) 뮤지션이다. IDM뿐 아니라 앰비언트 테크노, 드릴 앤 베이스 등의 장르를 들려주고 있다. 음악 외에 앨범 아트워크와 영상 작업까지 혼자 해냈다.



    윤키(Yoonkee)

    [I Worry, Too] (2006) 곤충스님 윤키, 곤충소년 윤키 등의 이름을 사용하다가 이 앨범에서부터 윤키란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힙합, 레게, 덥 등 다양한 사운드를 담고 있다.



    프라이머리 스쿨(Primary Skool)

    [Step Under The Metro] (2006) 힙합 프로듀서이자 기타리스트 프라이머리를 주축으로 결성된 프로젝트 밴드이다. 다양한 래퍼들이 참여했으며, 프라이머리를 앨범에서 감각적인 기타 연주를 들려준다.



    펑카프릭 부스터(Funkafric Booster)

    [One] (2006) 아소토 유니온 출신의 임지훈이 주축이 되어 만든 솔/펑크 밴드이다. 모든 녹음을 원테이크 방식으로 담았으며 솔, 펑크, 블루스, 재즈 등 다양한 블랙 뮤직 사운드가 담겨있다.






    준키(Junki)

    Mr. Hong (2006/Tyle Music)







    최윤성

    최윤성 (2006)



    랍티미스트(Loptimist)

    [22channels] (2007) ‘뉴욕에 도전한다’는 홍보문구만큼이나 강력한 사운드를 담고 있는 힙합 앨범이다. 국내의 다양한 래퍼들뿐만 아니라 해외 힙합 신의 실력파 아티스트들도 참여했다.



    V.A.

    [물 좀 주소] (2008) 타일뮤직이 1년여 만에 제작한 한대수 트리뷰트 앨범이다. 아마추어증폭기, 갤럭스 익스프레스,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판다풀 등 타일뮤직의 특성에 잘 맞는 독창적이고 개성 있는 뮤지션들이 대거 참여했다.


    <글 김학선 | 웹진 보다 편집장·진행 박준흠 | 가슴네트워크 대표>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812171448545&code=900315

    마스터플랜에 이은 힙합 전문 레이블 랍티미스트타일뮤직은 2005년 설립 이후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단숨에 음악마니아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벨 앤 세바스찬의 싱글 모음집을 시작으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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