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네트워크 로고

검색

검색하기

컨텐츠 모음

대중음악총서 한국의 인디레이블 37 POSTS



  1. 주소 : 서울시 종로구 낙원동 58-1 종로오피스텔 314호

    TEL. 02-762-3335 FAX. 02-762-3371


    가슴네트워크 기획․선정 「한국 대중음악의 현재」 시리즈 Vol.3

    한국의 인디레이블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박준흠 책임편집 | 박준흠 외 11인 지음 | 488 페이지 | 23,000원

    문의: 김윤태 대표 02-762-3335

    ※ 39개 인디레이블 대표, 뮤지션, 음반 사진 등 세부자료는 웹하드에 있습니다.


    “언니네이발관에서 장기하까지, 한국 인디음악의 모든 것을 담아냄”

    “한국의 대표적인 39개 인디레이블 대표들과의 생생한 인터뷰 수록”

    “39개 인디레이블이 발행한 음반들 소개”

    “1000여 컷에 이르는 인디레이블 대표, 뮤지션, 음반에 관한 풍부한 사진 자료 수록”

    “1997년, 한국 인디음악의 초창기부터 대중음악전문지 ‘서브’, 인터넷음악방송국 ‘쌈넷’, 문화기획그룹 ‘가슴네트워크’를 운영하면서 홍대 인디씬을 기록해온 책임편집자 박준흠이 얘기하는 한국 인디음악의 현재와 미래”


    책임편집 | 박준흠(가슴네트워크 대표, 문화기획자, 대중음악연구자)

    글 | 강일권, 김민규, 김양수, 김학선, 박준흠, 배순탁, 성우진, 이대화, 차우진, 최규성, 최민우, 홍정택


    1. 핵심 요약


    “장기하 때문에 인디음악이 떳다고? 천만의 말씀. 이미 2000년, 델리스파이스의 김민규가 문라이즈레코드를 설립할 당시부터 현재의 인디음악은 뜰 준비가 되어 있었다.”

    “대중음악축제의 성장과 함께 적어도 향후 10년은 인디음악의 성장세가 지속될 것이다.”


    2000년대 현재 활동하는 뮤지션들의 수와 그들 작품의 수준은 오히려 1990년대를 능가하고 있다. 2002년 이후 인디씬에 정착한 ‘홈레코딩’ 기반의 음반제작 환경은 뮤지션들에게 운신의 폭을 넓혀줘서 최소한 자본이 없어서 음반을 제작하지 못하는 시대를 종식시켰기 때문이다. 나아가 홈레코딩 관련 기술의 발전으로 뮤지션이 기술적인 능력만 있다면 일반 스튜디오 작업에 부럽지 않게 녹음하는 것도 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인디 뮤지션들은 스스로 자신의 음반사를 만들어서 앨범 제작을 하고 있다. 현재 인디레이블들은 나름의 음악적인 색깔을 갖는 것을 고민하면서 기획, 창작, 프로듀싱, 세션, 레코딩 등의 부분에서 진일보를 거듭하고 있다. 대중음악에서도 ‘역시 중요한 것은 창작’이라면, 이제라도 인디레이블에 대한 정확한 재조명이 필요하다.


    현재 한국 인디음악씬의 발전 과정은 아래와 같이 크게 4단계로 나뉜다.(※ 자세한 내용은 별첨의 《한국에서 인디레이블의 성장 과정》 참조.)

    1) 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붕괴와 대안적인 활동 방안

    - 인디뮤직 씬의 시작 (1990~1996)

    2) 인디와 강아지문화예술

    - 인디레이블의 도약기 (1997~1999)

    3) 문라이즈와 홈레코딩

    - 자주 레이블의 가속화 (2000~2004)

    4) 음반기획과 음반프로듀싱

    - 음악적인 스타일로 각 레이블 차별화 시도 (2005~현재)


    ■ 머리말 발췌

    인디음악을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 ‘한국 음악창작자의 역사’에서의 현재 지점으로 보는 시각은 고사하고, ‘현재 트렌드’(현재의 음악)로 보는 시각은 얼마나 있을런지. 1996년부터 시작된 1차 인디음악 붐은 다분히 언론의 선정적인 관심 때문이었지 음악 자체에 대한 관심 때문은 아니었다. 그래서 1999년이 되니 신기하게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매체의 관심도가 급격하게 떨어졌다. 이게 2007년까지 이어져 오다가 2008년에 와서는 장기하와 주변으로 인해서 다시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고 나서는 연초에 내게 몇몇 인터뷰 요청이 있었는데, 주요한 물음은 “장기하의 인기가 시들면 인디음악 붐도 꺼지지 않을까요?”였다. 이는 아직도 인디음악을 음악창작이나 음악트렌드, 음악산업 관점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하는 질문이다. 장기하 때문에 인디음악이 떴다고? 천만의 말씀. 한국에서 인디음악은 이미 ‘시대적인 트렌드’가 되었다. 장기하가 대중적인 관심을 일시에 증폭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그 조짐은 2000년에 델리스파이스의 김민규가 자신의 솔로 프로젝트인 스위트피(Sweetpea) 1집을 자신의 레이블인 문라이즈레코드(Moonrise Record)에서 내려고 할 때부터 ‘준비’되었다.


    2002년 이후 본격화된 ‘홈레코딩 제작시스템’으로 인해서 2004년 무렵부터는 매년 발매되는 인디음반이 200장을 넘기고 있다. 그리고 2006년 무렵부터 각 인디레이블들이 신경 쓰는 것은 ‘음악적인 스타일’ 부분이고, 그래서 음반기획과 음반프로듀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을 정도로 장족의 발전을 해왔다. 이 흐름에 맞물린 것이 대형 대중음악페스티벌이다. 2005~2006년 필자가 예술감독으로 있었던 광명음악밸리축제에서 본격적으로 전문화된 ‘한국 대중음악 축제프로그램’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2005년에는 ‘하나뮤직 스페셜’, ‘밸리 초이스’, ‘인디음악 10년사’, ‘민중음악 30년사’, ‘뉴 커런츠’ 프로그램을 3일에 걸쳐서 진행했다. 이후 2006년에는 펜타포트록페스티벌, 2007년에는 그랜드민트페스티벌, 2009년에는 지산밸리록페스티벌이 생겨나서 기존의 쌈지사운드페스티벌(1999년), 자라섬재즈페스티벌(2004년)과 함께 한국 인디음악 씬을 키우고 있다. 장기하와얼굴들이 결정적으로 주목 받은 곳도 다름 아닌 2008년 쌈지사운드페스티벌이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대형 대중음악페스티벌 시장이 급성장한 일본의 사례를 보면, 한국도 이제 영화제에 이어서 그 흐름을 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올해 진행되고 있는 상기 음악축제들의 진행 경과를 보건데, 한국에서 적어도 향후 10년은 음악축제 성장이 지속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동반하여 인디음악의 성장세도 이어질 것으로 판단한다. (박준흠/ 가슴네트워크 대표)


    연도/등급

    올해앨범

    필청앨범

    우수앨범

    주목앨범

    기타앨범

    소계

    1996

    1

    2

    0

    2

    1

    6

    1997

    1

    2

    5

    6

    3

    17

    1998

    1

    10

    11

    14

    25

    61

    1999

    1

    9

    8

    11

    33

    62

    2000

    1

    9

    13

    27

    53

    103

    2001

    1

    9

    20

    24

    71

    125

    2002

    1

    9

    22

    28

    68

    128

    2003

    1

    15

    26

    46

    87

    175

    2004

    1

    16

    25

    37

    111

    190

    2005

    1

    10

    27

    36

    136

    210

    2006

    1

    11

    33

    44

    164

    253

    2007

    0

    6

    12

    33

    72

    123

    총계

    11

    108

    202

    308

    824

    1453

    [한국 인디음반 발매 현황]1) (박준흠, 가슴네트워크, 2007년 7월)



    2. 출간 의의


    “한국 ‘음악창작자’들의 지형도를 살펴봄”

    “도서출판 선에서 발행하는 ‘한국 대중음악의 현재’ 시리즈의 완결판”

    Vol.1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음반리뷰> (2008년, 박준흠 책임편집)

    Vol.2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인터뷰> (2009년, 박준흠 책임편집)

    Vol.3 한국의 인디레이블 (2009년, 박준흠 책임편집)


    ‘한국의 인디레이블’ 프로젝트를 생각한 것은 2008년 4월경이었다. 당시 필자는 2008 광주청소년음악페스티벌 총감독을 맡아서 광주광역시에 내려가 있을 때였다. 바로 전에 진행을 맡았던 네이버 오늘의뮤직 내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인터뷰’는 3월부터 연재가 시작되었고, 이미 연재 전에 인터뷰 진행은 거의 끝났었기 때문에 약간은 한가로울 때였다.(물론 축제 준비 자체는 무척 바빴지만.) 그래서 가슴네트워크에서 당분간 매체사업을 해보겠다고 결심한 터였기 때문에 새로운 아이템을 생각했다.


    이전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서 음반과 뮤지션을 다뤘기 때문에 이번에는 ‘음반사와 음반사 대표’를 한번 다뤄보고 싶었다. 여태까지 대중음악 관련 기획기사를 보면 거의 대부분이 신보를 냈거나 공연을 준비 중인 뮤지션과 그의 음반 중심이라서 뭔가 다양성 면에서 부족했다. 여기에는 결정적으로 ‘대중음악 기획’에 관한 점이 빠져 있었다. 사실 어떤 뮤지션이 아무리 훌륭한 노래를 만들어도 그걸 ‘음반기획’ 측면으로 연결시키지 못하면 대중들은 제대로 전달받지 못한다. 뛰어난 뮤지션을 알아보고 그에 걸맞는 음반기획을 해주는 음반제작자는 음악씬에서 무척 중요한 존재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1990년대 들어와서 그런 음반기획자들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열악한 상태로 전락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서는 ‘음반기획 측면에서의 대안적인 시스템’인 인디음반 시스템이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더욱이 2000년대 들어서서 홈레코딩 음반제작 시스템의 급격한 발전으로 뮤지션 스스로가 자신의 레이블을 만드는 것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고, 2003년 무렵부터는 인디레이블의 숫자가 점진적으로 늘어났다.


    이번 연재 기획인 ‘한국의 인디레이블’은 2000년대 들어서서 새롭게 대두된 인디레이블의 현재 상황과 ‘성장 이유’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방법론적으로는 음반기획 측면에서 인디레이블 대표를 인터뷰하는 방식을 택했다. 또한 해당 인디레이블에서 발매된 음반들을 소개함으로써 대중음악을 뮤지션과 음반을 넘어서서 ‘기획과 제작’ 측면에서 조망하려고 했다. 이번에 다룬 39개 인디레이블의 선정 기준은 창작적으로 뛰어난 음반이 얼마나 나왔는지가 관건이었다.(기타 음악적으로 조명할만한 가치를 갖는 레이블도 선정 대상이었다.) 그래서 이번 39개 인디레이블들에 대한 기록은 현재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주목할 만한 음악창작자들이 어떤 식으로 분포하고 있는지에 대한 고찰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한국 음악창작자들의 지형도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원래 타이틀도 “한국 대중음악의 현재 - ‘인디레이블’을 통해서 살펴본 인디음악의 현주소와 한국 음악창작자들의 지형도”였다. (박준흠/ 가슴네트워크 대표)



    3. 내용 소개 (목차)

    * 본문의 레이블 배열순서는 ‘첫 번째 국내 뮤지션 음반 발매 연도’를 기준으로 정렬함



    Ⅰ. 한국의 인디레이블 _ 창작 대중음악의 현재


    1. 지금 ‘인디레이블’을 다시 이야기 하는 이유 | 박준흠

    2. 한국에서 인디레이블의 성장 과정 | 박준흠

    3. 경향신문, 가슴네트워크 ‘한국의 인디레이블’ | 박준흠



    Ⅱ. 한국의 인디레이블 _ 역사


    ■ 1996년 발매 시작 레이블

    01. 인디(Indie) - 한국 최초로 실질적 인디레이블 시스템을 도입하다 | 최규성

    02. 석기시대(Stoneage Records) - 한국 인디 음악을 묵묵히 지켜 온 이름 | 홍정택

    03. 드럭 레코드(Drug Record) - 펑크의 시작. 그것은 인디의 시작 | 이대화


    ■ 1997년 발매 시작 레이블

    04. 강아지문화예술(Gang A.G) - 아티스트의 다양한 감성을 즐기다 | 김민규


    ■ 1998년 발매 시작 레이블

    05. 스컹크 레이블(Skunk Label) - 펑크뮤지션들은 궁극적으로 ‘자기가 배척되지 않는 세상’을 원한다 | 박준흠

    06. 카바레 사운드(Cavare Sound) - 한국 인디 씬의 스펙트럼을 넓히다 | 김양수

    07. 문화사기단 - 세상이 사기라 외치던 겁없던 그들 | 홍정택

    08. 라디오뮤직(Radio Music) - 미선이, 루시드 폴을 발굴한 홍대 포크의 산실 | 이대화


    ■ 1999년 발매 시작 레이블

    09. 쌈넷(ssamnet) - ‘쌈지의 눈’으로 검증시켜서 보여주는 역할이 문화예술과 관련된 쌈지의 입장이다 | 박준흠

    10. 마스터플랜(Master Plan) - 한국 힙합의 성지에서 전천후 음악발전소로 | 배순탁

    11. B-레코드(B-Record) - 라이브 클럽과 인디 레이블의 적절한 조합 | 김민규


    ■ 2000년 발매 시작 레이블

    12. GMC 레코드(GMC Records) - 10년을 독하게 이어 온 한국 하드코어 신의 중심 | 홍정택

    13. 벌룬애니들(Balloon & Needle) - 노이즈에 대한 꾸준하고 진지한 행보 | 차우진

    14. 튜브앰프 레코드(Tubeamp Records) - 뮤지션들의 ‘다음’을 위한 발판이 되고 싶다 | 홍정택

    15. 문라이즈(Moonrise Records) - 인디 레이블의 새로운 시작 | 김학선


    ■ 2001년 발매 시작 레이블

    16. 쥬신 프로덕션(Jusin Production) - 대한민국 익스트림 메탈의 역사와 꿈이 모여 있는 레이블 | 성우진

    17. 드림온(Dream On) - 용감한(?) 형제의 꿈과 음악적 열정을 담아 | 성우진


    ■ 2002년 발매 시작 레이블

    18. 롤리팝뮤직(Lollipop Music) - 2000년대 홍대 인디 팝의 신(新) 지류 | 이대화

    19. 리버맨뮤직(Riverman Music) - 전 세계 희귀음원을 찾아 여행하는 레이블 | 최규성


    ■ 2003년 발매 시작 레이블

    20. 비트볼 레코드(Beatball Records) - 열혈 음악 애호가의 진심을 담은 레이블 | 김민규

    21. 샤 레이블(Sha Label) - 화려함보다 중요한 건 뮤지션만의 개성! | 배순탁

    22. 에그뮤직(EGG Music) - Everlasting Gallery of Good Music | 성우진

    23. 도프뮤직(Dope Music) - 한국 헤비니스 음악의 중심 | 김학선

    24. 퀸 엔터테인먼트(Queen Entertainment) - 퀸이라는 라이브클럽을 중심으로 사업 다각화, 소속 뮤지션들의 앨범 제작 | 성우진

    25. 리듬온(Rhythm On) - 아날로그 음악을 수호하는 마지막 보루 | 최규성

    26. 비행선(Bihaengsun) - 자유롭게 맘 가는 대로 | 김민규

    27. 신의의지 레코드(Will Records) - 아티스트들의 음악세계를 존중하며 한국힙합 신을 이끌었던 레이블 | 강일권


    ■ 2004년 발매 시작 레이블

    28. 파스텔뮤직(Pastel Music) - 인디와 메이저 사이의 교두보 | 차우진

    29. 소울컴퍼니(Soul Company) - 음악과 시, 그리고 힙합이 만나는 그곳 | 강일권

    30. 빅딜 레코드(Big Deal Records) - 하드코어 힙합의 결정체들로 이루어진 집단 | 강일권

    31. 루핀 레코드(Lupin Records) - 레이블과 엔터테인먼트 사이의, 중도좌파 레이블 | 홍정택

    32. 핑퐁사운드(Pingpong Sound) - 포크에서 슈게이징, 일렉트로니카까지 | 김민규


    ■ 2005년 발매 시작 레이블

    33. 일렉트릭 뮤즈(Electric Muse) - 뮤지션 출신의 제작자가 건립한 인디 팝/록의 새로운 거점 | 최규성

    34. 붕가붕가 레코드(BGBG Records) - 지속가능한 그들의 빡센 취미생활 | 홍정택

    35. 해피로봇 레코드(Happy Robot Records) - 취향을 전략으로 삼는 레이블 | 차우진

    36. 타일뮤직(Tyle Music) - 가장 감각적이며 스타일리쉬한 레이블 | 김학선


    ■ 2006년 발매 시작 레이블

    37. 루비살롱 레코드(Rubysalon Record) - 우주를 향해 볼륨을 높여라 | 최민우

    38. 튠테이블 무브먼트(Tune Table Movement) - 둘러앉아 소통하는 음악 공동체를 향하여 | 최민우


    ■ 2007년 발매 시작 레이블

    39. 파고뮤직(FarGo Music) - 홍보와 마케팅에서 협력 관계를 갖는 새로운 운영방식 | 성우진



    Ⅲ. 한국의 인디레이블 _ 부록


    2008 가슴어워드(Gaseum Awards) - 2008년 한국 대중음악 결산 | 박준흠



    [별첨] 한국에서 인디레이블의 성장 과정

    박준흠 / 가슴네트워크 대표



    1) 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붕괴와 대안적인 활동 방안

    - 인디뮤직 씬의 시작 (1990~1996)



    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붕괴와 대안적인 활동 방안의 필요성, ‘인디뮤직’이 갖는 의미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앨범2) 개념의 음반이 나온 것은 1964년에 발표된 신중현의 애드 훠(Add 4) 1집 [빗속의 여인](엘케엘레코드) 이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당시 매우 특이한 경우였고, 제대로 된 창작물을 담은 앨범들이 발표된 시기는 70년대 초반의 모던포크 시대부터다. 그것이 바로 한대수, 김민기, 양병집, 서유석, 양희은의 초기작들이었고, 록에서는 신중현의 음반들이 있었다. 그러나 70년대는 앨범으로서의 음반이 처음으로 발표된 시기 정도라는 의미를 가질지언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평가할만한 창작물은 소수의 뮤지션들에게서만 보일뿐이었고, 또한 프로듀싱, 세션, 레코딩과 같이 앨범 평가에서의 중요한 개념은 특별히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내가 아는 한 지금의 프로듀싱, 세션, 레코딩의 개념이 보이기 시작한 앨범은 1984년에 발표된 따로 또 같이 2집이 처음이다. 이전에 작은거인이 2집(1981년)에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세션과 레코딩 사운드를 들려주었지만 그건 원맨밴드 성격이었고, 엔지니어도 지다가와 마사토라는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한국의 세션, 레코딩 역사에 넣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앨범이 나온 시기를 80년대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80년대는 다양한 뮤지션들과 다양한 음악들이 조화를 이루었던 시기였고, 그래서 뛰어난 음반들도 많이 나왔다. 한마디로 언더그라운드와 오버그라운드가 조화를 이루었던 시기였고, 이 때 나온 뮤지션이 김현식, 어떤날, 시인과촌장, 신촌블루스, 한영애, 장필순 등이었다. 이들은 ‘언더그라운드의 거장’으로 얘기되면서 음악성도 높이 평가받았고, 또한 음반도 10만장 단위로 팔았다.3) 아이돌스타들만이 주로 주목받는 현재 음악환경을 생각했을 때 이는 매우 경이로운 사실이다. 당시는 뮤지션을 음악으로 평가하는 음악수용자들이 무척 많았거나, 음악수용자들에게 음악으로 승부하는 음반제작 풍토가 존재했던 것 같다. 뮤지션들에게는 무척이나 좋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1992년 서태지 등장 이후 한국 대중음악계는 아이돌스타를 양산하는 시스템으로 바뀌었고, 이는 단기간에 가장 손쉽게 큰 돈을 버는 사업으로 인식되었다.4) 그래서 대중음악계에서의 가수 선발 기준은 음악성이 아니라 외모와 같은 스타성으로 바뀌었고, 철저히 10대들을 주요 고객으로 생각하는 기획시스템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 운영을 위해 지속적으로 새로운 ‘연예인’들이 필요했던 공중파방송에서도 이를 부추킨 측면이 있다. 그 결과 80년대 언더그라운드 뮤지션 부류는 더 이상 음반 제작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80년대 언더그라운드 음악씬의 붕괴였고, 한국 대중음악사 측면에서 보면 음악적인 자산을 잃어버리는 커다란 손실이었다. 1990년 11월 1일에 김현식이 사망했고, 유작 앨범인 6집은 100만장 이상 팔렸는데, 이는 향후 더 이상 나오지 않을 언더그라운드 음악씬의 기록일 것이다.


    결국 ‘음악적인 진정성’을 자신의 음악에 투영하고 싶어 하는, 즉 ‘뮤지션’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나 그런 음악을 듣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대안적인 시스템’을 생각했는데, 이것이 ‘인디뮤직(씬)’이다. 여기서 ‘대안적’이라는 말은 음악 미학 측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음반 제작을 포함한 음악 활동 시스템’을 의미한다. 기존의 음반제작자들이 ‘창작에서 간섭받지 않으면서 완성도 높은 앨범 제작을 추구하는’ 언더그라운드 뮤지션 부류에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뮤지션들로서는 어쩔 수 없이 자구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스스로 음반을 만들거나 적어도 뮤지션이 앨범을 만드는데 있어 간섭을 하지 않는 제작자 부류를 원하게 되었다. 이것이 ‘인디레이블’이 갖는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즉, 인디는 진정한 뮤지션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택하는 공간이자 ‘시스템’이다. 그래서 ‘인디’를 얘기할 때 ‘음악창작’ 부분을 빼고 얘기하면 타당하지 않다.



    ‘인디뮤직 씬’의 탄생, 라이브클럽 드럭


    90년대 초반 대안적인 문화와 시스템을 바라던 사람들이 실험을 하기 시작한 곳은 홍대 주변이었다. 당시 ‘발전소’와 같은 음악과 미술, 춤이 어우러지는 클럽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1994년에 생긴 ‘드럭’은 인디밴드들이 공연을 하는 라이브클럽의 시작이었다. 사실 드럭은 처음부터 라이브클럽이 아니었다. 클럽 드럭은 1994년에 영국의 전설적인 펑크밴드 클래시(The Clash)의 [London Calling](1979) 재킷 사진이 복사된 4절지에 ‘펑크록의 이상’이 격문처럼 쓰여진 포스터를 문에 붙이고 개장하였지만, 당시는 정기적인 공연을 염두에 두거나 인디뮤지션들의 근거지 개념은 없었다.


    초기 드럭의 공간은 뮤직비디오가 나오는 조그만 TV들을 소도구로 이용한 ‘바/카페’의 개념이었고, 단지 한쪽에 밴드들이 연주를 할 수 있는 그믈망이 앞에 처진 작은 장소가 마련되었다는 점이 달랐다. 이는 당시 신촌의 현대백화점 뒷쪽에 있었던 록카페5)들의 확장된 개념의 클럽이었다. 하지만 너바나의 여파로 그런지록이 인기를 얻고 70년대 펑크가 재조명을 받으면서, 특히 1994년 4월 8일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이 사망하여 ‘그런지록의 전설’로 남으면서 한국에서도 카피밴드 수준의 그런지록과 펑크밴드들이 생겨났다. 이들의 연주가 수용될 수 있었던 드럭은 흔히 말해 드롭아웃(drop-out)들의 해방구로 회자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당시는 ‘공연장’의 개념만 있어서 어느 정도 전문적인 수준의 연주를 하는 밴드들(대개 헤비메틀 밴드들)은 무대에 설 수 있었지만 그 이하 수준의 밴드들은 대중 앞에서 공연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웠기 때문이다.6)


    1995년 4월에는 드럭에서 커트 코벤인 1주기 추모공연이 열렸고, 이 때를 즈음해서 ‘드럭 밴드’라는 이름으로 정기 공연 체제가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이 해부터 크라잉 넛, 언니네 이발관, 델리 스파이스, 코코어 등이 연주를 하기 시작했고, 그 중에서도 크라잉 넛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드럭은 점차 펑크록 중심의 라이브클럽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드럭이 펑크록의 메카로 자리 잡은 것은 1996년에 홍대 주차장거리와 명동에서 있었던 모잡지 주최의 ‘스트리트 펑크쇼’에 드럭의 밴드들이 주축이 되어 참여하면서부터이다. 이 당시 보여주었던 관중들의 폭발적인 열기는 매체를 타고 전파되었고, 이런 호응을 얻어서 드럭에서 처음 만든 음반이 바로 [Our Nation]7)이었다. 이게 최초의 인디 앨범으로 얘기되고 있고, 그 해에는 ‘배드 테이스트’의 [One Man Band... Badtaste]도 발매되었다.



    2) 인디와 강아지문화예술

    - 인디레이블의 도약기 (1997~1999)


    인디레이블은 거대 상업 논리 하의 음악비즈니스 시스템에서에서 뮤지션에게 그나마 자유를 주는데, 좀 더 자신의 스타일을 지킬 수 있는 음악을 할 수 있게 하는 장치가 되기 때문이다. 이는 상업성만을 생각하게끔 되어 있는 구조를 가진 메이저 음반사가 할 수 없는 일들이 인디레이블 체제에서는 가능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인디레이블은 마이너 성향의 뮤지션에게 있어 대중에 대한 창구일 수가 있고, 이것이 인디레이블 존재에 대한 당위성이다. 인디와 강아지문화예술은 한국에서 인디레이블 시스템이 정착되는데 있어 결정적인 공헌을 했던 레이블들이다.


    ▶ 인디(Indie)는 드럭, 재머스에 이은 인디레이블로 출발했지만 앞의 두 음반사가 자신들의 클럽과 클럽 밴드들을 홍보하려는 이유로 출발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제한된 범위에서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인디는 국내 최초의 ‘인디레이블’이라고도 할 수가 있다. 음반사 인디의 모체는 10년간 사회운동단체에서 활동하다가 대중음악씬에 발을 들여놓은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주체가 되어 만들어진 ‘뮤직센터21세기’8)였다. 이후 탄생된 인디는 “계약 기간은 1년이다. 손익분기점(3천장)을 넘기면 수익배분은 4 : 4 : 2(밴드 : 인디와 스튜디오 : 홍보비)로 한다. 밴드는 클럽 공연을 지속해야 한다. 인디가 망했을 때 인디를 인수한 사람의 의도가 애초의 인디의 의도와 맞지 않으면 음반의 판권은 밴드에게 간다”라는 뮤지션 측에 가장 큰 권리를 주는 명문화된 계약 조건을 내걸었다. 인디의 음반제작실장인 김종휘와 록밴드 허벅지의 보컬 안이영노는 인디 운영에서의 브레인이었는데, 이들은 1996년 봄에 시작된 각기 다른 클럽에 섰던 밴드들이 한 달에 한번씩 모여 릴레이로 공연을 벌였던 ‘땅밑 달리기’를 주도한 중추 세력이기도 했다. 이들은 SM(실천하는 문화전사)을 표방하며 클럽 씬과 언더그라운드 밴드들의 소식지인 ‘팬진 공’을 1997년에 ‘폐간’9)하는 일도 벌였다.


    1997년 10월 인디, 팬진 공, 개클련(개방적 클럽 연대)에 의해서 노노 클럽에서 열린 ‘인디 시연회’는 향후 인디에서 발매할 밴드들을 선정하는 오디션 성격의 이벤트였고, 여기서는 코코어, 프리다칼로, 허벅지, 앤, 마루, 오딘, 삼청교육대, 아무밴드가 선정되었다. 그 해 12월 27일, 28일에는 인디 주최로 정동 문화체육관에서 ‘인디 록 페스티벌(정축년 독립만세 사건)’이 열렸다. 이후 제작된 인디 음반들은 사운드랩 스튜디오에서 고종진 엔지니어가 레코딩/믹싱을 하였고, 앤, 오딘, 삼청교육대, 아무밴드의 프로듀서는 서울재즈아카데미의 강사이기도 했던 기타리스트 김성수가 맡았다.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인디가 만든 가장 큰 업적은 다들 생각에만 머문 ‘인디레이블’을 현실화 시켜서 이들 성과에 대한 논의 여부를 떠나서 ‘시스템’을 만들어 냈다는 점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인디는 1999년을 넘기지 못하고 운영을 중단했다.


    ▶ 강아지문화예술은 5명의 고등학교 동창생들(권병준, 이한별, 이효찬 등)이 자신들의 밴드인 강아지 독집 음반을 준비하다가 1997년에 만든 인디레이블이다. ‘인디’와 다른 점은 뮤지션들이 만든 음반사라는 점이고, 그로 인해 자신들이 직접 음반 제작(레코딩, 믹싱, 마스터링)에 참여함으로써 느낌에 충실한 음반을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러브마트의 데모 음반이나 허클베리 핀, 갱톨릭의 음반을 들어보면 알 수 있는데, 특히 허클베리 핀의 데뷔 음반은 완성도면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주위에서 도움을 주는 뮤지션들(99의 성기완, 노클루의 송현주, 도현호 등)이 있었다. 초기에는 방송 홍보 자체를 거부할 정도로 자존심이 강했고, 최종적으로 영상, 인터넷방송 등 총체적인 문화 사업을 꾀했다. 기존 시장에서 음반화되기 힘든 밴드들의 음악도 팬들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운영했지만 이들 또한 1999년을 넘기지 못했다.



    3) 문라이즈와 홈레코딩

    - 자주 레이블의 가속화 (2000~2004)


    2000년은 인디레이블 역사를 가르는 분수령이다. ‘현재’ 인디레이블들은 나름의 음악적인 색깔을 갖는 것을 고민하면서 기획, 창작, 프로듀싱, 세션, 레코딩 등의 부분에서 진일보를 거듭하고 있는데, 이 새로운 인디레이블의 시작점은 2000년에 만들어진 문라이즈(Moonrise Record)였다. 이 레이블은 델리스파이스의 김민규(기타, 보컬)가 본인의 솔로 프로젝트인 스위트피(Sweetpea)의 1집 [Never Ending Stories]를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로써 한국 대중음악계는 콘텐츠 면에서 몰라보게 풍부해지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1999년을 기점으로 초기 인디레이블을 주도했던 강아지문화예술과 인디가 시장의 한계에 부딪쳤고, 그로써 부진한 활동을 하면서 잠시 과도기가 있었다. 그 와중에 홈레코딩(home-recording) 기술과 관련 소프트웨어, PC(하드웨어) 발전에 영향 받아 인디레이블 자체의 패러다임도 서서히 변해가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대개의 인디뮤지션들은 ‘자신이 운영하지 않는’ 저자본 레이블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방식이었는데, 인디레이블이 메이저레이블과는 매니지먼트 방식이 다르더라도 소속 뮤지션들이 자본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러다가 스위트피가 문라이즈 레이블을 만든 2000년 이후로는 점차 홈레코딩이 보편화되면서 뮤지션들의 입장에서는 비로소 ‘자생적인’ 인디뮤직씬이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스위트피의 1집 [Never Ending Stories](2000)를 필두로 전자양 [Day Is Far Too Long](2001), 마이 언트 매리(My Aunt Mary) [2nd My Aunt Mary](2001), Where The Story Ends [안내섬광](2001), 토마스 쿡(Thomas Cook) [Time Table](2001)이라는 명반들을 발매하였던 문라이즈는 한국 인디씬을 한 단계 도약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문라이즈의 결과물들을 보고나서 뮤지션들은 새로운 인디레이블의 패러다임을 실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고, 자신이 음반제작의 주체가 되는 것이 장기적으로 음악을 계속할 수 있는 방편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여파는 2002년 이후로 인디씬에 나타나기 시작해서 무수한 ‘자가’(뮤지션 스스로 설립해서 운영하는) 인디레이블이 생겨났다.



    4) 음반기획과 음반프로듀싱

    - 음악적인 스타일로 각 레이블 차별화 시도 (2005~)


    홈레코딩으로 ‘음반제작’ 자체가 원활해지자 레이블들이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음반제작에 있어 ‘음악적인 전문성’을 부여하는 문제였다. 이는 다름 아닌 ‘음반기획’과 ‘음반프로듀싱’에 관한 문제였고, 이를 통해 각 레이블이 자신들만의 음악적인 스타일을 갖는 것이다. 즉, 차별화를 꾀하려는 것이었다. 파스텔뮤직, GMC, 일렉트릭 뮤즈, 튠테이블 무브먼트와 같은 레이블들이 대표적이다.






    1) 2007년 7월에 가슴네트워크에서 『인디음반가이드 2000』을 집필하기 위해서 조사한 한국 인디음반 발매 현황이다. 순전히 책임편집자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음반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이 보다는 약간 더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도 유통망을 통해서 발매된 인디음반들은 다 소장하고 있고, 일부 라이브클럽에서만 파는 음반들도 수시로 구입했기 때문에 큰 차이는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2009년 11월 시점에서 추정하건데 발매된 전체 인디음반은 2000장이 넘을 것으로 생각한다. 『인디음반가이드 2000』은 2010년에 발간할 예정으로 있다.


    2) ‘작품’으로서의 음반. 이는 ‘음악비평’의 시작과도 관계가 있다. 영미권의 대중음악사를 보더라도 본격적으로 음악비평이 시작된 것은 ‘앨범’ 제작이 보편화된 이후라고 할 수 있다.


    3) 이들은 ‘작품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최초이자 최후의 부류가 되어버렸다. 이후에는 90년대의 서태지 정도가 있었고(이도 그의 5집까지만), 대개의 경우 작품성은 상업성에 반하는 비극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4) ‘아이돌스타’ 시스템은 주류음악 매니지먼트에서의 위험 요소를 줄이는 방안으로 개발된 측면도 있다.


    5) 우드스탁, 놀이를 하는 사람들, 도어스 등과 같이 마니아 취향의 음악을 들으면서 술을 마시고, 때로는 자발적인 가무를 하던 공간.


    6) 물론 라이브클럽이 ‘아마추어 밴드들이 공연하는 장소’는 아니고, 클럽마다 오디션을 통해서 최소한 어느 정도 연주 수준을 가진 밴드들을 무대에 세운다. 하지만 1994~1995년 당시 아마추어 카피밴드일 수 밖에 없었던 그런지/펑크밴드들도 공연을 할 수 있었던 ‘새로운 개념’의 장소로 라이브클럽이 그 역할을 했다는 점이 중요한 의미이다. 그 결과 한국에서 인디뮤직씬이 탄생될 수 있었다.


    7) 이 음반에는 크라잉 넛과 옐로우 키친이 앨범을 반씩 나누어서 참여했다.


    8) 뮤직센터21세기에서는 투쟁적인 이데올로기의 록음악을 하는 메이데이, 이스크라, 천지인의 음반을 출시했다.


    9) 이 잡지는 ‘폐간호’부터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주소 : 서울시 종로구 낙원동 58-1 종로오피스텔 314호 TEL. 02-762-3335 FAX. 02-762-3371 가슴네트워크 기획․선정 「한국 대중음악의 현재」 시리즈 Vol.3 한국의 인디레이블 박준흠 책임편집...
  2. 사용자 삽입 이미지

    Ⅰ. 한국의 인디레이블 _ 창작 대중음악의 현재


    1. 지금 ‘인디레이블’을 다시 이야기 하는 이유 | 박준흠

    2. 한국에서 인디레이블의 성장 과정 | 박준흠

    3. 경향신문, 가슴네트워크 ‘한국의 인디레이블’ | 박준흠




    Ⅱ. 한국의 인디레이블 _ 역사

    * 본문의 레이블 배열순서는 ‘첫 번째 국내 뮤지션 음반 발매 연도’를 기준으로 정렬함



    ■ 1996년 발매 시작 레이블

    01. 인디(Indie) - 한국 최초로 실질적 인디레이블 시스템을 도입하다 | 최규성

    02. 석기시대(Stoneage Records) - 한국 인디 음악을 묵묵히 지켜 온 이름 | 홍정택

    03. 드럭 레코드(Drug Record) - 펑크의 시작. 그것은 인디의 시작 | 이대화


    ■ 1997년 발매 시작 레이블

    04. 강아지문화예술(Gang A.G) - 아티스트의 다양한 감성을 즐기다 | 김민규


    ■ 1998년 발매 시작 레이블

    05. 스컹크 레이블(Skunk Label) - 펑크뮤지션들은 궁극적으로 ‘자기가 배척되지 않는 세상’을 원한다 | 박준흠

    06. 카바레 사운드(Cavare Sound) - 한국 인디 씬의 스펙트럼을 넓히다 | 김양수

    07. 문화사기단 - 세상이 사기라 외치던 겁없던 그들 | 홍정택

    08. 라디오뮤직(Radio Music) - 미선이, 루시드 폴을 발굴한 홍대 포크의 산실 | 이대화


    ■ 1999년 발매 시작 레이블

    09. 쌈넷(ssamnet) - ‘쌈지의 눈’으로 검증시켜서 보여주는 역할이 문화예술과 관련된 쌈지의 입장이다 | 박준흠

    10. 마스터플랜(Master Plan) - 한국 힙합의 성지에서 전천후 음악발전소로 | 배순탁

    11. B-레코드(B-Record) - 라이브 클럽과 인디 레이블의 적절한 조합 | 김민규


    ■ 2000년 발매 시작 레이블

    12. GMC 레코드(GMC Records) - 10년을 독하게 이어 온 한국 하드코어 신의 중심 | 홍정택

    13. 벌룬애니들(Balloon & Needle) - 노이즈에 대한 꾸준하고 진지한 행보 | 차우진

    14. 튜브앰프 레코드(Tubeamp Records) - 뮤지션들의 ‘다음’을 위한 발판이 되고 싶다 | 홍정택

    15. 문라이즈(Moonrise Records) - 인디 레이블의 새로운 시작 | 김학선


    ■ 2001년 발매 시작 레이블

    16. 쥬신 프로덕션(Jusin Production) - 대한민국 익스트림 메탈의 역사와 꿈이 모여 있는 레이블 | 성우진

    17. 드림온(Dream On) - 용감한(?) 형제의 꿈과 음악적 열정을 담아 | 성우진


    ■ 2002년 발매 시작 레이블

    18. 롤리팝뮤직(Lollipop Music) - 2000년대 홍대 인디 팝의 신(新) 지류 | 이대화

    19. 리버맨뮤직(Riverman Music) - 전 세계 희귀음원을 찾아 여행하는 레이블 | 최규성


    ■ 2003년 발매 시작 레이블

    20. 비트볼 레코드(Beatball Records) - 열혈 음악 애호가의 진심을 담은 레이블 | 김민규

    21. 샤 레이블(Sha Label) - 화려함보다 중요한 건 뮤지션만의 개성! | 배순탁

    22. 에그뮤직(EGG Music) - Everlasting Gallery of Good Music | 성우진

    23. 도프뮤직(Dope Music) - 한국 헤비니스 음악의 중심 | 김학선

    24. 퀸 엔터테인먼트(Queen Entertainment) - 퀸이라는 라이브클럽을 중심으로 사업 다각화, 소속 뮤지션들의 앨범 제작 | 성우진

    25. 리듬온(Rhythm On) - 아날로그 음악을 수호하는 마지막 보루 | 최규성

    26. 비행선(Bihaengsun) - 자유롭게 맘 가는 대로 | 김민규

    27. 신의의지 레코드(Will Records) - 아티스트들의 음악세계를 존중하며 한국힙합 신을 이끌었던 레이블 | 강일권


    ■ 2004년 발매 시작 레이블

    28. 파스텔뮤직(Pastel Music) - 인디와 메이저 사이의 교두보 | 차우진

    29. 소울컴퍼니(Soul Company) - 음악과 시, 그리고 힙합이 만나는 그곳 | 강일권

    30. 빅딜 레코드(Big Deal Records) - 하드코어 힙합의 결정체들로 이루어진 집단 | 강일권

    31. 루핀 레코드(Lupin Records) - 레이블과 엔터테인먼트 사이의, 중도좌파 레이블 | 홍정택

    32. 핑퐁사운드(Pingpong Sound) - 포크에서 슈게이징, 일렉트로니카까지 | 김민규


    ■ 2005년 발매 시작 레이블

    33. 일렉트릭 뮤즈(Electric Muse) - 뮤지션 출신의 제작자가 건립한 인디 팝/록의 새로운 거점 | 최규성

    34. 붕가붕가 레코드(BGBG Records) - 지속가능한 그들의 빡센 취미생활 | 홍정택

    35. 해피로봇 레코드(Happy Robot Records) - 취향을 전략으로 삼는 레이블 | 차우진

    36. 타일뮤직(Tyle Music) - 가장 감각적이며 스타일리쉬한 레이블 | 김학선


    ■ 2006년 발매 시작 레이블

    37. 루비살롱 레코드(Rubysalon Record) - 우주를 향해 볼륨을 높여라 | 최민우

    38. 튠테이블 무브먼트(Tune Table Movement) - 둘러앉아 소통하는 음악 공동체를 향하여 | 최민우


    ■ 2007년 발매 시작 레이블

    39. 파고뮤직(FarGo Music) - 홍보와 마케팅에서 협력 관계를 갖는 새로운 운영방식 | 성우진




    Ⅲ. 부록


    2008 가슴어워드(Gaseum Awards) - 2008년 한국 대중음악 결산 | 박준흠




    Ⅰ. 한국의 인디레이블 _ 창작 대중음악의 현재 1. 지금 ‘인디레이블’을 다시 이야기 하는 이유 | 박준흠 2. 한국에서 인디레이블의 성장 과정 | 박준흠 3. 경향신문, 가슴네트워크 ‘한국의 인디레이...
  3. 사용자 삽입 이미지

    Ⅰ. 한국의 인디레이블 _ 창작 대중음악의 현재


    1. 지금 ‘인디레이블’을 다시 이야기 하는 이유



    문화기획은 ‘당대 문화예술’을 대중들에게 소개하는 작업이자 방법이다. 즉, 당대 예술가와 예술작품을 대중들에게 가장 유효적절한 방법으로 소개하는 작업이 핵심이다. 또한 그 작업을 통해서 기획자 자신보다는 대상이 빛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하는 도덕적인 책무도 따른다. 크게 보면 평론도 문화기획 안에 넣을 수가 있는데, 대중들에게 작품 가이드 작업을 통해서 해당 분야 문화상품 판매를 촉진시키는 산업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고, 영화나 음악 평론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래서 영화평론은 당대의 작가(감독)인 박찬욱, 김지운, 홍상수와 같은 이들을 끊임없이 호출하고 영화마니아는 이들의 작품들을 ‘지속적으로’ 소비한다. 그리고 대중음악에서도 영미권이나 일본의 음악평론은 같은 종류의 일들을 한다. 간단하게 얘기해서 해당 분야의 평론 작업은 특정 ‘작가’의 특정 ‘작품’을 ‘스테디셀러’로 만드는데 일조하는 작업이다. 이는 1960년대 알프레드 히치콕과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나 밥 딜런, 비틀즈, 롤링 스톤스의 음반들이 스테디셀러가 되어 끊임없이 소비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한국 대중음악계에서만은 이 부분이 결여되어 있는데, 이는 아직까지 대중음악을 ‘작가’와 ‘작품’이라는 개념 없이 ‘가수’와 ‘노래’ 중심으로만 인식하고 있는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모든 예술 장르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창작’ 부분이 대중음악에서는 도외시되고 있고, 한 가수를 평가할 때 ‘가창력’이나 따지는 넌센스가 발생한다. 적어도 1990년대 이후 한국에서도 한 영화를 평가할 때 출연 배우의 연기력 부분보다는 감독의 연출력과 시나리오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대중음악에서 ‘음악창작’에 대한 낮은 인식은 작품으로서의 ‘앨범’ 제작을 중요하게 여기는 뮤지션들에게는 치명적인 문제다.


    그래서 일반인들의 관점에서 질문한다면, 현재 한국 대중음악계에는 역량 있는 뮤지션들과 작품성이 뛰어난 앨범들이 존재하기나 할까? TV를 통해서 볼 수 있는 가수는 온통 아이돌그룹이거나 가요무대에 출연하는 트로트 가수 또는 왕년의 인기 가수 정도인데. 대답부터 얘기하면, 2000년대 현재 활동하는 뮤지션들의 수와 그들 작품의 수준은 오히려 90년대를 능가하고 있다. 2002년 이후 인디씬에 정착한 ‘홈레코딩’ 기반의 음반제작 환경은 뮤지션들에게 운신의 폭을 넓혀줘서 최소한 자본이 없어서 음반을 제작하지 못하는 시대를 종식시켰기 때문이다. 나아가 홈레코딩 관련 기술의 발전으로 뮤지션이 능력만 있다면 일반 스튜디오 작업에 부럽지 않게 녹음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현재 많은 인디 뮤지션들은 스스로 자신의 음반사를 만들어서 앨범 제작을 하고 있고, 이는 1990년대를 능가하는 결과물들이 나올 수 있는 바탕이 되고 있다. 단지 음악매체, 음악평론, 음악정책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음악관계자들마저도 많은 수가 “한국에서는 ‘들을만한 음반’들이 사라지고 있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정말로 그럴까? 내가 보는 견지로는 절대 그렇지 않다. 음반시장이 무너졌다고 얘기되는 현재도 인디씬에서는 끊임없이 좋은 뮤지션들과 좋은 앨범들이 양산되고 있다는 점이 그에 대한 반증일뿐만 아니라 한국대중음악계에서의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시스템의 근간에는 ‘인디레이블’이 존재한다. 그래서 오히려 지금은 ‘인디레이블’을 통해서 현재 인디음악뿐만 아니라 대중‘음악’(‘엔터테인먼트’가 아니라!) 전반의 현주소를 살펴볼 수 있고, 더욱이 한국 ‘음악창작자’들의 지형도를 정확히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음악관계자가 “들을만한 음반들이 사라지고 있다”라는 식으로 얘기한다면
    1), 그건 자신의 태만을 드러내는 것이거나 본인 스스로 ‘음악을 듣는 귀’가 취약함을 얘기하는 것일 수도 있다.


    현재 인디레이블들은 나름의 음악적인 색깔을 갖는 것을 고민하면서 기획, 창작, 프로듀싱, 세션, 레코딩 등의 부분에서 진일보를 거듭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은 일천하다. 대중음악에서도 ‘역시 중요한 것은 창작’이라면, 이제라도 인디레이블에 대한 정확한 재조명이 필요하다. 이들에 대한 재조명은 2000년대 현재 한국 대중음악씬에서 창작(콘텐츠 기획&생산)의 의미를 다시 짚어보고, 창작자, 뮤지션, 음악생산의 지형을 살펴보는 것이다. 이게 문화기획자로써 또한 음악평론가로써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래서 “진짜 문제는 음악생산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매체, 기획자, 정책당국자, 소비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질문이 이번 연재를 기획한 배경이다.


    이번 연재에서는 ‘인디레이블’을 통해서 현재 인디음악뿐만 아니라 대중음악 전반의 현주소를 살펴보고, 더욱이 한국 ‘음악창작자’들의 지형도를 정확히 살펴보려고 한다. 연재는 총30회 진행될 예정이고, 한주에 1개 레이블을 소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나 상황에 따라서는 2개의 레이블을 묶어서 진행할 수도 있다. 발매한 음반들의 음악적인 완성도나 스타일, 역사성을 감안하여 인디레이블들을 선정했고, 해당 레이블을 잘 설명할 수 있는 필자가 글을 쓰는 방식을 택했다. 그리고 연재가 완료된 후에는 가슴네트워크에서 연재물들을 모아서 단행본 출판을 할 예정이다.


    (※ 이 글은 2008년 7월에 경향신문 연재 시작에 앞서 쓴 서문 형태의 글입니다. 2009년 7월 시점에서 읽어보니 그동안 한국 인디음악씬에 대한 중앙 매체와 대중의 주목도가 몰라볼 정도로 커졌다는 점이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이는 1년 동안에 인디씬에 주목할 만한 뮤지션들이 갑자기 늘어난 게 아니라 그간 우리시대에 ‘어떤’ 흐름이 생겨났는데, 인디씬이 거기에 부합한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추측하기에 그 ‘어떤’ 흐름은 세상과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에 관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엔터테인먼트 안에서도 알갱이가 있어 보이는 것을 찾는 경향이 있는데, 적어도 ‘콘텐츠의 진정성’으로 승부하려는 인디음악은 이에 부합합니다. 1990년대 말의 인디씬은 전체적인 완결성의 부족으로 한 때의 흥미 거리로만 머물렀지만, 이미 2004년 무렵부터의 인디씬은 완결성과 함께 다양성 면에서도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현재 인디음악에 대한 늘어난 관심은 예정된 것이었고, 주목받고 있는 인디뮤지션들이 현재 한국 대중음악을 대표합니다. 그런 이유로 이 흐름은 ‘정착’2)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먼저 지적했던 “진짜 문제는 음악생산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매체, 기획자, 정책당국자, 소비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질문의 답은 이미 세상이 제게 보여준 것 같습니다. 이제 “한국에서는 ‘들을만한 음반’들이 사라지고 있다”라는 시대착오적인 얘기들은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박준흠 / 가슴네트워크 대표



    2. 한국에서 인디레이블의 성장 과정



    1) 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붕괴와 대안적인 활동 방안

    - 인디뮤직 씬의 시작 (1990~1996)



    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붕괴와 대안적인 활동 방안의 필요성, ‘인디뮤직’이 갖는 의미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앨범3) 개념의 음반이 나온 것은 1964년에 발표된 신중현의 애드 훠(Add 4) 1집 [빗속의 여인](엘케엘레코드) 이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당시 매우 특이한 경우였고, 제대로 된 창작물을 담은 앨범들이 발표된 시기는 70년대 초반의 모던포크 시대부터다. 그것이 바로 한대수, 김민기, 양병집, 서유석, 양희은의 초기작들이었고, 록에서는 신중현의 음반들이 있었다. 그러나 70년대는 앨범으로서의 음반이 처음으로 발표된 시기 정도라는 의미를 가질지언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평가할만한 창작물은 소수의 뮤지션들에게서만 보일뿐이었고, 또한 프로듀싱, 세션, 레코딩과 같이 앨범 평가에서의 중요한 개념은 특별히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내가 아는 한 지금의 프로듀싱, 세션, 레코딩의 개념이 보이기 시작한 앨범은 1984년에 발표된 따로 또 같이 2집이 처음이다. 이전에 작은거인이 2집(1981년)에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세션과 레코딩 사운드를 들려주었지만 그건 원맨밴드 성격이었고, 엔지니어도 지다가와 마사토라는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한국의 세션, 레코딩 역사에 넣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앨범이 나온 시기를 80년대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80년대는 다양한 뮤지션들과 다양한 음악들이 조화를 이루었던 시기였고, 그래서 뛰어난 음반들도 많이 나왔다. 한마디로 언더그라운드와 오버그라운드가 조화를 이루었던 시기였고, 이 때 나온 뮤지션이 김현식, 어떤날, 시인과촌장, 신촌블루스, 한영애, 장필순 등이었다. 이들은 ‘언더그라운드의 거장’으로 얘기되면서 음악성도 높이 평가받았고, 또한 음반도 10만장 단위로 팔았다.
    4) 아이돌스타들만이 주로 주목받는 현재 음악환경을 생각했을 때 이는 매우 경이로운 사실이다. 당시는 뮤지션을 음악으로 평가하는 음악수용자들이 무척 많았거나, 음악수용자들에게 음악으로 승부하는 음반제작 풍토가 존재했던 것 같다. 뮤지션들에게는 무척이나 좋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1992년 서태지 등장 이후 한국 대중음악계는 아이돌스타를 양산하는 시스템으로 바뀌었고, 이는 단기간에 가장 손쉽게 큰 돈을 버는 사업으로 인식되었다.
    5) 그래서 대중음악계에서의 가수 선발 기준은 음악성이 아니라 외모와 같은 스타성으로 바뀌었고, 철저히 10대들을 주요 고객으로 생각하는 기획시스템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 운영을 위해 지속적으로 새로운 ‘연예인’들이 필요했던 공중파방송에서도 이를 부추킨 측면이 있다. 그 결과 80년대 언더그라운드 뮤지션 부류는 더 이상 음반 제작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80년대 언더그라운드 음악씬의 붕괴였고, 한국 대중음악사 측면에서 보면 음악적인 자산을 잃어버리는 커다란 손실이었다. 1990년 11월 1일에 김현식이 사망했고, 유작 앨범인 6집은 100만장 이상 팔렸는데, 이는 향후 더 이상 나오지 않을 언더그라운드 음악씬의 기록일 것이다.


    결국 ‘음악적인 진정성’을 자신의 음악에 투영하고 싶어 하는, 즉 ‘뮤지션’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나 그런 음악을 듣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대안적인 시스템’을 생각했는데, 이것이 ‘인디뮤직(씬)’이다. 여기서 ‘대안적’이라는 말은 음악 미학 측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음반 제작을 포함한 음악 활동 시스템’을 의미한다. 기존의 음반제작자들이 ‘창작에서 간섭받지 않으면서 완성도 높은 앨범 제작을 추구하는’ 언더그라운드 뮤지션 부류에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뮤지션들로서는 어쩔 수 없이 자구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스스로 음반을 만들거나 적어도 뮤지션이 앨범을 만드는데 있어 간섭을 하지 않는 제작자 부류를 원하게 되었다. 이것이 ‘인디레이블’이 갖는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즉, 인디는 진정한 뮤지션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택하는 공간이자 ‘시스템’이다. 그래서 ‘인디’를 얘기할 때 ‘음악창작’ 부분을 빼고 얘기하면 타당하지 않다.



    ‘인디뮤직 씬’의 탄생, 라이브클럽 드럭


    90년대 초반 대안적인 문화와 시스템을 바라던 사람들이 실험을 하기 시작한 곳은 홍대 주변이었다. 당시 ‘발전소’와 같은 음악과 미술, 춤이 어우러지는 클럽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1994년에 생긴 ‘드럭’은 인디밴드들이 공연을 하는 라이브클럽의 시작이었다. 사실 드럭은 처음부터 라이브클럽이 아니었다. 클럽 드럭은 1994년에 영국의 전설적인 펑크밴드 클래시(The Clash)의 [London Calling](1979) 재킷 사진이 복사된 4절지에 ‘펑크록의 이상’이 격문처럼 쓰여진 포스터를 문에 붙이고 개장하였지만, 당시는 정기적인 공연을 염두에 두거나 인디뮤지션들의 근거지 개념은 없었다.


    초기 드럭의 공간은 뮤직비디오가 나오는 조그만 TV들을 소도구로 이용한 ‘바/카페’의 개념이었고, 단지 한쪽에 밴드들이 연주를 할 수 있는 그믈망이 앞에 처진 작은 장소가 마련되었다는 점이 달랐다. 이는 당시 신촌의 현대백화점 뒷쪽에 있었던 록카페
    6)들의 확장된 개념의 클럽이었다. 하지만 너바나의 여파로 그런지록이 인기를 얻고 70년대 펑크가 재조명을 받으면서, 특히 1994년 4월 8일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이 사망하여 ‘그런지록의 전설’로 남으면서 한국에서도 카피밴드 수준의 그런지록과 펑크밴드들이 생겨났다. 이들의 연주가 수용될 수 있었던 드럭은 흔히 말해 드롭아웃(drop-out)들의 해방구로 회자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당시는 ‘공연장’의 개념만 있어서 어느 정도 전문적인 수준의 연주를 하는 밴드들(대개 헤비메틀 밴드들)은 무대에 설 수 있었지만 그 이하 수준의 밴드들은 대중 앞에서 공연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웠기 때문이다.7)


    1995년 4월에는 드럭에서 커트 코벤인 1주기 추모공연이 열렸고, 이 때를 즈음해서 ‘드럭 밴드’라는 이름으로 정기 공연 체제가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이 해부터 크라잉 넛, 언니네 이발관, 델리 스파이스, 코코어 등이 연주를 하기 시작했고, 그 중에서도 크라잉 넛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드럭은 점차 펑크록 중심의 라이브클럽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드럭이 펑크록의 메카로 자리 잡은 것은 1996년에 홍대 주차장거리와 명동에서 있었던 모잡지 주최의 ‘스트리트 펑크쇼’에 드럭의 밴드들이 주축이 되어 참여하면서부터이다. 이 당시 보여주었던 관중들의 폭발적인 열기는 매체를 타고 전파되었고, 이런 호응을 얻어서 드럭에서 처음 만든 음반이 바로 [Our Nation]
    8)이었다. 이게 최초의 인디 앨범으로 얘기되고 있고, 그 해에는 ‘배드 테이스트’의 [One Man Band... Badtaste]도 발매되었다.




    2) 인디와 강아지문화예술

    - 인디레이블의 도약기 (1997~1999)


    인디레이블은 거대 상업 논리 하의 음악비즈니스 시스템에서에서 뮤지션에게 그나마 자유를 주는데, 좀 더 자신의 스타일을 지킬 수 있는 음악을 할 수 있게 하는 장치가 되기 때문이다. 이는 상업성만을 생각하게끔 되어 있는 구조를 가진 메이저 음반사가 할 수 없는 일들이 인디레이블 체제에서는 가능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인디레이블은 마이너 성향의 뮤지션에게 있어 대중에 대한 창구일 수가 있고, 이것이 인디레이블 존재에 대한 당위성이다. 인디와 강아지문화예술은 한국에서 인디레이블 시스템이 정착되는데 있어 결정적인 공헌을 했던 레이블들이다.


    ▶ 인디(Indie)는 드럭, 재머스에 이은 인디레이블로 출발했지만 앞의 두 음반사가 자신들의 클럽과 클럽 밴드들을 홍보하려는 이유로 출발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제한된 범위에서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인디는 국내 최초의 ‘인디레이블’이라고도 할 수가 있다. 음반사 인디의 모체는 10년간 사회운동단체에서 활동하다가 대중음악씬에 발을 들여놓은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주체가 되어 만들어진 ‘뮤직센터21세기’9)였다. 이후 탄생된 인디는 “계약 기간은 1년이다. 손익분기점(3천장)을 넘기면 수익배분은 4 : 4 : 2(밴드 : 인디와 스튜디오 : 홍보비)로 한다. 밴드는 클럽 공연을 지속해야 한다. 인디가 망했을 때 인디를 인수한 사람의 의도가 애초의 인디의 의도와 맞지 않으면 음반의 판권은 밴드에게 간다”라는 뮤지션 측에 가장 큰 권리를 주는 명문화된 계약 조건을 내걸었다. 인디의 음반제작실장인 김종휘와 록밴드 허벅지의 보컬 안이영노는 인디 운영에서의 브레인이었는데, 이들은 1996년 봄에 시작된 각기 다른 클럽에 섰던 밴드들이 한 달에 한번씩 모여 릴레이로 공연을 벌였던 ‘땅밑 달리기’를 주도한 중추 세력이기도 했다. 이들은 SM(실천하는 문화전사)을 표방하며 클럽 씬과 언더그라운드 밴드들의 소식지인 ‘팬진 공’을 1997년에 ‘폐간’10)하는 일도 벌였다.


    1997년 10월 인디, 팬진 공, 개클련(개방적 클럽 연대)에 의해서 노노 클럽에서 열린 ‘인디 시연회’는 향후 인디에서 발매할 밴드들을 선정하는 오디션 성격의 이벤트였고, 여기서는 코코어, 프리다칼로, 허벅지, 앤, 마루, 오딘, 삼청교육대, 아무밴드가 선정되었다. 그 해 12월 27일, 28일에는 인디 주최로 정동 문화체육관에서 ‘인디 록 페스티벌(정축년 독립만세 사건)’이 열렸다. 이후 제작된 인디 음반들은 사운드랩 스튜디오에서 고종진 엔지니어가 레코딩/믹싱을 하였고, 앤, 오딘, 삼청교육대, 아무밴드의 프로듀서는 서울재즈아카데미의 강사이기도 했던 기타리스트 김성수가 맡았다.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인디가 만든 가장 큰 업적은 다들 생각에만 머문 ‘인디레이블’을 현실화 시켜서 이들 성과에 대한 논의 여부를 떠나서 ‘시스템’을 만들어 냈다는 점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인디는 1999년을 넘기지 못하고 운영을 중단했다.


    ▶ 강아지문화예술은 5명의 고등학교 동창생들(권병준, 이한별, 이효찬 등)이 자신들의 밴드인 강아지 독집 음반을 준비하다가 1997년에 만든 인디레이블이다. ‘인디’와 다른 점은 뮤지션들이 만든 음반사라는 점이고, 그로 인해 자신들이 직접 음반 제작(레코딩, 믹싱, 마스터링)에 참여함으로써 느낌에 충실한 음반을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러브마트의 데모 음반이나 허클베리 핀, 갱톨릭의 음반을 들어보면 알 수 있는데, 특히 허클베리 핀의 데뷔 음반은 완성도면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주위에서 도움을 주는 뮤지션들(99의 성기완, 노클루의 송현주, 도현호 등)이 있었다. 초기에는 방송 홍보 자체를 거부할 정도로 자존심이 강했고, 최종적으로 영상, 인터넷방송 등 총체적인 문화 사업을 꾀했다. 기존 시장에서 음반화되기 힘든 밴드들의 음악도 팬들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운영했지만 이들 또한 1999년을 넘기지 못했다.




    3) 문라이즈와 홈레코딩

    - 자주 레이블의 가속화 (2000~2004)


    2000년은 인디레이블 역사를 가르는 분수령이다. ‘현재’ 인디레이블들은 나름의 음악적인 색깔을 갖는 것을 고민하면서 기획, 창작, 프로듀싱, 세션, 레코딩 등의 부분에서 진일보를 거듭하고 있는데, 이 새로운 인디레이블의 시작점은 2000년에 만들어진 문라이즈(Moonrise Record)였다. 이 레이블은 델리스파이스의 김민규(기타, 보컬)가 본인의 솔로 프로젝트인 스위트피(Sweetpea)의 1집 [Never Ending Stories]를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로써 한국 대중음악계는 콘텐츠 면에서 몰라보게 풍부해지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1999년을 기점으로 초기 인디레이블을 주도했던 강아지문화예술과 인디가 시장의 한계에 부딪쳤고, 그로써 부진한 활동을 하면서 잠시 과도기가 있었다. 그 와중에 홈레코딩(home-recording) 기술과 관련 소프트웨어, PC(하드웨어) 발전에 영향 받아 인디레이블 자체의 패러다임도 서서히 변해가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대개의 인디뮤지션들은 ‘자신이 운영하지 않는’ 저자본 레이블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방식이었는데, 인디레이블이 메이저레이블과는 매니지먼트 방식이 다르더라도 소속 뮤지션들이 자본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러다가 스위트피가 문라이즈 레이블을 만든 2000년 이후로는 점차 홈레코딩이 보편화되면서 뮤지션들의 입장에서는 비로소 ‘자생적인’ 인디뮤직씬이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스위트피의 1집 [Never Ending Stories](2000)를 필두로 전자양 [Day Is Far Too Long](2001), 마이 언트 매리(My Aunt Mary) [2nd My Aunt Mary](2001), Where The Story Ends [안내섬광](2001), 토마스 쿡(Thomas Cook) [Time Table](2001)이라는 명반들을 발매하였던 문라이즈는 한국 인디씬을 한 단계 도약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문라이즈의 결과물들을 보고나서 뮤지션들은 새로운 인디레이블의 패러다임을 실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고, 자신이 음반제작의 주체가 되는 것이 장기적으로 음악을 계속할 수 있는 방편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여파는 2002년 이후로 인디씬에 나타나기 시작해서 무수한 ‘자가’(뮤지션 스스로 설립해서 운영하는) 인디레이블이 생겨났다.




    4) 음반기획과 음반프로듀싱

    - 음악적인 스타일로 각 레이블 차별화 시도 (2005~)


    홈레코딩으로 ‘음반제작’ 자체가 원활해지자 레이블들이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음반제작에 있어 ‘음악적인 전문성’을 부여하는 문제였다. 이는 다름 아닌 ‘음반기획’과 ‘음반프로듀싱’에 관한 문제였고, 이를 통해 각 레이블이 자신들만의 음악적인 스타일을 갖는 것이다. 즉, 차별화를 꾀하려는 것이었다. 파스텔뮤직, GMC, 일렉트릭 뮤즈, 튠테이블 무브먼트와 같은 레이블들이 대표적이다.



    박준흠 / 가슴네트워크 대표




    3. 경향신문, 가슴네트워크 ‘한국의 인디레이블’



    ▶ 제목 : 가슴네트워크 선정 ‘한국의 인디레이블’

    ▶ 기획 : 경향신문(khan.co.kr), 가슴네트워크(gaseum.co.kr)

    ▶ 진행 : 가슴네트워크

    ▶ 게재 : 2008년 7월 ~ 2009년 2월, 경향신문 주말섹션



    한국 ‘음악창작자’들의 지형도를 살펴봄


    ‘한국의 인디레이블’ 프로젝트를 생각한 것은 2008년 4월경이었다. 당시 나는 2008 광주청소년음악페스티벌 총감독을 맡아서 광주광역시에 내려가 있을 때였다. 바로 전에 진행을 맡았던 네이버 오늘의뮤직 내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인터뷰’는 3월부터 연재가 시작되었고, 이미 연재 전에 인터뷰 진행은 거의 끝났었기 때문에 약간은 한가로울 때였다.(물론 축제 준비 자체는 무척 바빴지만.) 그래서 가슴네트워크에서 당분간 매체사업을 해보겠다고 결심한 터였기 때문에 새로운 아이템을 생각했다.


    이전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서 음반과 뮤지션을 다뤘기 때문에 이번에는 ‘음반사와 음반사 대표’를 한번 다뤄보고 싶었다. 여태까지 대중음악 관련 기획기사를 보면 거의 대부분이 신보를 냈거나 공연을 준비 중인 뮤지션과 그의 음반 중심이라서 뭔가 다양성 면에서 부족했다. 여기에는 결정적으로 ‘대중음악 기획’에 관한 점이 빠져 있었다. 사실 어떤 뮤지션이 아무리 훌륭한 노래를 만들어도 그걸 ‘음반기획’ 측면으로 연결시키지 못하면 대중들은 제대로 전달받지 못한다. 뛰어난 뮤지션을 알아보고 그에 걸맞는 음반기획을 해주는 음반제작자는 음악씬에서 무척 중요한 존재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1990년대 들어와서 그런 음반기획자들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열악한 상태로 전락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서는 ‘음반기획 측면에서의 대안적인 시스템’인 인디음반 시스템이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더욱이 2000년대 들어서서 홈레코딩 음반제작 시스템의 급격한 발전으로 뮤지션 스스로가 자신의 레이블을 만드는 것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고, 2003년 무렵부터는 인디레이블의 숫자가 점진적으로 늘어났다.


    이번 연재 기획인 ‘한국의 인디레이블’은 2000년대 들어서서 새롭게 대두된 인디레이블의 현재 상황과 ‘성장 이유’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방법론적으로는 음반기획 측면에서 인디레이블 대표를 인터뷰하는 방식을 택했다. 또한 해당 인디레이블에서 발매된 음반들을 소개함으로써 대중음악을 뮤지션과 음반을 넘어서서 ‘기획과 제작’ 측면에서 조망하려고 했다. 이번에 다룬 39개 인디레이블의 선정 기준은 창작적으로 뛰어난 음반이 얼마나 나왔는지가 관건이었다.(기타 음악적으로 조명할만한 가치를 갖는 레이블도 선정 대상이었다.) 그래서 이번 39개 인디레이블들에 대한 기록은 현재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주목할 만한 음악창작자들이 어떤 식으로 분포하고 있는지에 대한 고찰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한국 음악창작자들의 지형도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원래 타이틀도 “한국 대중음악의 현재 - ‘인디레이블’을 통해서 살펴본 인디음악의 현주소와 한국 음악창작자들의 지형도”였다.


    박준흠 / 가슴네트워크 대표




    ■ 연재 참여 필자(총 12명)와 담당 인디레이블(총 39개 레이블)


    - 강일권(웹진 리드머 편집장) : 빅딜 레코드, 소울컴퍼니, 신의의지 레코드

    - 김민규(일렉트릭 뮤즈 대표) : 강아지문화예술, 비트볼 레코드, 비행선, 핑퐁사운드, B-레코드

    - 김양수(월간 PAPER 기자 & 만화가) : 카바레 사운드

    - 김학선(웹진 보다 편집장) : 도프뮤직, 문라이즈, 타일뮤직

    - 박준흠(가슴네트워크 대표) : 스컹크 레이블, 쌈넷

    - 배순탁(음악평론가) : 마스터플랜, 샤 레이블

    - 성우진(음악평론가) : 드림온, 에그뮤직, 쥬신 프로덕션, 퀸 엔터테인먼트, 파고뮤직

    - 이대화(웹진 이즘 편집장) : 드럭 레코드, 라디오뮤직, 롤리팝뮤직

    - 차우진(음악평론가) : 벌룬앤니들, 파스텔뮤직, 해피로봇 레코드

    - 최규성(대중문화평론가) : 리듬온, 리버맨뮤직, 인디, 일렉트릭 뮤즈

    - 최민우(웹진 [weiv] 편집장) : 루비살롱 레코드, 튠테이블 무브먼트

    - 홍정택(가슴네트워크 필자) : 루핀 레코드, 문화사기단, 붕가붕가 레코드, 석기시대, 튜브앰프 레코드, GMC 레코드



    1) 그렇다면 2008년 상반기만 해도 인디씬에서 발매된 비둘기 우유 [Aero](일렉트릭 뮤즈), 뎁(Deb) [Parallel Moons](카바레사운드), 로로스(Lolo's) [Pax](튠테이블 무브먼트), DJ Shinin' Stone [The Hypnotize LP](스프링 돌핀), V.A. [한대수 트리뷰트 - 물 좀 주소](타일뮤직)와 같은 의미 있는 앨범들은 어떻게 얘기해야 할 것인가?


    2) ‘지속’이 아니다. ‘지속’이라는 관점은 한국 대중음악씬에서 인디음악을 따로 보는 시각이다.


    3) ‘작품’으로서의 음반. 이는 ‘음악비평’의 시작과도 관계가 있다. 영미권의 대중음악사를 보더라도 본격적으로 음악비평이 시작된 것은 ‘앨범’ 제작이 보편화된 이후라고 할 수 있다.


    4) 이들은 ‘작품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최초이자 최후의 부류가 되어버렸다. 이후에는 90년대의 서태지 정도가 있었고(이도 그의 5집까지만), 대개의 경우 작품성은 상업성에 반하는 비극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5) ‘아이돌스타’ 시스템은 주류음악 매니지먼트에서의 위험 요소를 줄이는 방안으로 개발된 측면도 있다.


    6) 우드스탁, 놀이를 하는 사람들, 도어스 등과 같이 마니아 취향의 음악을 들으면서 술을 마시고, 때로는 자발적인 가무를 하던 공간.


    7) 물론 라이브클럽이 ‘아마추어 밴드들이 공연하는 장소’는 아니고, 클럽마다 오디션을 통해서 최소한 어느 정도 연주 수준을 가진 밴드들을 무대에 세운다. 하지만 1994~1995년 당시 아마추어 카피밴드일 수 밖에 없었던 그런지/펑크밴드들도 공연을 할 수 있었던 ‘새로운 개념’의 장소로 라이브클럽이 그 역할을 했다는 점이 중요한 의미이다. 그 결과 한국에서 인디뮤직씬이 탄생될 수 있었다.


    8) 이 음반에는 크라잉 넛과 옐로우 키친이 앨범을 반씩 나누어서 참여했다.


    9) 뮤직센터21세기에서는 투쟁적인 이데올로기의 록음악을 하는 메이데이, 이스크라, 천지인의 음반을 출시했다.


    10) 이 잡지는 ‘폐간호’부터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Ⅰ. 한국의 인디레이블 _ 창작 대중음악의 현재 1. 지금 ‘인디레이블’을 다시 이야기 하는 이유 문화기획은 ‘당대 문화예술’을 대중들에게 소개하는 작업이자 방법이다. 즉, 당대 예술가와 예...

  4. 박준흠 / 가슴네트워크 대표, 문화기획자


    사용자 삽입 이미지

    1992년 10월


    내 입장에서 보면, 개인적인 음악 청취 이력의 변동과 한국 인디음악 씬의 시작이 운명적으로(?) 맞물린다고 주장하고 싶다. 1992년 이 시기는 한국에서 ‘대중문화의 시대’가 막 꽃을 피우려던 시기였고, 그 즈음 문화계간지 상상, 리뷰 등도 창간되었으며, 문예아카데미 같은 곳에서 대중음악을 포함한 대중문화 강좌가 생겨났다. 그러면서 대중음악이 진지한 비평 대상이자 문화연구의 대상으로 편입되었는데, 이는 기존 음악평론가의 관점과는 다른 종류의 글들이었다.


    신촌 일원 음악 씬에도 변화가 있었는데, 바로 ‘록카페’ 문화가 생성된 것이었고, 이에 대한 연구는 밴드 허벅지의 리더였던 안이영노의 석사논문 등에서 볼 수 있다. 내 경우는 그 무렵까지 집에서 혼자서 음악을 듣다가 드디어 밖에서 음악 교우들을 찾으려고 음악감상 모임에 가입했는데, 그게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내 인생 항로를 결정적으로 바꾸는데 일조한 음악마니아 모임이었다. 이게 제갈량이 세상에 출사표를 던진 것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내 나름 많은 기대와 설레임으로 그 모임을 찾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이 모임은 신촌 현대백화점 뒤에 위치한 ‘우드스탁’이라는 록카페에서 매월 첫째, 셋째 일요일 2시에 음악감상회 겸 담소 등등을 했었는데, 돌아가면서 2~3명이 각자 50분 정도 분량의 감상회 준비를 해오는 방식이었다. 초기 4~5년은 매우 열심히들 참여했고, 지극정성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준비하고, 소개했으며 스터디모임 비슷한 것까지도 시도를 했었다. 때때로 주변의 록카페를 빌려서 밤새 놀기도 하고, MT 가서도 음악 듣던 기억이 난다.


    내가 이 모임을 알게 된 것은 월간음악잡지 핫뮤직 독자게시판에서 모임 창단에 관한 소개글을 보고서였고, 당시 ‘음악마니아로서의 매너리즘’에 어느 정도 빠져있던 터라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던 욕구가 있었다. 정말 어려서부터 팝음악을 듣기 시작해서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포크, 퓨전재즈, 월드뮤직, 올드록, 하드록, 스래쉬․데스 등 온갖 종류의 헤비메틀에 이어 40~50년대 스탠다드 재즈까지 어느 정도 섭렵을 하고 나니 더 이상 새롭게 들을 음악이 없다는 것에 대한 갑갑증이 그 매너리즘의 원인이었다. 어쩌면 고등학생 시절부터 대중음악 관련 일을 하고 싶었던 내게 30살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으니, 어느 정도 조급증 비슷한 것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 때 마침 내게 다가온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의 돌파구였다.


    이 모임 음악감상회를 통해서 몇 가지를 깨달은 것이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음악적인 트렌드’(정확하게 말해서 ‘현재의 음악을 듣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당시 모임에서도 최고령(?)이었고, 음악청취 스펙트럼도 다른 이들보다 훨씬 넓었을 뿐만 아니라, 세션이나 레코딩 상태 같은 것에 집중해서 들었기 때문에 흔히 말해 ‘제대로 된 음악’에 대한 감식안이 꽤 있다고 자부하는 편이었다. 국내뿐만 아니라 영미권 대중음악 거장들의 연주를 집중적으로 들었고, 음악잡지 보면서 남들이 좋다고 하는 음악은 어떻게든 들으려고 무던히도 애썼던 기간이 물경 15년이나 되니 나름 그 방면의 고수가 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모임 동생들이 그 당시 영미권의 주류 대중음악권으로 막 편입되기 시작했던 얼터너티브록, 펑크 음악을 소개하는 것을 들으면서 한동안 혼란에 빠졌었다. 나 같은 올드록 마니아들은 짐작하겠지만, 올드록 마니아 입장에서 얼터너티브록, 특히 펑크는 음악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나 레드 제플린(Led Zeppelin)과 같은 거대한 스케일의 기가 막히게 연주하고, 매우 훌륭하게 녹음된 음반들을 중심으로 듣던 음악마니아들은 이와 반대편에서 다른 음악적 가치를 추구하는 펑크는 그냥 소음 비슷했다. 1992년 당시를 회상하면, 영미권에서 너바나(Nirvana)의 전설적인 히트 앨범인 [Nevermind]에 왜 광분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랬으니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 클래쉬(The Clash)와 같은 ‘펑크 거장’의 음악들조차도 흥미가 없는 것이 당연했다. 1980년대 영미권의 언더그라운드, 컬리지음악 씬에서 움트기 시작한 가장 중요한 음악적인 흐름인 얼터너티브 음악에 둔감했다. 지금 지산밸리록페스티벌을 운영하는 옐로우 나인의 김형일대표도 모임 일원이었는데, 그가 소개하는 소닉 유스(Sonic Youth)의 [Dirty] 앨범에 수록된 <100%>를 처음 들었을 때 정말 ‘뜨악’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던 내가 4~5개월의 꾸준한 교화(?) 기간을 거치면서 1993년 봄 즈음에는 나 역시 얼터너티브록 팬으로 변했던 것 같다. 여기에는 R.E.M. 광팬이었던 박모양이 꾸준히 던져준 R.E.M. 음악의 영향도 컸다.


    결국 나는 운이 좋아서 당시 ‘음악적인 트렌드’에 충실했던 모임 동생들 덕분에 80~90년대의 중요한 대중음악 트렌드를 체감할 수 있었고, 더 중요한 것은 ‘몸으로 느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지금껏 음악평론가로 지내면서도 ‘콤플렉스’가 없는 편이다. 즉, ‘현재의 음악’을 단지 직업적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고, 좋아하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글을 쓸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현재의 음악’을 하는 ‘당대 뮤지션’을 발굴해서 조명해줘야 하는 소임을 가진 음악평론가에게는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단지 음악마니아라면 자기 취향 자체에만 충실해도 되기 때문에 ‘음악적인 트렌드’가 그리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하지만 크게는 자국의 대중음악산업까지 염두에 두어야 하는 음악평론가는 이 부분이 직업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이는 음악 모임을 통해서 우연찮게 깨달은 점이지만, 그 깨달음은 대중음악계 주변부에만 머물던 내게 중앙으로 진입할 수 있는 용기를 준 것 같다. 그래서 1997년에 대중음악전문지 《서브》를 만들던 당시부터 음악평론가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동시대 평론’을 해야 한다는 점이었고, 그 때까지도 다른 음악잡지에서 별로 다루지 않았던 영미권의 얼터너티브 음악과 한국 대중음악/인디음악을 주요하게 다루었다. 또한 1999년 11월에 가슴네트워크를 오픈할 때 가졌던 모토가 ‘지금, 여기, 우리의 가슴 열기’였다. 기억할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다시 돌아와서, 『한국의 인디레이블』 머리말에서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한국에서 ‘인디음악’과 ‘인디레이블’은 현재 어떤 의미인가?”이다. 인디음악을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 ‘한국 음악창작자의 역사’에서의 현재 지점으로 보는 시각은 고사하고, ‘현재 트렌드’(현재의 음악)로 보는 시각은 얼마나 있을런지. 1996년부터 시작된 1차 인디음악 붐은 다분히 언론의 선정적인 관심 때문이었지 음악 자체에 대한 관심 때문은 아니었다. 그래서 1999년이 되니 신기하게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매체의 관심도가 급격하게 떨어졌다. 이게 2007년까지 이어져 오다가 2008년에 와서는 장기하와 주변으로 인해서 다시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고 나서는 연초에 내게 몇몇 인터뷰 요청이 있었는데, 주요한 물음은 “장기하의 인기가 시들면 인디음악 붐도 꺼지지 않을까요?”였다. 이는 아직도 인디음악을 음악창작이나 음악트렌드, 음악산업 관점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하는 질문이다. 장기하 때문에 인디음악이 떴다고? 천만의 말씀. 한국에서 인디음악은 이미 ‘시대적인 트렌드’가 되었다. 장기하가 대중적인 관심을 일시에 증폭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그 조짐은 2000년에 델리스파이스의 김민규가 자신의 솔로 프로젝트인 스위트피(Sweetpea) 1집을 자신의 레이블인 문라이즈레코드(Moonrise Record)에서 내려고 할 때부터 ‘준비’되었다.1)



    [한국 인디음반 발매 현황]2) (박준흠, 가슴네트워크, 2007년 7월)

    연도/등급

    올해앨범

    필청앨범

    우수앨범

    주목앨범

    기타앨범

    소계

    1996

    1

    2

    0

    2

    1

    6

    1997

    1

    2

    5

    6

    3

    17

    1998

    1

    10

    11

    14

    25

    61

    1999

    1

    9

    8

    11

    33

    62

    2000

    1

    9

    13

    27

    53

    103

    2001

    1

    9

    20

    24

    71

    125

    2002

    1

    9

    22

    28

    68

    128

    2003

    1

    15

    26

    46

    87

    175

    2004

    1

    16

    25

    37

    111

    190

    2005

    1

    10

    27

    36

    136

    210

    2006

    1

    11

    33

    44

    164

    253

    2007

    0

    6

    12

    33

    72

    123

    총계

    11

    108

    202

    308

    824

    1453



    2002년 이후 본격화된 ‘홈레코딩 제작시스템’으로 인해서 2004년 무렵부터는 매년 발매되는 인디음반이 200장을 넘기고 있다. 그리고 2006년 무렵부터 각 인디레이블들이 신경 쓰는 것은 ‘음악적인 스타일’ 부분이고, 그래서 음반기획과 음반프로듀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을 정도로 장족의 발전을 해왔다. 이 흐름에 맞물린 것이 대형 대중음악페스티벌이다. 2005~2006년 필자가 예술감독으로 있었던 광명음악밸리축제에서 본격적으로 전문화된 ‘한국 대중음악 축제프로그램’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2005년에는 ‘하나뮤직 스페셜’, ‘밸리 초이스’, ‘인디음악 10년사’, ‘민중음악 30년사’, ‘뉴 커런츠’ 프로그램을 3일에 걸쳐서 진행했다.3) 이후 2006년에는 펜타포트록페스티벌, 2007년에는 그랜드민트페스티벌, 2009년에는 지산밸리록페스티벌이 생겨나서 기존의 쌈지사운드페스티벌(1999년), 자라섬재즈페스티벌(2004년)과 함께 한국 인디음악 씬을 키우고 있다. 장기하와얼굴들이 결정적으로 주목 받은 곳도 다름 아닌 2008년 쌈지사운드페스티벌이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대형 대중음악페스티벌 시장이 급성장한 일본의 사례를 보면, 한국도 이제 영화제에 이어서 그 흐름을 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올해 진행되고 있는 상기 음악축제들의 진행 경과를 보건데, 한국에서 적어도 향후 10년은 음악축제 성장이 지속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동반하여 인디음악의 성장세도 이어질 것으로 판단한다.




    2009년 10월


    그동안 수고하신 필자 분들과 사진을 제공한 해당 레이블, 사진작가 분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인터뷰에 성실하게 응해주신 레이블 대표님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또한 어렵게 매주 전면 지면을 내준 경향신문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30주를 진행하는 동안 시간도 많이 뺏기고, 여러 어려움도 있었다. 반면 그에 반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기사를 읽고, 관심을 가졌을까라는 의문이 든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또 한번 거대한 기록을 해냈다는 사실이고, 이게 ‘당대성’(현재 음악 기록)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 만족한다. 그런 점에서는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었다는 점 자체만으로도 내게는 큰 행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08~2009년, 두 번째 붐을 맞은 한국 인디씬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훗날 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도와주신 분들을 거론해야 할 것 같다. 먼저 이 책의 출판을 기꺼이 수용한 도서출판 선의 김윤태 대표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출판사로서는 정말 어려운 결정이었고, 대단히 고맙다는 인사를 거듭 전하고 싶다. ‘한국 대중음악의 현재’ 아카이브는 전적으로 도서출판 선의 도움이다. 그리고 ‘한국 대중음악의 현재’ 시리즈 디자인을 담당한 디자인이즈 추정희 실장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항상 성실함과 안정적인 퀄리티를 보여주는 디자이너를 만난 것도 내게는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사진을 기꺼이 제공한 레이블 측과 최규성, 이정실, 권준경 씨 등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귀중한 시간을 내어 인터뷰에 참여해 주신 12명의 필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이들의 프로필은 ‘참여 필진 프로필’ 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인터뷰에 응해주신 레이블 대표 분들에게는 말할 나위 없이 고마움을 느낀다. 이들로 인해서 이 책 출판이 가능했다.


    올해 11월 가슴네트워크가 10주년을 맞고, 공연, 전시, 세미나, 출판, 출반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2009 가슴네트워크축제’를 준비 중이다. 이를 도와주고 있는 최규성, 하나, 류형규, 문예진, 신나리, 도미노, 김민규, 김민정 씨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KT&G 상상마당, 공간 루, 파스텔뮤직, 일렉트릭뮤즈, Views, maniadb.com, 향뮤직에도 고마움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항상 곁에서 지지와 신뢰를 보내주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드디어 ‘한국 대중음악의 현재 Trilogy’가 끝났다.



    2009. 9. 30.

    문화기획그룹 & 문화예술전문매체 ‘가슴네트워크’ 박준흠




    1) 인터넷음악방송국 쌈넷에서 방송국장으로 있을 때 김민규 씨가 문라이즈레코드 마케팅 정책에 관해 조언을 구하려 온 적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1+1’ 형식으로 본 앨범에다가 문라이즈 컴필레이션 시리즈를 붙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었고, 이후 그런 방식으로 몇 장이 나왔다.


    2) 2007년 7월에 『인디음반가이드 2000』을 집필하기 위해서 조사한 한국 인디음반 발매 현황이다. 순전히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음반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이 보다는 약간 더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도 유통망을 통해서 발매된 인디음반들은 다 소장하고 있고, 일부 라이브클럽에서만 파는 음반들도 수시로 구입했기 때문에 큰 차이는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2009년 9월 시점에서 추정하건데 발매된 전체 인디음반은 2000장이 넘을 것으로 생각한다. 『인디음반가이드 2000』은 2010년에 발간할 예정으로 있다.


    3) 2005년 당시 출연진은 다음과 같다. 하나뮤직 스페셜(조동진, 장필순, 한동준, 버드, 오소영, 이다오), 밸리초이스(한대수, 이병우, 이상은, 이승열), 인디음악 10년사(델리스파이스, 허클베리핀, 마이언트매리, 이장혁, 코스모스, 몽구스, 스웨터, 슬로우쥰, 페퍼톤스, 푸른새벽, 카프카, 소규모아카시아밴드, 바세린, 49몰핀스), 민중음악 30년사(안치환, 연영석, 손병휘, 노찾사, 꽃다지), 뉴 커런츠(미스티블루, 13스텝스). 그리고 4개의 거리무대에서 파스텔뮤직, 튜브앰프, 비트볼레코드, 카바레사운드, 12몽키즈, 핑퐁사운드, B레코드, 롤리팝이 레이블 무대를 가졌다. 한마디로 2009년 현재 대형 대중음악축제 프로그램의 원형이라고 자부한다.




    <이미지 출처>


    ■ 표지, 내지 디자인에 아래 음반 이미지를 차용하였습니다.

    나루(Naru) [자가당착(自家撞着)] (2008/해피로봇)

    다방밴드 [돗대] (2005/일렉트릭뮤즈)

    루비라이트(Rubylight) [Love, On!] (2006/루비살롱)

    언니네 이발관 [비둘기는 하늘의 쥐] (1996/석기시대)

    얼스(Earls) [The Merrymaker] (2005/파스텔뮤직)

    키비(Kebee) [Evolutional Poems] (2004/소울컴퍼니)

    플라스틱 피플(Plastic People) [Folk, Ya!] (2006/일렉트릭뮤즈)

    V.A. [클럽 하드코어, 아싸 오방 첫 앨범!] (1998/인디)


    박준흠 / 가슴네트워크 대표, 문화기획자 1992년 10월 내 입장에서 보면, 개인적인 음악 청취 이력의 변동과 한국 인디음악 씬의 시작이 운명적으로(?) 맞물린다고 주장하고 싶다. 1992년 이 시기는 한...

  5. 그동안 수고하신 필자 분들과 사진을 제공한 해당 레이블, 사진작가 분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그리고 인터뷰에 성실하게 응해주신 레이블 대표님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또한 어렵게 매주 전면 지면을 내준 경향신문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30주를 진행하는 동안 시간도 많이 뺐기고, 여러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반면 그에 반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기사를 읽고, 관심을 가졌을까라는 의문이 든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또 한번 거대한 기록을 해냈다는 사실이고, 이게 당대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 만족합니다. 그런 점에서는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었다는 점 자체만으로도 제게는 큰 행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래는 그간 인터뷰에 응해주신 인디레이블 대표분들입니다. 이렇게 한자리에 모셔보니 정말 보기가 좋군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해피로봇 - 이소영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강아지문화예술 - 공윤영


    사용자 삽입 이미지

    붕가붕가레코드 - 고건혁, 윤덕원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일렉트릭뮤즈 - 김민규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인디 - 김종휘


    사용자 삽입 이미지

    도프뮤직 - 김윤중


    사용자 삽입 이미지

    드럭 - 이석문


    사용자 삽입 이미지

    드림온레코드 - 박형주


    사용자 삽입 이미지

    롤리팝뮤직 - 서준호


    사용자 삽입 이미지

    루비살롱 - 이규영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마스터플랜 - 이종현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문라이즈 - 김민규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문화사기단 - 차승우, 이성우


    사용자 삽입 이미지

    스컹크 - 원종희


    사용자 삽입 이미지

    벌룬앤니들 - 최준용


    사용자 삽입 이미지

    비트볼 - 이봉수


    사용자 삽입 이미지

    빅딜레코드 - 정환석


    사용자 삽입 이미지

    빵 - 김영등


    사용자 삽입 이미지

    샤레이블 - 이기용


    사용자 삽입 이미지

    소울컴퍼니 - 배이삭


    사용자 삽입 이미지

    리듬온 - 손병문


    사용자 삽입 이미지

    쌈지(쌈넷) - 천호균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에그뮤직 - 박경훈


    사용자 삽입 이미지

    루핀레코드 - 윤석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리버맨뮤직 - 이재수


    사용자 삽입 이미지

    튜브앰프 - 이한철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석기시대 - 전홍필


    사용자 삽입 이미지

    쥬신프로덕션 - 김도수


    사용자 삽입 이미지

    카바레사운드 - 이성문


    사용자 삽입 이미지

    퀸엔터테인먼트 - 이문식


    사용자 삽입 이미지

    타일뮤직 - 전수영


    사용자 삽입 이미지

    튠테이블무브먼트 - 송재경


    사용자 삽입 이미지

    파고뮤직 - 손관호


    사용자 삽입 이미지

    파스텔뮤직 - 이응민


    사용자 삽입 이미지

    GMC 레코드 - 이하석



    그동안 수고하신 필자 분들과 사진을 제공한 해당 레이블, 사진작가 분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그리고 인터뷰에 성실하게 응해주신 레이블 대표님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또한 어렵게 매주 전면 지면...

  6. ㆍ대중성 다지며 인디 전성기 노래하다

    메이저와 마이너 레이블의 가교 역할


    김민규 대표 ⓒ 이정실

    문라이즈 문라이즈 레이블은 2000년대 초반, 말 그대로 독립적이고 언더그라운드에만 머물러 있던 당시의 인디 레이블들 가운데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쳤던 레이블이었다. 레이블 대표였던 김민규(델리 스파이스)의 취향에 따라 주로 모던 록과 포크에 기반한 음반들을 발매하였고, 메이저와 마이너 레이블의 가교 역할을 하며 인디 신의 저변을 넓히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최근 그런 비슷한 위치에서 활동하고 있는 파스텔 뮤직의 원형을 제시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제는 보편화된 홈레코딩 시스템을 처음으로 정착시킨 레이블이기도 하다. 레이블의 음악적 특성상 큰 사운드는 필요하지 않았기에 집에서 소규모의 녹음 기기로 앨범을 제작·발매하며 적은 자본으로 앨범을 완성할 수 있는 시스템을 확립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인디의 전성기에 문라이즈가 있었다.

    문라이즈 레이블은 2000년에 델리 스파이스의 리더인 김민규가 자신의 솔로 프로젝트를 위해 처음 만들었던 레이블이다. 초반의 문라이즈 모습에서 아마추어리즘이 느껴졌던 것은, 이 레이블의 시작이 단순히 김민규의 솔로 프로젝트 앨범을 내기 위해 만들어졌던 것에서 기인한다. 모던 록 밴드였던 델리 스파이스와는 다른, 보다 내밀하면서 포크적인 감성을 담은 음악을 하고자 했던 김민규는 ‘스위트피(Sweetpea)’란 이름과 함께 자신의 음악을 간섭받지 않고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독자적인 레이블을 만들게 되었다. 딱히 레이블의 성격을 규정하지는 않았지만 이후 문라이즈에서 나온 대부분의 음반들은 소박한 사운드를 담은 모던 록과 포크의 자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노브레인

    스위트피의 정식 데뷔 앨범은 발매와 함께 큰 반응을 얻어냈다. 김민규 특유의 서정적인 감성과 어쿠스틱한 사운드가 결합된 이 앨범은 평단과 음악 팬들 모두에게 큰 지지를 얻어냈고, 문라이즈라는 레이블을 대중들에게 알릴 수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당시 많은 인기를 얻고 있었던 델리 스파이스라는 이름값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스위트피의 이 앨범에는 ‘I’m Not Certain, But You Are…’라는 제목의 보너스 CD가 한 장 삽입되어 있었는데, 이 CD에는 정순용(마이 언트 메리)의 솔로 프로젝트인 토마스 쿡(Thomas Cook)과 이한철, 그리고 이후 하나음악에서 솔로 앨범을 발표하는 이다오 등의 노래들이 들어있었다. 이 보너스 CD는 문라이즈 레이블의 특징을 보여주는 한 단면으로, 이 마케팅 방식은 이후 토마스 쿡의 앨범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니까 뮤지션의 솔로 앨범을 내면서 일종의 프로모션으로 이후 레이블에서 나올 뮤지션들을 소개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이 방식은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음반 구매자들에게 레이블의 홍보와 함께 문라이즈만의 음악적 색깔을 동시에 알려나갈 수 있었다.

    스위트피의 성공에 이어 두 번째로 앨범을 발표한 뮤지션은 마이 언트 메리의 리더 정순용이었다. 그는 김민규와 마찬가지로 솔로 활동에 대한 욕구가 있었고, 문라이즈를 통해 그 욕구를 해소할 수 있었다. 토마스 쿡이란 이름으로 만들어진 정순용의 솔로 앨범은 여러모로 스위트피의 앨범과 닮아있었다. 한 밴드의 리더로서 밴드 음악과는 다른 보다 개인적인 음악을 앨범에 담은 것이 그랬고, 또 솔로 앨범과 함께 보너스 CD를 담은 방식이 그랬다. 문라이즈 레이블의 두 번째 보너스 CD에는 스위트피의 노래를 비롯해 첫 번째 CD에도 참여했던 이한철, 이다오 등의 노래들이 들어있었다. 이후 문라이즈에서 앨범을 발표하는 전자양, 웨어 더 스토리 엔즈의 노래들이 들어있었다. 문라이즈는 이런 방식의 마케팅과 홍보를 계속해 나갔다.

    전자양과 웨어 더 스토리 엔즈의 앨범이 잇따라 발매되면서 문라이즈는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펴나갔다. 거의 활동을 하지 않은 전자양의 노래가 광고의 배경음악으로 쓰이는 행운도 뒤따랐고, 델리 스파이스의 김민규라는 배경으로 인해 다른 인디 레이블들에 비해 메이저 시장에 접근하기가 보다 용이한 편이었다. 또 일렉트로니카 음악을 했던 웨어 더 스토리 엔즈의 앨범은 모던 록과 포크에 한정돼 있던 문라이즈의 음악적 스펙트럼을 넓혀주었고, 이후 시부야 케이 스타일의 음악을 하는 하키의 앨범을 발매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이후 재주소년과 하키의 음반을 발표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던 문라이즈는 2000년대 중반부터 그 기세가 조금씩 꺾여가기 시작했다. 델리 스파이스 활동을 병행하고 있던 김민규는 문라이즈에만 신경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고, 김민규와 함께 문라이즈를 이끌던 마케팅 담당자마저 레이블을 떠난 결과였다. 현재는 레이블의 대표였던 김민규가 파스텔 뮤직과 계약을 맺고 활동하고 있는 관계로 문라이즈는 잠시 휴지기를 갖고 있는 상태이다. 재주소년과 하키 등이 소속되어 있지만 예전과 같은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마이 언트 메리 ⓒ 플럭서스


    문라이즈는 두 가지 측면에서 한국 인디 레이블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첫 번째는 문라이즈가 인디 레이블이란 개념을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알렸다는 것이다. 그 전에 존재했던 인디나 강아지문화예술 등의 인디 레이블들이 대중성이란 측면에서 한계가 있었다면, 김민규가 만들어낸 문라이즈는 감성적인 음악과 델리 스파이라는 지명도가 맞물리며 대중들에게 보다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문라이즈의 음악들은 공중파 라디오에서도 심심찮게 선곡될 수 있었고, TV나 언론 매체에도 노출될 수가 있었다. 이후 생겨나는 레이블들은 문라이즈의 이런 마케팅을 많이 참조하였고, 비슷한 노선을 추구하는 레이블들도 여럿 생겨났다. 두 번째는 홈레코딩 방식이었다. 이들은 레이블이 어느 정도 안정적인 운영에 들어갔음에도 홈레코딩을 고집했다. 해당 뮤지션이 자신의 힘으로 각자 레코딩과 믹싱을 하고 마스터링만을 전문 스튜디오에서 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최소한의 비용을 들여 최대한의 효과를 거두어야 하는 인디 레이블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었다. 문라이즈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증명해 보였다. 문라이즈의 이런 방식은 다른 레이블과 뮤지션들에게도 영향을 끼쳐 홈레코딩은 인디 신의 보편적인 방식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인디의 시작을 함께한 문라이즈 대표 김민규

    W ⓒ 최규성

    김민규는 한국 인디 음악을 얘기하는데 맨 앞자락 위치에 놓아야 할 뮤지션이다. 그는 델리 스파이스라는 밴드를 통해 인디 신의 실질적인 시작과 함께 했고, 인디를 대중들에게 알리는데 큰 공헌을 했으며, 인디에서 메이저라는 가장 모범적인 단계를 밟아나간 뮤지션이었다. 델리 스파이스라는 밴드가 지금 한국 음악사에서 갖는 의미에 비하자면, 그 시작의 이유는 너무나도 단순한 것이었다. 집에서 혼자 기타 연습을 하던 김민규가 자신이 연마한 기타 테크닉을 가지고 함께 합주를 해볼 밴드가 필요했던 것. 김민규는 PC 통신 사이트에 멤버 모집 공고를 냈고, 그 글을 본 윤준호가 찾아와 델리 스파이스라는 밴드가 탄생하게 됐다. 그렇게 델리 스파이스는 1997년 역사적인 데뷔 앨범을 발표하였다. 그 안에 담겨있던 ‘챠우챠우’는 한국 인디 신의 송가가 되었고, 델리 스파이스는 곧바로 인디 신을 대표하는 밴드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델리 스파이스로 활동을 하며 세 장의 앨범을 발표하면서 승승장구하고 있던 김민규였지만, 그에겐 다른 음악적 욕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밴드가 아닌 자신만의 음악을 마음대로 만들고 발표할 공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는 그가 좋아했던 영·미 지역의 인디 뮤지션들이 행하던 방법이기도 했다. 델리 스파이스 활동 도중 틈틈이 외국 여행을 하며 음악적 영감을 얻어왔던 김민규는 외국의 인디 레이블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 영향을 바탕으로 자신의 솔로 앨범 발매를 위한 문라이즈란 이름의 독립 레이블을 만들게 된다. 처음 시작은 단순히 스위트피라는 자신의 솔로 앨범 발매를 위한 것이었지만, 앨범의 기대 이상의 성공과 함께 주위의 동료 뮤지션들이 하나둘 가세하기 시작했다. 그는 한 밴드의 리더로, 또 한 레이블의 대표로 그 역할들을 충실히 수행해 나갔다. 현재 그는 스위트피의 3집 앨범 활동을 하고 있으며, 각종 페스티벌 무대를 위해 한동안 휴지기를 가졌던 델리 스파이스의 활동 역시 준비 중에 있다.

    <글 | 김학선 웹진 보다 편집장·진행 | 박준흠 가슴네트워크 대표>

    세상이 사기라 외치던 겁없던 그들

    문화사기단 아는 사람만 알던 ‘문화사기단’의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이들이 6년만에 컴백한 서태지에 대해 공식적으로 안티를 선언했을 때였다. 이 때문에 이들은 ‘서태지 안티를 통해 홍보를 노린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물론 정교한 비판의 논리가 없었던 것을 비판한다면 그 비판이 맞는 말이겠지만, 결국 펑크는 ‘무엇에 대한 반항’이라기보단 ‘반항’ 그 자체이기도 하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쩌겠는가.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그렇게 생겨먹었던 것을.

    펑크는 음악이면서, 동시에 태도였다. 섹스 피스톨즈가 그러한 이래, 펑크 뮤지션들에게 ‘태도’는 음악 외에도 늘 펑크가 펑크이기 위한 이슈로서 존재했다. 홍대에서 맨 처음 펑크 키드들의 몸부림이 시작되던 그 때, 그들은 오프스프링이나 그린 데이 같은 네오 펑크보다는 섹스 피스톨즈의 저돌적인 태도와 클래시의 음악을 본받고자 했다. 노브레인이 주축이 되어 1998년에 결성된 레이블 문화사기단은 정통 펑크 레이블로서 ‘음악’과 ‘태도’를 동시에, 가장 적극적으로 추구한 레이블들 중 하나였다. 노브레인의 ‘청춘 98’ 음반 발매와 함께 만들어진 이 레이블은 차승우(사진)의 군 전역 이후인 2000년부터 후배 밴드들의 음반을 활발하게 소개하면서 그 활동 범위를 넓혀갔다.

    자신들의 음반 활동과 함께 버닝 햅번, 배다른 형제, 푸펑충 등 신인 밴드들을 지속적으로 소개하고 이들의 앨범 또한 발매하던 문화사기단은 홍대 인디 신에서 펑크 열풍이 쇠락해가면서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고, 2002년에 잠정 해산하게 되었다. 이후 노브레인은 차승우의 탈퇴로 이전의 거칠던 ‘조선 펑크’에서 벗어나 다른 방향의 펑크 음악을 하고 있다. 이후 문화사기단에서 활동하던 많은 밴드들은 해체되었거나, 다른 밴드를 결성해 다른 레이블에서 활동하고 있다.

    <글 | 홍정택 가슴네트워크 필자·진행 | 박준흠 가슴네트워크 대표>

    아티스트 및 발매 앨범 - 문라이즈

    스위트피(Sweetpea) 델리 스파이스의 리더인 김민규의 솔로 프로젝트. 그는 밴드 사운드와는 다른 평소에 즐겨 듣던 외국 인디 팝 뮤지션들의 감성과 닮은 음악을 하고자 스위트피라는 솔로 프로젝트를 만들고 자신만의 레이블까지 만들었다.



    [Never Ending Stories] (2000) 밴드 사운드와는 다른, 보다 어쿠스틱한 사운드를 담고 있다. 델리 스파이스 시절보다 더욱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싣고 있으며 발매 당시 평단과 음악 팬 모두에게 높은 지지를 얻어냈다.



    [하늘에 피는 꽃] (2004) 1집과 비교해 모던 록부터 발라드까지 보다 다양한 음악을 담아냈다. 거의 혼자서 만들었던 1집과 비교해 동료 뮤지션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마케팅 역시 보다 적극적으로 이루어졌음. 1집보다는 대중적으로 더 어필할 수 있었다.



    토마스 쿡(Thomas Cook) 마이 언트 메리의 리더인 정순용의 솔로 프로젝트.

    [Time Table] (2001) 어쿠스틱한 사운드 속에서 정순용만의 멜로딕한 감각이 잘 살아있는 앨범. 혼자서 모든 곡을 만들고 대부분의 연주를 직접 했다.



    마이 언트 메리(My Aunt Mary) 홍대 클럽에서 오랫동안 활동을 해온 모던 록 밴드로, 홍대 인디 신의 시작과 거의 함께 해온 밴드. 3집 앨범으로 제2회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올해의 앨범’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nd My Aunt Mary] (2001)



    웨어 더 스토리 엔즈(Where The Story Ends) 코나라는 밴드에서 활동하던 배영준을 중심으로 결성된 일렉트로니카 프로젝트 밴드이다. 문라이즈 레이블의 기존 이미지와는 이질적인 일렉트로니카 음악을 함으로써 문라이즈의 음악적 영역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는 W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眼內閃光] (2001) 배영준이 해왔던 가요 멜로디와 일렉트로니카 사운드가 이상적인 조화를 이룬 앨범이다. 인간적이며 따뜻한 일렉트로니카 앨범이다.



    하키 웨어 더 스토리 엔즈에 이어, 기존 문라이즈의 색과는 다소 이질적인 시부야 케이 스타일의 음악을 하는 여성 뮤지션이다. 시부야, 라운지, 프렌치 팝 등이 조화된 음악을 들려주었다.

    EP [주워가줄래?] (2004)



    [이상한 얘기] (2004) 김민규가 직접 프로듀서를 맡은 앨범이다. 국내에선 쉽게 들을 수 없던 스타일의 음악이었지만 일본 뮤지션들과의 유사성 때문에 논란이 일기도 하였다.



    델리 스파이스(Deli Spice) 영화 ‘클래식’에 삽입되면서 더 유명해진 노래 ‘고백’이 담겨 있던 5집 [에스프레소] 활동 이후, 델리 스파이스는 긴 동면에 들어간다. 음악적 재충전과 각자의 프로젝트 활동으로 보낸 이 기간 동안 김민규는 ‘스위트피’로, 윤준호와 최재혁은 ‘오메가3’로 활동했다. 2005년 여름에는 밴드 결성 10주년을 맞아 기념공연으로 전국 투어를 갖는 등 바쁜 나날을 보냈다.



    [Bombom] (2006) 공백이 길었던 만큼 들려주고 싶은 얘기도 많았다. 이들은 무려 30여곡의 데모를 모은 후 최종적으로 엄선된 12트랙을 들고 스튜디오로 향했다. 봄은 그들이 그토록 원하던 유토피아라고 한다.

    문화사기단

    노 브레인(No Brain) 싱글 [청춘 98] (1998) 1집 [청년폭도맹진가] (2000)

    섹스 피스톨즈 트리뷰트 앨범 [Never Mind The Sex Pistols. Here‘s The No Brain] (2001) 2집 [Viva No Brain] (2001)



    푸펑충 2집 [Tough Like Metal] (2000)



    지랄탄 ‘99 & 리얼쌍놈스 1집 [마이너리그] (2000)



    펑크킬러(Punk Killer) EP [Animal Punx] (2001)



    런 캐럿(Run Carrot) EP [Oi!] (2001)



    아작(A-Zak) EP [Azak!!] (2001)



    글로벌 코퍼레이션(Global Corporation)

    EP [Return To The 77 Punx] (2001)


    <시리즈 끝>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902111444325&code=900315


    ㆍ대중성 다지며 인디 전성기 노래하다메이저와 마이너 레이블의 가교 역할 김민규 대표 ⓒ 이정실문라이즈 문라이즈 레이블은 2000년대 초반, 말 그대로 독립적이고 언더그라운드에만 머물러 있던 당시의...

  7. ㆍ우린 중도좌파, 배고픈 음악은 가라

    다른 고집보다도, 늘 레이블의 지속가능한 운영을 고민한다.


    인디 레이블 하면 으레 떠오르는 ‘치열하거나, 가난하거나, 그래서 궁상맞은’ 이미지들은, 제펫(Jeppet)이라는 이름으로 캐스커(Casker), 가재발 등과 함께 한국 일렉트로니카 1세대로 활동하던 윤석준이 설립한 루핀 레코드에서는 사실 조금 낯선 것들이다. 국내 대형 모바일과 온라인 콘텐츠 제공 업체 산하의 자회사로 등록되어 있는 루핀 레코드는 캐스커, 제펫, 포스티노(Postino), 블루 셔벗(Blue Sorbet) 등의 음반과 음원제작 사업 외에도 파티 프로덕션, 애니메이션 등의 영상음악 및 포스트프로덕션, 콘텐츠 배급 및 투자 사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업 포트폴리오를 지니고 있는 중견기업이다.

    온라인 음원사업의 가능성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오프라인 음반배급은 메이저 배급사에 맡기고 포털 사이트, 커뮤니티 사이트 등을 통한 음원판매를 통해 캐스커, 소울메이트 등의 음반을 히트 시킨 전례는 시장공략에 ‘적극적인’ 루핀 레이블의 특성을 보여준다. 혹자는 이런 번듯하게 ‘사업하는’ 모습에서 루핀 레코드의 인디 레이블로서의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핀 레코드는 배고프게 음악하는 것을 숙명처럼 알던 이전 홍대 인디 신을 경험하고 지나온 뮤지션이 인디 레이블의 지속가능한 생존과 발전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험을 거듭하며 만들어 온, 조금 독특한 형태의 ‘중도좌파’ 인디 레이블이라고 할 수 있다.

    루핀 윤석준 대표(사진)는 한국 일렉트로니카 1세대 뮤지션으로서 순수 일렉트로니카 최초의 레이블이었던 DMS 트랙스와 지 레코드가 잇달아 문닫는 것을 보면서 ‘이런 음반을 지속적으로 소개해 줄 수 있는’ 레이블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다른 인디 뮤지션들이 그렇듯, 그 또한 DMS 트랙스와 지 레코드에서 발매하려던 데뷔 앨범이 잇달아 무산된 이후 스미스 앤 모바일이라는 모바일 콘텐츠 제작 업체에서 음악 외의 일을 하게 되었다. 때마침 국내에 불어닥친 모바일 붐은 그와 그가 속한 회사의 사업을 비약적으로 성장시켜 주었고, 이 무렵 그는 문득 다시 음악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회사 대표에게 “레이블 사업을 해보고 싶다. 최대한 수익사업으로 발전시키겠다”는 합의 하에 루핀 레코드를 설립했다.

    음악 외에 다양한 경험을 쌓았던 그간의 시간은 그가 일렉트로니카 전문 레이블의 대표로서 한국에 일렉트로니카 뮤지션과 문화를 소개하는 것 외에도 더욱 다양한 수익 모델을 찾고, 이를 통해 사업기회를 넓힐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이제 일렉트로니카 외에도 다양한 장르의 뮤지션을 소개하고, 이를 통해 루핀의 브랜드를 재조명받고 싶다는 그는 ‘내가 이 일을 그만두게 되더라도 계속 살아남아 아티스트와 그들의 앨범을 소개할 수 있는’ 레이블로서 루핀 레코드를 만들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루핀 레코드를 처음 설립했을 때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제펫

    “처음에는 ‘제펫’이라는 이름으로 당시 우리나라 일렉트로니카 뮤지션 대부분이 활동하던 ‘DMS 트랙스’에서 활동하면서 작품도 내고, 앨범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2001년에 DMS 트랙스가 갑자기 문을 닫으면서 앨범 발매가 한 번 무산되었다. 이후 가재발과 전 DMS 트랙스 소속 분의 주도로 ‘지 레코드’가 만들어졌고, 거기서 가재발 2집, 캐스커 1집 등이 발매되었다. 나도 자연스레 지 레코드 소속이 되었고, 그곳에서 다시 앨범을 준비하게 되었는데, 앨범이 나올 때가 되니까 지 레코드가 또 없어지더라. ‘아, 난 내가 직접 레이블을 만들어서 내야 되나보다’ 하는 생각이 그때쯤 들었다(웃음). 지 레코드에서의 앨범 발매가 무산될 때 즈음 지인의 소개로 당시엔 생소했던 모바일 콘텐츠 비즈니스를 시작하게 되었다. 창단 멤버로 회사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일이 잘되어서 사업이 성공하니까 문득 레이블 운영이 하고 싶어졌다.”

    -기업체 내의 사업부서로서 있는 루핀 레코드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디 레이블이라고 할 수 있다고 보는가.

    “루핀은 회사 조직상으로만 사업부서로만 되어있을 뿐 엄연한 독립회사다. 모든 수지타산, 자금집행이 독립적으로 진행되고 비용정리도 따로 정산한다. 대개의 인디 레이블이라는 게 뮤지션 혼자서 만들고 소수의 커뮤니티가 꾸려가는 독립집단이 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우리 루핀 레코드는 그냥 음반만 내고 마는 레이블이 아니라는 걸 차별화의 요소로 삼고 싶었다. 그래서 이런저런 시도도 많이 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구심점에는 늘 ‘음악’이 있도록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려 했다. 유통상으로 인디와 메이저의 중간에 있는 중도좌파 레이블로서, 모바일과 온라인을 주로 하는 특징적인 레이블이 되고 싶었다.”

    -제펫 1집에 대한 시장반응은 어땠는지.

    캐스커

    “레이블을 만들고 제일 처음 만든 음반이 잘되어야 레이블이 오래 간다는 소리가 있는데, 엄밀히 말하면 제펫 1집이 시장에서 크게 성공하지 못해서 불안했던 게 사실이다. 2004년 6월에 루핀이 런칭하고, 제펫 1집 앨범을 발매했고, 그해 연말 카운트다운파티를 투자·주최했는데 다행히도 그게 대박이 났다. (참고로 윤 대표는 1999년부터 굵직한 일렉트로니카 파티들을 기획한, 국내 파티기획자 1세대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당시 호텔파티 집객이 2000명 정도면 성공한 케이스로 보는데, 우리 파티에는 당시에 4000명이 넘게 왔다. 그때 자연스레 그 파티가 이슈가 되면서 루핀의 이름을 알릴 수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2005년 캐스커의 2집을 내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2004년 파티를 할 당시에 프리 템포가 처음 내한했는데, 그때 라이센스를 맺지 않았던 게 후회되지는 않아도 아쉽기는 하다(웃음).”

    -루핀 레코드는 국내 인디 레이블 가운데 온라인 음원 시장 쪽을 가장 성공적으로 공략한 사례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온라인 음원 시장의 가능성을 어떻게 알았나.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유통은 직접 할 수 있으면 직접 하는 것이 제일 좋다. 하지만 우리는 타이틀의 수나 스케일 면에서 부족한 감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유통수수료라도 아끼기 위해서 오프라인 음반 유통을 다양한 메이저 배급사에 맡기는 대신, 모기업이 성공한 모바일 시장과 함께 온라인 음원 시장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물론 당시만 해도 음원의 디지털 유통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고, 매출이 나올 만한 수익 모델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오히려 ‘노다지’와 같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모바일 시장이 그랬다. 유행하는 애드립 같은 것을 벨소리로 만들어서 등록만 하면 수천만원씩 매출이 나왔는데, 언젠가는 이런 일이 모바일이 아니라 디지털 음원 유통 전반에 있어서 가능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모회사는 SKT, KTF 등의 BP(Business partner)로 활동할 만큼 모바일에서의 성공경험이 있었고, 나 또한 음악콘텐츠 사업부문을 총괄하면서 이를 직접 두 눈으로 보고 나니 확신이 생겼다. 당시만 해도 모바일이 디지털 유통의 메인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회사에서의 경험을 최대한 활용해 포털 사이트와 커뮤니티 사이트 등에 우리의 음악을 소개하고 다녔다. 남들은 라디오 PD한테 가는 시간에 우리는 온라인 사이트를 뛰어다니고, SKT부터 해서 통신사들까지 줄기차게 돌아다녔다.”

    -현재 온라인 음원 시장을 어떻게 보나.

    “시간이 지나면서 온라인 음원 시장, 더 나아가 대중음악 시장이 보편화된 것이 문제라고 본다. 산업으로 보면 그 어떤 산업도 크기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시장이 커지는 속도보다 경쟁이 심화되다 보니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더 붙는다. 예전에는 음반을 한 장 발매하면 10명이 수익을 나눠 가졌는데, 이제는 100명이 나눠 갖는다. 저작권협회에 등록되어 있는 곡, 작곡가 숫자는 내가 처음 시작하던 2004년과 비교해 현재 두 배가 넘는다. 옛날에는 음반을 내기 어려웠는데, 이제는 음악을 내기가 너무 쉬워졌다. 음반을 내기 귀찮으면 디지털 싱글만 발매하면 그만이다. 음악을 하는 입장에서 보면 공급과잉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전체적인 질도 좋아졌다. 이 덕에 유통회사는 협상우위가 생기니 좋지만, 그 때문에 정확하게 알려줄 창구의 기능이 상실된 것은 문제다. 유통사는 자신들과 친하거나 자신들이 소속으로 하고 있는 음악을 밀어줄 수밖에 없지 않은가. 공급은 많은데 이 때문에 제작자는 음악을 소개하기가 힘들고, 소비자는 공정하게 음악을 전달받지 못한다. 여기서 서로에 대한 불신이 생긴다. 다행히 최근 들어 독립 레이블 위주로 자체적인 유통, 홍보망을 구축해 나가고 있는데, 긍정적인 현상인 것 같다. 과잉공급의 시대에 좀더 활발한 활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다고 뮤지션으로서 음악의 완성도까지 버려가며 음악을 찍어내고 싶지는 않다는 고집도 있기 때문에, 그게 마냥 쉽지만도 않다.”

    -루핀 레코드 아티스트들의 특징이라면.

    “우리는 스스로 중도좌파의 레이블을 표방한다. 소속 뮤지션인 포스티노의 예를 들자면 그는 1집 음반을 낸 뮤지션이지만 동시에 100곡을 넘게 쓴 프로 주류 작곡가다. 이처럼 어쩌다 보니 기존에 활동을 많이 한 ‘내공이 있는’ 뮤지션들이 모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레이블의 전체적인 아우라가 좋아진다. 가끔 합의적인 일치를 이끌어낼 수 없는 부분들도 있다. 루핀은 전체적으로 일반 인디 레이블들과는 달리 회사 시스템을 철저하게 지키면서도 ‘남들도 다 하는 부분들’을 우리도 지켜내려는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

    -초기에는 일렉트로니카 전문 레이블의 색이 강했는데 요새는 장르를 별로 가리지 않는 편인 것 같다.

    블루 셔벗

    “시작할 당시에는 내 스스로 한국 일렉트로니카 1세대라는 자부심도 있었고, 주위의 뮤지션들도 대개가 일렉트로니카 장르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쪽으로 시작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그것밖에 몰랐고, 그게 좋았고 계속 그러려고 했다. 일렉트로니카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가 파티사업도 하게 되었고. 그러던 생각이 <소울메이트> OST를 기점으로 조금씩 바뀌게 되었다.”

    -장르가 다변화되면서 이전에 가지고 있던 색깔을 잃게 될 거라는 우려는 없나.

    “물론 그런 것이 있을 것이고, 지금도 그것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있다. 음악 스타일을 관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레이블의 발전과 소통에 정말 도움이 되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컸다. 루핀 레코드를 처음 시작할 때 굉장히 일렉트로니카 뮤지션으로서의 자존심이 강했다면, 지금은 우리가 레이블을 유지하고 이를 통해 좋은 음악과 아티스트를 계속 소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아티스트가 공연을 하고, 음반을 낼 수 있도록 지원해주고 환경을 조성해주면 그러는 와중에 레이블의 브랜드 가치가 창출되고 다 함께 시너지를 볼 수 있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레이블에서는 아티스트가 무조건 첫째라는 생각이 들었다.”

    -향후 루핀 레코드를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가고 싶은가.

    “일을 잘하는 인디 레이블들은 분명히 있다. 돈도 많이 벌고, 투자도 많이 하고, 아티스트들 대접도 잘해주고…. 하지만 대개의 인디 레이블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음악을 위해 다른 일을 함께한다. 나는 그런 건 싫다. 이왕 음악을 하기로 했다면 음악으로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최대한 다양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고 그것을 통해 정말 ‘음악과 관련된 일로 먹고 사는’ 레이블을 만들고 싶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이 일의 일환으로 애니메이션 포스트 프로덕션을 3년 전부터 꾸준히 해 왔고, 그것을 통해서도 수익을 냈다. 그리고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지만 투자사업도 다양한 방향으로 하면서 수익 다변화를 꾀하고 있다. 우리 또한 여전히 음반만 따지면 마이너스다. 다른 사업하고 다 더해야 수지를 맞출 수 있지만 그래도 하는 이유는 다른 인디 레이블 분들처럼 ‘음악이 좋아서’다. 레이블 사업을 지속하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면 ‘부끄러워서는 안 되니까’이다. 내가 아티스트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만든 레이블이니까,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한동안 음반이 안 나오는 경우가 있더라도 루핀 레코드가 없어지지 않도록 할 것이다. ‘명반’이라 할 만한 음반을 만들고 싶은 건 당연한 거고…. 하나 더 욕심이 있다면 이전과는 다른, 음악적으로 특화된 루핀만의 스타일도 만들고 싶다. 백조처럼 진짜 멋지게, 하지만 발밑은 땀나게 음악하면서 살고 싶다.”


    루핀 레코드 국내 아티스트·카탈로그

    현재 소속 아티스트: 제펫(Jeppet), 나코틱 블루(Narcotic Blue), 블루 셔벗(Blue Sorbet), 포스티노(Postino), 성운

    거쳐간 아티스트: 캐스커(Casker)



    출시 음반

    제펫(Jeppet)

    1집 ‘Romantic English Woman’ (2004) 루핀레코드의 창설과 함께 발매된 첫번째 음반. 트렌디한 라운지, 다운템포 트랙으로 감각적인 사운드를 들려준다.



    캐스커(Casker)

    2집 ‘Skylab’ (2005) 감성적이고 멜랑콜리한 서정성의 토대 아래 다운템포, 하우스, 드럼앤드베이스, 브로큰비트 등을 자유자재로 뒤섞으며 단순한 라운지·칠아웃 음악으로 규정할 수 없는 다채로운 사운드를 들려준다.

    3집 ‘Between’ (2006) 월드뮤직, 일렉트로니카, 다운템포, 하우스, 누재즈 등 다양한 장르의 벽을 넘나들며 그들만의 음악으로 재해석하는 캐스커가 전자탱고로 인간의 관계와 소통을 담은 음악



    성운

    1집 ‘몽향’ (2008) 가요적 대중성에 재즈의 구성을 가미한 음반으로 직접 사람의 손에 의해 연주되는 언플러그드 구성으로 만들어진 음반



    포스티노(Postino)

    1집 ‘A Letter From Postino’ (2007) 세련되고 감성적인 일렉트로닉 팝을 들려주는 포스티노는 이기찬, 윤종신 등 국내 최정상 인기가수의 트랙에 참여, 유수히 많은 히트곡을 선보인 작곡가 출신 싱어송라이터로, 타이틀곡 ‘동감’에서는 015B 정석원이 featuring에 참여하기도 했다.



    블루 셔벗(Blue Sorbet)

    1집 ‘Melodical Sounds of the Taste’ (2007) 스타일리시 퓨처뮤직을 표방하며 대중적이면서도 세련된 멜로디와 다양한 장르를 선보인 블루 셔벗의 데뷔 앨범



    V.A. ‘Chicaloca Compilation’ (2006)

    하우스, 힙합, 재즈, 브레이크비트 등을 넘나들며 여름에 어울리는 시원한 클럽뮤직을 들려주는 편집음반



    V.A. ‘015B Final Fantasy’ (2006)

    후배 뮤지션들이 재해석한 015B의 기존 히트곡들과 함께 015B의 신곡 2곡이 수록된 10년 만의 스페셜 음반



    OST ‘소울메이트’ (2006)

    드라마의 집필을 맡았던 조진국 작가의 선곡을 토대로 루핀 레코드 소속 아티스트들의 곡을 한데 엮어 만든 앨범. 6개월 이상 OST 판매순위 1위에 오르며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OST ‘소울메이트 Forever’ (2007)

    1집에서 먼저 만나 본 해외 아티스트의 곡들에 토와 테이의 곡과 루핀 레코드 소속 아티스트들의 신곡 등을 함께 담은 ‘소울메이트’ OST의 후속작


    <글 | 홍정택 가슴네트워크 필자·진행 | 박준흠 가슴네트워크 대표>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902041437475&code=900315

    ㆍ우린 중도좌파, 배고픈 음악은 가라다른 고집보다도, 늘 레이블의 지속가능한 운영을 고민한다.인디 레이블 하면 으레 떠오르는 ‘치열하거나, 가난하거나, 그래서 궁상맞은’ 이미지들은, 제펫(Jeppet)이라는...

  8. 아트마케팅 기업 쌈지의 ‘쌈지 아트프로젝트’

    게토밤즈

    1997년 11월 한국에서 일어난 ‘IMF 사태’를 아직까지도 대략의 발생 일자까지 기억하는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다. 첫 번째는, 32살이었던 당시 대중음악계로 전업하는 계기가 되었던 대중음악전문지 서브(SUB) 창간 작업을 하는 와중에 겪었던 최고의 악재였기 때문이다. 아마 저녁 먹다가 TV 기자회견을 통해서 정부 고위관리자의 발표를 접했던 것 같은데, 이 때문에 당분간 광고시장이 75% 줄어들 것이란 소문은 10월부터 본격적으로 창간작업을 하던 내게는 거의 패닉 상황을 안겨주었다. 결국 그해 12월24일에 창간호가 나왔지만, 짐작하다시피 당시의 잡지광고 시장은 최악이었다. 두 번째는, 그 ‘IMF 사태’ 이후 한국에 본격적으로 인터넷 인프라가 구축되면서 강남 테헤란로를 중심으로 일었던 ‘IT 벤처붐’ 때문인데, 그 시기의 끝물인 2000년 3월부터 인터넷음악방송국 ‘쌈넷’의 개국 작업을 했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IMF 사태’ 전후로 인생에 중요했던 두 가지 작업을 했던 셈이다.

    쌈넷은 90년대 당시만 해도 낯설었던 ‘아트마케팅’을 기업 차원에서 효과적으로 했던 패션잡화 회사인 ‘쌈지’가 만든 자회사이다. 쌈지는 ‘디자인과 예술, 상품과 예술의 인터미디어’를 표방하면서 회사 초기였던 92년경부터 예술가 지원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대표적으로 IMF 당시 가난한 예술가를 위하여 “예술이 브랜드에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캐치프레이즈로 만든 ‘쌈지 아트프로젝트’가 있다. 대중음악 쪽에서도 2008년 10회를 맞은 언더그라운드 록 페스티벌의 대표격인 ‘쌈지사운드 페스티벌’을 들 수가 있고, 여기 ‘숨은 고수’ ‘무림 고수’ 양대 프로그램은 인디뮤지션들을 대중적으로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이 페스티벌은 “감각 공유라는 점에서는 미술이나 전시회보다 록 페스티벌이 좀더 직접적이고 접촉적이고 효과적이다”라는 천호균 대표의 생각 때문에 시작되었는데, 이미 실질적으로 가장 오래된 록 페스티벌로 자리잡았다.

    포춘쿠키

    이후 쌈지는 IT와 관련한 사업 방향을 정했고 그것이 바로 ‘인터넷과 대중음악이 결합된’ 쌈넷이었다. 아마 98년부터 생겨난 여러 문화 관련 웹진, 인터넷방송국들을 예의주시하면서 내린 판단이었을 것이다. 쌈넷은 쌈지사운드 페스티벌의 주관사이면서 ‘쌈지 팝프로그램’을 맡는 회사가 되었다. ‘쌈지 팝프로그램’은 쌈지가 아트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언더그라운드 록밴드를 후원하는 프로젝트로 99년부터 가동했다. 매년 몇 개의 밴드와 음반을 공동 제작하고, 그들의 콘서트를 열어 음악성을 마케팅하는 동시에 쌈지 소비자들에게 음악을 서비스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처음 나온 음반이 황신혜밴드의 ‘Ver 2.5 특별시 소년소녀’였다. 하지만 이를 쌈지 홍보실에서 주관하는 것이 어느 정도 힘이 부치면서 전문성 있는 운영집단이 필요하게 되었고, 쌈넷이 이를 맡으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음반 레이블 형태로 발전했다. 이게 오늘날의 ‘55AM Music’의 모체인 인디레이블로서의 쌈넷이다.

    여기서 독자들이 하나 궁금해 할 수 있는 사항이 있다. 어떻게 쌈지의 대자본(?)이 투여된 쌈넷이 ‘인디레이블’일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인디음악’의 기준은 음악생산의 주체를 뮤지션이거나 뮤지션의 의견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제작자인 경우로 보기 때문에, 또한 쌈넷에서 그간 나온 음반들이 인디뮤지션 부류였기 때문에 쌈넷을 인디레이블로 보는 것이다.

    쌈지사운드 페스티벌의 주관사인 덕에 ‘숨은 고수’ 프로그램을 통해서 발굴된 신인들과 계약할 수 있는 이점이 있는 쌈넷은 음악사업 인프라가 인디레이블들 중에서는 가장 튼실한 편이다. 하지만 쌈지라는 회사가 모회사란 점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음악사업에서 운신의 폭이 넓지 않다는 단점도 있다. 당장 쌈지사운드 페스티벌만 해도 사업적인 방향으로 끌고 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디씬의 활성화를 위해서 쌈넷에 거는 기대가 있고, 그건 그간 아트마케팅으로 성과를 보았던 쌈지의 노하우가 접목되기를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천호균 쌈지 대표(사진)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쌈지는 “예술이 브랜드에 생명을 불어넣는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갖고 앞으로는 새롭게 ‘쌈지 농부프로젝트’를 진행하려 한다고 들었다. 아트프로그램도 함께 진행되나.

    “올해로 쌈지사운드페스티벌이 10년 되었다. 아트프로젝트의 전반적인 방향들이 그 때 그 때 바뀌어왔는데, 그럴 때마다의 특색은 그 당시에 좀더 소외된 쪽, 소외됐는데 내용은 있는 쪽으로 우리가 접근해갔다. 그 바뀌는 과정 중에 지금은 “농사가 예술이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변하는 시점에 ‘농사 테마’가 낀 것이다. 농사를 중심으로 농사를 예술 같이 생각하고, 농사를 사랑하는 예술가들, 쌈지가 농부를 사랑하는 그 마음을 고객들하고 얘기하자 해서 생긴 프로젝트가 ‘농부 프로젝트’이다. 이는 아트프로젝트의 전환 또는 업그레이드?”

    -그럼 농부프로젝트에서 향후 ‘쌈지 팝프로그램’(쌈지사운드 페스티벌, 쌈넷에서 하는 음반사업 등)이 기존 방향과 달라지는 게 있나.

    “음악 파트도 농부프로젝트 회의에 꼭 참석하라고 한다. 그래서 농촌에 농가나 민요나 이런 것도 있겠지만, 농촌은 그 나름대로 갖고 있는 민중성이 있잖은가. 그런 경향의 음악들에 대해 음악가들하고 얘기하면서 그런 부분을 보여줬으면 하는 희망이 있다. 미술 쪽도 그렇고. 우리가 폐교 사용 신청을 해놓고 있는데, 그 프로그램이 되면 거주를 하면서 의무적으로 한 달 정도는 농촌에 관련되는 일, 직접 농사를 짓는다든지, 그림을 그려준다든지, 그런 걸 작가들하고 협의를 할 계획이다. 좀더 적극적으로 아티스트들과 교류를 생각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이런 콘셉트로 진행된 경우는 없었다. 서울 근교의 추수가 끝난 논에 쌈지사운드 페스티벌 무대를 만든다든지 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다.

    “대형 페스티벌이 한국에서 많아지다 보니까 차별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올 해 쌈지사운드 페스티벌이 10주년이라 다르게 가자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아직은 한국에서 한 적이 없는 방식을 실험적으로 해보고 싶다. 지역 밀착형, 지방이나 지역 단체 등을 끼워서 다르게 해볼 생각도 있다. 단지 대중성이니 하는 큰 틀에서는 방향성을 좀 바꿔야 할 거 같다. 재래시장에서의 공연도 생각해 보고 있다. 장터, 뭐 각설이 같은 게 나올 수도 있고. (웃음)”

    -쌈지사운드 페스티벌이나 음반사업 쪽에 관심을 갖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있나.

    “음악으로 직원들하고 소통을 하고 싶었다. 처음에 쌈지사운드 페스티벌을 할 때, 초청 대상이 우리 회사 직원들, 협력 회사 직원들이 중심이었다. 그리고 가까운 소비자들하고. 그런데 그 당시에 황신혜밴드하고 대학로 학전에서 공연을 기획하게 됐다. 7회를 했는데 내가 7회를 다 가서 봤다. 항상 맨 뒷자리에서 보곤 했었는데, 볼 때마다 관객들이 반응하는 게 다르더라. 연극을 보는 것 같았다. 내가 적극적으로 음반을 만들자 해서 같이 음반도 만들고, 매장에서 판매를 시도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확장을 해서 그런 뮤지션들을 한 무대에 세우게 된 게 쌈지사운드 페스티벌이다. 소통을 하기 위한 도구로 음악을 사용했고, 그 방법으로 매일 듣는 걸로 소통하는 것보다는 뭔가 듣기 어려운 쪽을 같이 듣자고 생각했다. 그들이 주로 서는 무대 공연에서 자연스럽게 미술하고 같이 섞이는 계기도 됐다.”

    골든팝스


    -음반사업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

    “쌈넷이란 회사를 만들 때, 좀 전문적인 조직으로 음반비즈니스를 하면서 쌈지 마케팅에 도움이 되게 하자는 생각이었다. 쌈넷 음반사업의 기본적인 취지는 쌈지사운드 페스티벌에서 신인으로 나온 ‘숨은 고수’들 중심으로 음반을 만드는 게 원칙이다. 슈가도넛이나 이런 쪽에서 이상은, 언니네이발관 이런 쪽으로 자연스럽게 바뀌어 간 거다. 현재 음반시장 전체 상황이 너무 안 좋아지면서 어떻게 보면 지금 쌈넷은 쌈지사운드 페스티벌 기획회사로서의 존재 가치가 가장 큰 순위가 아닌가 싶다.”

    -음반사업 부문에서 어떤 뮤지션의 음반제작에 관심이 있나.

    -사실은 쌈넷이 다른 일반 레이블들처럼 처음부터 음반을 만들자, 그러기 위해서 레이블을 만들자, 해서 성립이 된 회사가 아니었다. 쌈지사운드 페스티벌이 있었고, 즐기기 위해서 재밌는 걸 하자해서 그렇게 하다가 어느새 쌈지사운드 페스티벌과 마찬가지로 커져버린 거다. 스스로 걸어가려던 것보다 더 커진 케이스다. 그래도 한 가지 고마운 것은 쌈지라는 이미지가 있어서, 좀 특이하다거나 생각이 있다거나 하는 뮤지션들이 찾아와 준다는 것이다. 그렇게 찾아와 주는 친구들을 픽업만 해도 특이한 쌈지만의 색깔을 가질 수 있었는데, 요즘은 그게 약간씩 변해가면서 그냥 레이블들 중의 하나로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도 고민을 하고 있다. 국악이라든가, 딴 데서 주목을 안 하거나 혹은 못 받거나 하는 쪽으로 관심을 돌려 다시 한번 원점으로 가서 원래의 ‘쌈지 색깔’을 찾아가보자는 목표를 갖고 있다.”

    -쌈넷에서 나온 음반에서 드러나길 바라는 쌈지 색깔이라는 게 어떤 건가.

    “뭔가 좀 ‘다르다’라는 얘기를 하는 것, 좀 촌스럽달까? ‘대중적이지는 않은데 대중적인 소재’를 찾는 것이다. 아직 ‘들어가지 않았지만 들어가야 할 것’들, 이걸 우리는 ‘소외’됐다고 하는데, 소외된 것들이 인정을 받고 그런 게 쌈지 문화의 신인이고 젊음의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볼 때는 뭔가 다르다는 말로 표현될 것 같다.”

    -여기서 ‘소외’됐다는 건 단순히 소외됐다는 게 아니라, ‘향후 5년이나 10년 이내에 빛을 볼 거라는 확신에서의 소외’이고, 그런 판단에서 사업을 진행하는 것은 아닌가.

    보이

    “뜨고 안 뜨고 보다는 그동안 검증된 것들만 보거나 고르거나 하는데, ‘쌈지의 눈’으로 검증시켜서 보여주는 그런 일정 부분의 역할이 예술문화와 관련된 쌈지의 입장이다. 그런 중에 농부가 나타난 거다. ‘농사가 예술이다’란 얘기는 예전부터 많이들 해왔던 얘긴데, 그걸 실천을 하는 것이다. 인사동도 그렇고, 헤이리도 그렇고, 매장으로 그걸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우선 우리 직원들만이라도 농사도 짓고, 농사지은 걸 먹고, 그런 분위기로 회사를 이끌어 가면 교육적인 효과도 있고, 환경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음악, 미술 등이 같이 엮여 갔으면 하는 게 쌈지아트프로젝트의 연장선상이라고 본다.”

    -쌈지 아트프로젝트에서 매년 10명씩 선정하는 미술가들을 보면 어느 정도는 미술계에서 중견 이상으로 올라간 것 같은데, 음악 쪽은 좀 다른 것 같다.

    “미술 쪽이 오래되다 보니 지원 폭이 좀 크다. 미술 쪽은 레지던스 프로그램이 있으니까 나름대로 경쟁력이 있는 것 같다. 레지던스를 신청할 때마다 대단하고, 작가들의 해외 활동도 훌륭하다. 그런데 개인적으론 그게 뭐 대단히 중요한가라는 생각도 든다. 결국 그 작가들이 큰 길을 걷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하면 관객들, 대중들하고 소통하는가’가 가장 큰 목적인데,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거다. 너무 전문적이 되다보니까.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음악은 쌈지 소속도 많지는 않지만 대중과 소통하는 데 미술보다 가까운 거 아닌가. 재밌는 건, 미술 전공하는 학생들도 쌈지에 기대를 많이 갖고 있고, 음악도 숨은 고수다 해서 신청이 많이 들어오는데, 실질적으로 쌈지의 본격적인 문화를 대변하는 쌈지의 상품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쌈지는 그냥 문화인 거다. 문화가 담긴 물건이 아니라, ‘문화’와 ‘물건’을 철저히 구분하는 것 같다. 그걸 우리가 경계를 하고, 너무 전문적으로 가는 걸 섞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상품과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생활 속의 예술, 예술 속의 생활’이 모토인데 그걸 실천을 못하고 있다 (웃음). 쌈지 농부 할 때는 실천을 좀 하자고 굳게 다짐하고 있다.”

    쌈넷(55AM, 쌈지) 발매 음반

    황신혜 밴드

    [Ver 2.5 특별시 소년소녀] (1999)



    어어부 프로젝트 밴드

    [New Hair] (2000)

    [21C New Hair] (2000)



    닥터코아(Dr. Core) 911

    [비정산조] (2000)



    허벅지

    [장미 허벅지] (2001)



    황보령

    [태양륜] (2001)



    허클베리 핀(Huckleberry Finn)

    [나를 닮은 사내] (2001)



    슈거도넛(Sugardonut)

    [Spinner Jump] (2002)

    [Speed King] (2003)

    [Phantom Pain] (2006)



    코코어(Cocore)

    [Super Stars] (2003)

    [Fire, Dance With Me] (2006)

    게토밤즈 & 스키조 (Ghettobombs & Schizo)

    [Star] (2003)



    네스티요나(Nastyona)

    [Bye Bye My Sweet Honey] (2004)



    포춘쿠키(Fortune Cookie)

    [행운의 시작] (2004)

    [Hills Like White Elephants] (2007)



    언니네 이발관

    [순간을 믿어요] (2004)

    [가장 보통의 존재] (2008)



    게토밤즈(Ghetto Bombs)

    [Rotten City] (2005)



    골든팝스(Golden Pops)

    [The Great Fictions] (2007)



    보이(Voy)

    [쉬어가기] (2007)



    백현진

    [Time Of Reflection] (2008)



    V.A.

    [쌈지 사운드 페스티벌 1999] (1999)

    [도시락 특공대 2. Behind Story] (2000)

    [2001 쌈지 사운드 페스티벌] (2001)


    <글·진행 | 박준흠(가슴네트워크 대표)>
    아트마케팅 기업 쌈지의 ‘쌈지 아트프로젝트’ 게토밤즈1997년 11월 한국에서 일어난 ‘IMF 사태’를 아직까지도 대략의 발생 일자까지 기억하는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다. 첫 번째는, 32살이었던 당시 대...

  9. ㆍ록·메탈 마니아들의 ‘오아시스’

    드림온

    수입 음반 전문점에서부터 시작된 꿈이 지속되다

    형제는 용감했다. 록음악계, 인디 레이블에서 선한 미소를 바탕으로 열정적으로 사업을 추진해온 박형주와 박병주 형제가 그들이다. 명동에서 록, 헤비메탈 수입 앨범을 전문으로 판매하던 레코드점 사업을 시작으로 결국 그런 종류의 음악을 직접 라이선스화해 발매하는 레이블을 이어오고 있다.

    껌엑스

    국내에 진출한 직배 음반사들과 대형 레코드사들의 레퍼토리 중에서 갈수록 헤비메탈, 익스트림 메탈 종류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고집스러운 메탈 마니아들에게 ‘드림온’이라는 이름은 그야말로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다. 처음엔 귀한 수입 음반을 구할 수 있던 레코드점을 운영하던 박씨 형제는 내친김에 정식으로 레이블을 차려 명동 사무실 시대를 열며 헤비메탈 전문 레이블로서의 입지를 굳혀가게 된다. 이제는 모두 국내 페스티벌 참여나 내한공연을 통해 그 실체까지 볼 수 있었던 다크 트랜퀼리티, 인 플레임스, 에덴브릿지 등의 질 좋은 라이선스 앨범에서부터 어느새 국내의 고참 헤비메탈 밴드 블랙 신드롬의 앨범이 드림온 레이블을 달고 시장에 나왔다. 이어 펑크 밴드 껌엑스의 앨범은 아예 일본에도 정식으로 소개되어 우리나라 시장에서보다도 훨씬 좋은 판매와 반응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게다가 출중한 록 기타리스트 강인오는 미국의 모 기타 전문 사이트에서도 그 유명한 기타리스트 조 새트리아니 등과 같은 차트에서 경쟁을 하는 등 국내 뮤지션과 밴드들도 드림온 레이블을 통해 소개되고 좋은 성과를 얻어내기에 이른다. 에어로스미스를 좋아했기 때문에 다른 것 생각할 것 없이 그들의 대표곡인 ‘Dream On’에서 이름을 따서 레이블을 차리게 된 박형주, 박병주 형제는 이제는 각기 레이블과 공연기획사 대표로서 협력 관계를 갖으며 사업을 분리하긴 했지만 우리의 록음악계에서 이들 형제의 존재와 열정은 각별한 편이었다.

    이제 드림온 레이블은 Park, Dream On, Boss Moon의 이름을 달아 각기 전문적인 장르와 영역의 음악을 발매하고 마케팅 하는 1인 체제의 인디 레이블이 되어 있다. 굳이 강요하거나 주문하지 않고 뮤지션과의 인간관계를 중시한다는 방침에서도 느낄 수 있듯 드림온은 이름 그대로 록 팬들과 뮤지션들의 꿈을 지속시키고 이루게 하며 그야말로 꿈을 키워주는 역할을 해오고 있다. 주택가 골목 안에 대문 밖으로는 아름드리 나무가 뻗어나와 있는, 드림온 박형주 대표의 멋진 양옥집을 찾았을 때에는 마침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어떻게 레이블을 시작하게 됐나?

    잇츠 할리데이

    “명동에서 수입 앨범을 취급하는 레코드점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가 딱 IMF 때였는데 1년쯤 하다 보니 재미도 없어졌다. 다시 뭘 할까 생각하는 중에 친구가 라이선스 음반처럼 앨범을 받아서 우리나라에 배급할 수 있는 능력이 될 것 같다고 해서 시작하게 됐는데 실제로는 1999년 1월쯤이었던 것 같다. 수입 앨범 판매 말고 레이블로 옮겨 가는 시점이었다.”

    -‘드림온’ 하면 형제가 운영하는 레이블로 기억된다. 초기의 구성원 소개와 어떤 변화를 겪으며 지금에 이르게 됐나.

    “초기에는 나와 친동생 그리고 A&R 담당하는 직원이 한 명 더 있었다. 그땐 다 알음알음 꾸려가던 시기여서 역시 잘 아는 친구한테 디자인을 맡겨서 했다. 그러다 식구가 한 두명 더 늘었다가 명동에서 서초동으로 이사해서도 그런 체제가 유지됐다. 2003~04년 쯤에 서초동으로 옮겼다가 2007년 5월에 다시 지금의 홍대 부근으로 옮겨왔다. 홍대에는 라이브클럽도 많으니까 제대로 일도 하며 공연도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못 보고 있다. 현재 레이블은 거의 내가 혼자 하는 1인 레이블 상태가 됐고, 동생은 완전히 공연기획 쪽으로 나서게 됐다. 이름도 다른 회사가 됐는데 M&P라는 기획사이다. 공식 첫 기획공연의 시작이 마이클 쉥커 밴드의 공연인데, 워낙 요즘이 불황기라 앞으로의 계획은 아직 모르겠다. 1인 레이블은 일단 편한 건 있는데 나 혼자 다 해야 되니 힘들긴 하다. 2007년 2월부터 그렇게 1인 체제가 됐다.”

    -레이블 이름이 기억하기도 쉽고 뭔가 희망도 품게 되는 친밀한 느낌이다.

    “이름을 지을 때 다른 생각은 별로 안 했다. 우리 형제가 워낙 에어로스미스를 좋아하다보니 대표곡인 ‘Dream On’이 바로 생각도 나고 해서 그렇게 짓게 됐다.”

    -록, 헤비메탈 전문 레이블 이미지가 강하다.

    “그 당시는 이상하리만큼 익스트림 메탈이 강세였다. 수입을 해도 그런 쪽이 구매력이 높았다. 처음 낸 앨범이 다크 트랜퀼리티나 인 플레임스가 된 것도 그런 바탕인데, 우리 형제 자체가 그런 장르 쪽을 특별히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때는 그런 게 잘 나가서 그랬다. 게다가 당시엔 유럽 레이블 쪽과 계약 일을 진행하는 게 쉽고 흔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데에도 좀 재미를 붙이기도 했다.”

    -전문가들도 드림온 레이블 내에 전문화로 레이블 이름이 분화되었다는 것은 잘 인지하지 못하는 편인데, 언제부터 어떤 형식으로 레이블이 나뉘어져 있는지 소개해 달라.

    내 귀에 도청장치

    “앨범 발매를 계속 하다보니까 어느 시점부터 차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음악 장르에 따라 구별을 해야겠다 싶어서 레이블 시작 후 1년여 정도 지난 2001년에 프리티 메이즈 앨범이 출시되면서 ‘Park’ 레이블이 만들어졌다. ‘Park’은 헤비메탈, 익스트림 메탈 전문이고 ‘Dream On’은 ‘Park’보다는 소프트한 정통 록, 모던 록 그리고 국내 뮤지션들을 위한 레퍼토리들을 갖기 위해서 성격을 분리했다. 하지만 우리의 메인 레이블은 ‘드림온’이다. 그리고 근래에 만들어진 ‘보스 문(Boss Moon)’도 있는데 이제 레이블 사업 10주년을 맞아 보다 다양한 것을 하고 싶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동안 고정관념이나 이미지 때문에 좋은 음악이나 앨범임에도 못 내는 등 손해를 좀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입장에서 ‘보스 문’을 만들어서 그쪽에서는 라운지, 인디 팝, 기타 팝 등 다양한 음악들을 만들어보려고 시작했다. 레이블 이름을 지으려고 별 생각을 다 하다가 내가 좋아하는 스페인 축구팀을 떠올리고는 ‘라울 곤잘레스’ 생각도 했었지만 결국 아는 선배이자 ‘(주)상상이상’이라는 디자인 회사 대표의 닉네임에서 착안해 로고나 이미지 등을 만들게 됐다.”

    -레이블 운영 10년을 겪고 지내오면서 요즘 가장 어려운 일이 뭔가.

    “2007년부터 혼자 하는 체제가 되면서 힘이 든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겠지만 일단 음반 판매량 감소가 타격이 크다. 게다가 우리는 주로 헤비메탈 위주로 발매하다보니 크게 주목받지도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디지털 시장에 대한 반감이랄까. 그런 것도 있었다. 지금은 완전히 시장 자체를 인지했는데 어떤 레이블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앨범을 냈을 때 판매량이 너무 줄었다. 2002년 월드컵 이후부터 완전한 하향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간 국내 공연시장과 각종 록 페스티벌에 관련 밴드들을 많이 참여시킨 편이다. 유명한 여러 해외 밴드들도 우리와의 일 관계 때문에 조건도 많이 양보하고 와 주었는데, 그동안 여러 록 페스티벌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요즘엔 많이 배제되어 있어 우리 레이블이나 밴드들도 이제는 등한시 되는 것 같다. 록, 헤비메탈 마니아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무대 자체도 많이 없어졌다는 게 안타깝기도 하다.”

    -장기 계획이나 목표는.

    “디지털 시장에 신경을 더 많이 쓰게 될 것 같다. 그리고 음반을 발매하지 못 하는 좋은 아티스트들을 발굴하기 위해서는 어차피 자본이 있어야 그런 쪽에 투자를 할 수 있는 것이다. 한쪽 파트에서는 보통 일반적인 사람들이 다 좋아할 수 있는 대중성 있는 음악을 많이 소개하면서 그것에 따르는 이익을 주목받지 못하는 음악 쪽에 투자하려고 한다. 요즘 제일 아쉬운 점이라면, 아무리 인터넷 시대가 됐다고는 하지만 록 전문지나 음악전문지 같은 활자 매체가 거의 사라졌다는 것이다. 인터넷은 단순한 노출 숫자나 나름의 장점도 있지만 구체적인 집중력과 충성도는 떨어진다는 생각이다.”


    퀸 엔터테인먼트

    원래 뮤지션이 되고 싶었던 꿈이 있었던 퀸 엔터테인먼트의 이문식 대표는 그야말로 다채로운 경력을 지닌 채 음악계에서 활동해온 인물이다. 우리나라에서 안정되게 전업 음악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름의 부업 정도는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간파하여 20살 어린 나이 때부터 클럽을 운영했다. 당시에 록 밴드로는 가장 대중적이고 유명하다고 생각했던 영국의 전설적인 밴드 퀸의 이름을 따서 이화여대 부근에서 현재까지 ‘퀸 엔터테인먼트’의 근거지가 된 ‘7시의 퀸’이라는 이름의 아주 작은 클럽을 시작했고, 이게 음악계에 발을 디디게 된 계기가 되었다.

    강인오

    그러다 대학교 학업과 군복무를 마치고 정식으로 집안 소유의 건물에서 비교적 수월하게 ‘퀸’이라 줄인 간판을 달아 바이자 클럽을 다시 열게 된 것은 1996년 그가 28살이 되던 해라고 한다. 그는 김경호 밴드의 백코러스를 했다는 특별한 경력도 있지만 트렌드 간파와 사업 수완이 출중해서 우리의 록 음악계와 라이브클럽가에서는 ‘비주얼 록’의 전문가 내지는 대부로도 불린다. 이제는 이대 후문에 자리하던 라이브클럽 ‘빵’도 홍대 쪽으로 자리를 옮긴 상황이라 신촌권에서 유일하게 유명 라이브클럽을 운영하는 업주가 되었다. 그간 그는 과감한 투자와 특유의 사업 기질을 바탕으로 사업을 다각적으로 확대해 왔다. 그의 사업 중 중심이었던 퀸 라이브클럽을 비롯하여 녹음스튜디오, 연습실 사업 등에도 손을 대왔고 국내 인디 레이블 중에서는 가장 확실하게 메이저 필드 방식의 대규모 매니지먼트 체계와 많은 자금을 투자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해서 독특한 비주얼적 요소와 외모, 스테이지 매너 등이 뛰어났던 내 귀에 도청장치, 라비디떼, 가이즈 등의 밴드는 마치 아이돌 그룹처럼 소녀 팬들이 따라 다니는 수준으로까지 만들어냈다. 현재 저비용 고효율의 방법으로 다양한 싱글들을 많이 제작하는 방향으로 레이블과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많은 밴드들을 소속시키고 관리하며 골드러쉬, 크로우, 이모티콘, 에어백 등 퀸 엔터테인먼트 스타일에 맞는 방식으로 밴드들의 싱글들을 위주로 제작하고 있다.

    아티스트 및 앨범 - 드림온

    블랙 신드롬(Black Syndrome)

    [9th Gate] (2001) 대한민국의 하드 록, 헤비메탈 씬을 지켜온 고참 밴드 중 하나인 블랙 신드롬의 중요한 재기작.



    껌엑스(Gum X) 1996년에 껌(Gum)이란 이름으로 시작된 3인조 멜로-코어 펑크 밴드.

    [What’s Been Up?] (2003)

    [Green Freakzilla?] (2004)



    13 스텝스(13 Steps)

    [This Is The Reality That We Confront] (2005)

    [The Curse Upon Liar] (2006)



    강인오

    전문 연주 앨범에 대한 인식이 모자란 국내에서 보다 해외에서 먼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기타리스트.

    [My World] (2005)

    [The Road] (2008)



    다운헬(Downhell) 국내 인디 레이블 중 하나인 도프뮤직을 처음으로 설립했던 마크가 결성한 강력한 헤비메탈 사운드를 추구하는 밴드.

    [At The End Of Death] (2006)



    다크 앰비션(Dark Ambition)

    [Tears Of Daewongoon] (2007)



    잇츠 할리데이(It’s Holiday)

    [U N Holiday] (2008)


    V.A. [Extreme 2006]



    - 퀸 엔터테인먼트

    가이즈(Guyz)

    [Get Away] (2003)

    [Crazy] (2005)

    [Sunny] (2006)

    [Diary] (2006)

    [You Mean Everything To Me] (2007)

    [Like A Movie] (2008)



    프리 마켓(Free Market)

    [난장] (2003)



    내 귀에 도청장치

    [Prana] (2004)



    라비디떼(L‘Avidite)

    [Contact] (2004)



    이현도

    [The New Classik ...And You Don’t Stop] (2004)



    골드러쉬(Goldrush)

    [Star★ing] (2007)

    [How Do You Feel] (2007)

    [I Don‘t Know You] (2008)



    크로우(Crow)

    [In Place] (2007)



    이모티콘(Emoticon)

    [Hit And Run] (2007)


    <글 | 성우진(음악평론가)·진행 | 박준흠(가슴네트워크 대표)>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901141500225&code=900315

    ㆍ록·메탈 마니아들의 ‘오아시스’드림온수입 음반 전문점에서부터 시작된 꿈이 지속되다형제는 용감했다. 록음악계, 인디 레이블에서 선한 미소를 바탕으로 열정적으로 사업을 추진해온 박형주와 박병주 형제...

  10. ㆍ우린 ‘펑크 열정’ 초심으로 돌아간다

    외부에 기대지 않고 자체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시스템을 구축


    스컹크뮤지션 숄티캣


    스컹크 레이블은 1998년에 라이브클럽 ‘하드코어’에서 활동하던 럭스가 중심이 되어서 설립된 ‘펑크 전문 레이블’이다. 이전에도 한국 펑크 1세대인 크라잉넛, 노브레인 등이 중심이 되어서 활동하던 ‘드럭’이 있었지만, 스컹크는 펑크 뮤지션들이 설립과 경영의 주체란 점에서 남다르다. 레이블 설립의 실질적인 주체였던 럭스의 리더 원종희는 당시 고등학교 3학년생이었고, 미성년자였던 관계로 어머니의 이름으로 레이블 사업자등록증을 냈다. 그러면서 바로 레이블 설립 작품을 만들었는데, 그게 럭스의 첫번째 참여 음반이기도 한 ‘우리는 한마음(‘98 펑크대잔치)’이었다. 이 음반은 당시 신촌에 위치해 있던 ‘Rux Studio’에서 가정용 녹음기로 녹음된 음반이었고 럭스 외에도 결.애.사, 레이지본, 송지욱, K.A.B. 등의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 가정용 녹음기로 녹음된 음반답게 가히 로우파이 사운드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이들이 뮤지션 신분이면서도 당시로는 드물게 스스로 레이블을 만들어서 운영하게 된 이유는 다소 황당하다. 94년에 라이브클럽 드럭이 열린 이후 한국에 본격적으로 인디 신이 탄생되었다. 그때 드럭, 재머스, 스팽글 등 라이브클럽이 생기면서 ‘뭔가’ 만들어지고 있던 시기에 뮤지션들 대부분은 “음반은 어떻게 내지? 공연은 어디서 해야 하지? 합주는 어디서 하지?” 하면서 서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시대적 상황에서 스컹크 레이블을 만든 주체들은 그냥 다른 쪽은 안 보고 내부만 보면서 커왔다고 한다.

    그 결과 레이블도 직접 만들었는데, 거기에는 거창한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니라 음반을 내주는 인디 레이블이 있다는 사실을 잘 몰랐다는 약간은 김 빠지는 이유라고 한다. 당시 이들은 “테이프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걸 어떻게 만들지”와 같은 지금 생각하면 순진할 정도의 고민을 했다고 한다.

    스컹크 대표 원종희 | 사진제공 최규성


    결국 외부에 기대지 않고 자체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시스템 구축의 어려운 방법론을 택했다. 그러다 보니 합주실, 공연장, 음악 상품을 판매할 수 있는 온라인숍이나 스컹크 레이블 홈페이지, 그리고 그에 따르는 구조적으로 음반을 발매하기 위한 사업자등록증에서부터 바코드 생성, 유통까지도 직접 했다. 그리고 지금은 이런 ‘시스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각자 다른 레이블로 들어가 음악을 하고 스컹크 레이블에서 놀던 시절은 그대로 남겨두자고 결정했다고 한다.

    현재 스컹크 레이블에는 럭스를 포함한 2팀만 남았고, 스컹크 레이블에서 운영하던 라이브클럽 ‘스컹크 헬’은 얼마 전 문을 닫았다. 스컹크 헬의 고별공연이 지난해 12월과 지난 3일에 있었다. 한국 펑크 신에서의 중요한 움직임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다. 스컹크 헬이 사라지기 전인 2008년 11월14일에 우리 시대의 중요한 음악창작자이기도 한 원종희 대표를 만나 ‘한국에서 펑크를 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스컹크 레이블에 변화가 있다고 들었다.

    “지난해 4월쯤에 밴드가 대부분 나가면서 현재는 소속 밴드가 ‘럭스’하고 ‘백화난만조’ 2팀만 남았다. 그리고 이달에 라이브클럽 ‘스컹크 헬’이 없어지고 이 자리에 촬영 스튜디오가 생길 것 같다. 레이블도 간단히 얘기해서 90년대 후반의 모습으로, 다시 껍데기를 다 벗어버리고 원점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상태다.”

    -90년대 후반의 모습으로 간다는 것은 소속 개념을 없애겠다는 것인가.

    “그렇다. 스컹크 레이블이 뮤지션들과 정식으로 계약을 하고 뭔가를 할 때는 음반을 발매할 때나 뭔가 한 가지를 정할 때였다. 하지만 ‘소속’ 개념으로는 특별한 계약을 하지 않았다. 달랑 A4 용지 한 장에다가 ‘이 밴드는 스컹크 프로뎍션에 소속된다. 하지만 나가고 싶을 땐 언제든지 나간다’ 그런 식이었다. 그런데 그건 좀 좋지 않은 것 같다 싶어서 소속 밴드들을 다 없앴다.”

    -소속 밴드가 있게 되면 밴드들과 일을 할 때 소속되지 않은 밴드들에 차별을 받는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는 문제 때문인가.

    “그렇다. 보통 인디 레이블들은 많으면 3~4명이 일한다. 그러니까 일하는 인원이 3~4명이면 또 월급을 줄 수 있을 만큼의 일을 뭔가 크게 벌여야 한다. 그런데 일이 없는 상황에서 소속 밴드가 5팀, 10팀이 되버리면 사실상 한두 명의 인원이 10팀의 밴드를 관리하면서 잘해준다는 게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나.

    “펑크 레이블을 키워나가다 보니까 펑크도 키우면 키울수록 이게 어떻든 하나의 ‘회사’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펑크랑 회사랑은 안맞는 것 같다. 즉 펑크적인 사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회사를 만드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됐다.”

    -‘기획’ 쪽의 일을 하다 보니까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여러 문제점이 발생해 생각이 달라지게 됐다는 건가.

    “우리가 예전에 ‘3000 Punk’ 음반을 만들었을 때, ‘왜 음반이 1만원이지? 3000원에도 팔 수 있잖아’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우리끼리는 나름대로 파격적이라고 생각하면서 만들어서 팔았다. 하지만 나중에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처음에는 유통마진이나 이런 것들이 없어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없으면 음반이 많이 안 팔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획이나 음반회사 시스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지난해까지는 ‘우리끼리 해보자’라면서 만들었지만 ‘아, 이거는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는 게 차라리 낫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최근이다. 어떻게 보면 바보 같이 뒤늦게 알게 된 거다. 체험하면서.”

    -스컹크 헬의 고별공연에 관해 얘기해 달라.

    “지난해 12월24일은 새로운 밴드들을 포함한 14팀 정도가 밤샘공연하고, 지난 3일엔 이 자리를 빛냈던 많은 밴드가 참여해서 공연했다. 스컹크 헬 이전에는 원래 드럭이라는 곳이 있었으니까 이 자리에 가장 애착이 있을 만한 밴드들이 선다. 사실 그걸 골라낸다는 것도 어렵지만 크라잉넛 형들도 ‘종희 너를 떠나서 너보다 우리가 그 자리에 더 애착을 느낀다’는 얘길 또 하니까.”

    -예전 드럭 팀들까지 다 나오고 스컹크 헬까지 왔던 큰 흐름이 마감이 되는 의미인가.

    “그렇게 되는 거 같다. 나도 무척 아쉽다.”

    -레이블은 어떻게 시작됐나.

    스컹크뮤지션 스파이키브랫츠

    “문화라는 게 발전을 해가는 과정에서 하나의 새로운 콘텐츠에 대한 카테고리가 생길 때는, 아티스트들이 직접 홍보랑 매니지먼트 포함해서 발로 뛰는 모양새를 피할 수가 없는 것 같다. 90년대 중반 한국에 펑크랑 같이 인디(문화)가 왔으니까. 그때 당시에 홍대에 드럭이 생기고 스팽글이 생기고 뭔가 만들어지고 있던 그 시기에, 사실상 누구나 다 ‘음반은 어떻게 내지? 공연은 어디서 해야 되지? 합주는 어디서 하지?’ 그런 의문을 갖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던 시기였다. 그 시대적 상황에 비해서 스컹크 레이블은 그냥 다른 쪽은 안 보고 내부만 보면서 커왔던 거 같다. 그때 분명히 인디 레이블이란 곳이 있었고, 거기서 여러 음반을 발매해줬는데 우린 그걸 모르고 있었으니까(웃음). 외부를 찾아다니기보다 우리가 만드는 것에 더 집중을 했던 거 같다. 그러다 보니까 사실상 생겨야 할 건 스컹크 레이블 안에서 한 번씩은 다 생겼다. 합주실, 공연장, 음악상품을 판매할 수 있는 온라인숍이나 스컹크 레이블 홈페이지, 그리고 그에 따르는 구조적으로 음반을 발매하기 위한 사업자등록증에서부터 바코드 생성까지. 유통도 직접했고.”

    -레이블 설립 이후의 진행은 어땠나.

    “음반사가 되기 위한 기본은 다 한 번씩은 찔러봤다. 매출과 생산원가를 맞춰야 하는 과제에 당면했을 때 한두 명이 일을 다해야 되더라. 그런데 그에 비해서 일은 점점 많아지고 커지고, 펑크 부흥기라 스컹크 레이블에 들어오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다 받아주고 싶은데 어떤 걸 기준으로 받아야 되는지도 모르겠고. 나는 럭스를 하고 있으니까 럭스랑 비슷한 생각을 하는 친구들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해서 그 친구들의 음반을 발매해줬다. 그런데 한두 명이 홍보, 프로모션을 잘하면서 밴드들 공연까지 챙기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에 음반을 발매해도 많이 판매하지 못했다. 외부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확 죽더라. 자체 시스템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우리 펑크들이 독불장군식으로 ‘너희들 없이도 잘할 수 있어’라고 호언장담하면서 2005년까지 넘어왔는데 실질적으로 그렇게 되진 않았다. 아무도 듣지 않는 그 음악을 만들기에는 열정이 계속해서 사그러들었던 게 펑크밴드들의 실정이었던 거 같다. 특히 2005년 무렵부터는 ‘펑크의 시대’가 아니었고 인디에서도 트렌드가 바뀌었다. 결국에 지금 이 시점에서 스컹크 레이블은 우리가 충분히 이 ‘시스템’을 봤고, 충분히 이 ‘시스템’을 이해를 했다는 결론이 내려지면서 그럼 우리도 더 이상 ‘시스템’을 두려워하지 말자라는 생각을 했다. 시스템에 우리가 몸을 담고 속해도 되겠다 생각하면서 스컹크의 이상적인 방식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계기가 됐던 거 같다. 그게 2007년쯤이다.”

    -“시스템을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는 게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가.

    스컹크뮤지션 칵크래셔

    “나도 럭스라는 밴드가 어느 레이블에 소속되는 게 참 싫기도 했고 두려움도 같이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과연 그들이 우리의 목소리를 제대로 받아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가 밴드도 이만큼 했고, 어떻게 굴러가는지도 다 알게 됐다. 그러니까 녹음비가 얼마 정도 되고, 음반이 팔리면 유통마진이 얼마고, 밴드한테 돌아가는 게 얼마 정도인지를 구체적으로 다 알고 있는 상황에서는 남들한테 맡겨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다.”

    -스컹크 레이블 내의 다른 밴드들도 비슷한 입장인가.

    “그렇다. 그런 것에 대해서는 스컹크의 입장을 제대로 설명해줬다. 우리가 좋다고 우리끼리 있지만 이건 우리끼리 해서는 일이 안 된다. 일은 다른 사람들이랑 하자. 너희 음악도 충분히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좋은 음악이니까 다른 데 가서 싸워라. 그러니까 다른 레이블에 소속돼서 거기 레이블 사장과 싸우면서 니들 음악을 해라. 우리끼리는 놀자. 스컹크 레이블은 남겨두자. 스컹크 레이블 만들어놓고 놀던 그 시절은 그대로 남기자고 판단한 거다.”

    -스컹크 레이블만큼 간섭을 안하는 레이블을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렇기는 하다. 하지만 그만큼 또 일을 하게 되니까, 멀리 봤을 때 그건 분명히 밴드한테 득이 될 수도 있다. 그냥 스컹크는 성장하지 말자는 것이다. 지금 소속 밴드가 두 팀이 있으니까 세 팀이 늘어도, 네 팀으로 늘어도 앞으로는 비즈니스를 하지 말자는 취지로.”


    스컹크 레이블 발매 음반

    껌(Gum)- Bogus Punk Circle! (1999)



    럭스(RUX)

    I Gotta Go (2000)

    우린 어디로 가는가 (2004)

    Another Conception (2004)

    2005 Live (2005)

    The Ruckus Army (2007)



    프로펠러 21(Propeller 21)

    We Are Moving On Forward (2004)



    버닝 헵번(Burning Hepburn)

    Burning Hepburn (2003)



    더티 스몰 타운(Dirty Small Town)

    All Together Now (2005)



    99 앵거(99 Anger)

    Who Comes First? (2002)

    The Anger And The Sadness (2004)



    카우치(Couch)

    Pogo Till We Fuckin Die!!! (2003)



    페이션츠(Patients)

    Hanging Revolution (2006)

    All The Patients Let‘s Go (2007)

    스파이키 브랫스(Spiky Brats)

    Proud And Strong (2004)



    석 스터프(Suck Stuff)

    City Rebels (2006)



    명령 27호

    Songs From The Six Gun (2007)



    칵 크래셔(Cockrasher)

    Kids Return Now (2007)



    V.A. [우리는 한마음(‘98 펑크대잔치)] (1998)

    럭스의 첫번째 참여음반이자 스컹크 레이블의 첫번째 음반인 이 음반은 당시 신촌에 위치해 있던 ‘Rux Studio’에서 가정용 녹음기로 녹음된 음반이다.



    V.A. [3000 Punk] (1999)

    스컹크 레이블의 두번째 컴필레이션인 이 음반은 ‘Skunk Studio’에서 삼청의 이보람의 DAT 녹음기로 녹음된 음반이다.



    V.A. [We Are The Punx In Kore] (2003)

    기존에 펑크대잔치에 참여했던 밴드들과 20여개의 새 밴드가 참여했으며 배다른형제 스튜디오 이동훈의 도움에 의해 완성되었다.



    V.A. [2006 Skunk Compilation - Strike! Strike! Strike!] (2006)

    더 이상 한 개의 음반으로 묶일 수 없을 정도로 커진 한국의 펑크 신에서 더욱 많은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스스로 내지르라”는 강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글·진행 | 박준흠(가슴네트워크 대표)>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901071509115&code=900315

    ㆍ우린 ‘펑크 열정’ 초심으로 돌아간다외부에 기대지 않고 자체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시스템을 구축 스컹크뮤지션 숄티캣스컹크 레이블은 1998년에 라이브클럽 ‘하드코어’에서 활동하던 럭스가 중...
413-720 경기도 파주시 아동동 283. 팜스프링 아파트 114-504, 발행편집인 : 박준흠
Copyright © 1999-2008 가슴네트워크, gaseum.co.kr/gaseum.com. All rights reserved. 문의 : gaseumnetwork@gaseum.co.kr